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경제성장 찬양하는 것들은 분명히 자본가 마인드가 맞다. 박정희식 경제성장은 단순히 재벌과 부자들을 위한 성장이었다. 민중의 복지는 개좆만큼 생각한게 박정희였다. 1930년대 FDR의 뉴딜보다도 못했다. 아무리봐도 무슨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이 소리 하는것들은 생각하는 수준이 개돼지 수준이다.

단순히 경제성장 도표만 보고, 재벌이 진출한 것만 보며 그것이 최고의 경제 성장인냥 찬양하는 종자들은 복지는 왜 필요한지, 교육, 주거, 의료, 공공시설 등이 국가가 제공해야하는 것이 인권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치 못한다. 아니 부자들이 성장하면 우리도 덩달아 잘 살것이라는 심각한 착각 밑 뇌망상에 빠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데 이것보다도 더 자본가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이승만이었다. 그 이승만이라는 작자는 미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해!˝라고 해도, ㄴㄴ 그거는 사회주의에서나 하는거임 하며 안하던 인물이다. 정리하자면 이승만이나 박정희가 경제 살렸네 우리를 잘살게 만들었네와 같은 소리는 우리가 받아야 했던 권리를 알지도 못한채 파블로프의 개마냥 읊어대는 미친소리다.

또한 최근 보면 주 52시간도 부족하다 지껄이는 저 자유한국당 쓰레기들만 보더라도 한국인들 복지 의식 수준이 아직도 저급한 수준을 받어나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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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20-01-13 2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신화에 대해서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가 본격적인 경제성장은 1970년대인데, 1970년대에 지속적으로 고속성장을 한 나라는 단 네나라입니다. 일본, 한국, 대만, 이스라엘.
1960년대 남미로 몰리던 자본이, 남미의 사회주의화로 1970년대 위 네나라로 몰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경제성장은 냉전 경쟁체제의 산물로 보는게 더 합리적일 듯 합니다.

NamGiKim 2020-01-16 22:19   좋아요 1 | URL
한국은 지정학적 특수성이 있었다 봅니다. 한국 위에 북한과 중국 소련이 있으니 미국은 태평양 라인에서 반공국가를 만들어야 했고, 이는 상대적으로 한국에 대한 많은 지원으로 이어졌죠. 그리고 사실 한국의 복지는 민주화 투쟁과 노동운동의 성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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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풍요와 흑인인권운동

(워싱턴 링컨 기념탑에서 연설한 마틴 루터 킹)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1940년대에서 1950년대 사이 대대적인 경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1945년에서 1960년 사이 미국의 국내총생산(GNP)는 2000억 달러에서 5000억 달러나 증가했고, 경제 대공황 시기 평균 25%였던 실업률은 1950년대에는 5%까지 하락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경제 대공황을 극복한 미국은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그로 인한 경제 성장까지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국의 경제 성장은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주었고, 1920년대의 번영보다도 훨씬 더 풍요로운 생활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이 있던 무렵 미국에서는 새 생명이 많이 태어나기 시작했다. 1950년에만 350만에 달하는 아기들이 태어났고, 1946년에서 1961년 사이 대략 6350만 명이 아기들이 태어났다. 쉽게 말해 1950년대는 베이비붐(baby boom)이 절정에 달했었다.

(1950년대 미국 뉴욕 타임즈 스퀘어의 모습)

 

(1950년대 미국의 일반적인 중산층 모습)


1950년대 중반쯤, 모든 산업의 공장 임금이 상당히 증가했는데 주당 평균 80달러가 되었다. 또한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항생제나 페니실린 등이 나왔고, 그러한 보건 영역의 물품들은 공장에서 대량생산 되었다. 그러한 번영속에서 당연히 미국은 소련과 경쟁했고, 그러한 경쟁은 군사 기술을 발달시켰다. 1952년에는 비키니 섬에서 히로시마 원자폭탄에 대략 1200배 이상의 위력을 가진 ‘수소폭탄(Hydrogen Bomb)’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로켓 개발에도 많은 투자를 하여 우주 프로그램을 위한 기술을 개발하는데도 정부가 많은 투자를 했다.

(당시 미국인들이 즐기던 쇼핑)

 

(영화 플레젼트 빌, 이 영화는 1950년대 미국 사회가 가지고 있던 모습을 아주 풍자적으로 보여준 영화다.)


1950년대 미국에서의 소비재에 대한 몰입이 증가했는데, 이것은 번영의 증대, 제품의 다양성과 이용 가능성 증가, 그리고 그러한 제품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던 광고업자들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러한 소비재 수요의 증가로 신용카드(Credit Card)가 발달했다. 192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 기하급수적으로 생산이 증가하였던 자동차의 경우 미국 중산층 가정 하나당 소유하고 있었으며, TV의 보급도 증가하여 1957년에는 대략 4000만 대의 TV가 미국인들에게 보급되었다. 텔레비전의 증가로 인하여 “행복한 중산층 가정의 이미지”가 미국 사회에서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이러한 풍요로운 사회속에서 미국은 여러 문화가 탄생했다. 젊은이들이 즐기는 음악과 대중문화가 그러했는데,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로 대표되는 록큰롤에 대한 젊은이들의 사랑과 비트족의 탄생이 그 예시였다. 그 한편에선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미국사회 전체를 지배하기도 했지만, 확실히 미국 사회는 자신들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풍요로움과 물질적 향락에 심취했었다.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엘비스 프레슬리, 그는 로큰롤의 전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미국의 풍요는 당연히 부유층과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선전된 풍요였지, 자본주의적 빈부격차를 철폐하고 부의 독점을 철폐하기 위한 성장은 아니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미국 민중사에 따르면 “전체 가구 중 최하층 1/5이 총소득의 5%를, 최상층 1/5이 45%를 벌었고, 1953년 당시 전체 성인인구 가운데 1.6%가 80% 이상의 법인주식과 90%에 가까운 법인채권을 소유했으며 20만 개의 기업 가운데 약 200개의 대기업이 국가 전체 제조업 자산의 약 60%를 장악했다.”라고 한다. 또한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의 조사에 따르면 1962년에 전체 미국인의 거의 1/4에 해당하는 약 4200만 명이 빈민이었다. 빈민의 20%를 차지하는 비백인 인구 중에는 전체 흑인의 절반 정도가 속해 있었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절반 이상이 빈민이었다. 따라서 전쟁 이후의 미국 경제 성장은 당연히 자본가들과 그들이 선전한 중산층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었지, 빈민들의 삶은 당연히 어려웠다.

(버스안에 있는 로자 파크스, 그는 버스 내에서 흑인들이 느껴야 했던 불공평함에 도전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미국사회의 풍요와 번영에는 공개적인 억압과 차별이 존재했는데, 백인들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흑인들이 주로 인종차별의 희생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과의 전쟁속에서도 흑인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멈추지 않았던 미국정부는 냉전이 진행되는 와중에서 인종차별을 없애지 못했다.

(당시 로자 파크스가 탓던 버스)


물론 전쟁이 끝난 이후 미국사회의 극심한 인종차별은 미국의 엘리트 계층들에게 반성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한 반성의 표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트루먼 행정부에선 군대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없애는 정책을 도입했고, 1954년 미국 연방 대법원은 1890년대 이래 고수해 왔던 ‘분리되지만 평등하다’라는 말도안되는 원칙을 깨뜨렸다. 1954년에 있던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 사건(Brown v. Board of Education)’은 미국의 학교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화한다는 선언이었다.

(인종 통합을 공산주의라며 궤변을 하는 한 백인 여성)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흑인들)


그러나 이 판결은 1960년대까지 미국 사회에서 큰 효과가 없었다. 1965년까지도 미국 남부에 있는 학교 75%가 인종분리를 실시하고 있었고, 그 지역에 사는 백인들은 흑인을 대상으로 인종차별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80년 전 제정되었던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는 여전히 존재했다.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버스 내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태웠는데, 이러한 차별은 1955년에 큰 쟁점이 되었다. 1955년 말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당시 버스를 탔던 한 흑인 여성 로자 파크스(Rosa Parks)가 버스의 백인용 좌석에 앉았다가 경찰에게 체포당하여 유죄판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이 있자 미국 남부의 흑인들은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전개하여 버스 내에서의 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리틀 록 사건 당시 흑인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주둔했던 미군. 참고로 그 당시 투입된 미군은 2001년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로 유명한 101 공수사단이었다.)


이런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진행되자 흑인인권운동의 지도자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집 현관이 산탄총 세례를 받고 집이 폭파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몽고메리의 흑인들은 승차 거부 운동을 계속했으며, 1956년 11월 대법원은 버스 노선의 인종 분리를 불법이라 판결하며 버스 내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했다. 위에서 상술했듯이 1954년 브라운 대 판결이 나온 이후에도 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1957년의 리틀록 사건이 그러했다. 1957년 아칸소주 수도 리틀록의 어느 고등학교에 9명의 흑인 학생이 입학하는 것을 주지사가 군대를 동원해 막으면서 그 사건은 일어났는데,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연방 법원의 명령을 집행하기 위하여 연방군을 파견하여 학교운동장에 주둔하면서 연방군이 흑인 학생들을 교실까지 호위하는 사건도 있었다.

(말콤X와 마틴 루터 킹. 그들이 만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1950년대부터 미국 사회에서의 흑인 문제는 다시 사회적으로 쟁점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흑인인권운동가로 성장했던 것이 마틴 루터 킹과 말콤X(Malcom X)였다. 당시 마틴 루터 킹은 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의 영향을 받아 비폭력 투쟁 운동을 전개하며 흑백통합을 주장했던 데에 비해 말콤X는 직접적인 현장투쟁을 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조직 ‘네이션즈 오브 이슬람(Nations of Islam)’에서 활동하며 북부지역의 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흑백 분리 주의를 주장했었다. 물론 마틴 루터 킹과 말콤X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흑인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을 전개했다. 물론 말콤X나 마틴 루터 킹이 서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런 입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가 되어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은 어쩌면 1963년 이후 중동지역으로 성지 순례를 갔다오고 난 뒤 말콤X의 생각이 바뀐 것도 영향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마틴 루터 킹이나 말콤X의 투쟁은 미국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에 맞서 흑인들이 투쟁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참고로 킹과 대립하며 말콤X가 고수했던 노선은 베트남 전쟁을 거치며 ‘흑표당(Black Panther Party)’와 같은 흑인급진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인 전용 식당에 앉은 흑인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그린즈버러 사람들)


 

(그런 흑인을 곤봉으로 구타하는 백인 경찰)


그 시기 미국 흑인인권운동 투쟁에서 중심이 되었던 것은 마틴 루터 킹이었을 것이다. 1955년 몽고메리 버스 승차 거부 운동 이후 마틴 루터 킹은 여러 투쟁을 전개했다. 196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즈버러(Greensboro)에서 대학 신입생 흑인 4명이 백인들만 식사를 하던 간이식당에 들어가 식당에서 비폭력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마틴 루터 킹의 노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시위는 다른 남부 도시에도 확산되었고, 그 시위에 참여한 흑인 및 지식인들은 폭력에 시달렸지만, 100여 개의 도시에서 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러한 시위에 참여했다. 그 결과 1960년 말 여러 곳의 간이식당이 흑인들에게도 식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다.

(마틴 루터 킹의 유명한 연설 I have a dream의 한 구절)


그 외에도 마틴 루터 킹은 1960년대 워싱턴에서 행진을 하여 ‘민권 법안 통과’를 촉구 했고, 그 행진에서 “I Have A Dream(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대표되는 명연설을 하기도 했었다. 그 결과 1964년 민권법이 통과되었다. 마틴 루터 킹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몽고메리 주 셀마(Selma)에서 흑인 투표권 운동을 전개하여 그 지역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도록 만들었다. 셀마에서의 투표권 투쟁으로 미국 남부 사회는 흑인들에게 어떠한 조건 없이 백인들과 똑같이 투표권을 부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마틴 루터 킹과 그의 인권운동가들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까지 전개하게 되었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셀마. 이 영화는 마틴 루터 킹과 흑인들의 투표권 투쟁을 다뤘다.)


현재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그만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말콤X나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운동가들 그리고 흑인인권을 위해 협력했던 양심적인 백인 지식인들이 투쟁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흑인인권투쟁은 미제국의 가장 큰 약점인 인종차별이 그 시대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우리가 흑인인권운동에서 배워야 할 것은 소수자와 약자를 위해 동정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투쟁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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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나는 관대하다라는 패러디 대사로 인터넷 네티즌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던 영화 하나가 있다. 영화는 2500년 전 페르시아 제국이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제2차 원정을 갔을 당시 있었던 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를 소재로 한 영화로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그리스를 지켜낸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 영화가 바로 300이다.

 

영화 300에서 나온 스파르타 군대를 보면 삼각팬티를 입고 강철 방패와 창을 든 근육빵빵 보디빌더 몸매의 전사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고, 가장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의무감도 강하며, 군대 내에서의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당연히 다 백인이다.

 

반면에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부대가 상대하는 페르시아군은 전부다 피부가 갈색과 검정색 사이이고, 스파르타에다 보낸 페르시아 전령은 흑인이며, 병사들은 그저 머릿수에 의존한 전투를 전개한다. 그들 중 일부는 아프리카나 아시아 지역에서 대려왔을 법한 코뿔소와 그 사이에서 깃털 문양의 장식을 쓰고 있는 일부 원주민들이고, 거대한 코끼리도 있으며, 이모탈이라는 부대는 사람이 아닌 오크부대다. 300에 나오는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또한 현실적 고증과는 전혀 동떨어진 인물이고, 무슨 팬티만 입고 다니며, “나는 관대하다를 외친다. 그리고 그가 있는 왕국에는 미노타우르스 얼굴을 한 괴생명체도 존재한다.

 

이렇듯 영화 300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엄청난 왜곡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당연히 이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졌고,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큰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 그렇다면 영화 300에서 나온 페르시아의 후손들은 과연 누구일까? 그 후손들이 세운나라고 바로 이란이다. 냉전시대부터 미국은 이란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79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졌을 시기 미국은 이란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폈었고, 그 이후에도 이란에 대한 각종 제제를 비롯하여 제국주의적 처사를 일삼았었다. 냉전이 끝난 이후부터 현재까지 미국은 대략 30년간 중동에서 끊임없는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다시 영화 300으로 얘기를 돌리자면, 영화 300은 현재 미국이 중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온갖 편견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에게 있어서 이란을 포함한 중동의 국가들은 그저 이슬람이나 믿고, 여성들의 인권은 바닥이며, 자살폭탄 테러나 일삼는 야만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미제국주의적 오만과 편견이 2020년 새해에 이란의 특수부대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를 폭격으로 살해하고 미국-이란 사이의 전쟁 위협으로 내몬 것이다. 물론 필자는 현재의 이란과 미국의 갈등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갈 거라 믿지는 않지만, 곧 머지않아 적어도 군사적 충돌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20년 새해 시작과 더불어 300에서 나왔던 미국의 오만과 편견을 이란 사태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멀고 험한 길이지만 중동에 평화가 오기를 기원한다. 미국은 중동에서 물러나야 한다. 안그러면 그 대가는 미국 자신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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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한국전쟁의 진실(Truth of Forgotten Korean War)

(한국전쟁 전개 과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냉전체제가 형성되면서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으로 나뉘었다. 그러한 미소 대립 속에서 전 세계적인 대립이 일어났고, 그것은 내전으로 번지기까지 했는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한 이후 독립을 하게 된 한반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고, 그러한 갈등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것이 바로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Korean War)이다. 냉전 초기 한반도에서 일어난 한국전쟁은 미국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쟁이었다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 또한 대략 3년간 한국전쟁에 참전했었기 때문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Korean War Memorial. 필자가 미국 여행기 직접가서 찍었다.)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사실상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다. 미국의 워싱턴 DC에 있는 3개의 전쟁 메모리얼이 이를 잘 입증한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메모리얼(WW2 Memorial)’은 그 자체가 아주 거대하며, 관광하는 사람들이나 미국인들이 찾기 쉽게 워싱턴 DC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오벨리스크탑 근처에 있다. 링컨 기념탑 우측에 있는 ‘베트남 전쟁 메모리얼(Vietnam War Memorial)’은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전쟁 답게 분위기가 어둡고, 5만 8천 명의 미군 전사자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에 반해 링컨 기념탑 좌측에 있는 ‘한국전쟁 메모리얼(Korean War Memorial)’은 있는 거라곤 M-1 개런드 소총을 들고 있는 사람 크기의 미군 병사 동상들밖에 없다. 워싱턴 DC에 있는 메모리얼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에게 있어서 잊혀진 전쟁이다.

(2017년 자유한국당의 한국전쟁 관련 페이스북 게시물. 사실 이것은 한국전쟁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옳은 관점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을 다루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대체로 반공주의적 시각에 기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이 한국전쟁을 치를 당시 미국 내에서는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반전운동이 사실상 일어나지 않았었을 정도였고, 미국 사회도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에 심취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학계나 그나마 역사를 아는 대다수의 미국인이 내리는 한국전쟁은 “미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전쟁”일 것이다. 그들이 생각을 더 정리해서 말하자면, “한국전쟁은 1950년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과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시작했고 미국은 한국이라는 민주주의 국가를 지키기 위해 싸웠으며 1953년에 휴전으로 끝난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199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애덤 울람은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전쟁(Stalin’s War)’라고도 불렀다.

(전쟁 기념관에 있는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쉽게 말해 미국에게 있어서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면서, 자유주의국가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공산주의를 막아낸 전쟁인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반공주의적 시각은 현재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사실은 극우에 가깝다.)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미국이 참전했던 한국전쟁은 과연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소위 대한민국 보수 세력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이 과연 역사적으로 정당한 평가일까? 그러기 위해선 먼저 한국전쟁이 어떻게 해서 전개되었고 끝났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 그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인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 선언 이후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는 해방이 되었다. 해방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이 들어왔고, 이남에는 미군이 들어왔다. 이들이 들어오자 한반도의 신탁통치 관련한 논쟁이 불거졌고, 소련과의 합의를 보지 못했던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UN에 넘기면서 1948년 이남 지역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독정부를 수립했고, 한반도 이북 또한 김일성을 중심으로 단독정부를 세웠다. 그리하여 1945년 8월 15일 한반도 이남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그해 9월 9일 한반도 이북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승만, 일각에서는 그를 건국의 아버지라 하지만 그는 해방 후 무자비한 학살을 전개했던 인물이다.)


1948년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 근처에선 남한과 북한 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즉 이 시점부터 한반도는 전쟁의 위협에 놓였다. 단독정부 수립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의 지도부는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초반의 경우 스탈린이 남침을 허용치 않았으나, 1949년 10월 중국의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의 트루먼 정부가 소위 ‘애치슨 라인’을 발표하여 미국의 반공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하자 스탈린 또한 1950년에 남침을 허용했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 수도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의 T-34 전차)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한 북한군은 잘 훈련된 군대였다. 소련으로부터 지원받은 250대의 T-34 탱크를 비롯하여 소련제 ‘야크 전투기’와 대포 박격포로 무장했던 북한군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남한의 군대를 순식간에 괴멸시키기 공격 시작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했다.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도망치기 바빴다. 한국전쟁이 북한의 기습 공격으로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은 오키나와에서 한반도로 즉각 투입된 미군을 격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했고, 그렇게 해서 1950년 8월 남한 땅의 90%를 접수했다. 그 이후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 수많은 군대를 투입하여 전쟁을 끝내려 했지만, 미군과 UN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 부산항을 통해 지원병력을 보충해 나갔고, 더는 진격할 수 없었다. 지속적으로 증원된 병력을 받은 한국군과 미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교전해나갔고, 미 공군은 한반도 전역에 인민군 시설을 대상으로 폭격을 감행했다.

(낙동강 전선의 병사들)


 

(인천상륙작전 당시 더글라스 맥아더)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주도한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는 한국군과 미군 UN군에게 유리하게 역전되었고, 북한의 조선인민군은 9월 28일 서울을 내줘야 했다. 10월 1일 한국군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해나갔고, 미군과 UN군 또한 진군해나갔다. 10월 19일에는 북한의 수도 평양이 한국군에게 떨어졌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에 인접한 초산군에 이르렀으며 11월 23일에는 함경남도 혜산시, 11월 26일에는 함경북도 청진시까지 도달한다.

(한국전쟁 당시 중국측 포스터, 중국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가치를 내세우고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장진호 전투 당시 중공군.)

 

그러나 1950년 10월 25일 한국군과 미군 그리고 UN군이 진격한 것에 분노한 중국 측은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이라는 가치 아래 참전을 단행했다. 대략 30~50만 이상의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다시 유엔군 측에게 불리해졌고,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 측에게 넘어갔다. 수원과 용인에서도 후퇴해야 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밀리자 더글라스 맥아더는 핵무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지만, 대통령 트루먼이 그를 해임했다. 그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 부근까지 전쟁을 다시 원점으로 돌렸다.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고, 대략 2년간 38선 부근에서 양측의 교전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휴전 협상이 길었던 것은 양측의 포로 문제에서 합의를 쉽게 보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아무튼,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성사되면서 끝이 났다.

(1953년 7월 27일에 조인된 휴전 협정)

 

여기까지가 대략 보수세력들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의 전개와 범위일 것이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회담이 성사되기까지 대략 3년간 전개되었고, 적잖은 인명 피해를 초래했다. 수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남북 이산가족을 만들어냈으며, 남북한 할 거 없이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전쟁 또한 휴전으로 끝나면서 남북한 모두 전쟁 이전의 원점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 모두 양측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생겼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는 방향으로 갔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한반도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숫자를 증가했고, 이는 지금까지 미국의 최신식 전쟁 기계를 한반도에 설치할 수 있는 명분이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남측과 북측 할 거 없이 양측은 자신들이 사실상 한국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그러한 주장을 북측만 하는줄 알지만, 사실 남측과 미국측도 많이 하고 있다. 미국의 오마바 대통령이 “한국전쟁은 사실상 대한민국이 이긴 전쟁”이라고 규정한 것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버락 오바마의 결론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 또한 한국전쟁을 마치 “우방국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전쟁”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결론은 반공주의적인 요소가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한국전쟁의 시발점을 단순히 북한의 기습 남침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1945년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촉한 여운형 선생. 그는 해방 후 가장 인기가 많은 지도자였다. 후에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다 극우세력의 테러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남측과 북측의 정치인들의 행적, 분단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게 됐고 그것이 어떻게 해서 전쟁으로 이어졌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사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한반도 전역에서 독립운동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그러한 노력들은 이북에 주둔했던 소련보다 미국이 행한 크나큰 압력으로 좌절되었는데, 그것은 미군정이 건준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점령군 행세를 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미국은 한반도에서 친일파들을 앞세워 그들에게 권력을 행사할 기회를 주었고, 1945년 10월에 귀국한 이승만은 그러한 친일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결탁하여 반공주의 국가를 세우고자 했다.


이승만과 친일세력들의 그러한 분단공작 행위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3상회의가 있은 후 성공적으로 먹혀들어갔다. 그들은 마치 “소련이 찬탁 미국이 반탁”을 주장했다며 사실을 왜곡하여 좌익 세력들을 공격하며 민족반역세력으로 몰아갔다. 사실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은 5년이내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신탁통치 10년을 주장했다. 쉽게 말해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소련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게 분단을 막는 길이었다. 소련의 주장은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미국과 합의하여 한반도에 만든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반소시위를 하고 있는 서북청년회, 이들은 주로 북한에서 월남한 인사들로 구성된 폭력 집단이었다. 이들은 노동자 시위를 광적으로 진압했고, 제주도에서 광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1946년 신탁통치 논쟁에 휩싸인 이남에서 그러한 분열과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지만, 지도자 여운형은 이승만을 지지하는 극우세력들의 테러에 휩싸였고, 미군정과 이승만의 방조 아래 암살당했다. 그와는 별개로 박헌영과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좌익 세력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반하여 여러 정치 및 경제 투쟁을 전개해 나갔지만, 미군정과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아주 잔인하게 진압당했다. 특히나 1946년에 월남인사들로 구성된 극우조직 서북청년단은 좌익을 죽인다는 명분을 들어 광적인 폭력과 살인을 민간인을 대상으로 저질렀다.

(제주 4.3 항쟁 당시 우익들에 의해 학살된 제주도민들)

 

(여순항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대구 10.1 항쟁을 시작으로 수많은 노동자, 농민 투쟁이 미군정과 친일 세력들에 의해 진압당했다. 이는 미군정의 무방비한 자본주의 정책으로 초래된 문제였다. 1948년 남한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방향으로 나가자 제주도와 여수 순천에서 그에 맞서 민중항쟁이 일어났지만, 미군정과 이승만에 의해 그 항쟁은 대학살로 끝이 났다. 대략 3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서북청년단과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고, 여수와 순천에서는 1만 명 이상이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보도연맹 학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

(보도연맹 학살당시 민간인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살시키는 한국군)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이승만 정부는 한국전쟁 시기 광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 초기 남한 전역에서 자행되었던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이는 한국전쟁 초기 수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학살로써, 최소 3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사건이었다. 이 보도연맹 학살의 사망자는 많게는 100만까지 잡기도 한다. 그 학살은 주도한 것은 당연히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었다. 그 외에도 이승만의 군대와 우익 조직들이 한 학살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북한에서도 있었는데, ‘신천 양민 학살 사건(Sinchon Massacre)’이 그러했다. 대략 3만 5천 명이 학살당했고, 이는 그 지역 전체 주민의 1/4이었다. 이 학살은 우익 청년단체들이 저지른 학살이었다. 또한, 다른 학살들도 많았는데, 남한에서 저질러진 또 다른 학살을 뽑자면 1951년 2월 경남 거창에서 ‘거창 양민 학살 사건(Geochang massacre)’을 들 수 있다. 대략 700명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

물론 전쟁 초기 북한군 또한 학살이 없지는 않았다. 대표적으로 대전을 비롯한 몇몇 곳에서 학살이 일어났었다. 그러나 2000년대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서 양측의 학살을 철저히 조사해본 결과 북한군과 좌익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저지른 학살에 1/6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이 우익 집안의 가족들이나 우익 출신의 군인과 경찰 청년단을 대상으로 일어났으며, 남녀노소 노인 아이 유아 가릴거 없이 학살했던 우익과 한국군 하고는 분명한 차이가 났다. 쉽게 말해 좌익과 북한군 측에선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의 경우 ‘삼대기율 팔항주의(三大纪律八项注意, Three Rules of Discipline and Eight Points for Attention)’ 원칙을 잘 따랐는지, 민간인 학살 기록이 거의 없는 수준이다.

(노근리 학살 현장, 여기서 3일간 대략 3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쓴 '해방 후 양민학살사')

아무튼, 대한민국 군인과 우익 청년단의 광적인 학살은 당연히 미군의 방조와 도움 아래 일어났다. 미군 방첩대의 경우 한국의 경찰 및 청년단체와 협력하여 민간인 사이에서 좌익 색출에 나섰다는 점에서 우익 세력들의 민간인 학살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미군 또한 전쟁 초기 민간인 학살을 조직적으로 벌였는데, 1950년 7월에 있었던 ‘노근리 학살 사건(No Gun Ri massacre)’이 바로 그것이다. 노근리 학살 당시 미군은 그 지역에 살던 몇 백 명의 민간인들을 피난시키는 척하면서 폭격을 퍼부었고, 도망친 민간인들이 다리 밑으로 숨자 기관총과 소총을 발사하여 3일에 걸쳐 학살했다. 미군 제7 기병연대가 저지른 이 학살로 대략 3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퍼붇고 있는 미군 B-29 폭격기)

(폐허가 된 평양)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중 가장 심각한 민간인 학살은 바로 공중 폭격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 미국은 즉각적으로 한반도에 군사 개입을 했고, 7월쯤에는 제공권을 장악했다.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한반도 전역에 폭격을 감행했고,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2년간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북한 지역을 대상으로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1952년 7월 11일 평양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공격’에서 주간에 1254회의 공습 출격이 있었고 야간에는 B-29 폭격기의 54회의 출격이 있었다. 미국 공군의 평가에 따르면 최종적인 도시 파괴의 규모는 독일과 일본에 비해 훨씬 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공군이 1942~1945년 동안 65만 7000톤의 폭탄을 독일 본토에 투하했고, 미군이 독일 본토에 투하한 것 까지 합치면 120만 톤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총 63만 5000톤의 폭탄을 투하했고, 추가적으로 3만 2557톤의 네이팜 폭탄도 투하했다.

(폐허가 된 원산)

 

미군이 북한을 대상으로 했던 폭격은 상당히 효율적인 파괴와 살상을 불러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60개 도시가 평균 43% 수준으로 파괴되었다면,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도시와 마을의 파괴 정도는 40~90%까지 추산된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중에서 18개의 도시는 초소한 5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책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미공군은 똑같이 어리석고 무의미한 파괴 행위를 베트남에서 되풀이했다. 집중 폭격은 어떤 전쟁에서도 결정적인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국제연합의 대량학살협약은 대량학살이라는 용어를 “국민적, 민족적, 종족적, 종교적 집단의 전부나 일부를 말살하려는 의도”로 저지른 행위로 규정했다. 여기에는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 집단의 물리적 파괴를 꾀하고자 그 삶의 조건에 고의로 해를 가하는 것”이 포함된다. 협약은 1948년에 채택되었으며 1951년에 발효되었다. 미국 공군이 바로 그 정의에 의거하여 국제연합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북한 주민을 대량으로 학살하던 때였다. 어떤 이들은 적의 도시를 표적으로 지역폭격을 가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불법이 아니었고, 1948년 8월 스톡홀름에서 체결된 적십자사의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협약 이후에야 불법이 되었다고 언급한다. 두 조약은 이 공중전에 아주 작은 영향력도 미치지 못했다. 그 공중전은 어리석고 무자비하게 자율적으로 수행되었다.”


책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미공군 사령관이던 커티스 르메이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남한과 북한 양쪽에서 도시란 도시는 거의 다 불태워버렸어요.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700만명 이상을 고향에서 내몰아서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더 많은 비극이 일어나게 된 거죠.”

(폐허가 된 서울, 서울 또한 전쟁 초기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융단 폭격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가 말한 것처럼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자는 수백만에 달했다. 이는 당연히 남한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야기 시켰다. 이런 폭격은 여순 항쟁과 인천상륙작전기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도 자행되었다.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빨치산들은 추위와 고립 속에서 미군의 폭격도 견뎌내야 했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미군은 빨치산을 대상으로 네이팜 폭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심지어 미군은 재귀열을 퍼뜨리는 세균전까지 했다. 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북한 지역에 투하된 미국의 네이팜 폭탄)

 

“재귀열은 남부군뿐 아니라 한반도 곳곳에서 막대한 인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미국산 세균은 북한 지역에도 대대적으로 살포되어 중공군은 물론, 지료약을 구할 수 없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어갔다.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전남지역에서도 많은 민간인이 죽었다 한반도를 신무기 시험장으로 삼은 미국은 소형 핵탄두나 다름없는 네이팜탄과 세균무기를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다.”

(2016년에 개봉한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 이 영화는 박근혜 정부에 의해 홍보되었다.)

 

(2019년에 개봉한 반공영화 장사리, 이 영화는 극우세력들의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관객수가 참으로 저조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미국이 저지른 잔악 행위와 범죄행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제국주의는 한반도에서 아주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그러한 전쟁 범죄와 추악한 민낯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우익 내지는 반공적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미국 사회 또한 이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으로써, 그러한 전쟁범죄 또한 같이 잊혀졌기 때문이다. 한국사회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 또한 한국전쟁을 얘기할 때, 일방적으로 반공주의적인 시각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 더글라스 맥아더를 찬양하는 반공영화 ‘인천상륙작전’이나 트랜스 포머에서 섹시 여배우로 유명한 메간 폭스가 나오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과 같은 수준낮은 영화들이 개봉한 것이다. 미국 사회 뿐만 아니라 우리들 또한 한국전쟁을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한국전쟁 연구자 브루스 커밍스가 연평도 포격 이후 집필한 서적이다. 2017년 국내에도 번역되어 출판됐다.)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은 휴전으로 끝이 났다. 휴전회담에서 당연히 대한민국은 제외되었다. 대통령 이승만이 ‘북진통일’만 주구장창 외쳤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3만 6천 명 이상이나 되는 병사를 잃었다. 그래도 미국은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이끌면서, 이승만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패권을 한반도에서 절반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아시아에서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The Vietnam War)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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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시작과 매카시즘

(냉전 시기를 표현하는 한 포스터. 불곰은 소련 자본가는 미국이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당시 트루먼과 처칠 그리고 스탈린)


1945년 8월 15일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인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미, 영, 소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에 맞서 반파시즘 전선을 구축했던 미국과 소련은 전쟁이 끝난 후 서로 추구하는 것이 달랐고, 그러한 이해에 따라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그 시대가 바로 냉전이다. 냉전시기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세력으로 나뉘었으며, 두 체제가 경쟁하는 체제였다.

(1946년 3월 윈스턴 처칠이 발언했던 철의 장막을 표현한 만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철의 장막(鐵의帳幕, Iron Curtain)’ 연설이었다. 윈스턴 처칠은 그 연설에서 소련 휘하에 놓여 있는 동유럽 국가들을 예로 들었다. 그는 “발트해부터 아드리아해까지 철의 장막이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다.”라고 하며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48년 베를린 봉쇄 당시 물자를 공수하는 미군 수송기)

(냉전 시대 당시 유럽 지도)

당시 루스벨트의 급격한 사망 이후 부통령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된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은 전형적인 반공주의자였다. 미국의 지도자 트루먼이 보기에 제2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은 모든 상황에서 최악이었다. 당시 미국 휘하의 서유럽의 상황은 공장에는 사람이 없고, 철도는 전쟁으로 파괴되어 제대로 운행되지 못했고, 1946년 말에는 서유럽에 강추위까지 몰아닥쳤었다. 거기다 서유럽권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그 나라 공산당이 민중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유럽에서의 소련과 공산주의 세력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소련과 공산주의를 적대시하는 정책으로 나아갔다.

(그리스 내전 당시 지도)

따라서 미국은 자신들의 세계 패권을 장악하고자 1946년 윈스턴 처칠이 했던 연설을 이용하여 ‘공산주의 팽창 반대’ 바람을 일으켜 냉전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리하여 1947년 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은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여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선 강경한 외교 정책”을 표방하게 되었다. 그러한 좌우익 갈등은 터키와 그리스에서 터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우익 군주독재 국가였던 그리스는 영국의 노골적인 군사개입으로 좌익 게릴라 운동이 민중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했는데, 그것이 그리스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리스 내전 당시 병사들)

1946년에서 47년 그리스 내전이 격해지자 미국은 무기와 군사고문단을 지원하는 형식으로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미국은 그리스의 우익 정부를 돕기 위해 대포와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4000톤의 군사 장비를 지원했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이끄는 250명의 군사고문단을 투입하여 “농촌 및 마을 지역의 그리스인 수천 명을 강제로 소개하는 정책”으로 좌익의 씨를 말렸다. 쉽게 말해 그 과정에서 많은 그리스인이 우익들에 의해 학살당했다.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그리스 내전은 1949년 그리스 우익 정부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리스에는 오랫동안 야만적인 우익독재 정부가 들어섰다.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트루먼 독트린에서 “나는 미국의 정책이 무장한 소수 세력이나 외부의 압력이 시도하는 예속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도와야 한다고 맏는다”라고 했지만, 실제로 가장 큰 외부의 압력을 행사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냉전 초기 미국의 직간접적 내정간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지속되었는데,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필리핀에서 급진주의자들이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이에 미국은 개입하여 이들을 분쇄했고, 1950년대 마르코스 우익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운동이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중국 민중에게 인기가 없었던 장제스 정권은 부정부패했다. 1946년 중국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는데, 미국은 1949년까지 장제스 군대에 20억 달러나 원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트루먼과 이오시프 스탈린)

 

아무튼, 1947년 3월 해리 트루먼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반소련 반공정책을 고수하자, 소련 또한 이에 가만히 있지 않았고, 1948년 베를린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이에 대응하였다. 그러자 미국은 소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이라 하여 서유럽 경제를 대대적으로 회복시키고 원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베를린에 대규모의 수송기를 동원하여 물자를 공수했다. 그 결과 미국은 소련의 봉쇄를 풀었고, 1949년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었다. 베를린 봉쇄 사건 이후 미국은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194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로 불리는 NATO를 창설했다. 나토 창설의 목적 중 하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함이었다. 이에 맞서 1955년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를 창설했다. 이렇듯 냉전은 군사적 혹은 경제적으로 우위에 서 있던 미국이었기에 소련보다 더 위협적이었고, 당시 소련은 이에 대응하는 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마샬 플랜을 통하여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세력들은 보다 약화되었다.

(1949년 소련의 핵개발을 알리는 뉴스 기사)

 

반공정책을 고수해나가던 1949년 트루먼 정부를 발칵 뒤집어 놓을 일이 두가지가 일어났다. 하나는 소련이 자체적인 기술을 통해서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1949년 10월 1일 중국의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있자 미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일하자 미국의 공화당 세력들은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와 같은 발언을 하며, 민주당을 비판했고, 소련의 핵개발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소위 간첩 색출에 나섰다. 그러는 사이에 1950년 6월 25일 지구 반대편에선 한국전쟁(Korean War)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미국 내의 반공주의는 극에 달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나타내는 중국 포스터)

 

(한국전쟁 당시 38선)

 

이러한 반공적 분위기에 힘입어 미국을 아주 극단적인 반공주의 국가로 몰고간 인물이 있었고, 그가 바로 조지프 매카시(Joseph McCarthy)였다. 1950년 초 그는 웨스트버지니아 주 휠링에서 공화당여성클럽을 대상으로 연설하면서 종이 몇 장을 보여주며 얘기했다. 그는 “자기 손에 205명의 명단이 있는데,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국무장관에게 알려졌음에도 계속 국무부에서 일하면서 국무부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의 명단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만든 명단은 거짓말과 과장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매카시가 보여준 극단적 반공주의는 미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반공 프로파간다)

(스탈린은 미국이 무너지길 원한다는 미국측 포스터)

1950년 미국 공화당은 소위 ‘국가보안법(Internal Security Act)’을 발의했고, 공산주의자들을 투입하고 구금하기 위한 수용소 논의도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며, 실제로 그런 수용소가 세워져 사용되기 직전까지 갔었다. 당시 미국의 영화나 만화, 역사 수업과 신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미국은들에게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부추겼다. 미국의 많은 영화 배우나 유명 인사들이 공산주의자인지를 사회적으로 의심받았다. 그들중 일부는 아주 적극적이어서 어린이 만화 제작으로 유명한 월트 디즈니(Walt Disney)의 경우 매카시즘의 협력자로서 많은 사람들을 FBI에게 밀고했다. 자본주의를 비판한 영화 모던 타임즈(Modern Times 1936)의 주연을 맡았던 찰리 채플린(Charlie Chaplin)도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으며,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많은 공로를 세웠던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도 매카시즘의 희생자가 되었다.

(조지프 매카시. 그는 아주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다.)

 

(착한 공산주의자는 죽은 공산주의자 뿐이라는 팻말을 들고 있는 미국의 반공주의자)

 

매카시즘 사건 중 억울한 피해사건을 뽑자면 1950년 여름에 있었던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이설 로젠버그 부부(Julius and Ethel Rosenberg) 사건을 들 수 있다.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 혐의로 기소됐다. 그 혐의는 로젠버그 부부가 소련에 원자폭탄의 비밀을 알려줬다는 것이었다. 1951년 3월 6일 방첩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 받고, 악명높은 싱싱 교도소에서 처형됐다. 그러나 당시 미국 정부가 내세웠던 로젠버그 부부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거의 없었고, 나중에 이루어진 조사에 따라 그 사건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매카시즘의 억울한 희생자인 로젠버그 부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면서 반공주의를 내세웠고, 그리스 내전이나 중국의 국공내전과 같은 곳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며,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명분하에 테러와 학살을 방조하거나 도왔다. 또한, 적잖은 무기를 반동세력들에 팔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 따라 미국은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 사회로 변화했고, 그러한 매카시즘적 반공주의는 1960년대까지 강력히 미국사회를 지배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시기 미국은 즉각적으로 군사개입을 했다. 그러나 그 전쟁은 1953년 휴전으로 끝났고, 어쨌든 미국은 한반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미국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진행되었고, 미국인들에게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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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29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리스내전은 영국의 뒤를 이어
세계의 패자로 등장한 미국의 개입
으로 우파의 승리로 귀결되었군요.

오래 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이리니>라는 그리스내전의 비극
을 다룬 소설의 압축판을 읽었습
니다.

희미하지만 철저하게 오른쪽에서
기술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오로지 좌익게
릴라들의 만행에 대해서만...

NamGiKim 2019-12-29 22:39   좋아요 0 | URL
그런 소설이나 기록은 어디든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시기 우익이 한건 싹다 빼먹으면서 마치 빨치산만 한 것 처럼 얘기한다던지, 베트남 전쟁때 베트콩이나 북베트남군이 더 했다며 물타기 하는거나 비슷하죠. 사실 두 전쟁(한국, 베트남) 다 우익들과 미국이 한게 압도적으로 많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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