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러시아 제국 통치하에 있던 폴란드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현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로 이사 가게된 어린시절의 로자는 거기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15살이 된 로자는 유대인 혁명 서클과 폴란드 프롤레타리아당에 가입해 총파업 주도 등의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가, 탄압받자 스위스 취리히로 망명했다.

망명후 로자는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경제학에 대해서도 심도있게 공부했다. 그녀 그곳에서 평생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레오 요기헤스‘를 만났고 본격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혼 덕분에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 로자는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활동한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있던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 바르샤바로 돌아가 폴란드 사민당을 창당하고 폴란드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되는데, 이 당시 계급 투쟁보다는 반러시아 운동과 폴란드 독립을 먼저 주장하던 폴란드 공산주의자들과 충돌했다. 이는 당시 그녀가 민족주의에 대해 매우 경계했기 때문이다. 로자는 민족주의가 민족이라는 대의명분아래 계급투쟁을 방해하고, 이게 결국 국가주의에 기반한 이기주의로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는 등, 본격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후 로자는 1907년 베를린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자본의 축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사민당으로 활동했던 것도 이 시기다. 1914년 유럽에서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당시 로자는 독일의 빌헬름 2세를 비판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갔고, 대략 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16년 풀려난 그녀는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실망 했다. 제2 인터내셔널에 있던 사민당들이 조국 방위라는 개념을 내세워 제국주의간의 영토전쟁 혹은 패권전쟁을 맹목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이다. 독일 사민당을 떠난 로자는 카를 리프크네히트, 클라라 체트킨 등과 함께 인터내셔널단(Die Internationale)을 결성하고, 투쟁을 이어갔다. 이때 로자와 그들은 어떤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바로 스파르타쿠스단이다. 이때 로자는 다시 한번 독일 제국에 의해 체포되어 또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된다.

로자가 감옥에 있을 당시 1917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났고, 로자는 볼셰비키의 혁명을 환영하면서도 독재화를 우려하기도 했었다.

1918년 독일이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뒤, 11월 혁명으로 감옥에서 나온 그녀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의 기관지인 ˝적기(Die Rote Fahne)˝를 창간하고 사민당을 수정주의라고 격렬히 공격한다. 그해 12월 스파르타쿠스단과 다른 사회주의 세력을 규합하여 1919년 1월 1일 독일공산당을 창당하고 혁명(1월 봉기)을 일으켰으나, 독일 사민당의 비겁한 배신과 독일 자유군단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로자는 체포당한다. 체포된 로자는 길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다 어떤 병사가 휘두른 개머리판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들이어, 단결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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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풋은 네스 호의 괴물, 렙틸리언, 오고포고와 더불어 유명한 크립티드(미확인 생물)중 하나다. 히말라야에 산다고 알려진 예티의 친척으로서 직립보행을 하는 빅풋은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로 사스콰치라고도 불리는 빅풋은 원주민들의 이야기속은 물론이고,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부터 목격담들이 있었고, 현재도 간혹 목격담이나 몇몇 포착 영상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빅풋이 최초로 영상에 포착된 것은 1967년이다. 1967년 10월 20일 북캘리포니아 산악지대인 블러프크리크강을 지나가던 로저 패터슨은 밥 김린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검은색 생물체가 걷는 것을 목격했는데, 로저 패터슨은 자신의 카메라로 영상을 찍었고, 이게 결국 빅풋이 있다는 증거물로 여겨졌다. 로저 패터슨이 찍은 몇 분짜리 영상을 본 사람들은 이에 열광했다.

그 외에도 빅풋을 봤다는 목격자들은 넘쳐난다. 1964년에서 1970년까지 미국에서 빅풋을 봤다는 사람은 약 25회에 걸쳐 총 300명에 달했다. 1924년 캐나다 농부 알버트 오스트만은 자신이 빅풋 가족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했다고 주장했으며, 빅풋이 자신의 집을 습격했다거나 빅풋을 총으로 쐈다는 사람, 심지어 미확인비행물체(UFO)가 빅풋을 내려주고 갔다는 목격자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빅풋의 발자국이나 몸의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목격된 빅풋이 10만년전 지구상에 존재하던 영장류중 하나인 ‘기간토피테쿠스’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신비동물학(cryptozoology)’이라 하여 빅풋과 같은 미확인 생물체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말이 학문이지 이를 확실하게 입증할만한 증거자료가 있지는 않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부분은 아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생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빅풋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7월 2일 '영국왕립학회보B'에 실린 빅풋의 DNA를 검사한 논문은 "'빅풋'의 털은 하나같이 현존하는 종과 완벽하게 일치해 지금까지 발견된 빅풋의 털이 모두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를 가짜라 입증한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논문에 토대가 된 샘플 30개 가운데 10개는 곰, 4개는 말, 4개는 늑대나 개, 하나는 인간, 나머지는 소, 너구리, 사슴 등으로, 해당 샘플이 발견된 지역에 원래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포유류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1967년에 포착되었다는 빅풋의 필름 또한 조작으로 밝혀졌다. 사실 로저 패터슨은 한 영화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회사에서 내려온 지시와 함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비디오를 제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에는 “당시 자신이 털옷을 입고 빅풋 흉내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즉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빅풋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고, 증거 자료로 제시한 샘플들 또한 빅풋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간혹 포착되기도 하는 빅풋의 사진이나 영상들이 대부분 조작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자료가 다 거짓이냐는 의문 말이다. 즉 목격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빅풋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와 자신이 빅풋을 본 것을 매우 생생하게 증언했고, 이러한 것들이 다 거짓 혹은 기억에 의한 착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냐는 것이다. 따라서 빅풋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신 할 수 없는 나로선 그저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빅풋이 포착된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잘아는 히말라야의 예티도 있고, 중국, 러시아, 카프카스 지대를 끼고 있는 과거 구소련권 국가들에서도 빅풋과 같은 동물이 포착된 기록이나 목격담이 있다. 포착 영상들 중에는 최근에 촬영된 것들도 있다. 진실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빅풋이 존재한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기간토피테쿠스 같은 동물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http://news1.kr/articles/?2062633
https://namu.wiki/w/%EB%B9%85%ED%92%8B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109&cid=58943&categoryId=58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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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 학살(Massacre of My Lai)

˝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을 발췌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중부에 있는 미라이라는 마을에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Charlie Company)가 진입했다. 미라이에 진입한 찰리 중대는 베트콩 소탕이라는 명분아래, 거기 있던 민간인들에게 묻지마 학살은 하기 시작했고,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라이촌에 진입한 미군은 켈리중위가 내린 명령인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쏴죽여라(Shoot Anything that moves)‘에 복종했고, 여자, 아이, 노인 할 거 없이 보이는 데로 학살했다.

학살이 일어난 이후 미군은 이 미라이 학살을 철저하게 감췄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마을을 폭격했다. 그러나 1969년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을 Haeberle)은 자신이 찍은 학살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했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살에 참가했던, 폴 메들로라는 병사는 방송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방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중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중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아주 철저하게 규명되었다. 학살을 주도한 켈리 중위는 처벌받았고, 미군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져, 베트남전 반전운동이 보다 거세졌다. 공교롭게도 미라이 학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1969년은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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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mGiKim > 호치민 평전 서평

호치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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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mGiKim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미제국주의 역사

정말 감명깊게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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