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중국과 소련의 수정주의 논쟁 당시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에 대해 중국에서 낸 논평입니다.)

 

스탈린 문제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문제로서, 모든 나라의 모든 계급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켜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급이 다르고 정당과 분파가 다름에 따라 상이한 관점에서 크게 논쟁 중인 문제이다. 금세기에는 결코 어떤 최종적 평결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국제 노동계급과 혁명적 인민의 대다수 사이에는 실질적인 합의가 있는바, 그들은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에 반대하면서 그에 대한 기억을 더욱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이것은 소련에도 역시 해당된다. 소련공산당 지도자들과의 우리의 논쟁은 인민의 한 부분과의 논쟁이다. 우리는 혁명적 대의를 진전시키기 위해 그들을 설득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우리의 목적이다.

 

흐루쇼프 동지가 개인숭배와 싸운다는 구실로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했을 때,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그가 완전히 잘못이며 감추어진 동기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3614일자 편지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투쟁은 지도자들과 당, 계급, 대중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레닌의 일관된 가르침들을 어기는 것이며, 민주집중제라는 공산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은, 원칙에 기초를 둔 우리의 주장들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회피하고 있고, 단지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개인숭배의 옹호자들이자 스탈린의 잘못된 사상을 퍼뜨리는 사람들로 딱지를 붙이고 있을 뿐이다.

 

멘셰비키와 싸울 때, 레닌은 원칙의 문제에 대해 논적의 논증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고, 단지 그 때문에 비애(patho)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논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욕설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자신의 공개서한에서 보여준 태도는 정확히 멘셰비키의 그러한 태도를 닮았다. 그 공개서한은 논쟁 대신에 욕설을 하고 있지만, 우리로서는 원칙에 기초를 둔 논증들과 수많은 사실들로써 그것에 답변하고자 한다.

 

위대한 소련은 최초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국가였다. 처음에는, 이 국가의 당과 정부의 최고 지도자는 레닌이었다. 레닌 사후에는 스탈린이었다. 레닌 사후에, 스탈린은 소련의 당과 정부의 지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공인된 지도자로도 되었다. 10월 혁명에 의해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된 지 겨우 46년이 지났다. 이 기간 중 거의 30년 동안 스탈린은 이 국가의 최고 지도자였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역사에서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도, 스탈린의 활동들은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스탈린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그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단지 스탈린 자체를 평가하는 문제가 아니며, 더욱 중요하게는, 레닌 사후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어떻게 총괄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입장을 시종일관 견지해왔다.

 

흐루쇼프 동무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는 전체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관계가 있는 이 원칙적인 문제에 관하여 형제당들과 미리 상의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들에게 기정사실로서 강요하려 하였다. 누구든 소련공산당 지도부와 다르게 스탈린을 평가하는 사람은, 소련공산당의 내부 문제들에 간섭한다는 비난은 물론, “개인숭배를 옹호한다는 비난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역사적인 경험의 구제적 중요성이나, 스탈린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의 국제적 중요성이나, 스탈린이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는 역사적 사실의 국제적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누구도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전체 국제공산주의 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원칙의 문제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근거로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다른 형제당들이 스탈린을 현실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을 금지한단 말인가?

 

중국공산당은 역사유물론적 방법에 의해서 스탈린의 장점과 단점을 종합적이고 객관적·과학적으로 분석할 것과 역사를 실제로 전개된 그대로 설명할 것을 변함없이 주장해왔으며, 역사관념론적 방법에 의해서 스탈린을 주관적이고 조야하게, 완전히 부정하는 데에, 그리고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변조하는 데에 반대해왔다. 중국공산당은 시종일관 스탈린도 오류를 범했으며, 그 오류들은 사회·역사적인 뿌리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뿌리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비판할 필요가 있는 것은, 스탈린이 실제로 범한 오류들이지, 근거 없이 그의 탓으로 돌려지는 오류들이 아니며, 그 비판은 올바른 입장에서 올바른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릇된 입장과 그릇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부당한 스탈린 비판을 시종일관 반대해왔다.

 

레닌 생존 시 스탈린은 차리즘과 싸웠고 맑스주의를 전파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이 된 후에는 그는 1917년 혁명의 길을 닦기 위한 투쟁에 참가했으며, 10월 혁명 후에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하기 위해 싸웠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소련공산당과 소비에트 인민을 이끌고, 내부 및 외부의 적들과 단호히 투쟁했으며,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수호하고 공고히 했다. 스탈린은, 소련공산당과 소비에트 인민을 이끌고, 사회주의적 공업화와 농업집단화 노선을 떠받쳤으며, 사회주의적 변화와 사회주의의 건설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스탈린은, 소련공산당과 소비에트 인민, 소비에트 군대를 이끌고, 불요불굴의 격렬한 싸움을 하여 반 파시스트 전쟁을 위대한 승리로 이끌었다.

 

스탈린은 다양한 종류의 기회주의에 맞서서, 레닌주의의 적들인 트로츠키파들, 지노비에프파들, 부하린파들과 다른 부르주아의 앞잡이들에 맞서서 맑스-레닌주의를 방어하고 발전시켰다. 스탈린은 불멸의 맑스-레닌주의 저작들인 많은 이론적인 저작들을 집필하면서,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지울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스탈린은 전체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견지하면서, 중국인민들을 포함한 세계 모든 인민들의 혁명적인 투쟁을 크게 돕는 외교정책을 추구하면서, 소비에트 당과 정부를 지도하였다. 스탈린은 그 투쟁을 지도하면서, 역사의 흐름에서 전면에 서 있었고, 제국주의자들과 모든 반동세력들의 타협할 수 없는 적이었다. 스탈린의 활동은 위대한 소련공산당과 위대한 소련 인민들의 투쟁들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전 세계 인민들의 혁명적인 투쟁과 분리될 수가 없다.

 

스탈린의 삶은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의 삶이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삶이었다. 소비에트 인민들과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위해 가치 있는 일들을 수행했지만,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이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인 스탈린은 또한 약간의 실수들도 하였다. 몇 가지는 원칙에서의 오류였고, 몇 가지는 실천적인 사업과정에서 일어난 오류였다. 몇 가지는 회피할 수 있었고, 몇 가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의거할 선례가 없었던 때이기 때문에 거의 회피할 수가 없었다. 그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스탈린은 어떤 문제들에 관하여 변증법적 유물론을 벗어나서 형이상학과 주관주의에 빠져들었고, 결과적으로 그는 때때로 현실과 대중들로부터 분리되었다. 당 외부뿐만 아니라 당 내부의 투쟁에서, 몇 가지 경우들과 몇 가지 문제들에 관해서, 성질에서 상이한 두 가지 유형의 모순들, 우리 자신과 적들 간의 모순과 인민들 사이에서 모순을 혼동했고, 그리고 그것들을 다루는데 필요한 상이한 방법들을 또한 혼돈하였다. 반혁명을 진압하는 스탈린에 의해 지도된 사업에서, 처벌당해야 마땅한 많은 반혁명 분자들이 정당하게 처벌되었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릇되게 유죄로 판결된 무고한 인민들이 있었다. 그리고 1937년과 1938년에 억압하는 반혁명 분자들의 범위를 확대하는 오류가 발생하였다. 당과 정부 조직의 문제에서, 그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집중제를 충분히 적용하지 않았고, 어느 정도는 그것을 침해하였다. 형제적인 당들과 나라들과의 관계들을 다루면서, 그는 약간의 실수들을 저질렀다. 그는 또한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대해 몇 가지 잘못된 조언을 하였다. 이 실수들은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운동에 약간의 손실을 야기했다.

 

스탈린의 공적과 실수들은 역사적이고 객관적 현실의 문제이다. 두 가지를 비교해 보면 그의 공적들이 그의 과실을 압도한다. 그는 일차적으로 올바랐고, 그의 과실들은 이차적이다. 총체로서 스탈린의 사상과 그의 업적을 요약했을 때, 역사를 존중하는 모든 정직한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에게 있어서 일차적이었던 것을 먼저 분명히 관찰할 것이다. 그러므로 스탈린의 오류들이 정확하게 평가되고, 비판되고 그리고 극복되기 위해서는, 스탈린의 생애에서 일차적이었던 것을 수호하는 것, 그가 방어했고 발전시켰던 맑스-레닌주의를 수호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지 이차적이었던 스탈린의 오류들이, 소련과 다른 나라들의 공산주의자들이 경계를 하고 그런 실수들을 반복하는 것을 피하고 혹은 실수를 범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역사적 교훈으로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유익할 것이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역사의 교휸들 모두가, 그것들이 올바르게 끌어내어지고 역사적 사실들과 부합하고 왜곡되지 않는다면, 모든 공산주의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레닌은, 맑스주의자들이 베벨과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자들과 전적으로 상이했다는 것을 여러 번 지적했는데, 그 두 사람은 그들의 모든 실수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들이었다. 맑스주의자들은 이 사람들의 실수들을 감추지 않았고, 그러한 사례들을 통하여 어떻게 그것들을 회피하고 혁명적 맔스주의의 보다 준엄한 요구들에 맞추어 살 것인가를 배웠다. 이에 비해, 수정주의자들은 베벨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실수들에 대해 의기양양해 했고그리고 낄낄낄 웃어댔다.” 레닌은 이것을 빗대어 러시아 우화를 인용하였다. “때때로 독수리는 암탉보다도 더 낮게 날 수도 있다. 그러한 암탉은 결코 독수리보다 더 높이 날 수가 없다.” 베벨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위대한 공산주의자들이었고, 그들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독수리로 남았지만, 수정주의자들은 노동계급운동의 뒷마당에 있는, 똥 무더기 사이에 있는” “암탉들이었다. 베벨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역사적인 역할은 결코 스탈린의 그것과 비교될 수가 없다. 스탈린은 전 역사 시대에 걸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였고, 그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주의가 필요하다.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중국 공산당을 스탈린을 옹호한다는 죄목으로 고발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스탈린을 강력히 옹호한다. 흐루쇼프가 역사를 왜곡하고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할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전면에 나서서 그를 옹호할 회피할 수 없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스탈린을 옹호함에 있어, 중국 공산당은 그의 올바른 측면을 옹호하고, 10월 혁명에 의해 창조되었던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영광스런 투쟁의 역사를 옹호한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공산당의 영광스런 투쟁의 역사를 옹호한다. 중국 공산당은 전 세계에 걸친 근로인민들 사이에서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명성을 옹호한다. 간단히 말해서, 중국 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의 이론과 실천을 옹호한다. 이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중국 공산주의자뿐만이 아니다.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맑스-레닌주의에 헌신했고 모든 견실한 혁명가들과 모든 공정한 마음을 가진 인민들은 똑같은 일을 해오고 있다.

 

스탈린을 옹호하면서, 우리는 그의 실수들을 옹호하지는 않는다. 오래전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스탈린의 실수들 몇 가지를 직접 경험하였다. 이러저러한 때에 중국 공산당에서 나타났던 그릇된 좌익과 우익 기회주의 노선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그것들의 국제적인 우너천에 관한 한, 스탈린의 일정한 실수들의 영향하에서 발생했다.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그리고 1940년대 초·중반에 마오쩌둥 동지와 류샤오치 동지로 대표되는 중국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스탈린의 실수들의 영향에 대해 저항했다. 그들은 점차적으로 그릇된 좌익과 우익 기회주의 노선을 극복하였고 마침내 중국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제기된 잘못된 생각들의 일부가, 몇몇 중국 동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적용되었기 때문에, 우리 중국인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하여 좌익과 우익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우리 당은 단지 잘못을 저지른 우리의 동지만을 비판하였고 스탈린에 대해서는 결코 비난하지 않았다. 우리의 비판의 목적은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을 구분하고, 적절한 교훈을 배우고, 혁명의 대의를 전진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오류를 범한 동지들에게 단지 그들이 자신들의 실수들을 교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실수들을 교정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은밀하고 파괴적인 활동들을 위한 비밀그룹들을 조직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실천적인 경험에 의해 서서히 깨닫기를 기다렸다. 우리는 당 내부의 비판과 자기비판을 적절하게 하는 방법을 채택했다. 우리는 통일을 위한 바람으로부터 출발하였고, 비판과 투쟁을 통하여 새로운 기초 위에서 새로운 통일에 도달하였고, 이리하여 좋은 결과들이 성취되었다. 우리는 이것들이 적들과 우리들 간의 모순이 아니라 인민들 사이의 모순이며, 따라서 우리는 위의 방법을 사용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흐루쇼프 동지와 소련공산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 이후로 스탈린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왔는가? 그들은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 종합적으로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을 하지 않았고,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사이의 어떤 구분도 없이 그를 완전히 부정했다. 그들은 스탈린을 동지로서가 아니라 적으로서 다루었다. 그들은 경험을 정리하여 비판과 자기비판하는 방법을 채택하지 않았고, 모든 오류들을 스탈린 탓으로 비난하거나, 자신들이 멋대로 날조한 실수들을 스탈린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사실들과 사리에 맞는 일들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인민들의 마음에 독을 주입하기 위해, 스탈린에 대한 악선동과 인신공격을 하였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살인자”, “범죄자”, “강도”, “도박꾼”, “무시무시한 이반과 같은 유형의 폭군”,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의 독재자”, “바보”, “멍청이등등으로 욕설을 하였다. 우리가 이 모든 더럽고, 상스럽고, 악의적인 언어를 어쩔 수 없이 인용할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의 펜과 종이를 더럽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의 독재자라고 욕설을 하였다. 이것은 소비에트 인민이, 30년의 긴 세월 동안 사회주의 체제하에서가 아니라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의 독재자폭정하에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위대한 소비에트 인민과 전 세계의 인민은 이 중상모략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무시무시한 이반과 같은 휴형의 폭군이라고 욕설을 하였다. 이것은 전 세계 인민들에게 30년 동안 제공되었던 위대한 소련공산ㄷ앙과 위대한 소비에트 인민의 경험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경험이 아니라, 봉건적인 폭군의 지배하에서의 삶의 경험이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위대한 소비에트 인민,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전 세계의 맑스-레눈주의자들은 이 중상모략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바보라고 욕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지난 수십 년 동안 영웅적인 혁명 투쟁을 수행했던 소련공산당이 바보를 지도자로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전 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은 이 중상모략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멍청이라고 욕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반파쇼 전쟁에서 승리하였던 위대한 소비에트 군대가 멍청이를 최고 사령관으로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영광스런 소비에트 사령관들과 전사들 그리고 세계의 모든 반파쇼 전사들은 이 중상모략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살인자라고 욕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국제 공산주의운동이 살인자를 수십 년 동안 선생으로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은 이 중상모략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도박꾼이라고 욕을 하였다. 이것은 바로 혁명적 인민들이 도박꾼을 제국주의와 반동에 맞선 투쟁에서 자신들의 기수(standard bearer)로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소비에트 인민을 전 세계의 혁명적 인민은 이 중상모략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흐루쇼프의 스탈린에 대한 그러한 욕지거리는 위대한 소비에트 인민에 대한 총체적 모욕이고, 소련공산당에 대한 총체적 모욕이고, 소련 군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체제, 국제 공산주의운동, 전 세계 혁명적 인민들과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모욕이다. 흐루쇼프가 자신의 가슴을 치고 탁자를 두드리고, 목소리를 최대로 높여서 스탈린을 비방할 때, 스탈린의 시대 동안 당과 국가의 지도부에 참여했단 흐루쇼프는 자신은 과연 어떤 처지에 있는가? “살인자혹은 강도와 공범자의 처지인가? 아니면 바보혹은 멍청이로서 똑같은 처지인가?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그렇게 비방하는 것과, 제국주의자들, 여러국가들의 반동들, 공산주의의 배신자들이 비방하는 것과 어떤 차이점이 있단 말인가? 왜 스탈린에 대한 그러한 고질적인 증오를 하는가? 왜 당신은 적에게 하는 것보다도 더 사납게 그를 공격하는가? 스탈린을 비방하면서, 흐루쇼프는 사실상 소비에트 체제와 국가를 거칠게 탄핵한다. 이와 관련된 그의 언어는, 카우츠키, 트로츠키, 티토와 드질라스와 같은 배신자들의 언어보다 결코 약하지 않고 사실상 더 강하다.

 

인민들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안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해야 하고, 흐루쇼프에게 질문해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위대한 레닌의 당에 관하여, 사회주의 조국에 관하여,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어떻게, 세계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국제적인 제국주의와 국내의 반혁명에 맞선 격렬한 전투들에서 위대한 성과를 쟁취했고,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노력 속에서 영웅주의와 헌신의 기적을 보여주고 있고 전 세계 근로인민들에게 자신들의 국제주의적 의무를 성실하게 충족시키고 있는 인민에 관하여, 그러한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레닌은 비방의 정치적 의미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말하기를, “정치에서 비방은 종종 비방하는 사람의 사상적인 내용의 완전한 결여, 무력함과 무능, 짜증을 내는 무능을 은폐한다.” 이것은 바로 끊임없이 스탈린의 유령에 사로잡혔다고 느끼면서, 스탈린을 비방하는 것에 의해, 자신들이 총체적으로 원칙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과, 자신들의 무력함과 짜증내는 무능력을, 은폐하려 시도하는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에 적용되지 않는가? 소비에트 인민들의 대다수는 스탈린에 대한 그러한 비방을 승인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에 대한 기억을 더욱 더 소중히 한다.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자신 스스로를 대중들로부터 심각하게 고립시키고 있다. 그들은 마음속에 떠오르는 스탈린이라는 유령에 의해 항상 끊임없이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는데, 그 유령은 사실은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한 것에 대한, 광범위한 대중들의 커다란 불만이다. 지금까지 흐루쇼프는 소비에트 인민들과 사회주의 진영의 다른 인민들이 소련공산당 20차 대회에서 그가 보고했던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하는 비밀 보고서를 보는 것을 감히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그 비밀 보고서가 대낮의 햇빛을 견딜 수 없고 대중들을 심각하게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사실은,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스탈린을 비방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이 아이젠하워, 케네디 같은 사람을 존경과 신뢰를 가지고대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스탈린을 무시무시한 이반과 같은 유형의 폭군”, 그리고 러시아 역사에서 최대의 독재자로 비방하지만,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두 사람 모두를 미국 인민들의 절대적 다수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그들은 스탈린을 멍청이로 비방하지만, 아이젠하워와 케네디를 분별력이 있다고 칭찬한다. 그들은 한 손으로는, 위대한 맑스-레닌주의자,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사악하게 매질하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제국주의의 왕초들을 하늘 높이 추켜세운다. 이 현상들 사이의 관계가 단지 우연적이고, 그것이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배신으로부터 나오는 필연적 논리를 따라가고 있지 않다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는가?

 

자신의 기억력이 너무 나쁘지 않다면, 흐루쇼프는 1937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던 대중 집회에서, 스탈린을 공격했던 사람들에 대해 그 자신이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비판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스탈린 동지를 반대하여 그들이 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우리 모두를 반대하여, 노동계급과 근로인민들을 반대하여 손을 들었다! 스탈린 동지를 반대하여 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의 가르침들에 반대하여 손을 들었다!” 흐루쇼프 스스로 스탈린을 위대한 레닌의 친밀한 친구이자 전우로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천재, 선생 그리고 지도자로서, “위대한 그리고 불패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인민들의 진실한 벗으로서, 자신의 아버지로서 되플이하여 격찬했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 흐루쇼프가 했던 언급들과 스탈린 사후에 흐루쇼프가 했던 언급들을 비교해보면, 스탈린에 대한 그의 평가에서 흐루쇼프가 180도 달라졌다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기억력이 너무 나쁘지 않다면, 흐루쇼프는 스탈린이 지도하는 기간 동안 반혁명분자들을 진압하는 데 있어서 당시 널리 행해지고 있던 정책을 그 자신이 유별나게 정력적으로 지지하고 수행하였다는 것을 물론 기억해야만 한다. 193766, 모스크바 지방 당 5차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선언했다. 우리 당은 반역자들과 배신자들의 무리를 무자비하게 분쇄할 것이고, 모든 트로츠키주의자 우익 쓰레기들을 쓸어 버릴 것이다. 이것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 중앙위원회의 흔들리지 않는 지도력, 우리의 지도자 스탈린 동지의 흔들리지 않은 지도력이다. 우리적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완전히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를 바람에 날려버릴 것이다.

 

193868, 키예프 지방 당 4차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선언했다. 야키르들(Yakyirs), 발라츠키들(Balyitskys), 류브첸키들(Lyubchenkys). 쟈톤스키들(Zatonskys)과 다른 인간쓰레기는 폴란드 지주들을 우크라이나로 불러들이기를 원했고, 독일 파시스트들, 지주들과 자본가들을 여기로 불러들이기를 원했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적들을 절멸시켜왔지만, 아직 모든 적들을 절멸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계속 뜨고 있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국들의 포위가 존재하는 한, 간첩들과 파괴 행위자들이 우리의 조국에 침투할 것이라는 스탈린 동지의 언급을 확실히 명심해야 한다.

 

스탈린 시대 동안 당과 국가의 지도부에 있었고 반혁명분자들을 진압하기 위한 정책을 정력적으로 지지하고 단호하게 실행했던 흐루쇼프가, 왜 이 기간 동안 이루어진 모든 것을 부인하고, 스스로는 책임을 전적으로 회피하면서, 모든 오류들에 대한 비난을 스탈린에게만 전가시키고 있는가? 스탈린이 몇몇 오류를 범했을 때, 그는 자신을 비판할 줄 알았다. 예를 들어, 그는 중국 혁명에 관하여 약간의 잘못된 충고를 했다. 중국 혁명이 성공하고 난 후,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스탈린은 또한, 1939년 소련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행한 자신의 보고에서 당의 대오를 정화하는 작업에 있어서, 자신의 실수 몇 가지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어떠한가? 그는 단적으로 자기비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가 한 모든 일은, 모든 비난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고, 자신에게는 완전한 신뢰를 요구하는 것이다.

 

현대 수정주의가 날뚜기 시작했을 때, 흐루쇼프의 이러한 추한 행동들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15년에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의 수정주의자들을 맑스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판했을 때 말했던 것처럼. 이것은 말들이 잊혀지고, 원칙들이 상실되고, 철학들이 내던져지고, 결의와 엄숙한 약속들이 폐기되는 이 시대에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이 충분히 보여준 것처럼, 소련공산당 지도부에 의한 스탈린에 대한 완전한 부정은 지극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은 제국주의자들과 모든 나라들의 반동들에게 몹시 환영을 받았고, 소비에트와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실탄을 제공하였다. 20차 당 대회가 지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제국주의자들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인 물결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흐루쇼프의 반스탈린 비밀 보고서를 이용하였다. 제국주의자들, 모든 나라의 반동들, 티토 도당과 다양한 종류의 기회주의자들은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 그리고 공산당들을 공격할 기회를 재빨리 움켜잡았다. 이리하여 많은 형제 당들과 국가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놓이게 되었다.

 

소련공산당 지도부의 스탈린에 반대하는 광란의 캠페인은, 오랫동안 정치적인 송장이었던 트로츠키파들이 다시 부활하여 트로츠키의 복권을 떠들어대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196111,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가 종결되던 때에, 소위 제4인처내셔널의 국제 사무국은 소련공산당 22차 당대회와 당의 새로운 중앙위원회로 편지를 보내서, 1937년에 트로츠키가 스탈린에게 희생된 자들의 명예를 위해 기념물이 세워질 것이라고 말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 “오늘날, 이 예언은 실현되었다. 당신들의 당대회 전에 당신들의 당의 제 1서기는 이 기념물의 건립을 약속하였다.”라고 편지는 계속된다. 이 편지에서 트로츠키의 이름이, “스탈린에게 희생된 자들의 명예를 위해 세워진 기념물에 금으로 된 글자로 새겨져야 한다는 특정한 요구가 나왔다.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에 의해 시작된 반스탈린 운동은 트로츠키주의를 위한 문을 개방하였고”, “트로츠키주의의 전진과 그 조직 제4 인터내셔널을 크게 돕는다라고 선언하면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하는 데에 있어서,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은 대낮의 햇빛을 견딜 수 없는 동기들이 있다. 스탈린은 1953년에 죽었다. 3년 후 20차 당대회에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그를 격렬하게 공격하였고, 그리고 그가 죽은 지 8년 후 22차 당대회에서 또 다시 그를 격렬하게 공격하였으며, 그의 시체를 제거하고 불에 태웠다. 스탈린에 대한 격렬한 공격을 반복하면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소련 인민과 전 세계에 걸친 이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지워질 수 없는 영향력을 지워버리고, 스탈린이 옹호하고 발전시켰던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고 수정주의 노선을 전면적으로 적용하는 길을 닦으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들의 수정주의 노선은 정확하게 20차 당대회와 함께 시작되었고, 22차 당대회에서 완전히 체계화되었다. 제국주의, 전쟁과 평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식민지와 반식민지에서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당 등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그들의 수정이, 스탈린에 대한 그들의 완전한 부정과 불가분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사실들은 더욱 더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소련공산당 지도부가 스탈린을 완전히 부정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개인숭배와 싸운다는구실하에서이다.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시작하면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그들이 말하는 당 생활과 지도 원칙들의 레닌주의적인 기준들이라고 불렀던 것을 전혀 회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지도자들, , 계급 그리고 대중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레닌의 가르침들을 침해하고 있고, 당에서의 민주집중제의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맑스-레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인 당이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령부로서 진정으로 봉사하고자 한다면, 그 당은 지도자들, , 계급 그리고 대중들의 상호관계를 올바르게 다루어야하고, 민주집중제의 원칙 위에서 조직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당은 매우 견고한 지도력의 핵을 가져야만 하는데, 그것을 맑스-레닌주의의 보편적 진리를 구체적 혁명적 실천과 통합시키는 데 능숙한, 오랜 기간 검증된 지도자들의 그룹으로 구성되어야만 한다. 중앙위원회의 성원들이든지 아니면 지방위원회의 성원들이든지 간에, 프롤레타리아 당의 지도자들은 계급투쟁과 대중적인 혁명운동의 과정에서 대중들로부터 출현한다. 그들은 대중들에게 한없이 충성스럽고, 대중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대중들의 생각들을 정확하게 응축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끝까지 실행해 나가는 데 능숙하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대표자들이고 대중들에 의해 인정을 받는다. 프롤레타리아 당이 그러한 지도자들을 가진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당의 정치적 성숙의 표시이고, 여기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위한 승리의 희망이 놓여 있다. “역사에서 어떠한 계급도,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 수 있는 자신의 정치적 지도자들, 자신의 뛰어난 대표자들은 만들어내지 않고는 권력을 획득한 적이 없었다라고 레닌이 말했을 때, 그는 절대적으로 올바랐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경험 많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당의 지도자들을 훈련시키는 것은 장기간에 걸친 힘든 과업이다. 그러나 이것이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의 의지의 통일은 공문구로 남을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역사에서 대중들과 개인의 역할에 대한 그리고 지도자들, , 계급 그리고 대중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의 가르침들을 항상 고수해왔고, 당에서 민주집중제를 지켜왔다. 우리는 항상 집단적인 지도력을 유지해왔다. 동시에 우리는 지도자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데 반대한다. 우리는 지도자들의 이러한 역할에 중요성을 부여하면서도, 개인들에 대한 부정직하고 과도한 찬사와 그들의 역할에 대한 과장에는 반대한다. 194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오쩌둥 동지의 제안에 의거해,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당 지도자들의 생일에 대한 어떤 종류의 공적인 축하도,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따서 장소들, 거리들이나 기업들의 작명을 금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우리들의 이 일관되고 정확한 접근은, 소련공산당의 지도부에 의해 주창된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다.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주창함에 있어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은 그들 스스로 주장하듯이, 민주주의를 증진하고 집단적 지도력을 실천하고 개인의 역할에 대한 과장에 반대하는 의도가 없으며, 오히려 숨은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명백하게 되었다. 그들의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의 요점은 정확하게 무엇일까? 솔직하게 그것을 제기하자면, 그것은 단지 다음의 내용일 뿐이다.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구실로, 당의 지도자인 스탈린을 당 조직, 프롤레타리아트 그리고 인민대중들과 대립시키는 것.

 

2.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구실로, 프롤레타리아 당,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체제를 더럽히는 것.

 

3.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구실로, 그들의 입지를 세우고, 그리고 수정주의 음모가들이 당과 국가의 지도부를 찬탈하기 위한 길을 닦기 위하여, 맑스-레닌주의에 충실한 혁명가들을 공격하는 것.

 

4.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구실로, 형제 당들과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고, 그리고 그들의 지도부를 파괴하여, 그들 자신에 적합하도록 하는 것.

 

5. 그리고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구실로, 맑스-레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형제 당들을 공격하고, 국제 공산주의운동을 분열시키는 것.

 

흐루쇼프가 시작한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는 비열한 정치적 음모이다. 맑스에 의해 묘사된 누군가처럼, “그는 이론가로서는 보잘 것 없지만, 음모가로서는 뛰어나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은 개인숭배를 거부하고 개인숭배의 결과물들과 싸우면서”, 그들이 합당한 명성을 향유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높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스탈린을 발밑에 두고 짓밟는 동안,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이 흐루쇼프를 하늘 높이 찬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10월 혁명의 시기에는 아직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그리고 내전 동안 낮은 등급의 정치 일꾼이었던 흐루쇼프를, 그들은 정력적인 붉은 군대의 창조자로 묘사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흐루쇼프의 목소리가 아주 빈번하게 들렸고그리고 그가 스탈린그라드 주민들의 영혼이었다고 말하면서, 소비에트 애국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에서의 위대한 승리를 전적으로 흐루쇼프의 덕택으로 돌린다.

 

그들은 핵무기들과 로켓공학에서의 위대한 업적들을 전적으로 흐루쇼프의 덕택으로 돌리면서, 그를 우주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제조에 있어 소련의 성공은 스탈린의 지도하에 있었던 소비에트 과학자들과 기술자들 그리고 소비에트 인민들의 위대한 업적이다. 로켓공학의 토대는 역시 스탈린의 시대에 마련되었다. 어떻게 이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이 지워질 수 있겠는가? 어떻게 모든 명성이 흐루쇼프에게 주어질 수 있단 말인가? 맑스-레닌주의의 근본적인 이론을 수정했고, 레닌주의는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주장하는 흐루쇼프를, 그들은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고 풍부하게 한 찬란한 모델로 찬양한다.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이 개인숭배와의 전투라는 구실하에 하고 있는 행동들은 정확하게 레닌이 다음과 같이 말했던 바와 같다. 보통의 문제들에 대해 보통 사람들의 견해들을 가진 옛 지도자들을 대신하여, 새로운 지도자들은 제기하는데 그들은 불가사의한 허튼소리와 혼란을 말한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공개서한은 맑스-레닌주의를 고수하는 우리의 입장을 비방하는데, 우리가 개인숭배의 시기 동안 번성했던 사물의 질서, 이데올로기와 도덕들, 지도력의 형식과 방법들을 다른 당들에게 강요하려고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언급은 다시금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의 어리석음을 폭로한다.

 

소련공산당의 지도자들에 의하면, 10월 혁명이 러시아에서 자본주의를 끝장낸 후, “개인숭배의 시기가 이어졌다고 말한다. 마치 그 시기의 사회체제이데올로기와 도덕이 사회주의가 아닌 것 같이 말한다. 그 기간에, 소비에트의 근로인민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고, “인민들의 삶에 독이 되었던 두려움, 의심, 불확실함의 분위기가 만연했고, 소비에트 사회는 발전을 방해받고 있었다고 말한다. 1963719일 소련-헝가리 친선 집회에서의 연설에서, 흐루쇼프는, 스탈린은 도끼를 가지고 권력을 유지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스탈린의 테러지배라고 불렀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들로 그 시대의 사회질서를 묘사했다. “그 시대에는, 출근하는 사람이 집으로 되돌아올지, 아내와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를 알지 못했다.”

 

소련공산당 지도자들의 묘사에 의하면, “개인숭배의 기간의 사회는 봉건제나 자본주의 시기보다도 더 적대적이고그리고 야만적인시기였다. 소련공산당 지도부에 따르면, 10월 혁명의 결과로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체제는 수십 년 동안 근로인민들에 대한 억압을 제거하는 데도, 소비에트 사회의 발전을 가속화시키는 데도 실패했다.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가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를 수행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근로인민들에게서 무거운 짐이 제거되었고, “소비에트 사회의 발전이 갑작스럽게 가속화되었다. 흐루쇼프는 말했다. “! 스탈린이 단지 10년만 더 일찍 죽었더라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스탈린은 1953년에 죽었다. 10년 더 일찍이라면 1943년일 텐데, 1943년은 소련이 위대한 애국전쟁에서 반격을 시작했던 때인 바로 그 해이다. 그 당시에 스탈린이 죽기를 원했던사람은 누구였는가? 히틀러!

 

맑스-레닌주의의 적들이 프롤레타리아 지도자들을 헐뜯고, “개인 숭배에 반대하는 전투와 같은 그러한 슬로건을 사용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대의를 침식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에서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민들이 오래전부터 보아온 더러운 속임수이다. 1인터내셔널의 시기 동안 음모가 바쿠닌을 맑스를 욕하기 위해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처음에는, 맑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접근해서, 맑스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당신의 제자이고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중에 그가 제1인터내셔널의 지도부를 찬탈하는 음모에 실패했을 때, 그는 맑스를 비방하며 말했다. “독일인과 유대인처럼, 맑스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권위주의적이고 독재자이다.

 

2인터내셔널 시기 동안 배신자 카우츠키는 레닌을 욕하기 위해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 그는 레닌을 중상햇으며 레닌을, 맑시즘을 국가의 종교뿐만 아니라 중세나 동양의 신앙의 지위로까지격하시킨 일신교 신자들의 신에다 비유했다. 3인터내셔널에서 배신자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욕하기 위해 그러한 언어를 유사하게 사용했다. 그는 스탈린이 전제 군주이고 그리고 스탈린주의 관료제가 혐오스런 지도자 숭배를 창조했고, 지도자들에게 신성한 자질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현대의 수정주의 티토 도당은 스탈린을 욕하기 위해 유사한 말들을 역시 사용하는데, 스탈린이 절대적인 개인권력의 체제에서” “독재자였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소련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제기된 개인숭배에 반대하는 전투라는 쟁점은 바쿠닌, 카우츠키, 트로츠키 그리고 티토를 통해 전해져 내려 왔는데, 그들 모두는 프롤레타리아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을 침식하기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에서, 기회주의자들은 중상에 의해 맑스, 엥겔스나 레닌을 부정할 수가 없었고, 흐루쇼프 역시 중상에 의해 스탈린을 부정할 수가 없다. 레닌이 지적했듯이, 특권적인 지위가 중상의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다.

 

흐루쇼프는 레닌 묘로부터 스탈린의 시체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특권적인 지위를 활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시도할지라도, 그는 소비에트 인민과 전 세계의 인민의 마음속으로부터 스탈린의 위대한 이미지를 제거하는 데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흐루쇼프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맑스-레닌주의를 수정하기 위해 그의 특권적인 지위를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시도할지라도, 그는 스탈린이 옹호했고 전 세계의 맑스-레닌주의자들이 옹호했던 맑스-레닌주의를 타도하는 데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우리는 흐루쇼프 동지에게 진실한 충고 한 마디를 하고 싶다. 우리는 당신이 당신의 오류를 깨닫고, 잘못된 길에서 맑스-레닌주의 길로 되돌아오기를 바란다.

 

맑스, 엥겔스, 레닌, 그리고 스탈린의 위대한 혁명적 가르침들, 만세!

 

1963913일 중국 인민일보(People’s Daily)와 홍기(Red Flag)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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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치민(Ho Chi Minh)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만화 시리즈 중 하나인 보물찾기 시리즈를 읽게 되면서였다. 보물찾기 시리즈 중 하나인 베트남에서 보물찾기에는 아주 잠깐이나마 베트남 사람들이 국부로 여기는 호치민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고,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아 이런 사람이 있었구나정도로만 알게 되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다시 관심이 생긴 것은 대학교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나서였다. 당시 나는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이 생겨 여운형, 김원봉 등과 같은 잊혀진 독립운동가들의 평전을 읽었는데, 그 중 읽었던 평전 중 하나가 박헌영 평전이었다. 안재성 작가의 박헌영 평전에는 그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과 같이 대학교를 다녔다는 내용이 나왔었는데,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에는 충분했다.

 

군복무를 위해 한 학기룰 휴학했던 2016년 초 나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게바라(Che Guevara)에 빠졌었다. 체게바라를 좋아하게 된 나는 체게바라 관련 책들과 다큐멘터리 영화 등을 닥치는 대로 보았다. 체게바라 관련한 다큐멘터리에서 진보적인 대학생들이 두 개의 초상화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 대학생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 ! 호치민! ! ! 체게바라!(Ho! Ho! Ho Chi Minh! Che! Che! Che Guevara!)”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으로 남겼다.

 

201610월 말부터 소방서 공익으로서 복무하게 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박근혜 퇴진 집회에 참가하게 됐다. 매주 토요일마다 거의 빠지지 않고 퇴진집회에 참가했던 나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으로 알고 싶어 만화 작가 백무현 선생이 쓰신 만화 박정희를 읽게 됐다. 만화 박정희에서는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다루었고, 호치민의 얼굴과 베트콩 전사들이 그려진 파트에선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었다.

 

사상 첫 해외 파병인 베트남 전쟁. 그 전쟁의 진실은 무엇이었나? 그 전쟁은 역사적으로 오랜 외세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그에 반항하고 민족해방과 독립을 추구하며 싸운 애국지사와 역대 외세에 빌붙어서 일산의 영달을 꾀해 온 민족반역자들과의 싸움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일제 하 독립운동을 한 애국세력과 친일세력간의 싸움이었다. 신생 독립 민족 내의 민족양심세력과 민족반역세력의 싸움이었던 것, 베트남 민중의 80%는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가 해방 뒤 김구 등 민족세력을 지지한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미국이 지지한 쪽은 부패하고 타락한 사이공 반공정권이었다. 우리로 말하면 친일파 정권을 지지한 셈이다.”

 

이것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었던 베트남 전쟁의 또 다른 진실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식은 워낙 짧아서 반공주의자들이 하는 얘기도 절반은 진실이라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런 생각은 베트남 전쟁을 공부하면서 바뀌었지만 말이다. 만화 박정희를 읽게 된 이후 나는 알라딘에서 찰스 펜이라는 미국인이 쓴 호치민 평전을 구매하여 읽게 됐다. 그 책을 통해 베트남의 영웅 호치민 또한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기 나는 호치민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깊게 알지는 못했다. 호치민 평전을 읽게된 다음 캐나다 출신의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가 집필한 베트남 10000일의 전쟁(The Ten Thousand Day War Vietnam 1945~1975)’을 읽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읽으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CIA의 전신인 OSS가 호치민 휘하에 있는 베트민(Viet Minh)을 대일전에 참가시키기 위해 훈련시키고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0년 뒤 미국이 전쟁을 치르게 된 세력이 한 때 자신들이 동맹이었다는 사실도 같이 알게 되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읽은 이후 필자는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집필한 리영희 평전을 읽게 됐다. 리영희 평전에서도 과거 민주화운동가 리영희가 분석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그 내용을 읽어보면 읽어볼수록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이자, 비인간적인 범죄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7년의 추석은 참으로 길었다. 나 또한 10일 가까이 쉴 수 있었는데, 그때 읽었던 책이 바로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Ho Chi Minh, A Life)’이었다. 사실 내가 호치민 평전을 처음 읽을 때, 듀이커의 평전 이전에 찰스 펜의 호치민 평전을 읽었던 것은 듀이커의 책이 너무나도 두꺼워 읽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치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었던 나는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알라딘을 통해 그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따라서 2017년 나는 추석 연휴를 틈타 듀이커가 집필한 호치민 평전을 읽게 됐다.

 

대략 970페이지(각주 빼면 850페이지)가 넘는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은 한 학자가 30년 동안이나 호치민을 연구한 것을 책으로 집필한 완성작이었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저자 듀이커가 그랬듯이 나 또한 점차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됐다. 젊은 시절부터 그가 걸어온 독립을 향한 투쟁과 30년간의 해외 생활 및 여러 활동은 참으로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해외를 떠돌아 다니면서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과 베트남 독립을 향한 열정이 과거 일제시대의 독립운동가들을 떠오르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911년 베트남을 떠나서 1941년 중월 국경지대인 팍 보(Pac Bo)’에 베트민 혁명기지를 세우기까지의 호치민의 삶은 말 그대로 베트남 독립을 향한 투사의 생애였다는 사실을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책에는 베트남의 독립과 자유를 향한 한 혁명가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이 담겨있었다. 특히나 베트남과 인민에 대한 그의 사랑은 19459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할 때, 더더욱 드러난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더더욱 매력과 존경심을 느끼게 된 것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평전에서 자세히 읽으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얄타와 포츠담 회담에서 베트남 문제를 합의본 강대국들은 베트남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전국 자리에 오른 샤를 드골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화하려고 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 군대는 19545월 라오스 국경지대에서 벌어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8년간의 독립전쟁을 끝내고 독립을 쟁취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던 호치민의 투쟁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비록 미국과의 전쟁인 베트남 전쟁에 대해선 매우 짧게 다뤘지만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은 혁명가 호치민이 걸어온 자유와 독립을 향한 투쟁적인 삶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나는 혁명가 호치민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됐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고 난 이후에도 다른 책들도 읽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호치민 주석에 관한 두 권의 책은 송필경 선생께서 집필하신 왜 호치민인가?’와 호치민의 글과 연설을 모아놓은 식민주의를 타도하라를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다. 그 두 권의 책은 혁명가 호치민에 대해 많은 걸 알게 해주었다. 두 권의 책 또한 나로 하여금 호치민을 더더욱 존경하게 만들었다.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80노인이 되기까지 인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호치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의 생애는 나에게 참으로 깊은 감동을 주었다. 나는 호치민을 공부하면서 과거 일제시기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만큼 호치민도 위대한 생애와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호치민의 인간성에 대해 깊은 극찬을 보낸다. 특히나 그가 다른 지도자들과 다르게 부패하지 않았다는 점에 많이 주목한다. 물론 이 또한 사실이고 호치민 주석의 인간애는 참으로 존경받을 만한 행적이지만, 나는 그의 인간성 보다 그가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걸어온 투사로써의 모습에 더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호치민 주석의 지도 아래(비록 그는 1969년에 사망했지만) 베트남인들은 1975년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무찌르고 통일을 할 수 있었다. 즉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통해 자주와 독립 그리고 통일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민족반역자 편이었던 남베트남 정부에 부역했던 이들이 있다. 그들은 1975년 베트남이 통일을 이룩하고 난 이후 보트피플이 되어 미국에 망명했다. 보트피플이 되어 베트남을 떠난 그들은 혁명가 호치민에 대해 아무런 근거 없는 역사 왜곡과 입에 담을 수 없는 망발을 일삼으며 증오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신분적으로 남베트남에 부역했던 인물들이기에, 주장 자체에 신빙성이 매우 떨어진다. 그들은 그저 반공주의라는 편향된 사상을 가지고, 자기들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 정착한 보트피플들과 베트남 전쟁 파병을 찬양하는 한국의 극우 세력을 제외하면 호치민은 전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을 당시 미국과 영국,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일본의 진보적인 대학생들은 호치민의 초상화를 들고 ! ! 호치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제국주의 침략전쟁에 반대했다. 나는 이것이 혁명가 호치민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위대함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동남아시아의 한 지도자가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본보기는 없기 때문이다.

 

2020519일인 오늘은 호치민 주석이 탄생한지 130주년이 되는 날이다. 호치민은 오늘날 베트남에서도 세대를 아울러 대다수의 인민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비록 난 한국에서 태어났고, 호치민에 대해 공부하게 된 것도 근래에 들어서이긴 하지만, 그분을 매우 존경한다. 혁명가 호치민은 비단 베트남인들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준 훌륭한 선생이자, 격 없는 아저씨 혹은 삼촌이기도 하다. 그런 분의 130주년 생일을 맞아 내가 왜 민족해방투사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을 존경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해보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는 그를 존경할 것이고, 그를 잊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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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지 오늘로써 40년이 됐다. 40년 전 광주는 피바다였다. 전두환 일당이 보낸 진압군들은 광주를 피로 물들였다. 그들은 광주인민 수천 명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당시 광주를 피로 물들인 그 일당들은 아직도 살아있고,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은 재산 29만원으로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인 만큼,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791026일 박정희가 자신의 부하 김재규가 쏜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당시의 국무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가, 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최규하가 대통령이 된 이후 박정희 암살사건의 조사를 맡았던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세력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들은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박정희 암살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로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을 벌여 보안사령부 취조실로 연행하면서 12·12 쿠데타를 일으켰다. 12·12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 등의 신군부가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전두환은 최규하를 압박하면서 권력 찬탈의 야심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경험했던, 민주화운동 세력과 일반국민들은 이를 원하지 않았다. 12·12 쿠데타의 주역인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확장해나갔다. 19803월 중순 주한 미대사 글라이스틴은 자신이 작성한 한국의 정치 상황 보고서에서 전두환이 군을 장악하고 이제 정권을 장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 사망 이후 내려진 비상계엄에도 불구하고, 1980서울의 봄시기에는 학생운동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런 학생운동은 학원자율화운동 또는 학원민주화운동으로 시작되었다. 4월 들어 학생운동은 학내문제를 넘어 점차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으로 이어졌고, 노동자들의 투쟁도 가열됐다. 노동자 투쟁은 꽤나 적극적으로 일어났는데, 5·17 군사 쿠데타 이전까지 총 897건의 노동쟁의와 총인원이 20만명에 달했다.

 

1980414일 최규하 대통령은 공석 중인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을 겸임 발령했다. 이렇게 전두환은 신군부의 정치개입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5월 여러 민주화 운동들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대학가의 시위도 일어났다. 513일부터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전국적인 대규모 학생 시위로 나타났다. 514일에는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15일에는 시위가 더 확대되었다. 하지만 군대 투입을 우려했던 서울 경인지역의 총학생회장단은 군 병력의 이동소식이 전해지는 가운데 유혈사태를 염려하여 가두시위 철수를 결정했다.

 

신군부 세력이 군대를 이동시키고 배치시키기 시작하면서 16일 이후 광주등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서울을 비롯한 대부분 지역의 학생 시위는 중단되었다. 한편 학생 시위가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감행하기로 한 신군부 세력은 충정부대의 이동과 배치를 중단하지 않았다. 1980517일 비상계엄 선포지역이 제주도를 포함하면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517일 하루에만 600명이 넘는 재야·학생운동 지도자, 언론인 등이 체포됐고, 야당인사 김대중은 내란 음모죄로 체포됐다.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달리 전라도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됐다. 특히나 야당 인사 김대중을 지지했던 광주의 경우 박정희 시절부터 차별과 멸시가 있었다. 그런 감정속에서 김대중이 체포되자 광주 시민들은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전두환은 광주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다. 결국 전두환은 초기에 강경진압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군대를 광주에 보내게 된다.

 

1980518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에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농성을 시작했다. 이때 학교를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는 특수 곤봉으로 공격을 시작했고, 공수부대원이 휘두르는 곤봉은 학생들을 잔혹하게 구타했다. 공수부대의 진압이 과도하자 학생들은 이런 상황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하고, 시내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그날 오후 330분쯤 신군부 세력은 광주에 7여단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시위 진압에 나섰다. 공수부대는 진압봉, 개머리판, 군홧발로 시위하는 광주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했다. 이들은 시위대를 잡는다는 이유로 가택수색은 물론이고, 나이를 불문하고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여학생과 주부 등 여자들에게조차 옷을 벗기고 구타했는데, 이런 시위 진압은 18일 저녁 늦도록 이어졌다.

 

다음날인 19일 공수부대의 시위 진압은 더욱 폭력적으로 변했다. 이날 등장한 부대는 서울 동국대를 떠나 밤새 광주에 도착한 11여단 소속이었다. 장갑차까지 앞세워 출동한 그들은 지역대 단위로 시위대를 추적하여 곤봉과 소총 개머리판으로 공격하고, 일부 대원은 대검까지 사용했다. 이들은 다방, 여관, 민가 등을 샅샅이 수색하며 걸리는 사람마다 구타하고 연행했다. 이날 오후에는 11여단과 7여단의 5개 대대 병력 모두가 투입됐다. 물론 공수부대의 잔인한 구타에 광주시민들도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다. 광주시민들은 산발적인 시위를 전개하며 맞섰다. 이에 더 악을 쓰게된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 뿐만 아니라 시내버스나 택시를 세워 운전기사까지 구타하는 짓을 저질렀다. 이때 시위대는 화염병, 벽돌, 각목 등으로 계엄군에 맞섰고, 시위는 더더욱 확산됐다. 이때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학생 청년뿐 아니라 노인 부녀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죽게 되는 경우가 벌어졌다.

 

다음날인 20일 오후 시위대의 규모는 수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시작된 데모는 민중 항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오후 7시에는 대형 트럭, 고속버스, 시외버스와 택시 200여 대가 금남로를 가득 메운 채 시위에 참여했다. 시위 규모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당시 광주에서의 시위양상은 언론에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다. 특히나 KBSMBC같은 매체는 마치 공산주의자나 폭도들이 일으킨 것처럼 사건을 왜곡해서 보도했다. 그 결과 20일 저녁 광주의 MBCKBS가 불탔다.

 

521일 도청을 중심으로 30만 명이 모여들어 투쟁의 정점을 이뤘다. 당시 시위대가 대규모로 확산되니까, 공수부대가 물러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도 나왔었다. 그러나 정오가 되고 애국가가 울려 퍼질 때 공수부대 병사들의 M-16 소총은 불을 뿜었다. 잘 훈련된 병사들은 조준 사격으로 광주 시민을 하나둘씩 쏴 죽였다. 이렇게 최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이걸 직접 목격하게 된 광주시민들은 무차별 학살을 감행한 공수부대에 무장으로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들 중에는 경찰서에 있는 무기고를 접수하여 M-1 카빈 소총으로 무장해 계엄군에 저항했다. 이렇게 하여 시민군이 형성된 것이다. 시민군은 저항으로 21일 저녁 계엄군을 몰아내고 전남도청에 진입했다.

 

522일 광주는 시민군이 잔인한 공수부대에 맞서는 해방구가 됐다. 시민군은 자체 조직을 정비해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하는 일을 했다. 헌혈하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식량으로 보급했다. 시민군 측 차량들은 구호·연락·수송·보급·순찰·전투 등의 임무를 나눠 조직했다. 이런 혼란한 상황에서 은행이나 신용금고에서의 사고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목적은 달랐지만, 1871년 당시 지배계급에 맞서 민중들이 조직했던 파리 코뮌과 비슷했다.

 

하지만 광주는 고립되어 갔다. 고립되어 가자 시민군 지도부 내부에선 총기를 반납하고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525일 저녁에는 정상용과 윤상원 등 광주의 재야 청년운동권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항쟁 지도부가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계엄군에 맞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이들은 끝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들은 시민군을 진압하고 싶어 했다. 527일 새벽 1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새벽 455분 계엄군이 도청을 완전히 점령하면서 광주 민주화 운동은 막을 내렸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두환과 대한민국 군대의 잔인성도 있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의 이중적인 행태다. 미국은 전두환이 광주에서 시위가 확산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들이 진압하기를 원했고, 신군부 세력의 진압작전을 지원했다. 우선적으로 미국은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하에 있는 20사단의 광주 투입을 승인해주었다. 또한 미국은 신군부가 광주의 진압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오키나와 기지에서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 만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코럴시호를 한국 근해에 출동시켰다. 당시 미국에게는 한국의 민주화 보다 북한으로부터의 안보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국은 신군부를 지원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수백명 내지는 수천명이 죽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161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전두환의 광주학살로 많은 사람이 학살당했다. 광주에서 학살을 벌일 수 있었던 기본적인 동기부여는 반공주의였다. 그 반공주의라는 사상이 기본적인 바탕에 놓여 있었고, 극단적 반공주의가 광주 시민 전체를 폭도 내지는 빨갱이 새끼로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반공주의는 민주화된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남아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5·18을 북한군의 폭동으로 규정하는 심각한 역사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지만원 같은 사람들은 5·18 민주화운동을 북한이 개입했다는 어처구니 없는 책을 써서 광주시민들을 모욕하기 까지 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시민들이 군사독재 정권에 들고 일어나 저항하고, 그 이후 전두환 정권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인 오늘 만큼은 군부독재에 싸우다 죽은 이들을 기리도록 하자! 광주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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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알바 단상

오늘 난생처음으로 몸으로 뛰는 노동을 했다. 용인에 있는 어떤 고기 공장이었고,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총 9시간을 노동했다. 비록 쉬는 시간도 중간에 있고, 점심도 공짜로 제공됐지만, 하나에 최소 10kg 이상이나 되는 고기상자를 수백개씩 옮기는 작업은 신체적으로 단련되지 않은 사람에겐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량생산체제를 통해 생산된 고기상자를 옮기면서 ˝이 노동을 통해 오늘 내가한 잉여노동은 어느정도 일까? 혹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창출한 잉여가치는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까지 노동현장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도 참으로 많이 들었다. 그부분에 있어서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였다.

첫날 치고 일을 그렇게 나쁘게 한 것은 아니어서 크게 혼나지 않으며 최선을 다해 노동을 했던것 같다. 힘들게한 노동이라 더 보람찬 일이었다. 이번에 막노동을 해보게 되면서 올해 내가 가야할 길을 잡을 수 있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매주 1번씩은 그런 노동을 통해 일을 해야겠다.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이로써 앞으로 노동현장에서 경험을 쌓을 것이다.

위대한 혁명가이자 휴머니스트인 에르네스토 체게바라 동지가 쿠바의 높은 고위직에 있으면서 신성한 노동을 통해 혁명사상을 고취시키고 남는시간에 독서를 하며 모범을 보였듯이 당분간 나 또한 신성한 노동을 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학습하는 모습을 실천할 것이다. 적어도 올해는 매주 1번 혹은 2주에 1번씩은 노동을 통해 학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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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 : 아바나 선언 레볼루션 시리즈 6
피델 카스트로 지음, 강문구 옮김, 타리크 알리 / 프레시안북 / 2010년 2월
평점 :
절판


미국 플로리다주 최남단에서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나라 쿠바는 미제국의 각종 경제적 고립과 탄압 속에서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해온 나라다. 게릴라 투쟁으로 친미괴뢰정권을 몰아내고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는 1959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 미제국주의의 극심한 고립과 테러 속에서 생존해왔다. 195910월 쿠바에 대한 불법공습을 개시했던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19603월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망명자들로 구성된 반공 게릴라를 양성했고, 44세의 나이로 미국 대통령이된 존F케네디는 19614월 쿠바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1500명으로 구성된 병사들을 피그스 만에 상륙시켰다. 피그스만 침공이 처절한 실패로 끝나자 케네디 정부는 그해 11월 소위 몽구스 작전(Operation Mongoose)’을 실행하여 쿠바 정부를 위협했었다.

 

이런 미제국의 위협이 지속되자 쿠바는 소련과의 관계를 형성해나갔고, 소련의 도움을 받아 미국의 노골적인 테러 및 간섭행위를 막기 위해 각종 미사일을 배치했었다. 이중의 소련제 핵ICBM이 있자 미국은 쿠바 전역을 함선들로 포위하여 고립시키고 소련까지 위협했었다. 미국은 데프콘2까지 발령하며 쿠바와 소련을 위협했으며, 결국 흐루쇼프가 미사일을 강제적으로 철수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Cuban Missile Crisis)’였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소련의 굴복으로 끝난 이후에도 쿠바에 대한 미제국의 탄압은 중단하지 않았다. 1970년대 미국의 CIA는 질병을 퍼뜨려 쿠바 국민들이 식용으로 기르는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고, 쿠바에 대한 경제적인 제재를 풀지 않았으며, CIA를 통해 쿠바 지도자를 암살하려 했었다. 미국이 그토록 암살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쿠바에 저지른 테러리즘(Terrorism)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미국은 카스트로를 죽이기 위해 수백 번이나 암살 시도를 했었다. 미국은 왜 카스트로를 죽이려 했던 걸까? 그것은 바로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들을 했기 때문이다. 1959년 바티스타 친미 괴뢰정권을 몰아낸 피델 카스트로는 당시 쿠바를 경제적으로 수탈하고 있던 연합 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미국의 기업들을 국유화 했고, 거기서 창출되는 이익을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농지개혁을 실행하여 미국이 지원하던 지주세력들이 개인적인 단위의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게 막았다.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인민들에게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자유와 무료로 치료받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하고자 했다. 또한 피델 카스트로는 미국에서조차 하지 못하던 인종차별 철폐를 이루어 냈고, 남녀평등정책을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고자 했던 이유다.

 

혁명 시리즈 중 하나인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은 총 3가지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파트는 1953726일 몬카다 병역 습격 이후 재판과정에서 피델 스스로가 변호사를 자처하며 법정에서 했던 발언인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 두 번째는 1960년에 발표했던 제1차 아바나 선언이며, 세 번째는 1962년에 발표한 제2차 아바나 선언이다. 이 책의 첫 번째 파트인 역사가 나에게 무죄를 선고하리라를 보면 당시 피델이 어떠한 사회를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인민을 억압하고 미제국의 경제적 지배를 돕고 있는 독재자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축출해야 한다 생각했다. 피델이 보기에 바티스타 치하의 쿠바는 미제국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회로 사회의 소수계급이 다수를 착취하고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바티스타 치하의 쿠바에선 미국의 기업들이 쿠바의 자원과 생산물 대다수를 독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에 따라 쿠바 인민들은 착취에 시달리다 죽어 나갔다.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법정에서 자신이 꿈꾸는 혁명정부의 비전을 얘기했다. 카스트로가 꿈꾼 사회는 주거 문제가 해결된 사회, 토지 불평등 문제가 해결된 사회, 부패한 관리들을 청산한 사회, 인민들에게 질좋은 유급휴가와 저렴한 대중교통 수단을 제공하는 사회 그리고 이러한 것들을 이루기 위해 더 이상 국고를 횡령하지 않고,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대기업으로부터 관료들이 착복하지 않으며 국가의 막대한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고, 국가를 위해(방어할 국경도 없고 구입한 전쟁 무기는 오히려 국민을 향해 사용되는) 탱크나 전투기 등의 무기를 지나치게 구입하지 않으며, 국민을 교육하는 데 더 관심을 쏟는 사회였다. 따라서 카스트로는 자신의 진보적인 비전을 제국주의자들의 횡령과 착복행위를 청산하고 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달성할 것이라 생각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비록 혁명이 성공한 이후 쿠바는 미제국주의의 극심한 경제제재에 시달렸기에, 경제적인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피델 카스트로와 쿠바 공산당은 인민들의 복지와 삶을 개선하기 위해 각고한 노력을 보였다. 실제로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는 미제국의 극심한 고립을 받고, 경제적 위기가 있을 때, 국방 예산을 줄여서라도 의료와 교육 정책에 많은 투자를 했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 쿠바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제도다. 쿠바의 이와 같은 진보적인 제도는 2020년인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으며, 쿠바에 사는 외국인들 또한 이러한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20019.11 테러 현장에서 부상을 당한 소방관들이 의료비가 비싼 미국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쿠바로 넘어가서 제대로 치료받은 일이 있었다. 아무튼 이와같은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적용된 쿠바 사회는 세계적인 의료강국으로 우뚝 서 있다. 1차 아바나 선언과 제2차 아바나 선언에는 사회주의 쿠바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미제국주의자들이 악랄함과 사악함이 아주 잘 드러나 있다. 2차 아바나 선언에서 카스트로는 미제국주의를 아주 잘 분석했다. 대표적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국주의 세력이 촉발시킨 2차대전은 파시즘의 격퇴, 세계 사회주의 형성, 식민지 종속국가들의 주권 투쟁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1945년과 1957년 사이 12억 이상의 인구가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민중이 흘린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식민지 종속국가의 민중운동은 세계를 뒤흔들고 제국주의의 최후 위기를 특징짓는 보편적 현상이다. 쿠바와 남아메리카는 세계의 일부다, 우리의 문제는 제국주의라는 일반적 위기와 예속 민중의 투쟁이 야기하는 문제의 일부다. 즉 그 분쟁은 새로 탄생하는 세계와 죽어가는 세계의 분쟁이다. 우리 조국을 음해하는 섬뜩하고 잔인한 캠페인은 제국주의자들이 민중의 해방을 방해하기 위해 자행하는 부질없고 처절한 노력이다. 쿠바는 특별한 방식으로 제국주의자들을 괴롭힌다. 쿠바혁명에 대한 양키들의 증오에 무엇이 은폐되어 있는가? 현 세계에서 침략 목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제국주의 세력과 전 대륙의 독재 세력을 연합시키는(35000만 인구를 대변하는 이 세력은, 다른 국가의 안보를 위협할 금융, 군사 수단도 없이 경제적으로 저발전 상태에 있는 고작 인구 700만 명의 소국을 공격하려 한다) 그 음모를 어떻게 합리적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을 연합시키고 부추기는 것은 공포다.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공포다. 혁명적 수단을 통해 쿠바에서 집권한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진보적 중산층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진보적 중산층이 혁명적 수단으로 양키 독점 세력과 아메리카 대륙의 반동적 독재자들이 착취하고 억압해온 가난한 국가들에서 권력을 쟁취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아메리카 대륙의 약탈 당한 민중이 압제자들에게서 총칼을 회수하여 쿠바처럼 아메리카의 자유 민중으로 우뚝 설지도 모른다는 공포다.”

 

출처 : 카스트로 아바나 선언 p.115~116

 

미제국이 두려워했던 것은 남아메리카의 반미화였다. 이는 피델 카스트로가 제2차 아바나 선언을 발표할 시기 미국이 베트남 전쟁 개입 명분으로 내세웠던 도미노 이론처럼 참으로 제국주의적인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미국은 어떻게든 피델 카스트로를 죽이려 시도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 기록된 피델 카스트로의 연설들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의 투쟁적인 삶과 이데올로기가 있는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 그는 분명 위대한 혁명가였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 등을 통해 사회주의 쿠바를 세계 사회주의자들의 추구하는 목표 지점을 세운 인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4년이 넘었다. 피델의 죽은 뒤 그 뒤를 이은 동생 라울 또한 사회주의 쿠바를 번영으로 이끌고 있다. 더 이상 피델 카스트로는 살아있지 않지만, 그가 이룩한 사회주의적 업적은 지금도 많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사회주의 쿠바는 앞으로도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호할 것이다.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알고 싶은 사람들에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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