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나치에 대한 단상

오늘 고기집에서 영업 방해한 어떤 또라이를 보니 채식나치들은 정말 히틀러가 가지고 있는 논리를 있는 그대로 답습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건 깨우치게 된다.

육식 하지 말라는 채식나치들의 논리 대로라면, 고기 쳐먹는 티라노사우루스는 자연계에서 없어야 한다는 똥논리도 만들어 질 수 있다. 고기를 섭취하는 행위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당연히 필요하다. 그럼 자연에는 트리케라톱스와 이구아노돈만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 논리대로라면 채식주의자들이 섭취하는 식물들 입장에선 채식은 졸라 잔인한 행위 아니냐? 식물도 고통 느끼는거 모르냐? 채식주의자란 자들이 실은 풀님들을 칼로 난도질해서 죽지도 않은 상태로 뜯어먹고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바바리안이잖아. 셀러드랍시고 그 풀에 풀로 섞어 만든 이상한 액체를 잔인하게 자른 채소에 뿌려먹잖아!!! 누가 누굴 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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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1868년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식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제국주의적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70년대부터 정한론과 같이 정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론들이 등장했고, 1894년에는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꺾고 조선과 요동반도에 대륙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 입장에선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차르 치하의 러시아 제국이었다.

당시 러시아 제국 또한 승승장구하며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자 했고, 1895년 을미사변 이후 조선의 고종황제가 아관파천하는 일이 생기자 이를 계기로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으며, 따라서 일본과 러시아의 충돌은 불가피한 일이 되었다. 결국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1902년 영일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저지하려 했다. 또한, 러일양국은 조선과 만주의 권익에 대해 타협점을 찾지 못했고, 이는 결국 1904년 2월 8일 일본이 러시아를 선제공격하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게 바로 러일전쟁이다.

러일전쟁 초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 붙였다. 러일전쟁 초기 일본은 여순항을 함락시키고 만주 중심 도시인 봉천을 공격하여 1905년 3월 10일에 장악했다. 하지만 전투 과정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극심했다. 가장 유명한 전투가 당시 있던 203고지 전투가 있는데, 이곳에서만 1만 명이 전사했고, 203고지는 시체로 산이 형성되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확실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지상전보단 해전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은 발트해에 있던 발틱함대를 동원했는데, 일본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발틱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치 못하게 했고, 결국 발틱함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희망봉을 지나 인도양과 태평양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를 했고, 사실상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일본 해역에 도착했다. 결국, 러시아 발틱함대는 대마도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 함대와 교전했고, 대패했다. 그 해전이 바로 쓰시마 해전이다. 이를 통해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러시아 제국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안을 받아들여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맺혔다. 그 결과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우월권과 랴오둥반도, 그리고 사할린 남부지방을 획득하고 극동에서 확실한 패권 국가로 등장했다. 결국,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조선에 대한 식민지화를 추진했고,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완벽히 합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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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 전쟁사 1941~1945
데이비드 M. 글랜츠,조너선 M. 하우스 지음, 윤시원.남창우.권도승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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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19399월부터 일본이 항복하는 19458월까지 대략 6년간 전개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대략 5500만에서 70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 사망자였다. 기존의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하면, 주로 영미 연합군이 중심이 된 서부 연합군의 공로만 강조해 왔다. 박정희나 전두환 정권 시절 텔레비전에선 <전투: combat>, <게리슨 유격대>, <지상 최대의 작전>, <패튼 대전차 군단>, <벌지 대전투: Battle of the Bulge>, <배틀 오브 브리튼>, <켈리의 영웅>, <머나먼 다리> 등을 방영했었고, 이후에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 Saving Private Ryan>, <진주만: Pearl Harbor>, <퓨리: Fury> 그리고 2년 전 인기를 끌었던 <덩케르크: Dunkirk>처럼 주로 미국이나 영국을 중심으로 한 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인기를 끌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Band of Brothers><더 퍼시픽: The Pacific>을 보면 알 수 있듯이 2000년대 나온 미국 드라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영화들과는 달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은 영미 연합군이 아니라 19416월부터 19455월까지 아돌프 히틀러의 야만적인 침략에 맞서 영웅적으로 투쟁했던 이오시프 스탈린과 게오르기 주코프 등이 지휘하는 소련의 붉은 군대였다. 위에 상술한 영화들 때문이라고는 일방적으로 주장할 수는 없지만, 한국 사회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의 역할이 등한시되어온 측면이 있었다. 서구 중심의 매체와 문서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을 바라본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쟁취한 소련군의 역할을 쉽게 무시하게 되고, 중요치 않게 여기게 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관점을 배척하기 위해 이번에 미국의 군사 전문가인 데이비드 글랜츠(David M. Glantz)가 쓴 <독소전쟁사: When Titans Clashed How the Red Army Stopped Hitler>를 읽게 되었다. 그렇다면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소련군은 어떤 방식으로 히틀러의 침략을 막아냈던 것일까?

 

1.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

 

1917년 레닌과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에 맞서 1921년까지 사회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적백내전을 치러야 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내전으로 인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렸다. 1928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른 이오시프 스탈린은 소련의 경제를 회복시키고 초강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행했는데, 고도의 생산력을 달성함과 동시에 군사력을 증강했고, 군의 현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반까지 미하일 투하쳅스키와 같은 소련군 이론가들은 종심 전투 이론에 대한 전술적 개념을 완성 시켰고, 장갑차와 전차를 위주로 한 육군 전술을 발전시켰다. 1932년 소련은 사상 최초로 2개의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최초의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달성한 성과였다. 어쨌든 소련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업화를 기반으로 하여 군사력을 발전시켰고, 대숙청이 진행 중이던 193861일 붉은 군대의 평상시 전력은 대략 150만 명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스탈린이 진행한 공업화로 인하여 소련 전역에는 수많은 공장이 건설되었고, 그 공장들은 19416월 히틀러의 독일이 침략하자 19417월부터 11월까지 우랄산맥을 거쳐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이전하여, 소련군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탱크나 비행기 소총과 기관총 등을 대량으로 생산해냈다. 물론 전쟁 초기 독일군의 진격이 워낙 신속하게 전개되었기에, 일부 중요한 생산 지역이 독일군 수중에 넘어가 버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군수 물자 생산은 스탈린의 공업화가 기반이 됐기에 가능했고, 전쟁에서 소련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2. 미국의 랜드리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묻는다면,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있다. 그게 바로 미국의 랜드리스(무기 대여법). 랜드리스 배경에 관해 얘기하자면,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부터 알아보아야 한다. 사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그랬듯이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도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따라서 미국은 1941년 히틀러가 유럽의 75%를 장악하고 소련까지 침공했을 때도 유럽 문제에 간섭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미국은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이 있은 지 6개월이 지나서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하와이에 있는 미군 기지를 공습했기 때문이었다.

 

194112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이 있자 미국은 일본 제국에게 선전포고했고, 이로부터 4일 뒤인 1211일 히틀러는 동맹국 일본을 돕겠다는 이유를 들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으며, 그게 결국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1942~1943년에 미국은 영국과 중국을 지원하는 것과 동시에 소련에도 물자를 지원했는데, 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 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제공했다. 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미국의 랜드리스 지원은 소련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만약 이런 지원이 없었다면 소련의 경제는 전쟁으로 엄청난 부담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소련에게 지원한 전차나 항공기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특히 소련군들이 미국으로부터 쓰레기 무기를 받고 있다고 의심까지 하게 만들 정도였다. 전차를 예로 들자면 영국군의 주력인 마틸다 전차나 미군의 주력은 M4 셔먼 전차의 경우 독일군의 중전차들보다 성능이 좋지 않았고, 소련의 주력 전차인 T-34보다도 성능이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군의 무기 체계까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3. 쿠르스크 전투

 

많은 사람이 독소전쟁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독소전쟁의 전세를 뒤바꾼 전투를 생각한다면 아마 19428월부터 19432월까지 볼가강 근처에서 전개됐던 스탈린그라드 전투일 것이다. 물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 승리하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소련군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독소전쟁의 전환점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보단 19437월부터 8월까지 전개되었던 쿠르스크 전투라 생각한다.

 

양측 합쳐서 대략 1만 대 이상의 탱크와 3만 대 이상의 대포 그리고 5~6천 대 이상의 항공기가 총동원되었던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의 탱크 손실은 독일군의 5~6배를 능가했었다. 당시 독일군의 주력 전차는 3호와 4호 전차였지만, 독일군이 새로 개발한 티거라 불리는 6호 전차는 소련군의 T-34 전차의 성능을 훨씬 압도했고, 이는 티거 1대가 T-34 10대를 잡기도 했을 정도였다. 이렇듯 최신식 전차로 무장한 독일군에 맞서 소련군은 다수의 병력을 투입하여 피로스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 통계에 따라선 쿠르스크 전투에서 파괴된 소련군의 탱크가 대략 7000대 이상이라고도 하는데, 소련군이 이루어 낸 피로스의 승리는 절대 헛된 승리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전략적인 주도권을 상실했고, 더 이상의 대규모 공격 계획을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중앙 러시아의 광대한 지역이 소련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었고, 독일군이 더 이상 대규모의 공세를 소련군을 상대로 하지 못하게 됐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전투이자 소련군의 승리였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쿠르스크 전투는 독소전쟁사를 아는 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투다.

 

4. 정말 이오시프 스탈린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가?

 

독소전쟁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이 과연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있어서 공로가 있는지에 대한 의제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업적을 부정하는 측에선 1936년부터 1938년까지 그가 대대적으로 감행했던 대숙청으로 인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군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기 때문에, 1939년의 겨울 전쟁과 1941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1953년 스탈린 사후 소련의 서기장 자리에 오르게 된 흐루쇼프 서기장은 1956년 제20차 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스탈린을 격하하는 연설을 하며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했는데, 당시 흐루쇼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없었어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라고 하며 이오시프 스탈린의 공로를 강하게 부정했었다. 1930년대 스탈린이 감행했던 대숙청에 관해 얘기하자면, 대숙청 시기 군사적으로 유능한 장교들이 죽거나 굴라그에 보내졌던 것도 사실이고, 겨울 전쟁에서 핀란드 측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던 것도 사실이며, 독소전쟁 초반에 독일군의 거침없는 진격 때문에 후퇴를 거듭했던 것도 사실이다. 또한,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의 소련군을 보면 소련이 보낸 전차대대가 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격파되기도 했었다.

 

19416222300대의 전차와 3000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300만 대군의 독일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소련군은 기습공격을 받았고, 독일군이 공격을 개시한 당일에 대략 1200대의 주력 항공기를 지상에서 잃었었다. 그 바람에 194111월 말에는 모스크바 외곽까지 밀렸고, 레닌의 도시 레닌그라드도 독일군에 의해 포위당했었으며, 1942년에는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까지 독일군이 진입했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왜 스탈린은 독일군의 침공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느냐는 것인데, 독소전쟁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스탈린이 내렸던 판단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있던 얘기였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는데, “영국과의 전쟁을 완수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두 개의 양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독일 입장에서도 불리한 일이니 영국을 굴복시키지 않는 한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런 스탈린의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망상에 빠져있던 히틀러가 스탈린의 예상과는 달리 정말로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1941년부터 1942년 혹은 1943년 초까지의 소련군이 처해있던 상황은 굉장히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를 거치면서 스탈린의 소련도 점차 독일군에 맞서 반격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스탈린 또한 게오르기 주코프나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등의 의견을 적절하게 받아들이며, 전략을 세워 독일군에 맞서 싸웠으며, 점차 효율적으로 군대를 투입하여 독일군을 차례차례 박살 냈다. 1943년과 1944년 그리고 1945년부터는 스탈린의 세운 몇몇 작전들이 보기 좋게 성공하여 독일군이 후퇴하기도 했다.

 

독소전쟁 시기에 있어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또 한 가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그의 행동은 바로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그가 보인 모습이었다. 1941117일 독일군이 모스크바를 향해 점차 진격해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은 수도 모스크바를 탈출하지 않았고, 러시아 혁명 기념 퍼레이드를 진행하였으며,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까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에 남아 끝까지 크렘린 궁전을 지켰다. 이는 전쟁 초기 이오시프 스탈린이 자신의 목숨이 독일군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으며, 수많은 러시아 인민들에게 히틀러 파시스트의 침략을 무찌르게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됐다. 책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그가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4년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 작전 50주년 기념일에 미국의 어느 잡지는 표지에 아이젠하워 장군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거기에는 아이젠하워가 히틀러를 패배시킨 장본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명칭은 사실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게오르기 주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그리고 아마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더 어울릴 것이다. 좀 더 일반화하면 1941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에 대항한 소련군과 다민족인 소련 인민들이 전투에서 가장 큰 몫을 해냈다. 일본으로부터의 공격에 1931년부터 계속 시달려 온 중국 정도가 소련의 시련과 노력의 정도에 견줄 만하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자면 중국의 기여는 소련에 비해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소련은 독일군의 거의 절반과 계속 전투를 했었다.”

 

출처: 독소전쟁사 p.355

 

정리하자면 2차대전의 승리에 있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기여한 공은 분명히 있으며, 그가 2차대전 승리에 이바지한 공은 미국의 아이젠하워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국의 장개석 그리고 영국의 처칠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5. 소련군의 승리

 

1943년 쿠르스크 전투를 승리로 끝낸 소련군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그리고 발트 3(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1944년 초 소련군은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레닌그라드(러시아 제국 시절과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해방시켰고, 연합국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19446월 소련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을 감행하여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에서 독일군을 몰아냈으며, 1945년 초에는 헝가리에서 독일군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해 4월에는 독일 국경지대를 돌파했고, 430일 나치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여 제국의 심장인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세웠다. 베를린 전투는 5월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그해 5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히틀러 군대를 궤멸시키고 승리를 쟁취한 소련은 19457월 또 다른 전쟁을 준비했다. 그 전쟁은 바로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이던 일본 제국과의 전쟁이었다. 1938년 하산호와 1939년 노몬한에서 소련군하고 붙어봤던 일본은 1941년 소련과 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1945년 초 소련은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고, 그해 7월부터는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했었다. 19458월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와 팻맨이라는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89일 소련군은 만주 전역에서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 결과 소련은 사할린 남부와 만주지역 그리고 북한까지 접수했고, 일본군을 대패시켰다.

 

소련군의 만주 전역 공격은 오히려 1944년과 1945년 당시 독일군을 상대로 전개했던 전술보다 더 효과적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이후 소련군의 군사전략을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하였다.

 

6. 결론: 2차 세계대전 연합국 승리를 이끈 나라는 바로 소련이다.

 

지금까지 소련이 어떻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를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소련이 지불한 대가는 매우 컸다. 대략 1000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6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나치에 의해 학살당했다. 소련군의 전사자를 당시 미군 전사자에 비교하자면 대략 25배 이상이다. 194112월에서 194211월까지 독일과 소련 양측을 합하여 900만 명의 병력이 동부전선에서 격전을 치렀는데, 당시 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의 군대를 상대하고 있던 영국은 추축국에 6만 명의 손실을 입혔다.

 

19437, 독일군과 소련군 200만 명이 쿠르스크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500만 명이 스몰렌스크에서 흑해 연안에 이르는 600km의 전선에서 싸우는 동안, 서방 연합군은 시칠리아에 상륙해서 6만 명의 독일군을 몰아냈다. 전쟁 시작부터 1945430일까지의 독일군의 전체 손실은 대략 1100만 명이고 그중에 부상자가 600만 명인데, 이들 중 900만 명의 인명 손실이 동부전선에서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19446월 서방 연합군이 제2 전선을 프랑스에 형성할 때까지 소련군은 대략 3년간 동부전선 전역에서 나치독일에 맞서 싸웠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 때,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치른 소련의 노력은 서방 국가들보다 훨씬 컸다. 데이비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소련과 러시아 측 자료와 입장을 보여줌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을 영미 중심의 관점으로 봐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다만 읽기 전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저자 데이비드 글랜츠는 순수히 군사적인 입장에서 소련의 업적을 재조명했기에, 책을 이해하기 위해선 군사적인 지식 없이는 힘들다. 하지만 데이비드 글랜츠의 책은 읽음으로써 잃는 것 보다 얻는 것이 많을 것이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게 해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랜츠의 독소전쟁사는 명저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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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이 집권한지 1년 6개월이 넘어가던 2013년 8월 29일 대한민국 언론 조선일보에선 “북한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옛 애인으로 알려진 가수 현송월이 음란물을 찍다 처형되었다.”라고 보도했었다. 당시 이를 보도했던 조선일보는 현송월이 찍은 음란물이 중국을 통해 유통됐고, 예술인 일부는 북한에서 금지된 성경책을 소지했다고 알려졌으며, 그들에 대한 공개 처형은 은하수, 왕재산, 모란봉악단 등 주요 예술단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되었고, 사형수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는 오보였다. 2014년 5월에 평양에서 열린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에 모란봉악단 단장 직함으로 대좌 군복을 입고 나와 연설을 하면서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렸고, 2015년 12월에는 모란봉악단을 이끌고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도착하여 공연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3년 뒤인 2018년 1월 15일 판문점 통일각에서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예술단 파견을 위한 남북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로 참석하였다. 한 달 뒤인 2018년 2월 6일 현송월은 본인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과 만경봉 92호로 다시 남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한국을 방문한 김정남과 김정은 동생 김여정,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 그리고 관람객들 앞에서 직접 올라 ‘백두와 한라는 내 조국’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따라서 2013년 8월 최악의 쓰레기 언론인 조선일보가 보도한 현송월 포르노 유출 총살설은 명백한 오보였다. 이런 류의 북에 대한 오보는 그저 반공밖에 모르는 조선일보와 족벌언론 그리고 수구세력들이 북조선을 악마화하는 데 이용해왔다. 이는 미제와 서방 놈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현송월 오보 사건이 증명하듯이 그들이 보도하는 대부분의 북에 대한 악의적 보도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다. 비단 현송월 총살설 뿐만 아니라, ‘김경의 독살설’,‘리영길 총살설’,‘북 주민 30%가 마약 중독자’,‘기쁨조 속옷 수입설’,‘탈북자 처형설’,‘장성택 벌칸포 처형’ 등 무궁무진하게 많다. 앞으로 우리는 이런 허위 사실을 믿어서도 신뢰해서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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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는 1879년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출신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의 트로츠키는 1897년 18살의 나이로 러시아의 전제 군주 체제에 반대에 싸우다 투옥당했다.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그는 1900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902년 탈출하여 유럽으로 망명했다. 그는 감옥 생활 당시 가명을 사용했는데, 그래서 그의 이름이 트로츠키가 되었다.

이후 영국에 간 트로츠키는 수도 런던에서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을 만났고, 초기에는 <이스크라 신문>에서 활동하다가, 레닌의 노선에 실망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면서 트로츠키는 혁명 운동의 지도부로 떠올랐다. 겨우 스물여섯의 나이에 그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혁명 과정에서 생겨난 민주적으로 선출된 노동자 위원회들 가운데 하나―의 의장으로 선출됐다. 1905년 혁명이 패배하자 제정 러시아 정부는 다시 트로츠키를 투옥했다. 감옥 생활 당시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더 깊이 공부하며 “연속혁명론” 사상을 발전시켰다. 1907년 트로츠키는 다시 시베리아를 탈출하여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고, 이후 프랑스와 미국 스위스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혁명 활동을 펼쳤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터지자 트로츠키는 종군기자로 전선을 취재하다 반전적인 논조 때문에 프랑스 당국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고, 스페인에서도 추방당했다. 그렇게 해서 트로츠키는 미국 뉴욕으로 갔다. 그러던 1917년 차르체제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트로츠키는 러시아로 돌아왔고, 그해 7월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레닌과 더불어 무장봉기를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고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1918년 3월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를 제외시켰다.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차르 체제 복원을 노리는 백군을 지원하며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트로츠키는 적국을 창설하였다. 적군을 창설한 트로츠키는 소규모의 군대를 수백만의 군대로 성장시켰으며, 이를 토대로 적백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은 1919년 볼셰비키가 창설한 제3 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도 영향을 미쳤다. 레닌의 건강의 악화되던 1923년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경쟁하게 되었다.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당내투쟁에서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 같은 인물들을 상대로 경쟁했지만,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해나가던 1927년에는 당에서 제명됐고 1929년에는 소련에서 추방당했다. 특히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주장한 일국사회주의론에 비판적이었다.

레온 트로츠키는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오스트리아의 빈을 떠돌며 스탈린의 탄압에 맞서 굴복하지 않고 반스탈린주의 투쟁을 벌였다. 그 시기 트로츠키는 <나의 생애>, <러시아 혁명사>, <스탈린주의 날조학>, <배반당한 혁명>, <파시즘, 스탈린주의, 공동전선>등을 집필했다.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우상화와 폭력성 그리고 당내의 민주주의와 1인 권력화를 비판했다. 1936년 스탈린의 대대적인 대숙청으로 가족과 대부분의 측근을 잃었고, 1940년에는 멕시코에서 생활하며, 멕시코의 유명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프리다 칼로의 집에서 숨어지냈다. 그러나 그해 8월 21일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멕시코 출신의 암살자에 의해 등산용 곡괭이에 머리를 찍혀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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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6-18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볼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트로츠키랑 그람시랑 진짜 너무 닮지 않았나요? ㅋㅋㅋㅋ 트로츠키는 좀 모질게 생긴 그람시같고, 그람시는 좀 낭창하게 생긴 트로츠키 같다는....

NamGiKim 2019-06-18 10:31   좋아요 0 | URL
미하일 칼리닌 얘기하시는 건나요?

NamGiKim 2019-06-18 10:31   좋아요 0 | URL
아니면 혹시 앤트맨의 행크 핌 박사? ㅋㅋㅋㅋㅋㅋㅋ

syo 2019-06-18 10:37   좋아요 0 | URL
행크 핌 박사 정말 닮았네? ㅋㅋㅋㅋ

NamGiKim 2019-06-18 11:05   좋아요 0 | URL
지난번 앤트맨 볼 때 마다 행크 핌 박사는 트로츠키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Holy Bible 2019-06-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는 굽게 판단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지혜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인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신명기 1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