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 베트남과 전쟁의 기억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부희령 옮김 / 더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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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판된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들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그 수가 적다. 미국에게 있어서 베트남 전쟁이란 자신들 역사에서 사상 최대의 흑역사이자 실책이다 보니 그것이 베트남 전쟁 그 자체에 관한 연구이든 전쟁 소설(혹은 문학 작품)이든 개인의 자서전이든 간에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많지만, 정작 미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파병했던 대한민국의 경우 그 수가 아주 적다. 따라서 올해 5월에 출간된 비엣 타인 응우옌이 쓴 저서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Nothing Ever Dies Vietnam and the Memory of War>가 출간되었을 때, 필자는 신간에 대한 기대가 내심 생겼었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을 겪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전쟁을 겪었던 국가들이 어떤 식으로 전쟁 그 자체를 기억하는지를 분석한 심리학 서적이다. 이 책의 저자에 대해 얘기하자면, 1975년 베트남의 통일 이후 남베트남을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한 보트피플 출신이다. 물론 저자는 1971년 남베트남의 부온 마 투옷(Buon Ma Thout)에서 태어나 1975년 보트피플이 되어 미국에 정착한 베트남계 미국인이기에, 한때 자신이 살았던 남베트남에 대한 추억 혹은 기억이 부정확하거나, 남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보트피플들하고 차이를 보인다.

 

작년 10월과 11월 대략 한 달 동안 미국여행을 다녔던 필자는 필라델피아에서 베트남 타운에 들려 베트남계 미국인들을 봤었고, 워싱턴에서 머물던 숙소에서도 보트피플 출신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으며, 여행을 최종적으로 마치고 로스엔젤레스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보트피플 출신의 대학교수와 적잖은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대략 12시간의 기나긴 비행시간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 대화는 여러모로 보트피플들이 가지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관점을 알 수 있던 기회였다. 귀국행 비행기에서 필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베트남계 미국인 아저씨는 하버드 대학교 의과대학 교수였고, 미국 보스턴에 살면서 미국과 베트남을 자주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베트남을 자신의 고향 및 조국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여러 얘기를 나누던 중 필자는 그 사람과 호치민 주석에 관한 얘기도 나눴었고, 필자가 알고 있는 베트남 역사에 대해서 얘기해줬다. 참으로 흥미로웠던 것은 그분 또한 필자가 감명깊게 읽었던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2000년대 초에 읽었었다는 사실이다.(국내에는 2003년에 출간되었다)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 책은 호치민을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고 하며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책이다. 그런데 그런 책을 보트피플 출신 아저씨가 나름 괜찮은 책이라 얘기한 것은 꽤나 흥미로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런 대답을 들은 다음에 들었던 그 아저씨의 답변은 아 역시 보트피플이구나하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듀이커의 책에 대해 좋은 책이라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호치민 자체에 대해선 긍정적인 시각보다 부정적인 시각이 앞섰다. 그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제국주의에 투쟁한 것에 대해서 과연 가치가 있었던 일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아저씨가 내리는 남베트남의 독재자 응오딘지엠에 대한 평가는 부정보단 긍정의 시각이 앞섰다. 그 아저씨는 필자에게 (응오딘지엠은)는 분명 애국자였습니다. 하지만 잔인하기도 했죠.”라고 답변했는데, 이 점에서 역시 보트피플 다운 결론이라는 생각이 아주 많이 들었고, 여기서 필자는 남베트남계 보트피플들의 한계를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경험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책에 관해 얘기하겠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느꼈다. 우선 필자가 책에서 부정적으로 느꼈던 점을 얘기하겠다. 아까 위에서 얘기한 필자의 경험담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각이 이 책에도 아주 심하게는 아니지만, 약간은 반영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을 애국자로 옹호한다거나, 남베트남의 부정부패상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긴 하나, 베트남 전쟁 자체에 북베트남 측의 책임론을 주장한다.

 

저자는 1960년대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지원하면서 주변국인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끌여들였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북베트남 또한 이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런 관점은 필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결론이다. 베트남의 주변국이던 라오스를 보면 1960년대 활동을 하던 민족해방조직인 파테트 라오(Pathet Lao)에 대한 라오스 인민의 대중적 지지는 압도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녀평등과 계급해방 그리고, 지주의 재산 및 식량을 몰수하여 가난한 인민들에게 나누어줬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오스 인민들이 북베트남과 베트콩을 도와 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것은 이런 이유였다. 1975년 이후 광적인 킬링필드를 주도했던 폴포트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시각이 앞서고, 그를 매우 싫어하는 필자가 이에 관해 얘기하자면 당시 캄보디아 인민들이 친미제국주의자 론 놀(Lon Nol)이나 부패한 왕조인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지지하지 않고, 크메르루주를 지지하며 미제국에 맞서 싸웠던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봐야 한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마오이즘적 사상을 기반으로 반제국주의 투쟁을 했기에 이 또한 캄보디아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호치민루트를 라오스와 캄보디아까지 연결했다는 이유를 들어 전쟁의 책임을 북베트남에게도 있다고 하는 저자의 시각은 필자 입장에선 절대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필자가 저자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았던 또 다른 얘기는 북베트남은 재교육과 보트피플 난민들이 도망친 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라는 주장인데, 이 또한 동의할 수 없는 관점이다. 물론 필자 또한 재교육으로 고통을 받았을 일부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러한 청산 작업은 북베트남에게 있어서 당연히 필요했던 작업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남베트남 정권은 부패한 가톨릭 세력과 식민지 시절 프랑스에 협력하여 나라를 팔아먹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따라서 북베트남이 그들을 재교육 시키고 청산하는 작업은 필수적인 것이며,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이었다. 반대로 대한민국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노덕술 같은 악질 친일파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살려주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친일파 세력들이 대한민국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던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런 재교육 및 청산작업은 당연히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보트피플에 관해 얘기하자면, 보트피플은 제1차와 제2차를 나눌 수 있는데, 1975년 베트남을 떠난 베트남인들이 제1차에 속한다. 이들의 경우 주류는 친프랑스 계열 민족반역자들 사이공 정부의 관료나 공무원, 자본가 그리고 가톨릭 목사들이었다. 즉 북베트남 정부에게 있어서 큰 과오 및 안좋을 짓을 한 인물들이었고, 자신들이 한 부끄러운 행위들이 있으니 탈출한 것이다. 통일 후 베트남에서 재교육 및 처벌과정이 대규모의 보복성 학살 없이 끝났다는 사실과 1975~1986년까지 대략 100만 명 이상의 보트피플이 탈출했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베트남을 떠나고 안 떠나고는 순수히 그들 선택이었다. 당시 그들의 지도자나 다름없었던 응우옌 반 티에우(Nguyen Van Thieu)가 남베트남이 몰락할 위기에 놓이자, 비행기 6대에 금괴 2톤을 싣고, 미국으로 도주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자체를 북베트남에게 뭍는 것은 필자가 보기에 너무 과한 결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외에도 일반적인 베트남인들이나 필자의 관점에서 보면 다소 불편할 내용이 적잖게 보였다.

 

물론 위에서 상술한 부분은 당연히 고려하더라도, 이걸 제쳐놓고 책을 긍정적으로 볼만한 부분이 꽤 있다. 이 책은 단순히 베트남과 미국의 기억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편에서 싸웠던 소수민족과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병력을 파병했던 한국에 관한 내용을 포괄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을 얘기한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소수민족이 있는데,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편에 서서 싸웠던 몽족(Hmong)이 그러하다. 저자는 몽족들의 경험 및 역사를 토대로 베트남 전쟁과 그들의 기억을 얘기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편에 서서 싸운 몽족들은 결국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아주 철저하게 버려졌다. 물론 그들 중 일부가 미국으로 건너와 최소 17만 명 이상이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들은 아주 철저히 잊혀졌다. 대표적으로 미국에 살던 몽족 베테랑인 방파오(Vang Pao) 장군의 이야기를 얘로 들 수 있다. 방파오 장군은 자신이 죽으면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알링턴 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에 묻히기를 바랐고, 다른 몽족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은 미국에 있는 알링턴 묘지에 묻히지 못했다. 미국 정부가 그들을 외면했고, 그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남베트남군 베테랑 또한 마찬가지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필자는 몽족을 주제로한 영화를 언급함과 동시에, 그안에 들어가 있는 미국식 제국주의 혹은 애국주의를 비판한다. 아이언맨으로 유명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obert Downey Jr)와 멜 깁슨(Mel Gibson)이 출연한 영화 에어 아메리카(Air America)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가 감독과 배우로 이중작업한 영화 그랜 토리노(Gran Torino)가 그런 애국주의 혹은 미국식 국수주의를 전파하는 영화였다. 전자의 경우는 노골적인 미국식 국수주의 전파 영화라면 후자는 교묘한 미국식 국수주의 전파 영화였다. 그리고 그 영화엔 서양권이 가지고 있는 동양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도 들어가 있다. 1968년에 존 웨인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그린베레(The Green Beret 1968)가 그랬듯이 말이다. 필자는 에어 아메리카와 그랜 토리노를 보진 않았지만, 저자의 통찰력이 감격스러웠다.

 

이런 저자의 통찰력은 한국의 베트남 전쟁 기억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참으로 뛰어난 분석력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1994년 정지영 감독이 제작한 영화 <하얀전쟁>2004년에 나온 <알포인트> 2008년에 나온 <님은 먼곳에> 그리고 20141천만 영화인 <국제시장>을 비유하며,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한국 영화가 어떻게 변해갔고, 베트남인들의 고통을 어떻게 외면하는지를 아주 철저하게 분석했다. 이 점에 있어서 필자는 이렇게 명확히 분석한 저자의 글에 감탄했다. 더 나아가 이 책의 분석을 통해서 2014년에 나온 영화 국제시장이 베트남 전쟁을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왜곡했는지도 생각해보았다. 더 나아가 이 책에선 대한민국의 극우 세력들이 보면 매우 불편해할 내용들이 나온다. 그것은 바로 한국군 민간인 학살과 부패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에선 베트남인들이 한국군을 긍정보단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심지어 같은 편인 남베트남도 한국군을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남베트남의 공군 총사령관인 응우옌 까오 끼(Nguyen Cao Ky)가 한국군을 부패와 암거래로 고발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또한 저자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인 하미 마을 학살(Hà My massacre)을 언급하며, 과거 베트남전 참전용사들이 이 증오비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서 피해자 및 마을 측을 돈으로 매수하려 했던 추악한 사실을 언급한다. 따라서 이 책이 입증하듯이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을 긍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은 당연히 잘못됐고, 후세대는 베트남 전쟁 당시의 한국군 참전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필자는 이 책의 저자가 무수히 많은 영화들을 토대로 베트남 전쟁의 기억을 분석하고자 했던 점에서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영화가 있는데,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가 바로 그것이다. 책의 저자는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많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 외에도 전쟁의 사상자들(War of Casualties), 풀 메탈 자켓(Full Metal Jacket) 등 많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언급된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베트남 전쟁을 주제로한 컴퓨터 게임을 언급하기도 하는데, 110억 달러를 벌어들인 콜오브듀티 블랙옵스(Call of Duty Black Ops)가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블랙옵스를 언급하며 미국식 영웅주의와 반공주의를 비판한다. 이러한 저자의 평가 및 언급은 당연히 이 게임을 해보았다는 증거일 것이고, 고등학생 시절 이 게임을 여러 번 해본(그리고 지금도 가끔 하는) 필자로선 이 게임이 언급된 것이 나름 반가웠다. 전쟁의 기억을 보는 작업에서 단순히 참전용사들이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여러 매체와 문화에 나타나는 것들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저자의 노력은 참으로 높게 평가해줄 만하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보트피플식 한계도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한계점도 다른 극우반공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보트피플들에 비하면 상당히 나은 편일 것이다. 아무튼 보트피플이 쓴 책이라 감회가 새로웠고, 보트피플 치고는 의외였던 점도 있었던 것 같다. 재밌게 읽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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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초등학생과 중학교 1학년 당시 즐겨보던 다큐멘터리 하나가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의 이름은 바다 괴물들(Sea Monsters)였는데, 동물학자(이자 고생물 학자)인 나이젤 마빈이 고생대와 중생대 그리고 신생대를 돌아다니며 위험한 바다 동물들을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 나이젤 마빈이 마지막으로 간 곳은 지금으로부터 약 7500만년 전인 백악기 후기였다.

 

백악기 후기 바닷가에 도착한 주인공은 주인공보다 조금 더 큰 새들의 무리 속에 있었다. 그 새의 이름이 바로 헤스페로르니스(Hesperornis)였다.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이들은 날지못하는 새였는데, 이 대목에서 필자는 현존하는 생물인 펭귄을 떠올렸다. 물론 외형상 펭귄하고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날지 못하는 것과 바다에서 주로 생활하는 모습은 펭귄을 떠올릴만한 대목이었다. 생각해보니 필자 또한 지난 미국 여행에서 워싱턴 DC에 있는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헤스페로르니스를 보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뭔가 흥미가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다.

 

헤스페르로니스는 중생대 백악기 후기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 일대에 서식한 원시 조류로써 미국 중서부의 켄자스 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1871년 미국 켄자스 주 서부 일대에서 백악기 당시 서식하던 익룡인 프테라노돈을 발굴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고, 발견한 학자들은 이 동물이 펭귄과 같이 날지 못하며 수중 생활에 익숙한 새일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녀석에겐 이빨이 달려있었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조류가 파충류와 뿌리를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생물학적 증거라는 학계의 평가도 있었다. 현재 이 녀석은 백악기 후기에 살았던 일군의 반수생 조류들을 아우르는 분류군인 헤스페로르니스류의 대표격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당초 레스토르니스(Lestornis)라는 별도의 속명을 부여받고 모식종과 함께 학계에 소개된 크라시페스종(H. crassipes)을 비롯해 산하에 거느린 종의 수가 대략 10여 종에 이른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화석 자료를 토대로 이들의 서식 범위는 북아메리카 일대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러시아 볼고그라드 주(한때는 차리첸 혹은 스탈린그라드라 불렸던 곳)와 스웨덴 스코네 주에서 같은 종의 화석이 발굴된 덕분에 지금은 서식 범위가 유라시아 일대라고 고생물 학자들은 결론내리고 있다.

 

헤스페로르니스는 주로 해안가에 살면서 물고기나 오징어 등의 해양 생물들을 잡아먹으며 살았을 것이고, 상어나 모사사우루스 그리고 크시팍티누스(몸길이가 대략 5m 되는 물고기다)와 같은 것들이 아마 헤스페로르니스의 천적이었을 것이다. 현존하는 바다생태계에 적용해보자면 아마도 범고래나 북금곰 혹은 상어의 먹잇감인 펭귄하고 비슷하다. 이들은 백악기 후기까지 서식하다 6500만 년 전 대멸종 시기에 멸종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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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류 잭슨의 원주민 추방

(앤드루 잭슨 대통령의 초상화)

1783년 전세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은 국가 미국(United States)이 탄생했다. 1787년 헌법을 제정했고, 독립전쟁 시기 대륙군을 이끌었던 조지 워싱턴 장군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해 나갔고, 1800년 무렵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의 백인 정착민은 대략 70만 명까지 증가했다. 거기다 1803년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은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루이지애나를 매입하여 거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즉 원주민의 영역에 정착한 미국인들은 애팔래치아 산맥과 미시시피 강 사이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숲을 개간한 땅에 목화와 곡식을 심고 도로와 도시, 운하를 건설하고 싶어 했다. 그때부터 그들은 북아메리카와 태평양 해안에 이르는 전역을 다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영전쟁 당시 잭슨에게 항복하는 크리크족 추장)

1812년 미영전쟁이 일어났다. 미영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고,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한 채 1815년에 끝이 났다. 이 미영전쟁에서 유명해진 한 군인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이다. 앤드루 잭슨은 원주민 크리크족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해왔고, 그의 부대는 크리크족의 마을을 불태웠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해하는 것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앤드루 잭슨은 1814년 호스슈벤드 전투(Battle of Horseshoe Bend)에서 크리크족을 상대로 활약하면서 국민 영웅이 되었다. 당시 앤드루 잭슨은 크리크족과 싸우며 또 다른 부족인 체로키족(Cherokees)을 지원했었다. 어쨌든 전쟁이 끝나자 앤드루 잭슨과 그의 부하들은 크리크족의 땅을 매입했고, 그들의 영토를 절반으로 축소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이 특별한 것은 원래 토지의 개인 소유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원주민에게 ‘토지의 개인 소유’라는 개념을 원주민들에게 심어주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원주민들 가운데 일부를 매수했지만, 나머지는 추방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끼리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1818년 미국은 스페인령이던 플로리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하지만 플로리다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앤드루 잭슨은 세미놀족의 마을에 불을 질렀고, 많은 원주민을 죽였다. 이후 앤드루 잭슨은 플로리다 준주의 지사가 됐다. 지사가 된 앤드루 잭슨은 군대 의무감이던 친구에게 노예가격이 곧 오를 것이므로 가능한 많은 노예를 사두라는 얘기를 해줬고, 친척들에겐 땅을 많이 사두라고 조언하기도 했었다. 이런 잭슨의 모습은 미국의 일반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잭슨은 정말 그런 말을 했었다.

1828년 앤드루 잭슨은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 되었다. 잭슨과 그가 직접 후계자로 고른 마틴 밴 뷰런의 통치하에서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7만 명의 원주민이 강제적으로 서부로 내몰렸다. 검은매 전쟁(Black Hawk War)이 끝난 뒤 일리노이의 색족(Sacs)과 폭스족(Foxes) 원주민들은 이주해야 했다. 1832년 대통령에 재선된 후 앤드루 잭슨은 원주민 강제 이주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앨라배마에 살던 크리크족 2만 2000명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든 영역에서 지내고 있었음에도 연방정부의 약속을 믿고 떠났다. 그 약속은 “그들이 살던 땅 가운데 일부가 부족민들 개개인에게 주어질 것이며, 땅을 받은 사람들은 그 땅을 팔든 머무르든 연방정부가 보호해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크리크족은 백인 정착민들을 몇 차례 공격했고, 이에 광분한 미국은 크리크족을 서부로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미국 병사들은 크리크족의 마을에 침입하여 부족민을 3000명 단위로 묶어 서부로 몰았다. 그 과정에서 크리크족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수백 명씩 죽어갔고, 배 한 척이 침몰하면 300명 이상이 죽기도 했다.

(1838년 당시 체로키족의 눈물의 행로)

1835년 미국 정부는 500만 달러와 미시시피 강 서쪽 지역의 보호 거주지를 대가로 조지아 주에 있는 체로키 부족 땅을 조지아 주에 양도한다는 조약을 체로키 보죽의 소수 파벌과 체결했다. 1만 7000명의 체로키 족은 이 조약이 위법이라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고, 앤드루 잭슨은 윈필드 스콧 장군 지휘로 7000명의 연방군을 파견해 원주민을 포위한 뒤 서부로 내몰았다. 조지아 주는 체로키족을 추방하는 법을 통과시키고 체로키족의 정부, 집회 신문을 법으로 금지했다. 체로키 부족민들이 고향땅에 남아 있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백인 선교사들까지도 교도소에서 4년간 중노동을 하는 처벌을 받았다. 소수의 체로키 부족민들은 다른 부족민들 몰래 서명하고 연방정부와 다시 한 번 이주 조약을 체결했다. 정부는 이주를 강제로 실행시키기 위한 군대를 파견했고, 사로잡힌 1만 7000명의 체로키 부족민들은 감금되었다. 1838년 10월 1일 유명한 ‘눈물의 행로(The Trail of Tears)’를 떠날 첫 번째 집단이 출발했다. 감금과 굶주림, 갈증, 질병, 과도한 노출로 4000명의 체로키족이 눈물으, 행로 도중 목숨을 잃었다.

(현재 미국 사회에 남아있는 체로키 족들.)

미국의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앤드루 잭슨은 개척자이자 군인, 민주주의자 그리고 국민적 영웅인 잭슨만이 등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수많은 원주민을 죽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런 잭슨의 행적은 미국 국민들에게 잊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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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멜 장군)

 

1940년 5월 히틀러의 군대는 전격전(Blitz Krieg)을 통해서 벨기에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그리고 프랑스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1940년 여름 히틀러가 프랑스를 함락시키는 모습을 본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생각하며 북아프리카의 이집트와 남유럽의 그리스를 침공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는 달리 전략도, 계획도 없고 보잘것없는 군대로 서투를 공격을 했다가 도리어 연합국의 반격을 받아 곧 패배하고 있었다. 이에 당황한 히틀러는 1941년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침공하고, 다른 한편으로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장군 휘하의 1개 기갑군단 즉 아프리카 군단을 파견해 리비아에 주둔하던 이탈리아군을 지원하도록 했다.

(진격하는 영국군 병사)

 

194126일 소장으로 진급한 롬멜은 히틀러가 있는 베를린 총리 관저를 찾아갔고, 롬멜 장군은 히틀러로부터 북아프리카 사령관으로 발령받았으며, 212일에 북아프리카에 도착했다. 당시 북아프리카의 이탈리아 군영은 이미 짐을 싸 놓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롬멜은 독일군의 사열식을 이탈리아군에게 보여줌으로써 이탈리아군의 사기를 높였고, 이를 바탕으로 331일 대대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군 1개 기갑사단과 이탈리아 1개 기갑사단이 한 팀을 이루어 영국군에게 공세를 퍼부었는데, 영국군은 제대로 방어도 해보지 못하고 1주일도 안 되어 300km를 후퇴했다. 또한 46일에는 영국군 제8잡단군 사령관 오코너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영국의 몽고메리 장군)  

  

투브루크(Tuburq) 항구를 제외한 넓은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하자 영국군은 이를 지키기 위해 북아프리카에 대규모의 지원군을 보냈다. 1941615일 영국의 주력 기갑사단인 제7 기갑사단까지 동원한 영국군은 롬멜군대에게 대대적인 공격을 시도했는데, 역으로 롬멜장군은 기갑부대를 이용하여 영국군을 무너뜨렸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했던 독일의 3호 전차)   

 

19411118일 영국군은 십자군 전사라는 작전명으로 독일군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사막의 여우 롬멜을 잡기 위해 영국군은 1000대 이상의 전차를 투입했는데, 이는 롬멜 휘하의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전차보다 4배나 많은 숫자였다. 결국 독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후퇴했고, 19421월에는 리비아의 브레가 항까지 밀려났다. 이곳에서 롬멜은 다시 반격에 나서 영국군의 전략적 요충지를 연달아 격파했다. 그리고 6월 초 독일군은 다시 투브루크 항 근처까지 치고 올라갔다. 620일 롬멜은 투브루크 항을 향한 총 공격을 명령했다. 그 다음날 새벽 독일군은 방어가 삼엄한 영국군 요새를 함락시키고, 영국군 35000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그 공로를 인정한 히틀러는 롬멜을 원수급으로 진급시켜주었고, 롬멜 장군의 승리 소식을 들은 독일 베를린은 온통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FPS 게임인 콜오브듀티 2에서 나온 북아프리카 전투. 사진속에 있는 인물은 프라이스 대위고, 전차는 영국의 크루세이더 전차다.)  

  

하지만 독일군은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탱크와 탄약을 잃었고, 병사들은 지쳐만 갔다. 이 시점에선 독일군은 더 이상 진격하기엔 무리가 생긴 시작했다. 영국의 처칠도 이집트까지 밀리자 새 장군을 북아프리카 전선에 보내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였다. 몽고메리가 부임한 이후 독일과 영국은 전력면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몽고메리 휘하의 영국군이 탱크 1400대 비행기 1300대 그리고 23만 명 이상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롬멜은 9개 사단에도 못미치는 병력에 540대의 탱크와 350대의 비행기가 전부였다. 즉 수적인 면에서도 2.51로 독일군이 불리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결국 롬멜 장군은 194210월 알 알라메인 전투(Battle of Al Alamein)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거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Dwight Eisenhower) 장군 휘하의 미군이 카사블랑카에 상륙했다. 즉 전세는 롬멜 장군에게 불리해졌다. 알 알레메인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로부터 롬멜 휘하의 독일군은 이집트와 리비아 그리고 튀니지에서 미군과 영국군에게 밀렸고, 1943년 봄 쯤에는 튀니지에서 영미연합국을 상대로 방어만 하고 있었다. 결국 롬멜의 북아프리카 군대는 19435월 초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으로 철군하면서 완벽히 철수한다. 1940년 이탈리아 무솔리니가 시작한 북아프리카 전투는 영미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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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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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4일 필자는 2년간의 소방서 공익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전역했다. 공익 근무를 하던 시기 필자는 미국 여행을 준비했었고, 전역하고 난 지 5일 뒤인 1029일 아침 10시 뉴욕 존F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여행 가서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필자는 두 권의 책을 가방에 챙겼다. 하나는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이 쓴 그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nving Train>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이었다. 1달간의 여행 기간 동안 미국 동부와 캐나다 그리고 미서부를 관광하고 다녔던 필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우선적으로 읽었는데 미국 보스턴에 들린다면 케네디 생가와 더불어 그의 묘지를 방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의 묘를 방문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게 된 시점은 관광버스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 가는 도중이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은 필자는 버스 안에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폈고, 꾸준히 책을 읽었지만, 그다음 날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40달러로 1040달러를 딴 이후로는 점차 독서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1달간의 긴 여행을 로스엔젤레스에서 마치고 귀국한 필자는 이현상의 초기 생애 부분까지만 읽은 상태였고, 그 이후론 읽지 않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필자의 눈엔 다른 책들이 눈에 더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6월 여름 방학을 맞은 필자는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번에 다시 읽게 되었다. 대략 2주 동안 이현상 평전을 읽었던 필자는 책을 정독하는 기간 동안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대한민국 극우 반공 세력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고 싫어하는 인물 이현상은 일제에 맞서 노동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다 전사한 혁명 전사였기 때문이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사망했을 당시 일어난 6.10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현상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과 더불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조선을 군국주의화 할 때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데 헌신했고, 그 바람에 일제의 감옥을 들락날락했었다. 1939년 국내에서 창설된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한 그는 많은 인물들이 친일로 변절할 당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극소수의 인물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현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전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해방 정국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했던 그가 해방 정국에서 좋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미군정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19465월 정판사 사건 이후 이현상도 친일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었는데, 혁명가 이현상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한 주체가 바로 고문왕이라 불리던 노덕술이었다. 혁명가 이현상이 해방된 조선에서 악질 친일 경찰에게 빨갱이로 몰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현상이 고문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의 비극은 비단 김원봉 선생에게만 국한되어있지 않은 일이었다.

 

필자가 이현상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점은 그의 빨치산 투쟁기다. 1948년 여순항쟁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까지 이현상은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와 친일 세력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했었는데, 그의 경우 절대로 민간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여순 항쟁 당시 14연대에 속해있던 일부 남로당 출신 장교들이 봉기한 군대에 의해서 처형되었던 것과 항쟁 시기 좌익계열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하게 비판했고 반성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여순 항쟁 시기 좌익에 의해 저지른 학살은 대부분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무차별 학살을 일삼던 우익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현상 사령관은 좌익이 저지른 학살을 결단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이현상 사령관의 노력은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대거 편입된 신빨치산 세력들의 경우 일부는 이를 어기고, 약탈 및 군경과 우익 청년단에 대한 보복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히 금지했고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직속 부대들은 민간인 학살 및 강간, 약탈 등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주변에 있는 소를 가져갈 때도 절대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그 가격에 맞는 돈을 지급하고 가져갔다. 심지어 이현상 휘하의 빨치산들은 포로로 잡힌 국군 포로나 경찰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고, 이들을 그냥 풀어줌으로써, 역으로 감동을 줘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향하여 빨치산 투쟁에 임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강간과 학살 약탈을 일삼았다는 대한민국의 소설들은 왜곡되고 조작된 반공 선동이다. 그런 반공 소설에서 묘사한 빨치산의 모습은 당시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이를 토벌하는 우익 청년단과 대한민국 군경의 모습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하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북을 향해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도시들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었다. 그 결과 미군의 B-29 폭격기에 무차별 폭격을 받은 북한은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변했고,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1.4 후퇴 이후 휴전 협상을 북한과 하는 와중에도 미국은 북한 지역을 폭격했는데, 19537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폭격은 지속됐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자면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북한이 더 많았지만, 남한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시기 미군은 남한 땅 전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런 무차별 폭격은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남한 땅에서 계속되었다. 특히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미군은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들의 뿌리를 뽑기 위해 지리산 전역을 폭격했고,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까지 사용했다. 심지어 게릴라들을 죽이기 위해 세균까지 살포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미제국주의의 반인륜적인 범죄로 인하여 빨치산 게릴라들은 재귀열에 걸려 적잖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었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빨치산 게릴라들을 향해 휘발유를 살포한 뒤, 네이팜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고, 그 결과 유격대원들과 투쟁 인민들 그리고 산짐승과 나무를 가릴 것 없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으며 인근 지역이 불지옥으로 변해버렸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즉 미군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런 광기 어린 짓까지 일삼았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미제국주의 군대가 베트콩 해방 전사들과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와 같았다.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들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거기다 195110월 휴전 회담이 대략 3, 4개월 동안 정체되어 있을 때, 이승만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전방에 있던 백선엽 휘하의 군대를 지리산에 투입하여, 빨치산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현상과 빨치산들은 민중의 해방과 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총을 들고 싸웠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의 집요한 토벌 끝에 빨치산 세력은 씨가 말랐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2개월 뒤인 1953917일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30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워온 조선의 체게바라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투쟁 과정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체게바라는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땅속에 묻어졌다. 볼리비아의 토벌대가 체게바라의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그의 시신을 땅에 묻은 이유는 그가 우상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 또한 화장되어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저 이현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세워진 가묘가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있을 뿐이다.

 

필자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책에서 읽었던 부분은 한국전쟁 초기에 이현상과 구빨치산 세력들이 전개했던 투쟁이었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1950년까지 대략 2년간 지리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해오던 빨치산들은 19506월에 북상을 시작했었다. 북상하던 빨치산들은 19507월 하순에 남하하던 인민군과 접선하였고, 이후 낙동강 전선을 향해 남진했다. 낙동강에 도착한 그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인민군 정규 부대들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을 도하하여 후방에서 국군과 미군을 교란하는 것이 이현상과 빨치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195081일 낙동강을 도하한 빨치산들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빨치산들은 북한의 T-34 탱크를 잡기 위해 도착한 미군 탱크를 상대로도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빨치산들은 9월 말까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는 낙동강전선을 넘어간 유일한 유격대였고, 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아군의 인명 손실은 거의 없었으며 최소 수백 명의 미군을 사살하고 100명 이상의 미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미군 포로들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으며, 백여 대의 군용차량과 십여 군데 군사기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전과(戰果). 이 부분에서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교란 작전을 수행했던 한 여성 유격대원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강에 성공한 100명의 유격대 앞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무기가 등장했다. 탱크였다. 소총 한 자루에 수류탄 몇 개가 고작인 대원들은 모래땅을 흔들어대며 요란하게 밀려오는 탱크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으나 총알은 불꽃만 날리며 튕겨버리고 수류탄도 소리만 요란할 뿐 두꺼운 철판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이때 유일한 여성 소대장으로서 매 동무라고 불리던 부산 출신의 23살 처녀 대원이 부상당한 몸으로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미군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인민공화국 만세!” 매 동무는 가녀린 음성으로 만세를 부른 뒤 자폭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탱크가 멈춰 섰다.”

 

출처: 이현상 평전 p.350

 

우리가 아는 빨치산 대장 이현상 사령관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이자, 독립투사였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한반도 이남에서 혁명 투쟁을 전개했던 이현상 사령관이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던 것은 고작 3개월이다. 그것도 19485월에 난생처음 받았다. 3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토대로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빨치산을 지휘했던 것이다. 20세기 혁명사에 있어서 게릴라 투쟁의 전설인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쿠바 혁명과 호치민과 베트콩의 민족해방투쟁은 기후 및 환경 자체가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현상이 전개했던 지리산과 한반도 이남 지역은 절대 아니었다. 저자 안재성은 책에서 이현상의 빨치상 투쟁이 주어진 조건상 얼마나 악조건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리산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반경 50km의 고립된 공간이었다. 미국과 싸우던 베트남 유격대는 하노이로부터 보급을 받았고 독일과 싸우던 러시아 유격대는 트럭으로 물자를 보급받아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중국공산당이나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농사까지 지으며 싸울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 유격대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반나절만 걸으면 마일이 나오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깊이 숨어도 국군이 반나절만 밀고 오면 드러나 버리는 손바닥만 한 지역에서 이리저리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어가는 처지였다.”

 

출처: 이현상 평전 p.502

 

이렇듯 이현상의 빨치산 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전개된 투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과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비극을 느꼈다.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친일파에게 빨갱이로 몰려 결국은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드라마 서울 1945가 분단의 비극을 낱낱이 보여주듯이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도 이를 보여준다. 이현상 같은 혁명적인 독립운동가가 해방 이후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맞서는 빨치산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지속되었는지?”를 우리는 이현상 평전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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