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바도르 아옌데 - 혁명적 민주주의자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 지음, 정인환 옮김 / 서해문집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지난 2019년 남미에서 가장 긴 영토를 자랑하는 국가 칠레는 대규모 항의시위에 휩싸였다. 수많은 칠레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시위를 벌였고, 그 시위는 2020년인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되고 있다. 칠레는 부의 불평등이 극심한 나라다. 유엔 중남미ㆍ카리브경제위원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상위 1%가 전체 국가 부의 26.5%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가 차지하는 부는 전체의 2.1%에 불과할 정도로 칠레의 빈부격차 문제는 심각하다. 현재 칠레의 최저임금이 한국 돈으로 49만원 정도이지만, 민중의 53%62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고 있고 231만원 이상을 버는 샐러리맨은 칠레 인구 전체의 6.1%밖에 되지 않는다. 거기다 대학 등록금은 비싸고 의료보험과 약값도 비싸기에 일반 민중의 부담은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칠레의 상류 계급들과 기업들은 엄청난 이윤축적을 하고 있기에, 칠레 민중들은 이에 분노하여 거리에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빈부격차와 기업의 착취적 이윤창출로 인하여 민중의 불만이 극심한 칠레에서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사회주의자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적이 있다. 그는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대통령이 된 이후 칠레에서 평화적인 방법으로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세계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된 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살바도르 아옌데는 참으로 매력적인 생애를 가진 인물이다. 1908년 칠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쿠바 혁명가 체게바라처럼 의대에 입학했고, 군복무와 의대시절의 경험 그리고 각종 반정부 시위를 통해 사회 비판적 의식을 길렀으며, 마르크스주의를 학습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1938년부터 1942년까지 그는 칠레의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쳤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부터는 칠레의 상원의원을 지냈다. 칠레 사회당에서 정치경력을 쌓은 그는 3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지만, 1952년과 1964년 대선에선 칠레 좌파계열의 분열과 보수진영의 방해공작으로 패배했었다. 1970년 그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칠레의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그는 빈부격차가 극심한 칠레에서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을 실행했다. 그는 집권 초기에 수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폭등하던 물가인상률을 30%대에서 15% 이하로 감소시켰다.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약 8% 이상까지 치솟게 했고, 산업 생산과 광산ㆍ농업 생산량도 모두 성장세를 보였다.

 

초기 아옌데의 정책으로 칠레 경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호황을 누렸고, 수많은 이들이 전보다 나은 식품과 소비재를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고,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집세는 가계 수입의 10%를 상한선으로 정해, 더 인상할 수 없도록 했다. 아옌데의 개혁정책 뼈대에는 칠레 경제를 3개 부문으로 개편하는 방안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사회 부문, 혼합 부문, 민간 부문으로 나눠, 민주적으로 결정된 계획에 따라 긴밀히 연계될 수 있도록 했다. 가장 중요한 조처는 구리, 질산염, 요오드, 철광석, 석탄 산업과 금융, 무역, 그리고 칠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독과점 부문들의 국유화정책이었다. 따라서 아옌데는 많은 부분에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다.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진보적인 조치들을 단행해 나가자, 이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있었는데 바로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반공의식을 가진 미국과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 그리고 사회주의에 불만을 품은 우익 세력들이었다. 1970년 대선에서 인민연합을 겨냥한 흑색선전에 80~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부었던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아옌데가 칠레의 대통령이 되자 CIA를 이용하여 칠레에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고, 이들에게 부역하는 세력은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대형 슈퍼마켓과 증권거래소, TV 방송국과 철도, 공항 유류 저장 시설로 폭탄이 날아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테러 행위를 일삼는 이들에게 자금을 댄 것은 역시 미국과 CIA였다.

 

결국 미국은 1973년 우익 출신 군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이용하여 군사 쿠데타를 획책했다. 미국은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도왔고, 수도 산티아고는 피바다가 되었다. 피노체트 휘하의 반혁명 세력들은 아옌데가 있던 대통령궁을 비행기로 폭격하고 탱크를 앞세운 군대를 보내 아옌데 측 군대를 진압했다. 아옌데 또한 피델 카스트로에게 선물받은 AK-47 소총을 들고 반혁명 군대와 총격전을 벌였지만, 그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됐다. 1973911일에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 아옌데는 반혁명 군대와의 대치속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했는데, 그 내용중 일부를 발췌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동자와 농민과 지식인 모두, 앞으로 파시즘 치하에서 탄압을 당하게 될 겁니다. 파시즘은 이미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테러가 횡행하고, 교량이 파괴되고, 철로가 끊기고,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이 파괴돼도 이를 막아야 할 자들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저들 역시 똑긑은 짓을 저지른 겁니다. 역사가 저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인민 여러분,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절대 희생돼선 안됩니다. 저들에게 압도당해서도, 살육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저들의 모욕을 참지도 말아주십시오. 조국의 노동자 여러분, 저는 칠레와 칠레의 운명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반역이 우리에게 강요한 이잿빛의 쓰디쓴 순간도, 누군가는 반드시 이겨낼 것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 머지않은 장래에, 자유로운 인간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당당하게 걸어갈 드넓은 길을 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칠레 만세! 인민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마지막 말입니다. 제 희생이 헛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적어도 제 희생을 통해 범죄자와 비검한 자, 반역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도덕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 p.236에서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 일부 발췌

 

아옌데가 죽고 난 이후 칠레에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피노체트와 그의 주구들은 점령군 행세를 했다. 쿠데타 이후 불과 몇 달 새 수십만 명이 체포, 구금됐고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 병사들은 총살되었으며, 아옌데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장교들은 줄줄이 체포돼 고문당했고, 일부는 살해됐다. 칠레 좌파 정당의 평당원이나 노동조합 조합원도 탄압의 대상이 됐다. 많은 이들이 살해됐고, 이들 중 어린이 수십 명도 고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살해됐다. 지방에서는 지주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적 보복을 가했다. 군부는 의회를 해산시키고, 더 나은 미래와 이상적 사회를 꿈꾸던 수천 명의 이름 없는 이들도 삶을 마감했다. 피노체트가 아옌데의 유산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하면서 교육계에서 좌파 성향의 인사들이 줄줄이 축출됐다. 또한, 그는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이렇게 피노체트는 친미주의를 유지하며 독재 권력을 휘둘렀다. 피노체트부터 시작된 칠레의 정부는 무능했고 사회주의적 정책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칠레의 극심한 빈부격차와 초과이윤을 위한 소수 자본가들의 극심한 민중 착취 체제다.

 

칠레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극심한 불만이 심화되면서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피노체트 정권은 사회주의자 아옌데가 남긴 유산을 지우려 했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이 칠레 사회에 폭발적으로 나타나면서 아옌데는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이들에게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이다. 칠레의 사회주의자 대통령 아옌데의 존재는 미국이라는 악랄한 제국주의 국가가 사회주의 정권을 어떻게 파멸 시킬 수 있는지도 보여주기도 한다. 아옌데의 비극적 죽음과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악랄함과 사악함이 칠레를 어떤 비극으로 몰고 갖는지도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아옌데의 존재는 사회주의자가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민주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사회주의 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비록 아옌데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의 반동 쿠데타로 생을 비극적으로 마감했지만, 사회주의자가 민중 대다수에게 지지를 받았을 때 가지고 올 변화가 무엇인지 집권 기간 3년을 통해 보여줬다. 그는 칠레 인민들에게 안정적인 노후연금과 질높은 교육, 외세의 기업적 착취 및 인권유린 종결,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질높은 소비재 보급을 추구했고, 실제로 짧은 기간에 그걸 달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것은 미제국주의와 칠레 우익 부르주아 계층의 도움 없이 이룩한 아옌데의 업적이었다. 아옌데가 추구했던 정신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누려야할 당연한 인권이기도 하다.

 

빅터 피게로아 클라크가 집필한 살바도르 아옌데, 혁명적 민주주의자는 혁명가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민중의 인권과 사회주의 사회를 향한 그의 열정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훌륭한 명저다. 이 책은 읽는 이로 하여금 아옌데의 감동적인 생애와 사회주의적 열정을 느끼게 할 것이다. 글 앞부분에서 상술했듯이 현재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가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적 내부 모순이 극대화된 사회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적 민주주의자이자 사회주의자인 아옌데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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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월간 미제국주의 역사를 연재하며 참고한 참고문헌들 올립니다.  

미국사, 이주영, 대한교과서, 1997
미국사(맥을 잡아주는 세계사 09),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있는책, 2015
미국사 산책 시리즈,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10...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I II III, 앨런 브링클리, 황혜성, 휴머니스트, 2011
하룻밤에 읽는 미국사, 손세호, 랜덤하우스코리아, 2011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II, 올리버 스톤, 이광일, 들녘, 2015
미국사 다이제스트 100, 유종선, 가람기획, 2012
아메리카 제국의 몰락 (상), 황성환, 민플러스, 2018
미국과 맞짱뜬 나쁜 나라들, 임승수 문경환 (외), 시대의창, 2008
미국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 케네스C. 데이비스, 이순호, 책과함께, 2004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노엄 촘스키, 김보경, 한울(한울아카데미), 2007
하워드 진의 만화로 보는 미국사, 하워드 진, 송민경, 다른, 2013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래리 고닉, 노승영, 궁리, 2018
전쟁 국가의 탄생, 레이첼 매도, 박중서, 갈라파고스, 2019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 존 다우어, 정소영, 2018
미국 민중사 I II, 하워드 진, 유강은, 이후, 2008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김영진, 추수밭, 2008
전쟁과 기독교, 김상구, 책과나무, 2013
현대 미국의 이해, Russell Duncan, Joseph Goddard, 민병오, 명인문화사, 2015
이현상 평전, 안재성, 실천문학사,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2017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정병선, 책갈피, 2004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 2010
미국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사, 황재연, 군사연구, 2017
아프가니스탄 왜?, 권희석, 청아출판사, 2017
민중의 세계사, 크리스 하먼, 천경록, 책갈피, 2004
좌파세계사, 닐 포크너, 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미국학교에서 가르치는 미국역사, 조성일, 소이연, 2013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하워드 진, 유강은, 이후, 2016
이슬람 전사의 탄생, 정의길, 한겨레출판, 2015
진실이 밝혀지다, 마리오소사, 노사과연 편집부, 노동사회과학연구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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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96 2020-04-01 04: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NamGiKim 2020-07-20 13:54   좋아요 0 | URL
잘 참고하세용!
 

14세기부터 이어오던 일본의 무로마치 막부는 6대 쇼군인 요시노리 시기에 동요하기 시작했다. 1438년부터 커다란 내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고, 내란을 시작으로 각지역 다이묘들의 불만은 확산되어 갔다. 요시노리가 암살당한 이후 새로 취임한 쇼군은 불과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쇼군의 지위에 올랐다. 요시마사가 성년이 되어서도 불안한 정세는 계속되었는데, 이시기 막부의 부패는 극에 달했었다. 이 과정에서 막부와 쇼군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자 귄신 간의 세력 투쟁이 격렬해졌고,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일본에선 각 지방 영주들의 군사적 세력다툼인 전국시대가 시작됐다.

 

1467년에 시작된 오닌의 난은 11년간 지속했었다. 오닌의 난으로 인하여 쇼군의 권위와 내려갔고, 많은 다이묘들이 자신의 영지로 내려가 이제는 쇼군의 통제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닌의 난 후 약 반세기가 지나면서 새로운 세력인 전국 다이묘가 각지에서 할거하게 됐다. 전국 다이묘로 성장한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하나는 과거 일본에서 영향력이 있던 슈고 다이묘에서 전국 다이묘로 변신한 경우고, 다른 하나는 슈고다이 등이 하극상이라는 사회 풍조를 이용하여 슈고 다이묘 등을 타도하고 권력을 탈취한 경우였다. 후자의 경우는 오다 노부나가가 대표적이다.

 

전국 다이묘들은 혈연이 다른 재지영주와 백성을 포함하는 지역 결합을 군사력의 핵심으로 삼았다. 전국 다이묘는 다수의 재지영주를 자신의 유력 가신 밑에 배속시킴으로써 그들에 대한 통제의 효율성을 높였고, 창을 활용한 집단 전투를 도입했으며, 군량미와 무기 운송에 일반 백성들을 동원했다. 또한 그들은 가신들이 보유한 토지에 따라 세금을 부과하게 했고, 자신들의 나와발이를 원활하게 지배하기 위해 분국법 또는 전국가법이라 부르는 독자적인 성문법을 제정했다. 일본 전국시대의 특징중 하나는 전국 다이묘들이 다스리는 지역이 굉장히 많이 분산되어 있었다는 점인데, 각 지역을 다스리는 다이묘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독자적인 지역국가를 형성했었다. 따라서 이 전국시대에는 일본 전역에서 전국 다이묘들 간의 크고 작은 전투가 지속되었다.

 

1543년 일본 전국시대의 형세를 뒤집어 놓을 무기가 일본에 도착했다. 당시 인도의 향신료를 찾아 무역로를 확장하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아시아까지 항로를 개척했고, 그리하여 포르투갈인을 태운 상선이 일본 규슈 다네가시마에 닿은 것을 계기로 일본과 포르투갈 간의 무역이 시작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에는 소위 조총이라 불리는 무기가 들어왔고, 일본은 포르투갈인들에게 그 사용법과 제조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총은 일본 곳곳에 파졌고, 포르투갈인들은 조총술을 가르쳐줌과 동시에 일본산 은을 얻음과 동시에 기독교 사상까지 전파했다. 이런 과정에서 포르투갈인들이 준 조총의 위력을 알아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603만의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향하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오케하지마에서 고작 3천의 군사로 물리친 다이묘로서 두각을 나타낸 오다노부나가는 1567년 미노의 사이토 씨를 멸하여 비옥한 노비 평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여 수도 교토에 입성함으로써, 천하 통일의 일보를 세웠다. 그는 조총술을 군대에 익혀 적은 군사로도 많은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는데, 3개의 조로 편성한 조총 사격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매우 효율적이었다.

 

1570년 아자이 나가마사와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연합군을 아네가와 전투에서 물리친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위한 전쟁을 계속해나갔다. 일본의 쇼군들은 세력이 커지는 오다 노부나가를 견제하기 위해 세력을 연합하여 대항했지만, 1573년 오다노부나가는 그들을 무찌르고 무로마치 막부를 멸망시켰다. 또한 그는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량의 총포를 이용한 전법으로 당시 최강의 기마군단을 이글던 다케다 가쓰요리를 물리쳐 전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오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위를 보여주기 위해 아즈치 성 건설에 착수하여 1579년에 완성시켰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왜냐하면 그의 심복이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그를 배신해버렸기 때문이었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는 덴모쿠 산의 싸움에서 자신의 숙적인 다케다 가쓰요리를 멸하고 모리 씨 정벌에 착수했는데, 아케치 미쓰히데가 그를 배반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목숨을 잃은 뒤, 그의 충실한 심복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82년 야마자키 전투에서 배신한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대를 섬멸했고, 이어 1583년 노부나가의 고위 장군 시바타 가쓰이에를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패망시키고, 가쓰이에에 협조했던 노부나가의 셋째 아들 노부타카를 자살로 몰아넣어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1584년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마키와 나가쿠테 전투를 벌였는데,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이에야스와 화해하여 그를 휘하에 두는 데 성공했다. 1585년 히데요시는 기이를 평정한 후, 시코쿠를 정벌했고, 1587년에는 규슈를 정벌했다. 그리고 1590년 히데요시는 호조 우지마사를 멸망시킴으로써 최종적으로 전국을 통일했다. 이렇게 해서 전국시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이룩함에 따라 끝났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의 왕이 된 이후 일본은 전쟁을 다시한번 치르게 됐는데, 그게 바로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이다. 전국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인도까지 정벌할 야심을 가졌었지만, 그의 꿈은 조선 반도에서 깨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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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베트남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다. 19세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를 식민지화한 이래로 베트남은 독립투쟁을 전개해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Ho Chi Minh) 휘하의 베트민은 대동아공영권이라는 허상 아래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일으키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프랑스를 무찔렀다. 이후 미국이 남북으로 가르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자, 호치민과 공산당의 지도아래 단결한 베트남은 침략자 미국을 무찌르고 1975년에 통일을 이룩했다.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까지 무찌른 베트남이었지만, 베트남에게 평화가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봉건세력에 맞선 투쟁이 전개됐다. 라오스에서는 수파누봉(Prince Souphanouvong)의 지휘아래 라오스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파테트 라오(Pathet Lao)’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웠고, 캄보디아에서는 소위 크메르루주(Khmers Rouge)’론 놀(Ron Nol)’의 친미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승리로 끝나기 13일 전 캄보디아에선 폴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루주가 론 놀 정권을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고, 그해 12월 라오스에서는 파테트 라오가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는 사회개조작업이라는 명분하에 캄보디아를 광적인 학살국가로 변모시켰다. 수도 프놈펜에 있던 중앙은행을 폭파하고, 노동자 외에는 도시민들을 모두 농촌으로 보내어 집단농장에서 일하게 했으며, 소위 인텔리겐치아로 의심되는 대부분의 사람을 죽였다. 즉 폴포트는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고 광적인 킬링필드(Killing Field)’를 시작한 것이다. 4년간의 킬링필드로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과거 서방이 얘기하는 300만 학살설이나 250만 내지는 200만 학살설이 과장이라 할지라도 아무리 적게 잡아도 최소 80~150만의 캄보디아인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관계는 과거부터 좋지 않았다. 18세기 베트남이 소위 남진정책(Nam tiến)’을 추진하며 참파를 정복하며 당시 캄보디아의 영토였던 코친차이나 일대도 접수했다. 이런 양국의 갈등은 꽤나 심각했고, 1970년대 캄보디아의 친미 지도자였던 론 놀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서 활동하던 반베트남 단체인 Fulro를 지원했었다. 1975년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자 폴포트 또한 반베트남 성향을 드러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접수하고 통일을 이룩한 그 다음날인 51일 폴포트의 크메르루주군은 베트남의 푸꾸옥(Phu Quoc)을 기습해 점령했다.

 

킬링필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폴포트는 다시 한번 반베트남 감정을 드러냈다. 폴포트는 병사들에게 적들을 마음대로 죽여라. 하찮은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고 격려하며 베트남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했다. 1977430일 베트남 남서부 안장(An Giang)성의 국경도시 쩌우독(Chau Doc)을 공격해 베트남 시민 수백 명을 죽였고, 그해 9월엔 베트남 국경지역을 포격하고 6개 마을을 점령한 데 이어 6개 사단으로 떠이닌(Tay Ninh)성을 공격해 10km 정도 진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들을 또 학살했다. 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킬링필드 과정에서 베트남과 연관된 인사들까지 탄압하며 학살했고, 이것은 베트남의 하노이 정부를 분노케 했다.

 

폴포트에게 분노한 베트남 정부는 8개사단을 소집해 19771216일 베트남 인민 공군의 지원 아래 반격을 개시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잘 단련된 베트남 인민해방군의 주력부대는 크메르루주 군대를 박살내고, 19781월 초에는 수도 프놈펜에서 불과 38km 떨어진 지점까지 도착했다. 당시 베트남군은 크메르루주에 대한 협상을 포기하고 군대를 철수시켰는데, 크메르루주 지도부는 이를 자신들이 대승을 거둔 것이라고 자찬했다. 이때 크메르루주군은 철수하는 베트남군을 따라가 베트남 최남단 국경 마을인 하띠엔(Ha Tien) 외곽을 점령했는데, 이걸 계기로 하노이 지도부는 크메르루주 정권을 전복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베트남군 철군이후 기고만장해진 크메르루주군은 다시한번 안장성 국경마을들을 공격해 베트남 민간인 3천 명을 학살한 뒤, 베트남군을 피해 퇴각했다. 결국 베트남은 폴포트 정권에 맞서 전면전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정부는 35만 명을 징집하여 신병들을 훈련시키는 동안 10개 정예사단을 캄보디아 국경에 배치했다. 또한 라오스에 주둔 중이었던 3개 사단도 라오스-캄보디아 국경으로 이동시켰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와의 전면전쟁을 준비하자 캄보디아를 지원하던 중국은 베트남에게 정치적으로 경고를 하며 캄보디아에 대한 무기 공급을 대폭 확대했다.

 

19781221일 베트남 2개 사단이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군을 공격했다. 4일 뒤인 크리스마스에는 13개의 사단으로 이뤄진 15만 병력과 야포 전투기까지 동원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폴포트에 반대해 베트남에 망명해 있던 크메르루주군 병사들도 베트남과 연합하여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가 시작된 지 2주 만에 폴포트의 캄보디아군은 병력의 절반을 잃었고, 퇴각을 거듭했으며 197917일에는 프놈펜 또한 베트남군이 접수하게 됐다. 이렇게 캄보디아를 접수한 베트남은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키고 그곳에 친베트남 정부인 훈센 정부를 세워놓고, 1989년에 철군했다.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사이가 매우 안좋던 캄보디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베트남이 폴포트 정권으로부터 해방해주자 캄보디아인들은 베트남군을 해방군으로 맞았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맞보았던 미국은 베트남을 견제하기 위해 폴포트 정권을 지원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이후 베트남 정부가 폴포트 정부를 전복시키자 중국의 덩샤오핑은 캄보디아를 침공한 베트남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베트남 북부를 공격하기로 했고, 1979217일 중국은 베트남 국경지대에서 진격을 개시했다. 그 전쟁에서 중국 인민해방군 20만 명이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침공했고, 탱크 200대와 항공기 170대도 동원되었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공격은 랑선(Lang Son)과 라오까이(Lao Cai) 그리고 까오방(Cao Bang)에 집중됐다. 당시 베트남의 주전력은 캄보디아에 가 있었기에 중국군의 진격을 막는 베트남군은 미약했다. 6개 사단만이 베트남 북부지역에 주둔해 있었고, 나머지는 민병대로 이루어진 보조병력이었다. 그들은 수도 하노이를 지키기 위해 방어병력을 하노이 외곽에 집중배치해 놓았고, 국경에서의 전투는 10만 명의 민병대에게 맡겼다.

 

과거에 중국의 침략에 맞서 싸웠듯이 베트남군은 북부의 산악지대를 이용해서 최대한 버티며 중국군의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베트남군은 미군이 남베트남군에 제공한 장비들과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제공한 최신무기들로 중국군에 맞서 싸웠다. 심지어 베트남군은 소련제 대전차 미사일로 개전 하루 만에 중국군 탱크 13대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렸으며, 미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군 장교들의 지휘 능력도 중국군을 능가했다. 결국 중국군은 이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10만 명의 병력을 더 투입했고, 225일 동당과 몽카이의 베트남 국경 마을들을 점령했다. 이렇게 첫 성과를 거둔 중국군의 진격이 잠깐 멈추자 베트남군은 즉각 반격에 나섰고, 베트남군은 중국군이 점령한 동당을 탈환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랑선 전역에 한국전쟁 때 파병했던 정예사단 두 개를 투입했고, 격렬한 시가전 끝에 36일 중국군은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중국군은 랑선을 점령한 이후 베트남에 교훈을 주는 목적을 당성했다라고 하면서 철군을 선언했고, 베트남도 휴전에 동의했다. 양측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군을 막은 베트남의 군대가 정규군이 아닌 민병대였다는 점에서 중국은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국제정세의 양상을 제대로 보여준 전쟁이었다. 폴포트를 지원했던 중국은 베트남과 전쟁을 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랑 전쟁을 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싶었던 소련은 베트남을 지원했고,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 베트남을 견제하고 싶었던 미국은 폴포트 정권을 지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국제정세의 원리를 아주 명확히 보여준 전쟁이었다.

 

참고자료

 

미국의 베트남 전쟁, 조너선 닐, 책갈피, 2004

천년전쟁, 오정환, 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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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의 폭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소위 신대륙에 도착하여 저질렀던 침략의 역사부터 2020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종결까지 총 27개의 주제로 나누어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정리해보았다. 페이스북과 더불어 SNS에 ‘미제국주의 역사’라는 제목을 달고 몇 개월간 글을 올리면서 필자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보다 자세하게 공부할수 있는 기회였다. 처음 시작은 페친들에게 미국의 실체를 낱낱이 폭로하기 위해 간단히 시작할 생각이었지만, 집필할 거리들이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 올리게 된 미제국주의 역사는 단순히 미국의 팽창 혹은 침략의 역사만을 다루지 않았다. 주로 미국이 일으키거나 개입한 전쟁들을 위주로 글을 쓰긴 했지만 미국사회에서 억압받고 멸시받던 흑인들의 역사와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미국 지배계급의 역사도 집필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리즈 중 일부는 흑인노예의 역사와 백인들의 인종테러 그리고 1950,60년대 흑인인권투쟁도 다뤘다.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소위 자유주의 체제를 현재 유럽보다 더 많이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민낯을 너무나도 모른다. 19세기 미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기업가 계층으로 성장한 지배계급들은 이윤 창출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인간 이하의 노동을 강요했고, 낮은 임금을 부여했다. 십일조를 안 기업인이라며 기독교인들에게 극찬을 받는 석유 재벌 록펠러는 1914년 콜로라도주에 있는 러들로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하자 개틀링 기관총으로 무장한 주방위군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세기와 20세기 미국의 기업가들은 노동자에게 인간이하의 노동을 강요했고, 1889년에만 보더라도 최소 22000명 이상의 철도노동자가 죽고 다치는 일이 발생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에선 만약 노동자가 산업재해에서 팔이 잘리거나 다리가 잘려 가난을 면치 못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책임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여겨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대통령이 된 하버트 후버 또한 가난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떠받들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정책을 하기 이전까지 미국은 국가가 시장경제에 개입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 역사에선 흑인의 역사를 빼놓을 수가 없다. 17세기 초 북미 대륙에 소위 영국의 식민지가 건설된 이래로 버지니아주를 포함한 미국 남부에는 흑인 노예제도가 자리 잡았다. 그들이 북미 대륙에 오게 된 이유는 유럽에서 오던 계약 하인제를 대체하기 위한 노동력 확보였지만, 식민지 미국인들의 이윤 창출을 위한 목적으로 인하여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려온 흑인들은 백인들의 노예가 됐다. 이런 노예제도는 독립전쟁 이후 미국의 민주주의를 꽃피웠다는 건국의 아버지들 또한 그들의 처지를 전혀 생각지 않았기에 19세기까지 고스란히 유지됐으며, 남북전쟁 이전까지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노예제도에서 벋어나지 못했다. 남북전쟁 이후에도 흑인들에 대한 멸시는 계속됐고, KKK와 같은 인종주의 단체들은 20세기까지 린치라 하여 흑인들을 목메달아 죽이거나 십자가에 산채로 태워 죽이는 범죄를 저질렀다. 흑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차별받았고, 미소냉전이 한참이던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도 극심한 인종차별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의 인종차별과 흑인 멸시는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는 침략의 역사다. 1803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루이지애나주를 선물받은 미국은 영토 팽창에 나섰다. 1840년대에는 멕시코를 무력으로 침공하여 현재의 캘리포니아, 텍사스, 애리조나, 콜로라도 등의 광활한 영토를 강탈했다. 19세기 영국과 프랑스같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정복 전쟁에 나설 때 미국 또한 영토 팽창에 나섰다. 미국은 괌과 하와이등을 합병했고, 미서전쟁 이후 쿠바를 사실상 식민지 지배를 했으며, 필리핀을 합병한 뒤 대략 20만 이상의 필리핀인을 학살했다. 1900년 중국에서 일어난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미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과 더불어 베이징에 간섭군대를 파병했고, 청나라의 의화단 운동은 잔인하게 진압됐다. 1차 세계대전이 있던 1910년대 미국은 니카라과를 침략했고, 도미니카 문제에 개입하여 8년 동안 그 나라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전역에서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반혁명 세력인 백군을 돕기 위해 12000명의 미군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상륙시켰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미국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타국 문제에 개입하고 간섭했으며 때로는 침략을 자행하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한국은 미군정이라는 이름하에 3년 동안이나 지배를 받았다. 미국은 해방 이후 전국적으로 건국사업과 치안 유지를 해나가던 여운형의 조직을 불법 단체로 간주하여 강제로 해산시켰고, 한반도 이남에 자신들의 패권 유지를 위해 과거 일본 제국주의에게 결탁했던 친일 세력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친일세력들이 세력화하면서 한반도 이남에선 수많은 민간인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학살당했다. 친미세력들의 이러한 학살은 1950년 한국전쟁에서 최소 30만 이상을 학살한 국민 보도연맹사건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남북한 할 거 없이 무차별 폭격을 퍼부어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그 외에도 미국은 1947년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그리스 좌익의 씨를 말린 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 시작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에서 미국은 반민중적인 장제스 정권에게 1949년까지 20억 달러를 원조했으며,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한때 동맹이었던 호치민을 버리고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전쟁 비용 80%를 제공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쿠바혁명이 성공하여 친미국가 쿠바에서 사회주의에 기초한 국가가 탄생하려 하자 미국은 쿠바를 경제적으로 봉쇄했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때는 핵전쟁을 운운하며 쿠바와 소련에게 막대한 군사적 압박을 가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남북 베트남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베트남 민중 80%가 호치민을 지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 미국은 남베트남에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친미괴뢰정권을 만든 뒤,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정통성 없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은 남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진적으로 증가시켰고, 여러 작전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전개하면서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도 남베트남이 무너질 기미가 보이자 1964년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을 침략했다. 무차별적인 네이팜 폭탄 및 백린탄 투하와 고엽제 살포를 통해 미국은 수백만의 베트남 민간인에게 테러행위를 저질렀으며, 수백만의 베트남인을 학살했다.

 

그 외에도 미국은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중남미 지역의 국가를 침략하고 친미괴뢰정권을 만들면서 무수히 많은 폭력을 저질렀다. 특히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미국 CIA가 진행한 콘도르 작전으로 5만 명에서 6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됐으며,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혀 인간 이하의 고문에 시달렸다. 심지어 1980년대 미국의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에 잡힌 인질들을 통해서 이란에게 무기를 판매했고, 그 무기판매대금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미국은 1776년 워싱턴과 같은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에 의해 탄생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무수히 많은 침략전쟁과 내정간섭을 일삼아왔고, 자신들에 대항하는 세력들에겐 경제제제라는 가차없는 야만 행위를 하여 그 나라 국민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대표적으로 1990년대 걸프전쟁 이후 최소 100만에서 150만 명이 아사했던 이라크가 그러했고, 김일성 사망 이후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던 북한 또한 그러했으며, 21세기 사회주의 사회를 꿈꾸던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그러하다. 필자가 미제국주의사를 SNS에 연재하기 전에는 미국의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후안 과이도라는 괴뢰를 내세워 반동 쿠데타를 획책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연재하는 와중인 20201월에는 이란의 장군인 솔레이마니를 암살하여 미국과 이란 간의 긴장 관계를 극대화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다. 이 사건으로 미국과 이란은 전면전에 돌입할 뻔했었다. 따라서 현재도 미국의 전쟁 도발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번 이란 사태를 보며 필자는 호르무즈 해협 파병을 찬성하고, 미국의 군사적 도발 행위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극단적으로 찬양하는 친미극우주의자들이 모습에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필자가 이 글을 연재한 이유 중 하나는 많은 한국인이 대체로 친미성향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미제국주의 역사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라는 이름하에 미국이 보여준 폭력성에 대해 너무 간과하고 있다. 비록 필자의 능력이 못미쳐 많은 부분이 부족했지만, ‘미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보다 미국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을 갖기를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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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인96 2020-03-23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

NamGiKim 2020-03-23 21:1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gold234234 2021-03-31 2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좋습니다!

NamGiKim 2021-03-31 23:33   좋아요 0 | URL
동무 맞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