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2
안재성 지음 / 실천문학사 / 2013년 4월
평점 :
품절


20181024일 필자는 2년간의 소방서 공익 근무를 무사히 마치고 전역했다. 공익 근무를 하던 시기 필자는 미국 여행을 준비했었고, 전역하고 난 지 5일 뒤인 1029일 아침 10시 뉴욕 존F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미국 여행 가서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필자는 두 권의 책을 가방에 챙겼다. 하나는 <미국민중사>의 저자 하워드 진이 쓴 그의 자서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You Can’t be Neutral on a Monving Train>였고, 다른 하나가 바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이었다. 1달간의 여행 기간 동안 미국 동부와 캐나다 그리고 미서부를 관광하고 다녔던 필자는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우선적으로 읽었는데 미국 보스턴에 들린다면 케네디 생가와 더불어 그의 묘지를 방문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실제로 그의 묘를 방문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게 된 시점은 관광버스를 타고 요세미티 국립 공원에 가는 도중이었다. 하워드 진의 자서전을 끝까지 다 읽은 필자는 버스 안에서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폈고, 꾸준히 책을 읽었지만, 그다음 날 라스베가스 카지노에서 40달러로 1040달러를 딴 이후로는 점차 독서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1달간의 긴 여행을 로스엔젤레스에서 마치고 귀국한 필자는 이현상의 초기 생애 부분까지만 읽은 상태였고, 그 이후론 읽지 않았었다. 물론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필자의 눈엔 다른 책들이 눈에 더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6월 여름 방학을 맞은 필자는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을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번에 다시 읽게 되었다. 대략 2주 동안 이현상 평전을 읽었던 필자는 책을 정독하는 기간 동안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필자가 보기에 대한민국 극우 반공 세력들이 이를 갈며 증오하고 싫어하는 인물 이현상은 일제에 맞서 노동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에는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다 전사한 혁명 전사였기 때문이다.

 

1926년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사망했을 당시 일어난 6.10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현상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며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과 더불어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했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킴과 동시에 조선을 군국주의화 할 때도 마르크스-레닌주의적 혁명 조직을 건설하는데 헌신했고, 그 바람에 일제의 감옥을 들락날락했었다. 1939년 국내에서 창설된 경성콤그룹에서도 활동한 그는 많은 인물들이 친일로 변절할 당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극소수의 인물에 포함된다. 따라서 이현상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의 전설이었다.

 

필자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분노를 느꼈던 파트는 해방 정국이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했던 그가 해방 정국에서 좋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미군정과 친일파 세력들에게 탄압받았기 때문이다. 19465월 정판사 사건 이후 이현상도 친일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으며 모진 고문을 받았었는데, 혁명가 이현상에게 잔혹한 고문을 가한 주체가 바로 고문왕이라 불리던 노덕술이었다. 혁명가 이현상이 해방된 조선에서 악질 친일 경찰에게 빨갱이로 몰려 잔혹하기 짝이 없는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현상이 고문받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김원봉의 비극은 비단 김원봉 선생에게만 국한되어있지 않은 일이었다.

 

필자가 이현상에게 존경심을 느끼는 점은 그의 빨치산 투쟁기다. 1948년 여순항쟁부터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까지 이현상은 남조선에서 미제국주의와 친일 세력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했었는데, 그의 경우 절대로 민간인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여순 항쟁 당시 14연대에 속해있던 일부 남로당 출신 장교들이 봉기한 군대에 의해서 처형되었던 것과 항쟁 시기 좌익계열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하게 비판했고 반성함으로써,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여순 항쟁 시기 좌익에 의해 저지른 학살은 대부분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 청년단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에서 무차별 학살을 일삼던 우익들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지만, 이현상 사령관은 좌익이 저지른 학살을 결단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한 이현상 사령관의 노력은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대거 편입된 신빨치산 세력들의 경우 일부는 이를 어기고, 약탈 및 군경과 우익 청년단에 대한 보복을 가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현상 사령관은 이를 철저히 금지했고 이현상 사령관 휘하의 직속 부대들은 민간인 학살 및 강간, 약탈 등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을 주변에 있는 소를 가져갈 때도 절대 함부로 가져가지 않고, 그 가격에 맞는 돈을 지급하고 가져갔다. 심지어 이현상 휘하의 빨치산들은 포로로 잡힌 국군 포로나 경찰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고, 이들을 그냥 풀어줌으로써, 역으로 감동을 줘 그들이 자발적으로 전향하여 빨치산 투쟁에 임하도록 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빨치산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강간과 학살 약탈을 일삼았다는 대한민국의 소설들은 왜곡되고 조작된 반공 선동이다. 그런 반공 소설에서 묘사한 빨치산의 모습은 당시 빨치산의 모습이 아니라 이를 토벌하는 우익 청년단과 대한민국 군경의 모습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을 하게 된 국군과 유엔군은 북을 향해 진격하는 것과 동시에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도시들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었다. 그 결과 미군의 B-29 폭격기에 무차별 폭격을 받은 북한은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변했고, 최소 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1.4 후퇴 이후 휴전 협상을 북한과 하는 와중에도 미국은 북한 지역을 폭격했는데, 1953727일 휴전 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폭격은 지속됐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보자면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북한이 더 많았지만, 남한 또한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렸을 시기 미군은 남한 땅 전역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런 무차별 폭격은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남한 땅에서 계속되었다. 특히 지리산에 고립되어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던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미군은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들의 뿌리를 뽑기 위해 지리산 전역을 폭격했고,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네이팜 폭탄까지 사용했다. 심지어 게릴라들을 죽이기 위해 세균까지 살포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미제국주의의 반인륜적인 범죄로 인하여 빨치산 게릴라들은 재귀열에 걸려 적잖은 사람들이 죽기도 했었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미군은 빨치산 게릴라들을 향해 휘발유를 살포한 뒤, 네이팜 폭탄을 무차별적으로 투하했고, 그 결과 유격대원들과 투쟁 인민들 그리고 산짐승과 나무를 가릴 것 없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불에 타버렸으며 인근 지역이 불지옥으로 변해버렸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즉 미군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이런 광기 어린 짓까지 일삼았다. 이는 마치 베트남 전쟁에서 미제국주의 군대가 베트콩 해방 전사들과 남베트남의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른 반인륜적 전쟁범죄와 같았다.

 

미제국주의와 친일파 세력들은 이현상과 빨치산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거기다 195110월 휴전 회담이 대략 3, 4개월 동안 정체되어 있을 때, 이승만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전방에 있던 백선엽 휘하의 군대를 지리산에 투입하여, 빨치산의 씨를 말리고자 하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이현상과 빨치산들은 민중의 해방과 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해 총을 들고 싸웠다. 하지만, 국군과 미군의 집요한 토벌 끝에 빨치산 세력은 씨가 말랐고, 한국전쟁이 끝난지 2개월 뒤인 1953917일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은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30년 동안 사회주의 혁명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워온 조선의 체게바라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1967년 볼리비아에서의 혁명 투쟁 과정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 체게바라는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땅속에 묻어졌다. 볼리비아의 토벌대가 체게바라의 묘비도 세우지 않은 채 그의 시신을 땅에 묻은 이유는 그가 우상이 될 거라는 두려움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유가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 또한 화장되어 묘비도 세워지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저 이현상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여 세워진 가묘가 북한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있을 뿐이다.

 

필자가 가장 흥미를 느끼고 책에서 읽었던 부분은 한국전쟁 초기에 이현상과 구빨치산 세력들이 전개했던 투쟁이었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1950년까지 대략 2년간 지리산에서 게릴라 투쟁을 해오던 빨치산들은 19506월에 북상을 시작했었다. 북상하던 빨치산들은 19507월 하순에 남하하던 인민군과 접선하였고, 이후 낙동강 전선을 향해 남진했다. 낙동강에 도착한 그들이 수행했던 임무는 인민군 정규 부대들과 더불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는 것이 아니었다. “낙동강을 도하하여 후방에서 국군과 미군을 교란하는 것이 이현상과 빨치산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195081일 낙동강을 도하한 빨치산들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빨치산들은 북한의 T-34 탱크를 잡기 위해 도착한 미군 탱크를 상대로도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빨치산들은 9월 말까지 미군을 상대로 전투를 전개했다. 이현상의 빨치산 부대는 낙동강전선을 넘어간 유일한 유격대였고, 책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아군의 인명 손실은 거의 없었으며 최소 수백 명의 미군을 사살하고 100명 이상의 미군을 포로로 잡았다고 한다. 미군 포로들을 함부로 학살하지 않았으며, 백여 대의 군용차량과 십여 군데 군사기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전과(戰果). 이 부분에서 당시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교란 작전을 수행했던 한 여성 유격대원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강에 성공한 100명의 유격대 앞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거대한 무기가 등장했다. 탱크였다. 소총 한 자루에 수류탄 몇 개가 고작인 대원들은 모래땅을 흔들어대며 요란하게 밀려오는 탱크를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으나 총알은 불꽃만 날리며 튕겨버리고 수류탄도 소리만 요란할 뿐 두꺼운 철판에 흠집도 내지 못했다. 이때 유일한 여성 소대장으로서 매 동무라고 불리던 부산 출신의 23살 처녀 대원이 부상당한 몸으로 방망이 수류탄을 들고 미군 탱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인민공화국 만세!” 매 동무는 가녀린 음성으로 만세를 부른 뒤 자폭했다. 요란한 폭음과 함께 탱크가 멈춰 섰다.”

 

출처: 이현상 평전 p.350

 

우리가 아는 빨치산 대장 이현상 사령관은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이자, 독립투사였다.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한반도 이남에서 혁명 투쟁을 전개했던 이현상 사령관이 군사 훈련을 제대로 받았던 것은 고작 3개월이다. 그것도 19485월에 난생처음 받았다. 3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토대로 여순항쟁 이후부터 한국전쟁 휴전 협정 이후까지 대략 5년간 빨치산을 지휘했던 것이다. 20세기 혁명사에 있어서 게릴라 투쟁의 전설인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쿠바 혁명과 호치민과 베트콩의 민족해방투쟁은 기후 및 환경 자체가 게릴라 투쟁을 전개하기 적합한 곳이었다. 하지만 이현상이 전개했던 지리산과 한반도 이남 지역은 절대 아니었다. 저자 안재성은 책에서 이현상의 빨치상 투쟁이 주어진 조건상 얼마나 악조건이었는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지리산이 아무리 크다 해도 반경 50km의 고립된 공간이었다. 미국과 싸우던 베트남 유격대는 하노이로부터 보급을 받았고 독일과 싸우던 러시아 유격대는 트럭으로 물자를 보급받아 사실상 정규군이나 다름없었다. 중국공산당이나 만주의 항일 유격대는 농사까지 지으며 싸울 여유도 있었다. 그러나 남한 유격대는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아무리 깊은 골이라도 반나절만 걸으면 마일이 나오는, 상대적으로 아무리 깊이 숨어도 국군이 반나절만 밀고 오면 드러나 버리는 손바닥만 한 지역에서 이리저리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어가는 처지였다.”

 

출처: 이현상 평전 p.502

 

이렇듯 이현상의 빨치산 투쟁은 악조건 속에서 전개된 투쟁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필자는 다시 한번 분단의 비극과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비극을 느꼈다. 일제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고, 저항했던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 땅에서 친일파에게 빨갱이로 몰려 결국은 빨치산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극은 필자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드라마 서울 1945가 분단의 비극을 낱낱이 보여주듯이 안재성 작가의 이현상 평전도 이를 보여준다. 이현상 같은 혁명적인 독립운동가가 해방 이후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와 친일파에 맞서는 빨치산 투사가 되었는지”, 그리고 왜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환경의 악조건 속에서도 지속되었는지?”를 우리는 이현상 평전에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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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처음으로 이석기 석방 집회에 참가했다. 사실 필자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석기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이 없었고, 어떤 면에선 극우세력들이 주장하는 일각의 주장에 일부분 동조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그가 종북주의자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며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게 재작년 말쯤이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석기 의원이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박근혜 정권에 의해 탄압받았다는 사실이다. 대선 당시 박근혜에게 강력타를 날렸던 이정희 후보에게 악심을 품고 있던 박근혜와 새누리 수구 세력들은 당선이 되자마자 이석기 의원을 독방에 가두어 버렸고,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켰다. 이부분에 있어 필자는 정의를 추구한다면 이런 반공주의적 탄압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전근대적인 악법에 맞서 단결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어제 참가한 이석기 석방 요구 집회를 통해서 많은 동지와 함께 힘껏 외쳤다.

2018년 평창 올림픽부터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좋아지며 2019년에는 김정은과 트럼프 문재인이 판문점에서 만났고, 트럼프와 문재인이 잠시나마 월북을 하기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석기 의원을 석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석기 의원의 석방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 만약 그가 이석기 의원을 석방하지 않는다면 적폐청산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대통령 문재인은 이석기 의원을 석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이번 집회에도 우리 집회를 욕하고 방해하던 수구 파시스트 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은 과거의 반공주의적 잔재일 뿐이고 앞으로 변화해가는 세상에 적응치 못하고, 역사의 먼지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이석기 석방 뿐만 아니라 그들에 맞선 안티파시스트 투쟁도 동시에 전개해야한다고 필자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번 이석기 석방 집회에 참가하며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고, 수구 파시스트 세력들이 왜 이석기를 두려워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석기를 석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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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4.19 혁명으로 인하여 12년간 군림하던 이승만(Syng Man Rhee) 독재 정권이 물러났다. 4.19 혁명으로 인하여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허정은 사회개혁을 통해 난국을 해결하고자 했으나, 인민 대중의 요구를 들어주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총선이 치러져 대통령에는 윤보선 총리에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제2 공화국이 등장했지만, 사회의 혼란은 여전했고, 이승만 독재 치하에서 억눌려 살던 민중들이 호소하는 집회나 시위도 끊이질 않았다.

 

4.19 이후 파업과 쟁의가 급격히 늘어났다. 쟁의 건수는 19614~5월에만 282건에 이르렀는데, 이는 1953~1959년의 연평균 41건의 7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파업은 택시, 은행, 부두, 철도, 통신 등에 걸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노동조합은 1959년의 588개에서 1960년에는 914개로 64%나 증가했다. 기존의 어용 노조를 민주화하기 위한 투쟁도 분출했다. 장면의 민주당 정부는 민중들의 요구에 혁명 과업이 완수됐으니 학생들은 학원으로 돌아가라고 외쳤고, 그 또한 반공주의와 친미주의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기에, 국가보안법을 개정은커녕 오히려 데모규제법과 반공법을 도입해서 민중운동을 탄압했다. 쉽게 말해 장면 정부 또한 본질적으론 이승만 정부와 더불어 친미 반공에 입각한 정권이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주장에 따르면 서울의 지배 집단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시련이, 전쟁 전의 시기를 상기시키는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백한 좌경화 경향이었다.”라고 한다. 19612월 주한미군원조사절단 부단장 휴 팔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면 정부가 이대로 4월을 넘기기는 어류울 것이며 공산혁명 혹은 이와 비슷한 극단적 사태가 일어날지 모른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고, 그로부터 3개월 뒤 박정희(Park Jung Hee)를 비롯한 군부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5.16 군사 쿠데타가 그러했다.

 

군부 쿠데타가 처음으로 모의된 것은 1960910일로 김종필을 비롯한 영관급 장교 9명이 서울 총무장에서 모임을 갖고 군의 정풍운동을 벌이는 한편 혁명거사를 모의하고, 같은 해 119월에는 박정희 소장 집에서 다시 회합, 쿠데타 거사를 재확인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는 19614월까지 혁명조직 및 거사 계획을 완성하고 419일 실행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다. 다시 512일로 계획했으나 역시 실패했고, 마침내 1961516일에 쿠데타를 단행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보좌관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미군 대위의 회고록에 나온 내용이다. 그의 회고록에 따르면 “196141, 즉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 전, 나는 한국군 내에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고, 그런데도 정작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린 주한미국 대리대사나 맥그루더 주한미군 사령관은, 박정희 쿠데타군을 타도하고 합법적으로 성립된 장면 정권을 지지할 것이라 표방했다. 하지만 미국정부는 그 45일 이전에 이미 박정희 등의 쿠데타 가능성을 보고받고도 그냥 있었고, 5.16 직후인 1961518일 박정희와 하우스만은 비밀리에 만나 광범위한 군사혁명 과업들을 얘기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박정희 측과 미국 측이 이미 합의가 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1961516일 박정희 소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여 명이 중심이 된 반란군은 이날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이들 반란군은 중앙청 및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새벽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 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오전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의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전각료의 체포령에 이어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권을 인수한다고 밝혔다. 이로써 쿠데타는 성공했다. 그리고 며칠 뒤 육사 생도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거리 행진이 있었다. 쿠데타 세력은 즉각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군사 혁명 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民生苦)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 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5.16 쿠데타 이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들은 첫 번째 조항과 두 번째 조항을 가장 우선시했다. 5.16 이후 4.19 혁명은 의거로 격하됐고, 그 자리에 5.16이 혁명의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지금까지도 쿠데타 잔재들은 혁명이라고 우기고 그렇게 표기하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내걸었던 6번째 조항은 절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오히려 박정희에 의해 완벽하게 폐기되어 버렸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는 과거 자신의 남로당 경력에 있어서 두 나라에게 의심받기도 했고, 기대를 받기도 했는데, 그 의심과 기대를 가졌던 두 인물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미국의 존F케네디(JFK). 쿠바 미사일 위기와 더불어 미소 냉전이 긴장 상태였던 존F케네디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의심했지만, 박정희가 미국을 방문한 뒤로부터는 그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 북한의 김일성은 과거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에 기대를 걸어 한때 박상희의 절친이던 황태성이를 밀사로 남파시켜 남북연방제를 추진해보고자 했지만, 박정희는 황태성에게 간첩죄를 적용하여 형장의 이슬로 보내버렸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은 박정희 평전에서 5.16 쿠데타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5.16 쿠데타는 대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는 좋지 못한 선례를 한국 현대사에 남기게 되었으며, 그 선례는 이후 정치군인들에게 권력에 야심을 갖게 하는 충동을 뿌리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참고 자료

 

박정희 평전, 김삼웅 저, 앤길 출간, 2017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저, 창작과비평사 출간, 1999

한국 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저, 가람기획 출간, 2010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헌대사, 한규한 저, 책갈피 출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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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1941년과 1942년까지는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1941년 10월에서 1942년 1월까지 전개된 모스크바 공방전(Battle of Moscow)과 1942년 8월부터 1943년 2월까지 스탈린그라드 전투(Battle of Stalingrad)에서 소련군에게 패배했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더 이상 소련 영토를 향해 진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군은 전황을 다시 한번 바꾸기 위해서 또 다른 공격 작전을 준비했는데, 그게 바로 쿠르스크에서의 대반격이었다.

 

2. 양측의 전투 준비

(쿠르스크 전투 당시 평원에 있는 전차들)

 

그리하여 독일군 총사령부는 1943년 4월부터 대대적으로 전투를 준비하며 작전명 ‘성채’를 계획하기 시작했고, 1943년 7월 독일군은 쿠르스크 지역의 북쪽과 서쪽 양 방향에서 중앙부대와 남쪽 부대를 중심으로 대략 43만이나 되는 군대를 집결시켰다. 독일군의 준비가 길어지면서 소련군은 보다 세련되고 정교한 방어 체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역시 소련군 진지의 중핵은 대전차 방어에 있었고, 독일군과 대치하는 소련의 모든 전방 중대는 적어도 3문의 야포와 9문의 대전차포 및 1대의 전차 혹은 자주포가 할당되었으며, 방어 구역 내에 전투 공병 소대가 배속되었다.

 

소련군의 자료에 따르면 쿠르스크 전투 이전에 소련 중부 전선군과 보로네시 전선군에는 대략 100만 이상의 병력과 1300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및 3200대 이상의 탱크와 자주포가 일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독일군은 43만 명의 병력과 9960문 이상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탱크와 돌격포 3155문을 전선에 배치해 놓았다. 이 상황에서 소련은 추가적으로 44만 명의 병력과 6500문의 야포와 박격포 그리고 1500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배치했고, 그 결과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병력에서는 3 대 1, 주요 장비 면에서는 1.5 대 1의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독일군에게는 앞으로 치르게 될 전차전에서 또 다른 우위를 점할 수 있었는데, 88밀리미터의 포를 장착한 신형 전차 포르셰 티거가 투입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3. 쿠르스크 전투의 전개

 

1943년 7월 초, 쿠르스크의 독일군과 소련군은 이미 대열을 정비하고 전투를 치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독일군의 공격 시간은 최종적으로 1943년 7월 5일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소련군 지휘부는 이미 정찰 보고서를 통해 몇 시 몇 분에 공격할지까지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련군은 독일군이 공격하는 시간보다 30분 앞서서 독일군의 모든 집결 예정지를 향해 선제 포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에 투입되었던 티거 전차. 당시 티거 전차는 소련군의 주력 전차인 T-34를 혼자서 10대를 격파하는 일도 있었다.)

 

선제 포격으로 독일군의 공격을 잠시나마 지연시키긴 했지만, 7월 6일 저녁이 되자 독일군이 북쪽과 남쪽 양 방향에서 소련군의 제1 방어선을 돌파했다. 하지만 5일 뒤인 7월 12일 소련군 병력은 독일군의 진격을 막아냈다. 쿠르스크 전투가 진행되던 1943년 7월 10일 영미 연합국이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에겐 또 다른 부담이 생겼고, 소련도 7월 13일 쯤에는 영미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소식을 전해 들었다. 또한 히틀러는 폰 만슈타인에게 ‘성채 작전’을 중지시켰고, 제2 SS 기갑 군단을 전선에서 이탈시켜 시칠리아에 상륙한 영미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보냈다.

(보병과 함께 진격하는 소련의 T-34 전차)

 

1943년 7월 12일 소련군은 세심하게 준비해 왔던 전략적인 공세를 개시했다. <쿠투조프>라는 작전명으로, 우선 쿠르스크 돌출부 바로 북쪽에 해당하는 오룔 돌출부에 대한 반격이 시작되었고, 서부 전선군과 브랸스크 전선군, 최종적으로 중부 전선군까지 동원된 이 공세로 인해 독일군은 균형을 잃고 말았다. 이에 따라 독일군은 7월 14일부터는 실질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7월 12일에 공세를 게시한 소련군은 결국 오룔에 들어갔고, 오룔에 들어간 제3 근위 전차군은 8월 5일에, 브랸스크 전선군은 8월 5일까지 자신들의 이름에 해당하는 도시로 접근해서 독일군 방어 병력을 일소했다.

(포화속에서 진격해나가는 소련군)

 

돈바스 지역을 목표로 진군하는 소련군에 위협을 느낀 독일군은 오룔에서의 남쪽으로 이동하여 돈바스 지역의 북쪽으로 이동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꺾기 위해 반격을 시도했지만, 쿠르스크 전투에서의 소련군은 예전의 소련군이 아니었다. 투입된 독일군이 8월 6~7일 사이에 한 것은 소련 제40군이 가한 주공 방향 서쪽의 제2차 공격을 저지한 것 정도였다. 1943년 8월 11일에는 소련군 전차 군단이 독일 SS 기갑 사단과 보고두호프 일대에서 격돌했다. 여기서 대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진 것이다. 8월 13일에서 17일 사이에 독일군은 후퇴 작전을 위해 전투를 감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1943년 8월 23일 소련군이 하리코프 지역을 되찾으면서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의 승리로 끝났다.

 

4. 결과 및 의의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처음으로 소련군의 돌파 부대를 격파하지 못했던 전투이자, 독일이 동부 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조차 가지지 못하게 되는 전투이다. 쿠르스크 전투는 소련군에게 있어서 그런 기회를 제공했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등의 지휘관들이 더 체계적으로 군사 전략을 만들 수 있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독일군의 마지막 반격을 막아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큰 전투다.

(쿠르스크 전투를 묘사한 그림)

 

물론 소련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대가는 매우 컸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독일군의 탱크 손실이 1000대 이상이었던 데에 비해 소련군은 7000대 이상이나 되는 탱크를 전투에서 잃었다. 그 이유는 포르셰 티거(혹은 6호 전차)와 같은 독일의 신형 전차가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독일군의 티거는 혼자서 소련군의 주력전차인 T-34를 10대 이상 격파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 상술했듯이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즉 쿠르스크 전투가 있었기에 소련군은 1944년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고, 1944년 6월에서 8월에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동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고,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로코솝스키 그리고 수많은 소련의 병사와 인민들이 쟁취한 위대한 승리였다.

 

5. 참고 문헌


독소전쟁사, 데비이드 글랜츠 저, 권도승 역, 2007

러시아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저, 느낌이있는책,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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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미국의 독립 혁명

 

1776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과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을 비롯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s)들은 영국 당국에 맞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은 독립을 선포했고,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대략 150년간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렌치-인디언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 원주민 연합에게 영국이 밀렸지만, 나중가서 전세를 역전시킨 영국이 승리했다.)

 

17637년간 전개되었던 프랑스-인디언 전쟁(French-Indian War)은 프랑스의 패배로 끝났다. 유럽에서도 영국과 라이벌 위치에 있던 프랑스는 식민지 개척 시기에도 북미 대륙에서 영국과 대립했는데, 그게 결국 프랑스 인디언 전쟁으로 확산된 것이다. 프랑스 인디언 전쟁 이후 프랑스는 더 이상 북미 대륙에서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 인디언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말이 좋아 승리한 것이지 대략 7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받았던 경제적인 타격이 적잖았다. 따라서 프랑스 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은 북아메리카에 있는 식민지를 대상으로 보상을 요구했고, 노골적으로 식민지 문제에 직접적으로 간섭했다. 영국은 전쟁으로 인한 부채 탕감을 위해 식민지에 각종 세금을 부과했다. 대표적으로 외국산 설탕에 수입 관세를 부과했던 설탕법이나, 식민지에서 지폐 발행을 금지하는 통화법 영국산 수입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법 등이 있다. 특히나 타운센드 법은 식민지 미국인들로 하여금 대단히 많은 불만을 샀다.

(보스턴 학살 이 집회에서 영국군의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영국 당국은 영국 정규군을 식민지에다 영구 주둔시켰고, 1765년에는 반란법을 만들어 식민지인들에게 군대 주둔에 필요한 숙식을 제공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밀수 업자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영국 함대가 아메리카 근해를 순항하도록 했으며 식민지에 임명된 관리가 대리인을 보내는 대신 직접 현지로 가서 근무하도록 강제했으며, 급속히 번창하는 영국 기업과 경쟁할 수 없도록 식민지의 제조업을 영국 당국이 규제했다.

(보스턴 차 사건은 1773년 영국 당국의 가혹한 조치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당시 배에 올라간 사람들은 원주민으로 분장하고 영국에서 가지고 온 차를 바다에 던졌다.)

 

그 결과 영국 당국의 가혹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 정부에 맞서 저항했다. 1770년에는 항구도시 보스턴에서 항의 집회를 하던 5명이 영국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보스턴 학살(Boston Massacre)’이 일어났고, 1773년에는 영국 정부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수입한 차를 던지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이 일어났다. 보스턴 차 사건 이후 영국은 더욱 엄격한 법을 새로 제정하고, 보스턴 항을 폐쇄했으며 식민 정부를 해체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벙커힐 전투 기념탑. 지난 11월 필자가 미국여행 갔을 때 보스턴에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미군은 후퇴하면서 전투에서 패했지만, 사상자는 영국측이 더 많이 나왔다.)

 

영국 정부의 가혹한 통치는 식민지인들의 저항의식을 고취시켰고, 토마스 페인이 썼다는 상식(Common Sense)은 이를 부추겼다. 1774년 식민지인들은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를 발족했고, 1775년 렉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에서 식민지 군대와 영국 군대 간에 최초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그 이후 대륙회의에서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로 결정하고 토마스 제프슨의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이틀 후에 공표했다. 그게 바로 177674일이었고, 이로써 소위 미국의 독립 혁명이라고 불리는 독립 전쟁(American Independence War)가 시작된 것이다.

(요크타운 전투는 미국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투다.)

 

영국이 전쟁에서 승산이 가장 컸던 때는 1776년부터 1778년 초까지 계속된 전쟁의 두 번째 국면에서였다. 하지만 영국군은 트렌턴(Trenton), 프린스턴(Princeton)등의 소규모 전투에서 패배했고, 1777년 뉴욕의 새라토가에서 벌어진 새라토가 전투(Battle of Saratoga)에서도 대패했다. 또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하나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프랑스 군주정과 동맹을 협상했고,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였다. 남부로 옮겨간 전쟁에서 영국은 연전연승을 거뒀지만, 대규모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은 미국 측 대륙군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의 물자와 증원 부대를 차단하고 있는 틈을 타 1781년 버지니아의 요크타운 전투(Battle of Yorktown)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83년 프랑스 파리에서 파리 조약을 체결한 이후 미국은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게 됨으로써, 명실상부 독립 국가가 되었다.

(미국 제1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미국 독립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 같은 빼앗을 수 없는 권리들을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았다.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하여 정부가 만들어진 것이며, 정부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의 동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언제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이러한 목적들을 깨뜨린다면, 그 정부를 교체하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이 민중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러나 소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의 개념에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 노예 그리고 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말에서 토마스 제퍼슨이 여성들을 무시하기 위해 일부러 ‘men’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겠으나, 여성을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선언서에 숨어 있는 진실은 식민지의 신흥 세력들에게 영국을 격퇴하기 위한 지지가 필요했다는 것과 동시에 재산과 권력에 관한 기존의 체제가 심하게 붕괴되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들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식민지 관리로서 영국을 위해 봉사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어떤 인물인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포스터. 이 이면을 들여다 보면 그들은 결국 부르주아 계급이자 지배 계급이었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자신의 저서인 미국민중사에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미국 건국의 아버즈들을 둘러싼 신화는 지속되고 있다. “한 역사가(버나드 베일린 Bernard Bailyn)”가 최근에 한 말대로 국가 지도자들에게 책임 있고 인도적인 권력 행사를 요구하는 정치체제의 창설과 특권의 파괴가 그들의 가장 숭고한 열망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건국의 아버지들이 살았던 아메리카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베일린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가 헌명하고 공명정대한 정부를 위한 기본적 규범을 알고 있었다.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 간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압도해서는 안 되며, 아무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런 균형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기관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이 훌륭한 균형을 이루려고 노력한 현명하고 공명정대한 사람들이었을까? 실제로 그들은 현상을 유지하는 것, 즉 당시 지배세력 간의 균형을 제외하고는 다른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들은 노예와 주인, 무산자와 유산자, 인디언과 백인 간의 평등한 균형을 원하지 않았다.

 

베일린이 말하는 사회의 경쟁하는 세력과 마찬가지로 건국의 아버지들은 국민의 절반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선언서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헌법에서도 부재했으며 새로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초기 미국 여성들이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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