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밝혀지다 - 쏘련 역사에 대한 거짓말, 제3판 노동자 교양문고 3
마리오 소사 지음, 노사과연 편집부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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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운동권 단체인 노동사회과학연구소(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Mario Sausa)의 책인 진실이 밝혀지다를 읽었다. 국내에 출판된 소련이나 사회주의에 대한 서적은 대체로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들이 대다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는 필자로선 이 책의 부제목이 끌려 읽고 싶었었고 이번 기회에 읽게 되었다.

 

책의 내용은 목차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편은 수용소 군도의 저자인 솔제니친이나 로버트 콘퀘스트같이 반공주의적 입장에서 소련에 대해 비판해온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다. 대략 600만 명이 스탈린에 의해 의도적으로 굶어 죽은 것으로 알려진 홀로도모르(Holodomor)에 대한 반박과 대략 12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알려진 소련의 굴라그(Gulag) 수감자 수치에 대한 반박이 주를 이룬다. 2편은 스탈린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수치에 대한 반박이 담겼다. 이 책의 마지막인 3편은 영국 보수주의자이자 군사 전문가인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탈린그라드:Stalingrad>에 대한 비평이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2편의 경우는 필자의 주관과는 분명 다른 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즉 책에서 내린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얘기하듯이 대숙청기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치과 서방에 의해 과장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생각한다. 3편에서 다른 스탈린그라드 비평은 필자가 아직 그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 내용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앤토니 비버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를 감안했을 때, 서구식 반동주의를 경계해야 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군인이자 보수주의자이기에 당연히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 필자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공감했던 파트와 가장 많이 호감을 표했던 파트는 제1편이었던 것 같다. 이 책에 따르면 홀로도모르는 절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고, 소위 쿨락이라 불리는 부농들과의 계급투쟁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또한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한 소련의 농업 조건도 한몫했다. 거기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는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내전을 치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방 학자들이 출처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 사상자 수치는 사실 1930년대 나치 독일의 선전선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나치 독일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악마화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6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주장을 하곤 했는데, 반공성향이 강했던 영미권 언론에서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 마치 1990년대 북조선이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대다수의 아사자가 생겼을 때 미제와 서방 언론들이 300만 명이 아사했다는 날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판단했을 때,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아사자 수치는 과장됐고,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소련의 까다로운 농업 조건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1편에서 지적한 소련의 굴라그 수감자 수치도 마찬가지다. 솔제니친과 로버트 콘퀘스트를 비롯한 반공주의자들은 굴라그 수감자가 대략 900만에서 1200만 명 혹은 많게는 2000만 명이나 된다는 주장을 하곤 한다. 하지만 진실은 달랐다. 스탈린시기 가장 많은 수감자 숫자는 최대 250만 명이었다. 이는 순수히 굴라그 사용자만 포함된 것이 아닌, 감옥 및 교도소 그 외의 잡범들이 수용된 수치를 얘기한 것이다. 쉽게 말해 소련 인민의 30%가 굴라그에 수용됐다느니 하는 것은 명백한 과장이고 날조라는 것이다. 굴라그를 언급하며 1990년대 미국의 교도소 및 감옥 수감자의 수치를 보여준다. 책에서 제시한 FLT-AP 통신의 단신 기사에 따르면 1996년에 미국에서 감옥에 갇혀있는 수감자 550만 명이나 되는데, 이는 소련에서의 최대 굴라그 및 감옥 수감자 숫자보다도 300만 명이나 더 많은 수치였다. 책에선 언급 안 했지만, 필자는 스탈린 시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하는 미국의 반공주의자들에게 묻고 싶다. 미국 남북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 흑인의 대부분을 노예로 삼았고, 이후에도 KKK같은 인종 혐오 단체들이 미국을 돌아다니며 유색인종에게 무차별 테러를 일삼으며 산사람을 산채로 태워 그 유골을 기념품으로 갖는 린치 따위 행위를 20세기까지 남부에서 하도록 방조한 미국 정부가 과연 굴라그에 대해 비판할 자격이 과연 있는지 말이다??

 

물론 필자는 굴라그에 수용된 사람들과 대숙청 시기 희생된 사람 중에는 분명 무고한 사람도 적잖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스탈린과 소련에 대한 서방의 악마화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이유는 전혀 없다. 책을 보면 스탈린 집권 시기 8시간 노동제를 1930년대 초중반까지 실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스탈린은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겼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항상 지적해왔듯이 이는 박정희 정권과 차이가 나는 행보다. 당연히 굴라그에 수감된 사람들은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스탈린이 대다수 인민대중의 복지를 챙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는 1930년대 소련의 대학진학률과 극적인 문맹률 감소 그리고 노동자 연금 제도가 입증한다.

 

아무튼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소련의 입장에서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뭔가 큰 의의가 있었던 것 같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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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군 - 디지털 리마스터링
정지영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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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보고 싶어 했던 영화를 오늘에서야 드디어 봤다. 그 영화가 바로 1990년에 개봉한 ‘남부군’이다. 지난번 안재성 작가가 쓴 이현상 평전을 읽으며 분단의 비극이라는 역사적 사실에서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느꼈었다. 이번에 정지영 감독이 제작한 영화 남부군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배우 안성기가 영화에서 연기한 주인공은 실제로 빨치산 투쟁을 했던 작가이자 정치인이기도 한 이태의 삶을 모티브로 했다.

 

영화는 1945년 8.15 해방부터 1950년 인천상륙작전까지의 내용을 사진과 자막을 통해서 개략적으로나마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개략적인 설명이 끝난 뒤 영화는 인천상륙작전 당시 전남 쪽에서 인민군측 기자로 근무하던 이태가 유격대에 합류한 뒤, 한국군에 맞서 전투를 치르며, 투쟁하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준다. 실존 인물 이태가 겪은 투쟁기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빨치산들이 민중해방과 인민의 세상을 위해 어떻게 투쟁했는지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영화에선 빨치산들이 반공선전과는 달리 민중을 대하는 태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예를 들면 마을에 들어가 함부로 약탈하지 않는다든지, 대한민국 경찰인 남편을 둔 여자를 강간한 부대원을 총살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작중에선 한겨울에 지리산에서 빨치산 투쟁을 지휘하던 정치위원들끼리 얘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들의 투쟁이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다. 투쟁을 하다 사기가 빠진 한 정치위원은 동료들과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지금 이순간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있소! 볼셰비키 혁명 당시 시베리아의 빨치산은 트럭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으며 투쟁했고, 일제때 만주의 항일빨치산들은 농사까지 지어가며 투쟁했다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남조선에서 지리산이 빨치산의 가장 좋은 근거지라지만 결국 반경 15km 공간에 갇혀 있을 뿐이고, 북측과의 통신은 단절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치위원의 얘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지리산에서의 혁명 투쟁은 그만큼 가혹한 조건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추위와 굶주림하고만 싸웠던 것이 아니다. 1951년에는 미군이 살포한 세균에 맞서 싸워야 했고, 휴전 회담 기간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도착한 백선엽의 토벌부대와도 맞서야 했으며, 미군이 투하하는 네이팜 폭탄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훌륭하게도 영화 남부군은 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다뤘다.

 

그들은 왜 지리산으로 갔을까? 암울한 현실이지만, 그 투쟁또한 고달프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투쟁인데도 왜 끝까지 악조건 속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 그들이 인간을 사랑하고 민중을 사랑했던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이기에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빨치산에 합류했던 대원 중에는 우익 청년단이나 군경에게 가족을 잃은 복수심 때문에 참전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그 이전에  그들은 민중의 해방과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원했기에 고달픈 투쟁속에서도 투쟁을 이어나갔던 것이라 생각한다. 일부는 전쟁 자체의 회의감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빨치산 투쟁을 멈추지 않았던 건 그런 휴머니즘적 신념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한국전쟁 시기부터 1980년대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빨치산들의 투쟁에 대해 반공이 아닌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국민에게 강요한 매카시즘적 반공 이데올로기는 사회 깊숙이 퍼져 있었고, 반공주의에 익숙해진 국민들 관점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1990년에 개봉한 영화 남부군은 국가가 강요한 반공주의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자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을 알린 작품이다. 즉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반공주의가 강요한 패러다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였다. 영화 남부군에 나온 빨치산 혁명가들은 이념을 떠나 휴머니스트들로 기억되는 건 무리한 일일까? 아직도 반공주의가 살아있는 시대에서 이를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가슴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 영화에서 나온 휴머니스트들의 투쟁적인 삶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생각하게 되는 좋은 기회였고, 이런 훌륭한 영화를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제작해주신 정지영 감독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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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사변(Japanese Invasion of Manchuria)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펑톈 시 외곽 북쪽으로 7.5km 정도 떨어진 류타오후에는 뤼순과 펑톈 그리고 창춘을 연결하는 만철(만주 철도)이 관통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게 없이 만주의 황량한 벌판을 달리는 특급열차가 그 곳을 통과하는 순간 정체불명의 폭발음이 일어났다. 다행히도 열차는 파괴되거나 탈선하지는 않았고 제 갈 길을 달렸다. 사실 철도 주변에는 관동군 소속의 공병들이 숨어 있었다. 폭발 직후 그들은 일본군 특무기관과 일본군 제2대대 본부 부대에 무전기로 “동북군이 만철 철로를 파괴했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대좌는 관동군 사령관의 명의를 제멋대로 사칭하여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펑톈 교외에 있는 장학량 휘하의 동북군을 일제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9.18 사변 즉 만주사변의 시작이었다. 일본군 제2대대와 제5대대에게 공격을 받게된 장학량 휘하늬 동북군은 혼란에 빠졌다. 1931년 9월 19일 오전 8시 30분 일본 관동군은 경성의 조선군 사령부에 전보를 보내어 신속한 병력 증파를 요청했다. 당일 오전 관동군 주력은 펑톈 성 외곽을 포위하였고, 중포를 앞세운 관동군의 기습공격을 받은 장학량측 동북군은 패주했다.

주요 정부 청사를 비롯해 펑톈 항공국, 병기창, 동대영이 잇따라 일본 관동군에게 함락되면서 20일 새벽까지 펑톈 성 전역이 관동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1931년 9월 20일 관동군 2개 보병대대와 1개 포병연대가 창춘을 공격하였고, 오전 7시쯤 그 지역을 완벽히 점령하였고, 다음 날에는 지린 성으로 진격하여 전투 없이 그곳을 장악했다. 일본의 관동군은 9.18 사건 후 겨우 2~3일도 안 되는 기간에 남만주 전역을 장악했다. 사실 만주는 일본의 반식민지였다. 자본, 금융, 철도, 산업 등이 일본에게 예속된 상태였고, 군사적으로도 일본 광동군은 만철과 주요 철도 그리고 요충지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만주사변은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규율을 위반한 행위였다. 그러나 이미 힘을 잃은 국제연맹은 일본의 만주사변에 대해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국제연맹을 이끄는 열강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계산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구 열강들은 1929년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으로 인한 실업 및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시아에서의 일제 침략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국제연맹은 일제의 만주침략을 그냥 외면했던 것이다.

1931년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은 결과적으로 일본을 군국주의화 시키고, 전쟁국가로 이끌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무단통치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통치를 펼쳤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펼치던 문화통치 정책을 폐기하고, 황국신민화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1932년 2월 5일 하얼빈이 일본 관동군에 의해 함락되면서 만주 전체가 일본 손아귀에 넘어갔다. 당시 제1차 국공합작이 파기되어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을 치르고 있던 중국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침략을 상대해야 하게 되었다. 당시 만주사변을 신경쓰지 않았던 국제연맹의 주요 회원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은 그로부터 10년 뒤인 1941년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이 자신들의 아시아 패권주의적 관할에 큰 영향을 끼치자 결국 일본 제국주의와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렇듯 1931년 일본이 일으킨 만주사변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고, 일본을 본격적으로 제국주의 팽창으로 나서게 만든 사건이었다. 당시 만주 전역을 아주 손쉽게 점령한 일본은 앞으로 있을 중국과의 전쟁이 얼마나 장기전이 될 줄 예상치 못했고, 그로부터 몇 년 뒤 일본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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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패망사 - 태평양전쟁 1936~1945 걸작 논픽션 17
존 톨랜드 지음, 박병화.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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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한번 읽어보고 싶다. 재밌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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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 모택동은 왜 일본군의 進攻에 감사했나
엔도 호마레 지음, 박상후 옮김 / 타임라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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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학문적 검증이 안된 일본 극우 파시스트 학자가 쓰고, 왜곡과 선전 모략질의 달인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번역한 책이라는 점에서 신뢰도 안가고, 읽을 가치도 못느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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