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혁명(Cuban Revolution)

1400년대 후반 소위 신대륙을 발견한 인물로 알려진 제국주의자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쿠바를 찾은 이후부터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1898년 미서전쟁(미국과 스페인간에 일어난 전쟁)에서 스페인이 미국에게 패하자, 스페인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식민지를 포기했고, 1902년 쿠바는 형식적으로 나마 주권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얘기한 독립은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다. 미국은 쿠바를 정치 및 경제적으로 식민지화 했고, 쿠바는 미제국주의의 사탕수수 생산 기지가 되었다. 1945년 2차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면서 쿠바에서도 반제국주의에 눈을 뜨게 된 인물들이 생겨났는데, 이는 미제국의 경제적인 식민지배와 풀헨시호 바티스타의 반동적인 정권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반발이었다.

한국전쟁이 휴전 끝나기 1일 전인 1953년 7월 26일 변호사였던 피델 카스트로를 비롯한 쿠바의 혁명가들은 몬카다 병역을 습격했다. 체포된 피델 카스트로는 재판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반대여론이 거세지자 바티스타 정권은 그를 사면했고, 사면된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멕시코로 망명한 피델 카스트로는 체게바라와 같은 혁명 동지들을 만났고, 1956년 그란마호에 82명의 동지들을 태워 쿠바에 상륙했다. 그란마호의 상륙을 대기하고 있던 바티스타의 군대는 그들이 상륙하자마자 집중사격을 가했고, 첫 공격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그리고 피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포함한 20명만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그들은 정글 속으로 들어가 바티스타 군대에 맞선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바티스타 군대는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들은 폭격기까지 띄웠지만, 민심을 잡은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 혁명군은 점차 세력을 키워나갔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을 중심으로 혁명기지를 건설한 그들은 인근 마을에 병원시설을 짓고, 가난한 이들을 무상으로 치료해줬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혁명의 필요성을 잘 설득했다. 1957년 미국의 허버트 매튜스 기자는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서 카스트로와 인터뷰를 하고 미국의 주요 일간지에 이를 상세히 보도했는데, 이 보도 덕분에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는 독재에 항거하는 혁명가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정글에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나가던 혁명군은 1957년 부터 세력을 확장했고, 1958년에는 쿠바의 도시지역들까지 장악했다. 1958년 12월 체게바라를 선봉으로한 혁명군은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바티스타 괴뢰군을 대패시켰다. 이에 힘입어 피델과 체게바라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해 나갔고, 1959년 1월에는 수도 아바나를 점령하면서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 1956년 20명으로 시작했던 게릴라 투쟁은 3년만에 쿠바 전역을 해방시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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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폭풍 작전(Operation August Storm)

1945년 5월 7일 아돌프 히틀러를 이어 2대 총통이 된 카를 되니츠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300만 대군이 소련 전역에서 진격하며 시작된 독소전쟁은 4년간의 전쟁 끝에 소련의 승리로 끝이 난 것이다.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연합국에 대항하는 세력은 일본 밖에 남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중국과 미국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가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45년 4월부터 6월까지 전개되었던 오키나와 전투를 보면 일본군의 거센 저항과 끈질김에 직면해 있던 미군 또한 12,000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올 정도였다.(물론 일본군은 이에 6,7배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했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극심한 손실을 경험했던 미국은 일본으로 상륙하겠다던 ‘본토 상륙 작전’을 미루고 있었다.

1941년 4월에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던 소련은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4월 6일 일소 중립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독일과의 전쟁이 자신들의 승리로 끝이 나자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5년 7월 극동방면군 사령부 창설과 더불어 1945년 6월부터 유럽에 있던 소련군을 시베리아 열차를 통해 극동에 배치했다. 그리고 그 극동방면군 사령부에는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소련군이 6월과 7월 안에 병력 배치와 사령부 창설을 완료한 이유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시켰기 때문이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극동에 대규모의 군대를 배치하는 사이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의 사막에선 인류 최초의 핵폭탄이 터졌고, 핵실험까지 완료한 미국은 1945년 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는 사실을 안 스탈린은 만주에 있던 소련군들을 진격시켰고, 극동에 배치되었던 소련군들은 만주에 있던 일본 관동군을 상대로 전투를 개시하게 되었다. 8월 폭풍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8월 폭풍 작전은 1945년 8월 9일에 시작되었다. 만주와 소련 국경 전역에서 실행된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엔 대략 80개의 소총사단과 4개의 전차군단 그리고 3개의 항공군(대략 항공기 3개 사단 정도)등 총 15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고, 이는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가 투입된 규모였다. 그리고 여기엔 16,000명의 몽골 기병도 포함되었다.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일본군의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졌다. 소련군의 공격을 받자 통신이 마비된 일본군은 후퇴를 거듭하게 되었고, 소련군은 대규모의 전차 부대를 앞세워 삼면에서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가며 일본군을 압박했다. 대부분의 일본군들은 소련군의 기습을 받아 통신이 마비된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저항을 해보지도 못했지만, 하이라얼 요새의 일본군 부대나 북만주 최대의 일본군 방어 요새였던 아이훈의 경우는 조금은 달랐다. 일본군이 견고히 방어하고 있던 후터우 요새도 그러했다. 그러나 만주에 배치되었던 일본 관동군들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소련군의 전략 전술과 화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그리고 8월 16일에는 모든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이 명령을 하달 받은 일본군인들 중에는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은 이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후터우 요새를 방어하던 일본군이었고, 후터우 요새의 일본군은 8월 22일 소련군에 의해 요새가 함락될 때까지 저항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소련군은 진격을 계속 했다. 8월 말까지 만주 전역을 장악한 소련군은 만리장성이 있는 곳에서 멈추었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반도까지 진격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청진에 상륙한 소련군은 15일 까지 대략 4일간 전투를 치렀고, 21일부터 23일 사이에는 원산과 함흥 그리고 개성까지 진격해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소련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양보했던 사할린의 절반을 차지하기 위해 8월 18일 시무슈 섬을 공격했다. 사할린 공격에서 소련군은 대략 9천 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했고, 사할린 절반을 완전히 접수했다.

1945년 8월 9일부터 20일 까지 대략 11일 간 소련군은 대략 1만 2천 명의 전사자를 낸 반면에 일본군은 대략 2만 명에서 8만 3천 명 이상의 전사자가 속출하였다. 어쨌든 소련군은 8월 폭풍 작전에서 짧은 시간 동안 일본 관동군 부대를 섬멸하였다. 이는 독소전쟁 당시 반파시즘 전쟁에서 소련군의 쌓은 경험과 그것을 토대로 한 제병 협동 전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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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6-02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몰랐던 역사네요.
감사합니다. ^^

NamGiKim 2019-06-02 18:36   좋아요 1 | URL
독소전쟁사 쓴 데이비드 글랜츠의 논문이 ‘8월 폭풍 작전‘이라는 제목을 달고 번역되어 책으로 출간됐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유승현 2019-06-05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8월의 폭풍』역자로서 말씀드리자면 ˝8월의 폭풍˝은 작전명이 아니라 책 제목이었습니다. 소련군은 그러한 작전명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 글랜츠 본인이 자기 책 제목이 작전명으로 인식되어서 당황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책을 사서 읽어보시면 아실 일입니다.

NamGiKim 2019-06-05 11:01   좋아요 0 | URL
역자님께서 댓글 달아주실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5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송병헌 외 옮김 / 책세상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1919년 1월 15일 독일사민당 휘하의 자유군단에게 체포되어 이송되던 48세의 여성 혁명가가 자유군단의 어떤 병사가 휘두른 개머리판에 맞고,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이름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1차세계대전 때 부터 독일 사민당과 부르주아지에 대항하여, 사회주의자들의 투쟁을 이끌었던 혁명가 로자는 독일 사민당의 배신 자유군단이라 불리는 반혁명적 반동분자들에게 죽은 것이었다. 이후 그녀의 시신은 죽고난 뒤, 4,5 개월 뒤에 발견됐다.

그녀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있을 당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대립하며, 남긴 책이 한권 있다. 그 책이 바로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시작부터 끝까지 사회민주주의 이론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뚜아르뜨 베른슈타인에 대해 사상적으로 비판한다. 즉 베른슈타인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베른슈타인의 비판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보기에 자본주의 내에서 경제적인 개혁과 정치적인 개혁을 도달하여 사회주의를 달성한다는 베른슈타인류의 사상은 결과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사상에 입각하여 보았을때 타도해야할 자본가들과 부르주아지들에게 굴복하여 자본주의에 흡수되는 것이었고, 사회주의를 배신하는 행위였다.

그녀가 보기엔, 자본주의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선 에뚜아르뜨적 사상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라는 질병이 있다고 치자면, 베른슈타인의 개혁은 질병으로 생긴 종양만 제거하는 것일 뿐 질병 그 자체를 없애지 못한다는 얘기다.

로자의 책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현재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혁명가들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문제의식을 제공해주고, 왜 개량주의에 빠져서는 안되는 지를 알려준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20세 초 사민당은 혁명과 진보를 배신했었다. 1914년 유럽에서 제국주의 국가들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각국의 사민당들은 ˝조국 방위˝라는 개념을 내세워 자국의 노동 계급을 제국주의 전쟁의 총알밭이로 내몰았다. 그리고 1918년 독일에서 11월 혁명이 발생했을때, 독일 사민당은 ‘자유군단(후에 나치독일의 군대가 될)‘이라는 반동적인 집단을 동원하여 혁명을 무마시켰다.

1919년 1월 4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로자가 죽은 지 100년이 넘었다. 하지만, 로자가 지적했던 대로, 아직도 자본가들과 부르주아지들은 사적소유에 기반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본의 축적을 진행하고 있고, 사적소유가 사실상 없는 것과 다름없는 프롤레타리아트들은 하루하루 먹고 살기 급급하다. 따라서 이런 현실속에서 로자의 책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사회주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해준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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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아돌프 히틀러는 1889년 오스트리아에 있는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태어났다. 위로는 이복형들과 3명의 친형이 있었지만 친형들은 히틀러가 태어나기 전에 모두 사망했기에, 어린시절의 히틀러는 형제가 없이 자랐다. 그의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술꾼에 무례하고 권위주의적이고 흉폭했기에, 어린 히틀러에게 폭력을 자주 휘둘렀고, 이는 히틀러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초등학생 시절의 그는 수학을 빼놓고는 성적이 좋았고,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아버지는 아돌프 히틀러가 자신과 같이 공무원이 되기를 희망했지만, 아돌프는 그러한 아버지의 희망과는 달리 열렬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히틀러는 16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올라와 예술가의 꿈을 실현하고자 미대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이때부터 히틀러는 방황하면서 일정한 목표 없이 살았고, 1909년 12월 까지 노숙 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히틀러는 화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꾸준히 ‘아돌프 히틀러의 자화상‘, ‘성모마리아와 유년 시절의 예수(1913)‘, ‘바다의 야상곡(1913)‘ 등의 다수의 그림들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히틀러의 인생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는데, 제1차 세계대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히틀러는 독일군대에 자원했고, 최전선에 배치되었다. 1913년 당시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군의 징집을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슬라브 인들을 싫어했던 것과, 순수 독일인이라는 생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1914년 히틀러는 최초로 독가스가 사용되었던 이프르 전투가 일어났던 지역에 배치되었고, 수많은 독일 병사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 히틀러는 1914년 말에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상병으로 진급했으며,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 그는 1916년과 1918년에 전투에서 부상당하는데, 1916년에는 그 유명한 솜 전투에서 부상당했었고, 1918년에는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잠시 실명하기도 했었다. 잠시 실명했던 눈은 1918년 11월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에게 항복했던 시점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몇 날 며칠을 울었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에도 히틀러는 계속 군에 남아있었다. 그는 군에 남아 정치 활동을 감시하는 일을 했었지만, 독일 노동자당에 잠입했다가, 노동자당 사람들이 하는 연설에 감명을 받았고, 1919년 9월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 Partei, DAP)에 입당했다. 이로써 히틀러는 정치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1920년 초, 독일 노동자당 선전부 책임자까지 올랐던 히틀러는 1920년 2월 나치당을 창당하였고,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0월에는 당내 경호 조직인 돌격대(SA)를 조직하였고, 1922년에는 800명의 돌격대를 앞세워 사회주의 진영 노동자와 노동조합원들과 충돌하여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1923년 11월 히틀러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사례에 감명을 받아 뮌헨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독일군에게 진압당했고, 결국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재판과정에서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 능력을 토대로 재판관들을 매료시켰고, 원래 받아야 했던 형량보다 적게 받았으며, 6개월 이내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감옥생활 도중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였다. 나의투쟁 제1권은 1925년에 출간되었고, 제2권은 1926년 12월에 출간되었으며, 그의 자서전은 그가 집권하던 시기 독일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그리고 나치 친위대라고 할 수 있는 SS는 1925년 쯤에 창설되어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나치당의 활동은 지지부진하다가 어떤 결정적인 사건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했는데,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이 그런 기회를 제공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하여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빠졌다. 1924년에 등장한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그 빛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터지며 독일이 받아야 했던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28년 까지만 해도 총선 득표율이 2.6%였던 나치당은 1930년 들어 대략 20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해 9월에 치러진 제국의회 선거에서 18.3%의 득표율을 얻으며 제2의 당으로 부상했다. 1931년 11월 헤센 주의회 선거에서 37.1%의 득표율을 얻은 나치당은 당시 독일의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합친 것 보다 높은 지지율을 얻게 되었고, 1932년엔 아돌프 히틀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독일 총리직에 오르게 되었고, 그는 독일 의회를 해산하였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재무장 정책을 수립하였고, ‘국회 의사당 방화사건’을 빌미로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원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며 숙청작업을 진행했다. 또한 독일 내에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폭력을 휘둘렀고, 이에 따라 독일 내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나치로부터 대대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1933년 10월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한 히틀러는 1934년 6월 30일 전 나치 돌격대(SA)의 대장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나치 돌격대 지휘관들과 나치당의 반대파들을 향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숙청을 감행한 그날 에른스트 룀을 포함한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고 1934년 8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총통의 자리에 올랐는데, 당시 국민의 90% 이상이 이를 지지했다. 1935년 3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병력 증강과 징병제 도입을 선포했고, 1935년부터 나치독일은 군비를 대폭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했다. 더 나아가 1936년 3월에는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했고, ‘뉘른베르크법’을 선포하여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당시 히틀러는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경제를 재건하였다. 이는 미국의 뉴딜 정책 만큼이나 성공적이었으나 이를 군사주의를 강화하는데 이용하였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한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올림픽을 세계로부터 알리는 데 이용하였고, 그 효과는 고무적이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1936년과 1937년 일본과 이탈리아와 반 코민테른 협정을 체결하였고, 1938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다.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와 나치당은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을 일으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전역에 있는 유대인 상점과 시민들을 공격하여 야만성을 보여주었다.

히틀러의 영토 팽창은 라인란트 지방과 오스트리아에서 끝나지 않았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고, 그해 8월에는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9월에 폴란드 침공을 개시하였다. 전격전(Blitz Krieg)이라는 전략전술을 구사한 히틀러의 독일군대는 폴란드군의 전투기 부대와 기병대를 궤멸시켰고, 수도 바르샤바를 단기간에 함락시켰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포고하였고,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 3월 히틀러는 노르웨이를 침공했고, 4월에는 덴마크를 침공했으며, 5월 10일에는 벨기에와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를 침공했다. 노르웨이와 덴마크,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차례대로 항복했고, 수십만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덩케르크에서 대대적인 철수작전을 감행하여 영국으로 후퇴했으며, 1940년 6월 14일 독일군은 파리에 입성하였다. 프랑스까지 점령한 독일은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본토 항공전을 개시하여 수도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대도시들을 초토화 시켰고, 수 천대의 독일군 비행기들이 영국의 대도시와 군사기지를 폭격했다. 영국 공습에 나선 히틀러는 1940년 9월 이탈리아와 일본과 ‘3국 동맹’을 체결하였고, 1941년에는 북아프리카에 군대를 파병하였으며, 1941년 4월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까지 점령해버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벌인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을 굴복시키지 못했고, 그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전선으로 보냈으며,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개시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300만 이상의 병력과 수천대의 전차와 항공기를 동원한 히틀러의 소련 침공은 초반에는 승승장구했다. 1941년 9월에는 발트 삼국과 레닌그라드까지 진격했고, 그해 11월 말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외각 까지 진군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겨울을 대비하지 못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모스크바 진격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다. 거기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에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서 히틀러 또한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미국까지 유럽의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2차 세계대전의 정세는 히틀러에게 불리해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히틀러의 독일군은 1942년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를 점령했지만, 1943년 2월 20만 대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하면서 패배로 끝났고, 그해 7월 마지막 진격인 쿠르스크 전투도 소련군의 T-34 물량 공세에 밀리면서 패배했다. 그와 더불어 1941년 롬멜 장군이 파견된 아프리카 전선도 1943년 5월 튀니지까지 함락되면서 독일군의 패배로 끝이 났고, 그해 7월 영미 연합국이 시칠리아 섬과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게 되면서 독일군은 모든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밀렸다. 이렇게 2차 세계대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히틀러와 나치독일은 ‘최종 결정(Final Solution)’이라 하여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폴란드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같은 수많은 강제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이 진행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치는 1945년 전쟁이 끝날 때 까지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과 500만 명 이상의 전쟁 포로 및 반나치인사 동성애자, 장애인, 집시 등을 수용소에서 학살했다.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아프리카 전선에서 연합국에게 밀린 독일군은 1944년 6월 영미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이 전개되면서 패색이 짙어졌다. 그 과정에서 몇몇 나치 인사들이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1944년 8월에는 프랑스의 파리가 해방되고, 45년에는 벌지 전투에서 패배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도 소련군에게도 패전을 거듭했다. 영미 연합국은 1942년부터 독일의 도시를 공습했는데, 1945년이 되었을 당시에는 대부분의 독일 도시가 연합국의 공습을 받으면서 초토화 되었다. 1945년 4월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라인강에서 만났고, 독일군은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 진입하면서 패배했다. 베를린에 진입한 소련군은 독일의 국회의사당에 붉은 깃발을 꽂음으로써 전쟁을 끝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되길 꺼려했던 히틀러는 베를린에 있는 지하 벙커에서 아내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결국 독일군 잔존병력과 히틀러의 뒤를 이은 카를 되니츠 제독은 연합국에게 항복했다. 1939년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영광을 외치며 일으킨 전쟁은 처참한 패배로 끝이 났고, 제국주의는 왜 망할 수밖에 없는 지를 히틀러와 파시스트 무리들이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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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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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Marx in Soho>를 읽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1990년대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를 보고 기뻐 날뛰던 미국과 자칭 자유주의자(라고 읽고 수꼴이라 읽는다.)들의 논리를 철저하게 반박한 책이자, 미국 전역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 연극 대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여러번 지적하듯이 1991년 걸프전쟁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소련의 해체를 지켜본 미국과 미국자본가 그리고 자칭 자유주의자 세력들은 승리감에 도취하여 마치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무너진 것인 냥 대서특필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사회주의 세력과 국가는 냉전시기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이었고, 그런 소련의 해체는 그로 미국과 자본주의의 승리였던 것이다. 소련 해체 이후 오만함에 빠졌던 미국 자본가들의 행태에 대해 항상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워드 진은 그런 논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들이 논리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이 책에서 밝히는데, 그 밝히는 방법이 만약 현재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 미국 뉴욕에 가게 된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책에 나온 마르크스에 따르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하며,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숙청을 감행하며,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던 통치자가 다스렸던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분명 이상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사형제 철폐를 외쳤고, 그가 제시한 공산주의적 목표는 개인의 자유, 동정심 있는 인간존재로서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적 체제의 종말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며, 자본주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위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미국에 대해 얘기하는데 이 역시 미국의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주의로부터 승리했다고 하는 1990년대의 미국은 500명도 안 되는 개인이 2조 달러의 기업자산을 주무르고 있고, 뉴욕에 있는 수많은 노숙자들이 구걸하며, 노스캐롤라이나의 어떤 닭고기 공장에선 공장주가 문을 잠그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다 수십 명 단위의 노동자들을 죽이고, 열악한 사회복지로 인하여 1년에 4만 명 이상의 미국 아이들이 돌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누구로부터 승리했는지를 묻는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승리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마지막에 명언을 남기며 연극을 마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도록 합시다.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나무와 풀, 즐거운 가정, 몇 시간의 노동과 그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줍시다. 그리고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인간은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으나까요. 자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군요. 내가 다시 돌아와 여러분의 심기를 건드려서 화가 나는가요? 그러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어것은 재림이라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는 했습니다.”

 

출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p.134~35

 

정리하자면, 이 책 혹은 연극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론과 사회상이 실패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해체만 보고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거지 맑스가 제시한 세상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필자는 소련의 진보성과 이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소련의 좋은 점은 배우되, 한계를 비판할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튼 하워드 진이 집필한 이 책은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마르크스의 연극을 통해 제시해 줬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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