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 역사 모노드라마
하워드 진 지음, 윤길순 옮김 / 당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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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의 저자로 유명한 하워드 진(Howard Zinn)이 쓴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Marx in Soho>를 읽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1990년대 동구권과 소련의 붕괴를 보고 기뻐 날뛰던 미국과 자칭 자유주의자(라고 읽고 수꼴이라 읽는다.)들의 논리를 철저하게 반박한 책이자, 미국 전역에서 연극으로도 공연된 연극 대본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도 여러번 지적하듯이 1991년 걸프전쟁에서의 승리와 더불어 소련의 해체를 지켜본 미국과 미국자본가 그리고 자칭 자유주의자 세력들은 승리감에 도취하여 마치 사회주의가 실패하고 무너진 것인 냥 대서특필했었다. 그들의 입장에서의 사회주의 세력과 국가는 냉전시기 미국과 세계를 양분했던 소련이었고, 그런 소련의 해체는 그로 미국과 자본주의의 승리였던 것이다. 소련 해체 이후 오만함에 빠졌던 미국 자본가들의 행태에 대해 항상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하워드 진은 그런 논리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그들이 논리가 어떻게 잘못됐는지를 이 책에서 밝히는데, 그 밝히는 방법이 만약 현재 마르크스가 살아 돌아와 미국 뉴욕에 가게 된다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책에 나온 마르크스에 따르면 냉전시기 미국과 경쟁하며,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총살하고 숙청을 감행하며, 혁명 동지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던 통치자가 다스렸던 소련의 스탈린 체제는 분명 이상적 사회주의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사형제 철폐를 외쳤고, 그가 제시한 공산주의적 목표는 개인의 자유, 동정심 있는 인간존재로서 자신을 계발하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적 체제의 종말은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의 실패가 아니며, 자본주의의 승리도 아니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소위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미국에 대해 얘기하는데 이 역시 미국의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그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주의로부터 승리했다고 하는 1990년대의 미국은 500명도 안 되는 개인이 2조 달러의 기업자산을 주무르고 있고, 뉴욕에 있는 수많은 노숙자들이 구걸하며, 노스캐롤라이나의 어떤 닭고기 공장에선 공장주가 문을 잠그고 여성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다 수십 명 단위의 노동자들을 죽이고, 열악한 사회복지로 인하여 1년에 4만 명 이상의 미국 아이들이 돌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하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누구로부터 승리했는지를 묻는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승리한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마지막에 명언을 남기며 연극을 마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맙시다. 그냥 이 지구의 엄청난 부를 인류를 위해 쓰자고 합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도록 합시다. 식량과 의약품,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나무와 풀, 즐거운 가정, 몇 시간의 노동과 그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줍시다. 그리고 그걸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묻지 마세요. 인간은 누구나 그럴 자격이 있으나까요. 자 이제 가야 할 시간이군요. 내가 다시 돌아와 여러분의 심기를 건드려서 화가 나는가요? 그러지 말고 이렇게 생각하세요. 어것은 재림이라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는 했습니다.”

 

출처: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p.134~35

 

정리하자면, 이 책 혹은 연극은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론과 사회상이 실패하지 않았고, 얼마든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각에서는 소련의 해체만 보고 사회주의가 실패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사회주의로 가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거지 맑스가 제시한 세상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필자는 소련의 진보성과 이상을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제는 소련의 좋은 점은 배우되, 한계를 비판할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튼 하워드 진이 집필한 이 책은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마르크스의 연극을 통해 제시해 줬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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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김일성을 맹목적으로 찬양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닙니다. 그저 그의 항일운동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집필했습니다.)

 

김일성은 1912년 4월 15일 평양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였고, 아버지와 어머니 둘다 기독교 신자였다. 김성주는 3.1운동 이후 출옥한 그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923년부터 1925년 까지 외조부의 교회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1926년 6월 그의 아버지 김형직이 사망했는데, 아버지의 사망을 전후로 해서 학업을 중단하고, ‘타도 제국주의 동맹’을 결성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1927년 김성주는 동만주의 대도시 지린에 있는 유원중학에 입학했고, 그 시기 블라디미르 레닌이 집필한 ‘제국주의론’을 읽었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은 ‘조선공산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이때 일본 측으로부터 체포당해 투옥되었다. 출옥 후에는 이퉁이나 화이떠 현 등의 농촌지역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청년들과 교제했다. 당시 김일성은 리종락이라는 사람이 결성한 조선혁명군에 참가했는데, 1931년 리종락이 체포되면서 그의 부대가 궤멸되어 버렸고, 체포를 면한 김일성은 그 시기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1931년 9월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했다. 중국과 일본간의 전투가 격해지던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에서 구국군 유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 김일성은 자신이 창설한 부대를 이끌고 통화의 조선혁명군 사령 양세봉을 방문하여 민족주의자의 군대와 연합을 시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김일성은 1933년 2월 왕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왕칭유격대에 합류했고,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3년 5월 반민생단 사건이 투쟁이 전개되면서, 많은 조선인 당간부들이 일제가 만든 민생단 단원으로 몰려 체포, 구속 처형당했고, 이후 김일성도 왕칭유격대대에서 해임되었다. 그래도 김일성은 1933년 9월 동닝 전투에서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를 동원하여 이 도시에 대규모의 공세를 퍼부어,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인 스중헝을 구하기도 했었기 때문에 반민생단 사건 당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1935년 김일성이 왕칭으로 다시 돌아온 뒤, 부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었고, 김일성은 정치위원으로 부활했다. 1936년에는 동북항일연군 제2군이 결성되었고, 김일성은 신설된 제3사의 사장에 임명되었다.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의 동북항일연군 부대는 국내에 침투하여 어느 지역에 대한 습격에 나서는 데 그게 바로 신화화 혹은 전설이 된 보천보 전투다.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부대는 먼저 전화선을 절단한 후 주재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주재소를 습격하여 무기고에서 각종 총기와 탄약 수백 발을 탈취했으며, 동시에 면사무소와 우편소, 농사시험장등 주요 관공서도 공격했다. 보천보가 습격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제 당국은 혜산진 경찰서 경찰대 31명과 국경수비대 60명 그리고 헌병대 8명으로 토벌대를 꾸려 게릴라 부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로 인한 김일성 부대의 피해도 적잖았다. 사실 보천보 전투에서 주재소를 습격했을 당시 일본 측 전사자는 2명이었는데, 한명은 요리사였고, 다른 한명은 오발로 죽은 두 살짜리 아이였다. 이것과는 별개로 김일성의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전투를 치렀는데, 그 과정에서 일본군 7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 보천보 전투 이후 동아일보는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김일성은 조선의 영웅으로 등극하였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일제 측의 탄압도 심해졌다. 1938년부터 일본은 매우 조직적으로 만주에 있는 유격대를 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때 김일성의 제2방면군은 흩어져서 이른바 ‘고난의 행군’에 나서야 했고, 1938년 11월부터 1939년 3월 까지 100일 간 일본군의 추적을 따돌리며 행군했다. 히틀러가 폴란드 침공을 하고난 지 1달이 지난 시점인 1939년 10월 일본의 관동군은 또 다른 토벌작전을 개시했고, 이번에는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유격대를 막다른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김일성 부대는 1940년 3월 가장 혁혁한 성과를 올리는데 그게 바로 훙치허 전투다. 당시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의 대장 마에다는 “김일성의 목은 내가 벤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다녔다. 그는 “김일성 부대가 허룽현 훙치허의 일본인 목재소를 습격하여 쌀을 탈취해갔다.”는 신고를 받은 뒤 경찰 및 군부대를 출동시켰는데, 매복해있던 김일성 부대에게 공격당하여 부대가 전멸당한 것이다. 김일성 부대는 훙치허 전투에서 대략 100~120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고, 김일성의 유격대는 일본군 토벌대 측의 경기관총 5정, 소총 100여 정, 탄알 1만여 발, 무전기 1대를 노획했다.

 

1940년 7월 김일성 부대는 340명 규모의 부대로 확대되었지만, 계속되는 일본군의 토벌 때문에 1940년 10월에는 소부대로 나누어 만주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0년 말에는 사령부를 선두로 부대 전체가 소련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주둔했다. 하지만 소련은 1941년 4월 추측국 일본과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고, 따라서 소련은 만주에서 일본과 충돌할 가능성을 줄여야 했고, 이 때문에 김일성 측의 유격대는 소련 영내의 야영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42년 일본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패하자 소련은 항일유격대원들을 훈련시킬 계획을 세웠고, 그해 8월 소련은 제88특별여단을 만들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제88특별여단에 편성되었고, 항일전을 치를 날을 소련에서 준비했다. 이때 같이 활동했던 인물로는 최용건, 김책등이 있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소련은 그해 7월 대일전쟁에 대비해 정보요원을 차출했고, 김일성과 최용건을 비롯한 지도급 인사들은 만주와 조선에 투입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이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의 관동군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여러지역들을 해방시켰지만, 정작 김일성 측 부대는 전투에 투입되지 않고,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렇게 하여 김일성은 대일전에 제대로 참전해 보지도 못했고, 1945년 9월 19일 김일성은 제88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참고문헌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하루끼, 창비, 2014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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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사
서진영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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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01일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은 수십만이 모인 군중 앞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949년에 일어났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은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은 냉전초기에 접어든 미국사회에게 크나큰 충격을 주었고, 역으로 미국사회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켰다. 당시 미국의 공화당측 정치인들은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며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과 민주당에게 강력한 책임을 물었고, 미국사회는 매카시즘이라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극에 달했다. 따라서 미국 민주당과 트루먼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던 공화당 세력과 반공주의에 심취했던 미국인들은 중국이 공산화 되었다는 현상에만 집중했을 뿐,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갖지 않았다. 미국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일까?

 

1, 19세기 중국과 신해혁명

 

책의 시작은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고도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부터 시작한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청나라 군대를 굴복시킨 서구 열강들은 1841년 남경조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을 청나라에게 체결하게 하고, 승리자 영국은 홍콩을 점령한다. 이를 계기로 중국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의 침략이 확대되었고, 항구를 기점으로 서구 열강들의 자본이 중국대륙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서구 열강들이 중국 대륙을 잠식해가는 과정에서 중국 내부에선 혁명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게 바로 태평천국운동이다. 1850년대에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초반에는 많은 인원들을 끌어 들였지만 조직 내에서 갈등을 겪으며 분열되었고, 1864년에 지도부가 체포되어 처형당하면서 끝난다. 태평천국운동 이후 청나라에선 개혁의 목소리가 나왔고 동치중흥과 양무자강운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중국 전통사회의 기본적 가치와 제도에 대한 개혁이 아닌 서구의 선진기술문명의 수용하는 쪽의 운동에 가까웠고, 이홍장과 같은 청나라 관료들이 중심이 된 운동이었다. 결국 양무자강운동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에게 패하면서 추진력을 잃게 되었다. 1898년에는 강유위(캉유웨이)라는 인물이 이끌었던 변법운동이 발전하여 입헌군주제 체제가 실현될 뻔 했으나 서태후의 지원을 받은 보수파의 궁정쿠데타로 인하여 이 또한 몰락하게 된다. 중국 대륙에 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침탈이 극심해지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의화단 사건이 일어났지만,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을 파견하여 수도 베이징을 단숨에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이 또한 진압 당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위기감을 느낀 중국의 관료들은 개혁을 실행한다.

하지만 개혁이 청조의 운명과 중국의 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1911년 중국에선 혁명 지도자 손문의 주도로 신해혁명이 일어났다. 전국에서 지방자치운동과 혁명운동이 전개되면서 191111월 말에는 청조가 와해되었고, 1912년 새해에는 손문을 지도자로 하는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2. 중국 공산당의 창당 배경과 제1차 국공합작

 

신해혁명을 시작으로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는 명목상으로만 민국이었고, 사실상 위안스카이와 같은 군벌들 집합체였다. 이 과정에서 위안스카이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체제가 등장했고, 더 나아가 군벌세력인 위안스카이는 공화제까지 폐지하면서 전제정치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까지 보였다. 1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이후 중국 대륙은 군벌들 간의 분쟁이 일어났고,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중국 대륙에 대한 일본제국의 경제적인 점령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선 의식 있던 지식인 진독수를 중심으로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고, 1차세계대전이 종결된 191954일에는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일본제국주의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항일 운동은 반제반봉건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5.4운동은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났고, 1차대전 이후 서방 국가들에게 실망한 지식인들은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데 특히나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이 그러했다. 이를 기점으로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도 성장했고, 아나키즘 및 여러 진보계열 운동들이 더욱 활발해졌다. 1919년 혁명 러시아에서 창설된 코민테른은 중국의 사회주의 운동을 지원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19217월 중국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이 창설된다. 마오쩌둥 또한 중국 공산당을 창설하는데 기여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아시아의 상황에선 민족해방운동이 중요하다 생각했다. 따라서 코민테른은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과의 합작을 수립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중국 공산당도 국민당과 합작하여 민주주의 연합전선을 수립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또한 국민당의 지도자였던 손문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제1차 국공합작을 실행하게 된다. 이에 힘입어 1926년 중국 국민당은 군벌세력 무력화를 위한 북벌을 단행하게 되고, 1927년에 제1차 북벌을 마무리 한다.

 

하지만 1925년 손문이 사망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도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된다. 손문 밑에 있던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는 19263월 중산함 사건을 일으켜 중국 광저우 지방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산주의자들 소탕에 나섰다. 북벌과 동시에 상해를 비롯한 몇몇 지역을 접수한 장제스의 국민당은 19274월에 공산당원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및 혁명가들이 살해된다. 또한 장제스가 난징을 수도로 하는 난징 정부를 구축하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와해된다.

 

3. 1차 국공내전과 대장정

 

1927년 공산당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장제스는 제2차 북벌을 감행하는 동시에 공산당 토벌에 나선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에 맞서 구추백과 같은 노동자 혁명 세력들은 도시 중심의 노동자 투쟁을 전개했지만 27년의 남창봉기를 시작으로 추수봉기, 광주봉기에서 처참한 실패를 맛보았고, 도시 위주의 소비에트는 결국 1928년 중국 국민당군에게 무자비하게 진압 당했다. 결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주장한 농촌 혁명을 기반으로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국민당에 맞서 투쟁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소비에트들은 자체적으로 진보적인 정책들을 실행하였다. 또한 1928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의 홍군은 정강산을 중심으로 토지혁명을 추진하면서 농민들을 동원했고,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맞서 투쟁했다. 이후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되면서 1931년엔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수립된다.

 

하지만 농촌혁명근거지가 확대됨과 동시에 장제스의 공산당 토벌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이에 맞서 마오쩌둥의 홍군은 정강산 투쟁이라 하여 1928년 부터 게릴라전으로 맞섰다. 장제스의 국민당군은 이들을 토벌 및 섬멸하기 위해 193010월부터 193410월까지 총 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포위공격을 감행하였고, 1931918일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군사적으로 점령해 나갔음에도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나섰다. 심지어 장제스는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1933년 나치독일의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했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하기 까지 했다. 어쨌든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토벌로 인하여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10월 강서소비에트를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소비에트를 탈출한 10만 명의 홍군은 국민당군에 맞서 대장정을 전개하게 된다. 대장정 당시 홍군은 193410월부터 19359월까지 대략 10000km를 걸었고, 온갖 자연환경과 싸웠으며, 계속되는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국민당군과 추격해오는 수백 대의 전투기에 맞서 싸웠다. 11개의 성과 18개의 산맥을 통과했던 홍궁 정규군은 대장정이 끝날 때 쯤 8천 명 만이 살아남았다. 대장정을 감행했던 마오쩌둥과 홍군은 대장정이라는 신화를 창조해냈고, 이 사건은 중국 혁명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었으며, 마오쩌둥이라는 인물이 중국 공산당에서 보다 확고한 위치에 올라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은 계속되는 토벌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하여 점차 민심을 잃었고, 이는 결국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4. 시안사건과 중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부터 중국 대륙을 점령해 나가던 일본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침략에도 불구하고 장제스가 공산당 토벌에 앞장서자 장제스 밑에 있던 일부 부하들은 그를 구금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1936년에 일어난 시안사건이다. 이후 풀려난 장제스는 중일전쟁 한참이던 193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게 된다. 이때 마오쩌둥의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에 편입됐다.

 

하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은 이미 노골적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19377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중국 전역에서 진격하였고, 193712월 중국 국민당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을 자행함으로써 30만 명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일본군은 19383월 태아장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제외한다면 중국 전선 곳곳에서 승승장구하여 193810월엔 국민당의 임시수도인 우한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에 승승장구했던 일본은 전쟁이 길어지자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고, 1941년에 태평양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교착상태는 더욱 심각해졌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이끄는 홍군 또한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19408월부터 1941년까지 백단대전을 단행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백단대전에 놀란 일본은 화북과 화중지역을 치안구와 비치안구로 나누고 치안구에서 공산당을 색출하는 작업을 강화했다. 이유는 중국 공산당군이 게릴라전으로 일본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 공산당측을 토벌하기 위해 3광작전을 전개하여 모조리 전멸시키는 전멸작전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처럼 공산당은 화북 지역을 포함한 지역에서 세력을 급속도로 확대해 나갔는데, 이에 불안감을 느낀 국민당은 공산당측의 신사군을 포위 공격하여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는 치졸한 짓을 하기도 했다.

 

1941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킴에 따라 미국은 중국 국민당에 대한 지원을 늘렸고, 운남 곤명성에 플라잉 타이거스와 같은 미국 공군부대도 보냈으며, 랜드 리스라 하여 13억 달러나 되는 물자를 제공했다. 그리고 미국은 조지프 스틸웰이라는 장군을 장제스의 참모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부터는 중일전쟁 또한 연합국이 참가하는 세계전쟁의 일부가 된 것이다.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패배를 거듭했고, 1943년 이후 부터는 중국 전선에서도 진격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일본은 1945815일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 하게 됐고, 중국 또한 2차대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5. 국공내전과 공산당의 승리

 

1945815일 일본은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다. 1937년부터 1945년 까지 약 8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중국은 대략 150만 명의 군인과 1천 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전쟁의 공포는 2차대전이 승리로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이유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갈라져 다시 전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지쳤던 마오쩌둥과 장제스는 국민당과 협상 및 협력 그리고 평화적인 정부 수립을 추구했고, 초반에는 이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또한 미국은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조지 마셜 장군을 특사로 파견했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이견조정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국제 정세는 점차 미국과 소련 혹은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의 대결로 변모해갔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국공합작은 점차 분열되었던 것이다. 19465월 미군사고문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정예부대를 대거 투입하여 만주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했고, 19467월부터는 공산당의 거점지역에 대한 국민당군의 대대적인 군사적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났다. 19467월부터 12월 사이 중국의 국민당군은 공산당이 지배하던 수많은 해방구 영토를 점령했고, 19473월에는 인민해방군의 중심지인 연안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국민당군에겐 크나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극심한 부정부패와 빈약한 민중의 지지였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비해 민심을 바로잡지 못한 국민당군은 1948년에 들어서면서 군사적인 규모면에서 중국 공산당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또한 부정부패와 전쟁 수행으로 인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국민당 정부의 붕괴를 재촉했다. 심지어 194810월 미국의 조지 마셜 장군은 미국이 아무리 많은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한다 하더라도 현 국민당을 구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국민당 정부가 이와같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을 때 중국 공산당은 19489월에 전면적인 군사적 공세를 전개했다. 1941131일 중국 공산당군은 베이징을 점령했다. 19494월에는 중국 공산당군이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남경을 함락시켰으며 5월 말에는 상하이까지 점령했다. 승기를 잡은 중국 공산당군은 남하를 계속하여 194912월에는 대만을 제외한 중국 전 지역을 해방시켰다. 1949101일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6. 맺음말: 중국혁명은 반제국주의 항쟁이다

 

아편전쟁으로 시작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로 끝이 난 중국혁명은 그 후에 설립될 체제가 어떤 체제였든 간에 지속되는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침탈에서 시작되어 사회주의 국가 수립으로 나선 반제국주의 항쟁이었다. 20세기 초 중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소개될 당시 사회주의 노선을 놓고 중국 공산당 내에서 갈등이 있었지만, 마오쩌둥은 신민주주의론이라 하여 중국 현실에 맞게 적용하여 반제국주의 항쟁을 전개했다. 물론 신민주주의론은 정통석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서 보면 분명 바로잡아야할 사상일 수도 있지만, 중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선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기에 적합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 혁명은 도시 혁명에서 보단 농촌 위주의 소비에트 건설을 통해서 민중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반혁명분자인 장제스에 맞서 저항할 수 있었다. 그들은 게릴라전 위주의 전략전술로 국민당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고, 궁극적으로 국공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으며, 부정부패한 장제스 정권에 왜 맞서야 하는 지를 민중들에게 잘 접근하였다.

 

‘1949년 이후 중국에 어떤 사회가 등장했는가?’와는 별개로 중국 혁명사는 분명히 많은 이들에게 귀감을 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서방제국주의의 침탈 속에서 피어오른 혁명과 공산당 건설, 국민당에 맞선 영웅적인 투쟁과정은 읽는 이에게 나름의 감동과 흥미를 유발시킨다. 무엇보다 이 책은 1990년대 초에 기존의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집필된 책이기에 일반적인 중국사 서적보다 더욱 재밌게 읽힌다. 많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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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주의에 대한 오해

사회주의에 대해 음해하는 자들은 ‘사회주의는 가진자에 것을 뺐는 사상‘이다라고 이상한 잣대로 왜곡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은 가진 것을 뺏는 사상도 독재를 추구하는 사상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 집단이나 개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어떠한 견제세력 없이 흔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인민들 누구나가 일한 만큼 받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고 능력에 따라 일하며, 고도의 착취를 당하지 않고, 계급없는 사회라는 목표를 향해 이행되는 과도기적 단계다. 그 나머지 시간엔 문학을 읽고, 운동을 하고, 시를 쓰며 사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다. 따라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추구했던 세상은 모두를 다 똑같게 만들지도 똑같게 하는 세상도 아니었다. 이론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0세기 사회주의 민족해방투쟁이나 혁명 당시,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세력들이 지주나 자본가와 같은 대 부르주아 세력들의 재산을 몰수했던 것은 절대로 이유없이 몰수한 것이 아니다. 가진자들은 자신들의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한 대가를 치른 것이다. 즉 그 시기에도 자본가라고 해서 무작정 몰수만 했던 것이 아니다. 어떤 사회든 국가를 유지하는데 있어선 돈이 필요하다. 근데 모든 부자들의 재산을 어떤이유없이 뺏었다는건 그냥 반공분자들이 만들어낸 피해망상적인 선전선동일 뿐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회주의에 대해 오해를 하고있고, 한편으로는 매우 몰지각하다. 이게 다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반공주입식 교육과 미제국주의자들의 선전선동 때문이다. 지금같이 자본주의가 겨우 살아남은 세계에선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다시 공부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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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5-12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해‘일까요? 사실 대충이라도(혹은 대단히 정확하게) 알고 있지만 모른 체 하고 있거나, 혹은 진짜 사회주의가 어떤 것인지 따위는 애시당초 중요치 않기 때문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게 아닐까요?

어차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빨갱이‘라는 굴레를 씌울 수 있는 능력일 뿐인데요.

NamGiKim 2019-05-13 00:23   좋아요 0 | URL
모르거나 양심이 없거나 아니면 수꼴이 되어 흑화했거나 이것들 중에 하나겠죠.
 

CIDG(Civilian Irregular Defense Program) 계획

1960년대 초 미국의 존F케네디 대통령은 남베트남에 있던 군사 고문단의 수를 증강했다. 그들은 남베트남 정권의 군대를 지원했고, 베트콩에 맞서 싸우도록 했다. 또한 미국은 베트콩에 맞서 소수민족들을 포섭하는데, 그게 바로 라오스쪽의 몽족과 베트남 중부고원 지대의 몬타냐드족(영어로는 montagnard 에데족, 참파족, 바나족)이라 불리는 고산족이었다.

베트남 역사를 보다보면 그곳은 근대까지만 해도 기존에 참파왕국의 존재하던 곳이었고, 베트남 사회하고는 좀 거리가 있던 사회였다. 그러다 보니 베트남인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쪽 영토가 베트남 영토로 편입된 것은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남진정책을 하며 참파 왕국의 정복을 마친 18-19세기 쯤이었다. 따라서 19세기 프랑스가 점령했을때도 이를 분할통치로서 이용했었고, 마찬가지로 미국도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이를 이용했다. 비슷한 예로 이라크 전쟁 당시 제국주의자들의 압잡이가 되었던 쿠르드족을 예로 들 수 있다.

프랑스가 물러나고 난 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중부고원지대를 베트남화 시키는 강제적인 동화정책을 실시했지만, 이는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들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상황에서 중부고원지대에 들어간 것이 미국이었다. 남베트남과는 달리 북베트남의 호치민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그랬듯이 소수민족을 잘 포섭하여 해방전쟁에 잘 협력하도록 했고, 이대로 가면 중부고원 지대 소수민족이 베트콩에 협력할께 분명했다.

따라서 이를 두려워한 미국은 CIDG라는 계획을 실행하여 라오스쪽의 몽족과 중부고원 지대의 몬타냐드족들을 포섭하여 베트콩에 맞서도록 군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남베트남의 일부 소수민족들은 미국의 그린베레(Green Beret)와 마이크 포스(MIKE Force)팀에 합류하여 베트콩에 맞서 싸웠다. 미국이 이들을 설득했던 방법으로는 자치국 수립 혹은 자치권 부여를 주장했지만, 사실은 이들을 꼬득이기 위한 분할통치의 방식이었다. 물론 이들 중에도 베트콩과 북베트남군 편에 서서 싸웠지만,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퍼뜨린 농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이들은 피닉스 작전과 같은 대학살극에 참가하여 민간인을 학살했고, 해방전선 전사들의 목을 자르며 들고 다니는 것을 즐겼다. 마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그랬듯이 말이다.

무튼 이들은 미국에게 이용당했고, 쉽게말해 베트남판 간도특설대가 되어 베트콩들에 맞서 싸운다. 결국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할 때 이들을 철저하게 버렸고, 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난 후 말 그대로 사회주의 베트남에게 목숨을 빌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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