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가 된다는 것은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다.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아무리 달려도 발이 떨어지지 않는 꿈처럼, 나는 내가 목격한 것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다. 침묵을 지키며 보지 않은 척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해도, 무엇인가를 본 이후는 그 이전과 같지 않다



대학 1학년 때 과 친구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어. ˝너는 네가 이 나라에 안 태어 났어도 데모를 했을 거라고 생각해?˝ 같이 가두시위를 나가자고 친구에게 권했더니,
그 친구가 짜증을 내며 내게 묻더구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어. 길거리 좌판에 마르크스 책을 늘어놓고 팔아도 아무 죄가 안되는 나라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나는 데모를 했을까.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땅의 중력에 끌어 당겨져, 내가 누구인가를 증명하며 살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너는 상황 논리를 살고 있는 것이니, 아니면 너의 진심을 살고 있는 것이니를 묻는 것 같았던 그 말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남아 있 었지만, 나는 내가 속한 중력에 충실하고자 했었어. 세상의 아흔아홉 사람이 슬퍼하는데, 나만 행복하거나 기쁠 수는 없다고, 나는 너무나 그렇게 선택받은 사람으로 살아왔다고 죄책감 없이 행복이나 충만 같은 단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 시간은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 p179



당신이 잘 지내는 것이 나의 안녕 조건이라는 문장에 마음이 내내 멈춘다


아.. 사진은 1992년 동아일보 파업 현장에서 선배 기자가 찍어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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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손석희는 서른여덟이 되는 해에 책을 한 권 썼다. 1993년 가을이었다

언론. 정의. 그리고 손석희에 끌렸던 30년 전의 나는 [풀종다리의 노래] 를 구입했고 버리기 좋아하는 나는 절판된 이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칭찬한다


방송 시작 삼분 전, 스튜디오의 내 자리에 앉아 주머니 속의 리본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뉴스 타이틀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광고 방송 몇 개가 나가고 나면 내 얼굴이 잡힐 것이다. 적어도 문화방송의 모든 사람들이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나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리본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내가 기억하는 한 최대의 수치스럽고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그 리본을 양복 깃에 달지 않고 옷 안쪽 와이셔츠 주머니 위에 달았던 것이다. 나는 뉴스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내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것은 참으로 괴로운 자기합리화의 싸움이었다. 화면 밖의 사람들은 모두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고 나는 붉어지는 내 얼굴을 느낄수록 더한 당혹감에 빠졌다. 뉴스시간 내내 양복 깃에 가려 반쯤 보일락 말락했던 리본은 그대로 썩어빠진 내 양심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다

그날 밤 나는 거의 한 잠도 이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그 때까지의 내 삶에 있어서 그날 밤만큼 괴로웠던 적은 없었을 것이었다

- p179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리본

서른을 넘긴 나이에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직장인. 그가 거기에서 번뇌를 멈췄다면 지금의 손석희 앵커는 없었을 것이다.
그는 다음 방송에서 리본을 바로 달고 나왔다
인간 손석희가 언론인 손석희로 거듭나는
순간 이었다


수의를 입고도 웃던 환한 모습. 4.16 세월호 침몰 사건때 팽목항을 지키던 모습. 단원고 아버지와 전화 연결하려는데 따님이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해하며 울음을 참는 모습. 앵커 브리핑 ‘L의 운동화‘를 읽던 모습. 동갑내기 노회찬을 추모하며 목이 메던 모습... 내 기억속의 손석희 앵커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방송’이 얼마만큼 이뤄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가 ‘좋은 방송’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 우리는 주류 언론 속에서 양심을 거스르지 않고, 대중의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성공까지 한 언론인을 얻었다. 손석희가 정말로 해낸 변화는, 우리 사회를 그런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바꿔 놨다는데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회가 더 많은 손석희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은 지금부터 우리의 몫일 것이다


손석희 앵커와 한 시대를 살았다는 것에 감사하고 그의 진실된 뉴스를 들으며 같이 슬퍼하고 분노하고 웃었던 시절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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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09-11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ㅠㅠ 이 글도 너무 좋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손석희씨 책 빌린 거 있는데 얼른 읽어야겠습니다!!!

너무나 멋진 언론인입니다. 세월호이야기는 감동적이네요.

나와같다면 2024-09-11 18:18   좋아요 1 | URL
세월호는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재처럼 기억됩니다

전 세계 저널리즘사에 기록될, 521일간 이어진 팽목항·목포항의 세월호 현장 보도는 손석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정부 탄핵의 트리거는 저는 세월호였다고 생각합니다

고양이라디오 2024-09-11 23:07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 정말 탄핵의 트리거였네요.
 

“그동안 가난했으나 행복한 가정이었는데,
널 보내니 가난만 남았구나.”

단원고의 한 학부모가 이런 말을 써서 팽목항에 내걸었다. 이 짧은 말의 밑바닥에 깔려 있을 절망감의 무한함까지 시간의 홍진 속에 가려지고 말 것이 두렵다

우리는 전란을 만난 것도 아니고 자연재해에 휩쓸린 것도 아니다. 싸워야 할 적도, 원망해야 할 존재도 오직 우리 안에 있다. 적은 호두 껍데기보다 더 단단해진 우리의 마음속에 있으며, 제 비겁함에 낯을 붉히고도 돌아서서 웃는 우리의 나쁜 기억력 속에 있다. 칼보다 말이 더 힘 센 것은 적이 내부에 있을 때 아닌가. 죽은 혼의 가슴에 스밀 말을, 짧으나마 석삼년이라도 견딜 말을 어디서 길어 올리고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당할 수 없는 부조리와 기묘함의 광경 앞에서, ‘기억함’으로써 이 사건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였다

‘잊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잊지 않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망각이라는 순리를 거슬러야 가능한 일이고, 헛될 수 있음에도 노력하는 일이다. 그것은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며,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연결하는 일이다



기억합니다 세월호 10주기
내 맘은 변함없다
기억은 힘이 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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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람이 힘을 합쳐 이기는 세상
우리나라에도 영웅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싸우고 어떤 상황에 놓일까

무빙에서 초능력은 축복보다는 재앙에 가깝게 묘사된다. 초능력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신분도 처지도 평범 혹은 그 이하다. 보통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에 특출한 능력은 위험요소다. 때문에 몇 몇 인물들은 소외의 대상이 되기를 자처한다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에서는 ‘지구 수호‘와 ‘우주 평화‘ 같은 거창한 대의가 히어로를 움직이는 동력이다. 그러나 무빙 속의 인물은 세상을 구한다는 대의보다 가족과 친구, 연인, 동료 같은 주변의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운다. 그가 말하고 싶은 진짜 영웅은, 판타지의 세계가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이다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무슨 영웅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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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4-09-11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능력, 그게 뭔데? 사람의 진짜 능력은 공감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 그게 가장 중요한 능력이야. 다른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무슨 영웅이야˝

멋진 글이네요. 이런 초능력을 가진 분들이 진짜 영웅입니다.

나와같다면 2024-09-11 16:20   좋아요 1 | URL
소통이 어려운 시대에 인간관계의 깊이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자산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두려운 일이지만 정의를 위해서 용기를 내어서 도전하는 사람이 영웅입니다
 

우울증이 깊어가던 어느 날 아내는 남편에게 질문을 했다고 한다. 당신은 왜 살아? 당신은 죽고 싶었던 적이 없냐고. 세상 다 산 사람처럼 말하는데 덜컥 겁이 나더군요. 멍한 아내의 눈을 보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대답을 잘해야 할 텐데...

최의종씨의 아내는 7년 전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의대 교과서부터 논문까지 관련 자료를 샅샅이 뒤지며 공부를 시작한다

무엇보다 우울증 환자에게 치명적인 주변인들의 무신경한 말과 행동을 차단하며 아내가 우울증 치료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도록 도왔다

그리고 그 터널을 함께 지났고 이제 아내는 7년간의 치료 저항성 우울증에서 벗어나 일상을 회복한다

곁에서 함께 지켜주는 사랑의 포기함 없는 사랑이 필요하다는 참 단순한 진리

만약 당신을 생각하며 이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 또한 행운아다. 그 사람은 당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한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당신 또한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존재가 되어줄 수 있다. [소중한 사람을 위해 우울증을 공부합니다] 라는 책에 관심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이미 그런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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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8-21 05: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이 있고, 나왔고, 이런 남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진다면,,,,저도 혹시?? ㅎㅎ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2024-08-21 19:17   좋아요 0 | URL
끝까지 네편에 있을거라는 배우자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저도 뭉클했어요.
젤소민아님 유트브에 ‘인생 녹음 중‘이라는 채널이 있는데 한 번 들어보세요. 따뜻해지실거예요. 저처럼.

smallfuneral 2024-08-28 1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지욕지기생. 사랑에 관한 한 더 이상의 정의가 없겠다 싶은 문장이라고 여겼었지요.

나와같다면 2024-08-28 19:47   좋아요 0 | URL
어느 순간 저도 제가 이제껏 본 사랑에 관한 말 중 압권은 愛之欲基生 이였다고 생각합니다

smallfuneral 2024-08-2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고 있었던 참었나봐요.

smallfuneral 2024-08-28 18: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봐서, 다시 음미해봅니다. 가브리엘 마르셀 역시 그랬지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의 뜻은 당신은 죽지 마세요. 라는 의미이다.‘

나와같다면 2024-08-28 19:55   좋아요 0 | URL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 역시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 인생의 역사 신형철

smallfuneral 2024-08-2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댓글 다는 곳이 서툴러, 아래칸으로 이동 하려 하면 등록 되네요. 좋은 리뷰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