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1936년 프랑스 국경지대에 있는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했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강제 합병했으며, 1939년 초 주데텐란트(Sudetenland) 지역에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산다는 이유를 들어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이처럼 아돌프 히틀러가 정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나,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전쟁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이를 그저 묵인하고 있었다. 또한,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권과 더불어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스트 프랑코 세력을 지원했다.  

193810, 독일 외교부는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항구 도시인 단치히(Danzig)를 돌려 달라고 폴란드 정부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단치히 요구는 표면적인 행위일 뿐 실제로는 폴란드 전체를 먹고 싶어 했다. 따라서 나치 독일의 군부는 이미 폴란드를 침공할 작전 계획인 백색 작전을 수립해 놓았다.

 

위에서 상술한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이후 폴란드 정부는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히틀러가 폴란드까지 점령하려 한다는 계획을 안 영국과 프랑스는 19394월과 5월 차례로 폴란드와 군사방위상호원조협정을 체결하였다. 즉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할 시 이번만큼은 영국과 프랑스도 군사적으로 강경히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 독일은 더 이상 10만 이내의 군대만 소유한 국가가 아니었다.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대략 51개 사단을 소유하고 있었고, 그중 9개 사단은 3호 전차와 장갑차 그리고 삼륜 오토바이를 갖춘 기갑사단이었으며, 4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보유한 군사 강국이었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의 항공기 보유 숫자를 합친 거보다 2배 이상이나 되는 규모였다. 따라서 히틀러의 독일은 더 이상 영국과 프랑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19398월 세상을 놀라게 할 조약이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소련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 불리는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경험했던 양면전의 위험성을 사전에 없앤 것이다.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스탈린까지 손을 본 히틀러는 폴란드로 진격하라는 제1호 작전 명령을 내렸고, 대규모의 독일군이 폴란드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193991일 새벽 445,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침공 당시 독일군은 160만 명의 병력과, 3600대의 탱크, 6000대의 화포와 2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했다. 폴란드 침공에 나선 히틀러의 군대는 동프로이센과 체코에 배치된 북방 집단군단과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된 남방 집단군단으로 나누어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를 양쪽에서 협공했다. 당시 독일은 전격전(Blitz Krieg)이라고 하여 전차와 항공기 그리고 기계화된 보병을 이용한 작전을 구사했다. 이 전술은 상대측의 허점을 찔러 파고드는 형대의 공격 전술로서 굉장히 치명적이었고, 무엇보다 기동력이 추가된 신속한 공격이었기에, 단기간에 걸처 상대측의 군대를 궤멸시킬 수 있었다  

거기다 폴란드군은 전쟁 이론이나 기술 무기에 있어서 독일을 상대하기 역부족이었다. 폴란드 측은 가지고 있는 탱크도 거의 없었고, 비행기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쓸 법한 구식 전투기들뿐이었으며, 아직도 말을 타고 돌격하는 기병이 폴란드군의 주력을 이루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전격전이라는 새로운 군사 작전을 개시하는 독일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고, 독일의 융커스 급강하 폭격기들은 전격전에 있어서 진격하는 전차와 기계화된 보병을 수월하게 지원할 수 있었다. 99일부터 전개되었던 브주라 전투(Battle of Bzura)에선 폴란드 기병이 독일군의 전차를 향해 돌격하였다가 대량 학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914일 독일군은 폴란드군의 저항을 분쇄시키고 수도 바르샤바에 접근했다. 거기다 916일 동쪽에서 소련이 진격해오면서 폴란드 정부는 결국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다. 결국, 폴란드 측은 928일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폴란드 침공 시기 독일군은 대략 1만 명 이상이 전사했던 대에 비해 폴란드군은 7만 명 이상이 죽었고, 70만 명이 포로로 잡혔다. 폴란드 침공이 독일의 승리로 끝나면서 폴란드라는 국가는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했다. 이렇게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는지 21년 만에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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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주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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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의 반란과 식민지 미국의 빈부격차

 

미국의 독립 혁명이 일어나기 100년 전인 1676년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반란이 일어났었다. 분노한 정착민들은 수도인 제임스타운에 불을 질렀다. 총독은 불타는 도시에서 도망쳤고, 영국 당국은 정착민들을 제압하기 위해 대략 1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게 바로 베이컨의 반란(Bacon’s Rebellion)’이다.

(베이컨의 반란 당시 들고 일어난 민중들)

  

베이컨의 반란에서 민중이 불만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자신들과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부와 특권을 누리며 그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식민지 지배자들이었다. 따라서 베이컨의 반란은 하층계급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다. 즉 아래서부터의 투쟁이라는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이 반란에는 백인 하인들과 흑인 노예들고 가담했다고 하는데 그들 또한 버지니아 사회의 엄청난 빈부격차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시 반란을 이끌었던 지도자 너새니얼 베이컨(Nathaniel Bacon)은 분명 민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빈민을 돕는 것보다는 원주민들과 싸움에 더 관심이 있었다. 베이컨은 군대를 조직하여 원주민들을 습격하기도 했지만, “인민선언(Declaration of the People)”이라 불린 문서에서 반란의 명분을 밝혔고, 불공정한 세금을 징수한 것과 인디언들로부터 서부의 개척자들을 지켜주지 않는 것을 포함한 버클리 행정부의 비행을 고발하기도 했다.

(너새니얼 베이컨)

  

하지만 베이컨이 병에 걸려 죽은 이후 반란은 지속되지 못했는데, 영국 당국에서 30문의 대포로 무장한 군함과 군대를 동원하여 그들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반란에 참여했던 하인들과 노예들은 다시 주인들에게 돌려보내 줬고, 23명의 반란 지도자들은 교수형에 처했다.

 

베이컨의 반란은 버지니아에서 나타났던 연속적인 억압의 연결고리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다. 원주민들은 백인 개척자들에게 토지를 강탈당했고, 개척자들은 제임스타운의 부유한 상류층들에게 세금을 바치며 그들의 통치를 받았다. 이런 빈부의 격차 문제를 떠나서 이 사건의 핵심은 모든 식민지인들이 영국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버지니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란을 지지했었다.

(베이컨 반란 당시 그림)

  

1760년대에 북아메리카의 영국 식민지를 통치하던 부유한 엘리트 계급들에게는 세 가지의 두려움이 있었다. 적대적인 원주민들과 노예 반란의 위험성, 그리고 점점 커져만 가는 가난한 백인 계급의 분노였다. 남부의 대농장주들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흑인 노예들과 가난한 백인들이 베이컨의 반란 같은 대규모 봉기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식민지들이 성장할수록 지배계급은 통제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찾게 되었다. 최고의 부유층과 극빈층이 존재하는 사이에서 백인 중산층이 발전했다. 상층계급은 중상층 계급의 충성을 얻는 데 성공했고, 여기에는 분명 중산층에게 대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과연 어떻게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의 손실 없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1760년대와 1770년대의 지배계급은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다름 아닌 자유와 평등에 대한 말이었다. 자유와 평등에 관한 말은 영국에 대한 혁명을 일으킬 때만 필요했고, 노예제나 불평등을 없애는 데에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소위 미국 독립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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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7-1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제 논리만 지배하면 정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예전처럼 어울려 하루바삐 정치경제학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

NamGiKim 2019-07-16 22:35   좋아요 0 | URL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응우옌 반 쪼이(Nguyễn Văn Trỗi)

응우옌 반 쪼이는 1940년 2월 1일 꽝남(Quang Nam)성 디엔 반(Điện Ban)현에서 태어났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쟁취하지만,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베트남이 분단된 이후 수많은 북베트남 사람들이 월남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때 응우옌 반 쪼이도 부모를 따라 사이공으로 이주했고, 그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부정부패와 가족정치 불교도 탄압으로 인하여 민심을 제대로 못잡았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는 자생적으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 창설되어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싸우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월남한 응우옌 반 쪼이는 전구제조 공장에서 전기공으로 근무하다가 무장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1964년 초 남부 롱 안(Long An) 성(省) 게릴라 기지에서 정치 학습과 게릴라 전술을 배웠다. 결혼한 지 1주일도 안 된 응우옌 반 쪼이는 1964년 5월 로버트 맥나마라 미국방부장관이 베트남을 방문하자 탄손누트 공항에서 사이공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있는 ‘꽁 리(Cong Ly)‘ 다리에 폭발물을 설치했다가 그만 들켜버려 체포되었다. 남베트남 경찰에게 체포된 응우옌 반 쪼이는 체포된 후 6개월이라는 기간동안 남베트남 경찰의 온갖 잔인한 고문과 구타 그리고 회유를 받았으나, 죽음을 각오하고 비밀을 폭로하지 않았다. 군사재판에서 그는 공개 총살형을 선고 받았고, 1964년 10월 15일 결국 응우옌 반 쪼이는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24살이었다.

총살형이 집행되기 이전 응우옌 반 쪼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저널리스트로서 당연히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있는 것은, 그리고 비행기와 폭탄으로 우리나라의 인민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있는 것은 미국입니다. 그리고 우리 조국을 정복하는데 필요한 모든 계획을 세웠던 자는 바로 저 로버트 맥나마라입니다. 내가 반대했던 것은 바로 미국입니다. 이 땅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죄를 범한 맥나마라를 나는 처단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 마지막 소원이 있다. 내 조국의 하늘을 보고 싶다. 눈가리개를 벗겨 달라....˝
˝내 이 말을 꼭 기억해 달라.
타도 미제국주의!
베트남 만세!
호치민 만세!˝

출처: 왜 호찌민인가? p33~34

1975년 통일한 베트남 정부는 그의 혁명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그가 로버트 맥나마라를 죽이고자 거사를 단행했던 꽁 리 거리를 응우옌 반 쪼이거리로 명명했다. 그리고 1988년에는 한국에서도 혁명가 응우옌 반 쪼이에 대한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었다. 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혁명가 응우옌 반 쪼이가 참으로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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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원주민 학살과 흑인 노예의 탄생

(프란시스코 피사로)

 

지난번 콜럼버스 이야기를 다루면서 서구 지배자들이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무차별 학살에 관해 얘기했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의 북미 대륙과 쿠바, 아이티 그리고 바하마를 갔다 온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이 가는 곳마다 콜럼버스와 아라와크족의 비극은 반복되었다.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es)와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멕시코 지역의 아스텍(Aztec) 문명과 남아메리카의 잉카 문명을 파괴했다. 그 결과 스페인 정복자들은 현재 멕시코 지역과 그와의 중남미 지역 그리고 현재 미국의 플로리다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해상 무역 및 정복에 점차 참여하기 시작한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가 바로 영국이었다. 16세기 영국인들은 신세계에 대한 뒤섞인 감정을 가졌었다. 이에 따라 영국은 스페인과 경쟁할 수밖에 없었는데, 1588년 칼레 해전(Naval Battle of Calais)에서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영국에게 격파당하면서, 이후 해상권은 영국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렇게 해서 1607년 버지니아에 제임스 타운(Jamestown)이 건설되었다. 미국 버지니아 지역에 영국 최초의 식민지인 제임스 타운이 건설 된 이후 영국에서 미국 대륙으로 도망치거나, 출세를 위해 오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16209월에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소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들이 그러했다. 이후 현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보스턴항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매사추세츠 동부 지역에 찰스타운, 뉴타운, 록스베리, 콩코드 등의 새로운 타운들이 건설되었다.

(1637년 영국 원정대의 피쿼트족 마을을 공격하는 모습)

  

1607년에 건설된 영국의 제임스 타운에선 2, 3년 동안 식량난과 기아가 지속되었다. 워낙 심각했기에, 시체를 파먹는 일이 있을 정도였고, 제임스 타운에 거주하던 500명 중에서 6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가운데 몇 명이 배고픔을 견디다 못해 원주민들에게 도망쳤다. 시간이 흐른 뒤 제임스타운의 지배자는 포와탄족들에게 그들을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포와탄족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영국 이주자들은 원주민 마을을 파괴했고, 무차별 학살했다. 그로부터 12년 후 원주민들은 영국 이주자들이 증가하자 347명의 영국인들을 학살했으며, 그 이후에는 전면전을 벌였다. 결국, 영국 이주자들은 그들을 전멸시키기로 결정했고, 원주민들에게 무차별 보복을 감행하였다.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도착한 영국의 청교도들도 코네티컷 남부 지역과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피쿼트족(Pequots)과 전쟁을 벌여 대량학살을 벌였고, 원주민들을 보이는 데로 학살했다.

(당시 흑인들을 대량으로 실었던 노예선)

 

영국인들의 북미 대륙 정착이 시작되면서 17세기 중반에는 흑인 노예제도가 버지니아를 비롯한 미국 남부에서 확산됐다. 스페인이 대서양 해상권을 장악했을 시기 아프리카에서 가져온 노예들을 자신딜이 만든 전초기지를 중심으로 이송했고, 이후에도 노예들을 착취했었다. 아프리카 흑인이 북미대륙에 처음 도착했던 것은 1619년에 대략 20명이 제임스 타운에 도착한 것부터 시작한다. 이때 끌려온 흑인들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유럽에서 온 계약 하인들처럼 취급받았다고 역사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들의 경우 일정 기간이 되면 자유를 부여하기도 했다지만, 흑인들이 하인으로 등록되었다 하더라도 백인 하인과 다른 존재로 간주됐고 다르게 대우받았을 것이며, 사실상 노예랑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미 대륙 또한 흑인 노예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계약 하인들의 경우 일정 기간이 되면 자유를 부여해야 하는 제약이 있었고, 계약 하인들의 이주 숫자가 점차 줄었으며, 그에 따른 농업 생산력이 감소했기 때문이다. 또한, 1650년대와 1660년대부터는 남부 식민지에서 평생 노예들을 위한 법령을 제정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의 수요는 계속해서 증가하여 1700년의 버지니아 식민지에는 총인구의 12분의 1에 달하는 6000명이 존재했고, 1763년에는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17만 명의 노예가 존재했다. 1637년 처음으로 아메리카의 노예선이 매사추세츠를 출항했는데, 그 배의 창고는 수감자들을 구속하기 위한 가로 0.6m, 세로 1.8m의 족쇄가 달린 선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백인들은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배에다 실어 대량으로 북미 대륙에 옮겼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찾은 1492년부터 1776년 미국이 독립을 선포할 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대략 500만 명이 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 기간의 식민지 미국의 경제는 노예들을 착취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흑인 노예선를 표현한 그림. 흑인들은 움직이지 못한 상태에서 고향을 떠나야 했다.)

  

흑인 노예들이 남부에만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 미국도 주로 남부에 흑인 인구가 몰려있고, 북부에는 상대적으로 적었으며, 북부는 상업 및 공업이 발달한 곳이었기에 상대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북부 또한 자신들의 이윤 창출을 위해 흑인 노예무역에 가담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창출했다

(북미대륙에 와서도 흑인들은 백인들에게 지배받고 착취당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면 흑인들의 반란 및 저항은 없었을까? 물론 없진 않았다. 1687년에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노선네크에서 노예들이 지역에 있는 백인을 모두 죽인 후 장례식을 이용해 탈출하려고 한 계획이 발각되기도 했었고, 1739년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스토노에서 노예 20명이 반란을 일으켜 창고지기 2명을 죽이고 총과 화약을 훔쳐 남쪽으로 달아나면서 도중에 사람들을 살해하고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 반란은 다른 노예들도 가담해 대략 8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는데, 민병대가 그들을 강경진압하여 50명의 흑인이 죽고 봉기가 분쇄되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반란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도망치다 발각되면 백인들과 추격대에게 바로 사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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