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송광성 지음 / 나무이야기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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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이후 남북 분단 정부가 수립되고 그 분단 정부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사실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분단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고, 그 분단의 책임에 누가 가장 결정적으로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설사 알더라도 반공주의의 여파로 이를 쉬쉬하는 측면이 있다. 1980년대 한국에서는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정권에 맞서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다. 1980년 광주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신군부와 이를 지원한 미국에 대해 알게 된 수많은 청년 지식인들이 80년대 내내 대학가에서 반미시위를 전개했었다.

 

198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반미 성향의 학생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준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바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이다. 사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의 극우들의 믿음과는 달리 친북주의자도 아니고 사회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미국 대외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으로 분석한 학자였을 뿐이다. 글쓴이가 커밍스의 책을 처음으로 읽은 것은 군복무 말기인 2018년이었다. 그 당시 글쓴이는 대체복무로 소방서에서 근무했고, 2017년에 번역된 커밍스의 저작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을 읽었다. 그전에도 여러 한국 근현대사 서적들을 군복무 내내 탐독했지만, 커밍스의 저작은 너무나도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무엇보다 커밍스가 분석한 남한과 북한 지도부의 성격과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은 7년 전 글쓴이에게 소위 한국전쟁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시해 주었다.

 

보통 한국전쟁을 생각하면 1950625일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소련의 스탈린의 지령과 허가를 받고 기습 남침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커밍스는 이와 같은 내러티브에 전면적으로 도전했고, 그런 서사가 왜 무의미한지를 너무나도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반박했다. 글쓴이는 바로 이런 점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군복무 전후로 글쓴이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제국주의적 개입을 다룬 서적들을 여러 권 읽었다. 이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얼마나 많은 나라들에 개입하여 학살과 인권을 유린했는지를 알게 됐다. 여러 진보성향의 학자들의 분석을 종합해보면서, 글쓴이는 해방 이후 미군정에 대해서도 제국주의적인 지배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다.

 

가나의 국부로 평가받는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는 저서 <신식민주의제국주의의 마지막 단계(Neo-ColonialismThe Last Stage of Imperialism)에서 신식민주의의 본질은 거기에 종속되어 있는 국가가 이론상으로 독립적이며 국제상의 주권국으로서의 모든 외적 장식물들을 지니고 있지만, 실상은 그 경제 체제, 따라서 그 정치적인 정책은 외부의 지시를 받고 있다.”라며 냉전 시기 서구 제국주의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이와 같은 은크루마의 논리로 보자면, 미국의 한반도 강점은 분명히 이런 측면이 강력히 남아 있었다.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 세워진 미군정은 시작부터 점령군임을 표방했고, 과거 일제 친일 관료들을 그대로 등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결구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연결이 되었다는 것은 매우 비극적인 일이었다.

 

무엇보다 미군정의 문제점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 제국주의에 충성하던 친일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했다는 사실이다. 정말로 미군정은 일제 식민 경찰에 근무했던 조선인을 대부분 재임명했다. 미군정 정보 전문가 존 콜드웰은 미국은 일본 경찰 제도가 유지되도록 내버려두었다. 경찰 고위 간부는 대부분 일본이 훈련한 사람들이라서, 그들은 식민지 인민을 위한 정의와 인간적 대우에 대해 오직 일본식 방식과 일본식 생각만 알고 있다.”라고 했다. 실제로 자료를 확인해보면, 최소 80~85%의 미군정 치하 경찰들이 친일 경찰들이었다. 그 당시 대중들이 가장 증오하던 친일파가 바로 친일 경찰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해보자면, 미군정은 매우 반민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군정의 한반도 이남 정책은 냉전 시기 미국이 친미 반공독재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이 해방 이후 미군 점령기간 동안 무수히 일어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이런 역사적 진실들을 항상 외면하고 있다. 오히려 미군정의 정책들을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한 방법이었다며 미화하는 세력들이 너무나도 막강하게 살아있다. 이와 같은 극우 반공 사상을 가진 이들이 죽지않고 시퍼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지난 202412.3 계엄사태를 통해 다시 한번 증명됐다. 지난 2024년 윤석열 정권이 한국 사회를 망치고 있을 당시, 너무나도 좋은 책 한권이 출판됐다. 바로 송광성 선생의 저서 <미군 점령 4년사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글쓴이는 이 책을 읽으며 과거 커밍스의 책을 읽으며 느낀 지적 자극을 다시한번 느꼈고, 너무나도 감명깊게 읽었다.

 

글쓴이는 이 책의 존재를 올해 초에 알게 됐다. 부끄럽게도 이 책이 이미 1990년대 초에 출판된 책이라는 것을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다. 무엇보다 이 책이 1980년대 후반 해당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거기다 미국 UCLA 대학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글쓴이가 눈여겨 본 것은 해당 저작의 연구 방법론이다. 해당 연구는 해방 이후 미군정 하에서 벌어지는 민족모순과 더불어 계급모순도 함께 분석했다. 그런 점에서 본 저작은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도 함께 연결하면서 민족주의적 시각과 같이 본 셈이며, 그 당시 기존의 연구와는 차별성을 보인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접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해방 이후 미군정은 단순히 민족적 모순만 부각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미군정이 친일 및 반동적인 우익 인사들에게 생산 및 공장 경영을 맡겨 도시 노동자들과 어떻게 갈등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했고, 오히려 자주적인 노동자들이 미국이 내세운 인사들 보다 더 잘 공장 생산을 잘하고 관리했음을 입증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해당 저작의 내용을 보자.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의 몇 가지 예는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인이 소유한 서울 영등포에 있던 조선피혁 공장에서는 해방 전에 1,3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군수품을 생산했다. 19458월에 일본이 항복한 후, 그 공장 사무직 노동자 10명과 육체노동자 25명이 자주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인에게서 소유권을 양도받았다. 자주관리위우너회는 108일에 공장을 다시 움직여 물품 생산을 재개했다. 하루 8시간 노동과 주말 휴일, 건강보험, 소비조합 등 개선된 노동환경 아래에서 노동자는 낡은 기계를 수리해 신발 생산을 100%, 가죽 생산을 200% 증가시켰다. 그러나 1946410일 미군정은 노동자들이 선출한 위원회 위원장 박인덕을 해고하고 체포했다. 그리고 조균훈을 새로운 경영자로 임명했다. 조균훈은 노동자위원회를 폐지하고,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 경영으로 노동생산성을 67%나 하락시켰다. 노동자는 새로운 경영자에 맞서 파업을 일으켰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16.

 

이와 같은 계급적 의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본다. 왜나하면, 이와 같은 사실을 우리가 현대사를 보는 데 있어서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여러 부분에서 한반도 이남을 매우 가혹하고 잔혹하게 통치했다. 앞서 언급한 계급모순의 사례는 아래의 예시를 통해 다시한번 확인이 가능하다.

 

경성철도 노조의 행동은 철도 고용인 30%를 해고하고 월급제에서 일급제로 바꾸라는 91일자 군정법령 제55호에 대응한 것이다. 미군정 당국은 노조의 요구 조건을 무시했고, 운수국장 코넬슨은 "인도인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라도 먹을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은가"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62.

 

이와 같은 분석을 통해, 송광성 선생은 미군정을 실시한 미군이 남조선을 점령한 정복자였음을 분명히 한다. 미군정은 일본과 미국 정복자를 다함께 반대한 혁명적 조선 민족주의자를 잔혹하게 탄압했고, 일본인 공장을 자주적으로 관리하던 노동자를 몰아내고 친일 분자를 관리자로 삼았으며, 이런 미군정의 행동으로 노동자들의 강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가 대구 10.1 항쟁이었다.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일어나자 미군정은 매우 잔혹하게 진압했다. 서구의 많은 이들이 1989년 중국 공산당이 천안문 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했다고 규탄하지만, 정작 서구 세력이 더 무자비하게 봉기 진압에 나선 것에 대해선 외면한다. 대구 10.1 항쟁에서 최소 1,000명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미군정에게 있었다. 저자 송광성은 미군의 봉기 진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경찰은 미군이 깜짝 놀랄 정도의 잔인한 폭력으로 시위 군중에게 보복했다. 미군정 역사는 "혼란한 틈에 경찰의 극단적인 잔학 행위가 발생했다."고 시인했다. 미군 전술부대의 잔악 행위도 국립경찰의 잔혹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031일 전라남도 목포에서는 전술부대가 시위 군중 사이로 트럭을 몰고 지나가 많은 사람이 다쳤다. 미군정은 10월 민중항쟁이 공산주의 선동가 때문에 일어났다고 간단히 설명했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81.

 

이와 같은 미군정의 진압은 1948년 제주 4.3과 여순에서도 나타났다. 4.3이나 여순은 계급모순과 더불어 민족모순이 매우 부각 되었고, 여기서도 미군은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동반한 진압에 나섰다. 19489월부터 19495월까지 2개월 동안, 미군정은 유격대뿐만 아니라 유격대에 동조하는 제주 도민까지 폭력으로 진압했다. 미군정의 진압으로 500~2,000명의 유격대가 죽은 것에 비해, 민간인 사망자는 최소 3만에서 최대 7~8만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정이 유격대와 싸운 것이 아니고 제주 도민을 대량 학살했음을 의미했다. 여순에서도 그렇게 수천 명(최근 추산치는 1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미군정이 1948년 제주와 여순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학살한 데에는 자신들의 반공보루인 이승만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이승만 정권이 미국의 괴뢰였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하고 있다.

 

친미 집단을 양성하면서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분쇄하느라고 3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나서, 미국 군인들은 조선 민중의 강력한 저항에도 남조선에 이승만 정권이라는 반공보루를 구축했다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을 이어받았고 미군정의 정부 기구, 관리, 법률, 심지어 빚까지 떠맡았다. 이승만 정권은 형식상으로만 민주적이고 독립적이었으나, 사실상 독재정권이고 미국에 깊이 종속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독립된 한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미군사력은 한국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군사 문제에 간섭했다. 미군사력은 1948년 여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전라도 지방으로 확산했을 때,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막았다. 미군은 남한 전역에 걸친 광범한 '좌익소탕', 특히 한국 군대에서의 좌익 숙청을 끝마친 후에야 비로소 한국에서 철수했는 데, 그때도 미군사고문단을 잔류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는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됨으로써 한국이 미국에서 진정으로 독립되었다는 신화를 반박한다. 결국 미점령군과 조선 인민의 관계는 제국주의 국가와 그 식민지 국가 간의 관계에 지나지 않았다. 미점령군은 인공을 파괴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구조와 인맥을 지속시켰으며, 다시 대한민국으로 이월시킴으로써 미국에 깊숙이 종속하게 했다. 그리하여 남조선은 일본 속박에서는 벗어났지만, 미국 신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205~206.

 

또한, 한국의 극우들이 그리도 칭송하는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사실은 반민중적이었음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엔임시위원단은 전국 규모의 선거를 감시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유엔위원단은 남쪽만의 단독 선거 가능성을 토의했다. 조선에서 개진된 의견 중 이승만 진영과 한민당, 미군정 당국만이 남쪽의 단독 분리 선거를 지지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김구와 같은 보수주의 지도자를 포함한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남쪽 단독 선거를 반대하고 나섰다. 남쪽 내에서만도 상당수가 단독 분리 선거를 반대했다.”

 

송광성, 미군 점령 4년사 - 친일파는 어떻게 기득권이 되었나, 나무이야기, 2024, 345.

 

송광성 선생의 책은 미군 점령이 말 그대로 신식민주의적인 지배체제였다고 주장한다. 글쓴이 또한 이런 시각이 틀렸다고만 보지는 않는다. 분명히 미군정 체제는 태생부터 반민중성을 내재하고 있었고, 미군정의 친일 경찰 등용과 대구와 제주 그리고 여순에서의 민중항쟁 진압이 이를 입증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나온 논문인데도, 여전히 사회 분석 틀은 유용한 점이 많다. 이와 같은 분석을 바탕으로 한국과 남베트남 그리고 한국과 그리스 등의 여러사례를 비교 분석해보는 것도 의미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해당 저서는 1980년대 후반에 나온 저자의 학위 논문이기에 이후 한국 사학계와 사회학계가 축적한 연구를 반영하지 못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연구를 계승 발전한 총괄적인 연구서가 필요하다.

 

좀 있으면(202563)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다. 아마도 63일이 지나면 정권이 교체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란 세력들은 멀쩡히 살아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설립되고, 이승만 정권이 탄생하면서 우리는 친일 청산에 완벽히 실패했다. 그 여파는 현재까지도 윤석열과 같은 내란 세력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내란 세력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친일 세력이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아야 한다. 앞으로의 미래에는 우리 민중들이 저 윤석열 내란 세력을 청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역사부터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따라서 80년 전의 우리 현대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송광성 선생의 책은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글쓴이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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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내전 - 혁명 그 이후 1917-1921
앤터니 비버 지음, 이혜진 옮김 / 눌와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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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적백내전 관련 통사가 한국에 번역된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전투 위주의 서술도 분명 군사적 측면의 분석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친서구적인 시각이 많다. 뭐 첫 술에는 배가 부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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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1
전갑생 외 지음 / 뉴스타파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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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도서관에 들리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지난 토요일인 315일 집 근처 도서관에 들렸다. 사실 지난번에 읽다 만 책을 빌리려 했는데, 필자 눈에 너무나도 재미있는 책 한권이 발견됐다. 그 책은 바로 뉴스타파에서 출간한 책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 초토화 폭격>이었다. 이 책은 지난 2021년 뉴스타파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든 당신이 보지 못한 한국전쟁시리즈 중 첫 번째인 초토화 폭격을 책으로 집필한 것이다.

 

해당 도서는 2023727,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에 맞추어 출간됐다. 2022년에 탄생한 윤석열 정권은 202412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내란을 하기 전까지 북한에 대한 호전적인 적대감을 보여왔다. 내란수괴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윤석열 정권과 국민의힘이 북한을 자극하여 최소 국지전 수준의 전쟁 도발을 하려 했다는 내막이 점차 드러나고 있는 중이다. 평양에 무인기가 침투한 것도 사실상 주체가 한국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윤석열 비상계엄 선포 전후로 한국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에 북한군이 있다는 가짜뉴스들을 마구잡이로 살포했다. 우크라이나가 퍼뜨린 가짜뉴스들 중에는 너무나도 수준이 낮은 조작들이 판을 쳤고, 이런 거짓들을 필자는 속속이 파악하고 있는 중이다. 필자는 이 북한군 가짜뉴스가 만들어진 내막에는 윤석열 정권이 우크라이나에 파병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윤석열 정권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아 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보이는 것과 동시에 전쟁을 부르짖었다. 윤석열은 한반도를 전례없는 전쟁 분위기 속으로 몰아넣었고, 그 과정에서 남북관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됐다.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와 전쟁위기는 전적으로 윤석열 정권과 미국 바이든 정권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때도 없는 한미 군사훈련과 더불어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감 등은 윤석열 정권의 본질이었다. 심지어 윤석열 정권에 복무하는 이들은 친일 성향도 가져서. 일제의 식민 지배가 한국을 산업화 시켰다.”라는 망언들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기까지 했다.

 

, 윤석열 정권의 대미·대일 종속 외교와 친미·친일 사상의 근원에는 바로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있다. 윤석열 정권이 북한을 적대하고, 미국과 일본을 편중편애하는 것은 바로 반공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있기에 가능하다. 12.3 비상계엄도 바로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기초했다. 이는 윤석열 정권이 반국가 세력종북세력 척결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반공주의의 내재된 문제점을 보여줬다. 필자는 윤석열의 이런 지점들을 총괄하는 문제점이 바로 반북·반공주의라고 생각한다.

 

다소 서론이 길었다. 필자는 3년 동안 윤석열 정권을 지켜보면서 항상 들었던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윤석열은 과연 한국 역사를 공부해본 적이 있을까?”라는 의구심이다.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윤석열의 역사지식 수준이 과연 어느정도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그가 공개석상에서 보인 모습은 뉴라이트들의 수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고 본다. 윤석열은 뭐만하면 자유를 외치면서,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을 보였고 한국전쟁에서의 대한민국과 미국을 미화했다. 그의 발언에선 전쟁의 비극이나 참혹함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윤석열이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모른다고 믿고 있다. 윤석열의 반공주의적 생각과는 달리, 한국전쟁은 같은 냉전 시기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만큼이나 참혹하고 추악하며 잔혹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런 참극이 미국에 의해 벌어졌다.

 

잠시 얘기를 베트남 전쟁으로 돌려보자. 베트남 전쟁 당시 찍은 사진들 중에는 전쟁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무수히 많다. 그런 사진들 중에는 AP통신의 기자 닉 우트(Nick Ut)가 찍은 사진인 네이팜 소녀(Napalm Girl)’가 미국 및 서구사회에 잘 알려진 사진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들어,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무차별적으로 베트남에 투하했다.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민간인들이 매우 많았다. 사실 베트남 전쟁이 미국 내에 반전여론을 불러일으킨 것에는 미국 정부의 거짓선전(미국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거짓말.)도 있었지만, 네이팜 폭격과 같은 미군의 전쟁범죄 행위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는 제대로 된 통계가 없다. 다만 전쟁을 일으킨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에 따르면,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에 근거해서 보자면, 미국이 학살한 베트남인이 300만 명 이상이라고 보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베트남 전쟁 시기의 무차별 폭격과 민간인 학살은 이미 벌어진 역사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에서 이런 학살극이 벌어졌다. 수많은 한국인들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대한민국을 북한의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해준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보면 이야기는 전적으로 달라진다. 사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때보다 더 참혹한 수준으로 한반도를 폭격했다. 한반도 이남과 이북에는 베트남에 비해 산업시설이 더 많았고, 따라서 미군의 폭격으로 더 많은 산업 시설들이 파괴됐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인명이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한국전쟁 당시의 폭격에 대해, 한반도는 달의 표면으로 변했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사실이다. 말 그대로 미국은 한반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폭격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앞서 언급한 네이팜탄이 한반도 전역에 투하됐다. 미국 CIA 보고서에 따르면 미 공군은 한국전쟁 당시 총 32,357톤의 네이팜탄을 투하했다. 11갤런(416리터)짜리 대형 네이팜탄 기준으로 한국전쟁 31개월 동안 매일 69발가량을 투하한 셈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사용된 네이팜탄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실전에 사용되어 총 14,000톤이 투하됐다. 그러나 2배가 넘는 양의 네이팜탄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 투하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 방식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 말 그대로 한반도나 일본 비행장에서 B-29 폭격기가 발진하여 폭격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는 폭격기 호위용으로 전투기들이 투입됐다. 그 외에는 미군 항공모함에서 폭탄을 탑재한 전투기들이 발진하여 목표물을 폭격하고, 기총소사를 갈기는 방식이었다. 앞서 언급한 네이팜탄 32,357톤은 사실 미 해군과 해병 항공기가 투하한 투하량을 포함하지 않은 수치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추산해보자면, 32,357톤보다 더 많은 네이팜탄이 한반도에 투하되었다고 보면 된다.

 

박근혜 정부 시기에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정부의 선전과 동원으로 700만 명 이상의 관객 돌파했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개봉했던 시기 월미도 주민들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역사를 왜곡하지 말라!”는 피켓을 들고 항의시위를 벌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함포사격 및 폭격 장면에서 월미도를 마치 인민군 기지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군은 군사적 표적이 없는 민가를 무차별 폭격했다. 그 결과 최소 1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었고, 유족들은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채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미군의 악명높은 민간인 학살 사건인 노근리 학살 또한 학살의 시작은 피난민에 대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폭격이었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땅은 불과 70~75년 전 미군 폭격으로 불바다가 됐다. 서울만 하더라도 한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전까지 최소 4,2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폭격으로 희생됐고, 그 중 2,700명은 용산에서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는 폐허가 된 서울의 모습은 사실 미군 폭격의 결과물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모르면서 한국인들은 일상생활을 살아가고 있고, 한국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이 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나면서 더더욱 우리 기억 속에서 비극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전쟁 당시 미군의 북한 폭격은 말 그대로 지도에서 그 나라를 지워버리는 수준이었다. 미군이 상공에서 촬영한 북한의 도시들은 마치 달에 있는 크레이터들을 보는 느낌이다.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의 수도 평양에는 멀쩡한 건물이 2~3채 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북한은 미군 폭격으로 초토화됐다. 과거 대한민국 군대 및 교내에서 존재하던 가학적 체벌인 원산폭격도 사실 전쟁 당시 미군이 자행한 원산폭격을 빗대어 만들어진 체벌이었다. 미군은 원산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여 말 그대로 초토화했다. 원산의 도시 파괴율은 80%75%인 평양보다 더 높았다.

 

미군의 무차별 폭격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죽었는지는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최소 북한 인구의 20%가 미군 폭격으로 죽은 것은 사실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한국전쟁 당시 미 공군을 지휘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y) 사령관은 전쟁 3년 동안 우리는 그 나라 인구의 20%를 살해했다.”라고 증언했고,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명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라고 증언했다.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현재 북한이 가진 반미주의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의 가족과 이웃이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와 네이팜탄에 맞아가며 죽는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이 이후 미국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과 복수심을 느낀 것은 앞서 언급한 역사적 맥락에서 봐야할 것이다. 자신들 눈앞에 폭격으로 인한 지옥도가 펼쳐졌고, 북한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게 됐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남북한 모두 초토화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문제는 그 당시 미 공군의 전략전술을 보면, 민간인 피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그 당시 미군은 실험삼아 마을을 네이팜탄으로 초토화했고, 흰옷을 입은 민간인을 잠재적인 공산주의자라며 기총소사의 타깃으로 보았다. 말 그대로 한국인들은 미국에게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다고 봐도 절대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헝가리 출신의 종군기자인 매러이 티보르는 북한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조리 군사적 표적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던 농민들은 종종 기관총 세례를 받았는데, 그 조종사들은 표적에 발포하기를 즐겼다.”라고 말을 했다. 이는 그 당시 미군 전투기가 한반도에 사는 민간인을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이면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당 서적은 주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다루고 있다. 주로 사진자료들을 많이 첨부했다. 사실상 사진으로 보는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스타파는 해당 다큐멘터리 및 책을 쓰기 위해,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 가서 자료를 수집했다. 책에 나온 사진들 중에는 필자가 예전에 보았던 사진들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진들도 상당히 많았다. 책 마지막 장면에 1953727일자 항공기 사진에는 휴전협정 당일도 미군은 폭격을 멈추지 않았다. 1953727, 5공군 335전투요격비행대대 소속 파(PARR) 대위가 조종하는 세이버 제트전투기가 작전 중 촬영한 영상이다. 아래는 같이 출격한 B-26의 폭격 장면이다.(296.)”라고 나온다. 이렇게 보자면 북한은 개전초기부터 정전협정 효력이 발생하는 시점까지 총 31개월간 미군의 폭격을 경험했다. 미국이 북한을 얼마나 미친 듯이 폭격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한국전쟁에는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추악한 역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내란수괴인 윤석열은 이런 사실을 절대 얘기하지 않고 있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 절대다수가 이런 역사를 하나도 모른다. 비극의 서사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필자는 뉴스타파가 너무나도 소중하고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또 이걸 책으로 출판한 것에 대해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전쟁의 이면과 진실을 알리기 위해 보인 헌신과 노력도 대단히 높게 평가한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은 미국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희생한 전쟁, 자유를 수호한 전쟁으로 미화되어 왔다. , 뉴스타파는 그런 신화를 걷어차고, 폭력적이고 비극적이며 참혹한 한국전쟁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뉴스타파의 진실을 탐구하는 정신을 높게 평가한다. 사실 한국전쟁 폭격을 다룬 서적들을 여러 책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책은 주로 사진자료를 활발히 활용했고,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최신의 자료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사료가치가 높다. 또한, 사진자료가 책의 전반을 포함하고 있기에 너무나도 술술 읽힌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진실과 이면을 알고 싶어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강력히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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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 보림 창작 그림책
서진선 글.그림 / 보림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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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월 18일을 읽으며

올해 1월 한베평화재단에서 가는 평화기행에 참여하게 됐다. 이번 기행에서 나는 같은 운동조직에서 활동하는 동지와도 함께 갔다. 5박 6일간 갔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기행에서 상당히 친해진 선생님이 계셨다. 이 책의 주인공 서진선 선생이다. 사실 기행 첫째날부터 버스 뒷자리에 앉았는데, 그 분도 뒷자리에 앉았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눴고 너무나 다정해서 더 가까워졌던 것 같다. 여행 막바지에 한베평화재단 활동가인 짜노와 서진선 선생과의 대화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서 선생은 1980년 5.18 당시 고3으로 광주에 있었고, 비극의 현장을 직접 경험한 분이었던 거다. 그리고 작가로서 아이용 그림책을 썼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됐다. 얘기를 듣고나니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오늘 도서관에 들렸다가 이 책을 어린이도서관에서 펼쳤다. 책은 아이의 시각으로 5.18을 설명한다. 책에는 5.18 당시 저자가 겪은 경험도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아이가 기다리는 누나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무고한 죽음. 비록 아이에게 계엄군의 물리적 폭력이 행해지지는 않았지만, 억울하게 죽은 가족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광주시민의 아픔이 작품 속에서 느껴진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5.18 광주에서 광주시민들은 하나하나 지위를 가리지 않고, 저 계엄군에 맞서 저항했다. 중고등학생도 계엄군에 맞서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저항했다. 시민군을 위해 거리의 어머니들이 주먹밥을 만들고, 헌혈을 했다. 이는 영화 ‘택시운전사‘에도 잘 묘사됐다. 심지어 성노동자도 시민들과 시민군을 살리기 위해 헌혈을 하며 참여했다. 1871년 프랑스 파리코뮌에서 2개월간 일어났던 일이 1980년 광주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리영희 선생이 표현한 것과 같이 말이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력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계엄군은 M-16 소총을 조준한 다음 군인을 환영하러 나온 초등학생에게 까지 발포했다. 군인이 자국 민간인을 평시에 이렇게 학살했다.

나는 광주를 절대 잊을 수 없다. 5월이 되면 항상 광주에 내려가려 한다. 광주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을때, 유혈없이 계엄이 해체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광주의 추억 덕분이다.

광주라는 역사적 경험이 우리를 살렸다. 우리모두 광주에게 빚이 있다. 그래서 5.18 역사왜곡은 더더욱 용서할 수 없다. 지난 2024년 5월 광주에 내려갔다가, 광주에서 5.18을 북한군의 개입이라 선동하는 극우를 봤다.

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망언들이 그 사람 입밖으로 나왔다. 인간이 아니었다.

이제 5.18 광주민주화운동도 4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앞서 말한 바와 같이 5.18 광주는 44년 후 수많은 사람을 살렸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듣고 겪은 이야기를 그림 형태로 풀어낸 그림책이다. 그림과 사진이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임팩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앞으로도 이 책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에게 잘 읽혀 5.18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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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은 친일 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설립된 이래로 한반도 이남에선 역으로 친일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특히나 하지가 이끌던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가 친일경찰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친일파 청산을 향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이던 윌리엄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됐다.

 

194885일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었는데, 정부 수립 공포 다음날인 8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안이 상정되었고, 91일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이른바 반민법은 친일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가 살포됐다. , 여기서부터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반공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 속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족됐다. 위원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이, 특별재판부는 독립운동을 변호했던 김병로, 특별검찰부에는 권승렬이 임명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으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한 노덕술과 하판락 등도 체포됐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이와 같은 반민특위 활동에 분노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끼던 수도경찰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고문왕으로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항일운동,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그는 장택상의 눈에 띄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했으며,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노덕술은 본인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할 것 같자,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국회 내 반민법 관련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노덕술의 암살 리스트에는 극우인사인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이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백민태라는 인물이 검찰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간부들을 불러 항의했으며, 2월에는 반민특위 내의 특별경찰대(특경대) 폐지를 요구하는 강경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이승만이 펼친 논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 와해는 1949517일 노일환과 함께 소장파 리더 격이었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이 구속되면서 일어난 연쇄사건 속에서 발생했다. 이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 당국의 방조를 받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531일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세 의원 석방동의안에 가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은 88명의 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반민특위 그 자체였다. , 여기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한 이다.


 

이들은 63일 반민특위로 쳐들아가서,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민특위 측은 이들을 체포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잇단 시위의 배후에 친일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있음을 파악한 다음 최운하를 포함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66일 중부경찰서장이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고 직원들을 연행해 고문했다. 당시 이 습격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장경근 또한 일제시기 친일을 한 사람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다음 날인 67일 대통령 이승만은 한 발 더 나아가 AP통신 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자신이 특경대 해산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국회가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831일로 단축하면서 종결됐다. 특히나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안두희의 김구 암살을 겪으며 친일파 청산은 정말 물거품이 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검거활동을 시작했는데,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이었다. 이 중에 체포가 305, 미체포 193, 자수 61, 영장취소 30,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 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그 결과 남한에서 처벌한 친일파의 숫자는 말 그대로 0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기술, 학계 및 여러 분야에서 암약할 수 있었고, 부를 더 축적하여 재벌 및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최소 90% 이상이 일제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미국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과 그의 정권은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닌 남한 사람 거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에게 평판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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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4-03-1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이승만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응징한 전명운, 장인환을 변호하는 것을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