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크로우 법과 쿠 클럭스 클랜(KKK)

(면화 재배를 하고 있는 흑인들 남북전쟁 이후 노예가 해방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인종차별을 겪었다.)

 

남북전쟁은 1865년 북부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에서 승리한 북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경제를 회복하고자 했다. 당연히 경제 재건은 승리한 북부 측의 정책을 중심으로 실행했는데, 이는 남부인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남북전쟁이 끝나자 노예였던 흑인들 대부분은 해방되었는데 당연히 노예제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했던 남부입장에선 굉장히 불만족스러워할 조치였다. 물론 미국 정부가 노예주들과 싸운 것은 노예제를 종식시키기 위함이 아닌 남부의 막대한 영토와 자원, 시장을 얻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 단체 KKK. 이들은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게 무차별 폭력과 범죄를 저질렀다.)

 

노예상태에서 해방된 흑인들은 이후 미국식 자본주의적 착취에 시달리는 하층계급이 되었다. 물론 흑인들이 해방됨에 따라 아주 극소수의 경우 성공하는 사례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층계급으로 살아가야만 했고, 당연히 그들은 평생 노예만 아닐 뿐 예전 주인에게 복속되어 살아갔다. 미국에 사는 흑인 대다수가 남부에 있었고, 북부로 올라갈 형편이 안되었기에, 당연히 남부사회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남부사회에서 유행하던 린치. 미국남부사회는 이런 야만적인 짓을 1930년대까지 흑인들에게 했다고 한다.)

 

남북전쟁 이후 연방정부는 일정 부분이나마 흑인들의 보호를 위해 힘을 썼지만 1870녀대부터 점차 방관하게 되었다. 18655월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는 백인들이 흑인 46명을 살해했고, 100군데 이상의 가정집과 교회, 학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이런 폭력은 습격, 구타, 인종에 따른 살인행위를 하기 위한 백인들의 폭력 조직 결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단체가 바로 쿠 클럭스 클랜 즉 KKK.

(20세기 미국에서 실행되었던 짐 크로우 법. 백인과 흑인을 화장실에서 조차 구분하는 짓을 했다.)

 

1870년대부터 북부 정치가들은 흑인 유권자들의 지지에서 얻는 이익과 공화당을 받아들인 백인들이 장악한 남부의 안정적인 상태에서 생기는 이익을 놓고 저울질했고, 이는 결국 1877년남부에서 연방 군대를 철수시키면서 남부 흑인들에 대한 마지막 군사적 보호마저 사라지게 했고, 그 결과 흑인들은 남부 백인들로 하여금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남부사회의 흑인들은 KKK와 같은 인종차별 단체의 테러에 노출되었고, 1900년에는 무렵에는 남부의 모든 주가 흑인들에게서 투표권과 평등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디즈니 만화 영화 아기 코끼리 덤보에서 나온 장면. 여기 나온 까마귀들 중 한 까마귀의 이름이 짐 크로우인데, 이는 짐 크로우 법을 뜻한다. 즉 짐 크로우 법을 만화상에서 합리화시킨 것이다.)

 

당시 남부사회에 적용된 악질적인 법중 하나는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이었다. 이 법은 인종 분리 정책으로서 1876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00년간 미국 남부 사회에서 실행했던 법으로 참으로 악명높은 법이었다. 예를 들면 공립학교, 공공장소, 대중교통과 화장실, 식당 그리고 식수대에서 백인과 흑인을 격리했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백인과 흑인을 격리했는데, 군에서의 흑백분리 정책은 제2차세계대전 때까지 지속되었다. 또한, 미국 남부사회에서는 이런 분리 정책의 폐해가 1960년대 까지 곳곳에서 드러났는데, 1955년 로자 파크스가 주도 했던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Montgomery Bus Boycott, 1955)이 이를 잘 입증한다. 당시 미국 경찰들은 흑인들을 체포하고 살해하는데, 짐 크로우 법을 악용했다. 짐 크로우 법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참가하던 1965년이 돼서야 사실상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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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폐지 운동과 남북전쟁

  

 

노예제는 고대부터 존재했던 제도였다. 고대 로마시대에도 있었고, 동양권 국가들의 역사에도 존재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 흑인 노예들이 들어온 것은 17세기 초였다. 그 시기에 북미대륙으로 온 흑인들은 노예라기보단 계약 하인제에 가까웠지만, 현 미국의 남부지대에서 농업이 번창하면서 미국 남부지역은 노예제가 필요하게 되었고, 식민지 미국 또한 대다수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고 오게 된다. 미국 건국 이후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했던 데에 비해 남부는 농업 위주의 경제가 발전하였는데, 당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남부의 대지주들은 노예들의 착취를 통해 생산한 면화를 영국과 유럽에 수출했고, 그들의 산업기반의 핵심은 흑인 노예를 통한 생산이 바탕이 되었다.

 

남부에서의 노예는 인간이라기보단 하나의 재산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남부사회에서 흑인 노예들은 사고 팔렸고, 저당에 잡히기도 했으며, 빚을 갚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부사회의 입장에선 노예제가 필요했고, 이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은 사실상 재산을 버리는 것이었으며, 남부사회의 경제체제가 무너지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당시 미국에 살던 흑인들 대다수가 남부에 있었다.

(도망 노예를 잡아온 도망 노예 사냥꾼들)

  

하지만 이런 남부사회의 노예제는 점차 비인도적인 문제로 간주되며 이를 반대하고 저항하는 목소리가 생겼는데, 남부와는 달리 주로 흑인 노예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았던 북부 지역에서 일어났다. 그 외에도 흑인들은 여러 가지의 방법으로 소극적인 저항을 하기도 했고,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물론 그런 반란의 경우는 기나긴 세월 동안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미국의 노예제 문제가 정치적인 영역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1840년 자유당이 출현하면서부터였다. 윌리엄 게리슨 같은 인물들은 노예제를 폐지하고자 하였고, 자유당은 연방에 편입되는 영토와 주에서 노예제를 금지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국내의 노예무역을 금지시킬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노예제 폐지 운동에 흑인들이 가담하기도 하였다. 북부에 거주하던 소수의 흑인들은 도망 노예들을 구출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1830년 당시 북부에는 자유를 얻은 약 13만 명의 흑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20년 후에는 20만 명으로 증가하면서 대략 7만 명 이상이나 되는 자유 흑인들이 북부에서 살게 되었다.

(1850년대 당시 도망노예의 체포를 요구하는 호소문)

  

그러나 1848년 멕시코 전쟁 이후 미국 정부는 캘리포니아를 비롯하여 새로 얻은 영토에 대해 비노예주(enslave state)로 규정했고, 그 대가로 1850년 도망노예법(Fugitive Slave Act)을 통과시켜주었다. 이 법은 탈출한 노예들을 다시 소유주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법으로, 이미 북부로 탈출하여 살고 있는 노예들에게도 적용되었다. 결과적으로 미국 정부는 남부에게 유리한 법을 강화시켰던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그는 인종차별주의자였고, 노예해방을 원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노예제 문제의 갈등을 북부와 남부가 빗게 된 사건은 1857년 드레드 스콧 사건이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은 드레드 스콧이라는 노예가 자유 지역에서 한동안 지내왔는데도 그가 자유를 얻을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유는 그를 인간이 아닌 재산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 사건에서 남부와 북부의 갈등이 있었다. 1860년 가을 에이브러햄 링컨이 신생 공화당의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하게 된 이유에는 국민적인 충돌이 아닌 엘리트 집단 간의 충돌이었다. 당시 북부는 자유토지, 자유노동, 자유시장등의 경제적인 팽창에서 남부와 갈등하다가 생긴 사태였지, 북부가 노예제 폐지를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과거 노예해방론자로 알려진 에이브러햄 링컨은 18613월 대통령 취임연설에서 남부와 탈퇴한 주들을 회유하는 발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남부 주들에 존재하는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사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내게는 그렇게 할 법적 권리가 없으며 또 그렇게 할 의향도 없습니다.”

(1863년 게티즈버그 전투. 이 전투는 남북전쟁의 전황을 바꾸었다. 그 결과 북군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남부와의 갈등은 돌아설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18614월 남부연합이 북부측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며 남북전쟁이 일어났다. 흑인 노예 해방론자로 알려진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4개월째 이어지면서 프레먼트 장군이 미주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연방에 저항하는 노예주인들의 노예는 자유인이 될 것이라고 말하자, 링컨은 이 훈령을 철회했는데, 그는 여전히 메릴랜드, 켄터키, 미주리, 델라웨어 등 4개 노예주를 연방에 묶어두려고 안달이 나 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이 점점 격화되면서 사상자가 급증하고, 승리에 대한 절망감이 고조되고, 노예폐지론자들의 비판이 링컨을 떠받치는 너덜너덜한 연합세력을 갈가리 찢어 버릴 태세를 보이자, 링컨은 그제야 비로소 노예제를 반대하는 행동에 착수했다.

(흑인인권운동가 프레드릭 더글라스)

 

남북전쟁의 전황은 초반엔 남군 중심으로 유리하게 돌아갔다. 18617월에 치른 제1차 불런 전투(Battle of Bull Run River)1862년 제2차 불런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18637월 게티즈버그 전투(Battle of Gettysburg)를 중심으로 전황은 북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에서 승기를 잡음에 따라 링컨은 186411월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고, 186543일 북군이 남부 연합의 수도 리치먼드를 점령함으로써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대략 4년이라는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국에서 65만 명 이상이나 되는 인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앞으로 미국이 참전하게 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보다 훨씬 더 많은 수치였다.

 

아직도 사람들은 링컨 하면 노예해방론자로 알지만 그는 엄연한 연방주의자에 인종차별주의자이기 까지했다. 실제로 그는 노예 상태에 있던 흑인들을 보며 그들이 행복해 보인다.”라는 식으로 글은 쓴 적이 있었다. 어쨌든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예들은 해방이 되었다. 그러나 그 해방은 완전한 해방이 아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을 대상으로 한 백인 세력들의 엄청난 인종차별과 테러가 남부에서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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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5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6 1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련이 해체된게 단순히 소련 공산당의 관료와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의 문제로만 보며,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가 더 우월한냥 주장하는건 분명 문제가 있다. 아니 미국과 소련은 시작부터가 달랐다. 소련은 제1차세계대전의 피폐한 경제 상황에서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쳤고, 얼마 안가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으로 시작된 내전을 겪으며 주요 산업시설들이 초토화 되었었다. 신경제정책으로 일정부분 경기 회복하고 스탈린의 경제개발 프로그램으로 생산력을 올렸지만, 1941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다시한번 초토화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소련은 다시 경제를 회복시켜야 했다. 거기다 지정학적으로 우크라이나나 러시아 남부를 제외하면 농업을 할 땅이 거의 없다. 아니 그냥 나머지 지역은 북극이다. 괜히 그들이 부동항을 탐낸게 아니다.

반면 미국은 어떤가? 제1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초강대국으로 오른 뒤, 1920년대는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주듯이 과잉과 풍요의 연속이었다. 물론 그 과잉생산이 1929년 경제대공황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과잉생산 체제가 문제였기에 제2차세계대전 참전으로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세계대전 때 1941년 진주만 공습 외에는 영토가 공격받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본토의 공업시설과 농업 시설이 고스란히 유지될 수 있었다. 거기다 그들의 지형은 어떤가? 동부에 번창한 공업지대와 남부의 농업지대, 서부의 광산과 석유생산 그리고 알래스카와 부동항들까지, 지정학적으로 소련보다 훨씬 더 유리했다.

따라서 냉전시기 미국이 소련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우월한 자본주의 때문이라기 보단 그냥 지정학적으로 주어진 조건이 소련보다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미국이 소련조건이었으면, 툰드라에서 등신짓하다 지들끼리 폭주하여 박살났겠지!! ㅋㅋㅋㅋㅋ 아무튼 이런 넘사벽인 미국과 싸워 대등한 위치에 올랐던 소련이 참 능력있는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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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임승수의 마르크스 엥겔스 공산당 선언 원전 강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시리즈
임승수 지음 / 시대의창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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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휴가 기간에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인 임승수 선생께서 쓰신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필자가 임승수 선생의 책을 처음 읽었던 것은 공익 근무 초창기였던 2017년 초였다. 당시 마르크스나 엥겔스 그리고 레닌 사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던(지금도 그리 많이 아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는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었었는데, 워낙 지식이 부족하여 그 책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자본론이 집필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와 이 책이 왜 중요한지는 알 수 있었다.

 

필자가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던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집필한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참으로 전율이 돋을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 이후 필자는 공산당 선언을 두 번 더 읽었었다. 공산당 선언을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책을 처음 읽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의 의미는 생각보다 적을 수도 있다. 문장 자체가 어렵고, 당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역사적 혹은 배경적 지식이 있어야 이해가 가능한 생소한 내용도 적잖기 때문이다. 필자도 공산당 선언을 처음 읽었을 때, 그런 감정을 일정 부분 느꼈었다.

 

그래서 이번에 읽었던 임승수 선생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은 참으로 의미 있는 독서였다. 왜냐하면 과거 필자가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서 놓치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부분들을 바로 잡아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좋았던 것은 임승수 선생께서 해설에 써놓은 내용들이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쉽고 간략하게 정리해 놓은 점이었다. 마르크스와 사회주의 관련 서적에 대해 몇 권 읽어본 필자로선 임승수 선생의 해설이 머리에 아주 잘 들어왔다. 그 해설을 통해서 시대적인 배경과 마르크스가 책을 통해 인민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얘기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설에는 현대에 일어난 사건이나 상황을 대입해서 비교한 부분도 있었기에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 더 와닿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점이야말로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 본다.

 

공산당 선언을 비롯하여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당연히 아는 사실이겠지만, 지금까지 극우 부르주아들이 퍼뜨려 놓은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이 많다. 예를 들면 국민을 노예화한다든지, 생산한 걸 모두 다 똑같이 나눈다든지 혹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강탈한다든지 하는 그런 얘기들 말이다. 사실 이런 류의 반공 선전은 사회주의에 대해 전혀 모르고서나 할 법한 이야기들이다. 쉽게 말해 일베 정치경제학이라 해도 만무하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따르면 사적소유의 철폐는 대자본가 부르주아 계급이 소유한 생산수단의 철폐를 뜻하는 것이지 사실상에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적소유가 없는 프롤레타리아의 재산을 강탈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국민을 노예화한다는 반공 선전은 말 그대로 반공주의자들만의 근거 없는 피해망상이다. 굳이 사회주의 사회가 억압하는 인민들의 자유라고 하자면 굶지 않고 노숙하지 않을 자유와 인민대중의 복지를 거부할 자유뿐이다. 오히려 국민들 개돼지처럼 생각하고 노예로 여기는 건 자본주의다. 따라서 맑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가 자본가로부터 착취와 억압의 쇠사슬을 잃고, 해방을 얻어야 한다고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문장에서 주장했다. 공산당 선언과 맑스 엥겔스 그리고 레닌이 쓴 책들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들 책 그 어디에서도 생산한 걸 모두 다 똑같이 나눈다는 구절은 단 1절도 없다. 공산주의 단계에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크게 일을 하지 않고 살 정도로 생산력이 증대되어 필요에 따라 분배되고, 나머지 시간에 자유롭게 개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온다는 내용을 아주 교묘히 왜곡해서 알아들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공산주의 단계에서의 분배의 개념을 그리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단계에서는 노동한 기여도에 따라 분배되는 시스템이지 공동으로 분배하는 시스템이 절대 아니다. 비록 붕괴되긴 했지만 현존했던 소련 사회도 임금 노동이 있었고, 초과 근무를 하면 그에 맞는 수당을 추가적으로 받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가 생산한 걸 똑같이 나눈다는 것도 거짓말일 뿐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 임승수 선생의 책은 이런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해설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휴가 기간에 정말 읽기 좋은 책을 아주 즐겁게 읽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필자는 다시 한번 좋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조금은 힘들더라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먼저 읽고 이 책을 그다음에 읽기를 추천한다. 그래야 이 책을 더 수월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책을 집필해준 임승수 선생에게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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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멕시코의 영토)

1803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으로부터 거대한 루이지애나 영토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구입한 미국은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또 다른 영토를 탐내게 되는데, 그게 바로 멕시코였다. 멕시코는 1821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상태였다. 당시 멕시코는 현재의 멕시코보다 훨씬 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현재 텍사스주와 뉴멕시코주, 유타주, 네바다주, 애리조나주 그리고 캘리포니아주까지가 멕시코의 영토였다. 그 시기 텍사스는 1836년 믹구의 도움을 받아 ‘론스타 공화국(Lone Star Republic))’으로 독립했는데, 1845년 미국 의회는 텍사스를 미국에 편입시키기로 했다.

(미국 멕시코 전쟁 당시 미군의 진격 지도)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이 서부로 팽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대통령 제임스 포크(James Polk)도 마찬가지였다. 1845년 미국의 신문 편집자 존 오설리번(John O’Sullivan)은 “해마다 수백만씩 인구가 증가하는 우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대륙을 우리가 모두 차지하는 것은 명백한 사명이다”라는 기사를 썼던 사실에서 당시 미국인들이 팽창주의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멕시코군의 요새를 공격하는 미군)

그 시기 멕시코와 미국은 두 나라 사이의 국경을 리오그란데 강에서 북쪽으로 약 150마일에 있는 뉴에이서스 강으로 합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텍사스가 독립을 위해 멕시코와 전쟁을 치르는 동안 텍사스인들은 멕시코의 장군 산타 안나(Santa Anna)를 생포하여 그에게 리오그란데 강이 국경이라고 말하도록 강요했다. 제임스 포크 대통령 또한 그 두 강 사이에 멕시코인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리오그란데 강을 국경으로 삼겠다고 텍사스인들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멕시코인들이 사는 지역에 군대를 보내 갈등을 야기시켰다.

(미국 멕시코 전쟁 당시 기병전)

1846년 봄 제임스 포크가 보낸 군대를 전쟁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가에 나갔다가 실종된 재커리 테일러 부대의 지휘관이 두개골이 박살난 채 발견되었다. 그들은 멕시코의 게릴라 전사들이 강을 건너와 그를 죽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음날 멕시코인들이 순찰 중이던 병사들을 습격해 16명을 죽이면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공격은 멕시코 측에서 먼저 했지만, 이게 바로 미국 정부가 원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 전부터 미국의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멕시코에게 선전포가하자며 의회를 재촉하기도 했었다. 아무튼 재커리 테일러 장군 사건 이후 미국 의회는 멕시코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1848년에 체결된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초기의 희망과는 달리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승리는 그렇게 빨리 찾아오지 않았다. 포크 대통령은 테일러 장군에게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 몬터레이(Monterrey)시를 선두로 멕시코 북동부 지역을 장악한 뒤, 멕시코 시티로 진군하라고 명했다. 테일러의 부대는 1846년 9월 몬터레이를 점령했지만, 철군하는 멕시코 수비대를 뒤쫒니는 않았다. 포크 대통령은 멕시코시티를 향해 진격하려는 계획을 앞에 두고 테일러 장군의 전술 능력이 부족하다며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사이 포크 대통령은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 공격을 명령했고, 1846년 여름 스티븐 커니 대령 휘하의 소규모 부대가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산타페를 점령했다. 그리고 그의 부대는 캘리포니아로 진군했고, 1846년 가을에 드디어 캘리포니아 정복을 완수했다. 이후 멕시코는 저항을 계속했다. 하지만 1848년 2월 2일 양측은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reaty of Guadalupe Hidalgo)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은 상징적으로 멕시코에 1500만 달러를 주고 137만 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땅을 얻었고, 멕시코는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를 잃으며 자신들 영토의 총 55%나 잃게 되었다. 누가봐도 불공정한 조약이었고, 미국의 일방적인 정복행위였다. 이로써 미국은 현재 미국 서부에 있는 영토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이 과정은 멕시코 영토의 절반 이상을 무력으로 침략하며 얻은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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