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한참이던 1960년대 인도네시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대량 학살이 발생했다. 인도네시아 대학살(Indonesia Genocide)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1965년에 시작되었으며, 학살당한 숫자 규모에서 상상을 초월한다. 아무리 낮게 잡은 축소된 수치가 8만 명이고, 최대 30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7610월 당시 인도네시아 국가 보안기구 의장인 수도모 제독은 네덜란드의 한 TV 방송에서 학살 당시 최소 5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한다.”고 증언했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 수는 계속 늘어 하비비 전 대통령은 100만명이라고 했고, 학살을 지휘한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은 300만명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보통의 경우 학살 추정치를 50~300만 명으로 추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도네시아 대학살의 경우 가장 끔찍한 피해를 본 지역이 바로 휴양지로 유명한 발리(Bali)였다. 학살 당시 북부 수마트라와 동부 자바섬의 경우 학살의 규모가 너무나 커서 위생 문제가 제기될 정도였으며, 발리는 제주 4·3 때처럼 진압군에게 잡히는 사람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총살이면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학살당한 사람들의 경우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됐고, 참수당했으며 피부를 벗기는 식의 고문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 그대로 학살의 잔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당시 발리의 경우 섬의 인구가 200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20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와 같은 학살이 일어난 데에는 그 배후에 미국과 CIA가 존재했다. 인도네시아의 독립영웅으로 알려진 수카르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네덜란드에 맞서 잠시 일본에 협력하는 실책을 저질렀지만, 이후 노선을 바꿔 반일투쟁을 전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 지배하려 하자 이에 맞서 4년간의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군 6,000명이 전사했고, 인도네시아군은 45,000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도 대략 수만 명이 사망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학살 대다수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자행됐다. 당시 수카르노는 서방의 지원을 받아 네덜란드에 맞섰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이와 같은 수카르노의 반공노선은 초기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지만, 1950년대 제3세계 노선을 천명하면서 반미·친소 노선으로 돌아섰다. 미국의 CIA1955년에 수카르노 암살을 검토했었다. 이 시기 수카르노는 소련의 흐루쇼프와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나, 동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하면서 인도네시아 공산당과의 연립정부 구성을 보다 광범위하게 했었다. 이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반수카르노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1960년대 수카르노의 반미감정은 더욱 커졌으며, 19658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에 반제국주의 자카르타-프놈펜(시아누크)-하노이(호치민)-베이징(마오쩌둥)-평양(김일성) 을 선언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미국은 1950년대부터 반공성향의 군부 장성들을 규합했고, 그 중 하나인 수하르토를 내세워 쿠데타를 전개했다.

 

인도네시아에서 친미 쿠데타에 성공한 미국은 수하르토 정권의 학살을 도왔으며, 그 결과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의 인도네시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학살은 1968년에서 1969년에 종결됐다. 미국의 닉슨 행정부와 카터 행정부 그리고 레이건 행정부는 이 수하르토 친미독재정권을 민주적인 정권이라며 칭송했다. 수하르토는 거대 다국적기업들을 수익률 높은 제안으로 유치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가족을 위해 실질적인부를 축적했다. 물론 1960년대 인구의 절반 이상에서 1966년 약 12%로 빈곤을 감소시켰고, 수십 년간 꾸준히 연 7%의 경제성장도 보이긴 했다. 그와 동시에 수하르토는 집권 시기 포르투갈로부터 해방된 동티모르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을 유혈 진압했다. 1975년 수하르토는 군대를 보내어 동티모르에서 대략 10~20만 명을 학살했다.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은 1970년대 후반까지 가장 극심하게 전개되었는데, 미국의 카터 정부는 끊임없이 수하르토 정권에게 원조를 제공했다. 그리고 수하르토 정권의 동티모르 학살을 저지하려는 유엔의 시도도 봉쇄했다.

 

1982년에서 1984년까지 레이건 행정부 아래서 수하르토 정권에 판매한 무기는 10억 달러 선을 넘었으며, 이 동티모르 학살은 1990년대 초까지 지속됐다. 19911112일 최소 273명의 동티모르인이 딜리에서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앞서 언급한 수하르토의 가족 제국은 실로 거대했다. 1998년 기준으로 수하르토의 재산은 미화 160억 달러로 추정됐으며, 이는 세계에서 6번째로 부유한 사람임을 의미했다. 일각에서는 그보다 더 많은 300~400억 달러라고 추정하기도 했다. 수하르토의 가족사업은 호텔에서 인공위성까지 뻗어갔고, 루슨트 테크놀로지, 제너럴 일렉트릭, 하얏트 호텔, 휴스 등과 맺은 협력 관계를 이들은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수하르토의 통치 30년 동안 세계은행은 그를 적극 지지했고, 300만 달러 이상의 차관을 제공했다. 수십 년 동안 자체 보고를 포함한 수많은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부패를 용인하고, 그릇된 정부 통계에 그릇된 중요성을 부여했으며, 그것을 다른 나라의 모델로 제시하여 독재를 정당화하고, 인권 실태와 경제의 독점적 통제에 만족했다.” 1997년 대한민국 경제에 큰 악영향을 준 IMF는 인도네시아에게도 큰 악영향을 줬다. IMF로 하룻밤 사이에 인도네시아는 급속한 경제 악화를 겪었으며, 수백만 명이 가혹한 생존 조건에 몰렸다. 화폐가치가 폭락했고, 전염병이 자카르타로 퍼졌으며 국제 투기꾼들은 인도네시아 주식을 팔아버림으로써 시장가치가 절반으로 떨어졌다. IMF 위기가 가속화 됨에 따라 물가가 상승했고, 이는 식량폭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1998년 인도네시아 내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불러왔다. 그해 3월 수십 개 캠퍼스에서 수하르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힘을 얻었고, 학교에서의 시위가 격화됐다. 4월에는 2,000여명의 여학생들이 주도한 행진에 스미랑이라는 작은 도시에 살던 주부들이 합류했으며, 5130개가 넘는 자카르타 노동자단체의 대표들이 데폭의 인도네시아 국립대학 캠퍼스에 와서 4시간 동안 학생 활동가들과 만났다. 12일에는 1만 명의 학생이 평화적으로 행진하면서 노래를 불렀고, 엘리트 대학인 트리삭티 캠퍼스에서 주요 고속도로로 진출했다. 투입된 경찰이 최루탄으로 진압을 했고, 경찰 저격수의 사격으로 학생 4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인도네시아 전역의 충격으로 그리고 분노로 이어졌으며, 513일에서 15일까지 파괴적인 유혈시위가 솔로, 우중판당, 족자카르타, 괄렘방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시위가 유혈폭동으로 변해 수많은 중국계 인도네시아인이 죽고,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이와 같은 사태 속에서 반수하르토 시위가 격화되어 결과적으로 1998521일 수하르토가 인도네시아 대통령직에서 사퇴하게 됐다. 이로써 30년 이상 지속되던 수하르토 시대는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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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유럽의 좌파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줬다. 비록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키지는 못했으나, 혁명이 준 영향은 결코 무시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1920년대 비록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즘 운동이 성공하여 파시스트 체제가 등장했지만, 무솔리니 집권 전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려는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 이를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붉은 2년(Biennio Rosso, 비엔니오 로소)’라고 부른다. 오늘은 이 붉은 2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비엔니오 로소,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대략 2년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됐다. 보통 붉은 2년이라고 번역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였다. 20세기 초 유럽은 상호 경쟁하는 두 개의 거대한 동맹으로 조직 되었는데, 하나는 국, 프랑스, 러시아가 맺은 삼국협상이고 다른 하나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그리고 이탈리아가 맺은 삼국동맹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이 두 세력이 싸운 전쟁이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한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청년에게 암살당한 것이 전쟁의 계기였다. 전쟁은 1914년에 시작되어 양측의 참호전을 반복하다가 1918년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끝이 났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전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전쟁보다 가장 잔인하고, 끔찍한 전쟁이었다. 4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대략 1,000만 명 이상이 죽었고, 2,000만 명이 부상당했다. 기관총의 발달과 독가스, 탱크, 전투기, 후장대포 등 최신식 무기의 개발은 전쟁을 대량학살극으로 바꿔놓았다. 무기는 현대화되었으나 전쟁방식이 구식이어서 양측의 군인 사망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는 1년간의 고민 끝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하는 편에 서게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이탈리아 또한 승전국이 됐다. 그러나 다른 교전국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적잖은 전쟁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략 65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 병사가 전쟁 기간 3년 동안 전사했고, 최소 50만 명이 부상당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승전국들의 이익 배분 과정에서 큰 성과를 얻지 못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거기다 1917년 연합국 편이었던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여 볼셰비키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은 혁명을 전 세계로 전파해야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러시아 혁명은 독일에서의 군인·노동자 혁명으로 황제를 몰아내게 만들었고, 헝가리에서도 1919년 소비에트 정부를 잠시나마 들어서게 했다.

(붉은 2년 당시 파업에 동참한 노동자 사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이탈리아 민중들은 시위와 봉기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전쟁이 끝나던 1918년 이탈리아의 평균실질임금은 전쟁 전인 1913년의 64.6%에 머물렀고, 이에 따라 사회 불안이 고조되는 가운데, 러시아 혁명의 성공 소식까지 들리자 “러시아를 따라가자”는 분위기가 생긴 것이다. 이에 따라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아 노조 및 좌파 조직이 세력을 확장했다. 이탈리아 사회당의 경우 1918년 2만 4,000명의 조직원을 보유했는데, 1920년에는 20만 명으로 무려 10배나 조직원이 증가했다. 노조 조직인 이탈리아 노동총동맹은 200만 명의 회원수를 기록했으며, 아나키스트 노조도 80만 명의 회원을 확보했다.


1919년 이탈리아 인민당(PPI)이 창당되기도 했으며, 가톨릭 사제였던 루이지 스트루초가 이끌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 및 보통선거 형태로 치러진 1919년 선거에서 사회당은 국회에서 156석을 획득했고, 인민당은 국회에서 99석을 획득했다. 이들이 내세운 입후보자들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이에 반해 이전 선거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던 자유주의 성향의 입후보자들은 179석을 얻는 데 그쳤다. 1919년 사회당과 인민당 그리고 아나키즘 단체의 성장은 이른바 ‘붉은 2년(Biennio Rosso)’을 의미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8시간 노동과 임금 및 일자리 보장을 요구하는 파업이 물에 기름을 쏟아 부은 듯 들끓었다. 1919년 9월 토리노의 피아트 사에서 공장평의회 조직이 처음 생겨났고, 다른 지역에서도 불과 몇 달 사이에 연이어 공장평의회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탈리아에서의 사회주의 확산은 이렇게 전개됐다.

(1920년 파업 당시 밀란의 한 공장을 점거한 무장 노동자)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동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확산됐는데, 파업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정치적 주장으로 전환됐다. 1919년 총파업 횟수는 1,663회로 전전의 810회보다 2배로 폭발적 증가세를 보였고, 1920년에는 1,881회로 늘어났다. 공장 노동자 파업은 농촌으로 파급되어 농촌 파업이 1913년 97건에서 1920년 189회로 확산되었다. 파업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의 연대를 주장했다. 1920년 3월 29일에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을 중심으로 철강노동자들이 전국적인 총파업을 주도했으며, 이는 12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그해 6월에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의 수는 대략 50만 명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전국적인 파업을 주도한 중요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쉬(Antonio Gramsci)다. 안토니오 그람쉬는 1891년 이탈리아 사르데냐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인 1911년 이탈리아 북부의 공업 도시 토리노의 토리노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으며, 언어학을 전공했다. 이 시기 그람쉬는 철학·역사학·문학 등 인문학 분야도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3년 그람쉬는 이탈리아 사회당(PSI)에 가입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5년 사회당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이후 붉은 2년이라 불리는 기간에 노동자 파업을 주도했다. 

(안토니오 그람쉬 관련 포스터, 안토니오 그람쉬는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멤버이다. 그는 무솔리니 집권 하에서 감옥에 가게 됐다. 이후 옥중수고를 썼으며 1937년 옥사했다. 1980년대 전두환 독재정권시절 그의 책이 국내에도 소개되어 운동권들 사이에서도 읽혔다.)


붉은 2년 시기인 1920년 4월의 총파업은 결과적으로 11만에 실패로 종결됐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월에도 노동운동이 벌어졌고, 8월과 9월에 격화됐다. 9월 당시 파업에 참여한 무장 노동자들은 토리노의 185개 철강회사를 점거했으며, 이탈리아의 지올리티 내각은 결국 군대를 동원했다. 토리노에 5만명의 군인들이 파견되었고, 노조상층부가 노동자들의 공장점거를 지지하지 않으면서 이 파업도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를 풀면서 끝났다. 


1920년 9월 19일 이탈리아 노동총연맹은 기업주 대표들과 인금인상과 노동조건 해건을 약속받는 대신에 공장점거를 푼다는 대원칙에 합의했다. 사회당도 사회적 대타협에 합의했다. 이로써 2년에 걸친 이탈리아 혁명운동은 고개를 숙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그람쉬를 비롯한 사회당 내 좌파들은 노동운동의 패배가 사회당과 노조 지도부의 무능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당시 그람쉬가 제시한 새로운 노동조직가 운동의 방향이 이 시기에 급격히 부상했다. 당시 그람쉬가 조직한 노동조직은 러시아와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 등에서 실행된 소비에트 모델을 기반으로 하여 구상됐다. 그람쉬는 공장, 건설 현장, 광산, 농장, 상점 및 일반 농민 개개인을 망라하는 모든 노동 계층의 생산단위를 기본으로 평의회를 조직하고자 했다.


그람쉬가 구상했던 공장평의회 조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 각 공장에 존재하고 있던 내부위원회를 기반으로 구성원을 대표하는 대표위원을 선출한 뒤 다시 대표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이때 선거를 통해 대략 노동자 15명당 한 명의 대표위원을 선출하고, 공장의 각 계층과 분야의 대표자를 선출한 뒤 공장대표위원회를 조직한다. 셋째, 공장대표위원회가 각 지구나 구역별로 지구위원회를 구성하는 단위가 되며, 구역에 속한 모든 노동자, 즉 운전기사, 상정 종업원, 식당 웨이터, 청소부, 개인 고용 노동자 등의 대표가 포함될 수 있도록 한다.

(이탈리아 공산당 깃발, 이탈리아 공산당은 무솔리니 하에서 탄압받았으며 지하로 숨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무솔리니가 축출되자 이탈리아 내에서 빨치산 운동에 주력하여 나치와 무솔리니에 맞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더불어 서유럽에서 가장 큰 세력을 확보한 정당이 되었다 미국의 정치공작으로 집권에 실패했다.)


그람쉬는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모델을 토대로 동지들을 규합해, 보르디가, 타스카, 톨리아티, 테라치니와 함께 1921년 1월 이른바 이탈리아 공산당(Communist Party of Italy)을 창당했다. 그람쉬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당했을 당시, 이른바 붉은 2년은 끝난 상태였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좌파 조직만 성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1919년부터 베니토 무솔리니를 중심으로 파시스트 단체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1921년 최초로 파시스트당을 창당했다. 다음 해인 1922년 무솔리니는 자신이 만든 군사를 로마로 진군시켰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등에 업고 수상이 됐다. 무솔리니가 집권한 이후 이탈리아 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조직은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갔고 지하로 숨었다.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자 그람쉬는 1926년 무솔리니 치하에서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됐다. 20년 형을 선고받은 그람쉬는 옥중에서 저작활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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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 스투디움 총서 8
노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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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전쟁 1954-1962 서평: 20세기에 일어난 반프랑스 민족해방전쟁을 생각하며

지난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의 무장저항조직인 하마스(Hamas)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반격을 가했다. 하마스가 로켓 미사일까지 발사하여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하자, 세계 언론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으로 관심을 돌리게 됐다. 202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양측의 테러와 학살에 관한 기사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물론 서구와 국내 언론들은 팔레스타인의 잔혹성만 부각시키기 바쁜 상황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10월 초 언론들은 하마스의 잔혹성을 얘기하며, “닭장 속에 아이를 가뒀다”는 뉴스나 “영유아를 집단 살해했다.”는 이른바 가짜뉴스들이 끊임없이 생산했다. 이러한 언론의 주장들을 찾아보면 실질적으로 신뢰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즉, 하마스가 아녀자 강간이나 영유아 참수 그리고 아이들을 오븐에 넣어 죽였다는 주장들은 허위사실이었다.

이와같이 이스라엘쪽에서 퍼뜨린 가짜뉴스들이 넘쳐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마스라는 조직이 테러를 아예 저지르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는 테러와 학살이 양측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 테러와 학살 문제에서 극단의 정점을 찍고 있는 주체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라파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 전역을 공동묘지로 만들고 있다. 사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래로 이스라엘의 학살과 테러는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시기 미국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위선적 주장들에 따라 우크라이나를 동정했지만, 팔레스타인의 참상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그것과는 비교불가 수준이었다.

하마스를 포함하여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의 학살과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스라엘로부터 빼앗긴 자신들의 주권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다.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비슷한 역사가 20세기에도 있었다. 그게 바로 알제리다. 알제리는 1830년부터 1962년까지 대략 132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를 경험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는 너무나도 가혹했다. 1954년 기준 알제리의 남성 85% 여성의 95%가 제대로된 교육혜택도 못받았다.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알제리인을 프랑스군에 편입시켰지만, 이들이 원했던 독립을 절대로 허용해주지 않았다. 이들이 독립을 요구하자 최신식 군사력을 동원하여 학살을 벌이기까지 했다.

알제리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게 된 것은 1954년에 이르러서였다. 1954년 프랑스는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서 혁명적 농민 군대에게 패전했고, 100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포기하게 됐다. 즉, 알제리의 독립운동 세력은 디엔비엔푸 전투와 프랑스의 패전을 보면서 이에 깊은 영감을 얻었고, 1954년 11월 독립전쟁을 게시하게 된 것이다.

알제리의 독립전쟁은 단순히 군사적 측면에서의 전투만 전개된 전쟁은 아니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가들은 대중적인 시위도 조직했다. 파업과 봉기가 알제나 오랑 콘스탄틴 등 알제리의 주요도시에서 일어났다. 뿐만아니라 이들의 독립운동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프랑스의 영토 내에서도 일어났으며, 좌우연합과 더불어 국제적 지지확보에도 충실했다. 아마 이와 같은 지점이 알제리 독립전쟁만이 가진 고유한 특정일지도 모르겠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가 보인 모습은 너무나도 잔혹하고 추악했다. 전쟁 시기 독립운동을 주도한 세력들도 반대파나 친불파 그리고 프랑스인 거주지를 대상으로 학살과 테러를 저질렀고, 멜루자 학살이나 오랑 학살 등 다수의 사례가 존재하지만, 프랑스가 저지른 학살과 테러가 훨씬 더 많았다.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프랑스군 수만 명이 전사하고, 알제리인이 30~100만 명이 사망했는데, 대다수의 알제리인 사망자는 프랑스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보아도 알제리 독립전쟁은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과 분명한 유사점이 있다.

이번에 읽은 노서경의 <알제리 전쟁 1954-1962 - 생각하는 사람들의 식민지 항쟁>은 국내에 출판된 유일한 알제리 독립전쟁 관련 책일 것이다. 책의 저자는 알제리인들의 저항과 정치활동, 프랑스의 지배 방식, 알제리 독립운동가 지식인들의 활동과 프랑스 지식인들의 활동, 그리고 이들의 출판과 프랑스의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다루며 분석했다. 책 제목에 ‘전쟁‘이라는 단어가 붙다보니 일부 독자들은 전쟁사적인 측면에 기대할 수 있겠으나, 사실 이 책은 전쟁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하자면, 당연히 알제리 항쟁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알제리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의 규모는 40만 명이 넘었고,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 또한 이들에 맞서 사막과 마을에서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프랑스는 이들과의 전쟁에서 탱크, 장갑차, 전투기, 군함 그리고 전투 헬기도 투입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군사적 측면의 연구가 필요한 것도 분명하다.

이 책은 이런 부분을 다루지 않지만, 읽을 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특히나 현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벌어지는 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1966년에 개봉한 영화 ‘알제리 전투‘도 꼭 보길 추천하는 명작이다. 이 영화보다 알제리 전쟁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가 알제리인들에게 자행한 최악의 학살인 세티프 겔마 학살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하던 시점에 알제리인들은 프랑스에게 자치와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프랑스는 이를 탱크와 전투기 그리고 군함을 동원하여 진압했다. 프랑스는 1달간의 진압과정 동안 세티프와 겔마에서 무려 2~3만 명의 알제리 민간인을 학살했다.

학살의 규모로 보았을 때, 1956년 헝가리 봉기나 1968년 프라하의 봄 그리고 1989년 천안문 시위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를 합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인명이 프랑스의 알제리 무혈진압으로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이런 학살은 세계사 교과서에서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글쓴이른 이런 점에서 한국과 서방의 역사 기억과 세계사 교육이 과연 공정한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결국 이런 점에서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지극히 서구 제국주의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또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세계가 준비해야할 다극화 체제에선 이런 서구 중심주의를 뛰어넘는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며, 이런 문제의식을 남긴채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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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몰락하자, 동유럽과 러시아 등에서는 파시스트 세력들이 힘을 얻기도 했다. 통일독일의 동부지역에서는 네오나치 세력들이 등장했고, 헝가리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호르티 미클라시 옹호론자들이 등장했다. 해체된 유고슬라비아 연방 국가들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홀로코스트로 악명을 떨쳤던 우스타샤 옹호론자들이 등장했고, 러시아에서는 나치에 협력한 변절자 블라소프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또한, 우크라이나에서도 나치에 협력한 스테판 반데라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사실 동유럽 및 소련 사회주의권 붕괴는 각국의 자본주의화만 촉진시킨 것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파시스트들을 옹호하는 움직임과 정치적 폭력화 및 테러도 가속화했다. 마찬가지로 1989년 차우셰스쿠가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이후 루마니아도 자본주의화 됐다. 그 과정에서 루마니아 또한 파시즘 운동이 다시 나타났다. 루마니아의 파시스트들이 극도로 미화한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이온 안토네스쿠(Ion Antonescu)다.


이온 안토네스쿠는 1882년 루마니아 피테슈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던 그는 이후 장교가 되었고 1907년에 루마니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를 진압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으며, 전후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에도 참가하여 수도 부다페스트를 함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안토네스쿠는 승승장구하여 1933년 루마니아의 육군참모총장 자리까지 오르게 됐으며, 1937년에는 루마니아의 국방장관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루마니아는 카를 2세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안토네스쿠는 그들과 갈등하다 국가전복 혐의로 투옥되었다.


안토네스쿠는 이후 석방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40년 9월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사실 안토네스쿠는 1930년대부터 친히틀러·친파시즘 성향을 보였다. 안토네스쿠는 1938년도 헌법을 폐지하고 입법권과 행정권을 자신의 손에 넣고 히틀러를 따라 자신을 총통이라 칭했다. 안토네스쿠는 1940 9월에서 10월 사이 독일군의 루마니아 주둔을 승인했으며, 1941년 2월에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중심축이 된 추축국 동맹에 가입했다. 1941년 6월 22일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안토네스쿠는 그 다음날 소련에 대한 침략전쟁에 동참했다.


물론 루마니아의 군대는 소련군에게 상대가 안됐다. 1942년부터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루마니아군을 격파했다. 루마니아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10~2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에도 루마니아는 지속적으로 독일군 편에 섰다. 1944년 6월 15일 기준으로 보아도 최소 6만 명 이상의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있었다. 안토네스쿠는 1944년 8월 15일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독일군과 운명을 같이 할 것을 맹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패할 것을 안 미하이 1세는 진영을 바꿔 8월 23일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친추축국 세력을 숙청하고 나치 독일에 대한 단교를 선언했다. 비슷한 시기 지하로 숨었던 루마니아 내의 공산주의자들도 봉기를 일으켰고, 결과적으로 이들을 지원하는 소련군은 루마니아를 해방했다. 이로써 루마니아의 파시즘 체제는 무너졌다. 안토네스쿠는 총리직에서 해임됐으며, 그는 소련에 의해 체포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안토네스쿠는 소련으로 보내졌으며, 유대인 학살과 독일 협력에 대한 죄를 물어 1946년 6월 1일 총살됐다. 


안토네스쿠가 통치하던 시절 루마니아에서도 홀로코스트가 자행됐다. 28만 명에서 4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고, 베사라비아와 부코비나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 등에서 학살이 자행됐다. 물론 홀로코스트의 경우 폴란드(300만 명)나, 우크라이나(85~160만 명), 벨라루스(55~80만 명), 헝가리(56만 명) 등이 희생자 숫자가 더 높은 수치이기는 하나, 그 당시 루마니아에 살던 유대인 인구가 75만 명 정도였던 것을 생각한다면 안토네스쿠의 홀로코스트 행위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루마니아 내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은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독일군마저도 충격 받았을 정도의 잔혹성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1941년 10월 23일 지뢰받에서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유대인 학살의 신호탄이었다. 루마니아군 본부 중대가 몰살당한 다음날 루마니아군은 네 개의 커다란 창고에 유대인들을 쑤셔넣은 다음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 2만 명 이상의 유대인을 불태워 학살했다. 이렇게 해서 나치 독일은 안토네스쿠가 이끄는 루마니아 군대에게 베사라비아 지역을 맡겨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게 했다. 심지어 이 루마니아 군대는 구타와 고문 강간도 일삼았으며, 유대인 소녀들을 뽑아다가 그들의 성기를 잘라낸 다음 난교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안토네스쿠 치하에서 일어난 루마니아의 홀로코스트는 스테판 반데라의 OUN이 저지른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그런 극악무도한 통치자이자 학살자인 이온 안토네스쿠가 냉전 이후 루마니아에서 찬양하는 이들이 나타난 것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봐야할까? 우크라이나에서 스테판 반데라가 찬양받고 있는 현상은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파시즘의 흐름을 너무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온 안토네스쿠에 대해 쓰며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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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 운동 시기 NL계열 운동권 사이에서 북한을 알기 위해 읽었던 책이 있다. 그 책이 바로 독일인 작가 루이제 린저(Luise Rinser)가 쓴 또 하나의 祖國 - 루이제 린저의 북한방문기라는 책이다. 실제로 루이제 린저는 박정희 정권 시절 서독에서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던 윤이상이라는 음악가와 두터운 친분이 있었고, 민전이 전개한 민주화 운동에 관여하기도 했었다.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 시기에도 린저는 남한의 민주화 운동에 깊은 관심과 지지를 보였다. 그와 더불어 린저는 1980년부터 무려 10여 차례나 북한을 방문했고, 당시 북한의 지도자이던 김일성과도 두터운 친분관계를 유지했다.

 

나 또한 이 책을 어렵게 인터넷을 통해 구매했고, 완독은 아니어도 몇몇 부분을 조금씩 읽어봤다. 가장 흥미롭게 다가왔던 내용은 북한의 교화소 관련 내용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유린으로 드는 소재 중 하나가 이른바 정치범 수용소 관련한 내용이다. 이른바 미국이나 한국의 극우들이 생각하고 묘사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모습은 과거 솔제니친이 묘사한 스탈린 시절 소련의 굴라그나 빅터 프랭클이 묘사한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 같은 곳이다. 이러한 내러티브는 이른바 서방 진영에서 영향력이 워낙 강해서 그런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박연미에 의해서 증언되고 있다.

 

, 서구에서 그런 내러티브를 가지고 보는 북한의 수용소에 대해 창 살 없는 교화소라고 책에 대놓고 묘사했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신선했다. 물론 앞서 언급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묘사는 미국이나 제1세계의 프로파간다라 보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나 인권유린을 묘사하는 내러티브가 과거 냉전시기 미국이 피델 카스트로의 쿠바나 산디니스타가 통치하는 니카라과의 모습을 악마화할 때 사용하는 내러티브와 너무나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 친미국가들이 자행된 인권 유린들, 예를 들어 피노체트 하의 칠레의 강제 수용소 등은 항상 외면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분명히 있다. 그런 점에서 글쓴이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운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다.

 

주제를 다시 루이제 린저로 돌리자면, 그녀가 남긴 북한 관련 기록은 여러모로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교화소 문제도 그렇고, 그녀가 남긴 기록은 엄밀히 말해 그녀가 북한에서 직접 보고 겪은 것을 얘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기록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긴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을 무려 10차례나 방문하여 자신이 본 것을 기록으로 상세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이미지는 이른바 밝은이라는 수식어가 들어간 독재국가다. 아래의 린저의 발언을 통해 보도록 하자.

 

저는 북한이 어두운 독재국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밝은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김일성 주석이 모든 것을 보고, 듣고 또 모든 것을 감독하는, 그래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며 모든 생활양식을 규정하는 가장이자 어버이로 여겨집니다.”

 

,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분명 한 지도자가 영구적으로 통치하는 독재 국가이지만, 그녀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소련의 스탈린 체제나 그런 체제를 이식받은 동유럽 사회가 아니었던 것이다. 린저가 보기에 북한은 서구 보다 가난하더라도 인민들이 어둡지 않고 밝고 행복하게 사는 사회였다. 그리고 그녀는 북한에서 맛본 과일과 아채를 순수한 그대로의 맛, 기름지고 무해한 북한의 토양에서 우러나온 맛이라 표현했다. 그리고 북한의 공기게 맑다고 얘기했다. 린저는 북한을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도시들은 녹지대로 채워지고, 화학공장들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현대적인 정화시설을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 린저는 북한 사회가 수질오염이나 대기오염이 서구보다 훨씬 덜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린저가 이와 같은 관점을 가진 것은 그녀가 서독의 진보정당인 녹색당 대통령 후보가 되었던 그녀의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아무래도 1960년대 68운동의 흐름 속에서 린저는 친환경주의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린저가 주목한 밝은 독재라는 개념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린저가 북한에 대해 독재라고 분석한 두 가지 개념은 다음과 같이 있다. 하나는 개인숭배를 포함해서 북한의 모든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면모를 유교적 전통 때문이라고 봤다. , ‘어버이 김일성 수령이라는 식으로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존경하는 것을 전통적인 유교의 산물이라 본 것이다.

 

두 번째는 북한이 평화를 원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위협, , 미국 제국주의의 군사적 무력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린저는 분석했다. 미국은 핵무력을 포함한 온갖 군사적 무력으로 북한을 압박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사적인 자유가 제한받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두 가지 지점을 통해 린저는 북한체제가 개성이 용인되지 않은 독재국가라 봤다. 그러나 린저가 보기에 북한 사회는 비록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강요, 구금, 추방이 보이지 않는 사회였다. 또한, 린저는 권력자에 대한 국민의 불안과 국민에 대한 권력자의 불안이 만연하는 현상도 북한에서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걸 확인하기 위핸 린저는 북한의 교화소를 직접 방문했고, 거기서 담장, 감시탑, 가시철조망, 쇠창살 같은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린저는 이에 대해 유스호스텔 같은 곳이었다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사실 북한의 수용소는 교화소가 있고, 정치범 관리소가 따로 있다. 교화소는 주로 재교육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측의 폭력이 전혀 없다고 하면 빈말이겠으나, 북한의 방침 자체가 주로 교화 및 갱생에 맞춰진 것은 사실이다. 물론 시설의 열악함이나 그 내부에서의 폭력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제1세계가 묘사하는 이른바 아우슈비츠와 같은 정치범 수용소식 묘사는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글쓴이의 경우 실제로 교화소에 갔다 온 한 탈북자와 얘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1990년대 교화소의 경우 구타와 같은 폭력이 난무했다고 한다. 그 사람의 경우 1~2개월 교화소 생활을 하다가 탈북을 했는데, 글쓴이는 이 부분이 아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마져도 일각에서 떠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허구라고 말했으니, 글쓴이는 신동혁이가 묘사한 정치범 수용소 어쩌구는 거짓이라고 본다.

 

물론 이와 같은 증언과는 상충되는 또 다른 근거도 있다. 미국 시민 매튜 토드 밀러라는 사람은 20144월에 그 나라에 적대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6년의 노동형이 선고되어, 북한 교화소에서 212일간 감옥살이를 했다. 석방된 이후 밀러는 뜻밖의 좋은 대우에 자신도 놀랐다고 얘기했으며, 감옥에서 자신의 아이패드와 아이폰으로 음악을 듣도록 허용했다고 증언하기 까지 했다. 또한 밀러는 북한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자신의 공개 사과가 강요된 것이었다는 서방의 보도들에 나타나는 광범위한 추정을 부인하고 자신은 전적으로 진실했다고 말했다. 석방 전후 이뤄진 인터뷰에서 밀러는 노동교화소에서의 상황이 어떠냐는 질문에 대부분 땅을 파고, 돌을 옮기고, 잡초를 제거하는 등 농사일을 한다.”라면서, 구타나 폭행 같은 것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물론 김일성 시대와 김정은 시대의 교화소 시설은 분명 다를 테지만, 중요한 것은 기존의 반북 내러티브만으로 북한의 처벌과 교화를 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교화소에 들어가 교화가 되어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1세계가 퍼뜨린 북한의 수용소 내러티브는 신중한 검증이 필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교화소의 실상이 어떻든 간에 루이제 린저가 본 북한의 모습은 독재국가이지만 법과 물리력에 의한 강제로 통제 및 검열하는 국가는 아니었다. , 개개인에게 내면화된 자기통제와 자기검열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한편으로는 부정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긍정적으로 또는 자본주의 보다 나은 점이 있는 사회로 본 데에는 당시 68혁명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에서 시작된 68운동은 신세대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다시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서구 좌파들은 소련이나 동유럽 체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 당시 체게바라나 호찌민 그리고 마오쩌둥 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저 또한 그러한 인식 하에서 북한과 김일성을 바라보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즉 그런 점에서 북한에 대한 린저의 인식과 사유는 긍정과 오류를 떠나 서구 지성사의 흐름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보, 루이제 린저의 동양 호기심과 밝은 독재국가 북한, 그리고 윤이상, 동방학지202,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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