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 66주년 글

지금으로 부터 66년 전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디엔비엔푸 요새가 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 1946년 프랑스가 함대로 하이퐁을 무차별 포격하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시작했을때, 전쟁의 승자가 베트남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본적으로 장비와 무기면에서 프랑스군에 딸렸던 베트민은 프랑스군으로 부터 노획한 것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것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가 지원했던 무기를 들고 싸웠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통일을 이룩하면서 그때부턴 중국에서 지원한 장비와 무기들이 들어왔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을 고전하게 만든건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뒤 프랑스의 앙리 나바르 장군은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 비행장을 세워 방어선을 구축했고, 16000명으로 구성된 프랑스 최정예부대를 투입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5만 명의 병사와 이를 자발적으로 돕는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의 도움을 받아 디엔비엔푸 요새를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었다. 1954년 3월 13일 200대의 대포가 디엔비엔푸 요새에 포격을 가했고, 프랑스군의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갔다.

5월 초 베트민군은 디엔비엔푸 방어선을 뚫는데 성공했고, 5월 7일 베트민은 카스트리 장군과 수십명의 장교를 포함한 11000명의 프랑스군 정예부대를 포로로 붙잡았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가 진 것이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구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를 종결 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던 대다수의 인민들에게는 영광스러운 승리였지만, 프랑스에 빌붙었던 반공주의적 민족반역자들에게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그들이 바로 남베트남의 지도부와 군관료들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이 주인으로 섬기던 프랑스가 물러나자 섬기는 주인을 미국으로 바꿨을 뿐이다. 따라서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후에 있을 베트남 전쟁이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가 아닌 ‘제국주의 대 반식민주의‘의 대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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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2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Что делать)’ 읽었다. 예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이었지만 다른 사회주의 원전들이 혼자서 공부하기는 좀 어렵듯이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도 쉽지 않은 책이기에, 이번에 노정협에서 하는 세미나에서 같이 공부하게 됐다. 솔직히 공부하면서 어렵긴 했지만, 다를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니 그래도 좀 더 많은 걸 얻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즉 레닌을 공부할 수 있었던 참으로 뜻 깊은 일이었다.

 

필자와 같은 또래인 20대 중에는 칼 마르크스와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심지어 명문대를 나온 이들 중에도 위대한 사상가의 이름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내 또래 중에는 꽤 있다. 이처럼 현실 사회주의 소련의 해체는 80년대 운동권의 몰락과 더불어 대학생들의 사상적 비무장화를 제도적인 틀 아래 자생적으로 창설했다. 이 때문에 20~30년이 지난 현재의 대학생들은 사회주의를 공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 아래 살며 어떻게 하면 이 사회에 적응하여 돈 많이 벌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실천적인 변혁 행동에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공동으로 집필한 독일 이데올로기 초반 부분을 보면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세계를 해석해 오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철학이란 한 가지 사물이나 세계를 해석하는 것만이 아닌, 그 사물과 세계에 존재하는 모순적 구조를 변혁하는 게 더 핵심적이라는 얘기다. 그렇다. 철학을 비롯하여 우리가 다른 여러 가지를 공부하는 이유는 세상을 변혁하고 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바지하기 위함에 있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가 마르크스와 레닌 그리고 사회주의를 학습하는 데는 여기에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필자가 읽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이 집필한 제국주의론(Imperialism the highest rank of Capitalism)’, ‘국가와 혁명(States and the Revolution)’과 더불어 레닌의 3대 주요 저작 중 하나다. 또한 이 저작은 당시 레닌이 존경했던 러시아의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체르니셰프스키의 동명 소설과 같은 제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닌이 집필한 무엇을 할 것인가는 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에 집필됐고, 1902년에 출판되었다는 점에서 3대 저작 중 가장 먼저 나온 책이기도 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이 가장 주요하게 비판하는 대상은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안에 있는 소위 에뚜아르트 베른슈타인류의 경제주의자들이다. 이들이 발행하는 신문 중 하나인 노동자의 대의에 대한 레닌주의의 비판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아주 날카롭게 비판된다. 레닌은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점증하는 빈곤과 프롤레타리아트화와 자본주의적 모순의 심화 등의 사실을 부정한다는 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적 모순속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프롤레타리아트화를 소위 개량주의적 성향을 가진 경제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원칙을 부정하고 있고, 이것이 사회주의 혁명에 해가된다고 판단했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그 시기 러시아와 국제 사회민주주의 내에서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경향이 형성되어 있음을 분석하고, 맑스주의를 수정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꾸어 국제적 노동운동을 소위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를 침투시키는 기회주의적 경향의 본질을 소위 러시아의 경제주의자가 독일의 베른슈타인주의, 프랑스의 말레랑주의, 영국의 노동조합주의등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따라서 레닌은 이런 기회주의적 조류를 극복해야 하고, 이들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이 승리할 수 없음을 책에서 밝힌다.

 

사실 이러한 레닌의 주장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운동권에도 어떤 면에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운동권의 현실은 대체로 경제투쟁에 집중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현대사회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복지가 예전보다 좀 더 갖추어진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기 이전에 마르크스가 가장 싫어했던 개량주의의 일환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복지가 발달했더라도 기업단위의 이윤추구를 봉쇄함으로서 개개인의 상호경쟁 등을 불필요하게 만든 생산양식 즉 사적소유의 철폐로 이어진 사회는 절대 아니다. 이것은 다른 유럽국가들보다 복지가 좋은 북유럽 또한 마찬가지다. 즉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어나는 각종 시위는 경제투쟁에 기반한 부분이 크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투쟁 자체가 의미가 없고 아예 중단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의 현실도 분명 반영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혁명적 실천력을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것인가?’를 보면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 투쟁의 커다란 형태로 두 가지(졍치 투쟁과 경제 투쟁)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즉 그 둘과 나란히 이론 투쟁도 인정한다. 여기서 레닌은 엥겔스가 쓴 독일 농민 전쟁이라는 책을 인용하면서 독일 사회의 예를 들었다. 그러면서 레닌은 엥겔스의 말이 예언되었다고 하며 몇 년 뒤 독일의 비스마르크 정권은 소위 사회주의자 특별법을 제정하여 독일 노동자들은 중대한 시련을 겪었었는데, 독일의 노동자들은 이에 준비했고 결국 승리하여 사회주의자 특별법을 폐지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던 점을 강조했다. 솔직히 제1장에 나온 이 장면은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오버랩됐다. 여기서 레닌의 주장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 앞에는 이보다 더한,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시련이 놓여 있다. 괴물과의 투쟁이 그들 앞에 놓여 있으니, 입헌 국가의 특별법이라는 것은 이 괴물에 비하면 그야말로 난장이에 불과하다. 이제 역사는 우리에게 당면 임무를 제기했다. 그것은 다른 어떤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당면 임무보다도 혁명적인 것이다. 이 임무를 실행한다면, 즉 유럽의 반동의 가장 강고한 보루일 뿐만 아니라 아시아 반동(이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의 가장 강고한 보루이기도 한 것을 파괴한다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가 70년대 우리의 선각자들과 같은 헌신적인 결의와 열정으로 그보다 천만 배 더 넓고 깊은 우리 운동을 고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선각자들, 70년대의 혁명 운동가들이 이미 얻은 바 있는 그 영예로운 칭호를 우리가 획득하리라 기대해도 될 것이다.”

 

출처 : 무엇을 할 것인가? p.34~35

 

이걸 또 한국의 현실에 반영하자면, 경제투쟁과 정치 투쟁 뿐만 아니라 이론적 투쟁을 통한 실천도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즉 노동운동과 더불어 사상적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는 투쟁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행위에 반대하는 투쟁도 노동계급의 의무로서 실천돼야 하는 사안이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투쟁을 목표로도 삼아야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것이 바로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통해 얻어야할 결론이다.

 

사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시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당 안에서의 역사적 맥락을 모르면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운 책이다. 솔직히 어떤 러시아 사람이 현재 대한민국의 여러 사회주의 단체들의 논쟁과 대립 그리고 단체와 사상적 경향을 전반적으로 깊게 이해하는 것은 힘들 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라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운동권 경향을 이해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레닌이 주장하는 사상적 맥락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레닌이 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앞으로도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변혁적 실천을 이루고자 하는 인물들에게 분명히 많은 것을 가르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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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오바마의 연설)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은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대략 200~300만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초래한 이 전쟁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고, UN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의 지상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하여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지키고자 했다. 당연히 UN군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차지한 것은 미군이었고, 19537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미국은 크고 작은 전투를 이어나갔다. 3년간의 전쟁에서 360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고, 2150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항공모함·전함·구축함·순양함 등을 포함한 371척의 함대를 한반도 주변 해역에 배치했었다. 그러나 미국은 승리하지 못했다. 설사 빈말로라도 그것이 승리라고 말한다 치더라도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권을 유지한 절반의 성공이었을 뿐이었다. 무승부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2013년 미국의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수도 워싱턴 DC에서 열린 정전협정 6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전쟁은 미국과 대한민국이 승리한 전쟁이다.”라고 하며 지극히 반공주의적인 연설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바마와 미국과 한국의 소위 보수주의자들이 믿고 싶어 하는 하나의 믿음이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믿음은 소위 오바마를 포함한 미국의 반공주의자들과 한국의 반공주의자들이 생각일 것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패배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숨기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전쟁이 1953년 휴전협정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필자는 이 전쟁 자체가 무승부이거나 양측의 반쪽짜리 승리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선 한국전쟁에서 누가 최종적으로 지고 이겼냐를 따질 생각이 없다. 필자가 이 글을 쓰는 진짜목적은 미국의 오만함 혹은 정세판단 부족으로 빚어진 전쟁 초기의 패배 및 후퇴를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한국전쟁 시작부터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의 미군의 전황을 다룰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소련과 견줄만한 군사력을 길러낸 미국이 한국전쟁 초기 신속한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동맹국인 한국에서 사실상 끝자락까지 후퇴한 것은 20세기 미국 전쟁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패권을 휘두르게 된 것은 19459월이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를 패망시킨 미국과 소련은 38선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분단시켰다. 한반도 이남에 절반의 패권을 장악했던 미국은 미군정이라는 형태로 통치를 했고, 일제시기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승만을 지원했다. 이런 미군정의 지원으로 1948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 T-34 탱크)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미군정기 전라도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던 인물로 확실히 한반도 분단론자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 단독정부 수립을 통해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소위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을 주구장창 주장했다. 북진통일론이란 말그대로 무력을 통해 북한정권을 정복해서 통일을 이룩하자는 주장이다. 1950년 미국은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이것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는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미군 또한 한반도에서 점진적인 철수를 감행했고, 한반도 이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한반도 이남에 남아있던 미군사고문단 500명뿐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지원을 포기한 것은 아니어서 대포나 트럭같은 군수물자들을 한국군에게 지원했는데, 스탈린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북한군과 비교해보았을 때 매우 열악했다. 이것은 결국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력에 큰 공백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를 모르고 있던 이승만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군대의 규모나 훈련, 장비, 기술 면에서 떨어져 있던 한국군은 인민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38선에 있던 한국군 주력부대를 궤멸시키고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이승만 정부가 도망치면서 폭파해 놓은 한강 다리를 가설하는데 시간을 지체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한국군 측 중부전선군을 무너뜨리고 춘천과 홍천을 점령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개입했다. 1950627일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은 유엔 안보리에서 북의 군사적 행위를 침략으로 규정했다.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하던 628일 미극동공군은 작전을 개시했고 629일에는 172회나 출격했다. 629일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일본 도쿄를 떠나 비행기를 통해 전선을 둘러본 뒤, 수원에 도착하여 이승만과 회담한다. 195072일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하게 된다.

(한국전쟁 최초로 전투에 투입된 지상부대인 스미스 부대)

 

미국의 즉각적인 개입으로 인민군 측 Yak 전투기들이 대다수 파괴되었고, 제공권은 미국이 장악하게 됐다. 19507월 초 미군이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B-26 폭격기와 F-80 전투기가 한반도 상공을 뒤덮었다. 72일 미군의 지상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이후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제24 보병 사단 1개 대대가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오산으로 보내졌다. 75일 미국의 스미스 부대는 제107전차연대를 앞세운 인민군 제4사단과 전투를 치르게 되었는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미스 부대의 전투원 504명 중 최소 150명이 전사했고, 31명이 실종됐다. 결국 스미스 부대는 T-34 전차를 앞세운 인민군에 밀려 후퇴했다.

(대전 전투당시 포격 지원을 하는 미군)

 

거침없는 진격을 해나가던 인민군은 해방 5주년인 815일까지 임시수도 부산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 그들에게 있어 충청도에 있는 대전을 점령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50710일 미군과 한국군은 대전에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그로부터 4일 뒤는 714T-34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 4개 사단이 포병의 지원하에 공격을 했고, 미군이 가지고 있던 2.36인치 바주카포는 소련제 탱크를 파괴하는데 역부족이었다. 716일 한국군과 미군이 구축해 놓은 대전 방어선은 무너졌고, 19일에는 인민군이 미 제24사단의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대전에 투입되었던 미군 사단을 붕괴시켰다. 여기서 미군 지휘관이던 윌리엄 딘(William F. Dean) 소장을 포로로 붙잡았고, 최소 2000명 이상의 미군 사상자가 속출했다.

(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던 윌리엄 딘 소장)

 

대전을 함락시킨 인민군은 그 기세를 몰아 한국군과 미군을 전선 전역에서 밀고 내려갔다. 대전 점령 이후 인민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전라남도 광주를 점령했으며, 726~27일 여수까지 점령했다. 이렇게 되면서 한국군과 미군은 경상도와 낙동강 쪽으로 후퇴하게 됐다. 19507월 말 경북 상주에 투입되었던 3600명 규모의 흑인 병사들은 인민군과의 전투에서 무기와 장비를 버려둔 채 도망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19507월 말 미군과 한국군은 전선에서 92000명 규모(이중 절반은 미군이다.)로 인민군보다 병력에서 우위를 점하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계속 퇴각했던 것이다. 병력 규모 면에서 인민군을 압도하게 되었던 것은 부산항을 통해 병력과 물자지원을 끊임없이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렇게 지원받은 병력 중에는 미국의 제1기병사단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끊임없는 병력과 물자지원에도 불구하고 미군과 한국군은 19508월 워커 라인(Walker Line) 즉 낙동강 전선을 형성하게 됐다.

 

8월 초 낙동강 전선이 형성된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9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그곳에서 교착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즉 미군과 한국군은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전세를 뒤집을 반격 한번 거의 해보지 못 해봤다는 얘기다. 인민군이 수도 서울을 점령한 이후부터 낙동강 전선이 형성될 때까지의 전투 과정은 미군의 작전 실패 및 패배의 기록이다. 이런 미군의 실패는 인민군의 전투능력을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져 과소평가했다는 점에 기인한다. 위에서 상술했던 스미스 부대 같은 경우에는 인민군이랑 교전하기 전 인민군은 공포에 떨면서 후퇴할 것이다.”라고 대다수의 미군은 생각했었다. 실제로 오산에서 공포에 떨면서 후퇴하게 된 쪽은 인민군이 아니라 미군이었다.

(낙동강 전선)

 

백인이 대다수이던 미군의 경우 북한군을 열등한 노란색 인종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것은 유색 인종과 그 문화를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켰던 역사적 경험도 작용했다. 그리고 이런 인종차별은 미군내에도 있어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12%가 흑인이었지만, 미군은 흑인들의 부대를 백인들과 분리했다. 그랬기에 인종차별을 당한 흑인 부대는 전투력이 매우 저하된 상태에 놓여 위에서 상술한 상주 전투에서처럼 후퇴하기 바쁜 경우도 있었다. 또한 미군은 후퇴하는 과정에서 노근리라는 마을에서 대량 3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동양에 대한 무지도 여기에 반영되었다.

 

거기다 초반에 미군이 마주했던 인민군 병력은 전투 경험이 많은 정예부대였다. 한국전쟁 초기 인민군 선봉대에 섰던 부대는 과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편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공산당 측 부대였다. 이들은 중국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일본 제국주의 군대와 미국의 지원을 받던 중국 국민당군 부대에 맞서 싸워 혁명에 승리하는데 큰 기여를 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인민군에게 밀렸던 이유는 허술한 군대를 보낸 이유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미군 내부 문제가 심각하게 존재했던 것과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에 빠졌던 것도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주제는 소위 보수세력들이 많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렇기에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이나 과오를 비판하는 건 색깔몰이 당하기 아주 쉽다. 따라서 브루스 커밍스와 같이 한국전쟁을 좀 더 넓은 시각에서 보는 시도도 필요하다. 그 시도 중엔 전쟁 초기 미군의 실책과 오만함을 분석하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미국의 6.25 전쟁사, 정길현, 북코리아,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책과 함께, 2005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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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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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여름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대한민국 대법원의 기존의 강제 징용 관련 판결 이후 일본이 대한민국 국내 기업에서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 수출을 규제하면서 시작된 한일갈등은 대한민국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반일 불매운동에 참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반일불매운동이 한참이던 작년 여름 국내의 서점들에선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서적들이 인기를 끌었다. 그 책들 중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흥망을 다룬 존 톨랜드(John Toland)일본 제국 패망사(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도 있었다. 1400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의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반일 불매운동이라는 정치적 흐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 책을 팔지 않은 서점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워낙 많은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보니 필자도 이 책에 흥미를 느꼈다. 지난 학기 대학 생활을 열심히 했던 필자는 이 책을 읽고 싶었지만, 압도적인 분량과 비싼 가격 그리고 학교생활에 밀려 읽지 못했고, 올해 2월이 되서 읽게 됐다.

 

필자가 태평양 전쟁이라는 주제를 접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컴퓨터 게임을 통해서였던 것 같다. 중고등학생 시절 필자는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FPS 게임인 <메달 오브 아너 퍼시픽 어썰트: Medal of honor Pacific Assault><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Call of Duty World at War>를 아주 재밌게 했었는데, 이 게임들은 태평양 전쟁의 신화화된 미군의 이미지와 태평양 전쟁의 분위기를 느끼는 데는 충분했던 것 같다. 10대 시절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던 필자는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생겨 영화로는 <진주만: Pearl Harbor>, <핵소고지: Hacksaw Ridge>,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 <아버지의 깃발: Flags of Our Fathers>, <윈드토커: Wind Talker> 그리고 최근에 개봉했던 영화 <미드웨이: Midway>까지 해서 여러 편의 태평양 전쟁 영화를 감상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비록 드라마이긴 하지만, HBO에서 제작한 <더 퍼시픽: The Pacific>이다. 태평양 전쟁을 주제로 한 몇 편의 다큐멘터리로 감상했는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13부작짜리 다큐인 <태평양 전쟁 비사 일본침몰>이다.

 

위에서 상술한 대로 게임이나 영화, 드라마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태평양 전쟁사를 알게 되었지만, 정작 이것을 주제로 한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다. 소방서 공익 시절 영국의 전쟁 사학자 존 키건이 쓴 제2차세계대전사를 읽어보긴 했지만, 그 책 자체가 태평양 전쟁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다른 주제들 보다는 훨씬 소홀히 다루었기에 태평양 전쟁을 공부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국내에서는 태평양 전쟁 자체를 통사로 다룬 책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쇼와 육군을 포함한 몇몇 책들이 있었지만, 대체로 일본인들 시각에서 일본의 패망을 분석한 책이었다. 따라서 이번에 거의 2~3달에 걸쳐서 읽은 존 톨랜드의 일본 제국 패망사는 참으로 의미가 크다.

 

책은 1936년 기타 잇키를 포함한 일본의 극우 세력들이 주도했던 2.26 쿠데타부터 시작한다. 2.26 쿠데타의 실패에서 1937년 중일전쟁의 빌미를 제공한 노구교 사건으로 넘어간 뒤, 난징 대학살에서의 일본군의 만행을 잠시나마 언급한다. 그 이후엔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해 달리던 국제정세 속에서의 일본의 외교관계와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까지의 국내 및 국외적 상황과 이유를 조명했다. 이런 서술 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과 동맹을 맺는 과정, 일본과 소련이 중립조약을 체결하게 된 과정, 미국이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나빠지는 과정 등 그리고 그 사이에서의 일본의 외교활동과 미국과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를 존 톨랜드 특유의 매끄러운 문장으로 알기 쉽게 사건을 설명한다. 책의 1/3 내지는 1/4에 와서는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과정을 얘기하고, 그 이후 필리핀 전투에서의 패배와 자바 해전에서의 패배를 포함한 영미 세력의 패배를 박진감 있게 서술한다.

 

그러다가 이 책은 19424월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단행했던 두리틀 공습을 다루더니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 해군의 대패를 설명하고, 솔로몬 군도 즉 과다카날 전투에서의 일본군 패배를 아주 심도 있게 다룬다. 과다카날 전투를 끝낸 뒤, 책은 빅3(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의 테헤란 회담을 다루면서 이들의 흥미진진한 협상과 개인적 대화를 아주 흥미롭게 파헤쳤다 그다음부터는 1944년으로 넘어가 마리아나 상륙과 사이판 전투, 레이테만 해전 그리고 필리핀에서의 전투를 상세하게 다룬다. 일본의 패망해가는 시점인 1945년에 있던 얄타회담과 이오지마 상륙작전, 도쿄 폭격, 오키나와 전투, 포츠담 회담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까지 아주 섬세하게 다룬다. 일본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는 것과 19459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국에게 항복을 선언하는 것으로 책은 내용은 끝난다.

 

오래전부터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일본이 자신들보다 훨씬 경제 및 군사적으로 강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는지는 정말 의문이었다. 그 이유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지도부도 자신들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질 거라는 사실을 대체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 독일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것 하고는 분명히 달랐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것은 본인들이 질 거라는 예상 및 전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6개월 내지는 1년 내외로 소련은 독일군의 우수한 화력에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이런 전망을 내놓은 것은 비단 독일 뿐만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과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형성하게 되는 영국이나 미국도 이와 같은 전망을 내놓기도 했었다. 따라서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패배를 예상하고 감행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은 패배를 전망하며 천운을 걸고 감행한 짓이었다. 심지어 일본의 해군 함대를 이끌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도 미국과의 전쟁이 장기전이 되면 질 거라는 생각했다. 거기다 일본이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아래 일으켰던 아시아에서의 침략 전쟁 또한 미국에서 수입하는 석유에 의존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에서 고전하던 일본군은 1940년과 1941년에 이르러 미국으로부터 석유 수입에 경제적인 제재를 받았다. 미국이 일본에게 행한 석유 수입 제재는 일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큰일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아예 미국을 굴복시켜 유리한 조건을 얻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미국 또한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주일 미국대사로 있던 조셉 그루는 1941년 당시 미국에게 일본이 미국과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보로 보냈다.

 

일본이 생각하고 있던 진주만 기습 공격의 진정한 목표는 미해군을 무력화 시켜 태평양 일대를 단기간에 장악하고 더 나아가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여 일본이 유리한 조건을 차지한다는 계산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본은 하와이에 정박해있던 미해군의 주력 함대들을 격파해야 한다 생각했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군 함대 18척이 침몰하고나 심하게 파손되었고, 항공기는 188대가 파괴되었으며 159대가 손상되었다. 이 공격에서 2403명의 미국인이 죽었다. 그에 반해 일본군의 손실은 항공기 29대와 소형 잠수정 5척 파괴 항공기 승조원 45명과 잠수정 승조원 9명이 전사했고, 사카마키라는 일본군 소위 한 명이 미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진주만 기습 공격은 일본측에게 대대적으로 선전거리가 되었다. 일본은 이를 국민들에게 우리가 미국과 영국에게 혼쭐을 내줬다는 식으로 보도했다. 일본 국민들은 이를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진주만 기습 공격에서 가장 큰 패착을 놓았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 가지고 있던 주력 항공모함 3척을 파괴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결국 1942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로 이어졌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은 주력항모 3척 중에 요크타운호 1척이 침몰당했지만, 일본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는 지름길이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의 일본군은 참으로 끈질기고 집요한 집단이었다. 예를 들어 과다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물에다 독을 타는 전술을 사용하기도 했고, 무모한 반자이 돌격(Banzai Charge)을 감행하기도 했으며, 폭탄을 매고 미군에게 뛰어들어 자폭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지상전에서도 미군에게 밀렸다. 예를 들어 과다카날에서 있던 한 전투에선 일본군 전차 9대가 미군 포병들의 반격으로 파괴됐는데, 그중 강을 건너 살아남은 한 대도 75mm 대전차포에 파괴됐으며, 600명의 일본군 보병이 전사했다. 과다카날에선 일본군 8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미군 35명이 전사하고 75명이 부상당한 전투도 있었다. 드라마 <더 퍼시픽>에도 나오는 장면이지만, 194210월 일본군은 야간에 대대적인 반자이 돌격을 감행했지만, 수천 명이 전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결국 과다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은 25000명이나 전사했고 이것은 미군의 전사자 비율보다 몇 배는 훨씬 더 많은 수치였다.

 

그 외에도 이 책을 읽다보면 일본군이 섬에 상륙한 미군에게 아주 처참하게 패배하는 장면들이 많이 나온다. 1943년 타라와 전투에선 미군 1000명이 전사했지만, 일본군은 최소 5000명이 전사했다. 필리핀 탈환 작전에서도 일본군은 압도적으로 미군의 화력에 밀렸다. 1945년 태평양 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마에다 능선에서의 교전에서 미군은 탱크와 장갑화염방사차의 지원을 받았는데, 여기서 500명의 일본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은 초반에 100명이 넘는 군인들이 전사하더니 병력 1/3을 잃기도 했었다. 이처럼 일본군은 지상전에서 미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했고, 이것은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던 미군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났다.

 

이 책은 일본군의 잔인한 전술이나 비인간적인 전쟁 범죄를 생각보다 아주 잘 다루고 있다. 위에서 잠시나마 언급했던 난징 대학살에 대해 20~30만 명이 중국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는 사실을 잠시나마 언급하며 일본군의 잔인함을 강조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맥아더가 경험했던 필리핀에서의 패배는 수천 명의 미군이 일본군의 포로로 잡히게 되는 결과가 나타났는데, 여기서 일본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포로학대 및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들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다 죽어나갔다. 일본군은 총검으로 지쳐서 쓰러진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죽이는데 어떠한 인간적인 고민이 대체로 없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전세가 역전되면서 자국 국민에게도 미군을 상대로 자살하도록 강요했다. 대표적으로 사이판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가 그랬다. 2200여 명이나 되는 일본의 민간인들이 사이판 전투에서 쓸모없이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무모한 짓거리를 보던 한 미군 장교는 눈물을 흘리며 이런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책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그녀에게 시체들을 보고 싶은지 물었다. 그리고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두 흑인 병사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절벽으로 데려갔다. 절벽 아래로 시체들이 무리를 지어 물가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여자는 자기 몸에 두 아이를 끈으로 묶은 채 죽어 있었다. 혼잣말을 하듯이 장교는 일본인들은 왜 자살을 하죠?”라고 물었다. 그의 볼에는 눈물이 흘렀다.

 

출처 : 일본 제국 패망사 p.801

 

대략 2달간 전개된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은 자국 민간인들에게 미군을 악마로 그렸는데, 이러한 선전은 일본인들로 하여금 미군을 아주 두려워하게 만들며 목숨을 끊도록 강요했다. 수만 명의 오키나와 사람들이 미군과 일본군이 전개한 전투에서 사망했고, 일본군의 잔인한 수법으로 많은 민간인들이 죽어나갔으며 자살을 하게 됐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치르게 된 마지막 전투는 정말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고, 미군 또한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게 됐다. 물론 오키나와 사람들 중에는 죽기보단 미군에게 항복을 한 민간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무의미하게 목숨을 잃기 보단 살고자 했다. ‘일본 제국 패망사에선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투항한 사람은 나카소네 외에도 많았다. 다음 주가 되자 최소 3천 명의 군인과 노무부대가 미야기 오장의 호소에 귀를 기울였다. 오장과 같이 자원한 다른 일본인들이 동료들을 구하러 계속 땅속 깊이 들어갔다. 나오기를 거부한 이들은 화염방사기와 폭약으로 동굴에 갇혔다. 9000명의 군인들이 죽었다. 72, 오키나와 작전은 끝났다. 3개월 동안 12520명의 미 육군, 해병대, 해군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태평양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투였다. 일본은 11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 수도 유례없는 비율이었다. 양국의 군대 사이에 낀 약 75000명의 무고한 남성, 여성, 아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게다가 헛된 희생이었다. 일본은 본토 밖에서 벌어진 마지막 주요 전투에서 패배했다.”

 

출처 : 일본 제국 패망사 p.1100

 

일본군은 미군을 상대로 이해하기 힘든 작전들과 무모한 인명 피해를 강요하고 초래하기도 했지만, 항복하기를 수치스럽게 여기던 일본군들 중 살아서 포로가 되길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1944년부터 일본은 미군 함대를 상대로 소위 가미카제(Kamikaze)’라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게 됐다. 이 전술은 항공기에 탑승한 일본군 조종사가 폭탄과 기름을 실은 비행기를 미군 항공모함이나 군함에 돌격하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이들 중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고민을 하는이들도 분명 있었다. 자살 돌격하려던 비행기가 격추되어 공중에서 낙하산을 매고 탈출한 이들은 미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었다. 그 외에 지상에서 싸우던 일본군들도 포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모든 일본인들이 소위 명예로운 죽음(Honorable Death)’를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군에서 지휘가 높은 사람들은 명예로운 죽음이라 하여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검으로 자신의 배를 찌르며 죽어갔고, 머리에다 권총을 쏴서 죽기도 했다. 이러한 죽음은 일본인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자살 방법이었다. 이런 자살 방법은 1945815일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계속됐다.

 

책의 후반 부분에 와선 포츠담 회담과 일본이 항복하기 까지를 아주 섬세하게 다룬다고 위에서 상술했다. 후반부를 읽다보면 계속 드는 생각이 있다. 그 생각은 바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것이다. 미국이 떨어뜨린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최소 20만 명이 사망했다. 아무리 태평양 전쟁을 끝내기 위한 방법이었다지만, 원자폭탄 투하는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학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군사 시설이 거의 없는 도시에다 투하했다는 점에서 도덕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위에 상술된 오키나와 전투에서 미군은 무수히 많은 사상자를 냈고, 일본의 가미카제 공격으로 인한 미해군의 피해도 극심했다. 실제로 미국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처럼 일본 본토에 상륙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미군은 이 상륙작전에서 최소 50만에서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잃을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일본이 항복하기 전 기준으로 일본에는 생각보다 많은 병력이 존재했다. 비록 대부분이 훈련기에서 급하게 개조된 것이었지만 10,000대가 넘는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53개의 보병 사단과 25개의 여단 그리고 총 235만 명의 병력이 일본 본토에 남아 미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려고 했다. 이들은 특수 위수부대 25만 명 그리고 민간의용대 2800만 명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민간의용대의 경우 사용할 무기들은 화승총과 죽창, 봉건시대의 활과 화살이 전부였다. 쉽게 말해 민간의용대는 무장도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미군이 일본에 상륙했더라면 시간은 오래 걸릴지 모르더라도 분명히 일본을 항복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일본이 원자폭탄을 빨리 투하한건 소련의 태평양 전쟁 참전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 같다. 스탈린이 히틀러와 전쟁을 치르고 있어 태평양 전쟁에 참가하지 못했을 때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청했었다. 하지만 루스벨트 사망 이후 해리 트루먼이 대통령자리를 이어받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하지만 독일이 항복한 이후 미국과 소련의 사이는 보다 멀어졌다. 여기서 미국은 소련이 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이것이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이어졌던 것 같다.

 

이유를 떠나서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일본 제국은 1945815일 항복을 선언했다. 공식적인 항복 절차는 9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밟게 됐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은 참으로 참혹하고 잔인했으며, 양측의 병사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에서 상륙작전을 했던 미군은 쥐, 거미, 모기, 지네, 거머리, 대형 도마뱀, 전갈 그리고 악어까지 있는 악조건 속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미군은 일본군 양측은 말라리아같은 질병에 노출되기도 했다. 그래서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을 다룬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더 퍼시픽>의 분위기가 다른 것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다. 보다 자세히 말하자면 35년간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한국의 경우 1930년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징용으로 끌려가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여성들의 경우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팔려가 끔찍한 성범죄를 경험했다. 무수히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으로 태평양 전역에 끌려갔다. 미크로네시아와 같은 남양군도와 파푸아뉴기니 같은 태평양에 있는 섬들부터 시작하여 중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심지어는 사할린까지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 전쟁은 우리에게도 상처를 준 전쟁이었다. 그래도 책 마지막에서 시게미쓰 마모루가 언급된 구절에서 수년 전 상하이에서 한 암살자의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었다.”라는 구절은 참으로 반가웠다. 이것은 윤봉길 의사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감수자의 주장대로 태평양 전쟁 통사로써 나온 책을 찾아보긴 어려운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 책은 많은 분량과 방대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저자 특유의 매끄러운 필력으로 내용을 이해하는데, 매우 쉽다. 번역도 아주 좋다. 책을 읽는데 거의 2~3달이 걸렸다. 이 책을 읽어가며 다른 책들도 읽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존 톨랜드 특유의 매끄러운 필체와 흥미진진한 전개 때문에 이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책을 읽으면서 필자가 지금까지 해본 태평양 전쟁 게임과 감상한 영화들 그리고 다큐멘터리까지 다 생각이 났었다. 그래서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태평양 전쟁을 제대로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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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기념하는 베트남측 포스터, 대다수의 북베트남인들은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973123일 북베트남의 외무장관인 레둑토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파리평화조약(Paris Peace Accords)’을 맺었다. 이들이 맺은 파리평화조약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완벽히 철수하는 것을 뜻했다. 파리평화조약을 맺으면서 베트남에 있던 미군은 완벽히 철수하게 됐다.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 측에 포로로 잡혔던 미군들은 전부 다 석방됐고, 1973329일에는 마지막으로 몇 안되는 미군이 고향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남베트남에는 20년 전 미국이 거부했던 제네바협정에 따라 대략 50명의 미군사고문단만이 베트남에 남았다. 즉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년간의 끈질긴 투쟁 끝에 미군을 철수시킨 레주언(Le Duan)을 비롯한 북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는 민족 영웅인 호치민(Ho Chi Minh)이 평생을 이루고 싶어 했던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1973년 파리평화조약을 맺어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긴 했지만, 미국은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 정권을 경제 및 군사적인 지원을 계속하고 있었고, 남베트남 정권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412월 중순 수도 하노이에서 14명 이상의 노전사들이 팜구라오가 33번지의 한 건물에 모였다. 이들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반티엔둥 장군, 반티엔둥 장군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로 1975년 호치민 캠페인 당시 북베트남군을 지휘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전설적인 명장인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은 남베트남 인민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저항감이 없을 것이라고 예견하면서 해방투쟁에 차질이 없도록 조심하자고 당부했다. 북베트남군 총사령관인 반 티엔 둥(Van Tien Dung) 장군은 최근의 군사 상황을 보고했고, 이 보고를 들은 참석자들은 반 티엔 둥 장군의 군대가 남베트남의 푹롱(Phuoc Long) 성에 대규모 공세를 취할 것에 대해 거론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예비 점검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파리 평화 조약이 체결된 이후에도 남베트남 내부에선 베트콩과 남베트남군 사이의 전투가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평화 조약 이후에 벌어진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한달에 평균 1000명씩 전사했고,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무능함을 보였다.

(푹롱성 전투 지도, 푹롱성의 함락은 남베트남에게 있어서 1972년 부활절 공세 이후 처음 있는 성 함락이었다.)

  

197412월 중순 북베트남군은 시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던 푹롱 성을 공격했다. 북베트남군은 시험삼아 공격한 푹롱 성을 공격한 지 3주만인 197517일 성도 푹빈(Phuoc Binh)을 점령하면서 승리했다. 푹롱 성이 북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당하자 미 국무부는 하노이가 파리평화협정을 위반했다.”라고 하며 비난했지만, 미국의 군사적인 개입은 전혀 없었다. 남베트남측이 성 하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은 1972년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북베트남군의 푹롱 성 점령 이후 몇 주일 사이에 대략 15만 명의 북베트남군이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을 통해 내려와 남베트남 국경지대에 주둔했고, 남베트남의 44개 성의 중심지 대부분은 베트콩이 장악한 상태였다. 또한 푹롱 성을 장악함으로써 북베트남군의 사령부는 남쪽 깊숙이 호치민루트 근처에 산재해 있던 30만 명의 병력을 한데 모을 수 있었다.

(부온마투옷 전투 지도, 중부고원지대 닥락 성에 있는 부온마투옷은 남베트남군의 핵심 거점이었다. 부온마투옷의 함락은 남베트남군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병력을 모은 북베트남군은 19753월 남베트남군의 거점인 부온마투옷(Ban Me Thuot)를 점령하고자 했다.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던 부온마투옷은 남베트남군의 전략 요충지였다. 이곳이 함락되면 남베트남군의 전반적인 방어선은 무너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남베트남군은 대략 3만 명 이상의 북베트남군이 부온마투옷에서 몇 마일 외곽에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1975310일 반 티엔 둥 장군의 군대는 부온마투옷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었다. 북베트남군의 대포와 로켓포가 공격을 가하자 남베트남군 23사단 본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북베트남군은 비행장을 점령했다. 북베트남군이 공격하자 포위당한 남베트남군은 포위당한 지 30여 시간 만에 항복했고, 공격 시작 5일 만인 315일에는 북베트남군이 부온마투옷을 완벽히 장악했다.

 

남베트남군의 전략 요충지인 부온마투옷이 공격 5일 만에 함락되자, 북베트남군은 중부 해안 지역의 거점들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남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부온마투옷을 향한 공격이 시작된 지 5일 만에 중부 고원 지대를 포기한다고 통보했다. 이런 통보가 있은 지 2일 후 남베트남 정규군은 명령에 따라 플레이쿠와 콘툼을 버리고 후퇴했다. 이렇게 되자 북베트남군은 전투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1975321일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의 북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공격했다. 이들은 옛 황궁의 보존된 도시인 후에를 포위했고, 325일 후에를 점령했다. 구정 공세 당시 북베트남군이 28일간 후에를 점령했던 이후 6년 만에 다시 점령한 것이었다.

(부온마투옷 전투 당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군 전차)

 

반 티엔 둥 장군은 10만 명 이상의 남베트남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던 다낭에 35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당시 다낭에는 피난민들이 몰렸는데, 미 국무부는 민간 비행기를 이용해서 10만 명의 남베트남군과 피난 가는 민간인들을 인솔했다. 후에가 함락된 이후 남베트남군 사령관은 도주해 버렸고, 나머지 장교들도 군복을 벗어던지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1975330일 다낭도 후에처럼 함락되었고, 다낭을 지키고 있던 10만 명의 남베트남군 병사들 대부분이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다.

 

19754월이 되었을 무렵 남베트남 국토의 절반은 북베트남에 점령당했고, 남베트남 병력 15만 명은 전투부대의 기능을 상실했다.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한 지 1달도 안 되어 남베트남의 절반을 차지한 북베트남측은 호치민의 생일인 519일까지 수도 사이공에 입성할 것을 목표로 삼게 되었다. 4월 첫째 주에 접어들자 해안 거점들이 하루에 하나씩 함락됐다. 처음에는 퀴논(Qui Nhon)이었고, 다음에는 투이호아(Tuy Hoa) 그 다음날에는 나짱(Nha Trang)을 북베트남군이 접수하게 됐다. 북베트남군의 진격에 속수무책이 되었던 남베트남군은 중부고원지대의 끝자락 중심에 있는 쑤언록(Xuan Loc)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쑤언록 전투, 쑤언록은 베트남 통일 전쟁에 있어 남베트남군이 지키고 있던 마지막 방어선이다.)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레민다오 장군, 남베트남의 레민다오 장군은 쑤언록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다. 물론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방어선은 무너졌다.)

 

197549일 반 티엔 둥 장군 휘하의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마지막 거점지라고 할 수 있는 쑤언록을 점령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4만 명의 북베트남군 병력이 공격에 동원되었지만, 쑤언록을 지키고 있던 남베트남군의 제18사단장 레민다오(Le Minh Dao) 준장은 전력을 다해 방어에 나섰다. 북베트남군은 쑤언록을 단기간에 함락시킬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투는 421일까지 계속됐다. 쑤언록이 함락된 이후 북베트남군의 총 공세가 시작된 지 44일 만인 23일에는 남베트남 측 44개성이 완전히 함락되거나 포위됐다. 즉 수도 사이공만이 남았던 것이다

(후퇴하며 남베트남군이 버리고 간 군복과 군화들)

 

(남베트남군 전선 붕괴 당시의 남베트남 지도, 부패하고 무능했던 남베트남군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서 상대가 안됐다.)

 

1975421일 남베트남의 대통령이었던 응우옌반티에우는 몰래 떠났다. 과거 정상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모은 금괴 2톤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26일에는 1963년 응오딘지엠을 축출했던 두옹 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정권을 이어받게 됐다. 그러는 사이 북베트남군은 425일 사이공 근처 30마일에 펼쳐진 방어선을 휩쓸었고, 남베트남에 있던 각국의 대사관들도 하나둘 철수하기 시작했다. 북베트남군은 각 방면에서 포위를 좁혀가며 수도 사이공을 압박했다. 이렇게 사이공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미국은 소위 속풍 작전(Operation Frequent Wind)’을 전개하여 남아 있던 미국인들을 헬리콥터에 태우고 도망쳤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떠나는 미국측의 헬리콥터)

 

1975430일 오전 75311명의 미국 해병대원이 마지막 미군으로서 대사관의 성조기를 가지고 베트남을 떠났다. 반 티엔 둥 장군의 병력은 아무런 저항 없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입성했다. 사이공에 입성한 북베트남군은 질서정연하게 줄을 맞추어 사이공 시민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거리를 행진했다. 오전 11시 북베트남군 측의 ‘59식 전차(Type 59 tank)’ 한 대가 대통령궁의 문을 부수고 들어섰다. 여기서 병사 1명이 발코니로 뛰어올라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의 깃발을 게양했다. 이 역사적인 장면은 서방 언론에 의해 생중계됐다. 이날 대통령궁에 있던 두옹 반 민 장군은 항복을 선언했고, 이렇게 해서 10000일간 지속되던 베트남의 민족해방전쟁은 혁명 군대와 민중의 승리로 끝났다.

(수도 사이공의 대통령궁 철문을 부수고 진입하는 북베트남군 측의 59식 전차)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던 이유 중 하나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에 따른 동남아시아 공산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도미노 이론을 철저하게 믿고 있었던 미국은 남베트남 정권이 부패하고 반민중적인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1963년 응오딘지엠 정권이 내부 쿠데타로 무너진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었다. 이처럼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는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의 붕괴를 막으려고 1964년에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남베트남 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심하고 반민중적인 정권이었기에 만약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첫번째 탱크를 따라 대통령궁에 입성하는 북베트남과 베트콩측 탱크들)

 

이는 현재의 역사학계와 군사학계를 막론하고 대다수의 학계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는 일반적인 평가다. 이를 보여주듯이 남베트남 정권은 미군이 철수한지 2년 만에 붕괴됐고, 북베트남군이 전면적인 총공세를 가한지 1~2달도 안되어 방어선이 붕괴됐다. 1972년 북베트남군이 소위 부활절 공세를 감행했을 때도 남베트남군은 사실상 붕괴 직전의 위기까지 몰렸었지만 간신히 막아냈다. 그러나 이는 B-52 폭격기를 동원한 미군의 항공 지원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이지 절대로 남베트남군이 잘 싸워서가 아니다. 거기다 남베트남 정권과 군대의 핵심인사들은 변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들 중 대다수가 프랑스 식민지 시기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인물들이었다. 남베트남군 장교나 사령관들 대다수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에서 복무했던 인물들이다.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던 언론인이자 민주화 운동가인 리영희는 남베트남 정권과 북베트남 정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리고 있다.

(1975년 5월 7일에 열린 베트남 전쟁 승전 기념 퍼레이드, 통일을 이룬 베트남인들이 가장 먼저 기억한 인물은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호치민이었다.)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프랑스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프랑스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실례로, 200만 사이공 정권의 소위 자유반공 군대의 장교단에서, 과거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 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 사람이 있었을 뿐이야. 이 중령에 관한 얘기를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봤는데,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어쨌거나 남베트남 군대는 실질적으로 외세의 용병이나 괴뢰군대였어.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콩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콩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과거에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 운동가, 간호사, 각급 학교 교사 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단 한 사람도 식민지 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사실 하나만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소위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 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출처 : 대화 p.349~350

 

따라서 북베트남 측이 승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베트남이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크고 참혹했다. 그러나 그들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이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다.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에 헌신했던 호치민은 1969년 투사로서의 삶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신을 계승한 북베트남의 공산당 지도부는 호치민의 유지(遺旨)를 받들어 그가 사망한 지 6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다.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는 결코 패망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제국주의 국가 프랑스를 계승한 미국과 싸워 민족해방전쟁에서 승리한 것이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Ten Thousand Day War in Vietnam 1945~1975)’의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책 마지막 구절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가 책 마지막 장에 쓴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겠다.

(베트남 해방 승리 기념 포스터)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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