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조선 반도 전역에서 민중들과 민족대표들이 뜻을 모아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그 저항운동에는 수많은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이 참가했고, 그 민중들이 참가한 시위는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났었다. 그것이 바로 3.1 운동이다.

 

1. 식민지 조선의 시대적 상황

  

  

19세기 중후반 서구식 근대화를 거친 일본은 조선 반도를 지배하고자 했었다. 1894년에 일어났었던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던 일본은 1895년에는 조선의 민비인 명성황후를 암살했고, 그 외에도 타이완과 요동 반도에 대한 야욕을 드러냈었다. 결국 조선 반도를 놓고 러시아 제국과 이권 다툼을 벌이던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의 고종황제에게 을사조약을 체결토록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이에 반발하여 몇몇 조선 사람들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일본에 맞서 싸웠지만, 현대식 무기와 군사기술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 외에도 애국계몽운동이나 독립협회운동 그리고 신민회 조직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같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결국 1910829일 조선은 을사늑약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을 식민지배하게 된 일본이 펼쳤던 정책은 소위 무단통치였다. 무단통치란 지배자 일본이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강점정책을 실행하던 통치였다. 그들은 조선총독부를 만들어 조선의 행정권, 입법권 그리고 군대사용권 등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일본 헌병이 경찰력을 대신했다.

 

또한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이라 하여 명목상 근대적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으로 실행했지만, 대한제국 시대부터 이루어진 일본인의 조선토지 소유를 합법화하고, 일본인을 대거 조선에 이민시켜 확보한 토지를 그들에게 불하함으로써 일본인 지주를 양산하고 식민지 지주경영제를 강화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만들고자했다. 당연히 이런 일본의 무단통치에 조선인들은 반발과 불만이 많았고, 이런 토대는 조선인들이 일본에게 저항하거나 잘 따르지 않으려 하는 계기가 되었다.

 

2. 3.1 운동의 전개

  

  

이런 과정에서 1914년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은 연합국 편에서 참전했고,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은 승전국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1918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서구 열강들은 패전국의 식민지 문제를 놓고 논의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전후질서의 14개조 원칙을 제안했다. 그 안에는 소위 민족자결주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식민지 지배를 받는 약소민족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당시 중국 상해에 있던 여운형은 미국 대통령 특사인 찰스 크레인을 만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따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19191월 중국 텐진에 있던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프랑스에 보냈다. 여운형과 더불어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그리고 신한청년당의 회원인 선우혁은 조선에 들어와 선천, 평양 등지에서 기독교계의 이승훈 양전백 등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했다. 또 여운형은 직접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에 가서 전러시아조신인대회에 참석하고, 이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에 갈 것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동학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천도교의 지도자 손병희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은 1918년 말부터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제1차 세계대전 종전에 따른 독립운동 혹은 자치운동을 논의했다. 19191월 중순경 그들은 만세시위 형태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를 봤다. 기독교계도 독자전인 운동을 준비했었다. 27일 천도교 측이 평양에 사람을 보내 이승훈을 서울로 불러 독립운동을 협의했고, 225일 천도교와 기독교계는 마침내 연합에 합의하고 학생들에게도 함께 운동을 전개하자고 요청하며 불교계도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운동 지도부는 독립선언에 서명할 33인을 선정하고, 최남선에게 독립선언문의 작성을 맡겼다.

 

19193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들이 따로 독립선언식을 열었고, 선언식을 마친 뒤 민족대표 29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자 학생들은 서울 시가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같은 시각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에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서울의 학생들은 예정대로 35일 서울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 학생, 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다. 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 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운동의 양상도 달라져 계급, 계층 간, 종교단체 간 연대가 활발히 이루어졌고, 시위 자체의 조직화 지속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의 시위는 다수의 민중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시위도 다소 과격화되기도 했다. 물론 그 과격화나 폭력성이란 말은 일본 경찰의 가혹한 탄압에 대한 정당방위의 성격을 지닌 경우가 대다수였지. 처음부터 공세적인 시위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3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 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 경성철도 노동자, 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강력하게 진압했다. 3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23000명이 있었는데, 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다.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 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1919415일 수원 제암리에서는 30명의 주민이 일제의 보복으로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 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 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국 191931일에 시작된 전국적인 만세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이 났다.

 

3.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3.1운동은 해방 이후 남북 할거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남한의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도 소위 애국심을 부추기는 차원에서 3.1운동을 국가적으로 띄었다. 그중 가장 많이 띄운 인물을 뽑자면 아마 유관순을 들 수 있다. 물론 유관순이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정하고 업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3.1운동 그 차제를 유관순이라는 인물 하나만 가지고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3.1 운동은 소수의 지식인 계층만이 참가한 운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상술했듯이 3.1 운동에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경제적으로 수탈받고 억압받던 노동자 농민 계층도 같이 참여했고, 계층의 구분 없이 조선의 독립 쟁취라는 깃발아래 식민지 조선 전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중 투쟁이었다. 3.1운동으로 투옥된 이들은 8511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 것은 농민이었고, 농민은 그 전체의 58.4%였다. 또한 서울에 있던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더불어 노동자 대회를 가지고 자발적으로 파업에 돌입했던 사실에서 우리는 3.1운동은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비록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에는 실패했더라도 이런 노동자 농민들이 학생, 지식인들과 연대하여 반일 투쟁에 나섰다는 점에서 3.1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3.1 운동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왜냐하면 거의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연합하여 일본에 맞서 독립을 외친 일은 이것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분, 계급, 지역, 종교를 넘어 하나로 뭉치게 한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은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이 그러했다. 3.1운동에 감명받은 중국의 대학생들은 1919545.4 운동을 전개했다. 더 나아가 3.1운동의 소식은 인도, 베트남,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의 민족운동에도 자극울 주었다. 이처럼 3.1운동이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가 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반공주의 국가 미국

(로널드 레이건, 그는 켈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던 대통령으로 미국 사회를 다시 반공주의적 사회로 만들고자 했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는 재선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그리고 이란 인질 사건 등으로 인하여 카터에게 크게 실망한 미국 국민들은 좀 더 미국적이고 보수주의적인 후보에게 매력을 느꼈는데, 그 후보가 바로 전직 영화배우이자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던 보수주의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다.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은 로널드 레이건은 일반투표에서 51%를 얻어 41%를 얻은 카터를 꺾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라고 하는 정책을 내세웠다. 이것은 ‘공급 중심 경제학(supply-side economics)’에 기반한 것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은 미국 국내의 각종 사회, 경제 문제에서 줄곧 극단 보수적인 경향을 보이며 보수주의자들의 편에 섰다. 그는 자유 기업 제도와 기업가의 판단을 믿었고, 자유 방임주의만이 경제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레이거노믹스를 추진하면서 도시 지원, 노인 의료 보장제, 저소득층 의료 보조, 식량 구입권,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보조금, 학교 급식 등을 포함한 여러 종류의 복지와 사회 보장에 사용되는 예산을 삭감했다. 그는 부유층과 기업의 이익에 부합하여 그들에게 세금을 삭감하는 경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 레이건의 경제 정책이 나름의 효과를 가져와서 1980년 당시 12.4%였던 인플레이션이 1982년에는 7%까지 하락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레이건의 경제 정책으로 혜택을 본 계층은 당연히 미국의 대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부유층들이었다.

(스타워즈 계획,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은 스타워즈 계획을 세워 소련을 군사적으로 앞지르고자 했다.)

 

레이건 재벌과 자본가 위주의 경제 정책을 추진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반공주의적 시각에 있었다. 미국 공화당 출신의 대통령이었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반공주의자였다. 그는 미국이 세계를 이끌어야 한다 생각했고, 이를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여 소위 악의 제국 소련에 맞서야 한다는 망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미국의 침략전쟁인 베트남 전쟁을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숭고한 사업’으로 생각했었다. 실제로 로널드 레이건의 재임 기간 동안 미육군의 광고 예산은 무려 1억 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또한 그가 추진했던 해군 증강 계획으로 1986년에는 “해군 함대 600대 및 항공모함 15대 확충 계획”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981년 10월 2일 레이건 정부는 미국 전략 무기 시스템 재정비 계획을 발표하며 소련을 대상으로 핵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그가 재임안 8년 동안 군사 지출은 매년 약 1500억 달러에서 3천억 달러로 두배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 예산 총액의 30%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1983년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 당시 한국측 기사)

 

이렇게 미국이 다시 소련과의 체제 및 군사경쟁으로 대응하자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극심해졌다. 그러던 1983년 3월 레이건은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스타워즈’의 이름을 딴 전략 방어 계획인 ‘스타워즈 계획(Starwars Plan)’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20세기 말까지 우주와 지상에 빛이나 빔을 이용하는 지향성 에너지 무기에 공격용 위성과 요격 미사일이 더해지는 다중 미사일 방어 체계를 구축하여 소련의 공격 미사일을 요격한다”라는 것이 핵심이었다. 이러한 레이건의 망상적 계획은 현실 세계와 영화 세계를 착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고, 적잖은 과학자들로부터도 ‘미친 짓’이라는 비난을 받았었다.

(백무현 작가의 만화 전두환에 나온 소련의 대한항공 격추 사건의 이면, 로널드 레이건은 이 사건을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는 것으로 이용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 사회은 굉장히 많이 반공화 되어가고 있었다. 1982년 6월 12일 미국 뉴욕에서 10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핵무기 반대 시위가 열렸는데, 레이건은 시위하는 사람들을 빚대어 “이는 소련 KGB의 사주로 일어난 것”이며 그들은 미국이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1983년 8월에는 269명을 태우고 대한민국 김포공항으로 가던 대한항공 비행기 KAL 007기가 소련의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되는 일이 있으면서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소련에 대한 적대의식을 좀 더 고취시킬 수 있었다. 사실 여기에는 대한항공이 미국을 위해 염탐했다는 얘기도 존재하고, 소련측에서 착륙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고 비행기의 고도를 올렸다는 점에서 많은 의문점이 남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이 터지자 미국의 레이건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국방 예산을 증가했고, 미국에서는 반소련 감정이 생겨났으며, CIA는 그 사건을 통해 니카라과 정부군에 대항하는 콘트라 반군에게 2400만 달러를 지원했다.

(1984년에 개봉한 반소련 영화 레드 던)

 

레이건의 이런 반공적 사상은 미국 영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 영화사는 베트남 전쟁의 상처를 건드리는 <디어헌터 Deer Hunter>나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 Apocalypse Now>와 같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1980년대에는 반공성향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1980년대에 나온 반공영화 3가지를 뽑자면, <레드 던 Red Dawn>과 <람보 시리즈 Rambo> 그리고 <탑 건 Top Gun>을 들 수 있다. 붉은 새벽이라는 제목을 가진 영화 레드 던은 소련의 지시로 이루어진 핵전쟁으로 미국의 대도시가 대부분 초토화된 직후, 평화로운 콜로라도주의 도시를 침공한 저 화려한 소련과 쿠바, 니카라과 연합군을 상대로 학생들이 게릴라 전을 펼쳐 침략자들을 몰아낸다는 허무맹랑한 영화다. 제작비로 420만 달러가 들었던 이 영화는 제작비의 9배 이상인 3837만 달러를 기록하며 나름 흥행했다.

(실베스터 스텔론이 출연한 액션 영화 람보)

 

2019년에 새 시리즈가 개봉할 정도로 미국인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람보는 1980년대 미국의 반공정서와 베트남 전쟁의 패배 의식을 보여준다. 영화 람보는 전직 그린베레 출신인 람보가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에 억류되어 있던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러 베트남에 침투하여 활약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영화에 등장한 람보는 소련 군사고문단장 프톱스키 중령과 북베트남군에게 모진 고문을 받는데, 이를 끝까지 극복해낸 람보는 M-60 기관총 두정을 들고 북베트남군과 이를 지원하는 소련 군사고문단을 몰살시킨다. 주인공 람보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UH-1 헬기가 날라오자 그 헬기에 올라타 병사들을 해치우고 헬기를 강탈해 돌아가 적의 본거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포로들을 모두 구출하게 된다. 이런 서사를 보여주는 영화 람보는 198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미국인들에게 일종에 반공의식을 고취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탑 건)

 

미남 배우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영화 ‘탑 건(Top Gun)’은 1986년 미군에게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며 제작되었다. 인도양 어느 곳에 배치된 미국 항공모함에서 근무하는 주인공 톰 크루즈는 영화상에서 아주 매력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유혹적이게도 기름을 바르고, 햇볕에 그을리고, 멋있는 가죽 재킷을 입고, 오토바이를 몰고, 소울 노래를 부르는 매력 넘치는 전투기 조종사다. 거기다 미모가 아름다운 금발의 아가씨를 매혹할 정도로 연애 능력도 뛰어나서, 영화상에서 아주 화려하고 로맨틱한 연출까지 보여준다. 그는 작전 중에 전우를 잃지만 이를 극복하고 인도양 어느곳에서 소련제 전투기인 ‘미그기(MiG)’와 공중 대결을 펼쳐 유혈 사태 없이 상대편을 굴복시키며, 금발의 여주인공 품에 안는다. 이렇게 액션과 로맨스, 전투의 화려함까지 보여주며 미군을 홍보했던 영화 탑 건은 미국 내 극장에서 무려 5천만 명 가까지 관람했다. 따라서 미군은 영화 탑 건을 통해 자신들이 적 소련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미국과 전 세계에 홍보하고, 돈까지 벌어들이는 일거양득을 보았다.

영화와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과 미군을 홍보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반감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던 미국의 레이건 정부는 국제적으로도 많은 군사 개입과 문제를 초래했다. 로널드 레이건은 다른 나라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승리를 얻기도 했는데,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이 그러했다. 1983년 10월 카리브해의 섬나라 그레나다 상공에서 미군의 C-130 공군 수송기의 뒷문이 열렸다. 수송기의 뒷문이 열리자 미국의 특수부대인 SEAL 팀식스 대원들은 강하했고, 예정대로 강하 지점에 도착했다. 로널드 레이건과 국가안보회의 참모진들이 비밀스럽게 준비한 ‘절박한 분노 작전(Operation Urgent Fury)’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레나다 침공 당시 미군)

1983년 10월 25일 미국은 1만 명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을 앞세워 인구 11만 명 밖에 안되는 카리브해의 조그마한 섬 그레나다를 침략했다. 이는 소위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극도로 혐오감을 가지고 있던 레이건 정부가 “그레나다 내에 있는 미국인 1000명을 쿠바의 위협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정당방위다.”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로 미국이 그레나라를 침공한 목적은 쿠바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도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레나다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도 미국의 그레나다 침략을 거세게 반대했다. 뉴욕타임스와 로스앤젤레스타임스가 밝힌 것에 따르면 “미 국무성은 어떻게 해서든 그레나다 침략이 미국인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얻어내기 위해, 그레나다 의과대학의 미국인 교직원들에게 미 의대생들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 이야기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미군에게 붙잡힌 그레나다인)

미국은 그레나다 침략 과정에서 병원을 비롯한 민간 시설에 무차별 폭격과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대부분의 사상자는 당연히 그레나다인이었고, 대략 1000명 정도의 그레나다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레나다 침공 과정에서 미군측 사상자는 134명으로 알려졌는데, 이 중 사망자는 19명이었다. 그리고 미군측 사상자 대부분은 아군끼리의 상호총격전으로 부상 또는 사망한 것이었다. 그레나다 침공 과정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그레나다를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과 인명을 구조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이는 타국에 대한 엄연한 침략 행위였다. 그레나다 침공을 통해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지지도가 15%나 상승했으며, 그레나다에서의 승리에 환호했다.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

그로부터 3년 뒤인 1986년 미국은 리비아를 대상으로 기습 폭격을 감행했다. 그 이유는 로널드 레이건에게 있어서 리비아의 카다피는 미국의 이익에 방해가 되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레이건이 제거하려고 했던 카다피는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1969년 친서방 왕정 세력들에 맞서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Gaddafi)’는 물 부족 국가인 리비아에 농업과 산업 개발을 추진하여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산업 시스템을 소비 경제 국가에서 가능한 생산중심의 자립경제로 변화시켰다. 토지 또한 스스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고, 자본주의식 착취구조인 임금제도를 철폐하고자 했다. 그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69년부터 1975년 사이 총 11만 212 가구의 주택을 건설하여 비어있는 건물에 필요한 가구에게 분배했다. 그리고 카다피는 리비아 사회에서 차별받던 여성들에게 균등한 교육, 고용, 국가건설의 기회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68~78년 사이 중등교육을 받는 여학생 수가 4배 이상 증가했다. 또한 카다피는 전기와 교육이 리비아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했었다.

(1986년 리비아 폭격 당시 항공모함에서 이륙하는 미군 전투기)

미국이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가 등을 지게 된 것은 1980년부터였다.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을 거절했던 리비아의 카다피는 결국 미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고, 1980년 9월 리비아 공군이 리비아 공군기지 부근에서 돌아다니던 미군 정찰기를 격추시키면서 양국의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1986년 초에 일어났던 로마와 비엔나 공항의 폭파사건이 리비아 측의 지원을 받아 일어난 것으로 생각한 레이건은 그해 3월 리비아가 자신들의 영해임을 주장하는 수역에 일부러 미 해군함을 침범시켰다. 1986년 4월 서베를린의 미군 전용 디스코클럽 폭파사건을 확실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이를 리비아의 테러 행위라 주장하며 카다피를 죽이기 위한 기습 폭격을 감행하게 되었다. 미국의 레이건 정권은 리비아의 카다피를 죽이기 위해 트리폴리와 뱅가지에 무차별 공습을 퍼부었고, 카다피는 살아남았지만, 230명 이상의 리비아인들이 미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죽거나 다쳤다.

(콘트라 반군)

(이란 콘트라 사건 당시 타임즈 기사)

 

미국을 보수주의화 시켰던 로널드 레이건은 결국 1986년 이란 콘트라 스캔틀을 겪으며 위기를 맞았다. 레이건 정부는 당시 레바논에 억류되어 있던 미국 인질들을 석방하는 데 있어 이란의 힘을 빌렸는데, 그 과정에서 비밀무기판매도 진행했다. 18개월간 탱크격파용 토우미사일 1만 2000기와 항공기 파괴용 호크미사일 235기등을 이란에게 판매했고, 그러한 무기판매대금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콘트라 우익 반군을 지원하기 위한 지원자금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미국 스스로가 테러국으로 규정한 이란에게 비밀리에 무기를 팔면서 불법적으로 콘트라 반군을 지원한 행위였다. 거기다 그 시기 미국은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했었다. 미국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지원하며 여러 가지 물자와 무기를 지원했고, 그 무기는 후세인 정권이 쿠르드족을 학살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란 콘트라 스캔들은 레이건 정부에게 있어 큰 비판점이 되었다.

레이건 정부가 추진했던 ‘레이건 독트린(Reagan doctrine)’은 소위 1947년 해리 트루먼이 주장했던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남미의 엘살바도르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게릴라들이 인권 유린을 자행하는 호세 두아르테(Jose Duarte)의 우파 독재 정부를 전복시키려 하자 엘살바도르 독재 정부를 지원했었다. 이처럼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우면서 뒤에서는 타국의 인권을 짓밟았다. 레이건 정부의 폭력은 니카라과나 엘살바도르 그리고 그레나다와 같은 중남미 국가와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등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또한 적잖은 국방비 지출로 레이건 정부는 경제적 적자가 급증했었다. 복지분야의 지출은 줄어들었고, 부유층들만 그 혜택을 보았다. 따라서 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전형적인 친제국주의적 정부였다고 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초코머핀 2020-02-27 18: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성스런 글 잘 봤습니다 :)

NamGiKim 2020-02-27 18:06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댓글저장
 

1970년대 미국 사회와 보수주의의 등장

(1975년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전차)


1970년대의 미국 사회는 1950년대나 1960년대의 미국 사회하고는 분위기가 달랐다. 1950년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향을 받아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대호황을 누렸다면, 1960년대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흑인인권운동과 반전운동 그 외의 여러 사회운동이 전개되면서 ‘히피(Hippe)’라고 불리던 젊은이들이 기존의 체제에 반대하여 여러 사회혁명을 추구하며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1970년대 미국은 닉슨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하게 되면서 1960년대에 있던 사회 혁명적 분위기는 조금씩 잠들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정치적인 부분보단 개인적인 문제나 개성에 관심을 두게 된 시대였다.

(1970년대 미국의 청바지 광고, 당시 미국인들은 이러한 것들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특히나 미국은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대략 80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던 미국은 1500억 달러나 되는 비용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다. 간접비용으로는 그보다 더 많은 액수가 사용되었다. 1973년에 파리 평화 조약을 맺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미국은 1975년 동맹국이었던 남베트남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궁극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베트남 전쟁에서의 패배를 반성하지 않았다. 미국의 CIA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를 비롯한 외국 지도자들의 암살계획을 세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CIA는 쿠바에 가축의 질병을 퍼뜨려서 쿠바 국민이 키우던 돼지 50만 마리를 폐사시켰다. 칠레에서는 사회주의적 성향을 가진 대통령 아옌데를 암살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1970년대 중남미에서 적잖은 만행을 저질렀다.

(오일쇼크, 1970년대를 강타한 오일쇼크는 전 세계에 경제적으로 영향을 주었고 이는 미국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전쟁 말기 미국에서 터졌던 ‘웨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미국인들에게 정부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1974년 중동에서 ‘오일 쇼크(Oil Shock)’가 터져 미국은 그로 인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오일 쇼크로 인한 석유 가격 급등은 미국 경제의 전 영역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인플레이션은 1972년 3.3%에서 1974년에 11%로 급증했다.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의 경우 무려 3만 8000명의 노동자를 무기한 일시 해고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1970년대 초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베트남 전쟁의 패배와 더불어 히피로 대표되던 소위 ‘신좌파(New Left)’ 운동은 점차 힘을 잃었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과 전쟁에서 졌다는 패배의식이 소위 좌파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1970년대 미국인들은 자기 개성에 더욱 더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70년대 미국에선 조깅이나 다이어트 그리고 건강한 식단과 같은 것들이 국민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종교적인 선교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침술과 같은 동양 의학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낙태가 권리라고 주장하는 한 미국인 여성)


(로데 웨이드 판결에 반대하는 미국의 보수주의자들)


이렇게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개성에 관심을 두었던 1970년대 미국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집단과 세력들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신보수주의 운동(New Right Movement)’이었다. 이들이 앞장서서 활동했던 문제는 1970년대 시작된 낙태 논쟁이었다. 이들은 낙태를 무조건적으로 반대하며 진보세력들의 입장과 상반되는 견해를 피력했고, 1973년 미국 연방 정부가 임신 3개월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도록 판결을 내렸던 ‘로데 웨이드 사건(Roe v. Wade)’이 있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낙태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1970년대 당시 보수주의자들은 라디오와 TV등을 통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인 보수주의를 설파했고, 대중매체를 통한 그들의 선전은 미국인들에게 적잖은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낙태 반대 운동 뿐만 아니라 그들은 가정지키기 운동, 미국 전통지키기 운동등을 하며 일반인들로 하여금 1960년대를 비판하게 만들고 애국주의와 반공주의를 강조했다. 즉 1960년대 소위 히피들일 외쳤던 사회변혁이나 프리 섹스, 여성 해방, 성소수자 해방 등과 같은 가치하고는 매우 상반된 견해를 가진 이들이 1970년대에는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그들은 대중매체의 이용과 선전을 통해 미국의 중산층 계급의 지지를 끌어냈다.

(지미 카터 대통령, 그는 인권 대통령이라는 말을 앞세웠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많은 국제적 개입과 간섭을 했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자진해서 사퇴하자 그 대통령 자리는 제럴드 포드가 이어받았는데,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가 당선되었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취임 당시 인권을 증진시키겠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권이라는 소재를 적대세력인 소련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냉각시키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지미 카터 대통령을 소위 인권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그는 재임 기간 중 적잖은 실수를 저질렀다.

(1979년 이란에서 일어난 호메이니 혁명, 이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무너졌다.)


(이란 인질극 당시 타임즈 기사)


1979년 이란에서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으로 정권을 잡자 그해 10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선 분노한 이란인들이 미대사관에 침입해 63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고, 암 치료를 위해 미국에 입국한 팔레비의 귀환을 요구했었다.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이란에 대한 경제제제를 가하면서 풀려나지 않은 인질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래도 석방되지 않자 카터는 인질 구출을 위한 군사 작전을 승인했는데, 그 작전은 헬리콥터 사고로 8명의 사망자만 내고 실패했다. 또한 지미 카터 정부는 캄보디아에서 광적인 대학살을 벌이던 폴포트가 1978년에서 1979년 사이 베트남 하노이 정부에 의해 군사적으로 전복당하자 베트남 전쟁에서의 굴욕을 되갚아주기 위해 미국의 카터 정부는 베트남에 맞서 폴포트의 ‘크메르루주(Khmer Rouge)’ 정권을 지원하는 파렴치한 일을 저질렀다.

(로널드 레이건, 1950년대 유명한 헐리우드 배우였던 그는 1980년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다는 목적을 가지고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카터가 집권하던 시기 미국은 경제적으로 큰 난관이 있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했다. 1978년에는 제2차 오일쇼크까지 발생했다. 1979년 미국에는 아파도 병원에 가거나 약을 살 수 없는 아이들이 100만 명이나 되었다. 1800만 명이나 되는 17세 이하의 아이들은 치과에 가본적도 없었을 정도다. 미국의 젊은이들 중 특히 흑인 젊은이들 가운데 20~30%가 실직 상태였다. 197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은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980년 미국에서 공화당 출신 후보 한명이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명성을 떨쳤던 배우였고, 제법 인기도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었다.


로널드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미국사회는 다시 1940,50년대와 같은 반공주의 시대로 귀환했다. 물론 1950년대 미국이 보였던 반공주의 국가보다는 자국민에 대한 사상 탄압의 강도는 약했지만, 확실히 그 시기 미국에서는 전통주의와 보수주의, 애국주의 그리고 반공주의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은 베트남 전쟁으로 패배의식에 빠져있던 미국인들에게 다시 한번 미국이 부강해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실제로 미국은 그 기간 동안 국방비에 많은 지출을 했다. 그 과정에서 반공주의자 레이건은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와 간섭행위를 일삼았다. 대표적으로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과 콘트라 반군 지원이 그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미 제국의 중남미 침략사

(미국의 침략 본성을 나타내는 그림.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이 미국이라는 독수리는 남미에 대한 지배욕을 여러차례 드러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중남미 국가들을 제국주의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던 것은 19세기부터였다. 서부로의 영토 팽창 과정에서 미국은 멕시코의 영토를 무력으로 침략하여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멕시코로 하여금 강제로 체결하게 함으로써 드넓은 멕시코의 영토를 강탈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여 일어났던 아이티 혁명에서 미국은 아이티의 독립에 반대했다. 1898년에 쿠바 영토를 두고 일어났던 ‘미서전쟁(Spanish-American War)’에서 승리한 미국은 쿠바에게 자유와 독립을 보장해주는 척을 하면서 쿠바를 미제국의 경제적 식민지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 외에도 미국은 하와이와 푸에르토리코 괌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놓기 위해 강탈했고, 필리핀을 정복하기 위해 야만적인 젅쟁을 수행했었다.


미국은 현대식 대포로 일본을 위협하여 무역을 위한 개방을 요구했었고, 서방 제국주의 세력에 반대하여 중국에서 일어났던 ‘의화단 운동’을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제국 등과 같은 열강들과 연합하여 진압 군대를 보내 잔인하게 진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기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적백내전에서 볼셰비키 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방해하기 위해 12000명의 미군을 블라디보스토크와 아르한겔스크에 상륙시켰다.


1900년대부터 파나마 운하 건설에 많은 투자를 했던 미국은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장악하기 위해 콜롬비아에 대항하는 혁명을 아주 교묘하게 부추겨 파나마라는 ‘독립국가’를 만들어 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16년 미국은 도미니카공화국의 문제에 개입하여 8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고, 1915년에는 아이티에 개입해서 19년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다. 1912년 니카라과를 침략했던 미국은 니카라과의 보수기득권 세력들과 결탁하여 1933년 아우구스토 산디노에게 쫓겨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실질적인 주인행세를 했었다. 1900년~1933년 사이 미국은 쿠바에 네 차례, 니카라과에 두 차례, 파나마에 여섯 차례, 과테말라에 한 차례, 온두라스에 일곱 차례 개입했다. 1924년 기준으로 라틴아메리카의 20개 국가 가운데 절반의 국가 재정이 미국에 의해 어느 정도 좌우되고 있었으며 1935년에는 미국의 철강과 면화 수출의 절반 이상이 라틴아메리카에서 판매되는 상황이었다.

(냉전부터 현재까지 미제국의 중남미 국가 침략 및 방해공작을 보여주는 지도)


이처럼 중남미와 전 세계에서 침략과 간섭을 일삼았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중남미에 대한 자본주의적 탐욕주의를 버리지 않았었는데, 이것은 중남미 인민들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었다. 냉전시기 소련과의 경쟁을 이어나가던 미국은 중남미 지역에서 적잖은 개입을 했다. 라틴아메리카 경제와 국제관계사를 전공한 학자인 존 코츠워스의 계산에 따르면, 1948년에서 1990년 사이에 미국 정부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적어도 24개의 정부를 전복시켰는데, 4건은 직접적으로 미 군대를 동원해서, 3건은 CIA 주도의 반란이나 암살을 통해서, 그리고 17건은 미국이 직접 참여하지 않고 그 지역의 군대나 정치세력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대개는 군사적 쿠데타를 조장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개입 중 미제국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전복한 사례”는 대표적으로 3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54년에 과테말라에서 발생했던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64년 브라질에서 발생한 사건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73년에 일어났던 칠레에서의 사건이었다. 1945년 3월 14년 동안 과테말라에서 독재정권을 유지했던 유비코 정권을 숙청하고 민주적 총선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레발로는 노조 설립 등과 같은 소수 기득권층 위주의 사회제도를 개선하고 인민의 귄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진보적인 정책들을 추구했다.


그는 6년이라는 재임기간 동안 비민주적인 제도와 악습 그리고 식민지 자본의 횡포에서 민중을 구하는 데 모든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토지 국유화 강령을 내세웠고 그것은 당연히 남미를 자본주의적으로 지배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United Fruit Company)의 이윤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이런 아르벤스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다. 그 반대세력은 바로 과테말라의 기득권층과 남미민중을 착취하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사 그리고 그 기업의 이윤을 통해 이득을 보던 미국이었다. 결국 미국은 과테말라에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아르벤스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에 착수했다.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 그는 민중의 염원에 따라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했었다.)


1951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피비 포춘PB Fortune’이라는 비밀공작을 승인하면서 아르벤스 정부의 정복공작은 시작되었고, 미국의 CIA는 과테말라의 우익 군부 잔당들과 접촉하여 아르벤스 정부의 전복을 위한 구체적인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1954년 6월 결국 미국의 공작으로 아르벤스 대통령은 사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과테말라에서는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과테말라의 군부는 소위 반공법을 제정하여, 아르벤스에 동조하는 양심세력과 가난한 인민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무차별 학살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약 36년 동안 과테말라에선 군부의 야만적이고 잔혹한 고문과 학살로 인하여 20만 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살해되었다.


1961년 브라질의 대통령이었던 ‘주앙 골라르트(João Goulart)’는 브라질의 경제회생을 위해 정유산업을 국유화하고, 외국기업 소유의 유휴토지를 개발하여 빈곤층 등에게 공급하며, 다국적기업의 과다한 이윤 유출을 억제하여 국민자본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전임자인 콰드로스 대통령처럼 비동맹 자주노선을 지향했고 소위 제3세계와의 외교 통상관계를 증대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있던 미국의 쿠바 침공과 쿠바 봉쇄에 대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백만장자의 아들인 그는 결고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친미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그의 자주노선이 자신들의 이익과 반대되었다고 느꼈기에 그를 축출하기로 했다.


1962년에 치러진 브라질 총선에서 CIA의 공작을 통하여 극우 성향의 후보들에게 약 2000만 달러의 선거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미국은 브라질 내에 퍼지는 반미의식을 막기 위해 학생과 부녀자 단체 등을 동원해 친미그룹을 조직했고, 극우 언론사에 대한 자금지원도 동시에 실행했다. 결국 미국은 1964년 3월 친미성향의 군부 합창의장 브랑코를 통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은 소위 ‘엉클 샘 작전(Operation Uncle Sam)’이라고 명명한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자금, 무기, 연료 등 주요 전략물자를 비밀리에 브랑코 장군에게 지원했다. 1964년 3월 미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골라트 대통령은 우루과이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브라질의 자주적 정권을 전복시킬 수 있었고, 그 이후 브라질에선 수천 명의 골라트 지지자들이 공산주의자나 동조세력으로 몰려 체포되었으며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는 진압군의 발포로 무차별 학살당했다.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 그는 세계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사회주의자 대통령이었다. 사회주의적 성향을 싫어하는 미국에게 있어서 그는 제거되야할 대상이었다.)


남미 국가들 중에서 가장 긴 면적을 자랑하는 칠레는 1932년 이후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했다.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그 구리 생산이 미국계 양대 기업 케니코트구리와 아나콘다 구리가 장악하고 있었다. 1964년 칠레의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 CIA는 에두아르도 포레이 후보를 지원함으로써 사회주의자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후보를 물리쳤다. 이후 수년간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써가며 반공 그룹들을 지원했고 군사원조 1억 3600만 달러를 제공함으로써 칠레를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 다음가는 동맹국으로 만들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미군이 운영하는 기지에선 칠레군 장교 4000명에게 게릴라 소탕 전술훈련을 시켰다.


아옌데는 1970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 그는 “부를 재분배하고 통신회사 ITT를 비롯해 칠레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 기업들을 국유화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아옌데를 우려한 미국은 그가 당선되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1970년 9월 살바도르 아옌데는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하는데 성공했다. 아옌데 정부는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미국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던 구리광산 등에 대한 국유화를 단행했으며, 의료 및 교육 부문에 대한 공공서비스를 확대하고 사회적 불평등과 빈부격차를 줄이기 위해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실행에 옮겼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은 이 선거 결과를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실제로는 CIA에게 “아옌데가 집권하지 못하도록 저지하거나 혹은 정치 권력에서 축출”하는 작업을 허용했다. 미국 CIA는 정치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칠레군 최고사령관 레네 슈나이더(Rene Schneider)를 암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슈나이더의 암살이 CIA의 공작으로 밝혀지자 칠레 국민은 격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국의 CIA는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속적인 공작을 감행했다.


아옌데 정권은 결국 친미제국주의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가 이끄는 군부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1973년 9월 11일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칠레 국민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졌다. 쿠데타 계획에 따라 미 해군은 그 전날인 1973년 9월 10일 밤 자국 전함들을 발파라이소항에 정박시켜 아옌데 정부와 칠레 인민을 향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집무실 밖에서 들려오는 총성을 들으며 “역사가 반란군을 심판할 것이다. 칠레 만세! 칠레 인민 만세! 칠레 노동자 만세!”라는 말을 남긴 뒤, 피노체트 일당들에게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미국과 결탁하여 아옌데를 사살한 피노체트는 칠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대략 17년간 독재정권을 유지했고,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따라 칠레의 빈부격차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피노체트는 쿠데타가 발생한 3개월 동안 CIA의 지원을 받아 좌파로 의심되는 사람 수천 명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의 군사정부 기간 동안 총 3만 5000명이 처형되었다.

(콘도르 작전 풍자 그림, 미국이 진행했던 콘도르 작전으로 수많은 남미 민중이 고문 받고 학살당했으며, 감옥에 갖혔다.)


이처럼 냉전 시기 미제국의 중남미 문제 개입은 공식 또는 비공식적으로 지속되었다.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후반까지 대략 20년간 소위 ‘콘도르 작전(Operation Condor)’을 남미에서 전개했다. 미국은 콘도르 작전을 통해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브라질, 파라과이, 볼리비아, 페루, 엘살바도르 등에서 독재정권 사이에서 행해졌던 국가 간의 공동 첩보 활동, 체포와 납치, 송환, 심문, 고문, 암살, 비사법적 처형 등을 자행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콘도르 작전으로 5만 명에서 6만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파악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감옥에 갇혔으며 대다수가 고문에 시달렸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그들은 18년간이라는 기나긴 투쟁 끝에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았다.)


위에서 인용한 과테말라, 칠레, 브라질 등이 그랬듯이 남미에 있는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주도하는 정책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니카라과가 그러했다. 1960년대 니카라과에서 자체적으로 조직된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은 18년간 미국에 맞서 투쟁했다. 1979년 그들은 니카라과에서 미국의 하수인이던 소모사와 그 일당들을 몰아내어 정권을 잡았다. 니카라과에서 정권을 잡은 산디니스타 게릴라 세력들은 소모사 정권에게 유린당한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땅을 분배했다. 은행, 광산과 니카라과의 천연자원 등 그 동안 소모사 정권의 부패 근거지였던 자산들도 국유화했다. 또한, 문맹퇴치 운동을 벌여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 동안 문맹률을 12%로 줄이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미국에서 열린 미국의 베네수엘라 경제제제 및 간섭 반대 집회, 지금까지도 수많은 남미국가에선 반미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연히 이러한 문제의 책임은 미국에게 있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이런 사태를 좋게 보지 않던 미국은 니카라과 문제에 개입했고,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권은 미제국주의와 그들의 나팔수 세력인 반혁명군 콘트라(Contra)에 대한 군사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미제국은 중남미 민중을 끊임없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세력들에게 온갖 방해와 악행 그리고 학살과 범죄를 저질렀다. 1970년대 중반 베트남 전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맞보았던 미국은 좌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은 남미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을 통해 승리의 단비를 맛볼 수 있었다. 1983년에 있었던 ‘그레나다 침공(Invasion of Grenada)’이 그러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레삭매냐 2020-02-20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 전복
은 이란의 모사데그 정부 전복과
함께 1950년대 미국 CIA가 자랑하는
결과물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악질 소모사 부자를 축출한 산디
니스타 투쟁!~

쿠바 혁명에 놀란 미국이 유난히
중미 진보 정권에 경기를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NamGiKim 2020-02-20 13:43   좋아요 0 | URL
쿠바 혁명에서의 충격이 클겁니다. 오죽하면 피그스만 침공과 쿠바 봉쇄까지 했겠습니까.
댓글저장
 
플레전트빌
씨넥서스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 이 영화 리뷰는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정말 재밌게 보았던 영화가 있다. 그 영화는 게리 로스 감독이 제작한 영화 플레전트 빌(pleasantville)이다. 학교 수업시간에 정말 재밌게 본 영화롸 어제 다시 텔레비젼에서 찾아서 감상했다. 영화 플레전트 빌은 흑백과 컬러 화면을 통해 1950년대 미국 사회를 고찰해본 영화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데이빗과 제니퍼는 이혼한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남매인데, 데이빗은 미국에서 인기가 높은 티비 프로그램인 ‘플레전트 빌’의 펜이고, 데이빗의 여동생 제니퍼는 학교서 담배나 피며 불량한 남학생이나 꼬시는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 있는 인물이다. 그러던 어느날 제니퍼와 데이빗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티비 채널을 보기 위해 리모컨을 가지고 싸우게 되는데, 어떤 티비 수리공 할아버지가 준 리모컨을 가지고 티격태격하다가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플레전트 빌 프로그램으로 들어가게 된다.

(플레전트 빌 영화 표지)


데이빗과 제니퍼는 소위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플레전트 빌 속에서 배우로 출연하게 되는데, 그들이 보게 된 플레전트 빌은 희망과 행복 그리고 풍요와 번영이 넘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그 세계의 문제점은 모든 것이 다 흑백이었고, 사람들은 플레전트 빌 밖의 세상을 모르고 있으며, 그 세계 도서관에 있는 책들과 교과서는 백지상태다. 또한, 성적으로도 굉장히 보수적인 사회여서 섹스라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1950년대 미국 사회인 플레전트 빌로 가게 된 데이빗과 제니퍼 남매)


(풍요로운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데이빗과 제니퍼의 엄마)


그러나 플레전트 빌 세상도 데이빗과 제니퍼가 살게되면서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 변화의 시작은 여동생 제니퍼가 프로그램 상에서 자기를 좋아하는 어느 남자친구와 소위 ‘연인의 호수’에 가서 즐거운 성관계를 맺으면서 시작된다. 애초에 섹스라는 것 자체를 모르고 있던 제니퍼의 남친은 자신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에 충격받았고 그런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제니퍼의 남친은 깨닫게 되는데, 흑백이었던 세상에 존재하던 장미꽃 하나가 흑백에서 붉은색을 띄게 된다.

(제니퍼의 남자친구, 그는 제니퍼와의 성관계를 통해 변화를 깨닫게 된다.)


(제니퍼의 설명에 따라 목욕탕에서 자위하는 엄마)


제니퍼와 그의 남친이 성관계를 맺은 이후 연인의 호수는 단순히 손을 잡고 애틋함을 느끼는 장소을 넘어서 남녀가 진정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몸으로 교감하는 장소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변화는 플레전트 빌 전역에 퍼지게 된다. 플레전트 빌 세상에선 남녀가 침대를 공유하지 않는데, 남녀가 같이 잠자리를 공유하는 침대가 상점에 나타나고, 사랑을 나눈 사람들 중 일부는 색깔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뀐다. 항상 맑은 날씨만 유지하던 플레전트 빌에는 난생처음으로 비가 내리는 일이 생겼고, 도서관에 있던 책들은 백지상태에서 사람의 의지에 따라 글씨가 나타나게 되며, 고양이만 구출하던 소방관들은 난생처음 화재진압이라는 것을 하게 되며 변하게 된다. 또한 남편에게 호화로운 밥상을 차려주던 여성들 중 일부는 자아를 찾게 되어 남편의 말을 듣지 않고 이를 거부한다. 데이빗의 아버지는 아내에게 흑백으로 돌아오라고 부탁을 하지만, 내면의 자아를 깨달은 데이빗의 어머니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변화한 연인의 호수, 이 처럼 플레전트 빌은 컬러화 되간다)


(난생 처음 비를 맞아본 플레전트 빌 연인들)


이러한 변화를 겪게 되는 사람들은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게 되는데, 이러한 변화에 적응하지 않고 흑백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컬러쪽 사람들에게 불리한 법안을 마련하고, 소위 전통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컬러쪽 사람들의 가치관 및 표현을 제한하고자 한다. 예를 들면 컬러쪽 사람들이 듣는 흥겹고 도전적인 노래들을 금지한다든지, 글씨가 들어가 있는 책들은 금서로 지정한다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흑백쪽 사람들은 컬러쪽 사람들의 예술작품이나 존재 자체를 멸시하거나, 위협하는 모습을 보인다. 데이빗이 일하는 식당의 주인은 데이빗의 엄마랑 사랑에 빠지게 되어 성관계를 맺고,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누드화를 그렸는데, 그 누드화 그림은 흑백쪽 사람들에 의해 박살이 나버리고, 식당도 난장판이 돼버린다.

(컬러화 된 데이빗의 여자친구, 사랑을 통해 컬러화 되었다.)


플레전트 빌에서 살게 된 데이빗은 티비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플레전트 빌을 “부랑자도 없고 풍요와 번영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라고 하며 극찬하며 그 세상을 동경했지만, 플레전트 빌 세상의 문제점을 느끼게 되는 과정에서 프로그램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야할 한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데이빗 또한 컬러화 되가는 플레전트 빌에 적응하게 되고, 그러한 인간 내면의 변화는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본인 또한 컬러화 된다. 그리고 그는 컬러화 된 여친이 흑백화 된 불량배들에게 유색인종이라 놀림을 받는 것까지 목격한다.

(컬러화 되버린 엄마, 그는 결국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흑백이었던 플레전트 빌이 컬러로 도색이 되며 흑백 세상보다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그러면서 영화 또한 막을 내린다. 영화 플레전트 빌이 보여주는 1950년대 미국은 소위 보수주의자들에게 있어선 이상적인 사회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재건이라는 것을 할 필요가 없었던 미국은 소련과의 경쟁 속에서 1920년대를 능가하는 풍요와 호황을 누렸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호황을 누렸던 1950년대 미국 사회에는 소위 중산층들이 늘어났고, 그런 중산층들은 넓은 마당을 가진 주택에서 살며 자동차를 최소 2~3대 이상이나 보유할 수 있었다. 텔레비전의 보급도 늘어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텔레비전이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다. 소비재 생산도 굉장히 많이 늘어 미국의 중산층 가정들은 대형마트에서 쇼핑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풍요는 당연히 미국의 중산층들에게만 해당한 얘기였다. 미국 사회에서 하층계급이었던 흑인이나 유색인종 노동자들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멸시나 차별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소련과 체제 경쟁을 했던 미국 사회는 사상적으로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 시기에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것은 소위 ‘빨갱이(Commie)’로 낙인찍혀 사회적 활동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기 미국의 정치인들은 소위 전통이나 보수적인 가치를 내세우며 국가에 대한 충성과 자본주의의 우월함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세뇌했다. 즉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던 게 바로 1950년대 미국 사회라 할 수 있다.


영화 플레전트 빌은 1950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소위 전통주의와 보수주의의 문제점을 사랑 및 내면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통해 색채화 함으로써 아주 천재적으로 묘사했다. 쉽게 말해 영화 플레전트 빌은 흑백화면을 통해 그런 문제들을 아주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영화 상에서 등장하는 남녀간의 섹스에 대한 인식은 미국의 전통주의 내지는 보수주의적 성향을 반영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글씨가 담긴 책들을 금지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대되는 책들을 불에 태우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당시 미국에 만연해있던 보수주의자들의 편협한 시각과 반공주의적 관점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흑백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컬러화된 사람들을 유색인종 내지는 ‘컬러(Colored)’라고 표현하는 것은 1950년대의 인종주의를 비판한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은 플레전트 빌에 사는 사람들 중에 흑인이나 히스패닉 그리고 동양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영화 플레전트 빌은 컬러화 과정을 통해 1950년대 미국사회가 가지고 있던 성적 보수주의, 전통주의, 반공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데이빗과 제니퍼, 그들은 완벽히 컬러화 된 플레전트 빌을 보게 된다.)


영화를 다시 한번 감상하며 흑백에서 컬러로 색깔을 바꾸는 장면들에서 영화감독의 천재성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이런 명작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플레전트 빌은 찾아보기 힘든 명작이다. 영화 플레전트 빌을 보다보면 자본주의적 물질적 풍요로움이 과연 절대적 진리인가를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영화 플레전트 빌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물질적 풍요와 소비의 즐거움 그리고 전통이라는 것 보다 인간적인 내면적 성찰의 깨달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