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500만 년 전 공룡은 멸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룡이 어떻게 해서 멸종했는지는 지금까지도 고생물 학계의 여러 주장이 존재하지만, 분명한 건 공룡은 백악기 말기에 멸종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프리카 콩고에는 아직도 공룡이 서식한다는 얘기가 있다. 바로 모켈레 므벰베가 그것이다. 필자가 모켈레 므벰베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중국인이 쓴 ‘세계 역사 속의 49가지 미스터리’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그 책에서는 콩고에서 공룡이 목격되었다고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모켈레 므벰베였다.

 

모켈레 므벰베는 아프리카 밀림에 서식한다는 소문이 있는 용각류(목이 긴 공룡)를 닮은 크립티드로 현지어인 링길라어로는 ‘강의 흐름을 멈추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이 동물을 지칭하는 이름이 여러 개가 있고, 한 부족만이 아닌 여러 부족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존재이며,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모두 같은 동물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모켈레 므벰베의 길이는 대략 5~9m 정도로 추정되며 아프리카 코끼리나 하마만큼 거대하고, 용과 하마를 섞은 것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악어처럼 긴 꼬리와 뱀과 비슷할 정도로 가늘고 유연한 긴 목과 작은 머리 그리고 둥글고 두꺼운 몸통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모켈레 므벰베는 쥬라기 시절 서식하던 공룡인 디플로도쿠스나 아파토사우루스를 연상시키는 형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는 지역 원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추정한 것이다. 필자 또한 네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한 다큐에서 용각류의 사진을 보여주자 현지 원주민들이 모켈레 므벰베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무튼 지역 원주민들의 얘기에 따르면 성질이 사나와 카누를 뒤집어 버리고 사람을 습격해 죽이는 경우가 있지만, 초식동물이기에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동굴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고 주행성 동물이라 한다. 정말 신기한 것은 모켈레 므벰베가 있는 곳에는 하마가 거의 살지 않는데, 모켈레 므벰베가 그저 하마를 매우 싫어해서 보이는 대로 죽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대 미국인 선교사가 지역 원주민들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콩고의 텔레 호 근처에 사는 윈주민들이 호수에서 흘러나온 강의 상류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주변에 서식하던 모켈레 므벰베가 공격하자 그들끼리 힘을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모켈레 므벰베를 죽이는 데 성공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후 마을 사람들이 그 고기를 먹었는데, 그 시체에서 고기를 자른 부위가 다시 살아나 여러 번 잘게 써는 일을 반복하고 나서야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고기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하룻밤 내에 모두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밀림에 사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모켈레 므벰베를 단순한 동물을 넘어 일종의 정령으로 여기며 두려워서 했다고 한다. 재밌는 것은 그 얘기를 들은 선교사 또한 강의 상류에 원주민들이 모켈레 므벰베를 죽이기 위해 만든 바리케이드가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모켈레 므벰베에 대한 문헌상 첫 기록은 1776년 프랑스 선교사 프로이트의 저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의 저서에는 “그건 거대한 괴물임에 틀림이 없는 것 같다. 발자국이 땅에 나 있었는데, 둘레가 90cm나 되는 흔적을 만들었다. 발자국의 형태를 관찰한 후, 보폭을 측정해보니 그 동물의 보폭은 2.1 ~2.4m 정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굉장히 큰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모켈레 므벰베가 다시 주목받은 것은 1970년대 미국 텍사스에 사는 파충류 학자인 제임스 파월이 근처를 여행하면서 모켈레 므벰베에 대한 전설을 듣고 신비동물학회 회장인 로이 매컬 교수에게 이야기하면서부터였다. 이 얘기를 들은 매컬 교수는 1979년에 모켈레 므벰베를 탐사하기 위한 탐사대를 결성하여 발자국을 발견하는 성과를 얻기도 했으나, 그 이상의 증거물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후 1981년에 2차 조사대가 조직되어 떠나게 되었는데, 멕컬 일행은 간접적 접촉을 하게 되는데, 매컬 일행이 카누를 타고 에페나 마을 근처의 강을 돌고 있을 때, 멀리 떨어져 있던 둑에서 커다란 동물이 갑자기 잠수하면서 파도를 일으켜 매컬의 카누를 치었는데 그걸 본 원주민이 "모켈레- 음베음베!" 라고 소리치는 것을 목격했다. 이에 따라 매컬 교수는 하마가 없고 악어도 그런 파도를 만들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모켈레 므벰베라고 확신 하였지만, 매컬 교수가 직접 목격했던 것이 아니고, 그것을 증명할 어떠한 사진 증거도 남기지 못했기 때문에 2차 조사대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던 1992년 일본의 다큐멘터리 팀이 모켈레 므벰베로 보이는 생명체를 찍기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에 모켈레 므벰베의 실존에 관한 확실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모켈레 므벰베를 확실하게 입증할 증거가 있지는 않지만, 모켈레 므벰베의 울음을 녹음하기도 했고, 공중에서 사진으로 포착하기도 했으며, 추정되는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모켈레 므벰베가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또 다른 증거는 그 동물이 발견된 콩고와 같은 아프리카 밀림은 중생대 이후 지금까지 환경 변화가 거의 없었다는 점과 그런 동물들이 살기 좋은 고온다습한 지역이라는 점일 것이다.

 

지난 2012년 미국의 탐험가들이 모켈레 므벰베를 찾기 위해 중앙아프리카의 콩고 밀림으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별다른 얘기가 없는 거로 봐선 모켈레 므벰베를 입증할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한 듯하다. 과연 아프리카 정글에 공룡이 살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재미있는 상상이다. 이 얘기를 믿고 안 믿고는 읽는 이의 자유겠지만, 필자의 의견을 덧붙이자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쪽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상술했듯이 아프리카의 밀림지대는 공룡이 살던 중생대 시대의 기후와 환경에서 거의 차이가 없고, 그런 동물들이 살기 적합한 지형이기 때문이다. 무튼 발견된다면 한 번쯤은 보고 싶은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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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11-27 1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항해시대 3이라는 게임에서 중요 발견물중 하나로 나왔었지요.^^

NamGiKim 2020-11-27 19:20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콩고 공룡이 나오다니 흥미롭군요. 정말 고기가 다시 생성되는지 궁금하네요.ㅋㅋㅋㅋㅋ
 

19426월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뒤집은 해전이 있었다. 이 해전에서 일본 제국은 재기불능일 정도의 타격을 받았다. 이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이후 태평양 전역에서 있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고,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이 해전이 바로 미드웨이 해전(Battle of Midway)이다.

 

1. 배경 

1931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32년 상하이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1933년 독일과 더불어 국제연맹에서 탈퇴했고, 이후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하며 중국 대륙을 넘보기 시작했다. 1937년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수도 남경을 점령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제2차 국공합작으로 중국 민중이 뭉치자 중국전선은 점차 교착상태에 직면했고, 영국과 미국 또한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면서, 일본의 처지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히틀러의 파리 점령과 더불어 일본 제국의 인도차이나반도 침공이 있었고, 미국과 영국은 이런 일본의 행동에 반발하여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끊었다. 곤란한 처지에 놓인 일본 제국은 결국 미국과 전쟁을 하기로 했고, 1941127일 진주만 기습을 감행하게 되었다. 진주만 기습 공격은 미국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진주만 기습 이후의 일본군의 태평양 지역 점령은 연합국에게 있어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1941년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이 점령당했고, 홍콩과 싱가폴, 말레이시아, 버마,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 웨이크 심지어 알래스카의 알류산 열도까지 일본군 수중에 떨어졌다. 이러한 일본군의 승승장구한 태평양 점령은 19425월까지 지속됐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현상과는 달리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했을 당시 큰 실책을 범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일본이 파괴한 미국의 전함과 군함들은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하던 구식 전함들이었고, 미국의 주력 항공모함 3척은 당시 해상에서 훈련 중이었기에 파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은 미국의 항공모함을 상대해야 했고, 태평양의 중심인 미드웨이에서 상대해야 했다.

 

2. 미드웨이 해전의 전개와 미국의 승리

 

1942418일 미국의 미 항공모함에서 출동한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에 접근해서 폭탄과 소이탄을 투하하고, 중국 대륙으로 날아가는 일이 있었다. 당시 공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큰 충격에 빠졌고, 일본 해군을 지휘하던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이에 매우 자극받아 미드웨이를 공격하려는 의지를 더욱 굳게 다졌다.

 

그해 55일 일본 해군 사령부는 작전 명령 제18호를 발표하고 작전명‘MI 작전인 미드웨이 작전 계획을 승인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두 개 이상의 함대를 합한 연합 함대를 총동원했는데, 항공모함 8, 전열함 11, 순양함 23, 구축함 65, 잠수함 21척을 포함한 200척의 함대와 대략 6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된 규모였다. 당시 영국 해군보다도 규모가 대단했던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격파할 수 있으리라 의심치 않았다.

 

반면에 미국의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에게는 3척의 항공모함과 8척의 순양함, 6척의 전열함을 포함한 군함 76척을 동원되었다. 즉 함대 규모 면에서 3 1의 대결이었다. 하지만 미국에게는 가장 큰 장점이 있었는데, 19421월에 격침된 일본군 잠수정에서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코드 북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체스터 니미츠는 이것을 이용하여 미드웨이를 노리는 일본군의 계획을 미리 파악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군 참전 병력과 함대 수, 공격 노선, 작전 시간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64일 새벽 3시 야마모토는 기함 야마토호에서 각 함대의 지휘관에게 전투 준비지시를 내렸다. 545분 미군 해상 정찰기가 나구모 함대를 발견했는데, 일본군 전투기들은 미드웨이 해상에서도 미군의 레이더에 잡혔고, 미군 전투기와 일본군 전투기 간에 교전이 벌어졌다. 오전 7시와 10시에 일어났던 교전에서 일본군이 패배했고, 오후 245분 미국 엔터프라이즈호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급강하 폭격기들은 소류호를 공격했는데, 소류호가 침몰하면서, 한때 명성을 날렸던 나구모 함대는 전멸했다. 그리고 65일 새벽 255분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전 함대에 패배를 인정하는 미드웨이 작전 계획 취소전문을 보내면서 미드웨이 해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3. 결과 및 의의

 

미드웨이 해전은 완벽히 일본군의 대패로 끝이 났다. 일본군은 주력 항공모함 4척을 잃었고, 3057명이 전사했으며, 순양함 1척을 잃었다. 반면에 미군은 307명이 전사했고, 항공모함 1척을 잃었으며, 구축함 1대가 침몰당했다. 그러나 일본 신문들은 사실과 거꾸로 보도했다. 대본영에서는 미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호넷 호 격침, 전투기 120대 격추, 아군 피해 항공모함 1척 상실, 1척 대파, 순양함 1척 대파, 미귀환 전투기 35라고 발표했고, 진실을 알 리가 없는 일본 국민들은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하며 승리를 환호했다.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승리는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대략 6개월 만에 거둔 미국의 승리였고, 6개월 만에 일본의 패전으로 끝났음을 말해준 것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를 시작으로 미국은 과다카날 전투를 비롯한 태평양 전선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기를 붙잡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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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현존하는 펭귄은 현재 남아프리카와 호주 뉴질랜드 그리고 남미대륙에 존재한다. 이건 현재 우리가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펭귄에만 국한된다. 지금으로 부터 200년 전에는 북대서양에도 펭귄이 존재했었다. 그 펭귄이 바로 큰바다쇠오리다.

큰바다쇠오리는 몸길이 약 80 cm, 체중 5kg에 이르는 대형 바다새로, 캐나다의 뉴펀들랜드부터, 현재 미국의 매인 주와 그린란드, 아이슬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북해안까지의 북쪽 대서양 및 북극해에 분포해, 무리 생활을 했었다. 바다 속에 잠수해 멸치, 오징어 등을 먹었다. 바닷속에서는 짧은 날개와 다리를 사용해 고속으로 헤엄칠 수 있었고, 최대 1000m까지 잠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상어나 범고래 그리고 북극곰을 제외하면 사실상 천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육상에서는 몸을 세워 마치 펭귄처럼 걸었기에 지상에서의 속도가 느렸고, 번식기는 6월 무렵으로, 크고 작은 섬의 절벽에 상륙해 단 1개의 알을 바위 위에 낳았다. 따라서 이들의 존재를 알게 된 인간은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포위하고 생포했는데, 16세기부터 대대적인 포획과 사냥에 나서게 되었다. 물론 이들은 8세기 부터 인간에 의해 식용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콜럼버스의 북미대륙 발견 이후 수많은 유럽의 탐험가들이 대서양을 탐험하면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사냥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호기심 많아 사람을 봐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대했기 때문에,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 쉬웠다. 결국 유럽 정부에선 큰바다쇠오리에 대한 보호 정책을 펼쳤으나 암암리에 불법 포획이 계속 되었다. 큰바다쇠오리의 천국이었던 섬들은 곧 생지옥이 되었는데, 당시 선원들은 큰바다오리를 잡으면 재미를 위해 산 채로 가죽을 벗기거나, 알을 부수는 등의 일을 자행했으며, 큰바다오리가 서식하던 섬들은 나무가 없었기 때문에 식사를 위해 큰바다오리를 여러마리 잡아 일부는 산 채로 냄비에 넣고, 나머지는 그 냄비에 들어간 큰바다오리를 익히기 위한 땔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결과 1820년 무렵의 번식지는 아이슬란드 앞바다의 가이르풀라스케어 섬에만 남게 되었다. 이후에도 큰바다쇠오리를 박제로 만드려는 시도 때문에, 불법적으로 포획되어 고가에 팔렸다. 결국 1844년 6월 4일 엘데이 섬에서 마지막으로 확인된 살아 있는 큰바다쇠오리가 박제용으로 사살되면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목격 증언도 있었지만, 현재는 80개의 박제와 70개 남짓의 알 껍질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큰바다쇠오리는 16세기부터 서양인들에게 펭귄이라 불렸다. 이들이 멸종한 이후 서양의 탐험가들은 남극에서 큰바다쇠오리와 비슷한 종류의 새를 발견했고, 탐험가들은 이 새에게 펭귄이라는 이름을 붙혀주었다. 그 새가 결국 현재 우리가 아는 펭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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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7 1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5 11: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몰았는데, 그 수법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이 중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2004년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장동건의 와이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우익 청년단이 쏜 총에 맞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에 따르면, 그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은 그저 쌀이나 보리를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자본주의가 뭔지 혹은 사회주의가 뭔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무엇이었길래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몬 것일까?

 

1. 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에 관해 얘기하기 이전에 먼저 해방 전후사에 관해 얘기하겠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미군이 진주한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익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고,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힘을 얻은 이승만은 그런 노력들을 무력으로 무마시켰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은 여러 곳에서 봉기했었는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난 이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이다. 보도연맹 조직을 확장하면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했다. 심지어 10대인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할 정도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비단 좌익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 및 사정을 들어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자면 보도연맹 단체는 해방 후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만들었지만, 대다수 민간인이 더 많이 가입했으며, 그 절차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다.

 

2. 학살의 시작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엄청난 보복 및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텨였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기에, 한국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과의 전쟁 속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전향자들의 배신을 우려하게 되었고, 그런 이승만의 우려가 결국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을 따라 후퇴하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은 정부의 명령 아래 보도 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이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 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 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그 외에도 진해, 통영, 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중 가장 악질적인 사건은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이었다. 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보도연맹은 19506월부터 8월 혹은 그 이후까지 전개되었는데, 최소 20~30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학살당했다. 통계에 따라선 최대 100만까지 잡기도 하는데, 확실한 건 이승만이 전개한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들도 있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들도 존재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항상 북진통일과 반공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이 한국전쟁 시기 학살당했다.

 

3. 반공주의가 침묵을 강요했다.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물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학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주나 자본가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나 군경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이 규모나 무차별 학살이라는 측면에서 인민군보다 더 했고, 더 잔인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을 겪었던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고, 연좌제가 두려워 이런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유가족회가 결성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부 또한 이승만 정부 못지않게 이를 막았고, 유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결국,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9월에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2009년까지 진행되었다. 보도연맹 학살을 2000년대 조사하면서 대략 5000구 정도의 보도연맹원 시신이 밝혀졌고, 많은 증언과 한국군 자료들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나오면서, 역사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얘기할 때, 항상 인민군의 학살만 강조됐다. 그러나 2000년대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던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학살은 한국군의 학살에 비해 훨씬 적었고, 거의 16 비율이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인민군보다 더 잔인했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아직도 6.25가 되면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만 강조하며, 마치 우리는 피해자다라는 식의 피해의식을 국가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장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숨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금기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보도연맹 학살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국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그런 만행을 우린 한국전쟁일인 오늘 기억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4. 참고 자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르스 커밍스 저, 조행복 역,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저, 2005

이승만 평전, 김삼웅 저,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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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나 6시에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아는 분의 차를 타고, 천안문으로 향했다. 천안문에 도착한 필자는 대략 50분 정도 줄을 섰고, 3~5분 정도 마오쩌둥 기념관을 돌아볼 수 있었으며, 대략 1~2분 정도 마오쩌둥과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기에 중국 정부에선 그의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기념관까지 만든 것일까?

마오쩌둥 그는 1893년 후난성에서 태어났다. 젊은시절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그는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었다. 제1차 국공합작이 장제스의 배신으로 깨지자 1928년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고, 1935년 고난의 역경속에서 대장정을 성공시켰다. 이후 중일전쟁시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었고, 1950년대와 60년대에 전개된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는 항상 마오쩌둥이 있었다. 1972년에는 냉전 데탕트 분위기속에서 미국과 수교하였고, 1976년 사망했다.

이처럼 마오쩌둥의 인생은 중국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속에서 항상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오늘 아침 마오쩌둥을 보기 위해 대략 40분에서 50분 이상이나 줄을 섰을 정도로 마오쩌둥에 대한 중국 사람들의 존경심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느꼈다. 심지어 마오쩌둥을 보고 나서 눈물을 흘리시는 나이든 중국 어르신들을 적잖게 보았는데, 이 부분에서 마오쩌둥에 대한 그들의 존경심을 다시한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치 않은데, 그 비판에는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다. 1950년대 그가 전개했던 대약진 운동으로 인하여, 대략 3천만명이 아사했고, 문화대혁명은 많은 엘리트들과 지식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대약진 운동 사실상 정책적 실책이기에, 그것을 의도적인 학살인 것 처럼 얘기하는 것은 타당치 않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 정부조차 비판을 할 정도니, 그런점에서 보았을때 마오쩌둥은 절대 과가 없다고 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오쩌둥 사망 이후 그의 후계자인 등소평은 마오쩌둥에 대해 공7 과3이라 평가를 내렸는데, 그런 평가는 마오쩌둥의 과에 비해 너무 후하게 준거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수 있지만, 그렇다 해서 그의 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며, 장제스에게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것도 잘못됐다 본다. 따라서 필자는 마오쩌둥에 대해 평가할때 공5 과5로 본다.

한국 사람들의 경우 마오쩌둥을 비판할때, 한국전쟁 당시의 그의 파병을 문제 삼는데, 필자는 그런 류의 비판은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본다. 왜냐하면, 한국전쟁은 비단 중국만의 문제가 아닌 미국과 소련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라는 복잡한 국제관계의 맥락 속에서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봐야할 문제고, 브루스 커밍스가 얘기했듯이, 1945년 여운형의 건준과 모스크바삼상회의 부터 봐야할 문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얘기하자면, 오늘 본 마오쩌둥의 묘와 3년 전 모스크바에서 본 레닌묘를 비교하자면, 오히려 마오쩌둥이 레닌보다 더 밀랍으로 방부처리가 된 듯 하다. 마오쩌둥의 평가가 어떻든 그는 여전의 중국의 영웅이고, 혁명가로써의 공은 당연히 위대한 업적이기에 인정해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최근에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판한 마오쩌둥 평전을 필자는 읽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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