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일본군)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정복 야욕을 드러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777일 베이징의 서남 교외의 노구교에서 총성이 울렸는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중국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중일전쟁을 시작하게 된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중국 대륙에 파견했고, 그해 813일에는 상하이까지 전쟁이 확대됐다. 당시 중국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단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지만, 진격해오는 일본군을 저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난징에 입성한 일본군 탱크)

 

그해 11월 중국국민당 정부의 지도자 장제스는 수도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이전하고, 일본군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에 도달한 일본군은 19371213일 난징의 청부청사가 함락되면서 일본군 수중에 완전히 떨어졌다. 난징을 완벽히 점령한 일본군은 이 시점부터 약 2개월 동안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상상조차 하기 힘든 잔인한 학살과 강간등의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당연히 이러한 전쟁범죄는 당시 일본군의 주도로 이어졌고,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다.

(난징에 입성하여 행진하는 일본군)

 

당시 일본군이 했던 전쟁범죄들중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자면 중국군 포로나 민간인들의 목베기 시합을 들 수 있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무카이 도시아키와 노다 쓰요시가 10명의 목을 누가 더 빨리 베나 재는 시합, ‘100인 참수경쟁을 한 사실이 있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힌 것은 이러한 전쟁범죄가 당시 일본의 언론에 의해 스포츠 특보마냥 대서특필되었다는 사실이다. 그외에도 300인 베기에 도전한 다나카 군키치라는 범죄자도 존재했고, 이런 식으로 무수히 많은 전쟁 포로와 민간인들이 일본군의 목베기 시합에서 희생됐다.

(파놓은 땅에다 몰아넣고 중국인을 학살하는 일본군)

  

2개월간의 과정속에서 일본군의 전쟁은 상상을 초월했고, 이런 피해에 있어서 중국인 여성들 또한 무수히 많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다.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강간당했고, 이에 반항하면 일본군들은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난징 지역 곳곳에서 일본군의 강간과 살인 학살 그리고 방화가 지속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기 전 전투기들로 난징 전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만들었다

(목을 배놓고 기뻐하는 일본군)

 

이러한 학살이 계속되자 당시 나치당원이던 존 라베(John Rabe)를 포함하여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은 난징 국제안전지대를 설정하여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중국인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존 라베와 같은 외국인 선교사, 기업과 그리고 외교관들은 이미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상하이 안전구를 본떠서 안전지대를 형성했고, 대략 25만 명 이상이 중국인이 이 피난처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일본에서 보도된 중국인 목베기 시합 기사)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이른바 도쿄 재판 판결에 따르면 중일전쟁 초기 일본군이 저지른 난징대학살로 인해서 살해된 사람은 비전투원 12000, 패잔병 2만 명, 포로 3만 명, 시민 5만 명 등을 합하여 13만 명이 살해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최소 20~3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수치의 정확성을 떠나서 수십만명의 중국인이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에 의해 죽었고, 이러한 전쟁 범죄에 대해 일본 정부는 현재까지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난징 대학살이 끝난 이후에도 일본군은 자신들이 점령한 중국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을 전개했다. 이 결과 총 1500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들이 중일전쟁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얘기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진실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단상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공부하면, 일각에서 알려진 수천만명 학살자의 이미지는 지극히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과장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슨 ˝2천만을 죽였네˝, ˝4천만을 죽였네˝와 같우 소리가 인터넷과 유튜브에 떠돌고 하루에 4천명 혹은 한달에 4만명씩 학살했다는 해괴망측한 이야기도 들리지만, 지극히 악마화된 수치다.

1980년대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공개된 자료들에 따르면 1939년 당시 노동수용소와 이주지, 구치소에 수용된 인원은 약 200만 명이었고 그중 실제 정치범은 45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937년에서 1939년 사이에 노동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은 영미권 보수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300만에 훨씬 못 미치는 16만 명이었으며, 그 기간에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도 수백 만이 아닌 약 10만 명이었다. 굴라그 수감자도 최대가 250만이었고, 이것은 1990년대 미국의 감옥보다 300만이나 적은 수치다. 즉 솔제니친 같은 허장성세들이 거시적인 측면에서 최소 10배 이상은 과장한 것이다.

물론 스탈린 또한 대숙청 도중 과오도 있었고, 무고한 희생도 있었다. 근데 왜 이러한 과오가 있음에도 우익들과 수꼴들은 만족하지 않는걸까? 그것은 본인들이 얘기하고 싶어하는 ˝악마새끼 스탈린˝의 이미지에는 뭔가 부적합한 수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평가는 그렇다 쳐도 그가 이룩한 무상 복지체제만큼은 세계적인 업적이고 재평가가 필요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냉전시기 동유럽과 서유럽)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에 맞서 인민전선을 구축했던 미국과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은 19세기부터 전 세계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영국과 프랑스 같은 구제국주의 국가들의 쇠락을 의미했고, 세계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많은 역할을 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급부상을 의미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다른 체제였다. 미국은 자본가들의 기업과 이윤축적이 우선시 되는 자본주의 국가였던 반면, 소련은 사적 소유가 폐지되고 공공분야에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미국과 소련은 냉전이라는 45년간의 세계사적 흐름속에서 서로가 정치, 경제, 군사 그리고 문화적으로 경쟁했다. 미국과 한국을 포함한 역사 학계에선 미국의 개입보다 소련의 군사적 개입과 노골적인 폭력이 더 많았다고 주장하고, 그 사례를 더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진실은 그러할까?


냉전시대의 서막을 알린 것은 1946년 3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했던 한 연설이었다. 처칠은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같은 윈스턴 처칠의 발언이 증명하듯이, 미국 또한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시작으로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됐다. 특히나 1945년 루스벨트 사망 후 부통령 자리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쉽게 말해 전형적인 반공주의자였다. 윈스턴 처칠의 ‘철의장막(鐵의帳幕, Iron Curtain)’ 발언이 있은 지, 1년 뒤인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한다.

(트루먼과 스탈린)

 

트루먼 독트린의 내용은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행위였다. 이렇게 미국이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이에 소련 또한 반발하게 되자,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경쟁하는 체제로 거듭났다. 미국은 소련을 단지 경쟁자가 아닌 직접적인 위협으로 제시했지만, 그러나 이 냉전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과 개입을 행사했던 것은 스탈린(Stalin)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그리스 내전 당시 지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우익 군주독재국가였던 그리스는 나치가 물러난 직후 영국이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좌익 민족해방전선을 제제했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그리스에선 좌익 게릴라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리스 좌익은 대략 25만 이상이나 되는 지지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사태는 결국 내전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서 그리스 사태를 감당하지 못한 영국은 미국에게 지원요청을 보냈다.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트루먼 독트린’에 의거하여 그리스의 우익세력들을 지원했다. 미국은 아테네 우익 정부에게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만 4000톤에 달하는 군사장비를 보내줬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미군사고문단을 전투현장에 보내 1949년 그리스 좌익을 붕괴시키고 우익독재 정부를 세웠다.

(베를린 봉쇄 당시 물자를 수송하는 미항공기)

 

미국의 트루먼이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은 불안했다. 당시 미국 휘하의 서유럽의 상황은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철도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다. 특히 1946년 말에는 서유럽에서 강추위까지 몰아닥쳤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서유럽의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 나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게 됐다. 특히 이탈리아의 경우가 그러했다. 1948년 이탈리아가 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하여 정권을 잡을 것 같자 미국은 그것을 막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고, 만일을 대비해 과거의 파시스트들을 끌어모아 무장 지하 조직인 글라디오(Gladio)를 건설했으며,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을 계획했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철수하자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선 다시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중국에 조지 C. 마셜 장군을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화해 및 중재를 시도했었지만,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내전이 시작되자, 태도가 급변했다. 중국 민중은 부패한 관료집단인 장제스의 국민당을 선택하기보단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을 선택했다. 그러나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싸웠는데, 미국은 장제스를 지원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을 막고 싶었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도 미국의 개입은 이어졌다. 미국은 한반도에 상륙하여 미군정을 실시한 이래로, 한반도 이남의 자주적인 조직과 단체들을 인정하지 않고,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세력들을 이용했다. 이에따라 자주적인 통일 국가를 준비했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 세력들이 통일 운동과 노동운동을 진압하고 방해함에 따라, 한반도 민중의 자주적인 결정권은 무시됐다. 이렇게 해서 미군의 탄압으로 대구와 제주도 여수순천에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중국 통일 당시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베트남 문제에도 개입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 하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식민지 해방 전쟁을 냉전의 논리로써 접근했고, 프랑스에게 막대한 무기와 자금을 지원했다. 1950년 초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1000만 달러의 전쟁 비용을 대신 감당했지만,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이러한 전쟁 비용은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에 이르렀다. 미국은 필리핀 문제에도 개입했었다. 1945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에 미국은 개입하여 이들을 분쇄했고, 1950년대 마르코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의 과테말라에서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인 총선으로 대통령이 된 아르벤스가 미국에 의존된 사회 체제를 바꾸려는 모습을 보이자, 미국은 아르벤스의 반대세력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었다. 1951년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와 미국 관계)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개입을 통해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과 경쟁하던 소련의 경우는 이보다 확장력이 약했다고 할 수 있다. 소련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에서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 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소련이 자신들의 체제를 전파하기 위해 시도했던 것은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였는데, 이들의 경우는 스탈린의 조언에 거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한, 당시 스탈린의 입장은 국제적으로나 각국 내에서나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시스트 동맹의 틀 안에서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붉은 군대가 점령했던 동유럽 지역에서 지배하거나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긴 했지만, 군사력을 통해서 자신의 영향권을 그 이상으로 확대하고자 하지는 않았으며, 냉전 시기 소련이 동유럽 국가에 형성한 사회주의 블록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당시 붉은 군대가 점령한 지역에 국한됐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미국과 소련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미국의 반공정책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소련이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하는 조처를 하긴 했지만, 미국은 소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하여 서유럽 경제를 대대적으로 회복시키고 원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베를린에 대규모의 수송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봉쇄를 풀었고, 194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 불리는 NATO를 창설했다. 나토 창설의 목적 중 하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이에 맞서 1955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이렇듯 냉전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이었기에 소련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당시 소련은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미국은 소련에 비해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개입과 간섭을 했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논리가 절대로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역사적 진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위임통치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

(파리강화회의 당시 모인 연합국 정상)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을 시기 식민지 조선과 세계 정세는 변화해 가고 있었다.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 한 이래로 일제는 소위 무단통치를 실행했다. 무단통치란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일본이 조선을 무단통치롤 지배하고 있을 시기 세계는 크나큰 전쟁에 휩싸였다. 그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1)이다. 1914628일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저격한 것으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가 참전하게 되는 전쟁이었고, 1000만 명 이상 죽게 만든 전쟁이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1917년에 참전하게 됐고, 1918년 연합국 측은 독일제국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승국들은 연합국과 동맹국 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1919년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자 이승만의 스승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은 소위 민족자결주의를 표방했는데, 이것은 제국주의 국가에 짓밟혀왔던 약소 민족국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됐다.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시기 신한쳥년당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 呂運亨)은 김규식을 프랑스 파리에 보내 열강들에게 독립을 청원하고자 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91916일 하와이 호놀룰루를 출발하여 12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인 도산 안창호(安昌浩) 만났다. 그 뒤 뉴욕을 거쳐 23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을 만났다. 이승만은 서재필, 정한경, 장택상 등과 회동하고 필라델피아를 떠나 수도 워싱턴 D.C로 달려가 파리행 여권을 준비했다. 그는 여권 취득을 위해 윌슨 대통령을 면담하고자 했지만, 윌슨은 자신의 제자인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이승만과 그 일행은 파리 강화회의 참석이 불가능하게 됐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 내용)  

  

파리강화회의에서 강대국들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무시했지만, 그해 식민지 조선에선 전국적으로 반일운동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3.1운동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저항운동이었고, 비록 일제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났지만, 민중 대부분이 참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 참석이 좌절되면서 새로운 방안을 모색했다. 그것이 바로 위임통치 청원이었다. 1919225일 이승만은 위임통치 청원서를 우편으로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는데, 이 청원서 내용이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알려지면서 독립운동 세력들은 크게 분노했다. 그가 작성한 청원서의 한 부문은 다음과 같다.

 

저희들은 자유를 사랑하는 1500만 한국인의 이름으로 각하께서 여기에 동봉한 청원서를 평화회의에 제출하여 주시옵소, 연합국 열강이 장래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현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지지하여 주시기를 간절이 청원하는 바입니다.”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거리행진)  

  

아무튼, 이와같은 이승만의 위임 통치서가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더 분기충천하게 만든 일은 1919314일 이승만의 측근인 정한경이 미국 신문과의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 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데 있다라고 설명한 데에 있다. 즉 이승만이 주장한 위임통치론은 말 그대로 미국이 대신 조선을 일본 대신 통치해주자는 발언이었고, 이것은 이승만의 친미사대주의적인 발언이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3.1운동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고 난 다음에도 위임통치 문제를 가지고 미국 언론의 주목을 끌고자 했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이 보인 행동은 친미 사대주의적인 행보였다. 이승만을 연구한 이화여대 교수 정병준은 이승만의 노골적인 반일운동은 3.1운동 이전까지 한 차례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필라델피아에서의 행진 당시 성조기와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이승만)   

 

대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세와 하와이 내 자신의 입지에 따라 대일관에서 유화적인 자세와 반일을 오고 갔지만, 한인 사회 내부에 대해서는 언제나 반일 구호를 내세웠다. 이승만은 자신의 종교 활동과 교육활동이 모두 독립과 반일을 위한 것이라고 한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나 1915년의 국민회 쿠데타와 1918년 이즈모호 사건 등은 이승만의 대내적 반일구호가 실제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한 도구일 뿐이라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1919년 이전까지 이승만은 단 한 차례도 노골적인 반일운동을 벌인 적이 없었다.”

 

이승만은 310일 서재필에게서 국내의 3.1운동 소식을 들었고, 재미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독립운동의 요람지로써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414일 한인대회를 열었다. 14일부터 16일까지 대략 3일 동안 필라델피아 소극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서재필, 이승만, 임병직, 조병옥, 유일한 그리고 노디 김 등이 참가했고 총 150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들이 참가했다. 비슷한 시기 국내외에서는 몇 갈래로 임시정부 수립이 시도되었고, 19193~4월 국내외적으로 도합 8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선포되었다. 이중에서 실제적인 조직과 기반을 갖추고 수립된 것은 러시아 연해주, 상해 그리고 한성정부였다. 한성임시정부는 이승만을 소위 집정관 총재로 선출했다.

(임시정부 건국 강령)  

  

19194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상하이에서 국내외에서 모여든 조선의 각구 대표 30명이 410~11일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여기서 임시헌장 10개조와 정부 관제를 채택,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대내외에 선포했다. 그리고 국무위원을 선출했는데, 여기서 국무총리는 바로 이승만이 되었다. 더나아가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초기 개화운동 이후에 아무것도 한게 없었던 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결과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엇던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주진오 교수는 무엇보다도 그가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비쳤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배재학당 시절부터 맺어진 미국인 선교사들과의 친밀한 관계가 늘 막강한 배경을 이루었다라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국내에 과장되게 알려졌던 그의 외교활동 성과도 큰 몫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상해임시정부의 운동노선이 외교론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때 가장 주된 관심의 대상은 당연히 미국이었다. 그러므로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잘 수행해 낼 수 잇는 사람으로서 이승만이 주목된 것이 그가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차지하게 된 배경을 이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왕족의 후손이라는 신화와 35일 간에 불과했던 중추원 의관의 경력, 그의 구속이 사실은 박영효 역모사건과 관련때문이었지만 만민공동회 활동의 결과라는 인상도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1920년 이승만이 이끌던 구미위원부)   

 

하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자 그의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있었다. 즉 이승만이 국무총리를 맡아서 되는 지에 대한 적격성 논란이었다. 1911년 전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새웠던 우당 이회영이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 그리고 이승만과 의형제를 맺기도 했었던 박용만 등 무장 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은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했다. 이들은 이승만이 선출되자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 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단재 신채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한 단재 신채호, 그는 이승만을 이완용 보다 더 한 매국노로 간주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 큰 역적이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은 놈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되고 난 이후부터 그 권위를 이용했다. 그는 상하이임시정부의 거듭된 현지 업무 집행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는 191910월 초부터 19206월 말까지 자신의 비서 임병직과 함께 미국 주요 도시를 순방하면서 교포들과 미국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임시정부의 지지를 호소했지만, 한편으로 그의 외교노선으로 이회영 신채호 등이 상해 임시정부를 떠나 북경으로 올라가 버렸다. 또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후 그 기관의 돈줄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그는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국채를 발행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의 행동은 무장투쟁을 추구하던 이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임시정부를 내분에 휩싸이게 했다. 따라서 독립운동사에서의 이승만의 존재는 분열과 갈등 그리고 사리사욕에 찬 상징이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수입] Patriot (패트리어트 - 늪 속의 여우) (Extended Cut)(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Sony Pictures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멜 깁슨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 패트리어트(The Patriot)’를 봤다. 이 영화는 프렌치 인디언 전쟁 당시 늪 속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으며 프랑스군에게 공포를 심어주었던 식민지 미국의 지주이자 퇴역 군인인 벤저민 마틴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의 횡포와 탄압에 맞서 싸워가며 애국자가 되어가는 모습을 그렸다. 영화 초반의 벤저민은 전형적인 개인주의로써 영국과의 전쟁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독립전쟁 과정에서 자식을 잃게 되면서 독립군에 합류하게 되고, 더 나아가 미국 독립군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이러한 벤저민의 변화를 통해 영화는 소위 미국적 가치가 얼마나 위대하고 훌륭한 덕목인지를 선전한다.

 

영화에 나오는 영국군들은 그저 다 찌질이들일 뿐이다. 죄없는 민가에 가서 민간인들을 집단 암매장하고, 독립군들을 마구잡이로 쏴죽인다. 즉 영화는 미국이라는 정의로운 존재가 마치 악의 무리에 맞서 하나님 앞에서 보장된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묘사한다. 참으로 웃긴 것은 멜 깁슨이 주연을 맡았던 실존 인물인 벤저민 마틴은 흑인 노예들을 마구잡이로 부리는 인물이었고, 그 외의 독립군 세력들도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으며 그들에게는 어떠한 자유와 평등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러나 영화는 마치 미국의 정의로운 존재들은 흑인들을 생각했던 것처럼 아주 교묘하게 역사를 왜곡한다.

  

이처럼 영화의 구도는 참으로 단순하다. 영국군들은 찌질이들이고, 독립군과 노예를 부리던 워싱턴류의 지배계급들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는 인간이다. 전형적인 애국주의적 선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하고 애국주의적인 구도를 어느 정도 희석하는 장치가 있는데, 그게 바로 화려한 전투장면과 그에 걸맞은 배경음악이다. 영화감독은 애국주의를 시청자에게 홍보하기 위해서 영국군에 맞서 싸우는 독립군들의 전투를 매우 화려하고 강한 연출로 소화해낸다. 영화는 애국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전투장면을 화려하게 만드는 쪽을 택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가장 비판받아야 할 점은 흑인에 대한 역사 왜곡일 것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달리 흑인들은 식민지 미국의 노예로 살았고,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이들을 소유했으며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을 절대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이 편치 않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식 애국주의 영화 패트리어트는 전형적인 역사 왜곡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며 미국은 위대하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영화에서 나오는 미국 독립전쟁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1776년 소위 자유와 평등을 외친 건국 아버지들의 정신 따위가 아닌, 무수히 많은 원주민과 흑인들에게 지배자 영국보다 못한 대우를 했던 추악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역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