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시프 스탈린 포스터)

“스탈린의 진정한 핵심적 업적은 나무 쟁기를 가지고 일하던 러시아를 원자로를 완비한 나라로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아이작 도이처

“스탈린은 지도와 사업에서의 집단성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덕과 독단을 기준으로 자기 방침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흐루쇼프의 연설문, <개인숭배와 그 결과들에 대하여>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한 쪽에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다른 한쪽에선 아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그에 대한 평가를 넘어서 오늘은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보겠다.

1. 초기 생애

이오시프 스탈린은 1879년 현 그루지야(조지아) 동부에 있는 고리에서 3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베사리온 주가시빌리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하면서도 무차별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폭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이유 없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그런 아버지 때문에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매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살았다. 1888년 9살이 되던 해 그는 교회 소학교를 다녔지만, 그의 아버지는 스탈린으로 하여금 강제로 구두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졌던 어머니의 항의와 노력으로 스탈린은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고, 1894년 스탈린은 최고 성적으로 종교학교를 졸업했다.

(종교학교를 졸업할 시기의 스탈린 사진)


1894년 종교학교를 졸업한 스탈린은 트빌리시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트빌리시 신학교에서 스탈린은 성직자 교과목 외에 문학과 역사, 라틴어, 수학, 그리스어 등 폭넓은 교육을 받았고, 성적은 우수하였다.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강철권력’라는 책에는 당시 그의 성적표가 나와 있다. 이 성적표는 5점 만점 기준이다. 그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성경 5

러시아 문학 5

역사 5

수학 5

그루지야어 5

라틴어 (모름)

그리스어 4

교회 슬라브어 5

그루지야-이메레티 노래 5


그 뿐만 아니었다. 젊은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루지아 문인들과 지역 유지들을 감동시켜 격찬을 받을 정도로 시를 매우 잘 썼다 한다. 그가 칼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서적을 접하게 된 것은 1899년이었다. 그 서적을 접한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고, 혁명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2. 은행 강도와 혁명가

(젊은 혁명가 시절 스탈린)

 

스탈린이 혁명가로서 활동했던 것은 1900년이었다. 당시 그는 노동운동가로 활동하며 캅카스 지방의 주요 공단 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었다. 스탈린은 탁월한 언변으로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웠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노동자들을 시위에 앞세워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치게 열성을 보이면서 동료 공산주의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했었다. 혁명가로써 활동했던 스탈린은 1902년부터 1903년까지 경찰당국에게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1903년 스탈린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에 정식으로 입당했다.

(1900년대 찍은 머그샷)


1907년 볼셰비키당에서 활동하던 스탈린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운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티플리스 시내에서 대규모의 수송방해작전을 획책 하는 데 기여했다. 은행 강탈은 성공하여 대량의 현금을 확보했고, 며칠 뒤 가족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 바쿠로 피신했다. 당의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스탈린의 강도 행각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계속 성공에 성공을 거듭한 스탈린의 은행 강도 행각은 농촌과 중소 도시 은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대도심의 대형 은행과 현금 수송 차량까지도 탈취했었다.

(1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았다.)

(2월 혁명 당시 러시아 시위대.)


1912년 2월 당시 러시아 국외에 체류 중이던 레닌이 멘셰비키파와 최종적으로 결별한 볼셰비키당을 조직하면서, 스탈린은 제1차 중앙위원회의 신입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스탈린은 스탈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13년 스탈린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되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운 좋게도 왼쪽 팔이 불구였던 바람에 병역을 기피할 수 있었다. 2월 혁명 이후인 1917년 3월 25일 스탈린은 시베리아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왔고, 거기서 프라우다 편집진을 다시 한 번 맡게 되었다.

(4월 테제 이후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레닌)


2월 혁명으로 들어섰던 임시정부는 결국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끈 10월 혁명으로 무너졌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적군과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아래 구 황제를 복원하고자 하는 백군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른바 적백내전이었다. 적백내전 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더불어 레닌이 선출한 볼셰비키당 정치국의 위원이 되었고, 1918년 5월에는 차리첸(현 볼고그라드)에서 적군을 지휘했었다.

(적백내전 당시 트로츠키, 그는 수천 밖에 안 되던 군대를 수백만으로 늘렸고 덕분에 볼셰비키는 적백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내전시기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자주 경쟁 했었다. 1919년에 일어난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경쟁은 격해졌다. 당시 스탈린은 남부 전선의 사령관으로서 폴란드의 도시인 리보프를 향한 공세를 명령했지만, 트로츠키는 수도 바르샤바를 공격하려 했었다. 둘 다 서로를 지원하지 않았고, 결국 소련 폴란드 전쟁은 1921년 평화협정으로 끝을 맺었다. 1921년 적백내전은 볼셰비키의 승리로 끝났지만, 혁명 러시아는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내전으로 인한 경제난은 러시아인 수백만을 기아와 굶주림에 빠뜨렸고, 결국 레닌은 기존의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NEP(신경제정책)을 실행하게 되었다. 이후 건강의 악화되어가던 레닌은 1924년 사망했다. 레닌 사망으로 인하여 소련은 또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3. 권력을 획득하다

(스탈린 사진)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소련은 당내 투쟁에 휩싸였다. 레닌 사후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인물은 트로츠키였다. 당시 까지만 해도 소련 공산당에서의 스탈린의 인기는 그리 높지 못했다. 트로츠키와 그 외의 당내 투쟁이 치열할 때 트로츠키 반대세력은 스탈린하고 협력하고자 했지만, 나중에는 트로츠키와 연합하여 스탈린에 맞서야할 처지가 되었다. 즉 레닌 사후 스탈린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며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28년 당내투쟁의 혼란속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사람은 결국 스탈린이 되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국외로 추방당했고, 추방당한 트로츠키는 1940년까지 국외에서 외로운 투쟁을 이어가다가 스탈린이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


4. 경제 개발과 대숙청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과 더불어 우상화된 스탈린)


1928년 소련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기존에 펼쳤던, 신경제정책(NEP)를 포기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이 경제개발은 국가주도의 경제 개발이었다. 즉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고 계획하는 정책이었던 것이다. 스탈린식 경제개발이라 불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엄청난 착취와 인권유린이 있었지만, 그 나름 놀라운 경제 성장을 보였다. 1931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년에서 100년이 뒤떨어졌습니다. 10년 안에 그 격차를 없애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짓밟히고 말 것입니다.”

(노동자 스타하노프는 자신의 할당량에 7배 이상의 광물을 채굴했다.)


스탈린의 연설처럼 소련은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으로 자본주의가 위기를 맞아서 고통에 시달릴 때 스탈린의 소련은 초고속 성장의 연속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매년 10%가 넘는 경이적인 경제성장률을 기록했고, 문맹은 거의 사라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기도 했다. 1938년이 되어서는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경제 성장과 동시에 자유를 억압하고 1936년부터 1938년 까지 대숙청을 감행하여 공포정치를 실행하였다. 스탈린은 비밀경찰인 NKVD를 이용하여 인민들을 감시하였다. 대숙청시기 목숨을 잃은 사람이 약 200만이 넘고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추방당한 사람이 수백만이 넘었었다. 1931년 일본의 만주침공과 1933년 히틀러의 등장으로 스탈린의 소련은 소수민족을 억압했다. 그 당시 연해주에 있던 수십만의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추방됨에 따라 수만 명의 고려인들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대숙청시기 수많은 사람들이 공포 속에서 살았었다. 대숙청을 통하여 스탈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자가 되었다.

 

5. 대조국전쟁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


1930년대는 파시즘이 부상하던 시기였다. 1931년 만주를 침공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1933년 나치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재무장을 선언한 뒤 유럽정복의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던 1939년 히틀러는 스탈린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폴란드를 침공했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 이후 스탈린은 히틀러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했었다. 이후 스탈린은 핀란드를 침공했지만 핀란드군에 10배나 되는 사상자를 내고 대패했다. 심지어 스탈린의 심복인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에게 “네 놈이 유능한 장교들을 다 죽였잖아”라고 말했고, 결국 스탈린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하게 되었다. 히틀러와의 협정은 매우 불안정한 협정이었다. 영국을 굴복시키는데 실패한 히틀러는 서부전선에 있던 군대를 동부로 돌렸고, 1941년 6월 히틀러는 결국 소련을 침공했다. 개전 초반 소련은 우세한 화력을 가진 독일군에게 밀렸다.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고, 1941년 12월에는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각까지 들어왔었다.(그리고 실패했다.) 1942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까지 진격했었다.

(194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러시아 혁명 퍼레이드)

(1943년 쿠르스크 전투)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은 단결하게 되었다. 산업화 시기 중공업 위주의 성장을 했던 스탈린의 소련은 전쟁이 터지자 탱크와 비행기를 비롯한 군수문자를 초고속으로 찍어냈고, 수많은 소련의 젊은이들이 독일군에 맞서 싸우기 위해 군에 입대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국이 연합군 편에 서게 되자 미국의 수많은 물자가 소련으로 들어가게 됐고, 소련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물자를 아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3년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쿠르스크에서 대 반격을 시도했지만, T-34전차의 물량에 밀려 이마저도 실패했다.

(1945년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소련 깃발을 휘두르고 있는 소련군)

(1945년 승전 기념 퍼레이드 당시 백마타고 개선식을 하는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1943년부터 소련은 전선 전역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반격을 개시했다. 쿠르스크 전투와 바그라티온 작전이 성공한 이후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었다. 1945년 4월 소련군은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입성했고, 26일에는 라인강에서 미군과 만났으며, 4월 30일 히틀러가 자살함에 따라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했다.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2500만 명(이중 1000만명 이상은 소련군인이다.)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목숨을 잃었지만, 궁극적으로 소련은 승리했다.

(만주 진격 작전 당시 소련군)


그해 7월 스탈린은 유럽에 있던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를 이용하여 만주로 옮긴 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난 이후인 1945년 8월 9일 일본에게 선전포고 했고, 만주에서 부터 밀고 내려와 일본을 압박했다. 이때 한반도 북부가 소련 군정하에 들어갔고, 러일전쟁 당시 빼았겼던 사할린을 되찾았다.

(종전 이후 스탈린)


6. 냉전의 시작과 스탈린의 사망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2차 세계대전은 나치독일과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체주의 맞서 손을 잡았던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경쟁하기 시작했다. 냉전이 시작됨에 따라 소련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미국과 경쟁했다.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 편에 서게 되었고,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미국편에 서게 되었다. 1948년에는 소련으로부터 지원받던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가 되었고, 1949년 스탈린의 지원을 받던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내전에서 승리했다.

(동과 서로 분단된 독일)

(한국전쟁)


1949년에는 독일이 동과 서로 분단되며 냉전을 알렸다. 스탈린의 소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군사비용을 굉장히 많이 투자했다. 그 외에도 여러 분야에서도 경쟁했다. 1949년에는 미국의 원자폭탄보다 강력한 수소폭탄을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스탈린은 개입하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 김일성의 요청을 수차례 거부했다.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위 서방세계는 공산주의의 공포를 조성시킬 때 마다 스탈린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특히 미국의 겨우 스탈린에 대한 공포심을 부각시킴에 따라 자신들의 반공체제를 강화시킬 수 있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됐던 소련 경제는 1940년대 중후반부터 다시 회복됐고, 1950년대 초의 소련은 초강대국이 됐다.

(미라가 된 스탈린)


한국전쟁이 진행중이던 1952년 스탈린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됐다. 스탈린은 말년에 흑해 연안 별장에서 주로 생활했다. 거기서 여유롭게 살다가 1953년 3월 5일 생을 마감했다. 사후 그를 추모하는 행렬이 있었고, 그는 방부처리 되어 레닌과 더불어 레닌 묘에 전시됐다. 그러던 3년 후 소련의 후르쇼프는 제20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전세계 공산권 국가들을 놀라게할 스탈린 격하 연설을 한다. 이후 소련에서는 스탈린을 격하하는 운동이 벌어졌고, 굴라그 수감자 90% 이상이 석방됨에 따라, 스탈린은 격하운동은 격렬해졌다. 그리고 레닌과 같이 합장되었던 스탈린의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묘 옆에 묻어졌다.


7.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애 대한 평가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인 시각이 앞선 것 같다.)


스탈린 사후 권력을 잡은 후르쇼프가 스탈린 격하운동을 전개했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 사회가 스탈린에 대한 업적을 아주 무시한 것만은 아니었다. 1960년대 흐루쇼프 실각 이후 브레즈네프는 더 이상 스탈린을 격하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 1980년대 고르바쵸프가 스탈린에 대해서 강력히 비판하기도 했지만,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 빈곤에 직면한 러시아에선 스탈린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도 했다.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 푸틴 또한 스탈린의 시대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러시아의 제2정당인 러시아 공산당은 지금도 스탈린 찬양에 열을 올리고 있다. 긍정과 부정이라는 시각을 초월해서 현재 러시아에서 내리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대조국전쟁에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승리를 일구어낸 강력한 지도자이다. 앞으로의 러시아 사람들이 내릴 스탈린에 대한 평가가 어떨지 궁금하다.


8. 스탈린을 알기 위해 더 읽을거리


국내에도 스탈린 관련한 책이 몇권 출판 되었다. 개인적으로 이 3가지 책을 추천한다.

(스탈린 공포의 정치학, 권력의 심리학. 로버트 서비스 지음)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올레크 흘레브뉴크 지음)

(젊은 스탈린.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이자면 로버트 서비스의 스탈린 평전은 영국 보수쪽 학자가 쓴 것 치고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과 부정적인 서술을 나름 균형있게 했다. 올레크의 스탈린 평전은 스탈린에 대한 가장 최신의 정보를 담았다는 점에서 분명 명저이지만 너무 부정적으로만 서술했다는 비판이 있다. 사이먼의 젊은 스탈린은 아직 끝까지 안 읽어 봤지만 젊은 시절 스탈린을 잘 다룬 책이라는 평가가 있다. 3권 다 이 쪽 분야 연구자가 쓴 책이다. 따라서 스탈린을 알기 위해선 읽어야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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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들어섰다. 이러한 냉전의 대립은 좌우익간의 내전 형태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런 좌우익 대립은 어느 유럽의 한 국가에서도 나타났다. 그 나라가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역사로 잘 알려진 그리스다.

 

2차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나치독일은 그리스를 점령했다. 나치독일이 그리스를 점령하자, 이에 반발한 그리스인들은 나치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 인민해방전선을 창설했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는 데 성공했고, 나치독일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전개했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8월 그리스는 나치로부터 해방됐다. 당시 동유럽 전역에서 진격해오던 소련군을 막기 위해 대다수의 독일군 병력들이 철수했고, 그해 10월 그리스에는 영국군이 상륙했다. 영국군은 수도 아테네에 입성했다. 당시 그리스는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보지 않았다.

 

나치독일이 떠난 이후 그리스에는 연합정부가 세워졌지만, 영국은 군사개입을 통해 대중적인 민족해방전선을 제지했다. 거기다 그 연합정부는 우익 군주독재국가의 형태를 뗬다. 따라서 반체제인사들이 투옥되고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제거되자 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해방 운동이 성장했고, 이는 충돌로 이어졌다. 이게 1차내전의 시작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수도 아테네와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제외한 그리스 전지역을 장악했지만, 영국과 우익독재세력들은 이를 진압했다. 그리고 1945년 2월 얄타회담 시기 그리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했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1946년 3월 총선이 치러졌고, 아주 간신히 국왕파가 승리했다. 이는 다시 좌우갈등으로 번졌고 결국 내전이 일어났다.

 

1946년 사회주의 세력은 게릴라전을 다시 재개했다. 1946년 후반이 되자 사회주의자들은 인구 700만의 나라에서 17000명 이상의 군대를 모았고, 5만 명 이상의 지지자와, 약 25만 명의 동조자를 끌어 모았다. 당시 사회주의 세력의 봉기에 대처하기 힘들었던 영국은 그리스 내전에 미국을 끌어들였고, 미국은 그리스 내전에 개입한다.

 

1947년에 전투는 더욱 격렬해져 그리스 국군과 우익세력들은 북 이필로스, 그리스령 마케도니아와 텟살리아에서 대규모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내전에 개입한 미국은 1947년의 마지막 5개월 동안 아테네 우익 정부에 대포와 급강하 폭격기, 네이팜탄 등이 포함된 7만 4000톤의 군사 장비를 보내줬다. 미국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이끄는 250명의 장교단이 전투 현장에서 그리스 군대를 조언해주며 도왔다. 밴 플리트는 게릴라들을 고립시키고 그들의 지지기반을 제거하기 위해 농촌 지역의 그리스인 수천 명을 강제로 소개하는 정책에 착수했고, 이는 게릴라들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그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국군은 1948년 작전지역을 펠로폰네소스 반도, 아티카까지 확대했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 국군은 마을들을 초토화시키는 작전을 벌였고, 수많은 난민들이 발생했다. 결국 그리스 내전은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우익독재 세력이 승리했고, 1949년 사회주의 계열 게릴라들은 괴멸됐다. 이후 그리스는 미국 기업들의 자본이 밀려들어왔고, 1974년 민주화가 되기 이전 까지 우익군사독재시기를 거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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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더불어 미국이라는 나라가 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던 전쟁이다. 280만 명의 미군이 참전했고, 800만 톤의 폭탄을 베트남에 투하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쟁에서 베트남에게 패배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건국 이래 최대의 반전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애국심을 가지고 참전했던 참전용사들 마저 이 전쟁을 규탄했다. 당연히 이 전쟁은 냉전시기 미국과 대립했던 소련이나 중국을 비롯한 구공산권뿐만 아니라,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영국이나 프랑스 그리고 캐나다도 이 전쟁을 비판적으로 봤다. 이 전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미국인들의 시각은 헐리우드에서 만든 풀 메탈 자켓이나 지옥의 묵시록그리고 ‘74일 생과 같은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국제적으로 그리고 미국 내에서도 비판받는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쟁으로 미화했던 나라가 있다. 그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1965년 베트남에 군대를 파견했던 박정희 정권은 1973년 미국이 철수함에 따라 이 전쟁에서 발을 뺐다. 그리고 1975년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을 때, 그 악명 높은 긴급조치 9를 발동하여,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유신독재를 강화했다. 이와 동시에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이 북베트남 측의 승리로 끝나자 이를 악용하여 반공주의를 강화해나갔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박정희의 특별 담화)

 

박정희 정권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고, 북베트남과 해방전선이 이룬 승리는 민족해방전쟁에서의 승리가 아닌 자유월남의 패망이었다. 이런 반공주의적인 시각은 지금도 사회 깊숙이 남아있다. 작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여 그 나라의 독립 영웅 호치민을 칭찬했을 때, “자국민을 공산치하에서 수도 없이 학살한 호치민을 찬양하는 빨갱이 라며이에 대해 간질발작을 보이며 잎에 개거 품을 물었던 일각의 모습이 그 반증이다. 그렇다면 그들 말대로 베트남 전쟁은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이었고, 호치민은 단순한 빨갱이었을까? 이는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만 제대로 안다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1. 베트남의 독립선언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을 집필한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시작점을 1945년 미국이 당시 베트남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을 지원하던 시점으로 봤다.

  

(2차세계대전 당시 베트민을 훈련시키는 미국 OSS 요원들.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에 맞서기 위해 베트민을 지원했다.)  

 

2차세계대전 당시 호치민의 베트민은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일본이 항복하던 시점인 19458월 호치민의 베트민은 전국적으로 총 봉기를 일으켜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고, 194592일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 항복 날짜에 맞춰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한다.

 

그러나 연합국은 베트남의 독립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위 16도선을 기점으로 북에는 중국군이 남에는 영국군이 입성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당시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는 프랑스를 끌어들였고, 이는 베트남과의 마찰로 이어졌다. 베트남과 프랑스의 갈등은 격해졌고, 이는 결국 프랑스가 하이퐁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그게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의 독립선언. 호치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선언문은 미국의 독립 혁명 당시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한 것과 비슷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초반에는 프랑스가 유리했지만, 1949년 중국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프랑스군에게 반격을 가했고,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지 1년이 지난 시점인 1954년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비엔푸에서 베트민이 대승을 거두면서 프랑스의 참패로 끝이 난다.

 

그러나 미소 냉전이라는 대립 속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반공적인 시각으로 보았고, 프랑스를 지원해줬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대패한 것이다.

 

2. 분단과 남베트남의 혼란  

(1954년 5월 7일 프랑스군이 참패한 디엔비엔푸 전투. 디엔비엔푸 전투는 56일간의 포위 끝에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군 1만 명 이상이 항복했다. 제국주의자들을 무찌른 영광스러운 승리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베트남은 제네바 협약에 따라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다. 당시 이 분단은 2년 이내에 총 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하에서 실시되었다.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제국주의를 무찌른 세력이었지만, 남베트남에 들어선 응오딘지엠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던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앞세웠던 꼭두각시 바오다이 황제는 자신의 신복 응오딘지엠을 총리로 내세웠고,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한 뒤, 권좌에 올랐다. 정권을 잡은 응오딘지엠은 통일을 위한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린다. 제네바 협약에 따라 총선을 치러야 했지만, 도미노 이론을 믿고 있던 미국은 총선을 실시해야 했지만,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 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되어 부정부패를 일삼은 응오딘지엠. 가족 정치 부정부패 독재등 온 갖 악행을 저질렀다. 미국은 단지 그가 반공주의자이자 가톨릭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지원했다.)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자신들의 친인척들을 남베트남 내각에 대거 편입시켰다. 당시 남베트남은 농업국가로서 농민들의 민심을 잡으려면 토지개혁이 필수였지만, 응오딘지엠은 토지를 베트남의 소수 권력이라 할 수 있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만 우선적으로 할당했다. 그와 동시에 민중의 90%이상이 믿는 불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리고 반공주의를 표방하며 자신의 정권에 조금만이라도 반대하는 세력들을 짓밟았다. 당시 베트남의 종교인 카오다이나 호아하오교도 응오딘지엠 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남베트남 고위관료들에 의한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대불항전을 전개하던 베트민 잔존세력들까지 탄압했다.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남베트남의 비밀경찰을 동원하여 인민들의 사상을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수 만 명이 체포되고 처형됐다.  

(1963년 6월 11일 독재정권의 불교 탄압에 맞서 소신공양한 틱광둑 스님. 그러나 응오딘지엠의 제수인 마담 누는 이를 두고 바베큐라며 인간이하의 발언을 했다.)

  

그들의 탄압은 무자비했고, 결국 남베트남은 각종 시위와 혼란으로 휩싸인다. 19636월에는 응오딘지엠의 독재정권과 불교도 탄압에 반대하여 고승 틱광둑이 소신공양하는 일이 일어났고, 그 이후 여러 곳에서 각종 반대 시위와 불교도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케네디 정권은 CIA를 동원하여 응오딘지엠 정권을 축출했지만, 그 이후 남베트남은 군벌들의 내부 쿠데타에 휩싸이게 된다. 즉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

 

3. 미국의 군사고문단 파견 그리고 통킹만 사건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깃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이라고 불리는 이 단체는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됐다. 이들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고, 민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에 맞서 싸웠다.)

  

이와 같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가족 정치와 친 가톨릭 정치는 당연히 인민들의 불만을 불러왔고, 남베트남의 인민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게릴라 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1960년 남베트남 안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른바 베트콩이 자생적으로 창설되었다.

 

베트콩이라는 단체는 응오딘지엠 정권을 축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북베트남은 이를 지원하는 형태였다. 베트콩은 남베트남에 맞서 무장투쟁 및 각종 투쟁을 이어나갔고, 프랑스군 출신의 남베트남 군 관료들은 베트콩과의 전투에 있어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처럼 프랑스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로 구성된 군대는 전투에서도 무능력 했다.

 

도미노 이론을 믿던 미국은 남베트남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보고, 조금씩 군사고문단을 남베트남에 파견했다. 1961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 된 존F케네디는 남베트남에 있는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점차 늘렸고, 1963년에는 남베트남 주둔 군사고문단 숫자가 3만 명이 넘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허접한 모습을 보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압박 전투라 할 수 있는데, 1500명의 남베트남군이 300명의 베트콩에게 대패했을 정도로 무능력했다. 

(USS 매덕스 호. 통킹만 사건 당시 북베트남 해역에서 염탐행위를 하던 미국의 배.)

  

응오딘지엠이 미국 CIA의 지원을 받은 내부 쿠데타로 축출되었지만, 이후 남베트남은 지속되는 쿠데타에 시달렸다. 그럴수록 남베트남의 민중은 베트콩을 더 지지하게 되었고, 이대로 있으면 남베트남은 내부총질로 무너질 상황이었다. 미국에게 있어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19648월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는 자작극을 벌였고, 이를 빌미로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로써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4. 베트남 전쟁의 시작   

(롤링 썬더 작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롤링 썬더 작전을 통하여 베트남을 초토화시켰다.)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 미국은 19652월 베트남의 중부고원지대인 플레이쿠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자,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에 나선다. 이른바 북폭을 시작한 것이다. 북폭을 감행한 미국은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와 항구도시 하이퐁을 비롯한 대도시들과 북베트남 전역을 초토화 시켰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남베트남 정글에 무분별한 고엽제를 살포하여 산림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이 전투에서 무능력함을 보이자 미국은 19653월 다낭에 첫 지상병력을 파견한다. 이에 따라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그리고 태국도 군대를 파병한다. 그리고 그해 이후 남베트남의 젊은 장교 응우옌 반 티에우가 정권을 잡으면서 쿠데타는 종결된다  

(응우옌 반 티에우. (맨)왠쪽이 린든 존슨, 두번째가 윌리엄 웨스트 모어랜드 그리고 세번째가 응우옌 반 티에우다. 네번째에 있는 양복입은 베트남인은 남베트남 공군 사령관이던 응우옌 까오 끼다. 응우옌 반 티에우는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지속되던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권의 본질적인 문제인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또한 온갖 비리를 통해 돈을 모았다.)

  

하지만 남베트남군은 베트콩과의 전투에서 여전히 무능력했다. 19655월 말 소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꽝응아이 근처에 있던 남베트남군 여단을 매복 공격하여, 며칠 동안의 전투 끝에 남베트남군 2개 대대를 완전히 괴멸시키기도 했다. 이에 맞서 미국은 더 많은 지상 병력을 파견했고, 고엽제를 살포하며 인근 마을과 숲을 무차별 폭격했다.  

(이아드랑 전투. 1965년 이아드랑이라는 지역에서 미국은 대규모의 헬기 부대를 작전에 투입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된 미국의 제1 기병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노근리에서 민간인 250명을 학살한 군대이기도 하다.)

  

미국의 막강한 화력으로 인하여 베트콩들 또한 사상자가 급증했다. 196511월 미국의 제1 기병사단은 이아드랑에서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강한 공군력과 헬기 부대들을 투입했었다. 그 결과 며칠간의 전투에서 미군은 300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북베트남측은 1700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아드랑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다른 전투에서도 미군의 항상 압승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은 과거 미국이 치렀던 제2차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과는 다른 전쟁이었다. 베트남 전쟁은 남베트남 내에서의 전쟁이었다. 즉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상대하는 적은 남베트남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베트콩이었고, 이를 지원하러 호치민 루트를 통해 내려온 북베트남군의 소수 지원 병력이었다  

(닥토 전투. 1967년 베트남의 콘툼성 근처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즉 일정한 전선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전투가 어디에서 벌어질지 모르는 전쟁이었다. 미군은 수색과 섬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작전을 이어나갔고, 이와 같은 게릴라전으로 인하여 미군 사상자 또한 적잖게 속출했다. 그리고 미군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늘어만 갔다. 미국의 특수부대인 그린베레가 베트콩에 맞서기위해 자포자기식으로 라오스쪽의 몽족과 중부고원지대 소수민족을 비롯한 일부 소수민족들을 기반으로 만든 특수부대가 활동했지만, 규모가 그리 크지 못했기에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6711월 베트남 콘툼성 지역에 있는 닥토에서 대격전이 벌어졌지만, 미군은 이 전투에서 베트콩 1600명 이상을 사살하며 우위를 점하지만, 그 과정에서 40대 이상의 헬기와 350명 이상의 미군 전사자가 속출했다.

 

5. 구정 공세와 호치민의 사망

 

1967년에서 1968년 사이 남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 숫자는 총 50만을 넘겼다. 1967년까지 총 2만 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했지만, 정글을 B-52 폭격기로 무차별 폭격하고, 대규모의 헬기를 동원하여 수색 섬멸 작전을 이어나갔기에 미국은 베트남 전에서 이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전쟁을 일으킨 미국의 착각이었다. 1967년까지 미국이 이기고 있다 생각한 미국인들은 1968년부터 미국이 자신들에게 한 거짓말에 환멸을 느끼고 반전운동에 뛰어든다. 미국 내의 반전 운동을 촉발시킨 사건은 바로 구정 공세(Tet Offensive)’.  

(구정 공세. 1968년 1월 31일 베트남 구정에 감행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는 미국과 서방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이 공세는 미국 뿐만 아니라 서독,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과 같은 나라의 학생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 68혁명이다.)

  

19681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공격을 가했다.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들이 베트콩의 공격을 받았다. 베트남의 옛 수도 후에는 베트콩이 1달 간 점령했고, 케산은 제2의 디엔비엔푸 전투를 연상시켰으며, 수도 사이공은 잠깐이기는 하지만 베트콩 공격부대가 미대사관1층을 점령했다. 첫 번째 구정 공세 1달 동안 베트콩은 미군의 막강한 화력에 의하여 대부분 소탕되었다. 미군 2천 명이 사망했지만, 베트콩은 3만 명 이상 사망했다. 즉 전사자 측면에서 볼 땐 미국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구정 공세 당시 남베트남 전역이 공격당하는 모습이 대중매체를 통해 미국 전역에 보도가 되었고, 이는 미국인들로 하여금 환멸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는 결국 미국 내에서 반전운동을 격화시키게 되었다. 결국 린든 존슨 대통령은 재선하지 못했고, 196811월 잠깐 동안 북폭을 중지해야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문제는 린든 존슨에서 리처드 닉슨으로 넘어가게 된다  

(1969년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사망했다. 미국과의 전쟁 도중 사망한 그는 20대 청년 시절 부터 80 노인까지 오로지 민족해방과 독립을 위해 살아왔다. 부패하지 않았고, 남을 잘 설득했으며, 특히나 아이들을 사랑했다.)

  

구정 공세로 인하여 수많은 베트콩들이 전사했지만, 그들은 미국에 맞서 투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단계적인 철수를 이행했다. 196992일 북베트남의 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 호치민이 사망했다. 한평생을 베트남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바쳐온 위대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북베트남 인민들은 애도와 슬픔을 표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더 단결하게 되었다.

 

6. 반전운동과 미군 철수 그리고 베트남의 승리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사상 최대의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사실 베트남 전쟁은 전쟁 초기부터 미국 자본주의의 빈부의 계급적 불평들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미국은 징병제도였다. 미국의 징병제도로 인하여 가난한 백인의 자식들과 노동계급의 자식들 그리고 흑인의 자식들은 지옥의 베트남으로 가게 됐지만 대학을 다니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들 엘리트 계층들은 학업을 핑계로 징병을 언제든지 피할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베트남으로간 흑인군인들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다.

 

베트남 주둔 미군의 총 병력 13%를 흑인이 차지했고 이는 미국 인구에서 흑인이 차지하는 비율과 비슷한 수치였다. 즉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미국 징병제도는 계급과 빈부 그리고 인종간의 불평등이라는 모순점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반전운동이 일어나는데 있어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시위대가 반전운동을 하면 거리에 있는 미국의 경찰들은 곤봉을 돌고 시위대를 서슴없이 후려치기까지 했고 반전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소화기와 물대포가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심지어는 주방위군을 동원하기 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이런 진압 방식을 보고 히틀러의 게슈타포에 비유하기도 했다.  

(베트남 전 반전운동.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은 1965년 부터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그 규모가 훨씬 커졌고, 미국내에서의 반전운동은 미국으로 하여금 베트남에서 철수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인민들 또한 이 전쟁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지배계급에 맞서 투쟁했고, 전쟁을 끝냈다.)

  

시위대를 진압하는 미국 정부의 방식이 무자비했다는 사실은 1970년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 사건을 보면 알 수 있다. 1970년 당시 닉슨 정부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대하여 오하이오 켄트 주립 대학교 학생들은 반전시위를 벌였다. 미국의 주방위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발포했고, 그 과정에서 4명이 죽고 9명이 다쳤다. 이처럼 반전운동을 대하는 미국정부의 태도는 무자비했다.

 

그리고 1970년엔 1968316일 미군이 벌인 최악의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인 미라이 학살(Massacre of MyLai)의 진상이 규명됐고, 이로 인하여 베트남 전에서의 미국의 이미지는 최악이 됐다. 1971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오즈번이라는 사람의 자백을 통하여, 1968년부터 1971년 까지 미국의 피닉스 작전(Operation Phoenix)으로 인하여 총 27000명 이상이 어떠한 근거나 물증 없이 베트콩으로 몰려 학살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부활절 공세. 1972년 하노이는 다시 한번 대규모의 공세를 감행했다. 이번엔 전차와 장갑차 수백대를 동원했지만, 막강한 미군의 공군력 앞에서 많은 손실을 입는다.)

  

무튼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한 닉슨 정부는 완전한 철수를 꺼려했고, 베트남 전 참전 군인들까지 반전운동 대열에 합류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과 1971년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한다. 1972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대규모 공세인 부활절 공세(Easter Offensive)’를 막강한 공군력을 동원하여 무마시킨 뒤,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마지막의 대규모 폭격을 북베트남에게 감행한다.

 

미국의 마지막 협박에도 북베트남은 굴하지 않았고, 19731월 미국은 파리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했지만,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에 지원했다. 남베트남은 1800대 이상이나 되는 미국 항공기를 소유했기에, 군사력이 과장되어 선전됐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미국이 주고 간 것이지 남베트남은 그걸 굴릴 돈이 없었고,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197412월 북베트남 정부는 남베트남을 통일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19751월 북베트남군은 실험삼아 남베트남군이 있는 푹롱 성을 공격했고 3주 만에 점령했다. 197531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군의 주요거점지인 부온마투옷을 점령함으로써,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가는 길을 확보했고, 1975326일 중부에 고립된 최대의 기지이자 도시인 다낭이 함락되고, 남베트남군은 궤멸된다. 197547일에는 사이공 동쪽 64 Km 부근에 있는 쑤언록에서 남북베트남군은 전투를 치렀고, 420일 남베트남 지휘부는 쑤언록을 방어하던 군대에게 수도 사이공으로 후퇴를 명한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59식 전차가 대통령궁의 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제국주의자들의 패배로 끝났다.)

  

당시 대통령이던 티우는 부정축재로 모은 금괴 2톤을 몇 대의 비행기에 실은 뒤, 베트남을 탈출했고, 19754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 군대가 사이공으로 진군하고, 대통령궁에 59식 전차를 진격시킴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로써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승리고 끝난다.

 

7. 결론  

(전환시대의 논리. 대한민국의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 선생이 쓴 책이다. 반공주의가 극에 달하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시기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파악한 책이기도 하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에게 있어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전쟁이자, 최초로 패배한 전쟁이다.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미라이촌에서 504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했고, 피니스 작전을 통해 일정한 물증과 근거가 없는 민간인 2만 명 이상을 재판 없이 학살했으며, 이 나라를 무차별 폭격하고 고엽제를 살포하여 2백만 이상이나 되는 민간인을 도륙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했지만, 이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응오딘지엠 괴뢰 정부를 수립하여 반민중적인 반공독재정권을 지원했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다.

 

대한민국의 수구세력들은 당시 미국이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주장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남베트남 정권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에 빌붙어 호의호식하던 친프랑스 민족반역자들이 합쳐진 정권이었다. 당시 150만 이상이던 남베트남군 지휘관들 중에 프랑스 식민지 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은 육군 중령 1사람 밖에 없었던 데에 비해,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과 베트콩측의 지도급 인사 31명 모두가 베트남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항불 항일 독립운동가들이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베트남 민중이 어디를 지지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베트남의 민족반역자들을 지원했고, 결국 이 독립운동가들이 이끄는 군대에게 패배했다. 물론 베트남 전쟁 전사자 측면에서 보면 미국은 58천명이 전사했던 데에 비해,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은 100만 이상이 사망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 또한 막강한 전력을 잃었다. 항공기 3700대와 헬기 5000대 그리고 장갑차 및 탱크 800대 이상이 베트남 전쟁에서 파괴됐다. 즉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치른 손실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얘기다. 

(캐나다 종군기자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책이다. 이 책은 1980년대 13부작 짜리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정리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와 기자의 경험담을 이 책에 담고 있고, 베트남 전쟁의 전개 양상을 아주 잘 정리했다. 베트남 전쟁을 아는데 있어 꼭 읽어봐야할 명저다.)

  

이야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리자면 베트남 전쟁은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이 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운 민족해방전쟁이고,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싸운 위대한 혁명가이다. 수구세력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를 부정하려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나온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한 세기에 걸친 외국인의 지배가 그들을 연옥으로 몰아넣었고, 또 다른 한 세기의 전쟁이 그들을 질곡으로 이끌었지만, 그들은 의연하게 부활했다. 인류 역사는 베트남 민족의 용기와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아시아의 작은 국가가 스스로의 힘으로 민족 재통일을 이룩한 것보다 더 위대한 본보기는 이전에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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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70주년이 넘었다. 현재 한반도는 평화를 향해 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북한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다. 특히 역사의 경우 그러하다. 가까운 곳에 있지만, 아직 잘 알지 못하는 북한의 역사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다. 최근 북한을 공부하기 위해 김성보 교수가 쓴 북한의 역사를 읽었다.

 

1. 과연 북한은 적화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는가?

 

북한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네이버 뉴스 기사에 북한에 대한 기사가 나올 때 마다 북한은 한국을 적화통일 하고 싶어 한다.”라고 주장하며, 반북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북한이라는 나라는 믿을 만한 세력이 아니고, 적화야욕이 가득 찼기에, 현재 문재인 정부가 추구하는 남북평화 노선은 적국 북한에게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행위”(그러나 트럼프가 남북 평화를 얘기하면 입을 다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주장들은 북한의 역사를 모르고서 하는 일종의 반공주의적인 프로파간다다. 물론 1960년대나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이 남한보다 잘살았던 것은 맞는 말이다. 따라서 북한은 1968년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을 남한에 침투시켜 박정희를 사살하려 했던 것과, 울진 삼척 지역에 120명을 침투시켰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미국의 함선을 북한이 나포했던 푸에블루호 사건도 그때 일어났다. 물론 이 이면에는 6.25 전쟁 당시 빨치산 투쟁과 베트남 전쟁에서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투쟁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대실패였고, 오히려 역으로 대한민국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게 피해망상적인 반공주의를 강화시키는 역효과를 만들었다. 그 전략에 실패를 맞본 북한은 이 전략을 버리고, 1970년대 들어서 7.4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노선을 수정했다. 소위 대한민국의 극우세력들이 말하는 적화통일노선은 1960년대 북한이 스스로 폐기했다는 얘기다. 거기다 남북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차이는 1980년대 남한이 앞섰다. 즉 현재 대한민국의 반북주의자들이 얘기하는 적화통일론은 1950,60년대 북한을 바라보던 관점에서 바라본 시대역행적인 관점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말했듯이 한국도 변하듯이 북한도 변한다. 따라서 우리는 극우세력들이 주장하는 적화통일론에 1도 공감할 필요가 없다.

 

2. 북한의 경제

 

위에서 상술했듯이 한국전쟁과 1960년대 시점에서 남북한을 놓고 보자면 북한은 분명히 남한보다 잘살았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폭격을 전쟁 끝날 때 까지 받았던 북한은 전쟁이 끝난 뒤, 경제재건에 앞장섰다. 1950년대 후반에는 천리마 운동이라 하여 경제를 발전시켰고, 그 덕분에 당시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정권 시기의 한국보다 잘살았다.

 

그 뿐만 아니라 1960년대 북한은 군대를 현대화시키는데, 많이 투자했고,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 남한을 압도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북한의 경제력이 그리 낙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의 경제가 위태로워 진 것은 1980년대부터다. 1980년대의 북한은 경공업과 식량 생산에 있어서, 국가가 제시한 할당량에 못 미치는 생산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1989년 베를린 장벽을 시작으로 동구권의 몰락으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과의 무역이 끊겼고, 소련 해체 이후 탄생한 러시아연방의 옐친정권은 북한을 독재정권으로 보며 지원을 해주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가 덮쳤고, 이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는 극심했으며, 국가에서 실시하던 배급제가 끊겨 인민들이 아사하는 일이 일어났다.

 

동유럽 해체 이후 북한이 동유럽이나 소련처럼 붕괴될 거라 믿었던 미국은 북한이 망하도록 고립시켰다. 그 결과 1990년대 북한이 겪어야 했던, 경제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김일성 사후 김정일 집권 기간인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서 발생한 대규모 기근 사태로 인하여 200만 명의 북한 인민들이 아사했다.

 

3. 북한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따랐는가?

 

북한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항상 나오는 말이 있다. 북한은 과연 사회주의 국가가 맞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일제 패망 이후 소련 군정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북한은 분명 소련식 사회주의 노선을 따랐었다.

 

그러나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을 기점으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되고, 그해 8월에는 몇몇 파벌세력들이 김일성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면서부터 북한의 체제는 점차 인민민주주의에서 스탈린주의로 바뀌었고, 더 나아가 김일성은 1960년대 중소분쟁시기 마오이즘의 영향을 받은 주체사상을 만들어 자신의 통치에 이를 적용했다.

 

그 주체사상의 폐해가 극에 달한 것이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을 개정하면서 부터다. 이때부터 북한 체제는 일당권력에서 더 나아가 일인권력을 구축했고, 1980년에는 그의 아들 김정일 까지 가세하여, 권력 세습의 틀을 마련했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그리고 차우셰스쿠도 해내지 못한 권력 세습을 북한이 해냈다.

 

따라서 북한은 1972년 주체사상이라는 것을 완벽히 적용하면서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버린 거라 볼 수 있으나, 그 이전의 북한사회는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담긴 체제였던 것은 맞는 말이다.

 

4.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최초로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전쟁이다. 3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3백만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100만 이상의 양측 군인들이 사망했다. 세계최강대국인 미국도 이 전쟁에서 3만 명 이상의 병사가 전사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극우적인 시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을 대한민국을 지킨 전쟁 혹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봄으로써, 전쟁 시기 있었던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북한에 대한 적대적인 의식을 갖는다.

 

물론 한국전쟁은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고, 전쟁시기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자유민주수호로 미화하는 세력들은, 북한에 대한 적대의 식을 부추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반북주의로 인하여 감춰진 한국전쟁의 진실은 인민군이 했던 양민학살 보다 대한민국 국군과 극우청년단체에 의하여 벌어진 양민학살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인민군 학살이 1이면 국군의 학살은 6,7이다. 이는 진실화해조사위원회에서 조사한 거라 빼도 박도 못하는 팩트다.), 전쟁 기간 동안 미국의 야만적인 폭격으로 100만 이상의 북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한국전쟁을 대한민국의 관점 즉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보다보면, 이러한 것들은 외면하게 된다.

 

정리하자면 한국전쟁은 분명 북한이 일으킨 것이 명백한 사실이기는 하나, 잔인성이나 비인간성에 있어서 우리 측이 더 했고, 이를 토대로 하여 한국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된다.

 

5. 미국이냐 소련이냐 분단의 책임에 대하여

 

극우주의자들은 해방 이후 분단의 책임은 미국보다 소련에게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해방 이후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창설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탄압한 쪽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다. 당시 해방군으로 들어온 소련군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자치활동을 인정했고, 자신들이 지원하던 김일성과 협력하도록 했다. 즉 들어오자마자 남에서 활동하던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죄다 해산시켜 버리고, 총독부 행정기관을 그대로 유지하여 친일세력들을 앞세웠던 미국의 처사하고는 달랐다.

 

굳이 소련의 한계를 뽑자면 신의주 학생 사건과 신탁통치 논쟁으로 인하여, 반탁을 주장하던 조만식을 구금해버린 사건일 것이다. 이를 잘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건 소련은 초기에 인민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조만식을 중심으로 모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하고 협력하고자 했었다.

 

거기다 소련은 한반도를 집어 삼키겠다는 욕심에 차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소련은 동유럽에서의 세력확장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의 한반도 적화의 야욕에 차있었다느니 혹은 분단 최대의 원흉이 소련이니 하는 주장은 역사를 왜곡한 주장이다.

 

6. 현재의 북한을 바라보며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은 그의 아들 김정일이 통치했고, 김정일 사망 이후 그의 아들 김정은이 통치하게 되며, 현재까지 북한을 통치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고, 경제를 조금씩 회복해 나갔고, 김정은 정권 들어서면서, 경제성장을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물론 지금도 시골 가면 많이 낙후된 도시들이 있긴 하지만, 최소한의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됐다.

 

발전하고 있는 북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앞으로의 북한이 얼마나 발전하고, 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는, 북한을 얼 만큼 더 잘 아느냐 에서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북한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필수불가결하다.

 

북한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던 필자로선 이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이 책의 몇몇 부분은 필자의 견해하고는 안 맞는 부분도 있긴 했지만, 대체로 저자의 글에 공감하며 읽었다. 이 책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음에는 작년에 출판된 김정은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북한의 역사를 좀 알았으면 한다.

 

북한을 바르게 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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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 감상평: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알게해주는 영화

올해 초 제가 영화관에서 처음보게된 영화는 태평양 전쟁 시기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일제에 맞섰던 조선어학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말모이‘입니다.

1910년 부터 1945년 까지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우리의 나라를 빼았고, 수탈하고, 무수히 많은 생명까지 뺏는것도 모자라 우리나라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기 위해 말과 글까지 없애려고 했습니다. 특히나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어를 말살하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정책은 더더욱 심해졌습니다.

창시개명과 황국신민화운동 그리고 강제징용을 시작으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민족말살정책은 태평양 전쟁으로 극에 달했습니다. 그들의 탄압으로 인하여 수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파가 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며 민족말살정책에 앞장섰습니다.

그런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 나라의 말과 지키기 위해 조선말 사전을 완성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조선어학회 학자들입니다.
민족말살정책을 통하여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려 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을 구속하고 탄압했지만, 우리의 말과 글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세계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난 뒤, 그들이 숨겼던 조선어 사전 원고가 발견됐고, 그들이 지킨 사전 원고를 가다듬어 1947년 한글날에 ‘조선말 큰사전‘ 1권을 을유문화사에서 출판하게 됩니다.

오늘 사촌동생이랑 ‘말모이‘를 보며 우리말과 글을 지켜주신 학자들과 이를 위해 협력한 무명의 조선인들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19세기 당시 고도로 발달된 자본제국주의 국가들의 지배를 당했던 나라들 중엔 자신든의 고유 언어와 문자를 잃게된 나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를 생각하니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울 따름입니다.

우리 말과 글을 지켜준 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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