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이란 호르무즈 해협 파병에 적극 반대한다!

최근 미제국주의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가 중동에 위치한 국가 이란(Iran)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도널드 트럼프와 존 볼턴(John Bolton)과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설정해놓은 패권에 저항하고 있는 국가 이란을 굴복시키기 위해 경제적인 제제를 가하고 있고, 심지어 군사적인 무력도 사용하고 있다. 비록 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군사적인 압력을 통해 이란을 굴복시키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마치 지난번 미제국주의자들이 남미에 있는 국가 베네수엘라에게 했던 것처럼 말이다.

대한민국의 부르주아 우익 정권인 문재인 정부는 지난번 베네수엘라 사태때 친미 제국주의자인 후안 과이도에게 지지를 표명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이번엔 미제국주의의 이란 파병에 대한민국의 청해부대를 보내 미제국주의의 이란 때리기에 적극 동참하고자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부르주아 정권이 아제국주의 국가로서 보여준 사태는 비단 이란 사태뿐만이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와 경제 발전”이라는 명분하에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 연 5만 명 이상을 파병했었다.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박정희의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대략 9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함으로써, 베트남 민중의 분노를 샀다. 그로부터 40년 뒤인 2003년 대한민국의 노무현 정권은 미제국주의자 부시가 “중동의 민주화 이라크 신무기 위협” 따위의 명분을 내세워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자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했다. 이후에 이라크 파병이 국제적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 문제가 되자 한때는 “이라크 파병은 제2의 베트남 전쟁”이라며 극찬했던 한나라당 파쇼 집단들 마져 파병을 비판하던 상황에서도 노무현 정권은 “한미동맹” 따위나 운운하며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이번엔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던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의 평화 정세 유지라는 것에만 매달려 미제국의 또다른 제국주의적 행위인 미국의 이란 때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50년 전 베트남 전쟁과 15년 전 이라크 전쟁 그리고 현재 미국의 이란 때리기에서 알 수 있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3개다 미제국주의가 일으킨 침략전쟁이자 약소국에게 가하는 제국주의적 억압 및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제국은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 나라의 민중의 불만을 사기만 했다. 베트남과 이라크에서의 역사적 교훈은 잊은 채 현재 문재인 정부가 미제국의 요구에 따라 호르무즈에 청해부대를 보내고자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문재인 정부 또한 외교적으로 아제국주의적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르주아 정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재인 지지자들과 이란 파병 찬성론자들은 “이것이 대한민국을 위한 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무식하고 염치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파병하지 않으면 우리가 손해볼 것이다”라며 이란 파병은 불가피하다고 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그들에게 필자는 묻고 싶다. 그러면 왜 당신들은 강대국인 일본에 맞서 반일 시위를 하고 일본 불매운동을 하는건가? 당신들이 내리는 그런 결론은 “일본 불매 운동은 한국에게 경제적 손해고 불이익이다”라고 하는 수구세력들이 논리와 하등 다를게 없지 않은가? 이라크 파병에서의 교훈을 벌써 잊은 것인가?

만약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정부의 제국주의적 이란 때리기에 동참한다면 그것은 이라크 전쟁과 같은 재앙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이란 호르무즈 해엽 파병에 적극 반대해야한다!! 그리고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환상 또한 버려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아제국주의적 정책에 반대하고, 미제국주의의 폭력행위에 저항하자!! 그리고 미제국주의의 정책을 민중의 힘으로 분쇄시키자!!!

원문: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356094697769523&id=1000010704706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8월의 폭풍 - 1945년 8월 9-16일, 소련의 만주전역 전략 공세
데이비드 M. 글랜츠 지음, 유승현 옮김 / 길찾기 / 201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틀러의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시작된 독소전쟁은 1941622일부터 나치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 하는 194558일까지 대략 4년간 전개되었던 참혹한 전쟁이었다. 대략 4년간의 전쟁에서 소련의 붉은 군대는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군인을 잃었고, 160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했으며, 대략 2600만 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 책과 <독소전쟁사: When Titan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의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서방세계에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이미지는 만슈타인이나 하인츠 구데리안과 같이 나치 독일 측 장군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다. 따라서 서방세계가 인식하던 소련군은 군사적으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오직 인해전술식 작전을 고수하며 돌격밖에 모르는 군대였다. 여기에는 독일 장군들이 소련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오리엔탈리즘적 사고관도 반영되었다.

 

이와 같은 편견은 서방에서 만든 대중매체에도 잘 드러난다. 2001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인 에너미 엣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2011년 태극기 휘날리며의 감독으로 유명한 강재규 감독의 마이웨이(My Way)를 보면 소련군들은 아예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돌격하는 장면이 나오고, 전술적으로 굉장히 비효율적인 군대로 묘사된다. 미국인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Call of Duty)에 나오는 소련군 또한 언급한 영화들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2003년에 제작된 콜오브듀티1에서의 첫 소련군 미션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배를 타고 전선에 도착한 알렉세이 이병(게임 주인공)은 소련군 정치장교로부터 고작 5발의 총알을 받은 채 돌격하고, 모신나강 소총이나 탄약을 나눠주는 정치장교는 총이 없는 사람은 총을 든 사람을 따라가라. 그리고 그자가 죽으면 총을 주워서 적에게 사격하라라는 막장스러운 연설을 한다. 그리고 진격하다 보면 후퇴하는 병사를 정치장교가 기관단총이나 기관총으로 총살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 참전자들이 이와 같은 서방 매체를 접했을 때, 그들은 서방이 만들어낸 이미지에 매우 분노했고, “자신들은 그 정도로 열악하지 않았고, 굴라그에서 석방시켜 만든 형벌부대도 후퇴한다는 이유로 즉시 처분하는 일은 없었다라고 하며 이에 항의했다.

 

이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의 이미지는 반공주의와 러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기독교주의가 결합된 편견 그 자체다. 미군에서 복무하며 소련군에 대해 연구해온 군사학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이와 같은 서방의 역사 왜곡에 항상 반대했고, 비판해왔다. 이번에 필자가 매우 흥미롭게 읽은 책인 8월의 폭풍<August Storm>은 서방의 학자들과 매체가 만들어낸 신화적 허구를 소련 측 문서를 기반으로 하여 이를 반박한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를 읽어본 독자라면 아는 사실이겠지만, 1941년부터 1942년까지의 소련군은 절망과 후퇴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1943년 대규모 전차전인 쿠르스크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소련군은 군의 개편과 전략 전술의 개편 전차를 중심으로 한 제병협동 전술의 발전을 이루어냈고, 그 이후의 전투와 작전에서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통하여 독일군 종심 방어선을 돌파함으로써 붕괴시켰다. 19454월부터 있던 베를린 공방전(Battle of Berlin 1945)에서 50만 명의 붉은 군대가 76만 명의 독일군을 손쉽게 격파했던 역사적 사실에서 우리는 소련군 또한 굉장히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구사하는 훌륭한 군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4558일 나치독일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한 이후 소련군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추축국 중에 마지막까지 저항하고 있던 일본을 상대하는 것이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과의 전투를 치러오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의 참전을 여러 차례 요구했었다. 마치 스탈린이 루스벨트와 처칠에게 제2 전선을 형성할 것을 요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1945년 오키나와 전투(Battle of Okinawa)를 치르던 미군은 예상보다 많은 미군 전사자가 속출한 것에 당황했고, 소련군의 참전도 두려워하게 됐는데, “소련이 조기에 참전하면 태평양에서의 미국 패권에 큰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걱정 때문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가 이끄는 소련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적이 있었다. 그 바람에 일본은 극동지역을 팽창하는 것에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대로의 영토 팽창으로 나가게 되었고, 일본은 19414월 소련과 일소 중립조약을 체결했으며 그 이후에는 만주에서 방어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이 보다 격해지면서 일본의 대본영은 만주에 있던 상당수의 관동군을 중국 지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지역으로 배치하게 되었는데, 이는 만주지역에서 전략상의 공백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만주지역 관동군은 1945년 소련군의 공격이 있기까지 대략 70만 대군을 갖춘 대규모의 군대였고, 명실상부 만주지역의 주력부대였다.

 

히틀러의 제3제국을 멸망시킨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Aleksandr Vasilevsky)가 후에 있을 만주 진공 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소련군은 크게 3군데에서 만주 전역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배치되는 군대도 크게 3개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소만 국경지대와 몽골 만주 국경지대에 배치된 자바이칼전선군이었고, 그다음은 연해주 지역과 블라디보스토크 쪽에 배치된 제1극동전선군이었으며, 마지막은 만주 샤오싱안링 산맥을 향해 공격하게 될 제2극동전선군이었다. 소련이 계획한 이 작전에는 150만 이상의 병력과 5500대 이상의 전차와 자주포, 27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7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되었다.

 

194589일 소련군이 만주전역에서 공격을 가하자 일본군은 소련군의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전선이 무너지고,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크게 3군데에서 진격한 소련군은 사막 지역과 늪지대 그리고 산맥을 손쉽게 돌파하며, 거침없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만리장성까지 가기도 했고, 치스차코프 휘하의 소련군은 대략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제2극동전선군 중 일부는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게 빼앗겼던 사할린 이남에 입성했다. 일본 천황이 항복선언을 하기 3일 전 대본영은 일본군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만주의 일부 일본군 부대는 8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822일까지 소련군의 진격에 저항했던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들이 그러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8월 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소련군의 진격작전은 1주일만인 816일에 끝났다. 즉 단 1주일 만에 소련군은 만주전역으로 진군했고,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했다. 굉장히 신속한 승리였고, 소련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마지막 테스트를 멋지게 성공시켰다.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만주 진공 작전 당시 소련군의 승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만주 전역의 소련군 지휘관들은 모든 방면, 모든 단위부대에 걸쳐 큰 위험을 감수하며 대담한 작전을 실시하고, 자유롭게 계획을 수행했다. 소련군이 작전 초기에 실증했던 엄청난 유연성은 작전 전구의 특정한 요구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소련군 지휘관들의 전반적 지휘력 상승과도 연관되어 있다. 전쟁은 새루운 세대의 야전군, 군단, 사단, 여단, 연대 지휘관을 잉태했으며, 그들의 전문성은 최대 4년에 걸친 전투의 산물이었다. 이 세대의 지휘관들은 만주 전역이 기나긴 전쟁의 마지막 단계임을 깨달았고, 따라서 전역을 단기간 내에, 성공적으로 종결지으려 했다. 평화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었다. 소련군은 외과수술처럼 정밀하게 전투를 수행했고, 11일에 걸친 싸움 끝에 치열한 전쟁을 종결지었다.”

 

출처: 8월의 폭풍 p.147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군은 체계적인 전략 전술을 바탕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는 군대였고, 특히나 만주 지역에서 이를 아주 훌륭히 해냈다. 따라서 서방측이 만들어낸 소련군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소련군이 멋지게 성공시킨 만주 지역에서의 진격작전은 왜 서방세계에서 잊혀진 것일까? 그 이유는 같은 시기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핵무기 경쟁시대를 알리는 냉전의 신호탄이자 일본의 항복과 바로 연결되다 보니 소련의 만주 공세는 잊혀지기 십상이었다. 거기다 냉전시기 소련과 경쟁했던 미국이 이를 홍보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소련군의 만주 공세를 재조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책 저자인 데이비드 글랜츠에 대해 소개하자면 그는 1942년에 태어나 1963년 미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베테랑이었다. 그는 서방 군대의 상징 NATO에서 정보장교로 근무했었고,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등에서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에 대해 연구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소련군에 대한 서방의 편향된 시각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소련군과 소련 군사사를 소련의 입장에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 중 하나가 ‘8월의 폭풍이다. 사실 이 책은 1980년대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논문이기도 하다. 그가 이 논문을 완성하던 시기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이 반공주의를 강화하던 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그의 행동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은 우리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1극동전선군에 있던 치스차코프 휘하의 제25군은 작전 당시 한반도 이북을 해방했던 군대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반도에 입성한 소련군은 한반도 이북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고,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 이런 중요한 사실을 깊이 가르쳐오지 않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이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런 역사를 알아야 하고, 공정한 평가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좀 더 일반화하자면, 기존에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강요해오던 일방적인 반공주의적 시각과 관점에서 벗어나 역사를 좀 더 폭넓게 보고, 공정하게 평가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런 공정한 역사적 평가를 해야 할 한국 근현대사 사건 중 하나는 소련의 만주 진공 작전도 포함된다. 필자는 소련군 만주 진공 작전 일인 89일에 맞춰 이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반공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런 훌륭한 연구 서적을 집필해준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 교수님과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해주신 유승현 역자님 그리고 이 책의 출판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신 대한민국의 주은식 장군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승현 2019-09-03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늦게 서평을 확인해서 죄송합니다. 서평 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ㅠ

NamGiKim 2019-09-03 15:08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A.J.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차세계대전이 왜 일어났는지를 생각해볼 좋은 기회인것 같습니다. 올해 2019년은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난지 80년이 되는 해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네수엘라 위기 - 왜 발생했고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조셉 추나라.앤디 브라운.김준효 지음 / 책갈피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네수엘라에 대하여

2019년 초 미제국주의자 도널드 트럼프는 예전부터 눈엣가시처럼 여겨왔던 남미 국가중 하나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제와 억압을 가해왔다. 2013년 베네수엘라의 위대한 지도자 우고 차베스(Hugo Chavez)가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은 니콜라스 마두로(Nikolas Maduro)는 제국주의의 고립과 더불어 사회의 반혁명 세력들로부터 막강한 압렵을 받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경제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에서 위기를 겪고 있다. 최근에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던 후안 과이도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반동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베네수엘라 민중은 이를 저지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편에 선 베네수엘라 민중들이 무조건적으로 마두로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서 후안 과이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따라서 과이도의 반동 쿠데타는 실패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냉전 시기 미국의 남미 문제 개입은 사실상 남미 민중의 자결권은 커녕 이를 짓밟는 제국주의적 처사이자 침략이었다. 이와같은 미제국주의의 침략과 신자유주의적 흐름에 남미 민중은 반대했고, 그 대표적인 국가가 베네수엘라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베네수엘라에서 정권을 잡은 우고 차베스는 사회의 각계 분야에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했다. 물론 차베스의 한계라 하자면, 자본주의적 국내 기업들과 베네수엘라에 들어와 있던 외국 기업들의 자본 투기를 사실상 방치했다는 것이다. 이는 니콜라스 마두로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우익 반동 세력들이 언제든지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사실상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차베스가 우익 쿠데타로 2000년대 중반에 죽을 뻔했음에도 말이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의 진보적 개혁 정책 및 사회주의 비전은 그런 한계도 있었지만, 그들이 성취한 업적또한 분명히 존재했다. 차베스 정권은 ‘미시온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판자촌에 사는 어린이와 청년들에게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줬고, 문맹 퇴치 프로그램도 거창하게 실행했다. 기초 의료를 제공하기 위해 쿠바에서 의사를 불러와 환자 1800만명을 치료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즉 차베스는 가난한 인민대중에게 복지혜택을 부여하고자 헌신했다.

오직 자본주의만이 최고라 생각하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베네수엘라는 당연히 전복되고 없어저야할 국가였다. 따라서 미제국은 베네수엘라에게 극심한 경제적 제제를 가했고, 우익 반동들의 차베스 전복 쿠데타도 지원했다. 미국이 베네수엘라를 ‘인도적 지원‘하겠다는 주장은 말그대로 위선이다. 그리고 그 위선은 제국주의적인 정권전복을 뜻하는 것이다. 미국은 니콜라스 마두로가 미국 정부의 지원을 수용하든 거부하든 간에 이를 베네수엘라 개입 사태의 명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정말 미국이 인도적 지원을 생각했다면 베네수엘라에 대한 경제적 제제를 해제하면 될일이다.

따라서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미제국이 주장하는 ‘인도적 지원‘ 따위의 위선에 속지 말아야 한다. 책갈피에서 출간한 이 책은 베네수엘라의 문제를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필자는 이책에서 상당 부분 공감했다. 아무튼 베네수엘라가 만약 반동들에 의해 전복된다면 결과는 최악일 것이다. 베네수엘라 인민들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바란다!! 그들은 미제국주의에 맞서 승리할 것이다. Viva La Venezuela!!!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실이 밝혀지다 -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3판 노동자 교양문고 3
마리오 소사 지음, 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국내 운동권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Mario Sausa)의 책인 진실이 밝혀지다를 읽었다. 국내에 출판된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서적은 대체로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다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필자로선 이 책의 부제목이 끌려 읽고 싶었었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목차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편은 수용소 군도의 저자인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같이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소련에 대해 비판해온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대략 600만 명이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홀로도모르(Holodomor)에 대한 반박과 대략 12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진 소련의 굴라그(Gulag) 수감자 수치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2편은 스탈린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수치에 대한 반박이 담겼다. 이 책의 마지막인 3편은 영국 보수주의자이자 군사 전문가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 대한 비평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2편의 경우는 필자의 주관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즉 책에서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얘기하듯이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치과 서방에 의해 과장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3편에서 다른 스탈린그라드 비평은 필자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앤토니 비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감안했을 때, 서구식 반동주의를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군인이자 보수주의자이기에 당연히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감했던 파트와 가장 많이 호감을 표했던 파트는 제1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홀로도모르는 절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고,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과의 계급투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한 소련의 농업 조건도 한몫했다. 거기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는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내전을 치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방 학자들이 출처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상자 수치는 사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나치 독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악마화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반공성향이 강했던 영미권 언론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마치 1990년대 북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대다수의 아사자가 생겼을 때 미제와 서방 언론들이 300만 명이 아사했다는 날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판단했을 때,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아사자 수치는 과장됐고,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소련의 까다로운 농업 조건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편에서 지적한 소련의 굴라그 수감자 수치도 마찬가지다. 솔제니친과 로버트 콘퀘스트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굴라그 수감자가 대략 900만에서 1200만 명 혹은 많게는 2000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스탈린시기 가장 많은 수감자 숫자는 최대 250만 명이었다. 이는 순수히 굴라그 사용자만 포함된 것이 아닌, 감옥 및 교도소 그 외의 잡범들이 수용된 수치를 얘기한 것이다. 쉽게 말해 소련 인민의 30%가 굴라그에 수용됐다느니 하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고 날조라는 것이다. 굴라그를 언급하며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 및 감옥 수감자의 수치를 보여준다. 책에서 제시한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에 미국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수감자 55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소련에서의 최대 굴라그 및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도 300만 명이나 더 많은 수치였다. 책에선 언급 안 했지만, 필자는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하는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 흑인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KKK같은 인종 혐오 단체들이 미국을 돌아다니며 유색인종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으며 산사람을 산채로 태워 그 유골을 기념품으로 갖는 린치 따위 행위를 20세기까지 남부에서 하도록 방조한 미국 정부가 과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말이다??

 

물론 필자는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 중에는 분명 무고한 사람도 적잖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악마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보면 스탈린 집권 시기 8시간 노동제를 1930년대 초중반까지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스탈린은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이는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나는 행보다. 당연히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스탈린이 대다수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1930년대 소련의 대학진학률과 극적인 문맹률 감소 그리고 노동자 연금 제도가 입증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소련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큰 의의가 있었던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