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한 오보

지금까지 한국과 미국 그리고 서방제국주의자들이 북한에 대해 잘못된 보도를 거리낌 없이 해왔다. 그래서 오늘은 한번 진보위키에 있는 북한 오보 관련 내용들을 나열해볼까 한다.

1. 김일성 가짜설

해방 이후 소련군과 함께 귀국해서 북한 최고 지도자가 된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의 ‘그 김일성‘이 아니라 이름만 빌린 가짜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가짜설은 한국학계에서도 논파된 주장이다. 보천보 천투의 김일성은 그 김일성이 맞다.

2. 김일성 사망설

1986년 11월 18일 〈조선일보〉가 호외로 김일성의 사망을 보도했다. 그러나 그 김일성은 1994년 7월에 사망했다.

3. 금강산댐 수공설

북한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금강산댐을 건설한다는 주장이 1980년대 돌았었다. 국가 단위의 사기극이었다. 금강산댐 폭파 시 63빌딩 1/3이 잠긴다며 국민 상대로 공갈을 치던 전두환 일당은 이에 그치지 않고 평화의 댐 짓는다고 애들 코 묻은 돈까지 긁어갔다.

4. 성혜림 망명설

1996년 2월 13일 〈조선일보〉가 모스크바에 살고 있던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이 서방으로 망명한 사실을 보도했다. 조선일보사는 이를 ‘세계적 대특종‘으로 홍보하며 기사를 작성한 〈월간조선〉의 우종창 기자에게 2000만원의 특종 상금까지 줬으나, 결국 오보로 밝혀졌다.

5. 길재경·염진철 망명설

2003년 5월 17일 ‘연합뉴스‘가 ‘외교소식통‘을 인용, 조선로동당 서기길의 길재경 제1부부장 및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염기순의 아들 염진철의 서방 망명을 보도했으나, 바로 다음날 사실무근임이 드러났다

6. 고난의 행군 300만 명 아사설

북한 경제가 최악의 위기였던 1996-2000년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의 인구 손실은 43만 5천여 명으로 밝혀졌다. 그 기간에 감소한 인구의 사망 원인이 아사 한 가지일 리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사자는 백만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7. ˝북한 학자들이 유니콘을 발견했다고 주장했다˝는 보도

2011년 12월 30일 영국의 한 매체가 북한의 학자들이 유니콘의 서식지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는 보도를 했으나, 이는 고구려 동명성왕 전설에 나오는 ‘기린굴‘을 발견했다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여기서 기린이란 아프리카에 사는 목이 긴 그 동물이 아니라 중국 신화에 나오는 뿔 달린 상상의 동물을 일컫는 것이다. 북한을 바보로 만들기 위한 뉴스였겠지만, 실은 본인들이 바보였던 셈. 어쩌면 본인들이 바보라기보다는 그런 걸 믿는 바보들이 많으니까 많이 배우고 똑똑한 기자들이 그런 짓거리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거짓말에 잘 속는 바보들은 한국에도 얼마든지 있다.

8. 탈북 청소년 총살설

2013년 5월 라오스에서 붙잡혀 북한에 송환된 청소년 탈북자 9명이 총살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2014년 12월 7일 북한의 대외 선전 매체인 ‘우리 민족끼리‘에 그 중 5명의 근황이 공개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곧이어 북한 당국은 나머지 4명의 모습도 공개했다. 애초에 북한 당국은 탈북에 대해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9. 현송월 총살설

2013년 8월 29일 남한의 조선일보 기레기들은 현송월이 포르노를 찍다 총살되었다는 헛소리를 했으나, 다들 잘 알다시피 현송월은 살아있다. 총살된 현송월은 2018년 김정은과 문재인 앞에서 노래까지 불렀다.

10. 김경희 독살설

2015년 5월 11일 미국의 CNN은 한 탈북자의 말을 인용해 김정은이 자기 고모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를 독살했다고 보도했으나, 김경희는 살아있다.

11. 리영길 총살설

2016년 2월 10일 연합뉴스의 속보로 알려졌으나, 총참모장 리영길은 살아있다.

12. ˝북 주민 30%가 마약 중독자.˝라는 보도

2016년 12월 1일 (사)북한인권정보센터(NKDB)의 이관형 연구원은 한국프레스센터가 주최한 ‘북한 주민의 마약 사용 실태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서 북한 인구의 최소 30%가 마약을 소비한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는 아무런 검증 없이 국내 수많은 언론에 의해 인용·보도되어, ‘이제 만나러 갑니다‘ 류 북한 관련 예능과 더불어 북한 사회에 마약이 만연해 있다는 인식을 남한 대중에게 퍼뜨리는 데 혁혁한 공헌을 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정말 생각이란 걸 단 몇 초만 해봐도 터무니 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발표에서 북한 사회에서 ˝성별·연령별·계층에 무관하게˝ ˝일상화됐다˝고 하는 메스암페타민(필로폰, 일명 ‘히로뽕‘)은 대개 0.03g 기준인 1회 투약분이 국내에서 10만-20만 원에 거래될 정도로 아주 비싼 마약이기 때문이다.[1] 1인당 GDP가 많이 쳐줘 봐야 2천 달러 내외[2]인 북한 사회에서 평범한 서민들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북한에서는 거기 사람들한테 부담 없는 가격으로 팔 거라고? 그럴 거면 왜 국제 마약상들이 엄격한 통제 사회의 위험(예: 총살)을 무릅쓰고 굳이 거기 기어 들어가나? 대외적으로 훨씬 개방화되어 있고 마약 사범에 대한 처벌이 적어도 공산 독재 국가에 비하면 매우 널럴하며 무엇보다도 구매력이 비교불가 수준으로 압도적인, 대한민국이라는 이상적인 시장이 바로 옆에 있는데 말이다. 실제로 탈북자인 최승철 씨는 2011년 1월 21일 ‘오마이뉴스‘ 기고문을 통해 ˝(북한에서) 옥수수 100kg과 맞먹는 마약을, 그것도 마치 전 국민이 흡입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황당한 이야기에 불과˝하고, 자신이 북한에서 목격한 마약 사용자는 ˝대부분 먹고살 걱정이 없는 부유층의 일부 극소수 사람˝이었다며, 북한 주민 다수가 마약에 중독되었다는 보수 매체의 과장·왜곡 보도를 비판한 바 있다.

2019년 4월 22일에 방영된 ‘문화방송‘ 시사·교양 프로그램 ‘당신이 믿었던 페이크‘에서 이 가짜뉴스를 다뤘다. 이 방영분에서 마약상 출신인 탈북자는 이관형의 주장과는 달리 북한의 마약 중독자 비율이 0.2-0.5%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추정했고, 마약 재활치료 전문의인 천영훈 박사는 전 인구 30%는커녕 단 3%만 필로폰 중독자라 해도 그 사회는 작동할 수 없다며 이관형의 주장을 일축했다. 방송을 통해 이씨가 연구자로서 자질이 의심되는 면이 드러나기도 했는데, 예컨대 자신과 동일한 주장을 북한 당국자가 사실로 확인해 줬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으니 본인의 설이 ‘교차검증‘되었다며 자신만만하게 제시한 기사에서 정보의 원출처는 다름아닌 본인의 발표문이었다.

13. 김일성 가면 사건

2018년 2월 10일, 평창 겨울 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종목의 코리아 팀과 스위스 팀 간 경기에서, 남북한 단일 팀인 코리아 팀을 응원하던 북한 응원단이 쓴 가면을 일부세력이 김일성 가면이라고 주장하며 생긴 해프닝이다. 결과적으로 이 가면은 김일성 가면이 아니었고 지도자를 최고존엄으로 여기는 북한의 정서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가짜뉴스에 의한 해프닝이었다.

14. 풍계리 갱도 폭파에 대한 오보

2018년 5월 24일 벌어진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갱도 폭파에 대해, ‘TV 조선‘ 온라인 뉴스 팀이 그것이 실제로 이뤄지지 않았음을 속보로 보도했으나, 불과 수 시간만에 오보로 밝혀졌다

15. 국민연금 200조 북한 증여설

2018년 8월부터 일베저장소 등을 중심으로 남북 정권의 최고위층이 국민연금에서 200조 원을 떼서 북한에 넘기는 방안을 논의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작된 증거조차도 내세우지 않은, 그야말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짜뉴스다. 하도 황당하다 보니 조중동조차 물지 않았다.

16. 북한 헬기 남하설

2018년 12월 14일 한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이 북한군 헬기가 용인까지 남하... 아... 파주, 연천도 아니고... 하여튼 그랬단다. 그걸 믿는 머저리가 어디 있냐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있다. 얼마나 혹하는 인간들이 인터넷에 많았으면 포털에 연관 검색어까지 생겼을 정도였고, 모바일로도 카톡 등을 통해 ‘긴급 속보‘라며 전파되었다. 물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고, 헛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인 문제의 유튜브 채널 운영자 손상대 씨는 JTBC와 인터뷰에서, 제보자가 의무 수송 헬기의 적십자 마크를 인공기로 오해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해명을 내놨다.

17. 김여정 징계설

일단 웃고 시작하자. 김여정이 징계를 당했다니 이게 무슨 개 짖는 소린가. 김여정은 다들 알다시피 북한의 절대권력자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현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냥 최측근, 계승자 후보도 아니고 친동생이다. 자신의 유일한 외국 체류 시기인 스위스 유학 시절을 같이 하기도 했으니 김정은으로서는 상당히 애뜻한 마음이 있을 터이다. 그러한 인물이면 어지간한 중대 범죄가 아니고서는 견책을 당할 리가 없다.

이러한 기본 상식조차 저버린 〈동아일보〉·〈조선일보〉등 국내 보수 언론은 2019년 5월 말부터 하노이 북·미 회담의 실패를 책임지고 국무위원회 대미 특별 대표 김혁철은 총살, 조선로동당 통일선전부장 김영철은 숙청당했다는 설을 보도하면서 조선로동당 제1 부부장 김여정의 ‘근신‘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이러한 보도는 무비판적으로 재인용·확산되었다.

다행히 이런 웃기는 소리가 거짓임이 밝혀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일단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는 김영철은 보도가 나간 지 불과 수일 만에 김정은과 함께 군 부대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이 포착되어 건재가 확인되었다. 바로 그 다음날인 6월 4일에는 김여정도 김정은을 수행하여 집단체조 관람을 한 사실이 밝혀지며 국내 최대 계란판 원료 공급처인 〈조선일보〉를 머쓱하게 만들었다. 처형되었다는 김혁철도 국정원의 확인으로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유력해진 상황이다.

이 희극의 정점은 6월 25일에 국정원에서 김여정의 서열이 국가지도자 급으로 격상되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무슨 듣보잡도 아니고 김여정 정도 인물에 대해서 당시에 본인이 실제로 겪은 것과 완전히 정반대 상황을 그린 국내 언론의 대북 보도를 신뢰할 가치가 있을까?

18. ˝괴뢰가 보내온 귤은 전리품.˝이라는 주장

2019년 7월 28일 일본의 〈도쿄신문〉은 북한 치안기관에 하달한 내부 문건이라는 문서를 소개하며, 문서 중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트럼프 놈˝이라고 했다든가, 2018년 9월의 제5차 남·북 정상회담 시에 김정은에게 받은 송이버섯에 대한 답례로 문재인이 같은 해 11월에 북측에 보낸 귤 200t을 두고 ˝괴뢰가 보내온 귤은 전리품이다˝라고 표현했다는 등의 언급을 했다. 이는 국내 보수 세력이 문재인 정권을 상대로, 북한이 한국을 호구로 여기느니 한국이 북한에게 [패싱]을 당하고 있느니 하는 식의 정치적 공격을 펼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쿄신문〉이 소개한 문건은 정보당국, 북한 전문가 및 탈북자들의 분석 결과 조작된 것일 가능성이 농후한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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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9-0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꼴들은 이거보고 반성해라!!
 

운디드니 학살(Wounded Knee Massacre)


1850년대에서 1880년대까지 원주민과 백인의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백인세력들이 원주민 문명에 가하는 위협이 점점 커지자, 원주민들도 이에 저항했던 것이다. 원주민들의 공격은 주로 백인들의 공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때때로 이런 소규모 교전 및 전투가 크게 비화되기도 했는데, 남북전쟁 중에 미네소타 주의 동부 수(Sioux) 부족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던 것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운디드니 전장에서 말을 탄 버팔로 빌 대위, 볼드윈 장군, 넬슨 A. 마일즈 대위, 모스와 기타 인물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 백인 군대는 서부 원주민들과 여러 전선에서 맞부딪쳤다. 가장 치열하고 장기적인 전투는 몬태나에서 벌어졌는데, 미육군은 당시 와이오밍 주의 래러미 요새(Fort Laranie)와 새로운 광산 중심지를 연결한 보즈먼 도로(Bozeman Trail)를 건설하려던 참이었다. 서부에 있던 수족은 백인 군대가 자신의 땅인 버펄로 방목지 중심부를 침입한 것에 분노했다. 원주민들은 위대한 추장 붉은 구름(Red Cloud)의 지휘로 병사와 건설 인부를 무차별 공격 했고, 이후 그 도로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사건 사흘 후의 장면, 전장에 여러 구의 시신 중 일부가 담요에 싸여있다.)


1850년에서 1880년 사이 캘리포니아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5000명에 달하는 원주민들을 살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가난이나 질병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의 원주민 인구가 남북전쟁 이전 15만 명에서 1870년 3만 명으로 줄어들게 한 주요 요인이었다. 1867년에 일련의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인디언과 빚은 갈등은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요인이 등장해 또 다시 평화를 깨뜨렸고, 1876년 리틀 빅혼(Little Bighorn) 전투로 이어졌다. 원주민은 약 25000명에 달하는 전례 없는 대부대를 이루어 커스터 대령 휘하 연대를 기습 포위해 몰살시키는 전과도 새웠지만, 단합한 전사를 하나로 유지할 만한 정치조직이나 물자가 없었기에 추적을 피해 무리지어 달아나거나 식량을 찾아 흩어졌고, 미국 군대는 그들을 하나씩 추격했다. 미국 군대는 그들을 다코타로 돌려보냈고, 수족은 이내 힘을 잃고 패배를 인정하여 보호구역에 정착했다.

(운디드니 사망자들의 집단묘지. 사건이 일어난 지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에 묻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수십 년에 걸친 전쟁과 정부의 탄압은 서부에 남아 있던 원주민 인구를 격감시켰다.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종교적 대상이기도 했던 버펄로도 원래 6천만에서 1억 마리였으나, 1889년에는 100마리도 안 남을 정도로 그 수가 줄어 원주민과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되었다. 같은 종족의 죽음과 영토의 강탈, 자신들의 파괴된 생활방식을 애도하기 위해 원주민들은 ‘고스트댄스(교령춤)’라는 새로운 영적인 운동을 전개했다. 이 의식은 백인 침략자에게 살해당한 모든 원주민과 버펄로의 부활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원주민의 그런 활동 및 의식행위는 자신들의 세상이 올 거라는 믿음에서부터였다.

당연히 미 정부는 이 고스트댄스를 백인 개척민들 두렵게 만드는 야만적 행위라고 낙인을 찍고 이를 금지했다. 수우족의 이 의식을 목격한 사우스다코타의 파인리지 보호구역에 있는 백인 관리인이 “인디언들이 눈 위에서 춤춘다, 그들은 미쳐버렸다. 우리는 보호가 필요하다”는 전보를 워싱턴으로 보냈다. 미 정부는 수우족의 고스트댄서들을 검거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군인들이 두려웠던 350명의 오글라라 수우족들은 식량과 피난처, 말을 주기로 약속했던 추장 레드 클라우드의 보호를 찾아 빅풋의 인도로 배드랜드를 거쳐 가는 242km의 이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운디드니 강 근처에 피난처를 마련했는데 이미 500명의 군인들이 이들의 뒤를 쫓고 있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에서 나온 운디드니 학살.)


운디드니 강 근처에 세운 원주민들의 피난처를 발견한 미군은 그곳을 포위하여 수색했다. 미군은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총을 압수하고자 했는데, 그 총을 내놓지 않던 원주민 한명이 병사 한 명을 사살하자, 미군들은 원주민들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과 대포를 발포했다. 운디드니 학살은 대략 30분 동안 일어났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대략 300명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와 유아를 학살했다. 운디드니는 지옥으로 변했다. 죽고 다친 여자들과 어린이, 그리고 아기들이 사방에 널려있었고 포탄에 맞아 갈기갈기 찢긴 사람들도 있었다. 살아남은 원주민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한 아기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있는 엄마의 젖을 빨고 있었다고 한다.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자신의 책 미국민중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디언들은 서부의 평원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1890년의 어느 추운 겨울날, 미 육군 병사들이 사우스다코타 주의 운디드니에 있는 인디언 막사를 습격해 300명의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살해했다. 이 학살은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 중에서 정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이 대륙은 백인들의 소유임이 굳어졌다.”

 

학살이 끝난 몇일 뒤인 1891년 1월 1일 민간인으로 구성된 매장반이 시체 매장을 위해 학살 현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눈 속에서 146구의 시신을 찾아 커다란 구덩이 안에 던져버렸고 일당으로 시신 한 구당 2불씩 받았다. 운디드니 학살을 기점으로 마침내 원주민들의 평원은 미제국에 의해 정복되었고 서부의 식민지화는 끝이났다. 하워드 진의 말대로 콜럼버스와 함께 시작된 400년간의 폭력의 정점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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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역사왜곡의 특징

태평양 전쟁기 일본군 희화화

식민지 근대화론

마오쩌둥희화화 및 악마화

베트남 전쟁 원인 물타기 및 한국군 민간인 학살 부정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중국 혁명에 대한 평가절하

남북 분단 책임을 좌파와 소련에게 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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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국의 대자본가들

(토마스 에디슨)

 

1865년부터 1900년까지의 시기에는 증기기관과 전기가 점차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했다. 미국에는 193000마일의 철로가 건설되었고, 전신, 전화, 타자기 등 새로운 기기들은 사무의 속도를 향상시켰다. 석탄과 석유를 사용하여 공장의 기계를 작동시켰고, 도시의 가정집과 길거리도 밝힐 수 있었다. 발명가들과 사업가들이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했다. 어떤 발명가는 사업가를 겸하기도 했는데,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이 그러했다. 전기장치를 발명한 그는 판매에도 능했다.

(국내에 출판된 록펠러 전기. 악덕 자본가들은 이렇게 위대한 기업인 내진 성공한 사람으로 미화됐다.)

 

그러한 발전에는 당연히 인간의 노동이 필요했다. 그런 노동은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몫이었다. 19세기 후반의 미국에서는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엄청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생산된 부가 마치 피라미드처럼 구조를 이루었다. 피라미드 밑에는 노동자들이 있었고, 그 노동자들은 흑인, 백인, 중국인, 유럽 이민자, 여성과 같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미국의 새로운 억만장자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중에는 가난에서 벗어나 억만장자가 되어 출세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가난뱅이에서 부자가 된 성공 스토리는 언젠가는 그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데, 잘 이용되고 악용되었다

(석유로 재벌이 된 록펠러)

 

미국의 역사책에서 위대한 성과라 평가받고 있는 대륙횡단 철도는 구 철도회사에 의한 피와 땀, 정치적 책략, 도둑질 위에 건설된 것이었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는 서쪽의 태평양 연안에서 동쪽 방향으로 건설을 시작했고, 자유로운 토지 사용과 차관을 확보하기 위해 위싱턴 D.C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시 20만 달러의 뇌물을 바쳤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장에서 일하는 아일랜드계, 중국계 노동자들에게는 1,2달러 정도의 일당만 지급했다.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는 네브래스카부터 서쪽으로 건설을 진행했다. 감사를 받아야 할 때가 되자 이를 모면하기 위한 뇌물 차원에서, 의원들에게는 회사의 주식을 헐값으로 양도했다. 한편 노동자들은 더위와 추위,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수백 명씩 목숨을 잃었다.

(1914년 러들로 학살. 록펠러는 주방위군과 민병대 그리고 개틀링건 까지 동원하여 수십명의 노동자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미국의 유명한 억만장자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는 새로운 석유사업을 통해 재산을 모았는데, 그 과정에서 철도회사들과의 암거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록펠러는 운송비를 싸게 해주는 대신 석유 운반에 그들의 철도를 이용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이런 암거래로 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기름을 싸게 팔 수 있었다. 그래서 다른 석유회사들이 제대로 경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록펠러는 그런 경쟁회사들을 매입하여 독점기업을 세웠다. 1899년에 이르면 스탠더드 석유회사는 다른 많은 회사의 주식을 장악한 지주회사가 됐다. 자본금은 11000만 달러였고, 연간 이윤은 4500만 달러였으며 록펠러의 재산은 2억 달러로 추산됐다. 오래지 않아 록펠러는 철, 구리, 석탄, 운송, 은행등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그 결과 록펠러 회사의 이윤은 연간 8100만 달러가 되고 록펠러의 재산은 20억 달러를 넘게 되었다.

 

석유 재벌 록펠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사악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는데, 1914년 러들로 학살(Ludlow Massacre)이 그랬다. 1914년 미국 콜로라도 주에서 록펠러 소유의 광산에서 일하던 광부들과 그 가족이 파업을 하자, 록펠러는 콜로라도 주방위군과 회사에 고용된 민병대를 동원하여 수십 명을 학살했다.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10살 미만인 아이들도 적잖게 있었다. 콜로라도 주에서의 파업 및 농성은 사실 록펠러 회사가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며 대량으로 해고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실질적인 책임은 악덕 자본가 록펠러에게 있었다. 이후 미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는 러들로 학살을 두고 1946년 동명의 노래를 작곡해 불렀다.

(앤드류 카네기. 그는 강철을 기반으로 미제국을 만들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복지는 전혀 생각치 않는 악덕자본가였다. 그의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1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해야 했다.)

 

또 다른 미국의 악덕 기업가로는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JP 모건(John Pierpont Morgan)을 들 수 있다. 앤드루 카게니는 17세에 전신원이었고, 그 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Pennsylvania Railroad) 사장의 비서를 지냈으며, 엄청난 수수료를 받고 철도 재권을 판매하는 월스트리트의 중개인이 되어 곧 백만장자가 된 인물이었다. 그는 강철 생산에 투자를 많이 하여, 미국의 산업화와 도시화에 있어서 많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카네기는 1872년에 런던으로 가서 새로운 베세머 제강법을 보고 미국으로 돌아와 100만 달러를 들여 철강공장을 지었다. 연방의회가 설정한 높은 관세는 해외의 경쟁을 편리하게 막아 줬고, 1880년에 이르러 카네기는 한 달에 1만 톤의 강철을 생산해 연간 150만 달러의 이윤을 벌어들였다. 1900년 카네기는 연간 4000만 달러를 벌었고, 그해 한 디너파티에서 JP 모건에게 철강회사를 팔기로 합의했다. 그는 49200만 달러에 철강회사를 모건에게 팔았다.

 

그 뒤 모건은 카네기의 회사와 다른 회사들을 합병해 유에스 철강(US Steel Corporation)을 설립했다. 모건은 13억 달러(합병된 기업들의 총가치보다 4억 달러가량 높은 금액이었다)어치의 주식과 채권을 팔았고 합병을 조정하는 대가로 15000만 달러의 수수료를 챙겼다. 하지만 어떻게 모든 주식소유자와 채구너소유자에게 배당금을 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연방의회로 하여금 외국의 강철을 가로막는 관세를 통과시키도록 함으로써, 경쟁을 막아 톤당 가격을 28달러로 유지함으로써, 20만 노동자를 겨우 가족의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임금으로 하루 12시간씩 일하게 만듦으로써 가능한 일이었다. 즉 엔드류 카네기와 모건은 노동자들을 하루에 12시간 이상 노동을 시켜 착취함으로써, 자신들의 기업 제국을 만들고 유지했던 것이다.

 

1884년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의 대통령 당선은 당시 미국에서 일어나던 현상들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은 민주당의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독점기업 및 주식회사들의 권력과 맞서 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산업계의 수장들에게 제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여러분이 사업을 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약속했다. 당선된 후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빈민들보다는 부자들에 대해서 훨씬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가뭄으로 곤경에 처한 텍사스 농부들이 곡물 씨앗을 살 수 있도록 10만 달러를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아까워서 거절했다. 당시 국고에는 엄청난 돈이 쌓여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해에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부자들이 갖고 있던 국가 채권들을 원래 가격보다 비싼 값으로 되사는 짓을 저질렀다. 결국 그는 부자들에게 4500만 달러를 헌납한 셈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 당시 노동 현장의 모습. 아동 착취도 존재했다.)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 이론가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묘사했던 악랄한 자본주의 국가와 거의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질서 유지라는 중립성을 가장하면서 부자들의 이해에 봉사했다. 국가의 목표는 상층계급의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고 하층계급의 반란을 통제하며 체제의 장기적인 안정을 향상시키는 정책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민주당이나 공화당 어느 쪽이 승리하든, 국가 정책의 중요한 틀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미국의 악독 자본가들의 엄청난 부를 즐기고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광산의 붕괴, 화재, 폭발로 인해 죽거나 신체가 절단되는 등 그 부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제철공장과 직물공장에서는 수천 명이 죽고 불구가 되었으며, 1889년에는 22천 명 이상의 철도노동자가 죽고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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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8-30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편은 운디드니 학살입니다.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이산의 책 21
유인선 지음 / 이산 / 2002년 3월
평점 :
절판


이제 읽기 시작했다. 참 흥미로운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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