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이승만과 임정 탄핵 그리고 이봉창 윤봉길 의거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하여 임정요인들에게 환영 받았던 이승만,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와 노선적 갈등이 있었지만 그가 상해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해주었다.)    

 

1919년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독립운동사에서 화합의 상징이 아닌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의 상징이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선임을 둘러싼 갈등에서 외무총장인 박용만과 교통총장 문창범이 취임을 거부한 데에 이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이회영과 신채호 같은 무장투쟁론쪽 인물들이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갔다. 또한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의 길을 열었던 이동휘는 레닌이 지원한 독립자금 관련한 문제를 독자적으로 처리하다 물의를 일으켜 1921년 임시정부를 떠나게 됐다.

 

1920년 당시 미국 수도 워싱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그해 125일 상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의 소개로 프랑스 조계에 위치한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크로프트 목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1213일 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고, 처음으로 국무위원, 의정원 의원들과 상면했다.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던 이승만이었지만, 그가 도착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갈등은 뒤로하고 환영파티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그런 환영도 잠시였다.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국무총리였던 이동휘가 사표를 제출했고, 그 뒤를 이어 안창호와 김규식 등이 차례로 임시정부를 떠났다. 당시 임시정부는 이승만이 상해에 거주하게 됨에 따라 외교론을 고수했는데, 이런 이승만의 외교독립론은 많은 이들에게 분열을 일으켰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만든 두 얼굴의 이승만에 따르면 그의 외교독립론은 다음과 같다.

(당시 이승만의 진정한 목적, 그는 독립자금을 횡령하여 자신의 사적인 영역에 사용했다.)

  

우리 형편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민족문제연구소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승만이 이런 허무맹랑한 비젼을 내놓은 데에는 돈줄과 연관되어 있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인들은 독립성금을 냈다. 정부는 예산을 편성해서 독립군 부대를 양성했다. 그런데 소위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이 여기에 끼어들어 소위 중개인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는 성과가 사실상 없는 외교활동을 주장하며 13%만 정부에 송금했는데, 그러나 독립전쟁 준비를 모두 국민들에게 떠넘기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면 이승만으로서는 정부에 보낼 돈을 파격적으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대통령을 자처하며 이러한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주장을 하던 이승만에게 임정 요인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가 없었다.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은 이승만이 정부가 수립된 지 1년 밤만에 왔으니 임시 대통령으로서 어떠한 방책을 준비해 온 것으로 믿고 기다렸지만, 그는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못했다. 따라서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임정 요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발하여 이동휘ㆍ안창호ㆍ김규식ㆍ남형우 등 거물급 지도자들이 속속 임시정부를 떠났고, 이승만은 이들을 붙잡아 포용하려는 대신 신규식ㆍ이동녕ㆍ이시영ㆍ노백린ㆍ손정도 등을 새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여 위기를 넘기고자 했다.

 

이승만이 주장했던 외교독립론과 대척점에 있었던 무장투쟁론은 만주에서 여러 성과물을 만들어 냈다. 조선 시대의 현재 기준으로 수백억원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이회영 선생은 1911년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1919년 젊은 청년 약산 김원봉이 창설한 의열단은 1920년대 여러 가지 사보타주 활동을 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압잡이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1920년 당시 만주 각지에서 조직된 무장독립군 세력은 홍범도의 지휘 아래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김좌진 장군의 지휘 아래 청산리 전투에서도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소름끼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러는 시기 이승만이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한 것은 별로 없었고,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독선과 독주로 요인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말았다.

(이승만이 독립운동 시절 당시 그가 보인 행적, 그는 돈가지고 장난치는데는 고수였다.)

 

이처럼 이승만의 독선적인 정부 운영과 무대책에 실망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의정원 의원들은 국민대회를 준비하면서 지도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국무위원중심제 즉 일종의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개헌작업을 시도했다. 이승만이 이에 반대하면서 임정은 더욱 분열상이 가중됐다. 이승만이 반대의사를 표명해도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는 1921529일 마닐라행 기선 콜롬비아호를 타고 상해를 떠났다. 물론 그는 대통령직을 절대 사퇴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달 뒤,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한 이승만은 민찬호 등과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고, 동지회 창립석상에서 임시정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자신에 반대한 임정 세력들에 대한 치졸한 보복행위였다.

 

이승만은 임시정부로부터 1921929일 태평양회의(위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침을 받고 하와이에서 수도 워싱턴 D.C로 돌아왔다. 그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워싱턴 D.C.의 구미위원부를 한국위원회(The Korean Commission)로 바꾸고 활동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김규식이 워싱턴에 도착한 것을 계기로 이승만 등이 한국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위촉하고 워싱턴회의에 참석하는 미 대표에게 <한국독립청원서>를 제출했지만, 당시 서구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에게 한국의 독립문제는 안중에도 없었고, 워싱턴회의는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워싱턴회의 이후 이승만은 하와이에 아예 정착하게 됐다. 19236월 자신이 운영하는 한인기독학원의 남학생 12, 여학생 8명으로 하와이학생 고국방문단을 구성하고,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건축비 조달을 목적으로 호놀룰루 주재 일본총영사관과 교섭하여, 이 학생들이 일본 여권을 갖고 한국을 방문하게 했다. 그는 여기서도 일본에게 우호 내지는 친화적인 발언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임시정부와 이승만의 갈등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가 무책임하게 상해를 떠난 이후 상해임시정부는 극심한 분열상을 보였고, 임시정부 의정원들은 미국에 건너간 이승만에게 전보를 보내 수습을 요청했지만, 그는 사태수습을 외면하고 답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 대통령 불신임안을 제출하여 일주일 간의 토의 끝에 617일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불신임안을 의결하였다. 정부 수립 6년여 만에 임시 대통령 불신임안이 채택된 것이다.

 

임시 의정원의 불신임결의에도 이승만은 이를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봤고, 그는 구미위원부 사업을 빙자하여 임시정부의 허락도 없이 독립공채를 팔아 자신과 측근들의 활동비에 충당했다. 19253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곽헌ㆍ최석순ㆍ문일민ㆍ고준택ㆍ강창제ㆍ강경신ㆍ나창헌ㆍ김현구ㆍ임득신ㆍ채운개의 명의로 임시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이 발의되고, 임시 대통령심판위원장 나창헌, 심판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이 선임되었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임시 대통령에 취임한 지 6년여 만에 의정원에서 면직되었고, 쉽게 말해 탄핵됐다

(1925년 임시정부의 이승만 탄핵 문서, 우리는 2017년 박근혜가 탄핵된 것을 두고 대한민국 역사 최초로 탄핵에 성공했다 했지만, 박근혜 탄핵 90년 전 이승만 또한 임정에서 탄핵당했다.)

 

1925410일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이 주도하고 있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공포했지만, 이승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나 3년 뒤인 1928년에 구미위원부는 폐쇄상태가 되고 말았다. 1920년대 중후반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에 머물면서 활동했다. 이승만이 탄핵당한 이후 임시정부의 주석 자리에는 민족주의자인 백범 김구가 오르게 됐다. 그는 비록 반공주의적이고 우익 민족주의적인 인물이었지만, 조국을 일제로부터 독립시키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한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가장 어려운 시기 임시정부를 지켰다

(윤봉길 의거에서 보인 이승만의 반응)

 

사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다시 활동적인 단체로 거듭난 것은 1932년 백범 김구가 주도했던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를 통해서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원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살아있는 신으로 모시는 천황을 암살하려고 하다 체포됐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해 홍구공원에선 한인애국단원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으로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를 포함한 일본 제국주의의 거물들 7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를 알게된 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100만 명의 중국인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인 1명이 했다고 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게 됐다. 당시 윤봉길 의거의 방법론에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조선공산당의 박헌영도 19327월에 박헌영은 '상하이 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며,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집필했다.

(장제스와 이승만이 보였던 윤봉길 의거에 대한 반응, 같은 극우파임에도 이처럼 독립운동에 대해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의 반응은 과거 장인환 전명운 열사가 단행했던 스티븐슨 사건에서 보인 행보처럼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대해서도 주제넘게 평가절하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거에 대해 이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내용만 강화시켜 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주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196587일 경향신문에 실렸던 <이승만박사 해외독립운동 내막>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 건물에서 찍은 이승만 사진)

 

“19321월 이봉창 의사는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윤봉길 의사는 상해에서 시라가와 대장을 비롯한 일본의 유력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져 여러 명을 폭살 또는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만주를 비롯해서 고국에 무장투사가 잠입하여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때 이승만은 이러한 행동을 크게 비난하고 어리석은 짓들이라고 조소했다. 미국 신문 <크로니클>지 보도에 의하면, 그 당시 이승만은 이른바 비밀사절을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테러행위를 즉각 중지하도록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에 의하면 이봉창이나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한국의 독립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을 뿐더러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탄압하는 구실밖에 주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일본 내막기, 진주만 기습공격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이 쓴 책이다. 일각에서는 이 책을 가지고 이승만의 반일사상을 높게 평가하지만, 그 이전에 이승만이 미국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보여주었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이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승만은 1925년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지만,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행위를 끝내지 않았다. 그는 1910년대 초와 1920년대 당시 일본에 대해 우호적인 사설이나 발언들을 자주 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라는 권위를 이용해서 독립자금을 사적인 영역에 이용했다. 백범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의 이봉창 윤봉길 의사가 의거를 감행했을 때, 이것은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짓이라며 이를 주제넘게 평가 절하했다. 이러는 시기 국제정세는 점차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불러왔고,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화는 미국과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이승만 또한 일본에 대한 반일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다. 결정적으로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고 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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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96 2020-05-06 17: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 현대사 최대 비극은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이죠. 글 잘 읽었습니다. :)

NamGiKim 2020-05-06 17:41   좋아요 1 | URL
김삼웅 선생의 책과 민족문제연구소 다큐 그리고 그외의 몇개 서적들 참고해서 썻습니다. 하루빨리 이승만식 반공주의를 벗어나야 할텐데
 

2017년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국내의 수구세력들은 현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해 종북주의내지는 친중주의라는 조잡한 프레임을 씌어 정치적인 공격을 반복했고, 현재도 무슨 일만 있으면 그 프레임을 이용하고 있다. 물론 문재인 정부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사드도 설치하고 남북관계 개선에서도 미국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며 눈치를 보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이지만, 반공주의라는 맹목적 편견에 빠진 그들은 이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2020년 미국과 이란 관계에서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감행했다는 사실에서 문재인 정권은 친미주의적인 스텐스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19년 베네수엘라 사태때도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후안 과이도라는 괴뢰를 내세워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제국주의적 행위를 대놓고 감행했지만, 문재인 정권은 공식적으로 후안 과이도를 베네수엘라의 공식 정권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문재인 정권은 과거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파병과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감행했듯이 친미적인 정권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은 수구세력들에게 항상 무시당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필자는 그것이 수구세력들의 사상이 현실정치라는 영역을 부정하기 위한 반공 포퓰리즘에 있다고 생각한다.

 

나무위키와 일베 그리고 웹상의 네티즌들을 보면 그들은 북한과 중국에 대한 반공주의적 혐오감을 드러낸다. 이들은 미소냉전시기의 반공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북한은 해방 이후부터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존재고, 한국전쟁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적화시키고자 했던 적대세력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북한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진격할 때, 이승만이 원했던 북진 통일을 방해했던 존재고, 전쟁 이후에도 소련과 더불어 북한을 지원한 세력이기에 적이다. 따라서 그들은 해방 이후부터 한국의 극우파 정권을 지지한 미국은 우리의 동맹이고, 한국전쟁에서 적대세력이었던 북한과 중국은 적이 되는 것이다.

 

즉 이러한 반공 이데올로기를 가진 세력들이 지지하고, 당원으로 있는 세력이 바로 현재 미래통합당과 그 외의 수구 정당들이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2012년에서 2013년 그니까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시기에 미국의 공격헬기인 아파치 헬기(AH-64 Apache) 100대를 들여오는 계획을 대한민국 국방부가 착수했었다. 당연히 미국 군수산업을 배불리기 위한 미국의 계획이었지만, 반공의식이 강한 어떤 군전문가는 다음과 같은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가 도입하려 했던 아파치 헬기는 1991년 걸프전쟁에서 이라크군의 탱크를 대량으로 파괴했던 주력 헬기였다. 즉 그 반공주의자의 말에 따르면 아파치 헬기는 북한군 전차 수천 대뿐만 아니라 중국군 전차 수만 대를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라는 소리였다. 이런 발언만 보더라도 수구세력들은 중국을 두려워하며 적으로 규정한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그 외에도 그들은 중국의 군대 전력을 과거 미국이 소련에 대해 오만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가지고 그 군대를 평가했듯이, 그런 색안경 잣대로 중국의 군대를 바라보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 중국군은 그저 구식에 숫자에만 의존하고, 적국인 북한을 돕는 세력일 뿐이다.

 

여기에는 북한과 중국이 한국보다 문명적으로 뒤떨어지고 가난하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북한은 그저 정치범 수용소가 넘쳐나고 자유를 찾아 오는 탈북자들이 수두룩한 지옥같은 곳이다. 북한의 동맹인 중국은 그저 사람인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고, 싸구려 식품과 물품을 팔아대는 저질국가이자, 공산당 독재를 유지하고 우리에게 해만 끼치는 존재다. 이런 생각은 미국의 네오콘인 존 볼튼 같은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과도 참으로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볼튼 또한 중국과 북한을 자유의 적으로 규정했던 인물이고, 실제로 그는 중국 정권을 전복시키는게 옳다고 믿는 아주 극단적인 제국주의자다. 볼튼이 이러한 생각을 가진 데에는 중국에 대해 그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국내의 수구세력들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수구세력들은 반북 반중감정에 빠져 있다. 이것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에 입각한 반공주의와도 연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미소냉전에서 소위 미국이 강요했던 반공주의적 강요였을 뿐이다. 또한 이것은 현재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속에서 친미적인 스텐스를 강화하겠다는 수구세력들의 의도가 깔려 있다. 분명한 사실을 얘기하자면 이런 반공주의자들의 반북 반중론은 절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없다. 그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달리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하는 군사적 해결책은 없기 때문이다. 현재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세계적 질병 위기를 근거로 수구세력들은 소위 우한 바이러스를 운운하며 반중정서를 대중적으로 자극하고 있다. 즉 반중포퓰리즘을 이용하기 위한 정치적 맥락이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위에서 상술한 반북 반중주의 그리고 반공주의가 중첩된 의식이 존재한다.

 

수구세력의 반공주의적 반북 반중주의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들이 냉전적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도 우리 사회는 이런 냉전적 잔재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만이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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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2024-02-05 0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이 한국보다 문명적으로 뒤떨어지고 가난하다는 의식이 깔려있다./

그런데 정작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집권한 윤석열 정부는 지금 중국 시진핑한테 제발 한 번만 만나달라고 애걸복걸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런 중국과 경제적으로 단절되는 길을 선택한 한국 경제는 지금 침몰하고 있는 중입니다. 오죽하면 조선일보 기사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올까요?
https://etoland.co.kr/link.php?n=8091100
‘중국 시장서 설 자리 잃는 한국... 점유율, 30년 전으로 후퇴‘

가람 2024-02-05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도 우리 사회는 이런 냉전적 잔재를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글쎄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겪고도 한국 극우 세력은 꾸준한 종편 방송과 인터넷을 통한 여론 몰이와 선동으로 다시 집권하는데 성공했죠. 남북분단 상황이 계속되는 한, 한국 극우 세력은 절대 망하지 않을 것이고 냉전적 잔재 역시 극복할 수 없을 거라고 봅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문제적 인간 1
장 마생 지음, 최갑수 머리말, 양희영 옮김 / 교양인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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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월 자유한국당(현재는 미래통합당) 대표인 홍준표가 대통령인 문재인에 빗대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다. 홍중표는 민주노총과 전교조를 들먹이며 경제정책도 로베스피에르가 취했던 방식 그대로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국가 갑질 경제, 국가 간섭 경제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정부가 폭망한 그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라는 망발에 가까운 주장을 했었다. 더 나아가 그는 프랑스 혁명의 귀결이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온건 보수파가 완성했듯이, 한국판 로베스피에르가 폭주하는 세상을 언제까지 계속 방관해야 하는지 자문해 본다라는 막말로 입장을 마무리했다.

 

안 좋은 의미로 사용된 사례지만 수구세력의 연합체인 자유한국당 그것도 그 당의 대표를 맡는 사람 입에서 아주 부정적인 의미로써 로베스피에르라는 단어가 사용됐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인 로베스피에르는 매우 안 좋은 의미로써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혁명가 로베스피에르가 이처럼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이유가 있다. 그는 1789714일 민중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됐을 때부터,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기요틴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오로지 민중을 위해 살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출판된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로베스피에르에 관한 서술은 그리 자세하지 않고, 긍정적이지도 않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민중이 봉기했다는 사실에는 강조하지만, 로베스피에르와 그가 이끌던 자코뱅에 대해선 독재나 처형이라는 수식어로 일괄하는 것이 한국에 나온 대다수 세계사 교과서의 서술이다. 이것은 소위 자유주의적 세계관을 반영받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봉건 귀족에 반감을 품고 있던 부르주아 세력들이 주도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봉건 귀족에 반대한 이유에는 본인들의 부르주아적 이익을 확장하기 위함이라는 주목적이 있었다. 이런 부르주아의 열망에 찬물을 제대로 끼얹은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진보적인 가치들을 지향했다. 그는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이 절대적으로 금기시했던 흑인 노예제와 식민지화에 대한 구제국주의적 움직임에 분명히 반발했고, 소위 소수민족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의 인권과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유럽 전역에 국가 없이 떠돌며 살고있는 유대인들의 권리를 주장했고, 옹호했다. 17929월 의회에서 식민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되었을 때, 그는 식민지 탄압에 대해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1752년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은 그가 노예제와 식민지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법령 중 하나에서 여러분이 노예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과 식민지들의 최상의 이익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뒤엎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 여러분의 영광, 여러분의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식민자들이 우리를 위협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것을 법령화하게 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의 전복유 원하지 않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자유록기를 원하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식민지 대표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153

 

자코뱅 독재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가 주장하던 방토즈 법 즉 유죄를 선고받은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빈민들에게 나눠주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방토즈 법을 통해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려는 반혁명 분자들의 재산을 몰수하고자 했다. 아쉽게도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역사적인 의의가 매우 큰 업적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우선 당대로서는 보기 드물 만틈 아주 대담하게 모든 사람의 노동권을 주장했다. 그는 권리의 평등을 원했고, 지나친 재산 축적이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노동권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권리의 평등을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자유도, 사회적 행복도 없기 때문이다. 재산에 대해서는, 일단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노동을 통해 생필품과 식량을 확보할 수만 있게 해준다면 자유의 벗들은 재산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아리스티테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을 시샘하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하고 성숙한 사람들에게 아리스티데스는 크라수스의 보물들보다 훨씬 더 소중한 재산이다. 재산은 흔히 타락으로 이어지므로 그것을 잃은 사람들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해로운 것이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278

 

노동권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가 부르주아나 봉건 왕조로부터 착취받던 민중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대부분의 사설이나 교과서들은 프랑스 혁명이 결과적으로 봉건세력의 잔재인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을 숙청했다는 점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 루이 16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로베스피에르는 철저히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을 괴롭히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고자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로 루이 16세와 그 일당들이 처형당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몸소 증언한다.

 

인류의 눈으로 볼 때 그보다 더 파렴치한 자도 없습니다. 그는 오직 그보다 더 비겁한 자들에게만 경외심을 갖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의 유용성입니까? 그것은 더 서둘러 그를 처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지막 왕이라는 이 비루한 개인이 민중에게 왜 중요합니까? 의원 여러분, 민중에게 중요한 것, 여러분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은 민중의 신뢰가 여러분에게 부과한 임무를 여러분이 수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었습니까? 공화국, 그리고 루이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나는 이 치명적인 진실을 마지못해 선언하지만, 조국이 살아야 하므로 루이는 죽어야 합니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368~369

 

1793421일 그는 자코뱅 클럽에서 자신이 작성한 인권 선언 초안을 낭독했는데, 그가 낭독한 36개 조항에는 19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의 헌장이 되는 것들이 많이 존재하고, 그가 얼마나 진보적인 가치들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36개 조항을 다 옮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중요한 몇 가지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조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인간이 지닌 자연적이고 시효에 의해 소멸되지 않는 자연권의 유지와 인간의 모든 능력의 발전이다.

 

2조 인간의 중요한 권리들이란 그의 생존과 자유를 보존할 수 있게 해주는 권리들이다.

 

5조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자신의 뜻대로 행사하는 힘이다. 자유는 정의를 모범으로, 타인의 권리를 한계로, 자연을 원칙으로, 그리고 법을 보호자로 삼는다.

 

10조 소유권은 다른 모든 권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의무에 의해 제한된다.

 

11조 소유권은 우리 동포들의 안전, 자유, 생존, 재산을 해칠 수 없다.

 

13조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든가, 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생존 수단을 확보해줌으로써,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생계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18조 민중은 원한다면 자신의 정부를 바꾸고, 자신의 수임자들을 해임할 수 있다.

 

35조 자유와 진보를 방해하고 인간의 권리를 소멸시키기 위해 한민족에게 전쟁을 일으키는 자들은 예사로운 적이 아니라 살인자이자 반도로 기소되어야 한다.

 

이처럼 로베스피에르가 작성한 인권 선언은 진보적인 가치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상술한 홍준표와 같이 일각에서는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며 그의 시기를 폄하한다. 그러나 1793년 그와 자코뱅 세력들이 소위 혁명재판소를 창설하여 민중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이들과 부패한 이들을 단두대로 보내 처형한 행위는 순수히 민중의 염원을 따르고자 했던 로베스피에르의 열망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민중과 하층민 가진 것 없는 이들 추방 당한 이들, 유대인과 노예를 위해 싸웠다. 책에서 나온 그의 연설들 대다수가 민중을 생각고자 하는 바람에서 나온 발언들이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숙청되고 목숨을 잃은 건 사실이다. 소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시기 수천 명이 단두대로 보내져 목이 잘렸다. 그러나 그의 공포정치 시기 로베스피에르는 자신과 지지세력들이 설정했던 목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소위 반혁명적 사상을 가진 탐욕스러운 부르주아들에게 단두대라는 형벌을 끊임없이 내리기도 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행동에 분노한 이들은 결국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생쥐스트, 쿠통과 더불어 그를 단두대로 보내 처형했지만 말이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은 민중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 로베스피에르의 열정과 혁명정신이 아주 많이 느껴지게 한다. 그가 했던 연설 곳곳에 민중에 대한 그의 휴머니즘적 사랑이 담겨있다. 자유주의자들이 독재자 혹은 악인으로 왜곡해온 로베스피에르의 진실을 역사적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명저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혁명과정에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할 때, 혁명을 두려워했던 유럽의 봉건 국가들이 혁명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소위 대프랑스 동맹을 형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고 영국 등은 프랑스를 대상으로 전쟁을 벌였다. 여기서 프랑스는 이 반동의 무리들이 저지르는 침략을 격퇴시키기도 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이 정복전쟁을 하기 전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전시 상태에 있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휴머니스트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어린 혁명정신과 민중애를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많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마지막으로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한 연설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고자 한다.

 

여러분의 주권자는 민중입니다. 끊임없어 그들을 권리를 누릴 자격이 없는, 야만적이며 타락한 존재로 부름으로써 그들을 중상하고 모독하는 일을 그만둡시다. 정의롭지 않고 부패한 자들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은 민중의 권력을 부유한 특권계급에게 넘겨주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선량하고, 인내심 강하고, 관대한 것은 민중입니다. 우리의 혁명이, 그리고 적들의 범죄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울 뿐인, 최근의 수천 가지 영웅적인 행동들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민중은 단지 평화, 정의, 그리고 생존권을 요구할 뿐입니다. 권력자들, 부자들은 차별, , 쾌락만을 갈망합니다. 민중의 이익과 소망은 천부의 것이며 인류의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적 이익입니다. 부자들의 이익과 소망은 야심, 탐욕, 기괴한 망상, 그리고 사회의 행복에 가장 치명적인 열망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민중의 비탄에 빠뜨린 폐해는 언제나 부자들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민중에게는 재난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영광스러운 혁명을 수행했습니까? 부자들입니까? 권력자들입니까? 민중만이 혁명을 열망할 수 있었고 혁명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오직 민중만이 한결같은 이성에 의해 혁명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민중이 다시 쟁취한 권리를 민중으로부터 강탈할 것을 우리에게 제안한단 말입니까?

 

사람들은 국민을 두 계급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그중 한 계급은 언제든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한 계급을, 오직 그 계급을 제압할 목적으로만 무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첫 번째 계급은 모든 독재자들, 모든 압제자들, 모든 공공의 흡혈귀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계급은 민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민중이 자유에 위협이 된다고 말합니다. ! 여러분이 만약 민중에게 자유를 맡긴다면 민중은 자유의 가장 튼튼한 벋짐목이 될 것입니다. 부당한 힘으로, 말하자면 민중을 절망에 빠뜨려 그들이 하는 수 없이 자신의 대의를 배신하도록 만들려는 자들은, 잔인하고 야심에 찬 궤변가들인,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니 인류의 신성한 권리에 대한 요구를 결코 중단하지 않을 민중을 더는 비난하지 마십시오!”

 

출처 :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3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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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들! 볼셰비키가 줄곧 그 필요성을 역설해 왔던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완수되었습니다. 이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의 의의는 무엇입니까? 특히 이 격변의 의의는, 우리가 부르주아의 참여 없이 소비에트 정부를 우리 자신의 권력 기관으로 갖게 되리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피억압 대중이 스스로 그들의 권력을 창출할 것입니다. 옛 국가 기구는 철저히 파괴될 것이며, 새로운 행정 기구가 소비에트 조직의 형태로 만들어질 것입니다.”

이 연설은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그라드에 있는 스몰니 대학교에서 레닌이 했던 연설이다. 1917년 10월 혁명을 통해 인류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위대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은 혁명 러시아에서 여러 가지 진보적인 업적들을 달성했다. 비록 잠깐이긴 했지만, 10월 혁명 이후 혁명 러시아에선 매우 진보적인 정책들이 행해졌다. 노동자들에게 식량이 우선 공급되었고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되었다. 지주 소유의 토지가 사라졌으며, 신분과 호칭이 완전히 폐지되고 모든 러시아 주민이 인민이 되었다. 인종차별과 같은 악법은 폐지되었고 혁명 이후로 인종차별이 웬만큼 사라졌다. 여성은 사회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행사했다. 사형제가 폐지되었고 심지어 동성결혼이 합법화 되었다. 당시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 혁명 러시아에선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던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룩한 업적이었다.

그러나 1918년 백군 반동들을 돕기 위해 제국주의 열강이 침략을 감행하면서 레닌과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과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레닌은 그 전쟁에서 보인 사민당과 제2 인터내셔널의 배신적 행위에 실망하여 그들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했지만, 적백내전의 경우 달랐다. 이것은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고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볼셰비키로써는 당연히 맞서 싸워 승리를 쟁취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일각에서는 적백내전 당시 레닌과 볼셰비키가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창성했던 경찰조직 ‘체카(Cheka)’의 폭력성을 지적하며, 레닌의 무자비함과 잔인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적백내전 시기 볼셰비키가 맞서 싸우던 백군은 분명히 반혁명·반동세력이었다. 이들은 로마노프 왕조 이래로 300년간 민중을 착취해오고 탄압해오던 반동들이었다. 거기다 백군반동들은 러시아 곳곳에서 볼셰비키를 축출하기 위한 백색테러 행위에 착수했다. 당시 지도부에 있던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을 포함한 볼셰비키 인사들은 그러한 테러의 위협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레닌 또한 총에 맞아 총알이 몸에 박히는 불행을 겪었다.

따라서 체카는 이런 반혁명적 반동세력들에 맞서 싸우기 위한 수단이었다. 볼셰비키의 노력으로 혁명군대 적군은 러시아 전역에서 백군 반동 세력들과 제국주의 세력들을 몰아낼 수 있었고, 1920년에서 1921년에 사실상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전이 불러온 피해는 크론슈타트 수병의 반란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동반했다. 여기서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를 포기하고 소위 신경제정책(NEP)를 실행했다. 사실 레닌이 집권하던 시기 러시아의 경제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특히 적백내전 시기에는 제정 러시아의 경제 상황보다 더 안좋았다. 내전에서 발생한 기근으로 수백만이 아사했다.

비록 러시아 혁명 이후 레닌이 집권하던 1920년대는 참으로 힘든 시기였지만, 궁극적으로 레닌이 민중에게 심어준 진보와 혁명사회를 향한 꿈은 지금도 사회주의를 꿈꾸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자본주의의 착취와 인권유린에 반대하여 일어난 혁명이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는 자본주의적 모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보여주듯이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미국은 전세계의 경제를 달러를 통해 휘어잡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돈이 없으면 치료나 진료검사를 받지 못하는 사회다. 소위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그러한 사회다. 이런점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레닌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레닌 동지가 혁명 러시아를 탄생시키며 추구했던 민중을 위한 정책들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진보적인 정책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 세계의 사회주의자들이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의 사상을 공부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로써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가 탄생한 지 150년이 됐다. 우리 역사로 보자면 그는 신미양요가 일어나기 1년 전인 조선 말기에 태어난 인물이다. 그때문인지는 몰라도 일각에서는 그의 사상이 나이브하다고 하며 마치 현재 사회에는 적용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치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현재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체제를 진리인냥 받들어 모신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위에서 상술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탄생한지 150주년인 오늘은 참으로 의미있는 날이다. 오늘따라 블라디미르 레닌 동지가 너무나도 보고 싶다. 4년 전 모스크바를 방문하며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던 그가 생각이 난다. 혁명가 레닌을 다시 생각하며, 그가 꿈꾸던 세상을 이루겠노라고 다시 한번 다짐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블라디미르 레닌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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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제국주의 침략과 학살의 역사

  

1492년 소위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알려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er Columbus)는 미국인들에게 있어 영웅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통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했고, 그 결과 미국이 탄생했다는 믿음을 미국인들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세계사 교육이 미약한 한국인들에게도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경우가 다분하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보면 미국인들이 찬양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에로 삼았던 침략자이자 제국주의자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난다.

 

1451년 이탈리아 제노바 근처에서 양모 직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행적은 1477년 리스본에 나타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장인이 선장이었던 콜럼버스는 바다 지도를 제작하는 일에 종사했고, 그 과정에서 항해술을 배웠다. 1484년부터 콜럼버스는 동생과 함께 항해에 들어갈 비용을 댈 후원자를 찾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포르투갈 왕 주앙 2세에게 후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격던 중 스페인으로 건너가 이세발 여왕(Queen Isabel)을 만났고, 비록 몇 번의 거절을 당했지만, 1492년에 뜻을 이루게 됐다. 당시 스페인의 이세벨라 여왕은 해외 진출에 관심이 많았기에 콜럼버스를 후원함과 동시에 그들에게 소위 계약서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계약이 바로 산타페 계약(Santa Fe)’이다.

 

149283일 스페인 팔로스 항을 출발한 콜럼버스 일행은 120명의 선원과 3척의 배를 동원했다. 이들은 1년을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양의 보급품도 실었고, 인도를 찾기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서쪽으로 향해 계속했다. 14921012일 항해를 시작한 지 약 70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바하마 군도에 상륙했다. 바하마에 상륙한 콜럼버스는 그 섬의 이름을 서인도제도(West Indies)라고 붙였고, 거기에 살고있는 사람들을 인도사람이라고 하여 인디언(Indian)’이란 의미에서 인디오(Indio)’라고 붙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이들에게 보답해 준 것은 학살과 노예화 뿐이었다. 그는 원주민을 보았을 때부터 그들을 노예로 삼을 생각을 했다. 아라와크족(Arawaks)이 마을에서 나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그들을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생각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은 앵무새와 솜뭉치, 창 외에도 많은 물건을 가져와서 유리구슬이나 매종(사냥용 매의 다리에 묶는 종)과 바꿨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물건들을 기꺼이 교환했다. 그들은 탄탄한 체구에 잘생긴 외모를 지닌 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내가 칼 한 자루를 보여주자 아무 생각 없이 칼낳을 쥐다가 손을 베이기도 했다. 이들에게는 철이 없다. 이들의 창은 막대기에 불과하다. 이들은 좋은 하인이 될 듯하다. 50명만 있으면 이들 모두를 정복해서 마음껏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미국민중사 I p.15

 

당시 콜럼버스가 무엇보다도 원했던 정보는 황금의 위치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갈 수가 없어 원주민들을 납치하고 포로로 붙잡아 배에 태운 뒤,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스페인 마드리드 궁정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터무니 없는 과장된 내용을 보고했다. 콜럼버스는 이사벨라 여왕에게 아시아와 중국 연안의 한 섬에 도착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허구였고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런 과장 및 왜곡 보도를 하면서 자신들이 포로로 붙잡았던 원주민에 대해서도 보고를 올렸고, 그 대가로 다음 항해에서 필요한 만큼의 황금과 원하는 만큼의 노예를 가져오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하여 다음항해에서 콜럼버스는 17척의 배와 200여 명의 선원을 투입하여 노예와 황금을 가져오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를 했다. 그들은 카리브 해의 섬들을 차례로 돌며 원주민을 포로로 잡았다. 또한 콜럼버스의 선원들은 무리지어 돌아다니며 황금을 약탈하고 여자와 어린이들을 성적 노리개와 노예로 사로잡았다. 현재 아이티 섬 근처에 근거지를 마련한 콜럼버스는 1495년 대규모 노예사냥에 나섰다. 그들은 아라와크족의 남자와 여자 그리고 어린이 1500명을 스페인인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우수하다고 생각되는 500명을 골라 배에 실었다. 이들 가운데 200명이 항해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훗날 콜럼버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팔 수 있는 모든 노예를 계속 잡아 보냅시다라고 하며 기록을 남겼다.

 

콜럼버스와 선원들은 거대한 금광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한 아이티의 시카오 지방에서, 14세 이상의 원주민 모두에게 석달마다 일정한 양의 금을 모아오라고 명령했다. 금을 발견하면 구리표식을 달아줬지만, 그게 없는 원주민들은 발견되는 즉시 두 발이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곳에도 황금 덩어리는 없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도망쳤으며, 그 과정에서 사냥개를 대동한 선원들에게 붙잡혀 죽어갔다. 이에 분노한 아라와크족은 저항군을 모아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스페인인들에 맞섰는데, 스페인인들은 사로잡은 포로의 목을 매달거나 불태워 죽였다. 이런 콜럼버스의 학살과 수족절단으로 인해 아이티의 원주민 25만 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498년과 1501년 콜럼버스는 다시 아메리카 대륙으로 제3, 4차의 항애세서 트리니다드섬과 베네수엘라 해안 그리고 파나마 일대를 탐색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대륙을 다녀온 이후로부터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원주민들이 서양인들에 의해 탄압받고 학살당했고, 지배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미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스페인 왕실에 거짓 보고까지 해간 인물이었다. 수많은 미국인들에게 신대륙 개척자로 인식되고 있는 인물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토착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원수나 다름없는 인물이다. 2009년 당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었던 우고 차베스(Hugo Chavez)콜럼버스의 날로 지정된 1012일을 원주민 저항의 날로 바꿈으로써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았었다. 신대륙 발견 이후 무수히 많은 원주민을 학살하고 노예로 일삼았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이제는 그가 저질렀던 잔혹한 침략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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