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

20세기 전쟁사에 있어 지배받던 식민지 세력이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빛나는 승리와 독립을 쟁취한 전투가 있다. 그게 바로 1954년 프랑스군이 대패한 디엔비엔푸 전투다.

1. 배경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항복했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호치민은 전함 미주리호에서 있을 일본의 공식적인 항복 날과 맞추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강대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북베트남에는 중국 국민당군을 남베트남에는 영국군을 주둔시켰다. 이후 중국 국민당군은 철수했지만 영국군은 과거 베트남을 식민지로 삼았던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가 베트남에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베트남을 다시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1946년 호치민은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하여 그 나름 베트남 독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협상은 쉽지 않았고 1946년 11월 북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 전세는 프랑스 군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에 있는 베트민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호치민을 체포할 뻔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에 맞서 싸웠다. 1949년 중국의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이 났다. 프랑스에 맞서 싸우던 베트민군에게도 매우 든든한 우군이 생긴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프랑스군에 맞서 싸우고 있던 베트민에게 식량과 무기 그리고 탄약을 지원했다.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물자 지원을 받은 베트민은 1950년 9월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베트민군은 1951년 프랑스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미국으로부터 네이팜 폭탄을 비롯한 온갖 물자를 지원받은 프랑스군은 네이팜 폭탄으로 이에 맞섰고 1951년 베트민의 총 공세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비록 1951년 베트민의 공세가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군의 상황이 진전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자체가 정글전과 게릴라전 위주였고 따라서 프랑스군의 전선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심지어 1953년 베트민군은 북부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중국의 국경지대를 완전히 장악한 뒤, 라오스까지 진격 하고자 했다. 이에 고심하던 프랑스군은 라오스와 베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인 디엔비엔푸를 선정하여 프랑스 육군 공수부대를 투하해서 지역을 점령한 후 요새를 건설하고, 해당 요새에 최대한의 병력을 모아 베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을 유인하여 싸우고자 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다시 한 번 베트민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줘서 전세를 되돌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2. 프랑스군의 준비

프랑스 육군은 해당 작전을 위해 현지 주둔 병력은 물론 본국에서 지원 가능한 거의 모든 병력, 장비, 물자를 총동원했다. 그 숫자를 다 합치면 투입병력만 16,000명, 지원 병력까지 합치면 2만 명에 육박했다. 당장 요새를 건축하기 위한 각종 장비는 물론이거니와, 포병도 105mm 견인곡사포를 28문이나 확보했고, 심지어 전차도 경전차지만 M24 채피를 분해해서 수송기로 실어와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으로 10대를 확보했다. 여기에 더해서 요새를 지원할 항공전력도 프랑스 공군의 F8F 베어캣을 중심으로 한 270여대를 배치했으며, 수송기도 100대를 확보했다.

이런 식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침공부대는 1953년 11월 20일 2개 대대규모의 공수부대(제6식민지공수대대(6 BPC), 제1샤쇠르공수연대 2대대(II/1 RCP))가 현지공수강하에 성공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순식간에 전체 병력을 공중으로 수송하는데 성공했으며, 즉시 비행장을 건설하고 비행장을 지킬 요새를 건축했고, 비행장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반경 3km 이내에 8개나 되는 전초진지를 탄탄하게 건축하고 병력을 배치했다.

3. 디엔비엔푸 전투 시작과 승리

사실 디엔비엔푸는 사방이 산에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한번 고립되면 거의 탈출이 불가능한 지역인데다가, 애초에 공중에서 병력을 투하해서 만든 요새라 처음부터 프랑스가 지배하는 지역과의 육상교통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민군의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있던 프랑스는 병력의 열세와 보급의 문제를 압도적 화력과 항공수송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베트민군은 다수의 대공포를 포함한 포병화력을 모아놓고 있었다.

베트민의 보 웅우옌 지압(Vo Nguyen Giap) 장군은 이미 프랑스가 결전을 시도할 것이라 예상하고 전력을 비축해 놓고 있었고,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투입을 파악하자 3개 사단을 디엔비엔푸로 집결시켰다. 다수의 병력을 험준한 산악지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해 보응우옌잡 장군은 육군 제351공병포병(Engineering Artillery)사단에게 디엔비엔푸로 가는 도로 82km를 확장시키라고 명령했고, 사단 병력뿐만 아니라 민간인들까지 가세한 결과 디엔비엔푸로 통하는 확장 도로가 완성되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베트민 병력들은 중기관총, 대공포, 야포 등을 손수 인력으로 옮기거나 혹은 부품 단위로 분해하여 정상에서 조립하는 식으로 설치를 하는 상상을 초월한 집념을 보여줬다. 당시 베트민 육군은 자전거를 개조하여 수백 킬로그램의 군수물자를 운반하였는데 산악이동중에 타이어가 손상되면 헝겊을 말아 타이어대신 사용했다.

프랑스군이 투입된 지 약 2개월이 지나고 1954년 1월말이 되자 베트민군은 프랑스군 포병의 배치를 파악할 목적으로 간헐적으로 포병 공격을 가하는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프랑스군의 정찰을 방해했다. 그러면서도 베트민군은 약 5만 명의 대군을 집결하는 동안 섣부른 공격을 삼갔고, 마침내 공격자 대비 방어자의 승리 비율인 3대 1의 상황을 만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프랑스의 예상과는 달리 베트민군은 프랑스군의 4배에 달하는 포병과 방공 전력을 투입하였다.

1954년 3월 13일부터 베트민군이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압도적 포병 화력에 의해 프랑스군의 북동쪽 전초진지가 순식간에 함락되었다. 다음날에도 압도적인 포병 화력의 지원을 받은 베트민의 파상공세가 정예 제7알제리 척후병 연대 5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북쪽 진지에 가해졌고, 이 진지는 이틀만에 함락되었다. 이렇게 북쪽의 고지대를 장악한 베트민군은 비행장에 정밀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때문에 비행장이 폐쇄되자 이제 프랑스군의 항공지원은 낙하산을 통해서만 가능해졌다. 한편 이렇게 프랑스군의 진지 2군데가 차례로 함락되자 사기가 땅바닥에 떨어진 베트남인들로 이뤄진 징병군이 다음날 자욱한 안개를 틈타 항복해 왔고, 이들이 지키고 있던 옆 진지마저 베트민에게 넘어갔다.

물론 프랑스군도 놀고 있던 것은 아니라서 전투 초기에는 매일 10회 이상의 공습을 퍼붓고, 보급물자는 물론 하루 100명 이상의 증원 병력을 낙하산으로 투입하는 등 지속적인 증원을 했다. 그러나 베트민군이 투입한 중화기의 숫자도 많아서 요새의 화력으로 대응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당장 대공포만 80여문 이상이었으므로 공습하는 프랑스 공군 항공기에 대해 맹렬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전투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측 항공 전력도 날로 축소되었다.

전투 개시 며칠 만에 북쪽의 3개진지가 모두 베트민에게 넘어갔고 프랑스군에게 남은 것은 중심부의 4개진지와 남쪽에 멀찍이 떨어진 1개 진지였다. 베트민은 잘 방어되고 있던 남쪽 진지를 본진과 차단시킨 채 본진에 맹공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위태위태한 상황에서도 간신히 붕괴를 막아내었다. 본진 주변의 개활지에서 공세를 퍼붓느라 1주일간 많은 인명피해를 본 베트민군은 이제 전략을 바꾸어 참호를 파면서 접근해 왔고, 이후 약 1개월간의 전투는 제 1차 세계대전 시대의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베트민 측은 뚜렷한 성과 없이 발생한 엄청난 사상자와 의약품의 부족으로 사기가 심각하게 저하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측 역시 보급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참호전에 익숙하지 못한 지휘부가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4월 말 베트민은 서북쪽 진지 일부를 점거하고 비행장 영역 대부분에 화력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프랑스의 낙하산 공수조차도 착륙 지점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5월로 넘어가자 베트민은 카츄샤 다연장로켓마저 구해와서 파상공세를 퍼부었고, 프랑스군은 TOT 사격을 통해 적의 대열을 붕괴시키면서 저항했지만 병력과 물자 모두에서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막바지인 5월 6일에는 베트민이 맹랑한 심리전까지 벌였다. 프랑스군의 사기를 꺾기 위해 프랑스 노래를 불렀는데 다른 노래도 아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래였다. 결국 5월 7일 저녁 프랑스군의 모든 진지가 함락되었고 프랑스군은 베트민군에게 항복했다.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는 이로써 끝이 났다.

4.결론

56일간 지속되었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총 2000명에서 3000명이 전사했고 1만 명 이상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은 8년간의 전쟁에서 약 7만 명이 전사했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의 승리로 끝난 뒤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를 함으로써 8년간 지속되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이 났다.

디엔비엔푸 전투는 식민지 지배를 받던 베트남이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스스로 승리를 쟁취한 위대한 전투이자 식민지 지배를 받는 나라가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런 저항정신을 가진 베트남이었기에 미국과 싸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참고 문헌

*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푸른숲(2003)

*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을유문화사(2002)

*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2013)

*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 정토웅, 가람기획(2010)

*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손영운/김태완, 주니어김영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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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알아두어야합니다 2018-08-2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디엔비엔푸는 마오쩌둥이 사단급에 해당하는 최신무기를
공짜로 제공해주어서 가능한것이었지
그 이전에는 숫제 나무몽둥이로 프랑스 몰아내잔 꼴밖에 안되었음

NamGiKim 2018-08-29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리고 후에 남베트남의 지도자가 될넘들은 그 당시 프랑스에 부역했죠. 호치민과 지압같은 사람들은 프랑스에 맞서 싸울때 프랑스가 식민지 유지하도록 전비 70%를 댄 것도 미국이었고, 어쨌든 이겨서 몰아낸거니 대단한거지. 난 적어도 그렇다고 봄.
 



(주의 이 게임 평은 엄청난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이 게임을 할 사람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포일러 당하는게 싫고, 게임을 즐기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이 게임을 시작해서 다 깨고 난 뒤 평을 감상하는 방법이 있고, 그냥 읽는 방법이 있습니다. 선택은 알아서~~)

개인적으로 컴퓨터게임을 자주 한다. 현재 유행하는 오버워치나 배틀그라운드(이건 해본적 없고 오버워치는 가끔 pc방에서 하는 정도) 같은 온라인 게임도 하지만 난 기본적으로 게임안에 영화 같은 스토리나 연출 그리고 반전이 들어가 있는 게임을 아주 좋아한다. 그 중 지금까지 내가 해본 게임 중에 나를 가장 감동시킨 게임이 있다. 그 게임이 바로 마피아2이다.

이 게임을 처음 해본 건 2014년도였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감동적인 스토리를 가진 게임이었기에 지금까지 총6번 이상이나 정주행했다. 그리고 주인공이 아주 잘생겼다. 게임의 배경은 1940~50년대 미국 뉴욕에 있던 마피아들의 이야기를 시칠리아 출신인 청년 비토 스칼레타를 통해 보여준다. 지금부터 비토 스칼레타를 통해서 마피아2의 스토리를 얘기하겠다.


1. 게임 스토리


(어린시절 비토의 눈에 들어온 미국. 그는 미국으로 이민와서 본 것들이 정말 멋있는 것도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추악한 이면도 봤다. 아메리칸 드림은 그야말로 악몽보다 더 했다.)

마피아 2의 주인공 비토 스칼레타는 1925년 시칠리아에서 태어났다.7살이 되던 해 스칼레타는 가족이랑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다. 미국으로 이민 온 스칼레타는 미국에 살면서 정말 화려한 것들도 많이 봤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국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하고 더러운 모습도 보게된다.(그의 아버지도 사실상 막노동에 가까운 최하층 생활을 하다 죽었다.)


(체포된 비토는 감옥가는 대신 군복무를 선택했고, 1943년 18살의 나이에 2차대전에 참전했다.)

청년시절 비토는 조 바바로라는 친구를 만나 비뚤어진 생활을 하게 됐고, 보석상을 터는 도중 경찰에게 체포된다. 그에 나이18이었다. 하지만 시대가 2차세계대전 때였고 미국 정부가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할 이탈리아인들이 필요한 시기기도 하였다. 비토는 공수부대에 입대하게되고 1943년 시칠리아 상륙 작전 중 하나인 허스키 작전에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다. 1945년 비토는 이탈리아 전선에서 전투도중 부상을 당하고 휴가를 얻어 미국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친구 조의 도움으로 서류를 조작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복귀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게 됐다.

(군에서 전역한 비토는 민간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가족은 2000달러라는 빚이 있었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비토는 친구 조와 함께 마피아가 되기위해 여러 일을 하게 됐다.)

비토의 가족은 생전에 아버지가 사채업자로부터 빌린 2000천 달러라는 빚이 있었다. 결국 비토는 빚을 갚기 위해 비토는 어두운 일을 하게 됐다. 사람을 죽이고, 주유권을 몰래훔치고 그야말로 범죄에 손을 댄 것이다. 그런 범죄행각을 통해서 비토는 2000천 달러를 갚았다.

(주유권을 불법으로 팔았던 비토는 결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고 10년 형을 선고 받았다. 교도소로 가게 된 비토는 앞으로 젊은 청춘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래도 리오 글란테라는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도움으로 6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가족의 빚을 해결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토는 국가재산인 주유권을 불법으로 팔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됐고 법정에서 징역10년형을 받았다. 결국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된 비토는 처음에는 아주 고달픈 감옥생활을 했다. 감옥생활을 하던 중 동료(리오 글란테)가 생겨 6년 만에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생활 초기에 비토의 어머니는 병으로 죽고, 20대 초반 시절 죄수를 인간취급 하지 않는 간수들에게 노골적인 폭행을 당하는 둥 참으로 고달픈 감옥생활을 해나갔다.

(풀려난 비토는 자신만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서 조직생활을 해나간다. 물론 그 기간 동안 돈도 벌고 좋은 주택도 구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안아 아일랜드 조직으로부터 습격받아 또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1951년 4월 감옥에서 나온 비토는 다시 돈을 모으고 마피아로써의 삶은 하기 위해 다시 손에 피뭍히는 일을 하게 됐고, 그 대가로 카를로 팔콘이라는 마피아가 이끄는 마피아 조직의 조직원이 되었다. 마피아가 된 비토는 그 시절 사람을 죽이고 때리는 일을 했지만, 돈을 모으고 좋은 주택까지 구해서 살 수 있게 되었다.

(빈털터리가 된 비토는 다시 돈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잠시 사채와 마약에 손을 뎄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어느 날 비토는 아일랜드계열 조직의 습격을 받아 그나마 있던 좋은 집과 돈을 잃었다 비토에게 있어서 다시 큰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비토와 조 그리고 그들의 친구인 헨리는 유대인 사채업자로 부터 “35000달러를 2주안에 55000달러를 갚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돈을 빌려 중국조직인 삼합회에서 대마초와 마약을 2만 달러에 사들였다. 물론 그들의 계산은 그들이 산 물품들을 팔아 12만 달러를 만들어 자신들의 몫도 챙기겠다는 계산이었다. 그 계획은 나름 성공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지만 거기에 있던 조와 비토의 친구인 헨리가 중국인 조직으로부터 끔살당했고, 자신들이 공들여 모은 돈까지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에 분노한 그들(비토와 조)은 삼합회를 습격했고 습격한 기지의 삼합회 조직원 반 이상을 죽인뒤 대마초와 마약을 구매했던 대장까지 죽였다. 심문도중 삼합회 보스는 비토와 조의 동료인 친구 헨리가 정부의 첩자라는 소리를 듣지만 비토와 조는 이를 믿지 않았다.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는 동시에 비토는 자신에게 있던 큰 빚까지 동시에 갚았다.)

그 다음날 조와 비토는 돈을 다 갚게 됐다. 돈을 갚기 전 비토는 자신이 알고 지내던 항구쪽 두목인 데릭 파팔라도가 자기 아버지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복수 한 뒤 데릭 사무실에서 거액의 돈을 얻는 바람에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돈을 갚은 그 다음날에 또 다른 문제가 터지게 되었다. 비토가 감옥에 있을 당시 그를 4년이나 감형시켜줬던 사람(리오글란테)이 차를 몰고 와 차안에서 비토에게 “어마어마한 문제가 터졌고 헨리라는 놈은 정부첩자이며 중국인 조직은 할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사실 비토의 친구 헨리가 비토가 속해있던 조직에 들어오기 전 리오 글란테가 죽을 위기에 놓이자 비토는 리오 글란테의 목숨을 비밀리에 살려줬었다.

따라서 리오 글란테는 비토에게 기회를 줬다. 비토가 살 수 있는 조건은 비토 자신의 조직의 우두머리인 카를로 팔콘을 죽이는 것이었다. 카를로를 죽이러 천문대에서 교전하던중 비토는 카를로와 대면하게 되는데 조가 비토의 머리에 총을 겨냥했다. 그러나 조는 자신의 친구인 비토를 쏘지 못했고, 그 둘은 카를로를 죽인다.

일을 끝낸 뒤 리오 글란테는 비토를 환영하러 왔고 비토와 조는 각기 다른 차에 타게됐다. 첫 번째 차를 탔던 비토는 조가 탄 차는 다른 방향으로 꺾는 것을 보았지만, 리오글란테는 “조는 우리거래에 포항되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 마피아2는 “마피아를 위한 천국따윈 없다”는 글과 동시에 끝이 난다.

(20대 시절부터 마피아의 길을 걸어온 비토는 마피아 생활을 하며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었다. 그러나 그 아메리칸 드림은 참으로 고달프고 허황된 것이었고, 그가 속해있던 마피아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세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2. 마피아2가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

위에서 언급했듯이 난 이 게임을 6번 이상이나 정주행했다. 이 게임을 여러번 하면서, 당시 미국의 시대상과 대부분의 이민자 출신의 미국인들이 이룰 수 없던 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었다. 즉 나는 이 게임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빈부격차의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이 게임의 주인공 비토 스칼레타가 가난한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의 집에서 태어나지 않고 잘사는 집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주인공 비토는 너무나도 가난했기에, 어쩔 수 없이 범죄와 살인이 난무하는 마피아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주인공 비토는 그 길 외에는 다른 길로 나갈 수 있었을까?와 같은 질문들 말이다. 이런 질문들은 내가 이 게임을 반복해서 하면서 내 머리 주변을 맴돌았다.

마피아2는 지금까지 내가 해본 스토리 게임 중에서 제1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명작이다. 지금까지 해본 스토리 게임 중에 이 게임의 스토리를 뛰어넘는 명작을 아직 못봤다. 정말 많은 생각과 의미를 던져주는 게임이다. 다만 너무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게임의 자유도가 떨어지고, 기승전 운전인 것은 단점이긴 하지만 매우 탄탄하고 감명깊은 스토리가 이를 다 커버하고도 남는다. 안 해본 사람은 해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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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선언 범우문고 88
마르크스.엥겔스 지음, 서석연 옮김 / 범우사 / 2004년 2월
평점 :
품절


지난 5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해서 개봉했던 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영화관에서 봤다. 워낙 개봉하는 곳도 적고, 공산주의하면 절대악으로 생각하는 편협하기 짝이 없는 고정관념이 사회를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다보니 네이버 영화 평은 영혼없는 알바들의 평테(평점테러)로 도배되어 있었다.  영화 청년 마르크스는 청년 마르크스가 자신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 19세기 부조리한 체제를 변혁시키기 위해 위대한 선언문인 '공산당 선언'을 쓰기 까지의 스토리를 다뤘다.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런던에서 책으로 출판한 선언문이다. 이 100페이지 안팎의 선언문은 굉장한 호소력을 가졌었다.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 책을 읽고,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 저항했다. 암울했던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주화 투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는 실패한 사상"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사회주의는 마치 "실패한 사상 혹은 불가능한 사상"으로만 간주되고 있는듯 하다. 특히 지금도 메카시즘이라는 반공주의적 레파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국사회는 더더욱 그런듯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주의가 다시한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술의 발전이 보여줬다. '4차산업혁명'이 바록 그것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노동의 종말과 기술이 발전이 온다면 그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는 19세기에 쓰인 이 위대한 선언문이 굉장히 낡은 사상이라 폄하한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데로 소련이라는 사회가 막스가 얘기한 사회주의였다면 그말은 보다 현실성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소련 사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단계에서 멈췄던 사회주의 국가지, 막스가 얘기한 세상은 아니었다고 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자본주의에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나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는 자본주의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또한 고질적인 문제가 많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이 목표로 하는 사회는 과거의 유물 따위가 아닌 현재 서방 자본주의보다 더 좋은 사회를 목표로 해야한다!!

 

공산당 선언이 매우 야만적이었던 19세기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했다면, 21세기 자본주의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식 천박한 자본주의 혹은 미국식 자본주의 보다 더 나은 세상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주읠르 공부하기 위해선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것이 필수다.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은 자본론에 비하면 분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처음읽는 이에게는 다소 난해한 용어들이 적잖게 존재하는 책이다. 나 또한 3년전 이 책을 읽었을 때 그런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래도 이 책이 나한테 준 호소력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엄청났다. 나와 같은 20대 젊은 이들이 이책을 읽기를 적극 권한다. 마지막으로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인용하겠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다. 전 세계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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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945 - O.S.T.
Various Artists 노래 / 워너뮤직(WEA)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학 동기 형이랑 치맥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동기 형은 나한테 ‘서울 1945’라는 드라마를 추천해줬다. 그 얘기를 들은 뒤 나는 드라마 서울 1945를 보기 위해 인터넷을 찾아봤고, 인터넷 다운로드 사이트에 들어가 1화부터 71화까지 전부 다 다운로드 받았다. 그게 2015년 1월이었다. 드라마의 이름을 알려준 형은 “해방전후사를 그럭저럭 잘 보여준 드라마”라고 나에게 얘기해줬기에, 난 그냥 막연히“그런가 보다!!”했다. 드라마 서울 1945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게 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현대사를 보는 관점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서울 1945를 다 본 나는 이후 이 드라마를 3번씩이나 정주행했다. 왜냐하면 그만큼 정주행할 가치가 있는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드라마 서울 1945는 1930년대 일제시기부터 1953년 한국전쟁 휴전협정까지의 해방전후사를 기존의 반공주의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친일파와, 사회주의자들을 역사 속에서 재조명한 수작이다. 단순히 친일파에 대한 비판에서만 멈추지 않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친일파가 되었는지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왜 그 시기에 사회주의자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매우 잘 보여줬다. 무엇보다 우리 현대사에서 매우 잊혀진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과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재평가도 이루어 졌다.(이 드라마를 통해서 몽양 여운형에 대해 개인적으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역사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단순히 이분법적으로만(예를 들면 인민군 나쁜 놈 국군 정의의 사도?) 보지 않으려 했던 것도 이 드라마를 높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드라마 서울 1945에서 개인적으로 혁명가 최운혁의 삶이 가장 가슴이 아팠고 많은 감동을 줬다. 가난한 집안의 아들→법관이 되려다 실패한 인재→소련유학→동북항일연군에 복무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해방 이후 소련군과 함께 입성→이후 서울대학 법학교수로 활동→여운형 노선에 합류하여 좌우합작운동에 투신→여운형 암살 이후 월북하여 남로당에 입당→남로당 입당 이후 남파공작원으로 활동→한국전쟁 발발 이후 인민군 중좌(중령)로 참전 및 법관으로써 활동→1.4후퇴 이후 빨치산으로 게릴라 투쟁을 하다 1951년 8월 체포당한 혁명가 최운혁의 일생이 참으로 많은 여운을 남겼다. 드라마 서울 1945는 최운혁의 일대기를 통해 해방전후사와 분단의 비극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선 인간성을 잃지 않는 주인공 최운혁의 모습도 매우 잘 보여준다. 1930,40년대 사회주의자가 되었지만 해방 후 좌우익 연합을 위해 헌신하는 최운혁의 모습,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이 기정사실이 됐음에도 통일정부 수립의 꿈을 버리지 않았던 최운혁의 모습, 한국전쟁이 시작될 거라는 사실을 알자 전쟁에 대해 매우 회의적으로 생각하고 전쟁에 반대하던 최운혁의 모습, 한국전쟁 시기 인민군의 무분별한 인민재판으로 무고한 양민들 까지 죽어나가자 이에 대해 슬픔과 죄책감을 느끼는 최운혁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시대의 지식인이 느꼈을 고뇌를 아주 잘 보여줬다.

혁명가 최운혁의 일생을 보면서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사회주의를 지지했지만 통일정부수립을 바라다 결국 전쟁 시기 빨치산으로 갈 수 밖에 없던 그의 운명이 참으로 가슴 아팠다. 드라마 서울 1945를 보고나서 한국현대사를 보는 나의 관점과 인식에 새로운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사라졌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또한 그 시기 부조리한 체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나선 혁명가들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게 되었으며, 좌우를 막론하고 좌우익 합작과 통일 정부 수립에 나섰던 몽양 여운형을 매우 존경하게 되었다. 이 드라마가 나온지도 이제 12년이 흘렀다. 그러나 서울 1945가 나온 이후로 우리 근현대사를 재조명한 영화들은 좀 있었지만, 드라마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정권 교체가 된지 1년이 넘었으니 이제는 서울 1945와 같은 수작이 나올 차례라 본다. 내년에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다룬 드라마가 나온다고 들었다. 좋은 드라마일 거라 기대한다. 비단 약산 김원봉 뿐만 아니라 서울 1945와 같은 한국근현대사를 잘 재조명한 드라마가 나오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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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꼴들이 지껄이는 문재인 적화통일론, 혹은 ˝현 대한민국은 적화통일되기 일보직전이다.˝와 같은 얘기는 환단고기급 개애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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