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을 뒤에서 쳐다보는 미군)

 

2015년 당시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이른바 국정 교과서 사태를 주도했던 뉴라이트 세력들은 기존 역사교과서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자 했다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의 이승만의 정치투쟁은 건국투쟁이고소련 치하의 공산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켰으며이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만들어졌다.”가 된다즉 한국 근현대사는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고북한은 시작부터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이들은 소위 신의주 사건과 같은 예시를 들며소련군이 폭압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크나큰 오류가 존재한다왜냐하면 그들이 찬양하는 미군정은 매우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으며억압적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는 미국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상한 공식에 빠져 있다그러나 이는 미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경제를 독점하는 과정을 보면허구일 뿐이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미군정 또한 그러했다미군정은 한반도에 상륙하는 시점부터 환영하러 마중나온 시민에게 총격을 가해 몇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그리고 포고령을 발포하여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1945년 9월 점령군으로 서울에 입성한 미군)

 

미군정의 통치는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이것은 미군정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야기된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즉 미군정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일반 노동자 농민은 쌀을 구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으며땅과 자본을 소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익만 증가하는 구조였던 것이다그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봉기 및 저항으로 이어졌으며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에 대해 추수봉기(Harvest Uprising)’이라고 표현했다.

 

추수봉기는 1946년 9월 23일 부산의 철도 노동자 8,000명이 파업을 일으키며 시작됐다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며칠 사이에 파업은 인쇄공전기기사전신 및 체신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산업에 파급되어 총파업으로 이르게 되었고많은 학생들이 이 파업에 가담했다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가담했다한반도 이남 지역을 통틀어총 25만 1,000명의 이 파업에 동참했다한마디로 미군정에 맞선 생존권 투쟁 및 자주권 투쟁이었던 것이다.

(대구 10.1 항쟁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에게 살해된 민간인의 시신)

 

파업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체로 개혁적인 것들이었다. “쌀 배급의 증가보다 높은 봉급실업자 및 귀국자들을 위한 주거와 식량공장에서의 작업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또한 민주적인 노동법 제정과 정치범 석방 그리고 반동적 테러의 중지 등의 요구도 나왔었다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장이던 허성택이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에게 보낸 서신에도 앞에서 언급한 요구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 10.1 항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시위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학살한 제주도 양민 시신의 숫자를 보여주는 지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항쟁을 통해 미군정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그러나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바로 강경진압과 폭력동원이었다대구 10.1 항쟁과 같은 시위는 최소 3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명 이상이 경찰에게 체포됐다북한 개성 지역에서만 3,000명이 체포되고서울은 용산 철도 차고에서만 불과 하루사이에 2,000명이 체포당했다또한 전라남도에서만 4천 명이 체포됐다진압 당시 미군정은 주로 국립경찰에 의존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했지만필요의 정도에 따라선 서울측 경찰이나 미군 전술부대를 파견했다그리고 대구 10.1 항쟁에서는 미군 탱크가 출동했다.

 

1946년 10월 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미군과 우익경찰이 군중 6,000명에게 실탄을 사격했다이 과정에서 15명 이상이 죽고 또 다른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명이 체포됐다같은 날 경남 창원에서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10월 11일 경남 진해 근처의 웅천에서는 미군과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었다부산의 경우 10월 9일에만 양측의 충돌로 경찰과 군중 24명이 피살되었고미군정은 전술부대를 투입하여 군중을 진압했다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총파업 및 반미군정 투쟁 과정에서 발생했다당연히 미군정의 강경진압으로 생긴 사망자들이었다.

(존 리드 하지와 이승만)

 

이처럼 미군정의 통치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었다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이런 폭력은 1948년 제주도에서 정점을 찍었다이들은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나자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하고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미군정이 동원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대원들은 독소전쟁 시기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연상시키는 학살극을 벌였다학살은 1948년 중반부터 1949년 말까지 주로 발생했다총 30,000명에서 60,000명의 제주도민이 그렇게 학살당했다제주도민 10명 중 1명 혹은 6명 중 1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켜세우며미군정 자체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려는 뉴라이트들을 보면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미군정은 일부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정권이었지파업을 전개하던 대다수 시민을 위한 정권이 절대로 아니었다미군정이 내세운 이승만도 그러하며이들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따라서 미군정은 절대로 민주주의를 전파한 세력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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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간 존재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국가 베트남 공화국(Republice of Vietnam, Việt Nam Cộng Hòa)이다한국에서는 보통 남베트남으로 자주 불리며영어로는 South Vietnam이라고 불린다남베트남은 1955년에 탄생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과 북이 분단됐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호치민(Ho Chi Minh)을 지도자로 하며 1945년에 탄생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이 유지가 됐고남베트남에는 1949년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 Quốc gia Việt Nam)이 유지가 됐다.

(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응오딘지엠)

 

그러나 베트남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베트남 공화국으로 바뀌었다이 베트남 공화국은 1955년 소위 국민 투표를 통해 탄생했으며형식적으로 대통령제가 유지됐다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남의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신분적으로 베트남의 상류 계층이었다식민지 시절 그는 식민지 관료였으며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 일본을 지지하는 노선으로 바꿔 프랑스에 대항하는 약식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창설되자베트민으로부터 협력을 제의받았으나 단번에 거절했다그 이유는 본인의 형 응오딘코이(Ngo Dinh Khoi)가 베트민에 의해 처형당했기 때문이었다물론 그의 형은 프랑스 식민지 협력자였고그의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다 그러했다결국 응오딘지엠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서 살았으며그 시기부터 반공사상을 전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지엠이 귀국한 것은 1954년 제네바 회담 전후였고바오다이는 그를 베트남국의 총리로 임명했다이에 따라 미국의 노선은 바오다이를 지지하는 것에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것으로 바뀌었다이에 따라 응오딘지엠은 국민투표를 통해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베트남 공화국을 선포하며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1956년 이내로 약속됐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남베트남에서 독재정치를 실행했다그가 총선을 거부한 이유는 너무나도 분명했다그 이유는 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했기 때문이다그걸 알았기에 지엠도 아이젠하워도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1955년 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미국의 계획대로 지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혹은 지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즉 그렇게 해서 실시된 것이 1955년의 국민투표였고지엠은 국민투표에서 98.2%의 득표율을 얻었다쉽게 말해 부정선거였다당시 응오딘지엠을 지지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많았다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으며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휴버트 험프리존 F.케네디 등이 응오딘지엠의 지지파였다이들은 미국의 강경 보수 성향으로 극단적 반공주의자 지엠과 성향이 잘 맞았다.

(응오딘지엠과 미국 대사인 헨리 케벗 로지, 지엠은 마치 미국 대사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춰 고개를 숙이는 것 같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응오딘지엠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남베트남에 남아있던 베트민 세력들을 탄압하고 소탕하는 것이었다당시 베트민은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으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은 세력이었다이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의 침략을 무찔렀고남베트남 지역에서도 프랑스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었다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북베트남의 호치민에게 정통성이 밀렸던 것이다그 이유는 본인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아무것도 안했기 때문이다응오딘지엠은 베트민들이 설치한 선거함을 철거했고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인사들을 줄줄이 체포하고 감옥에 투옥했다. 1960년대 초반 기준으로 이미 남베트남에는 수십만의 정치범이 감옥에 구금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시기 식민당국에 협력한 이들에 대한 인적청산을 하지 않았다. 1954년 제네바 협정 이후 북베트남에서 8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월남한 것도 따지고 보면이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인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이중 60만 명은 가톨릭 세력이었는데이들 또한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식민당국의 대대적인 협력자들이었다즉 응오딘지엠 정부는 이들을 정착시켰고남베트남의 군대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규모가 늘어났다그리고 이 남베트남군의 장교와 사령관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 당국에 협력한 인사들이었다쉽게 말해 이들은 바오다이 베트남국에서 응오딘지엠의 베트남 공화국의 장교와 사령관이 된 것이다즉 미국은 이런 매국노들을 지원하며 민주주의를 교활하게 포장시켰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에게는 정통성이 하나도 없었다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가레스 포터(Gareth Porter)는 2017년 켄 번즈(Ken Burns)의 PBS The Vietnam War(2017)에 대한 비판 글을 개제하며응오딘지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하기 위한 선거조항을 담고 있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운명은 와드의 역사서에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있다저자는 프랑스 식민주의를 조국에서 몰아내었던 베트남 공산주의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했을 것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이 책에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유일한 설명은 남베트남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정권이 1955년에 선거를 거부할 만큼 강력해졌다는 것이다이러한 주장은 제안된 선거만을 언급하는 에드워드 밀러(Edward Miller)가 마치 그들이 프랑스 식민통치권으로부터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남베트남 정부의 법적 구속력이 없었던 것처럼, 6쪽 분량의 내용을 담고 있다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일은 미국 그 자체가 선거를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이다. 1955년 중반 디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그리고 1955년 6월 중순에 이르러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통일 베트남을 위한 자유선거를 약속하고 있었는데냉전국가인 분단된 독일과 한국의 정책과 일관되게 하기 위해 자유선거를 유지했던 것이었다.”(What Ken Burns Left Out of the Vietnam Story, Gareth Porter, 2018.03.01.)

 

쉽게 말해 미국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저자인 마이클 매클리어(Michael Maclear)는 남베트남의 정부가 정통성이 없었다는 것을 책에 다음과 같이 보여주었다매클리어는 베트남 30년 전쟁의 제1막에 해당하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마감은 임무 교대를 위한 무대 장치의 전환이었으며, 10년에 해당하는 제2막은 미국이 프랑스의 뒤를 이어 고딘디엠(Ngo Dinh Diem)을 남베트남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99) 응오딘지엠 정부가 정통성이 없음을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또한 매클리어는 미국 1급 기밀문서 펜타곤 페이퍼의 내용을 인용하며미국의 남베트남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7년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와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을 만난 응오딘지엠)

 

미국은 제네바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미국의 지속적인 입장은 베트남 국민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결정할 자격이 있기 때문에이에 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실질적인 입장은 6월의 <펜타곤 페이퍼>에 잘 나타나 있다미국은 24만 명에 달하는 남베트남 정규군(ARVN)을 훈련시키는 한편재정 지원을 지속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프랑스와도 협력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00)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윤충로 교수는 박사논문인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에서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에서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으며친프랑스 세력에 저항하기도 했다고 주장했다그의 논문에는 남베트남 군벌 및 친불파 집합체이던 까오다이교나 호아하오교 그리고 베트남 국민당이나 빈쑤옌 등과 같은 세력을 견제했다고 나온다. “1955년 바오다이의 폐위를 거쳐 1956년 4월 호아하오의 지도자인 바꿑(Ba Cut, Le Quang Vinh)의 마지막 무력 저항을 분쇄하고 봉건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면서 이런 프랑스와의 대결이 절정에 달했다.”고 한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 그러나 윤충로 교수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낀 세력이 바로 항일투쟁과 항불투쟁을 한 베트민이었다.”는 사실도 명백히 밝혔다.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또한 당시 지엠은 이중의 압력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다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diệt cộng)반공(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

 

논문에서 윤충로 교수한 인용한 쩐반짜우(Tran Van Giau)의 인용문을 보자.

 

남부당국은 그 지역의 우리 동포와 모든 애국적이며평화적인 세력을 야만적으로 학살하고 있다겨우 1년 동안에 그들은 3,000건이 넘는 범죄를 저지르고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적어도 4,000명의 애국자들이 죽거나 부상당했으며, 19,000명 이상이 체포되었다.”(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5)

 

응오딘지엠 정권의 멸공 반공 정책은 사실상 정통성이 밀리기 때문이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해가고 있던 프랑스를 잠시나마 몰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지원에 의존한 것이었고그렇기 때문에 과거 반프랑스 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을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이다애초에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아무것도 안했으니당연히 정통성이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밀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응오딘지엠과 이승만, 1957년 응오딘지엠은 한국을 방문하여 이승만과 만났다. 이 둘은 사상적으로도 정치 성향도 통치하는 방식도 거의 비슷했다.)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맞다이는 낡은 관점이 아니라 응오딘지엠의 행보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이다애초에 미국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도 남베트남은 미국의 창조물이었다.”라고 밝히고 있으며바로 그렇기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꼭두각시 정부였던 것이다그리고 무엇보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미국 정부에 의해 세워졌고미국 정부에 의해 제거됐다. 1963년 그가 암살당한 것도 CIA가 뒤에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했기 때문이다이것은 미국이 기존 꼭두각시를 새로운 꼭두각시로 대체한 것일 뿐이다마지막으로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이 쓴 <최고의 인재들내용은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그러나 양측의 성격이 구분된 상황에서 미국이 식민주의의 흔적 없이 베트남에 들어간다는 덜레스의 말처럼 순진한 말도 없을 것이다베트민은 선거를 통해서든전복이나 게릴라전을 통해서든 남쪽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그들은 근대 세력이었고그들에 반대하는 남쪽 세력은 봉건주의자들이었다그 상황에서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었다그들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에 강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일깨웠다아울러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를 쫓아내는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베트남 사회에 대의와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식민 지배 아래에서 그들 사회는 분열되었고서로를 불신하며 의지할 가족에게만 충실했다따라서 그들이 연대하는 순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이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알게 되었다.

 

남쪽은 정반대였다남쪽의 정부 구성원들은 서유럽인들을 상대했고전쟁 때 국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냈다그들은 프랑스에 협력했고전쟁으로 이권을 챙겼다응오딘지엠은 외국에 있어서 어느 편도 고를 수 없었다남쪽에는 옛 봉건 질서가 여전히 존재했는데이는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남쪽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연대하기보다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베트남의 전통은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었다응오딘지엠 정부는 친족 정부였고따라서 지엠이 몰락하던 시기에 오로지 친족만 신뢰했다처음부터 한 베트남 친족만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리더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북쪽은 외국인을 쫓아낸 사람이 이끌었고남쪽은 외국인이 추대한 사람이 다스렸다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주의가 한창인 시기에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명했고지엠은 해방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겁던 시기에 베트민을 인정하지 못하고 망명했다호찌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외국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그래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원하는 농민층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던 것이다지엠은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단 한 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그는 미국의 정치적 필요성과 야망이 만들어낸 미국의 피조물이었다베트남 기준에서 볼 때 그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지엠은 불교 국가의 가톨릭교도이자 남부의 주류 베트남인이었지만무엇보다도 혁명이 휩쓸고 간 국가의 봉건 귀족이었다.”(최고의 인재들 p.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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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만에 연재하는 글이네요이것저것 하다 보니 많이 늦네요.)

 

1991년 MBC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시대와 해방정국 그리고 한국전쟁까지를 통틀어 우리의 현대사를 잘 조명한 역작이다채시라와 최재성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적잖은 시청자들에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탄탄한 스토리 라인시대적 혼란 속에서 꽃피는 남녀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비극적인 한국 근현대사 재조명등을 생각해 보았을 때, ‘여명의 눈동자는 비슷한 시기 방영했던 머나먼 쏭바강과 모래시계와 더불어 한국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위해 봐야할 드라마인 것은 분명할 것이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한국 근현대사를 다룬 드라마다. 여기서 채시라가 맡은 역인 윤여옥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다.)

 

배우 채시라가 맡았던 드라마의 주인공인 윤여옥은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과 해방정국에서의 좌우갈등 및 학살 그리고 한국전쟁이라는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주인공 윤여옥의 비극은 드라마 1화부터 시작이 된다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 여옥은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끌려간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한 일본군 장교를 접대해야 했고일본군 장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맺게 된다여옥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그녀는 알 수 없는 곳에 배치되어 시도 때도 없이 무수히 많은 일본군과 성관계를 맺어야 하게 되는 신세가 된다왜 드라마 상에서 여옥은 이런 강제적인 성관계를 맺는 신세가 된 걸까그것은 바로 그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일본군 위안부(Comfort Women)였기 때문이었다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는 그 시기 정신대(挺身隊)’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이번에는 한일 역사문제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인 일본군 위안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법 이슈가 됐다. 국내를 포함하여 해외에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억하는 소녀상이 서 있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빈번이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 강간 등이 일어났었다. 1894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그리고 1918년 적백내전기 시베리아 출병과 1920년 간도 출병 등에서도 그러한 일들이 벌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지역을 점령한 일본군들 또한 마찬가지였다이들은 약탈과 학살 그리고 아녀자를 강간하는 등의 온갖 만행을 저질렀으며이러한 일본의 폭압 통치는 중국인들이 항일의지를 부추겼다에드가 스노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는 당시 소비에트 지구에 있으면서 스노가 본 붉은 연극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그 내용의 일부를 보면 당시 만주의 일본군들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만극은 제목이 <침략>이었다막이 오르면 1931년 만주의 어느 마을이 나타나고이곳에 일본군이 밀려와서 무저항의 중국군을 몰아낸다. 2장에서는 일본군 장교들이 어느 농가에서 잔치를 벌이는데중국인 남자들은 두 팔과 무릎으로 받침대를 만들어 이들의 의자 구실을 하고 술에 취한 장교들은 이 농민들의 아내를 겁탈한다.”

 

출처중국의 붉은 별 p.145

 

이처럼 일본군의 약탈과 강간은 빈번히 일어났다그런 만행이 극을 찍었던 것은 중일전쟁 개전 이후 벌어진 난징 대학살(Nanking Massacre)에서였다. 6주 동안 20~30만 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던일본군은 난징에 있던 중국인 아녀자들을 겁탈했다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중국인 여성들이 일본군에 의해 죽고 강간당했다그 숫자는 최소 2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난징 대학살이 종결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 1938년 1월 일본군은 소위 상하이 부근 공창가에 육군 위안소를 열었고여기에는 24명의 일본 여자와 80명의 조선 여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다만 이들의 경우 군과 결탁한 매춘업자가 제공 또는 보급장교가 모집에 나서기도 했지만이때까지는 일본 처녀가 아닌 조선 처녀에게는 강제성을 띄지 않았다고 한다다만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중국 전역으로 전선이 더 확대되자 이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일본 군부는 소위 위안부 차출에 강제력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 위안부를 경영하는 상인인 오쿠다 진자부로와 후쿠다 요네자부로는 기업의 거액 융자를 획득한 후에동년 5월 17일 대척회사공사에 같은 방식으로 하타마 도모시치에게 18천엔을 대출해주었고이 세 명의 상인은 바로 1939년 4월 28일과 5월 24일에 각각 위안부를 소집하여 총독부의 어용선 금령환 호에 탔다위안부 징발책의 운영은 이와 같은 민간인 업자들이 주로 담당하였다한편 2001년 한국의 위안부 증언집 조사 결과 한국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여성은 29.4%인 데 반해일본인 징발업자에 의해 동원된 한국 여성은 16.0%로 나타나고 있다.

(1944년에 찍은 일본군 위안부 사진, 사진 속에 임신한 여성은 바로 박영심 할머니로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 이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써 일본을 규탄하는 행동에 착수했으며, 2006년 평양에서 사망했다.)


(위안소에서 줄을 서 있는 일본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하루에 20명 이상의 남성을 상대했다고 한다. 생리를 포함하여 몸이 아파도 봐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노예 생활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반항하면 일본군은 이들을 처형하기까지 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 지역은 일본 본토뿐만 아니라 한반도와 중국 대륙만주지역필리핀인도차이나 반도버마인도네시아 등이었고이것은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군이 침략한 지역들이었다중국에는 상하이부터 항저우난징한코우수조우우후난창한코우잉샨 등의 도시만 합쳐도 130개소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물론 중국 대륙 전역에 있던 위안소를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다필리핀에는 30개소 버마에는 50개소 그리고 인도네시아에는 40개소 이상의 위안소가 있었고이걸 합치면 120개소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심지어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호주군이 일본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솔로몬 군도만 하더라도 20개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1942년 9월 3일 일본 육군성 은상과장의 보고서에는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이 400개소 정도 있는 것으로 나온다.

(난징에 있던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 위안소 위치 지도, 지도에 나온 바와 같이 일본이 지배하던 곳 대부분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

 

일본군 위안부 모집은 현지 여성의 조달유괴와 납치가난 및 가족의 빚 청산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존재했다일종에 취업 사기 형식으로도 존재했으며군을 동원한 비혼 여성에 대한 납치 및 협박을 동원한 경우도 많았다소위 일부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경우는 사실상 그러한 일인 것을 알고서 지원하는 것이 아닌돈을 목적으로 들어갔다 위안부일을 하게 된 일종에 취업사기 형식이었다그리고 소위 정신대로 모았던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위안부로 차출하기도 했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귀향)


(영화 귀향에서 나오는 한 장면, 영화 속 주인공이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고 있다.)


(영화 허스토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실과 정의를 향한 투쟁을 다루고 있다.)


 

어찌됐든 일본 제국주의가 군의 사기 진작과 성욕 해소라는 목적으로 강제성을 동원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다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숫자가 20만 명이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다만 이 정도의 숫자가 다소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과장이고 아니고를 떠나 그런 추산에 대한 의심이 일본군의 전쟁범죄를 가려주는 것도 아니다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피해자가 된 사례를 증언한 피해자들의 증언은 많이 있고그것이 바로 전쟁범죄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 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두 명의 여성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물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은 제법 많고 다양하다그러나 이 글에서 그것을 다 다루는 것은 무리이기에 대표적으로 정서운 할머니와 박영심 할머니만 언급하고자 한다.

(박영심 할머니, 1998년 북한에서 인터뷰한 영상이다. 할머니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생생히 증언했다.)


(정서운 할머니의 인생을 다룬 단편 애니매이션, 정서운 할머니는 1992년 최초로 자신이 위안부임을 밝힌 인물로,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여러 증언을 남겼다.)

 

1992년 처음으로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해 국내외적으로 여론을 확산시켰던 정서운 할머니는 경남 하동 악양 입석리에서 태어나 1938년 14살의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갔다. 15살 때부터 부산-시모노세키-대만-중국-태국-싱가포르-사이공-인도네시아 등으로 이동했으며인도네시아 수마라이 등지에서 8년간 일본군 위안부로 있었다본인 증언에 따르면태평양 전쟁 말기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에 의해 다른 위안부들과 더불어 집단 학살 당할 뻔했지만미군이 일본군 기지를 공습해서 운 좋게 살아남았고연합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1년간 싱가포르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946년에 부산으로 귀국했다고 한다이후 그는 1992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공개했으며,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 대회에서 자신의 아픔을 증언했으며, 1996년에는 미국 등지에서 강연 활동을 했다그러던 2004년 진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8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중국 난징에도 위안소가 있었다위안소의 이름은 리지샹 위안소로 면적이 6700나 된다이 위안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현재까지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이 위안소로 끌려온 피해자 중에는 박영심 할머니도 있었다평남 출신의 박영심 할머니는 17살이던 1939년에 난징 위안소로 끌려와 대략 3년 동안 위안소 생활을 해야 했다. 1944년 연합군이 촬영한 일본군 위안부 포로 사진에 임신한 모습으로 찍힌 이가 바로 박영심 할머니이며해방 이후 1946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에서 살았다그렇게 북한에서 살다가 2006년에 85세의 나이로 평양에서 생을 마감했다박영심 할머니에 대한 자료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 보고서로도 확인이 되며, 1944년 9월 8일 생산된 중국 원정군 Y군의 G-3(작전작전 일지에는 쑹산 포로 중에는 한국인 여성 6명이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즉 이 중 한 명이 박영심 할머니다.

(와패니즈인 토니 마라노, 토니 마라노는 난징 대학살을 포함한 일본의 전쟁범죄를 부정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일본 극우와의 커넥션이 깊은 인물이다. 몇 년전 그는 미국에 있는 소녀상에 가서 이런 모욕적인 행동을 했다.)


(박정희와 박근혜,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졸속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그의 딸 박근혜도 탄핵되기 1년전 비슷한 짓을 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1990년대부터 한국 사회에서 이슈가 된 문제이다그리고 현재도 매주 수요일마다 서울에 있는 일본 대사관 근처에서는 수요집회가 열리고 있다이처럼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양국이 정치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 있다일본군 위안부는 분명한 전쟁범죄다소위 일반 성매매 문제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며일본 제국주의의 전쟁범죄라는 점에서 규탄 받아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데에는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 때문이기도 하지만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막중하다.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강제 징용 문제 그리고 사할린 한인 문제 등을 졸속으로 끝내서 이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고이는 결국 일본에게 한국은 합의했다.”는 주장을 하게 만들었다따라서 박정희 정부의 책임도 매우 크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와 더불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1938년부터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일본은 더 많은 병력을 전선에 보내야 했고결국 식민지 지역에서 인력을 차출했다대대적인 징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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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이라면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를 보았을 것이다. 1985년 6월 1일에 개봉한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관객 92만 5천 명이 보았을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물론 이 영화는 당시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학생 운동권들의 저항을 억누르고반공의식과 반북의식을 고취하려는 목적에서 상영된 것이었다즉 캄보디아 폴포트 공산정권의 이런 만행을 보라대한민국이 공산화가 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전두환 정부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다그리고 놀랍게도 이러한 관점들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먹혀들어 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영화 킬링필드는 1975년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잡은 폴포트(Pol Pot, Salot Sar)와 크메르 루주(Khmer Rouge)의 학살과 만행을 다루고 있다영화는 미국의 반전기자 시드니 스켄버그(Sydney Schanberg)와 캄보디아의 디스 프란(Dith Pran)의 우정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따라서 영화를 본 이들이라면 감동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영화의 본질은 분명했다캄보디아의 만행을 폭로함으로써반공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려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정부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킬링필드의 희생자 유골, 캄보디아는 폴포트 집권 시기 수많은 인명이 학살로 희생됐다.)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자 폴포트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4년간 캄보디아를 통치했다그의 정권은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통치기간 4년 동안 학살을 자행했다이 학살로 최소 200만에서 300만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하는 이들도 있다즉 크메르 루주 정권의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학살로 그만큼의 인명이 학살당했다는 이야기다그러나 이러한 수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기도 한다실제로 폴포트 집권 시기 학살당한 사람의 숫자는 80만에서 150만 사이이며사망자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 및 수용소 생활 중 사망했다는 것이다이 중 실제 즉결 처형으로 사망한 자의 수치는 7만 5,000명에서 15만 명으로 되며나머지 학살굶주림질병과로로 숨진 사람들이 100만 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폴포트 집권 시기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도시에 살던 캄보디아인들이 강제로 농촌으로 이주당했고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서적의 80%가 혁명에 불필요하다는 이유로 폐기됐다그리고 S-21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인 뚜옹슬랭에서 고문과 조작이 있었고그 시설에서만 1만 4,000명이 거쳐 갔으며 이 중 절반이 사형당했다뿐만 아니라 폴포트는 크메르 루주의 병력을 동원해 베트남의 국경지대을 의도적으로 침공했으며적잖은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살던 베트남인들을 학살했다캄보디아 내의 베트남인들도 그저 베트남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숙청당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크메르 루주는 많은 학살을 자행했다그러나 많은 이들이 크메르 루주의 학살은 알아도 그 이전의 학살은 모른다그 이전의 학살은 무엇일까그것은 바로 미국의 닉슨(Nixon) 행정부가 저지른 캄보디아의 제1차 킬링필드다. 1954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형식적으로 독립을 얻은 캄보디아는 다시 베트남 전쟁의 영향을 받았다. 1960년대 초반 이후 미국과 남베트남군은 호치민 루트를 통해 증파되는 베트콩 물자를 차단할 목적으로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면서 더 증가했다실제로 1967년 2월 24일 미군남베트남군한국군으로 구성된 대규모 군대가 캄보디아 영토를 침입해 크락 크란의 크메르족 마을에 집중 포격을 가한 적이 있었으며미국의 항공기들은 수시로 캄보디아 국경을 침범했었다.

(B-52 폭격기, 미국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

 

1969년 3월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이른바 비밀 폭격을 시작했고, B-52를 포함한 미군의 폭격기가 거의 매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 폭탄을 투하했다거기다 당시 시아누크는 제3세계 블록에 가담하였고캄보디아 국경지대 내에 베트콩 주둔을 허용했다따라서 닉슨 정부는 캄보디아를 폭격했다. 1970년 미국은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론놀(Ron Nol)을 동원해서 캄보디아에서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고베트콩 소탕을 명분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했다대규모의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이에 따라 민간인 희생자가 속출했는데민간인 희생자 대부분은 미군의 폭격과 공군력에 의해 발생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이 폭격한 캄보디아 지역을 나타낸 지도, 말 그대로 캄보디아 전역을 폭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70년 1월 캄보디아 정부가 공식 백서를 통해 사진과 날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세부 사항들을 덧붙여 수많은 사망자를 발생시킨 수천 건의 사건들을 공개했다여기에는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과 지상공격에 관한 것을 담고 있었다그러나 놀랍게도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나 지상공격 이후에 발견된 시체 중 베트콩의 시체는 단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즉 이들의 공격이나 폭격으로 죽은 이들은 다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캄보디아 침공을 설명하고 있는 미국의 닉슨 대통령)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은 결국 미군의 철수로 끝났다그러나 강도 높은 폭격은 지속됐다. 1971년 말 회계감사원(General Accounting Office)의 조사낟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폭격이 난민과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킨 매우 중요한 원인이라고 결론 내리고 난민의 수를 인구 700만 명 중 약 1/3로 추정했다심지어 미국의 정보기관은 마을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차별적인 포격과 공중폭격의 가능성이라고 보고했다그리고 이러한 미국의 파괴행위는 역효과를 만들어 냈다그것은 바로 1960년대 중후반부터 캄보디아에서 활동하던 크메르 루주의 급부상이었다크메르 루주는 미군의 폭격이 격화됨에 따라캄보디아 내부의 농민들에게 지지를 받게 됐고이는 결국 론놀 정부군과 크메르 루주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미군의 폭격을 목격한 미국의 통신원 리처드 더드먼(Richard Dudman)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폭격과 사격은 캄보디아 농촌 사람들을 급진적으로 변하게 만들었으며농촌을 대규모의 헌신적이고 효율적인 혁명 기지로 변모시켰다.”

 

출처여론조작 p.439

 

1973년 초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핀란드조사위원회가 사용한 대량학살(Mass Genocide)’라는 말에 걸맞는 규모로 증가했다미국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북베트남의 레둑토(Le Duc Tho)가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한 이후 5개월 동안에도 캄보디아에 대한 폭격은 지속됐으며, 8월이 되어서야 폭격이 중단됐다즉 1969년 3월부터 1973년 8월까지 미국은 4년 6개월 동안 캄보디아를 무차별 폭격했다그 결과 캄보디아의 농촌은 폐허로 변했고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공포의 장소가 된 프놈펜으로 탈출했다많게는 2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도 추정하며,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핀란드 조사위원회는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으로 6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사망했다고 추정했으며최소 30만에서 많게는 80만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올리버 스톤(Oliver Stone)과 피터 커즈닉은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에서 이에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캄보디아 침공에 대한 노엄 촘스키의 주장)

 

공산계 반정부 무장조직 크메르루주는 급속히 세를 불렸다젊은 크메르루주 조직원들의 광신적인 행태에 대한 무시무시한 보도가 꼬리를 이었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캄보디아에서 정권을 장악했다그들은 곧바로 국민들을 상대로 다시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그 결과 150만 명 이상이 학살당했다미국의 폭격으로 이미 50만 명이 죽음을 당한 터였다미국은 캄보디아의 주요 우방인 중국과 화해 무드 상태에서 폴 포트가 이끄는 잔학한 크메르루즈 정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103

 

이처럼 우리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에 대해 편향적으로 알고 있다폴포트 정권이 저지른 잔혹한 만행은 기억하고 있지만정작 폴포트의 킬링필드 못지 않게 캄보디아 민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미국 닉슨 정부의 대량 학살 프로그램은 완벽히 잊혀졌다또한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잡은 이유가 미국 때문이라는 사실도 가려졌다왜 그런 것일까그것은 바로 서방 사회가 편향되고 조작된 여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따라서 캄보디아 대량학살을 논할 때미국의 제1차 킬링필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주제며비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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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과학적인계산

 

더쉬닉은 기근대학살" 기간의 사망자 수를 계산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메이스도 더쉬닉의 방법을 사용했다:

 

‘1926년 인구조사와 ... 1939117일의 인구조사의 자료에 따르면 ... 그리고 집산화 이전의 평균 증가율... (2.36%), 우끄라이나에서 두 번의 인구조사 사이에 750만 명이 사망했다고 계산할 수 있다.’19)

 

이러한 계산의 무의미하다.

 

세계 대전, 내전 그리고 1920년부터 1922년 사이의 대기근 모두가 출산율의 저하를 야기했다. 그 시기에 태어난 신세대는 16세인 1930년 무렵에 육체적 성숙을 이루었다. 인구 구조는 필연적으로 1930년대의 출산율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자유로운 낙태 또한 1930년대의 출산율을 극적으로 감소시켰고, 1936년에 정부가 인구증가를 위해 자유로운 낙태를 금지시킬 때까지 지속되었다.

 

1929년에서 1933년은 농촌에서 기근이 동반된, 거대하고 맹렬한 투쟁이 특징적인 시기였다. 이러한 종류의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상황으로 출산율이 감소하였다.

 

우끄라이나인으로 등록된 인민들 수는, 민족 간의 결혼, 신고한 국적의 변화 그리고 이민에 의해 변화하였다.

 

우끄라이나 국경조차도 1926년과 1939년에 같지 않았다. 200만에서 300만의 쿠반 코사크(Kuban Cossaks) 사람들은 1926년 우끄라이나인으로 등록되었으나, 1920년대 말에는 러시아인으로 재분류되었다. 이 새로운 분류만으로도 더쉬닉과 메이스가 계산한 기근대학살의 희생자들25%에서 40%를 설명해 준다.20)

 

공식적인 수치에 의거해서, 우끄라이나의 인구가 1926년에서 1939년 사이에 3339000명이 증가한 것을 더해보자 (300+3,339,000=6,339,000 역자). 나찌에 의한, 실제로 대학살이 진행되는 환경에서 유대인의 인구증가와 이 수치들을 비교해 보라.21)

 

더쉬닉 계산법의 타당성을 시험해 보기 위해 더글라스 토틀은 캐나다의 서스캐처원(Saskatchewan) 주의 인구 수치를 한 예로 잡아보았는데, 이 지역에서는 1930년대에 농민들의 거대한 투쟁이 있었다. 억압은 종종 폭력적이었다. 토틀은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과 서부 캐나다의 가뭄에 의해 야기되고, 캐나다 우익 정부의 정책과 폭력이 뒤얽힌, ‘불황대학살의 통계학적인 희생자들의 수치를 계산하려고 했다:

 

1931년 서스캐처원 인구

 

921785

 

1921부터 1931년까지 서스캐처원 인구 증가율

 

22%

 

1941년 서스캐처원 인구 예상치

 

(1931인구 더하기 22%)

 

1124578

 

실제 1941년의 서스캐처원 인구

 

895992

 

불황대학살의 희생자들

 

228586

 

“1931년 인구를 기준으로 한 희생자 비율

 

25%

 

제 정신을 가진 사람 누구라도 캐나다에 대한 기괴한 어릿광대극이라고 불렀을, 과학적인 방법은 우익 출판물들에서 스딸린 테러증거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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