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대략 3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은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몰았는데, 그 수법이 너무나도 잔인했다. 이 중 가장 악질적인 만행이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에 의해서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이다.
2004년 장동건과 원빈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장동건의 와이프가 아무것도 모르고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우익 청년단이 쏜 총에 맞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작중에 따르면, 그녀가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것은 그저 쌀이나 보리를 준다는 이유 때문이었지, 자본주의가 뭔지 혹은 사회주의가 뭔지를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도대체 보도연맹이라는 단체가 무엇이었길래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의 현장으로 내몬 것일까?
1. 보도연맹이란?

보도연맹에 관해 얘기하기 이전에 먼저 해방 전후사에 관해 얘기하겠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북에는 소련군 이남에는 미군이 진주했다. 미군이 진주한 한반도 이남에는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 좌익 세력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들이 활발하게 활동을 했었고,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었다. 하지만 미군정의 힘을 얻은 이승만은 그런 노력들을 무력으로 무마시켰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승만과 친일 세력들의 탄압에 맞서 민중들은 여러 곳에서 봉기했었는데,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진압당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되고 난 이후 이승만 정부는 좌익 세력 축출이라는 목적하에 해방 후 소위 좌익 활동을 한 사람들을 전향시키기 위해 단체를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보도연맹이다. 보도연맹 조직을 확장하면서, 비단 과거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많이 가입했다. 심지어 10대인 중·고교생도 보도연맹에 가입할 정도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비단 좌익 경력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이유 및 사정을 들어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생업에 충실한 사람들이었다고 보면 된다.
정리하자면 보도연맹 단체는 해방 후 좌익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전향시키려고 만들었지만, 대다수 민간인이 더 많이 가입했으며, 그 절차가 매우 쉬웠기 때문에, 가입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었다.
2. 학살의 시작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엄청난 보복 및 학살을 당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면서 부텨였다. 한국전쟁 초기 북한군의 진격은 매우 신속했기에, 한국군은 후퇴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군과의 전쟁 속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전향자들의 배신을 우려하게 되었고, 그런 이승만의 우려가 결국 무차별 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전선을 따라 후퇴하던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은 정부의 명령 아래 보도 연맹원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했다. 군경과 서북청년단 같은 우익단체들은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에게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했는데,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학살이 남한 전역에서 일어났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학살이 전개되었다.

1950년 7월 전라도 해남 지역의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소집 후 학살하였고, 제주에서는 4.3 사건 관련자들이 예비검속되어 학살당했다. 경상남도 마산의 여양리에 있는 골짜기 도둑골과 부산의 금정구 노포동 뒷산에서 수천 명이 집단 학살당했다. 그 외에도 진해, 통영, 거제에서도 우익청년단과 군경에 의해 무차별 학살이 일어났다. 경상도에서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중 가장 악질적인 사건은 경산 코발트 학살 사건이었다. 대략 3500명의 보도연맹원을 경산 지역 코발트 광산에 몰아놓고 무차별 학살한 뒤 그 3500명의 시신을 콘크리트로 덮어 학살을 은폐하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렇게 보도연맹은 1950년 6월부터 8월 혹은 그 이후까지 전개되었는데, 최소 20~30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학살당했다. 통계에 따라선 최대 100만까지 잡기도 하는데, 확실한 건 이승만이 전개한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최소 30만 명 이상이나 되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중 학살당한 사람 중에는 보도 연맹원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이 더 많았고, 10대 청소년들도 있었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들도 존재했다. 이 학살의 중심에는 항상 북진통일과 반공을 부르짖던 이승만이 있었고, 최종적으로 이승만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민간인이 한국전쟁 시기 학살당했다.
3. 반공주의가 침묵을 강요했다.
보도연맹 학살로 인하여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물론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학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주나 자본가 그리고 우익 청년단이나 군경을 대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즉 한국군이 저질렀던 학살이 규모나 무차별 학살이라는 측면에서 인민군보다 더 했고, 더 잔인했다. 그러나 보도연맹을 겪었던 유가족들은 대한민국에서 침묵하며 살아야 했고, 연좌제가 두려워 이런 진실을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4.19 혁명 이후 유가족회가 결성되기도 했지만, 박정희 정부 또한 이승만 정부 못지않게 이를 막았고, 유가족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결국, 한국전쟁 시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9월에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2009년까지 진행되었다. 보도연맹 학살을 2000년대 조사하면서 대략 5000구 정도의 보도연맹원 시신이 밝혀졌고, 많은 증언과 한국군 자료들에서 수십만 명을 학살했다는 근거가 나오면서, 역사 속에서 감출 수 없는 민간인 학살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을 얘기할 때, 항상 인민군의 학살만 강조됐다. 그러나 2000년대 정부 주도로 진행되었던 진실화해조사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인민군의 학살은 한국군의 학살에 비해 훨씬 적었고, 거의 1대6 비율이었다. 이렇듯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인민군보다 더 잔인했다. 오늘은 6.25 전쟁이 일어난 날이다. 아직도 6.25가 되면 북한이 침공했다는 사실만 강조하며, 마치 ‘우리는 피해자다’라는 식의 피해의식을 국가적으로 강조한다. 이런 장치는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숨기는 수단이 되기도 하고, 금기시하게 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보도연맹 학살은 우리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한국군의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그런 만행을 우린 한국전쟁일인 오늘 기억할 필요와 의무가 있다!!
4. 참고 자료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르스 커밍스 저, 조행복 역, 2017
한국전쟁, 박태균 저, 2005
이승만 평전, 김삼웅 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