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양 선생 서거 45주년에 이기형 선생께서 낭독한 시입니다.)

분노와 눈물로 돌이켜봅니다
45년 전 오늘을!
긴 장마철 쌀도 돈도 떨어졌을 때
여 선생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름깨나 있다는 자들이
겨레와 나라를 팔아먹는 글을 썼을 때
여 선생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저 일제 민족말살 암흑 시기
여운형은 3·1운동의 뿌리요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큰 몫을 담당했던 겨레의 기둥이었습니다
아시아 천지에서, 조국의 품에서,
그 번듯한 외모가 보입니다
그 유창한 사자후가 들립니다

일제 총본산 우두머리들 앞에서 불을 뿜은
현하의 변
청사에 남을 ‘독립투쟁의 예술’ 이었습니다
해방의 감격과 환호 속에 솟은
저 ‘건국준비위원회’의 깃발
백두산과 한라산에 비춘
민족소생의 햇발인저!
친일잔재 민족 배반자들이
반탁을 외칠 때
찬탁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심혈을 기울였건만.
이승만의 분단노선에 맞서
좌우합작 통일노선을 치켜들었건만,
아아,
그대의 천재적 정견에 따랐더라면
반 세기 민족분단 비운은 막았을 것을!
거성도 가고 세월도 갔지만
역사는 똑바로 기록합니다
‘여운형 노선이 겨레 살리는 길이었다’
당신의 생애는 광휘롭고 웅혼했습니다

오늘은 묘비도 세우고
유덕과 위업을 우러르며
추모의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귀여운 딸 연구는, 지금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세계 도처에서 조국통일을 위해 밤낮 뛰고 있습니다
저번, 조화를 안고 46년 만에 서울에 왔건만
아버님 묘소에 바치질 못하고
눈물을 뿌리며 돌아갔습니다
처참한 현실이지요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역사적 남북합의서가 이미 채택되었습니다
겨레와 역사는 거스르는 반역을 물리치고
당신의 높은 가르침대로
남북형제는 기필고 자주통일을 이룩하고야 말 것입니다
선생은 우리 민족의 해방과 독립뿐 아니라
인간해방이라는 인류의 높은 이상까지 펼쳐 보이고 가르쳐 주신
대선각자 대애국자였습니다
몽양 여운형 선생,
천계에서도 저희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세요 이끌어 주세요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인류해방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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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독일군대가 소련을 기습 공격했다. 153개 사단과 3700대의 탱크 그리고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독일군은 1500km에 이르는 전선을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크게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독일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소련군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공격 당일 1200대의 소련군 항공기가 지상에서 파괴되었고, 독일 공군은 제공권을 완벽히 장악했으며, 소련군의 병력 및 철도 이동은 끊임없이 루프트바페(Luftwaffe)의 공격을 받았다. 개전 초기의 독일군은 경미한 저항만 받으며 진격했고, 그들이 전개한 ‘전격전(Blitz Krieg)’은 붉은 군대를 손쉽게 제압했다. 소련군은 필사적으로 독일군의 전진을 저지하고자 했지만, 브레스트 요새만 7월 12일까지 전선을 사수했을 뿐이다.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고받았던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독일군이 공격했다는 사실에 매우 충격을 받았지만, 1930년대부터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전쟁을 준비해 온 소련은 즉시 전 국민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신속하게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정치 경제의 중심인 모스크바에 독일군의 공격에 맞서 방어력을 집중시켰는데, 이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해올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41년 7월 말이 되었을 때, 독일군은 소련의 영토 깊숙이 진격했고, 8월에는 독일군의 중앙 부대가 스몰렌스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몰렌스크라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었기에 소련군은 총력을 다해 독일군에 맞섰다. 소련군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을 패배시켰다. 그래도 소련군은 9월까지 독일군의 발목을 잡아놓았기 때문에 모스크바 전투를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해 9월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게 포위당하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가 독일군에게 함락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1941년 9월 30일 독일군은 ‘태풍’이라는 작전명으로 모스크바를 대상으로 대규모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을 보고받았던 아돌프 히틀러는 “10일 안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함락하고 붉은 광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는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기 위해 독일군 최정예 부대를 모아 180만 병력을 동원하여 모스크바로 진격하게 했다. ‘태풍 작전’에 따라 독일군 장갑차 제2부대가 브랸스크(Bryansk)를 향해 진격하였는데, 가을비로 인하여 진흙탕이 되었음에도 독일군은 10월 2일에 중앙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브랸스크를 점령했다. 그 후 2주 동안 독일군 중앙부대는 브랸스크 부근에 두 개, 비야즈마 서쪽에 한 개씩 모두 세 개의 포위망을 구축했고, 이 세 곳에서의 전투로 소련군 66만 300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 놓은 소련군은 모스크바 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독일군 전진을 막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지휘 체계에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이오시프 스탈린은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했고, 주코프 장군은 10월 중순에 모스크바로 통하는 모든 길목에서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10월 19일 소련의 지도부는 모스크바에 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모스크바를 사수할 것을 호소했다. 그로부터 몇일 후 모스크바 시에는 25개 노동자 부대와 12만 자원병이 모여들었고, 45만 명이 도시 방어를 위해 나섰다. 소련군과 일반 지원병들은 11월 초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르며 라마강과 루자강 등 지역에서 독일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이런 저항을 통해 소련은 “10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겠다는 히틀러의 야욕”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1941년 11월 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함으로써 독일군에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직접 보였고, 그런 스탈린의 호소를 들은 소련의 시민들과 군인들은 독일군에 맞서기 위해 단결하게 되었다. 그해 11월 15일 독일군은 군대를 재정비한 후 모스크바를 향한 공격을 다시 퍼부었다. 11월 27일에는 모스크바에서 불과 24km 떨어진 이스트라(Istra)를 점령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모스크바 외곽까지 접근했다. 1941년 12월 초 겨울을 맞은 모스크바에는 매서운 추위가 왔다. 기온이 영하 20에서 30도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1941년 12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을 받은 주코프는 소련군을 이끌고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가했다. 주코프 장군은 소련의 주력 부대를 모두 중앙으로 집중시켰고, 12월 6일에 시작된 모스크바를 향한 독일군의 전면적인 공세를 막아냈고 물리쳤다. 이를 기회로 소련군은 모스크바 근처에서 독일군에 맞선 반격을 개시했고,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던 1941년 12월 8일 독일군은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방어 태세로 전환했다. 1941년 12월 16일부터 1942년 1월 7일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빼앗겼던 남쪽 도시 툴라와 모스크바 북쪽의 칼리닌을 되찾았고, 1월 초에는 소련군의 서쪽 부대가 반격하여 승리를 거두면서 독일군은 250km 밖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3개월간 지속되었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은 총 58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속출했고, 소련군은 1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생겼다. 독소전쟁 개전 초기 독일군의 진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개과천선하여 효과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게오르기 주코프를 참모로 두고 그와 협력하여 모스크바 공방전을 준비했고, 10월 혁명 퍼레이드를 그대로 진행함으로써 독일군에 맞서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소련 인민들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진입했을 시기 포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을 떠나지 않았으며, 소련의 군사 지도자들과 함께 작전을 지휘했다. 따라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소련이 승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독일군에 맞서 열심히 싸운 병사들과 인민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그들에게 큰 동기부여를 해준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의 지도력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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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13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결국 소련은 공간(스몰렌스크)을 내주고 시간
을 벌면서 모스크바 공방전을 위한 준비를
한 것이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라스푸티차가 몰아 닥치기 전에 보급선을
늘어 뜨리지 말고 신속하게 모스크바로 주공
을 해야 한다는 구데리안의 판단을 OKW와
히틀러가 무시한 점도 독일군 패착의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네요.

독서가 한량 심씨 2020-02-18 23: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몰렌스크는 전쟁과 평화에도 나오는 전쟁시 중요도시던데요. 잘 읽고 갑니다.

NamGiKim 2020-02-18 23: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미제국의 추악한 전쟁 범죄 베트남 전쟁

(절규하는 소녀, 이 소녀는 네이팜 폭탄에 화상을 입었다.)


“1964~1972년까지,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나라가 한 작은 농업국가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원자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군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패배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싸웠을 때, 그것은 조직화된 현대의 테크놀로지와 조직화된 인간사이의 싸움이었으며 결국 인간이 승리했다.”


이 얘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미국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United States)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끝난 지 2년이 지나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위에서 언급된 인용문처럼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미국은 핵폭탄을 제외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들은 베트남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패배했다. 이것은 1776년 미국이 건국된 이래로 최초로 전쟁에서 패배한 사례였다. 베트남을 침략하여 전쟁을 일으켰던 미국의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면서도 전쟁을 몇 년간이나 지속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했고, 전쟁은 1975년에 와서야 끝이났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떻게 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고,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으며 왜 패배한 것일까?

(1945년 호치민의 베트남 독립 선포식)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하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과 전투를 치르던 미국은 반파시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조직과 협력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s)는 북베트남 지역에서 반일투쟁을 하던 호치민(Ho Chi Minh) 휘하의 베트민(Viet Minh)과 협력관계를 구축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호치민 휘하의 베트민 조직은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켰고,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에는 옛 지배자인 프랑스가 다시 들어왔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배하고 싶어 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야욕은 1946년에 노골적으로 변했고, 그해 11월 베트남의 항구 도시 하이퐁이 프랑스 군함의 무차별 폭격을 받아 6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 일어났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베트민 부대를 상대했지만,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에 맞서 게릴라 전을 전개하여 그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베트민을 지원하게 되었고, 소련의 스탈린 또한 호치민의 베트민 정부를 공식 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거기다 1950년에 한국전쟁까지 발발하면서 미국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냉전의 논리로 접근했고 그 전쟁에서 침략자 프랑스를 도왔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1950년 초기에 미국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지불했던 전쟁 비용은 1000만 달러였지만, 전쟁이 끝났던 1954년에는 10억 달러를 초과하여 프랑스가 부담했던 총 전쟁 경비의 80%를 초과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1400대의 탱크와 340대의 비행기, 350대의 정찰 보트, 24만 정의 소총, 1500만 발의 탄약 등의 군사지원을 프랑스에게 했지만, 1954년 5월 7일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가 함락되면서 이는 물거품이 되었다. 1954년 보 응우옌 잡 장군 휘하의 베트민군이 디엔비엔푸 요새를 포위했을 당시 미국은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이라 하여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의 베트민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실행하지는 않았다.

(응오딘지엠)

 

1954년 5월 7일 56일간의 포위 끝에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가 베트민 측의 승리로 끝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도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당시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베트남의 문제를 놓고 회담이 열렸다. 거기서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이 되었다. 이러한 분단에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2년 이내에 베트남 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 선거를 실시한다는 조건”이 바로 그러했다. 당연히 미국은 남베트남에 자신들을 지지하는 정권을 만들어 놓았고, 자신들이 내세운 응오딘지엠이 이끄는 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을 받던 남베트남은 정통성에서 호치민 정부에게 밀렸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의 지도부와 핵심세력들은 100년에 걸쳤던 프랑스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프랑스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다. 100만 이상의 병력을 자랑했던 남베트남군대의 장교단 중 과거 프랑스와 일본 식민지 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 사람만 있었을 정도였다. 따라서 남베트남 정부는 호치민의 북베트남 정부에게 정통성에서 상대가 안되었고, 이를 안 미국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존F 케네디 대통령)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게된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은 부정부패와 독재정치를 하였다. 그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남베트남의 초대 내각을 가톨릭 출신으로만 구성했고, 그의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자관에 앉혔다. 그의 동생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써 함께 했고, 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 임명했으며, 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 임명했다. 그 외에 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주었다. 초기에 토지개혁을 실행하여 성공적으로 마쳤던 호치민 정부와는 달리 지엠정권은 토지개혁에도 실패했고, 민중의 대다수가 믿는 종교인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알렉산더 켄드릭A. Kendrick이 쓴 <미국의 갈등The Wound Within>이란 책에 의하면, 응오딘 누가 이끌던 남베트남의 비밀 경찰은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 7만 5000명을 살해했고 5만 명을 투옥했다. 이러한 탄압에는 전직 베트민 출신도 포함되었고, 당연히 남베트남 민중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베트콩 깃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들)

이러한 응오딘지엠 정권의 폭압 통치가 계속되자 남베트남 민중은 이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고, 1960년에는 북베트남 정부에게 지원을 받는 조직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in South Vietnam) 즉 베트콩(Viet Cong)이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투쟁을 전개했다. 이렇게 되면서 남베트남은 무너질 기미가 보였다. 심지어 1963년 6월 11일 남베트남의 고승 틱광둑(Thic Quang Duc) 스님이 소신공양하는 사건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면서 남베트남 정권은 더더욱 민심을 잃게 되었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혼란의 연속이던 남베트남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미군사고문단(American Advisor)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대응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던 1963년 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900명에서 1만 6000명까지 증가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그린베레(Green Beret)와 같은 특수부대도 파견했고, 라오스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 그리고 캄보디아에서 비밀스러운 작전을 전개해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군대는 워낙 무능해서 수도 사이공 근처에서 벌어진 압박 전투(The Battle of Ap Bac)에서 1500명이나 되는 군대가 300명 안팎의 베트콩에게 대패하는 참사가 벌어지기까지 했다.

(1964년 통킹만 사건 당시 USS 매독스 호)

 

1963년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남베트남의 혼란이 지속되자 미국 CIA에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졌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진 이후 ‘두옹반 민(Duong Van Minh)’ 장군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이 남베트남에 들어섰지만, 1965년 응우옌 까오 끼(Nguyen Cao Ky)와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일으킨 쿠데타가 있기 전까지 대략 10번 이상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결국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64년에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영해 통킹만에서 비밀작전을 전개했고,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을 향한 선전포고의 구실을 만들어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미국의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을 대상으로한 대규모의 폭격을 계획했고,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의 씨를 말리기 위해 고엽제를 무차별 살포했다.

(B-52 폭격)

(네이팜 폭탄이 투하된 시골 지역)

(고엽제를 살포하는 미군 항공기)

1965년 2월 남베트남의 도시 플레이쿠(Pleiku)가 베트콩에게 기습당하는 일이 있자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을 전개하여 북베트남을 대상으로한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게 된다. 또한 북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 그리고 남베트남을 연결하는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에도 무차별 폭격을 감행하고 고엽제를 투하했다. 1965년 3월에는 남베트남의 휴양 도시인 다낭(Da Nang)의 미케(My Khe) 해변에 3500명의 미해병대가 상륙했다. 미해병대가 다낭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 말까지 18만 4000명이상이나 되는 미국 정규군이 남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고, 1966년 중반에는 30만 명 1967년과 1968년 사이에는 그 규모가 54만 9천명까지 증가했다. 그리고 미국의 요청에 따라 대한민국과 오스트레일리아 태국 필리핀 그리고 뉴질랜드가 병력을 파병했다.

(베트콩으로 의심받아 M-16 소총으로 위협받고 있는 한 주민)

(베트남 전쟁 당시 투입된 대규모 헬기 부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전하게 된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작전에 투입된 미국은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ory)’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전을 펼쳐 움직이는 것은 모두 총으로 쏘아죽일 수 있었고, 그들은 얼마든지 베트콩으로 의심이 된다면 민간인을 살해해도 상관이 없었다. 특히나 지상전에서 UH-1 헬기의 지원을 받는 미군은 베트콩이 나타났다 의심이 되면 헬기를 불러 막강한 화력지원을 퍼부었다. 1965년 11월에 있었던 이아드랑 전투(Battle of Ia Drang)에서는 대규모의 공중지원을 받은 미군이 전사자 300명을 내고 1700명 이상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렇듯 미군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이나 베트콩을 상대로 우위를 유지했다. 1967년까지 이러한 전투가 반복되었기에 미국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믿었다.

(구정 공세 당시 지도)


(구정 공세 시기 사이공 미대사관에서 벌어진 전투)

그러나 1967년이 지나고 1968년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정치 및 군사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베트남의 대명절 구정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전개한 구정 공세(Tet Offensive)가 전황을 단숨에 역전시켰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감행한 구정 공세는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땐, 베트콩 측의 결과가 혹독했다. 1달간의 공세 동안 대략 3만 7천 명 이상의 베트콩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1달 동안의 미군 전사자는 2000명 정도였다. 구정 공세는 남베트남에 있던 미군 기자들을 통해서 미국 전역에 생중계가 되었는데, 생중계가 되었던 장면 중에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있는 미대사관 1층이 베트콩에게 점령당하는 것과 옛 황궁이 있는 후에가 1달 동안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게 점령당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장면들이 생중계가 되자 미국에서는 대규모의 반전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반전운동에 나서는 미국의 젊은이들)

결국 미국은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거대한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되었고, 베트남에서 미국이 이기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린든 B 존슨은 대통령 선거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대통령으로 당선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에게 옮겨졌다. 구정 공세와 68혁명의 여파로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69년부터 ‘베트남화 정책(Vietnamazation)’을 전개하여 단계적인 철수를 감행했다. 비슷한 시기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베트콩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으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하고 더 나아가 침공하는 짓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은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1972년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미소, 미중 데탕트를 의식하여 소위 수백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한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감행했다. 이 공세는 미군의 공군력으로 무력화되었다. 닉슨 정부는 마지막 협박으로 소위 ‘라인베커 작전(Operation Linebecker II)’을 전개하여 하노이와 하이퐁에 막강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

(부활절 대공세 당시 진격하는 북베트남군)

(라인배커 작전 당시 B-52 폭격기)

(라인배커 작전으로 폐허가 된 하노이)

 

하지만 라인배커 작전에도 베트남은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1973년 1월 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에 체결하며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부를 완벽히 통일할 계획을 세웠고, 1975년 3월에 이를 실행으로 옮겼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을 궤멸시켰고, 1975년 4월 수도 사이공을 점령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이로써 베트남은 남과 북이 통일되었고, 전쟁은 북베트남과 베트콩 측의 승리로 끝났다.

(사이공 미대사관에서 탈출하는 미군 헬기)


(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격하는 베트콩 측 탱크)

정리하자면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개입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들어왔을 때, 미국은 한때 자신의 동맹 세력이었던 호치민을 버렸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에는 그 전쟁을 냉전식 반공논리로 해석하여 프랑스를 지원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미국은 베트남을 분단시켰고, 통일을 위한 총선까지 일방적으로 막았다.

(켈리 중위, 그는 미군 최악의 학살 미라이 학살을 저질렀다.)


(미라이 학살 당시 학살 당한 주민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가 정통성에서 밀리는 것과 민중들이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남베트남 정권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 그런 방법으로도 해결되지 않자 1964년에는 통킹만 사건까지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참으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1961년 8월 초부터 1971년 10월 말까지 만 10년 동안 미국은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에 총 7300만 리터의 맹독성 고엽제를 살포했는데, 이는 베트남 인민 1인당 2.7kg에 달하는 다이옥신을 투하한 셈이었다. 미국은 대략 800만 톤이나 되는 폭탄을 베트남 전쟁에서 사용했고, 그중 200만 톤을 호치민 루트에 투하했으며 이러한 무차별 폭격은 대략 200~300만의 베트남 민간인을 죽게 만들었다. 위에서 상술된 라인배커 작전에서도 미군의 B-52 폭격기가 파괴한 것은 민간인 시설이 대부분이었다. 즉 미국은 폭격이라는 행위를 통해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심지어 미국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되는 북베트남군과 북베트남측의 트럭 행렬을 막기 위해 ‘비둘기 작전(Project Pigeon)’이라는 구상까지 계획했었다. 비둘기에 폭탄을 심어 북베트남군 차량을 폭파시킨다는 이 계획은 결국 비둘기가 피아구분을 못해서 실패했지만 말이다.

(미국 신문에 보도된 미라이 학살)

(피닉스 작전 당시 사용된 마크)


베트남 전쟁 기간 미군이 전개한 ‘수색과 섬멸 작전’은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베트콩들의 경우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민중과 함께하는 게릴라 전술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미군이 전쟁에서의 전과을 보고하는 방식은 소위 ‘바디 카운트(Body Count)’였는데, 이는 전투에서 적으로 규정하고 사살한 시체들을 계산하여 전과를 보고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당연히 민간인 사살도 적군 사살로 기록되었다. 전쟁 특성상 게릴라전이었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이 공론화 되기도 했었는데, 대표적으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 그러했다. 1968년 3월 16일 윌리엄 켈리 중위 소속의 병사 30명은 미라이 지역 근처에서 대략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미군에게 학살당한 504명 중 17명은 임산부, 173명은 어린이 그리고 56명은 유아였다. 미라이 학살은 군에 의해 1년간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양심 있는 종군기자의 폭로로 그 진상이 규명되었다. 당시 미라이 학살은 군의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 학살이 아닌 적군 사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처럼 미군은 베트남에서 잔인한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길바닥에 널부러진 시체들)

(베트콩을 발로 차는 남베트남군)

 

미군은 소위 ‘피닉스 작전(Phoenix Program)’이라 하여 1968년부터 1971년까지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잡아 구금하고 고문하며 살해하는 작전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최소 2만 명에서 2만 7천 명이나 되는 민간인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당했다. 당연히 살해된 민간인이 베트콩이라는 근거는 없었다. 쉽게 말해 죄없는 민간인들이 어떠한 법적 절차없이 베트콩이라는 심증만 가지고 즉결처분당한 것이었다. 당시 피닉스 작전을 폭로했던 오즈번은 "피닉스 작전은 인간이 자행할 수 있는 가장 야수적인 범죄"였다고 진심을 털어놓기도 했다.

(베트남을 폭격하는 전투기들)

이처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상상을 초월했다. 네이팜 폭탄이 일상적으로 투하되었던 베트남의 국토는 초토화 되었고, 미군이 무차별 살포한 고엽제로 인하여 환경이 파괴되었으며 전쟁 이후 수많은 기형아들이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즉 전쟁의 피해가 전쟁 이후에 태어난 후세대들에게 까지 영향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수백만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국은 총 5만 8천 명이 전사했고, 26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들은 막강한 화력으로 베트콩을 굴복시키려 했지만, 미국의 수많은 전쟁 기계들이 베트남에서 사라졌다. 대략 3700대 이상의 미군 항공기가 파괴되었고, 5000대 이상의 헬기가 파괴되었으며 800대 이상의 전차와 장갑차가 베트남 전쟁에서 파괴되었다.

(반전운동 당시 병사들에게 꽃을 주는 히피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독립을 되찾기 위해 영웅적으로 잘 싸웠기에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미국 내에서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며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규탄하던 반전 시위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미국의 양심적인 진보 지식인들은 이 전쟁범죄를 규탄했다. 이러한 규탄의 목소리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용사들이나 전투현장에 있던 병사들에게까지 영향을 주었고, 양심있는 사람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한 행동과 목소리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패배를 안겨준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제국주의에 맞서는 반전운동가들과 베트콩들의 저항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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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Parasite (기생충) (2020 골든글로브 영화상 수상작)(봉준호 감독 작품)(지역코드1)(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Universal Studios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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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리뷰는 영화 기생충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필자는 지난 7월 영화관에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감상했다. 영화를 보기 전부터 상당한 호평이 많았기에 필자는 내심 기대했었고, 정말 감명깊게 영화를 감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이 이 영화는 해피엔딩 따위를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실존하는 현실 사회를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다.

영화 상에선 대조적인 삶을 사는 두 집안을 보여준다. 한 집안은 넓은 마당을 소유한 대 저택에서 살지만, 다른 집안은 환풍도 되지 않는 반지하에서 산다. 이런 대조적인 삶을 보여줌으로써 영화 기생충은 현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빈부격차의 문제를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 영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정말 재미있는 요소라 할만한 것은 영화의 결말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상에선 반지하 사는 집안이 기존에 일하던 가정부를 내쫓은 이후 자신들의 정체를 그 가정부에게 들키게 되는데, 그 부분에서 부터 영화의 결말이 어디로 갈지 예상되지 않고, 그들(반지하 집안과 가정부)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결말이 나오게 될건지도 예측하기 힘들었다. 영화 상에서 반지하 집안의 장남이 캐나다로 유학간 친구를 대신하여 그 집안의 수능 영어 과외 선생으로 취직했을 때, 집안에 있는 한 그림을 보고 ‘침팬지 혹은 오랑우탄‘아니냐고 답변했지만, 알고보니 그 그림에 엄청난 반전이 담겨있어 보는이를 소름끼치게 했다.

필자가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대저택에 사는 부유층의 무능함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반지하에서 살던 가족들이 기존의 가정부를 의도적으로 해고시키게 만든 이후 영화에선 개판 5분전이 된 부유층 집안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부유층들은 자신들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았다. 영화 기생충에서 나온 부유층들이 보여준 또 다른 하나의 무능함은 부유층들 끼리 가족여행을 갔을때 여실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행마저도 하층계급의 도움없이 제대로 즐기지도 못하고, 떠난지 하루도 안되어 하층계급이 챙겨주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재벌집에 붙어서 출세를 위해 거짓말까지 사용해가며 살아가는 그들을 ‘기생충‘이라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필자는 무슨 선민의식에서 인지는 몰라도 그들을 잘해주는 척 하면서 은근 깔보는 그들이야 말로 기생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위에서 상술했듯이 영화상에서 그들이 없으면 부르주아 집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러가서 놀지도 못하고, 집안 청소도 못하며, 음식도 해먹지 못하고, 자식 교육도 못한다. 즉 그런맥락에서 봤을때 영화 기생충에서 나온 부르주아 집안이야 말로 실제로는 하층계급에게 기생하며 정작 자신들 끼리는 기본적인거 조차 못하는 기생충이라고 필자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필자는 영화 초반에 나오는 반지하 집안을 보며, 이것은 절대로 허구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과거 소방서 공익 시절 구급출동을 하면 필자는 그렇게 통풍도 안되고 습기먹어 집안에 곰팡이가 들끍어 반지하 냄새가 아주 많이 나는 가정을 여러번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화의 반지하 가정은 지금도 대한민국에 존재하고 있고,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자 문제점이다. 영화 기생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의식을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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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2-11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관점도 새롭습니다ㅋㅋ 계층론 아닌 계급론으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분야에서 할 말 많게 만드는 영화가 잘 만든 영화인 것 같습니다.

NamGiKim 2020-02-11 10:28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영화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창의성과 천재성이 드러나는 작품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리하르트 조르게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1895년 러시아 남부 캅카스 지역의 바쿠에서 유전 기술자인 독일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친구사이였다.

최고의 보수를 받던 아버지는 유전 회사와의 고용 계약 해지로 직장을 잃게 되자 가족을 이끌고 독일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조르게는 학도자원병으로 참전하였다. 그는 서부전선에 파견되어 크게 부상당했는데, 손가락 세 개를 잃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는 상병으로 승진해 철십자 훈장을 받았지만, 이러한 부상 때문에 제대를 했다. 그는 부상 회복 기간 동안 마르크스의 서적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나머지 전쟁기간 중에 베를린, 킬, 함부르크에 있는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농업과 포병술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교사로 일하면서 독일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 때문에 직업을 잃고, 모스크바로 가서 코민테른의 요원이 되었다.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열망과 혁명운동에 이바지하겠다는 실천의지가 남달랐던 조르게는 이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주목을 받았고, 코민테른의 추천으로 그는 모스크바의 공산당 고위교육과정에 입교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조르게는 두각을 나타냈다. 무엇보다 외국어 능력이 출중했다. 독일어와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영어와 프랑스어도 유창하게 구사했다. 1924년 조르게는 소련 공산당원이 됐으며, 이듬해에는 소련 국적도 취득했다.

1927년 조르게에게 부여된 첫 임무는 미국 영화산업계(할리우드)에 침투해 공산주의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1929년 귀국한 조르게는 이내 소련군 총참모부 산하 제4국(정보국, GRU)을 만든 얀 베르친 장군의 눈에 띄어 GRU 소속 정보원으로 발탁됐다. 베르친은 조르게를 1년 동안 치밀하게 훈육했다. 조르게는 잠시 영국에 파견돼 정보 수집 활동을 한 뒤, 다시 독일로 옮겨 히틀러가 이끄는 신생 나치당에 가입했다.

1930년에 리하르트 조르게는 중국의 상하이로 가서 정보수집과 혁명공작을 하였다. 공식적으로 그는 한 독일의 통신사의 편집인과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특파원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저명한 좌익 저널리스트인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만나서 그녀와 잠시 사귀었으며, 그녀는 리하르트 조르게에게 일본 기자들을 소개하였다. 그는 일본 기자인 오자키 호츠미를 포섭하여 정보원으로 삼았다. 그는 농업전문가로 행세하여 중국 각지를 여행하면서, 당시 장제스의 대대적인 탄압을 피해서 지하로 숨어 있던 중국공산당의 당원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1932년에 그는 일본군과 중국군이 싸운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취재하였고, 이 해 12월에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조직 인선을 끝낸 조르게는 독일로 돌아가 열렬한 나치주의자로 변신했다. 뛰어난 친화력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조르게는 무엇보다 나치당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요제프 괴벨스 선전부장관과 친분을 맺었다. 이어 그는 베르리너 뵈르세 차이퉁 등 두 언론사의 일본 특파원으로 자리를 얻었다. 혹시나 취중에 신분을 노출시킬 수 있다는 걱정에 조르게는 좋아하던 술까지 끊었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괴벨스는 조르게의 환송 파티에 참석할 정도로 조르게에 대한 애정을 표시했다. 누가 보더라도 조르게는 골수 나치당원이었다. 베르니너 뵈르세 차이퉁 신문의 편집국장은 전도유망한 한 독일군 고위장교에게 조르게를 잘 부탁한다는 소개 편지까지 써주었다. 고위장교는 바로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의 무관인 오이겐 오트 대령이었다.

완벽한 신분세탁을 거친 후 그는 1933년 9월 일본에 도착했다. 겉으로는 골수 나치당원에다 특파원 신분을 가진 조르게는 일본 주재 독일대사관을 수시로 출입하면서 오이겐 오트 대령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됐다. 그의 부인과는 내연 관계까지 맺었다. 5년 뒤 일본 주재 대사로 영전한 오트 대령은 오자키와 함께 그의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 됐다.

1936년 일본에서 2.26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조르게는 나치 당원 신분으로 중요한 정보를 빼내어 소련에 정보를 타전하기도 했다. 리하르트 조르게는 이러한 첩보망을 통해 독일-이탈리아-일본의 방공 협정, 독일-일본 협약, 진주만 공격의 정보를 빼내 소련에 전달했다. 특히 1941년엔 일본 주재 독일 무관에게서 정보를 빼내, 독일의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의 정확한 개시 일자까지 전달하기도 했다. 비록 스탈린이 이를 간과하여 초반에 독일군에게 대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일본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스탈린에게 극동에 있던 붉은 군대를 개전 초기 빠르게 이송시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승리를 거둘수 있게 기여했다.

일본이 전시국면으로 치달을수록 조르게가 첩보활동을 벌이는 것은 매우 위험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중대국면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조르게는 첩보활동을 계속했다. 소련에서 쓰이던 1회용 암호표에 의한 무선량이 대폭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의 방첩기관(특별고등경찰)은 이를 인지했고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조르게의 요원이었던 오자키는 1941년10월 14일 먼저 체포되었고 조르게는 10월 18일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일본은 소련에서 잡힌 일본 간첩과 조르게를 교환하려 했지만 소련은 조르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조르게는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4년 11월 7일에 교수형으로 스가모에서 처형되었다.

1961년에 리하르트 조르게의 활약상을 각색한 영화 《Qui êtes-vous, Monsieur Sorge?》 (조르게씨, 당신은 누구요?)가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일본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소련에서도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고, 1964년 니키다 흐루쇼프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조르게에게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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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완 2020-02-15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본드 실제 버전이라고 할 만큼 전설의 스파이였죠

NamGiKim 2020-02-15 13:46   좋아요 0 | URL
이때 시베리아에서 동부전선으로 군대를 뺄 수 있었던건 조르게의 활약 덕분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