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결에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우짜노, 노 대통령이 돌아가실 것 같다.˝
˝노태우 대통령요?˝
˝아니, 노무현!˝

몹시 당황하며 급히 TV를 켰다. 속보를 전하던 뉴스 화면이 잠시 멈추더니 기자들에 둘러싸인 문재인 이사장이 냉철한 표정으로 서거 소식을 알렸다. 한동안 넋이 나간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내와 나는 눈만 마주치면 훌쩍 거렸다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분향소라도 찾을 마음에 인터넷을 검색했다. 아내가 집에 분향소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탁상용 액자에 우리 부부의 사진을 빼고 노무현 대통령의 영정 사진을 넣었다. 커다란 거실 테이블에 사진, 향초, 향을 피운 작은 분향소가 만들어졌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우린 서로 마주 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떠나시는 날 아침, 아내는 정성스레 밥을 지어 올렸다. 그리고 우리는 노제에 갔다. 남기남도 내 마음과 같았다


지난 25년간 큰 웃음을 주었던
정훈이 작가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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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08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가님 별세 소식에 맘이 아픕니다 명복을 빕니다

나와같다면 2022-11-08 16:07   좋아요 1 | URL
씨네 21<정훈이 만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실거예요

시대를 역행하는 우울한 시대를 살면서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낄낄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너무 갑작스런 이별이 슬프네요

2022-11-08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08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우 2022-11-09 0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왜, 라고 했는데 갑자기가 아니군요. 아직 한창 나인데 너무 맘이 아프네요. 명복을 빕니다.

나와같다면 2022-11-09 10:28   좋아요 2 | URL
어느날 갑자기 동시대를 살아온 이의 부고를 들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가 참 두텁지 않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기타노 다케시는 말했다.
˝5천 명이 죽었다는 것을 ‘5천 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 이라고 한데 묶어서 말하는 것은 모독이다. 그게 아니라 ‘한 사람이 죽은 사건이 5천 건 일어났다‘가 맞다.˝

이 말과 비슷한 충격을 안긴 것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다음 말이었다.
˝한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주변, 나아가 그 주변으로 무한히 뻗어가는 분인(dividual)끼리의 연결을 파괴하는 짓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누구도 단 한 사람만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살인은 언제나 연쇄살인이기 때문이다

저 말들 덕분에 나는 비로소 ‘죽음을 세는 법‘을 알게 됐다. 죽음을 셀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애도의 출발이라는 것도

이태원 참사 희생자 156분을 애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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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서시>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는 아름다운 시가 많은데 내가 유독 <서시>에 끌린 것은 언제가부터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잦아진 탓이다. 그런데 이 시는 죽음에 대한 시가 맞기는 한가?
˝어느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운명을 만나 그가 내게 행한 일을 돌이켜 생각하게 되는 때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지 않을까. 그러니 죽음에 대한 시가 맞을 것이다. 아니,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 죽음윽 시라고 해야 하리라. 운명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니 말이다.

운명이 고전 비극에서처럼 대결과 투쟁의 대상으로 그려지거나, 간구하고 복종해야 할 초월자/절대자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
이 시의 빛나는 착상은 운명을 의인화한 데에, 게다가 수평적으로 평등한 대상으로 설정한 데에 있다. 이 운명이 내 앞에 나타나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 운명이다. 어떻게 이 운명의 멱살을 잡거나 그 앞에 무릎을 끓을 수 있겠는가. 화자는 운명과의 만남을 미리 상상해본다. 제 운명을 껴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를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쌍둥이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최초의 상봉을 앞두고 하는 생각들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날이 오면 화자는 말을 아끼겠노라고 말한다. 말없이도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떨어져 있었지만 늘 함께였던 나와 내 운명. 그 애증의 세월을 이제는 다 뛰어넘어서. 그저 운명의 얼굴을, 그 얼굴에 새겨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보겠다는 것. 그것이 곧 내 삶의 ˝그늘과 빛˝이기도 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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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가 여전히 위대한 것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그 끈질긴 깊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 질문은 ‘무죄한 인간의 고통‘에 관한 것이다

‘왜 죄없는 사람이 고통받는가? 그러므로 신은 없거나, 있어도 무능하다.‘ 예나 지금이나 이와 같은 의문과 울분 속에서 자주 무너져내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왜 죄 없는 학생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아야 하고, 왜 갓 태어난 아이들이 살균제를 들이마시며 죽어가야 하는가. 욥이 유사한 질문을 던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3천년 전이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 때문에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그 불행의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고통스럽다.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내 아이가 어처구니없는 확률(우연)의 결과로 죽었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숨막히는 허무를 감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이 모든 일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섭리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살아 있는 자를 겨우 숨쉬게 할 수 있다면?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직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는 이유도 모른 채 아이를 잃은 부모가 갑자기 독실한 신앙인이 된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 같다. 고통의 무의미를 견딜 수 없어 신을 발명한 이들을 누가 감히 ‘패배한‘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을것인가. 그들이 신을 발명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인간을 구원할 생각이 없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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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10-28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으며 든 생각은 ’무죄‘한 이들이 고통받는다는 모순을 없애기 위해서 ’원죄‘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나와같다면 2022-10-28 12:00   좋아요 1 | URL
신형철님은 신학자가 아니어서 신학적 정답을 알지 못하며 다만 침묵할 때의 욥의 마음을 겨우 짐작해볼 따름이라고 하셨네요..

그런데 또 기독교를 이해하려면 이 ‘원죄‘ 라는 개념을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1994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와 마주한 14살 ‘은희‘의 아주 -보편적이고 가장- 찬란한 기억의 이야기

김일성 사망과 성수대교 붕괴라는 커다란 두가지의 사건으로 이 시대를 기억하게 하면서 그 안에 펼쳐지는 한 소녀의 삶을 통해 사춘기의 성장통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다 보고도 누가 벌새를 가냘프다고 하겠는가, 허약하고 부실한 것은 알고 보니 이 세상이 아니던가. 1994년 성수대교를 보라. 감독에게 강력하게 요구한다. 서둘러 속편을 내놓으라. 은희가 감자전 꼭꼭 씹어 먹고 어떤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지 보고 싶다. 저 속절없이 끊어진 다리를, 날아서 건너는 갈매기가 보고 싶다.˝
- <아가씨> 박찬욱감독

은희와 동시대를 살아갔던 그때의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애도할 수 있는 작품을 비로소 만났다. 수많은 은희들에게 결코 잊힐수 없는 애도의 기억이 될 것이다
- <쇼코의 미소> 소설가 최은영

˝한강의 기적˝이라는 국가의 꿈. 서울 강남은 그 몽상의 끝점이었다. <벌새>는 이 몽상 안의 세계를 살아가는 은희가 사랑하고 상처 입던 순간들을 소환한다
-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변호사 김원영

이 영화의 역사성은 1994년 가족과 학교를 중심으로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통증과 폭력의 일상을 그려 낸 데 있다

사랑에 필요한 것은 영원한 약속이 아니라 영원하지 않을 관계를 끝낼 때,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일이다.
그래서 ˝사랑은 아무나 하나˝, 이 말은 언제나 명언이다
- <페미니즘의 도전> 여성학자 정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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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0-25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은희 역 배우가 드라마에 나오니 반갑더라고요~많이 자랐고요 ...

나와같다면 2022-10-25 18:18   좋아요 2 | URL
내가 눈여겨 본 배우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서 나오는 보는것도 큰 기쁨이예요
나만 아는 보석 같은

북프리쿠키 2022-10-25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참 좋았습니다.^^

나와같다면 2022-10-25 23:47   좋아요 2 | URL
내 안의 어린아이. 붕괴. 애도하다. 그렇게 성장하다.. 여러가지 질문을 던져준 영화였어요

나와같다면 2022-10-26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있을까?
아직 내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