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의 아프팍 전쟁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5
조너선 닐 외 지음, 차승일 옮김 / 책갈피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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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전쟁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이 사실상 종결됐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20년간 치렀던 미국과의 전쟁은 그 이전 미국이 치렀던 베트남 전쟁보다도 긴 시간이었다. 그런 전쟁이 올해 2월 29일 도하합의를 성사시키며 미국의 패배로 끝난 것이다.

사실 아프가니스탄인들은 20세기 후반부터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왔다. 1979년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10년간 전개됐다. 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7~8년 동안의 내전 즉 종족분쟁과 세력분쟁이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휩쓸었다. 그런 내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가니스탄은 2001년 미국과의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었다.

2001년 9.11 테러로 인해 미국인 3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단 한번도 자국 영토가 공격받아본 적이 없던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도 테러리즘에 바탕을 둔 단 한번의 공격으로 진주만 기습 공격 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나왔으니 미국사회는 충격과 공포 그리고 이슬람에 대한 공포에 휩싸였다.

9.11 테러를 시작으로 미국이 일반적인 침공을 감행했던 나라가 있다. 하나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였고 다른 하나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아프가니스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에 속한다. 이들은 미국에게 침략 받던 시점에서 이미 20년동안 전쟁을 치른 상태였다. 즉 2001년 9월 미국이 침략해서 일으킨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를 공격한 것이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할때 내세운 명분은 크게 나눠 두가지다. 첫번째는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가 아프가니스탄에 있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여성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국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명분이었지,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진정한 목적은 아니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개입한 진정한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 사이의 패권경쟁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9.11 테러 이후부터 미국 네오콘의 상징인 도널드 럼즈펠트 국방장관과 부통령 딕 체니는 9.11의 희생양으로써 이라크를 침공하고 싶어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지리적으로 이란과 붙어있어 미국이 장악했을시 그들이 소위 ‘악의축‘이라 부르던 이란을 압박하는데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거 이라크에 들어가면 이란을 견제하는데 미국이 매우 유리해진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간 진짜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미국은 개전 초기 큰 저항을 받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 농촌에서 저항이 일어나긴 했지만, 초반에 들어간 미군이 한 것은 지역을 다스리며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4년부터 아프가니스탄에선 탈레반이 주도하는 게릴라전이 미군 점령 지역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여기에 미군이 대응하는 방식은 간단했다.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게릴라 소탕 방법 그대로였다.

그 결과 오히려 아프가니스탄인들이 미국을 더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 미군이 얘기하는 소위 부수적 피해는 민간인들이 많이 죽게되는 이유였다. 과거 베트남에서 그랬듯이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 병력 증강을 감행했고, 이것은 부시 행정부를 이어받은 오바마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오바마는 부시 행정부 보다 더 나갔다. 그들은 탈레반이 있을거라 예상되는 파기스탄까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했다. 2007년부터 시작된 드론 공격은 오바마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횟수가 더 늘어났다. 오바마 또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 책은 오바마 집권 초기인 2009년에 출간된 책이다. 책에서 언급하듯이 실제로 오바마는 2010년 아프가니스탄의 주둔 병력을 10만 명 이상까지 증강했다. 10만 명까지 증강하던 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사한 미군은 최소 500명을 넘겼었다. 2009년에 집필한 책이기에 그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얘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 점이 조금 아쉽다.

지난 12월 필자가 읽었던 ‘아프가니스탄 왜?‘라는 책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이 그것보다 더 났다. 왜냐하면 전자는 아프가니스탄 지원사업에 나섰던 인물이 쓴거라 미국에 대한 비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오바마의 아프팍 전쟁‘은 미제국주의에 대한 고찰이 있다.

미국이 침략해서 일으킨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보였던 미국의 실책과 과오 그 자체다. 미국은 애초에 가망이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 이게 바로 베트남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연결고리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왜 미국의 패배로 끝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고 싶은 이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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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의 힘을 빌리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1945815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조선은 해방이 되었다. 815일 해방이 되자 가장 먼저 발빨리 움직인 인물은 다름 아닌 몽양 여운형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고, 1930년대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지내며 일장기 말소사건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제의 그 어떤 회유와 억압에도 굴복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942년 도쿄에서 미군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여운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했고, 1944년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국내에서 준비했다.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진격을 개시하자 조선 총독부는 일본 천황이 항복하기 전 자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당시 국내에 독립운동 조직이 있던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8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족시켜 한반도의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다. 해방이 되자, 일제시대때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기고만장했던 친일파들은 목숨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거기다 몽양 여운형 또한 친일파를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기에 친일파들에게 있어 그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해서 한반도 이북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했다. 한반도 이북에 입성한 소련군은 건국준비위원회와 협력하여, 친일파 청산을 위한 작업들을 단계적으로 해나갔다. 한반도 이북에 소련군이 주둔하게 되자, 일제에 협력하여 부를 축적했던 친일파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대에 서야했다. 그들 중 생계형 친일의 경우 용서받거나 인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했지만, 악질 친일파들의 경우 처벌받았다.

(얄타회담, 강대국들은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이북에서 친일파들이 처벌받는 다는 소식은 한반도 이남에서도 전달됐다. 한반도 이북은 일본이 항복하기 이전부터 소련군이 진격을 개시하여 일본의 행정체계가 붕괴되었지만,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여운형의 건준이 치안과 행정을 유지해나갔지만, 조선 총독부는 아직 남아있는 상태였다. 해방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맥아더는 아베 총독에게 포고문을 보냈는데, 거기에는 총독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기 이전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빅3는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를 봤다. 그에 따라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이 이남에는 미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1945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했다. 미군이 상륙하기 2일 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자, 좌우를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이 처음에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제국주의를 무찔러 준 것에 대해환영했지만 이는 오래가지 않았다. 한반도 이북에 진주했던 소련군과는 달리 미군은 본인들 스스로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99일 서울에 입성하여 그들이 발표한 포고령을 보면 이것이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웠다. 친일파들이 살기 위해 해야할 일은 분명했다. 점령군으로써 한반도 이남을 다스리게 된 미군정에 협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에겐 어떠한 나라를 세워야 하는지에 대한 큰 비전이 존재하지는 않았다. 진보적 성향을 가진 중도좌파 여운형이나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정권을 잡게 된다면 그들은 친일파로서 단죄당할 것이 분명했다. 임시정부의 김구도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들은 미군정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다.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 해방 이후 가장 먼저 발빠르게 움직였던 세력은 바로 여운형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친일세력을 등용했다.)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다. 지난번 5부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승만은 귀국하기 전 주일미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와 한반도 이남에서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던 하지 사령관과 일본에서 만났다. 그는 그렇게 해서 맥아더가 지원해준 비행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 사령관과 함께 귀국하게 된 이승만은 그의 주선으로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이튿날 그는 기자회견과 귀국 방송을 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승만의 귀국 기자회견 내용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후 곧 나오려고 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못 나오고 지금까지 애만 써 왔다. 그러다가 얼마 전에 미주를 떠나 하와이, , 일본 동경 등을 거쳐 급기야 어제 저녁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하지 중장, 아놀드 소장과 얘기해 본 즉 의견이 합치되어 협조해 갈 수 있음을 믿었다. 여기에 나는 우리들의 합동이라는 것을 크게 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33년 동안이나 떠나 있었으므로 국내 형편은 잘 모르나 차차 알아가면서 여러분과 합동해 가겠다. 특히 여기서 내가 분명히 말해두고자 하는 것은 나는 평민의 자격으로 고국에 왔다는 것이다. 임시 정부의 대표도 아니오 외교부의 책임자로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끝까지 한국의 평민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 군정부와 아무런 연락이 있었던 것도 아니나 여기 온 길을 열어준 것은 이분들이다. 나는 앞으로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 일하겠거니와 싸움을 할 일이 있으면 싸우겠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년의 우리 역사가 어둠에 묻혀 있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미한 탓이었다. 그 중에서도 나와 같이 나이 많은 사람들의 잘못이 많았다.”

(미군정의 서울 입성, 이것은 또 다른 외세의 지배를 뜻했다.)

 

당연히 그의 회견과 방송에는 해방된 조국의 미래상이나 미군정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그는 동포들의 일심협력과 맥아더, 하지, 아놀드 장군의 고마움안 피력할 뿐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일단 독립운동 세력들은 그와 힘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해서 1025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이 결성됐고, 이승만은 독촉의 총재에 추대되었다. 이것은 한국민주당, 국민당, 조선공산당 등 각 정당 및 사회단체 200여 개가 모여 구성된 협의체였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는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여 힘을 모으고자 했지만, 11월 중순 조선공산당 측에서 친일파 청산을 내세웠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고, 결과적으로 독촉은 해체되었다.

 

1123일 김구를 포함한 임정 요인 1진이 귀국했다. 김구를 포함한 임정인물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는 하지가 동원한 환영식이 거창하게 열렸지만, 이들이 귀국할 때는 미군장교 1명과 통역 한명만 마중나올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김구와 같은 임정인사들에게 환영식을 해줄 수 있었지만, 김구에게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있었던 이승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 여론조사에서 이승만은 여운형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지도자로 칭송받기에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당시 조선 사람들에겐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인식됐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상웅은 자신의 저서 이승만 평전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이와 관련 이른바 단파방송청취사건으로 한국인 250여 명을 구속하면서, 역설적으로 이승만의 존재가 전쟁 말기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전파되고,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와 같은 명성은 해방 정국에서 그의 위상을 한껏 부풀리는 기능을 하였다. 여기에 젊은 날의 행적, 미국 유명 대학의 박사학위, 임시정부 대통령, 미국과의 관계 등이 복합되고 부풀려지면서 명성과 함께 신비성을 더하게 되었다.”

 

쉽게 말해 그의 행적이 이런 맥락속에서 조선 민중들에게 부풀려졌다는 것이다. 1945916일 전 동아일보 사장을 지낸 송진우를 포함한 우익인사들은 미군정의 지원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정당을 만들었다. 그게 바로 한국민주당 즉 한민당이다. 이 한민당은 지주와 친일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득권 정당으로 미군정의 구미에 맞는 집단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10월에 귀국한 이승만과도 호흡이 아주 잘 맞았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중심으로 뭉친 한민당은 이승만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이승만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힘을 자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독립총성중앙협의회가 해산되고 나서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노선을 표명했다. 그는 19451221<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란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한국은 지금 우리 형편으로 공산당을 원치 않는 것을 우리는 세계 각국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기왕에도 재삼 말했거니와 우리가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 극렬파의 파괴주의를 원치 않는 것입니다. () 이 분자들은 소련을 저희 조국이라 부른다니 과연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요구하는 바는 이 사람들이 한국을 떠나서 저희 조국으로 돌아가서 저희 나라를 충성스럽게 섬기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노선과 아집은 모스크바3상회의를 기점으로 더 심해졌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조선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합의를 보았다. 3상회의 당시 미국은 신탁통치를 필요하다면 5년 더 연장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던 반면에 소련은 신탁통치 기간을 5년으로 하되, 그보다 더 빨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국내에는 모스크바3상회의 내용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왜곡돼서 전달되었다. 그 바람에 미국은 반탁 소련은 찬탁이라는 왜곡된 논리가 성립이 되었다. 여기서 이승만은 당연히 반탁을 외쳤고 선동했다. 이승만이 반탁을 외침에 따라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 세력들 또한 반탁운동에 나섰고, 반탁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모스크바3상회의 오보, 모스크바3상회의의 내용은 동아일보에 의해 왜곡보도됐다. 미국은 신탁통치 연장 소련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진실은 반대로 보도됐다. 결국 이 왜곡된 보도는 왜곡된 반탁운동을 창조해냈다.)

 

(반탁운동을 주도하는 시위대, 반탁운동이 일어나자 친일파들과 이승만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후 모스크바3상회의에 대한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김구와 이승만은 반탁시위를 계속해 나갔다. 신탁통치 논쟁이 거치면서 한반도 이남에서의 좌우갈등은 극심해졌다. 이 과정에서 19463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지만, 어떠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어떠한 성과물 없이 끝나자 이승만은 19466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다. 이것이 바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었다. 정읍 발언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분단체제를 만들자는 이승만의 선언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승만을 지도자로 등극한 극우단체와 친일집단은 좌익에 대한 테러를 자행했다. 특히나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터지면서 좌익에 대한 탄압은 더 극심해졌다. 1946101일에는 대구에서 미군정에 맞선 항쟁이 일어났고, 결국 친일 경찰들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 이 발언은 이승만이 통일보단 분단과 외세의 결탁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하자, 이는 미군정에서도 문제 삼기 시작했다. 결국 미군정은 이승만을 제외하고 한반도 이남에서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좌우합작운동의 지도자 여운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한들에게 테러를 당하고, 이승만 세력들의 의도적인 방해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테러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리던 여운형은 자신의 딸을 보호하기 위해 두딸을 북조선으로 보냈는데, 이것은 우익세력들이 여운형을 악의적으로 공격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 세력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지도자 여운형은 1947719일 테러의 희생자가 되었다.

 

1947312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했다.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행운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좌우합작운동 시기 미국에 로비를 지속적으로 넣었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면서 아시의 반공 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22일 국무장관 마샬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단독정부수립론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194610월 이범석에 의해 조직된 조선민족청년단 즉 족청은 이승만의 방계 단체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좌익에 대한 폭력과 테러를 일삼았다. 이승만 주변으로 몰린 친일파들은 각종 정보와 거액의 정치자금을 이승만에게 제공했다. 이범석이 만든 족청과 같은 우익 청년단체들은 이승만을 위해 좌익에 대한 테러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미군정이 만들어낸 각종 경제적 실패로 인해 시위를 하던 민중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공장이나 철도 그 외의 파업 현장에 들어가 경찰과 함께 그들을 진압했다. 여기엔 김두한과 같은 조직폭력배 조직도 있었다. 그중에 가장 악질적인 집단은 해방 후 친일지주의 자식들이 월남하여 만든 서북청년회였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범죄행위를 경찰의 비호아래 저질렀다. 당연히 이들은 경찰과 친일파들의 지원을 받았다.

(여순항쟁 당시 사진, 여순항쟁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민중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던 항쟁이다. 그러나 이 항쟁은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당시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권력이 있었다. 일단 그는 맥아더와 하지 그리고 미국 인사들의 지원을 받았다. 이처럼 이승만에겐 자신을 지원하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있었다. 이승만은 단독정부 수립을 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이용하여 통일정부수립을 막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 또한 그들과 결탁하여 극우세력의 테러 행위을 방관하거나 옹호했다. 여운형의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성과없이 끝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맡겼다. 유엔에 맡겨진 이후 남과 북은 분단정부 수립의 길로 들어섰고, 1948815일 해방된 지 3년 만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분단정부 수립 과정은 참으로 잔혹하고 혹독했다. 소위 좌익 혹은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고 학살당했다. 좌익은 씨가 말렸고,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과 같은 곳으로 숨어서 외로운 투쟁을 한국전쟁 이후까지 해나갔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부터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과정에서 이승만은 분단의 씨앗을 제공한 점에서 반민중적인 지도자였다. 당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고 친일파 척결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란 지도자는 최악의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반민특위가 결성되어 친일파를 청산하기 위한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이승만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이승만의 악행은 정부수립과정에서도 그 이후에도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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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 역사의 전복자들
길(도서출판)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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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일 영국의 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가 9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살아온 인물이었고,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에릭 홉스봄(Eric Hobsbawn)이다. 젊은 시절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에릭 홉스봄은 생전에 여러 저서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인 4대 저서인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는 마르크스주의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한 성과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책들이다.

 

필자는 올해 초 SNS상에서 잘 알고 있는 한 동지로부터 에릭 홉스봄의 저서를 알게 됐다. 이에 따라 필자는 그가 집필한 극단의 시대를 전 페이지는 아니더라도 일부분 참고할 용도로 읽게 되었는데,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20세기의 역사를 조명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그가 인식한 냉전에 대한 관점이 많이 기억에 남는다.

 

그의 저서 극단의 시대는 분명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를 조명한 명저지만, 지난번 액기스로 읽은 그 책을 뒤로하고 필자는 이번에 그의 저서인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을 읽었다. 이 책이 더 끌렸던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의 책 표지가 끌렸기 때문이다. 그의 책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총 5부로 나뉘어있다. 공산당의 투쟁을 다룬 1부와 아나키즘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다룬 2,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운동에 미친 영향을 다룬 3, 군인과 게릴라를 다룬 4부 그리고 반란자와 혁명을 다룬 5부로 나뉘어 있다.

 

아나키즘에 대한 그의 성찰 및 날카로운 비판은 상당히 볼만 했다. 아나키즘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무대책성을 홉스봄은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와 동시에 홉스봄은 과거 아나키스트들이 혁명에 헌신하여 기존의 체제를 타파하고자 했던 역사적인 부분을 인정하기도 한다. 즉 홉스봄은 아나키즘의 양면을 아주 잘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각 당의 공산당의 역사적 사건과 활동들을 통해 유럽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사를 조명한다. 그는 기존에 소련의 스탈린주의에 머물러 있는 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그 자체를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물론 이 점에서 홉스봄은 필자와 좀 다른 견해를 가졌는지는 몰라도, 그가 끝까지 소련의 사회주의 체제를 믿었다는 점에서 그를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가 마지막 장인 5부에서 다루는 주제는 대체로 68혁명 시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엇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성에 대한 인식은 좀 구식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 나름 고찰해볼만한 분석을 하기도 한다. 그는 68혁명에서 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그의 분석은 생각보다 타당한 근거를 제시한다. 따라서 그는 혁명을 성공하기 위해 어떤 방법이 적합한지 그 대안이 뭔지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알려준다.

 

책의 제4부에서 다룬 군인과 게릴라 파트에서 그는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 게릴라 투쟁을 통해 게릴라전의 특성과 본질을 분석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베트콩은 민중과 함께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그는 이에 맞서는 미국은 그런 게릴라전의 본질을 쉽게 무시하고, 거기에는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그가 분석한 게릴라에 대한 내용도 상당히 감명 깊었다.

 

에릭 홉스봄의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1960년대(특히 68혁명을 전후로 해서)1970년대 그가 쓴 논문들을 모으거나 핵심을 간추린 책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분석이 상당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의 글들이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에는 그가 끝까지 영국 공산당에 남아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았던 행적도 한몫 했던 것 같다. 그의 책 혁명가 역사의 전복자들은 홉스봄 나름의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여러 가지 역사와 주제를 분석한 책이기에 읽어볼 가치가 있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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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이승만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평가절하했던 이승만은 19321110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건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배려로 19333월 국무의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국제연맹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탄핵당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다. 결국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온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당시 그는 몇 개월 뒤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는데, 쫓겨났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는 급변했다. 19319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3년엔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침략의 길을 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선 파시스트 히틀러가 민주적인 투표로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세계를 감돌게 됐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파시즘 진영과 민주진영으로 나뉘어 전투를 치르게 됐고, 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9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 이 책은 1941년 이승만이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에게 경전급으로 찬양받는 서적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 계속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393월 수도 워싱턴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거듭 요청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했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미국과 일본사이에 곳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됐다. 또한 그는 그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백범 김구는 약산 김원봉을 임정에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주의하면 치를 떨었던 극반공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혐오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인 1941년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한 것에 대해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서술은 어떤면에선 기회주의적 처사였다. 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한 것은 사실 크게 이상한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팽창으로 나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이것은 소위 미영프(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승만이 그 책을 쓰던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즉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었다.

 

1939년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던 이승만은 1941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자기자신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임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대미 외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점까지 절대로 혁명가나 철저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미활동을 전개하게 된 시점은 194112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부터였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승만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승만은 19433월말 하원의원 오브리엔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국무장관 헐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대국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 OSS의 책임자였던 도노반은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와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는 정한경, 이원순, 임병직 등이 그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 이승만이 집권했을 때 외무장관(임병직), 주일대표부 초대공사(정한경),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이원순) 등의 요직을 지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는 주구장창 외교활동을 견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지속중이던 와중에 소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지만, 한편으론 무장투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를 통해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카탈리나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엔젤레스 롱비치 인근에 있는 카탈리나 섬은 CIA의 전신인 OSS를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활용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이 추천한 일부 한인 대원들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년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필자는 고래투어 하는 배에 올랐다가 우연히 카탈리나 섬을 육안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시 이 사연을 선원에게 얘기해주니 흥미로워 했다.)


(서울 1945에서 재현된 OSS 훈련,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71부작짜리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가 전쟁 막바지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받는다.) 

 

 

이승만은 당시 OSS의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로부터 큰 호감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OSS가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여기에는 이후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도 관여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만나 미주에 있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한일 게릴라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넵코(NAPKO) 프로젝트가 수립되었고, 이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관여했다. OSS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권 초기 활동했던 장석윤, 장기영, 유일한 등이 있다. 그들은 1944~1945년 당시 켈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 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즉 이들이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1943년 일본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패배했고, 1944년에는 일본령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3월에는 이오지마가 함락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6월에 오키나와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1945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즉 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발언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강력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체류 중에 여러 차례 반소 반공의 입장을 밝히는 언론 기고를 하였는데 맥아더에게 보낸 것은 이후 자신의 한반도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 (한국-필자)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주리 호에서 공식적으로 치뤄진 일본의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이것이 맥아더로 하여금 이승만을 한국의 반소 친미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의 귀국을 전적으로 돕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끝이 났다. 이승만은 해방의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이제 해방된 한반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5104일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떠나 10일 뒤인 14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거기서 맥아더를 통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를 만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뿐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이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맥아더와 이승만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자 답게 이승만을 좋아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던 초기 때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추종하는 나라 미국의 입장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섬기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데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분열을 낳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을 위해선 친일적인 발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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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ISIS에 빠지는가?

넷플릭스(Netflix)에서 내 흥미를 아주 자극한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는 스웨덴에서 제작한 8부작짜리로 2014년과 2015년 당시 돈바스 전쟁 관련한 뉴스를 잠식시키고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된 ISIS를 주제로 했다. 바로 ‘칼리프의 나라(Kalifat)‘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연은 크게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시리아 리카에 위치한 ISIS에 합류했다 그들의 잔인성과 비도덕성에 기겁하여 탈출을 하려는 부부, 스워덴에서 살다 자신이 차별받는다 생각하여 ISIS에 심취한 10대 소녀들, 스웨덴에서 테러행위를 준비하는 ISIS 그리고 그걸 막으려는 스웨덴 경찰당국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연이라 할 수 있다.

스웨덴에서 만든 드라마이기에 2015년 스웨덴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나라 스웨덴의 이미지는 부유함, 복지국가, 아름다운 자연환경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부러움을 사는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ISIS에 가담하려는 애들이 있으니 어떤이들은 놀라움 내지는 충격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왜 ISIS가 되는 걸까? 드라마 보는 내내 이들이 ISIS가 되는 동기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생각해보게 됐던것 같다. 그들이 ISIS가 되는 이유에는 기본적으로 무슬림이라는 종교적 의식과 거기서 발생하는 ˝세계가 우리 종교를 차별한다는 의식˝이 존재한다. 그런 의식 속에는 전쟁과 파괴로 얼룩진 중동의 역사가 있고, 그 중동분쟁의 원인인 미국과 이스라엘이 있다.

1970년대 중동전쟁으로 빗어진 오일쇼크, 1991년 걸프전쟁과 2001년 9.11테러 그리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이라는 역사적 흐름에는 무슬림들이 그들을 싫어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또한 그런 일련의 사건에서 빚어진 전세계적인 이슬람 차별도 그들이 ISIS가 되는 이유였다. 실제로 2000년대 미국이 중동분쟁에 기름을 부으면서 이슬람에 대한 차별이 심해졌는데,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억압받고 차별받고 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동기부여로 작용했다.(실제로 ISIS들도 그런 주장을 하기도 하고)

2014년에 등장한 ISIS의 특징은 아마도 전 세겨적으로 자원자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는 점일 것이다. 심지어 이슬람 신자가 거의 없는 한국에서 ISIS에 가담하는 한국인도 나왔을 정도니 말이다. 즉 ISIS는 불행한 가족사가 있거나 종교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접근하여 자신들 편으로 끌어 들였다. 그렇게 끌어들아 사람들을 모아 소위 지하드라는 이름하에 자신들의 율법과 교리를 강요하고, 그들에게 폭탄테러와 같은 자폭행위를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라의 이름으로 합리화 된다.

드라마에는 종교가 한 개인에게 강요하는 잔인성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것이 다 알라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맹신적 믿음이 어떻게 악의적으로 이용되는지, 믿음을 가진 신자에게 그것이 어떻게 적용되는지가 드라마에서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드라마 칼리프의 나라는 ISIS가 일반사람을 현혹시키는 방법과 ISIS에서 탈출하려는 사람이 벌이는 과정을 아주 긴장감 있게 그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칼리프의 나라라는 제목과는 달리 ISIS 치하 일반사람들의 삶이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ISIS 치하의 삶을 아주 긴장감 있게 잘 소화했다는 점은 이 드라마의 장점일 것이다. 중동문제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이 드라마를 적극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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