혜경의 집
재곤이 잠든 사이 아침밥을 준비한 혜경. 정성스레 요리한 잡채가 차려진 밥상 앞에 두 사람이 마주 앉는다
- 준길이 돈 줘서 보내 버리고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
- 진심이야?
- 그걸 믿냐?
<무뢰한>에서 가장 좋아하는 신을 꼽으라면 저는 이 잡채 신을 선택 하겠습니다. 이 장면에서 찰나에 열렸다 닫히는 혜경의 우주를 여러분도 보셨나요? 그 우주를 열어 준 사람도 재곤이고 닫아 버린 사람도 재곤이죠. 재곤이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라고 말한 직후 혜경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립니다. 조심스럽게 진심이냐고 묻는 혜경에게 재곤은 그걸 믿냐면서 얼버무리죠. 순간 혜경은 고개를 푹 떨구고 애꿎은 잡채를 입안에 욱여넣으며 실망감을 감춥니다. 온 우주가 열렸다가 닫히는 순간이 저 표정속에 드러났다고 생각했는데요
재곤이 혜경에게 괜한 기대를 주었다가 금새 거둬 버린 이유는 뭘까요? 저는 재곤이 진심을 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사랑한단 말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을 여러분도 느껴 보셨을 거예요. 재곤도 그런 마음에 무심코 진심을 툭 뱉어 버린 것 같았어요
결국 혜경은 재곤이 마련한 3천만 원을 들고 준길에게 갑니다. 이를 지켜보던 경찰이 준길과 혜경을 급습하죠. 차에서 내린 준길은 재곤이 쏜 총에 맞아 즉사하고, 혜경은 비로소 재곤이 경찰이라는 사실을 알아챕니다. 이후 혜경은 마약범의 수발을 들면서 살게 되는데요. 마약범 검거를 핑계로 재곤이 혜경을 다시 찾아가면서 두 사람은 재회합니다
내 이름은 정재곤입니다...... 잘 들어. 난 형사고 넌 범죄자 애인이야. 난 내 일을 한 거지, 널 배신한 게 아니야
재곤이 자신의 정체를 밝혔을 때 혜경이 느낀 배신감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성경 시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가 내 원수였다면 차라리 내가 견디기 쉬었을 것을.‘
적이라면 피하기라도 했으련만, 오히려 내가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였기에 배신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죠. 재곤이 자신의 본명을 밝힌 순간 혜경이 느꼈을 마음 아닐까요
제가 주목하는 문장은 ‘난 내 일을 한 거지, 널 배신한 게 아니야‘라는 뒷말이에요. 재곤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은 ‘너를 배신한 게 아니다‘,‘너를 아프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내 일을 해야만 했을 뿐이다‘ 가 아니었을까요? 그 행동만으로 나의 진심을 의심하진 말아 달라는 사랑 고백으로 들리기도 했어요
<무뢰한>은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에서 과연 진심이 어디까지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