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풋은 네스 호의 괴물, 렙틸리언, 오고포고와 더불어 유명한 크립티드(미확인 생물)중 하나다. 히말라야에 산다고 알려진 예티의 친척으로서 직립보행을 하는 빅풋은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언어로 사스콰치라고도 불리는 빅풋은 원주민들의 이야기속은 물론이고,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부터 목격담들이 있었고, 현재도 간혹 목격담이나 몇몇 포착 영상들이 인터넷을 떠돌고 있다.

빅풋이 최초로 영상에 포착된 것은 1967년이다. 1967년 10월 20일 북캘리포니아 산악지대인 블러프크리크강을 지나가던 로저 패터슨은 밥 김린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다가 갑자기 검은색 생물체가 걷는 것을 목격했는데, 로저 패터슨은 자신의 카메라로 영상을 찍었고, 이게 결국 빅풋이 있다는 증거물로 여겨졌다. 로저 패터슨이 찍은 몇 분짜리 영상을 본 사람들은 이에 열광했다.

그 외에도 빅풋을 봤다는 목격자들은 넘쳐난다. 1964년에서 1970년까지 미국에서 빅풋을 봤다는 사람은 약 25회에 걸쳐 총 300명에 달했다. 1924년 캐나다 농부 알버트 오스트만은 자신이 빅풋 가족에게 납치당했다가 탈출했다고 주장했으며, 빅풋이 자신의 집을 습격했다거나 빅풋을 총으로 쐈다는 사람, 심지어 미확인비행물체(UFO)가 빅풋을 내려주고 갔다는 목격자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빅풋의 발자국이나 몸의 크기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목격된 빅풋이 10만년전 지구상에 존재하던 영장류중 하나인 ‘기간토피테쿠스’가 아니냐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미국의 경우 ‘신비동물학(cryptozoology)’이라 하여 빅풋과 같은 미확인 생물체들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말이 학문이지 이를 확실하게 입증할만한 증거자료가 있지는 않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부분은 아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지금까지 생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빅풋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7월 2일 '영국왕립학회보B'에 실린 빅풋의 DNA를 검사한 논문은 "'빅풋'의 털은 하나같이 현존하는 종과 완벽하게 일치해 지금까지 발견된 빅풋의 털이 모두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를 가짜라 입증한 사람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 논문에 토대가 된 샘플 30개 가운데 10개는 곰, 4개는 말, 4개는 늑대나 개, 하나는 인간, 나머지는 소, 너구리, 사슴 등으로, 해당 샘플이 발견된 지역에 원래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포유류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1967년에 포착되었다는 빅풋의 필름 또한 조작으로 밝혀졌다. 사실 로저 패터슨은 한 영화사에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회사에서 내려온 지시와 함께 영화를 홍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비디오를 제작한 것이었다. 실제로 미국에는 “당시 자신이 털옷을 입고 빅풋 흉내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즉 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빅풋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는 없고, 증거 자료로 제시한 샘플들 또한 빅풋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간혹 포착되기도 하는 빅풋의 사진이나 영상들이 대부분 조작되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 자료가 다 거짓이냐는 의문 말이다. 즉 목격을 했던 사람들 중에는 빅풋관련 다큐멘터리에 나와 자신이 빅풋을 본 것을 매우 생생하게 증언했고, 이러한 것들이 다 거짓 혹은 기억에 의한 착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냐는 것이다. 따라서 빅풋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신 할 수 없는 나로선 그저 확실한 물증이 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추가적으로 더 얘기하자면, 빅풋이 포착된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잘아는 히말라야의 예티도 있고, 중국, 러시아, 카프카스 지대를 끼고 있는 과거 구소련권 국가들에서도 빅풋과 같은 동물이 포착된 기록이나 목격담이 있다. 포착 영상들 중에는 최근에 촬영된 것들도 있다. 진실은 잘 모르겠지만, 만약 빅풋이 존재한다면 과거에 존재했던 기간토피테쿠스 같은 동물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참고자료
http://news1.kr/articles/?2062633
https://namu.wiki/w/%EB%B9%85%ED%92%8B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79109&cid=58943&categoryId=58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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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이 학살(Massacre of My Lai)

˝나는 미라이 지역이 썩 기분 좋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부대원들도 ‘붉은 동네‘라는 소문을 들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마을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아서 썰렁했다. 연기가 피어나는 곳이 있어서 혹시 사람들이 살고 있지 않나 하고 경계했지만, 지뢰가 터져 사람들이 죽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미라이라는 동네 터 외에는 아무것도 공격할 것이 없었다. 이미 주민이나 베트콩도 없는 상태에서 그곳은 썰렁한 마을, 벼만 촘촘히 심어 놓은 논, 폭격으로 생긴 분화구, 구제 불능의 가난만 남아 있는 동네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 할 일이 없어서 부서진 가옥들을 불태우고 동굴들을 폭파시켜 버렸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489~490에서 병사 팀 오브라이언의 증언을 발췌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중부에 있는 미라이라는 마을에 윌리엄 켈리 중위가 이끄는 찰리 중대(Charlie Company)가 진입했다. 미라이에 진입한 찰리 중대는 베트콩 소탕이라는 명분아래, 거기 있던 민간인들에게 묻지마 학살은 하기 시작했고, 총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

미라이촌에 진입한 미군은 켈리중위가 내린 명령인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쏴죽여라(Shoot Anything that moves)‘에 복종했고, 여자, 아이, 노인 할 거 없이 보이는 데로 학살했다.

학살이 일어난 이후 미군은 이 미라이 학살을 철저하게 감췄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마을을 폭격했다. 그러나 1969년 사진기자 로널드 해벌(Ronal을 Haeberle)은 자신이 찍은 학살 사진이 ˝라이프(Life)˝ 지를 통해 1969년 세상에 공개했고, 프리랜서 기자인 시모어 허시(Seymore Hersh)에 의해 학살이 폭로되었다. 그리고 당시 학살에 참가했던, 폴 메들로라는 병사는 방송에 나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방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방송 진행자: 어떤 사람들이었죠? 양민, 여자, 아이들이었나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캘리 중위가 와서 그랬어요. 저들을 어째야 하는지 알지? 그래서 전 ‘예‘ 라고 했죠. 당연히 전 감시하라는 말인 줄 알았어요. 갔다가 10분에서 15분 후에 다시 돌아오더니 켈리 중위가 여태 안 죽이고 뭐 했어?라고 그랬어요.

방송 진행자: 당신은 그때 몇 명이나 죽였나요?

폴 메들로: 전 자동화기를 쐈는데, 그냥 마구 갈겼습니다. 너무나도 빨리 지나가서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겠어요. 아마 10명에서 15명 정도 죽였을 겁니다.

방송 진행자: 양민, 여자, 아이들을요?

폴 메들로: 양민, 여자, 아이들요.

방송 진행자: 아기도요?

폴 메들로: 아기도요.

폴 메들로: 내가 왜 그랬냐고요? 전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마치 그땐 정당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어요. 정말로요! 전우를 잃었거든요. 정말, 정말 친했던 친구 바비 윌슨요. 그게 마음에 걸렸어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러고 나니 속이 후련했어요.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 사건이 나를 괴롭혔어요.

방송 진행자: 젊고 능력 있고 용감한 미군이 노인과 여자, 어린이, 아기들을 한 줄로 세우고, 냉혈한처럼 쏴 죽인다는 걸 많은 선량한 미국인은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은데,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폴 메들로: 모르겠습니다.

미라이 학살의 진상은 아주 철저하게 규명되었다. 학살을 주도한 켈리 중위는 처벌받았고, 미군의 이미지는 바닥으로 떨어져, 베트남전 반전운동이 보다 거세졌다. 공교롭게도 미라이 학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진 1969년은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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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mGiKim > 호치민 평전 서평

호치민 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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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NamGiKim >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미제국주의 역사

정말 감명깊게 읽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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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것은 국가가 아니야. 애국 이런 것이 아니야. 진실이야!”

2010125일 서울특별시 중량구 녹색병원에서 한 노인이 타계했다. 그는 한 평생을 군사독재에 저항해왔고, 고령의 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던 사상가였다. 그가 바로 리영희다. 필자가 리영희 평전을 읽었던 것은 재작년 이맘때쯤이었다. 당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집필한 인물 평전에 푹 빠져있던 필자는 김삼웅 선생께서 쓰신 리영희 평전을 읽게 되었고, 리영희 선생을 좋아하게 되었다.

 

1. 일생

 

리영희는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 시기 근로동원을 피해 고향으로 귀향하여 그곳에서 8.15 해방을 맞았고, 1946년 부모님과 함께 월남하였다. 1947년 군산에서 있던 리영희는 반탁운동에 참가했었고, 1948년에는 여순사건에 본의 아니게 휘말려 전투장면을 지켜보기도 했었다. 1950년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 리영희는 경북 안동의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 하다 6.25 전쟁을 겪었고, 자원입대하여 유엔군 연락 장교단에서 근무했었다. 사실상 미군들 통역이었다. 미군 통역 장교로 복무하던 리영희는 지리산과 속리산 일대에서 공비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었다. 한국전쟁시기 군복무를 하던 리영희는 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 학살 사건을 직접 보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군대의 부패상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났지만, 리영희는 군복무를 3년 더 했었고, 7년간을 대한민국 군대에서 복무하였다.

 

전역한 리영희는 서울 합동통신사에 입사하여 외신부 기자 생활을 하였고, 미국 언론사인 워싱턴 포스트에서도 익명의 통신원으로도 활동했었다. 그가 존경하는 혁명가 김산의 전기를 접한 것도 이때였다. 1960년 이승만 이기붕 독재가 극에 달하여 일어나게 된 4.19 혁명 당시 리영희도 시위에 참여하여,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웠다. 4.19 혁명 이후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이를 비판하는 글을 미국의 <뉴 퍼블릭>에 기고하기도 했었다. 1964년부터 조선일보에서 활동하게 된 언론인 리영희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자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을 반대하는 글을 올렸다가 조선일보를 퇴사하게 되었다.

 

1970년에는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근무했었고, 1972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근무하였으며, 나중에 운동권들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게될 책인 <전환시대의 논리>1974년에 출간하였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고 난 뒤,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은 긴급조치 9를 발동하였고, 1976년 리영희는 교수직에서 강제로 해임되었으며,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대략 2년간 징역살이를 했다. 1980년 리영희는 다시 교수로 복직했지만, 이번에는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다시 한 번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1984년에 다시 복직한 리영희는 1985년 일본 도쿄대 사회과학연구소, 독일 연방 교회사회과학연구소에서 연구하고 1987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에서 부교수를 역임하였다. 즉 전두환 정권이 끝날 때 까지 해외에 있어야 했다.

 

이후 리영희는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썼고, 이사 및 논설고문을 역임하였다. 이후에도 리영희는 여러 활동을 계속했고, <자유인>, <새는 좌 우의 날개로 난다>와 같은 명저들을 집필하였으며, 1995년 한양대학교에서 정년퇴직하였다. 이후 새로 들어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대체로 지지하였으며, 남북평화노선에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은 아니었다. 2003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무력으로 침공하자 리영희는 이를 비판하며 이라크 전쟁 반전운동에 적극 가담하였고, 노무현 정부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낼때로 이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비판했었다.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광우병 사태가 터졌을 때 리영희는 이명박 독재정권을 낱낱이 비판했다. 그러던 201081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 리영희 종북론

 

워낙 군사독재를 일목요연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보니 수구세력들은 리영희를 매우 싫어한다. 리영희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편향된 인물 혹은 종북주의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리영희는 정치적으로 크게 편향된 인물도 아니고 종북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오직 진실을 추구할 뿐이다. 친일연구를 주로하는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을 내놓았을 때, 수구반동세력들은 친북인명사전이라는 것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친북인명사전에는 리영희의 이름이 들어갔다. 책을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리영희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토벌에도 참가했던 사람이고, 대한민국 군대에서 대략 7년간 복무했던 인물이며, 이후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주체사상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종북주의자라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그런 주장은 그저 리영희를 싫어하는 수구주의자들이 하는 무논리에 기반을 둔 빨갱이 몰이일 뿐이다.

 

3.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가 쓴 책들 중에는 명저들이 굉장히 많다. 그중에 뽑자면 아마 전환시대의 논리라 필자는 본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1970년대 한반도를 둘러싼 4대강국의 정세, 기자풍토, 중국 혁명 및 중국의 상황 그리고 베트남 전쟁 까지를 포괄하여 다룬 책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1960년대 박정희 반공정권이 국민들에게 강요하던 틀에박힌 반공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정세를 분석하고 역사를 분석하였으며, 진실을 추구하였다는 점에 있다. 물론 문화대혁명에 대해선 세계사적인 흐름에 따라 오판하기는 했지만, 분명한 명저다.

 

4. 글을 마치며

 

2년 전 리영희 평전을 읽으며 언론인 리영희를 존경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가 집필한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어봤다. 정말 훌륭한 책이다. 무튼 리영희 같이 맹목적인 애국주의가 아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한국사회가 민주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리영희는 미군 통역 장교로 근무했던 경험을 토대로 출세의 길이 보장되었음에도 독재정권에 저항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지지할 때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폭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교수직에 있었던 리영희는 탄탄대로의 길을 무릎쓰고 군사독재를 비판하기 위해 펜을 들었었다. 이는 그가 진실을 추구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본다.

 

김삼웅 선생이 쓴 리영희 평전은 불의에 저항하며 살아온 리영희에 대해 알 수 있는 책이다. 그의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와 더불어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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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8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그새키 문화대혁명을 빨다가 실상이 드러났어도 끝까지 얼버무린 놈 아닌가 1970년이면 남침전쟁난지 20년밖에 안되었고 국가원수 목따로온 33명이 내려온 마당인데 반공을 강요하는게 당연한이치지 리영희는 지만원에게 개털렸음

책이 좋아 2023-05-05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라이 개돼지에 다름 아니네

NamGiKim 2023-05-05 22:38   좋아요 0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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