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고와 굶주림에 시달리다 숨을 거둔
故 최고은 작가의 마지막 남긴 쪽지가 가끔 목에 걸린 것처럼 생각난다

˝사모님, 안녕하세요. 1층 방입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2월 중하순에는 밀린 돈들을 받을 수 있을것 같아서 전기세 꼭 정산해 드릴 수 있게 하겠습니다.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항상 도와주셔서 정말 면목 없고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우리에겐 서로가 서로를 구원해줄 전능한 힘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힘 정도는 가지고 있다

이웃을 향한 불신을 거두고 나 또한 최소한의 이웃이 되는 길을 모색합니다


시대의 비극으로부터 일어나 회복으로 이끄는 힘은 세련되고 거창한 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과격한 우격다짐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거창하고 과격한 것들에 휩쓸리지 않는 평정과 극단의 열기를 경계하는 온화함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위기 또한 같은 방법으로 이겨낼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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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 없이 누가 더 뻔뻔한가를 경쟁하고,
‘가해자‘의 마음이 평화로운 사회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 많냐.˝고 말하는 사회

자녀를 읽은 슬픔을 국가체제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사회

이런 시대에 약자가 지닐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정희진에게 무기는 바로 ‘글씨기‘다
그에게 글쓰기는 약자의 시선으로 타인과 사회를 탐구하고 새로운 세계를 모색하는 과정이다

내 안의 소수자성을 자원으로 삼아 ‘저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드러내는 것, 나보다 더 억울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과 연대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일이다

이것이 정희진이 말하는 시대에 맞서 ‘품위 있게‘ 싸우는 방법으로서 글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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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2-08-30 21: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희진 글쓰기는 인간 글쓰기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정말 탁월한 것 같습니다. ^^

나와같다면 2022-08-30 22:37   좋아요 3 | URL
단단한 가치관과 그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내는 필력.. 너무 부럽습니다

삶은 복기의 연속이다. 그래야 한다. 매 순간이 대국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복기는 트라우마. 집착. 후회를 가져온다. 지나간 일을 제대로 해석하는 건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mini74 2022-08-30 21: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는 무기다란 말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정희진님 글 읽으면서 많은 걸 새롭게 보게 됩니다 *^^*

나와같다면 2022-08-30 22:36   좋아요 3 | URL
˝글을 쓰는 이유에는 네 가지가 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의지, 정치적 목적, 나는 모두 아니다. 나는 승부욕이다.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고양이라디오 2022-09-19 1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과거 정희진씨의 책을 읽고 글도 참 좋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나와같다면 2022-09-19 15:30   좋아요 2 | URL
정희진님의 글에는 잔뜩 날이 서있어요. 그 서늘하고 예리한 날 서있음이 너무 좋아요
 

이제까지 나는 ‘우울증‘에 대해서 이렇게 현실적이며 명확하고 확실하게 표현 된 글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이며, 어차피 인간은 결국 죽는다. 아무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울증 환자들은 인간이 혼자라는 것, 죽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운명이라는 것을 냉철하게 직시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현실적이다

‘혼자 죽는‘ 고통을 미리 맛보고 있는 그들에게는 삶이 이미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죽음으로 이 절대고독을 끝장내고자 한다

어떻게 보자면 우울증 환자는 매를 먼저 맞기 원하는 학생처럼 죽음을 지나치게 두려워해 온종일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인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이 과도한 공포, 삶의 소소한 즐거움마저 파괴하는 이 두려움은 어떻게 극복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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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볼 때 특정 부분에 깊게 ‘꽂힌다.‘
그리고 이 이유와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그 ‘꽂힌‘ 부분을 통해 나 자신을 알 수 있고,
그 부분에 나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다고 믿는다.˝

또렷이 떠오르는 한 장면, 온몸을 들썩이며 울게 만든 대사. 빠져들 수 밖에 없는 배우의 얼굴, 내 인생의 영화와 나를 망치러 온 나의 드라마

우울과 중력 <그래비티> - 우울증이라는 병

배가 똑바로 나아가려면 바닥짐은 실어야 하듯, 우리에겐 늘 어느 정도의 근심이나 슬픔, 결핍이 펄요하다. - 아루투어 쇼펜하우어

<그래비티>는 ‘내 인생 치유 영화‘다.
내 오랜 지병이 해석되고 다스려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 볼 용기는 없다. 치유 과정의 고통을 두 번 겪고 싶지는 않다

<그래비티>에서 라이언 스톤(샌드라 블럭)은 아이를 잃은 여성이다. 사랑하는 딸이 죽었다.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삶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 애도의 시간은 지극히 정상이다

대개의 질병은 원인은 다양하지만 증상은 비슷하다. 그래서 증상을 통해 병명을 진단할 수 있다. 우울증은 그렇지 않다. 증상 자체가 다양하다. 극단적으로 반대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의사도, 환자도 진단이 어렵다. 불면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과다 수면으로 욕창이 생기는 사람도 있다. 폭식증이 있는가 하면, 음식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병을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초기에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 때문이다. 이 힘은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만유인력이라고 부른다. 그래비티 gravity, 중력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물체의 무게는 이 힘을 가르킨다. 만유인력과 지구 자전에 의한 원심력이 더해져 우리가 지표면에 의지해 살 수 있다

우울증 환자의 호소 ˝지구가 나를 붙잡지 않아요.˝ 지구의 의지. 중력의 법칙에서 버려진 이들이 우울증 환자다. 우울증의 고통에 비하면 ‘우울‘ 이라는 표현은 우아하다. 우울증 환자의 삶은 스펙터클하고 격렬하다. 격렬한 고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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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영우 신드롬‘
드라마의 거센 인기몰이뿐만 아니라 드라마로 촉발 된 자폐 스펙트럼 장애차별. 능력주의. 공정과 역차별 담론 등 사회적 쟁점의 첨예함을 포괄적으로 드러냈다

문지원 작가는 다음과 같은 ‘감사 인사‘를 수차례 반복했다

˝만약에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게 있다면, 그건 우리 드라마라기보다는 이 드라마를 계기로 쏟아져
나오는 여러 이야기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드라마 대본을 쓴 작가이자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이야기들을 겸허하게 경청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목소리를 보탠 모든 시민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우영우>는 사회적 약자를 재현할 때의 성실함과 윤리적 태도의 소중함을 알아봐주는 시청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보여줬다

2022년의 <우영우>가 이전 드라마들보다 딱 한 뼘만큼 성장해 큰 사랑을 받은 것처럼, 여기에서 또 한 뼘 나아간 드라마를 곧 다시 만나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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