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과 미국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을 잊지 말자는 미국 포스터)

(1942년 당시 제2차 세계대전 전황을 보여주는 지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을 펼치던 1930년대의 국제 정세는 또 다른 전쟁을 향해 돌진했다. 소위 ‘파시즘(Fascism)’ 혹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표방하는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서구세력들의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만주사변(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을 일으켰고, 1933년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았다.

(나치 독일의 총통 히틀러. 콧수염을 단 외모로 유명한 그는 반인륜적 인종범죄를 저질렀다.)

(1937년 국민당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 여기서 일본군은 무차별 학살을 저질렀다.)
1933년에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1934년 독일의 ‘총통(Führer)’이 되었고, 하늘 높이 솟아 있던 독일의 실업률을 낮추고, 경제 성장을 해나갔다. 1935년부터 군비를 대폭적으로 증강하고 군방력을 강화하던 나치독일은 1936년 3월 라인란트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1920년대 이탈리아에서 파쇼국가를 세운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1935년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여 합병했고, 만주사변을 통해 만주를 순식간에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2년에는 상해사변을 일으켰으며, 1937년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중국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은 난징 대학살을 벌여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병사들)
1936년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세력인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과 민주세력 간의 전쟁이었는데, 민주세력은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소련의 지원을 받았고, 파시스트 세력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는 양상을 보임으로써 세계대전을 얘고 하는 것 같았다. 1938년 히틀러은 자신의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1939년 초에는 체코슬로바키아까지 점령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걸로 대응했지만, 1939년 9월 1일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독일에게 선전포고하게 된다. 이로써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폴란드 침공 당시 병사들을 격려하는 히틀러)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던 히틀러의 독일군은 단숨에 폴란드를 점령했다. 더 나아가 독일군은 1940년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했으며, 1940년 5월에서 6월 사이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프랑스까지 전격전을 통하여 점령했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히틀러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항공부대를 조직하여 영국을 상대로 공습에 나섰다. 지구 반대편에 있던 일본 또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1940년 9월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군사동맹을 맺음으로써 ‘추축국(Axis power)’을 형성했다.

(추축국을 나타내는 일본제국의 포스터)
1930년대 뉴딜정책을 추진했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이 그랬듯이 표면적으론 중립정책을 내세웠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도 그랬고, 영국이 폭격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으며,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을 때까지도 미국은 그저 유럽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초반기에도 영국에게 적잖은 물자를 지원해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일의 유보트(U-boat) 부대가 미국의 상선을 침몰시키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미국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키게 만든 장본인은 히틀러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영토인 하와이를 기습 공격했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당시 침몰하는 애리조나호)

(추축국의 정복 야욕을 보여주는 미국의 포스터)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감행한 진주만 기습공격에서 미군 2400명이 전사하고, 애리조나호와 오클라호마호를 비롯한 전함 7척이 침몰 및 손상당하였으며,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이 손상을 입었다. 항공기 150대가 파괴됐으며, 민간인 100명이 공습으로 사망했다. 진주만 기습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에서 일본의 불법 기습을 공식 발표했고, 연설 직후‘전쟁 참가법’을 발표했다. ‘전쟁 참가법’은 상원에서는 만장일치로 하원에서는 388:1로 가결됐다. 이로써 미국은 일본에게 최종적으로 선전포고했다. 그러자 일본의 동맹국인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미국에 선전포고했고,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탱크 공장.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만대의 탱크를 생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비행기 공장.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만대의 비행기를 생산했다.)
경제 대공황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미국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기관총, 탱크, 비행기, 군함과 같은 군수 물자들을 대량생산하는 체제에 돌입하면서 뉴딜정책이 해내지 못했던 성과들을 만들어 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의 국민총생산이 증가했고, 개인소득도 증가했으며, 실업률이 급감소했다. 또한 전시체제로 돌입하며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많은 여성이 일하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여성의 고용률도 높아졌다. 전시 대량생산 체제에 돌입하게 된 미국은 전쟁 초기에 있었던 물자 지원을 보다 확산시켰고, ‘랜드리스(Land Lease)’라 하여 추축국에 맞서 싸우고 있던 영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까지 보급물자를 지원했다. 이러한 물자 지원은 파시즘에 맞서던 연합군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2차 대전 당시 여성들을 격려하는 미국 포스터. 2차 대전의 대량 생산 체제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미군 모자를 쓴 도날드 덕.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디즈니 캐릭터 도날드 덕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을 홍보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 사회를 단결하도록 만드는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특히나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일본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매우 분노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자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자원했다. 군대에 자원한 이들 중에는 16, 17살이나 되는 청소년들도 존재할 정도였다. 이들은 주로 나이를 속여서 입대했고, 군대에 자원했다가 부적격 판결받은 이들 중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이라는 사회를 단결시켰던 것이다. 심지어 미국 공산당도 제2차 세계대전을 “파시즘에 맞서는 전쟁”으로 규정하며, 이 전쟁을 지지했다. 하워드 진(Howard Zinn)과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이 전쟁에 참전했던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였다. 또한 이런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는 도날드 덕(Donald Duck)과 같이 당시 디즈니에서 만든 만화에도 잘 반영이 되었다.

(미드웨이 해전)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시기의 전황은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한 일본은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폴, 버마(현재 미얀마), 괌, 필리핀,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등을 단기간에 점령했고, 더 나아가 태평양의 중간인 미드웨이까지 점령했다. 한편 1942년 유럽에서는 독일군이 동쪽을 향해 소련 영토로 진격해 들어가며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했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롬멜장군이 이끄는 독일군 부대가 영국군을 이집트로 압박하고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러했던 세계대전의 전황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독일군이 패하고, 미드웨이 해전이 미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942년 미국은 영국군을 돕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병사들을 투입했고, 1943년 5월엔 아프리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그해 7월엔 시칠리아섬을 시작으로 이탈리아 본토에 입성했다. 또한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은 지상최대의 작전인 노르망디 상륙작전(Invasion of Normandy)을 감행하여 성공시킴으로써 소련의 요구했던 제2 전선을 형성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시작으로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은 프랑스를 천천히 해방해 나갔다. 1944년 8월에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 입성했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차례대로 해방했으며, 1945년 4월에는 독일 라인강에서 소련군과 만나 악수를 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8일 독일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오키나와 전투. 병사 한명이 톰슨 기관단총을 쏘고 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일본군은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했다. 미드웨이 해전이 승리로 끝나면서 미군은 태평양 전역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군은 1942년 과달카날 전투(Battle of Guadalcanal)와 1943년 타라와 전투에서 일본군에 맞서 승리했고, 1944년 펠렐리우섬 전투와 1945년 이오지마 전투(Battle of Iwo Jima)에서 승리했다. 또한 미국은 1941년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필리핀도 되찾았고, 수많은 해전에서 일본의 막강한 해군력을 무력화시켰다.

(세계 최초의 핵폭탄 리틀보이. 이 리틀보이가 바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원자폭탄이다.)

(원자폭탄 버섯구름)
1945년 5월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을 때, 태평양에서는 전투가 계속됐다. 특히나 1945년 4월에 시작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는 6월까지 계속되어 미군에게 적잖은 사상자를 안겨주었다. 그 해 7월 미국에서 극비리에 진행된 맨해튼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미국은 원자폭탄을 소유하게 되었다. 당시 루스벨트가 사망함에 따라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결과적으로 그 원자폭탄을 일본에 사용하기로 했고, 1945년 8월 6일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3일 뒤인 8월 9일 또 다른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은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선언식은 1945년 9월 2일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8월 15일에 끝이 났다.

(연합국의 반파시즘 연대를 상징하는 포스터)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영국 소련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6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대략 7000만 명이 사망했다. 4년간의 참전 기간 동안 대략 40만 명의 미군 병사가 사망했다. 28만 명은 유럽 전선에서 사망했고, 12만 명은 태평양 전선에서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이나 일본 제국과 같은 파시즘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전쟁에서 미국이 소련과 더불어 승리의 주역이었고,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 체제를 종결시킨 역사적인 사실은 분명히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벌인 잘못된 것들은 쉽게 잊혀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치부를 보는 관점도 필요하다.

(좋은 전쟁이라는 신화.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선한 이미지에 반론을 제시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일본계 미국인들은 사막과 같은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1942년 2월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함으로써 영장이나 기소절차, 심문과정 없이 대략 11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사막 근처로 이주시켜 살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일본계 미국인들은 대략 3년 이상 그런 수용소에서 지내야 했다. 그렇게 이주당한 동양인 중에선 제2차 대전 당시 유럽 전선과 한국전쟁에서 미군으로 활약했던 김영옥과 같은 한국계 미국인들도 존재했다. 그리고 이 조치가 특징적이었던 것은 당시 파시스트 국가였던 독일과 이탈리아 쪽 미국인들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점에도 있다. 쉽게 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루스벨트의 이런 조치는 당연히 인종차별이라는 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미국 사회의 가장 큰 치부라고도 할 수 있는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엄연히 미국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략 100만 명에 달하는 흑인들이 군복무를 하게 되었음에도 미국 정부는 군대 내에서도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서 수용했다. 심지어 수천 명의 목숨을 구한 혈액은행조차도 백인과 흑인의 혈액을 따로 보관했다. 이런 시스템에 반대했던 흑인 의사 찰스 드루는 그저 그것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부당해고 당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은 분명 미국인들을 단결시켰지만, 한편으론 미국의 노동자들에게 파업권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실업률이 낮아졌고 경제 대공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했지만, 한편으론 미국 기업의 이윤률을 높이며 노동자들의 임금은 아니었다. 전쟁 중이었던 1944년에만도 광산과 철강공장, 자동차 및 운송설비 산업에서 10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폐허가 된 드레스덴)

(도쿄 대공습 당시 투하되는 소이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B-17과 같은 폭격기들을 적국을 폭격하는 데 사용했다. 1943년엔 독일 함부르크를 폭격했고, 그 외의 각종 독일 공장 시설 등을 폭격하였다. 그러나 1000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던 1945년 2월의 독일 드레스덴 폭격은 대략 2일 동안 10만 명의 독일 민간인들을 죽였다. 1945년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Bombing of Tokyo)은 당일 공습으로 8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적국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차원에서 실행된 거지만, 한편으론 상대편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폐허가 된 히로시마)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사용한 것은 또 다른 치부일 것이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2개의 원자폭탄으로 대략 16~20만명의 민간인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를 가지고 물타기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런 대량 살상 무기를 실전에 투입했다는 사실은 당연히 인도적인 차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얄타 회담. 왼쪽에서 부터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많은 사람들이 미국이 추축국과 싸웠던 이유 중 하나를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끝내려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전쟁 기간 동안 600만 명이 유대인이 나치가 만든 독가스실에서 죽어갈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미국 정부는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942년 초에 나치가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를 확보했음에도 말이다.

(미주리호에서 진행된 일본의 항복문서 조인식)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 승리에 큰 역할을 맡았던 미국과 소련은 신강대국의 위치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 된 것이다. 구제국주의로 대표되는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복구 과정을 거쳐야 했고, 사회주의 국가 소련도 전후 재건에 나서야 했지만, 미국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쟁 기간 설비해 놓은 인프라가 고스란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미국은 1950년대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또한 전시 기간의 대량생산 체제는 미군을 현대화시켰고, 대규모의 군대로 성장시켰다. 거기다 미국은 대량 살상 무기인 핵폭탄까지 가지게 되어서 냉전 초기 소련보다 군사적으로 우위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한편으로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국제무대로 뻗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런 경제적 토대와 군사적 토대를 통해 미국은 냉전시기 소련과의 경쟁에 나섰고, 점차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국제적으로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