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만화작가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를 정말 재밌게 읽었었다. 당시 이원복이 쓴 『먼나라 이웃나라』 도이칠란드 편을 재밌게 읽었었는데, 당시 책에 등장한 동독의 이미지는 지금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동독은 항상 서독에 비해 무언가 부족한 나라였다. 베를린 장벽을 넘어 자유를 찾아 나서는 동독인들의 모습과 소비재 부족으로 인해 서독 관광객으로부터 생필품을 갈취하는 동독 경찰의 모습이 만화에서 묘사됐다. 그리고 동독이라는 나라는 자유가 억압당하며, 공산당 독재자들이 통치하는 뭐 그런 나라로만 보였다. 이것이 단순히 이원복이 쓴 만화책의 문제만은 아니다. 2018년 독일에서 개봉한 영화 ‘벌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전적으로 동독 체제에 불만을 가진 가족이 서독으로 도망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나 통일하면 독일식 흡수통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동독에 대해 이런 식으로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동독에 대한 아주 단편적인 시각이다. 동독이 세운 업적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탈나치화(De-Nazification) 문제를 보면 그렇다. 동독사 연구자인 카트야 호이어에 따르면, 서독은 나치 출신을 공직계·교육계·문화계, 심지어 경찰 조직에도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독일민주공화국은 반파시즘을 기본 신조로 유지했다. 소련 군정 하에서의 동부 독일과 동독 정부는 미군정 하에서의 서부 독일과 서독 정부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탈나치화 과정을 거쳤다. 심지어 경제에 타격이 있어도 그 과정을 거쳤는데, 공학자와 경찰이 사라진 자리는 미숙하더라도 이념적으로 문제가 덜한 사람들로 채웠다.


독일의 경제 또한 그렇다. 물론 동독이 서독 보다 경제적으로 낙후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못사는 나라는 절대 아니었다. 1990년 기준 당시 서독과 동독의 1인당 GDP를 비교해보면 그렇다. 당시 서독의 1인당 GDP는 15,300 달러였고, 동독은 9,679 달러였다. 당시 소련이 대략 9,100~9,200달러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동독의 경제력은 결코 낙후되지 않았었다. 물론 이원복 또한 동독이 전후재건에 성공하여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 비교적 잘 살았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문제는 ‘사회주의=가난’이라는 점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데에 있다. 사회주의 국가하면 무조건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한국인들은 동독도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굶주렸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동독의 지도자에 대해서도 ‘독재자’ 혹은 ‘권력가’라는 단어로만 해석한다. 소위 한국에서 민주진보 진영에 있는 사람들 또한, 현실 사회주의권 지도자나 제3세계 지도자를 보면 항상 그 수식어로만 보는 경향이 크며, “이승만이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처럼 독재한 사람일 뿐이다.”는 매우 지엽적인 편견에 빠져있다. 구사회주의권 지도자들이 이른바 ‘서기장’이나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했다는 점을 들어 그저 장기집권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독재자라고 단순무식하게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4년이나 5년에 한번 씩 대통령을 선출해야만 민주주의라는 이상한 강박관념”에 빠져있기도 하다.


물론 1당 독재도 엄밀히 말해서 독재는 맞다. 그러나 그 독재의 성격이 어떠한지는 전혀 보지 않는 것이다. 정말 이 체제가 무슨 우리가 생각하는 인민을 대량 학살한 체제인지 박정희 정권처럼 치마 길이까지 검열하는 체제였는지, 경찰의 공권력이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던 시절 대한민국 만큼이었는지를 진지하게 분석조차 하지도 않는다. 


예를 들어, 리비아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리비아의 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에 대해 독재자 혹은 망나니라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카다피의 정치통치 방식인 자마히리야의 적용을 보면, 소위 서구가 주장하는 민주화(라고 쓰고 색깔혁명 혹은 폭동이라 읽는다.) 이후보다 선거제도와 지방자치제도가 자리 잡혔었다. 자미히리야(인민의회)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과 소수민족이었던 만큼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였다. 한국의 이승만 독재나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 이렇게 존재한다. 이런 리비아가 “과연 박정희나 전두환 보다 비민주적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폭압적인 독재통치라고 말 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이들은 한국 사회에선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도 이러한 접근이 과거에 존재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게도 필요하다. 즉, 단순히 지도자가 1당독재를 했다고 해서 1인체제를 유지했다고 해서, 소위 미국이라는 세력의 우산 아래 있던 친미 성향의 자본주의적 독재자와 같은 선상에서만 놓고 보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동독의 경우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하면, 억압·자유의 부재·검열·통제·생필품 결핍 등 절대 긍정적일 수 없는 요소들만 생각하지만, 동독의 사회를 들어다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앞서 리비아의 사례와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그것과 단순히 비교해서 “독재 통치일 뿐이다.”는 식의 관점도 어찌 보면 단순도식화다.


따라서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분석도 단순히 독재자라는 식의 관점은 분명히 잘못됐다고 본다. 호네커 시절 동독 사회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호네커 시절 동독은 나름 청소년들의 수요를 맞추기 위해 서방의 의류 등을 수입했고, 음악에 대해서도 풀어주며 서독과 교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즉, 서독 문화가 크게 금지됐던 것고 아니고, 정부의 일부 정책에 반하는 행동이 전면적으로 금지가 됐던 것은 아니다. 다만 체제 전복을 목적으로 삼는 행위는 금지가 됐는데, 이것은 소위 자본주의 국가들도 같은 선상에서 막는 부분이다. 참고로 에리히 호네커의 전임자인 발터 울브리히트의 경우도 서구의 시각에선 동독의 독재자로 규정받는데, 울브리히트는 1971년 수상직에서 사임했다. 이것이 무슨 이승만처럼 4.19 혁명과 같은 일로 사임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다. 


호네커 시절의 동독은 여성인권에 있어서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이는 동독의 여성 취업자 수치를 보면 명확하다. 동독의 여성 취업자 수는 1989년 기준 130여만 명으로 거의 세 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였다. 특히나 비생산 영역에선 여성 취업률이 1950년대 50% 수준, 1960년대 60% 수준, 그리고 1970년대 이후 70% 수준을 넘어가면서 남녀 동등한 비율의 취업률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고용률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독 사회의 여성 고용률을 살펴보면, 괄목할만한 변화를 알 수 있다. 동독이 탄생했던 1949년 전체 취업인구 731만 3,000명 중 여성이 298만 9,000명으로 40.9%를 차지했으며, 취업인구에서 차지하는 남녀 비율은 60:40이었다. 이러한 비율은 1970년대 말에 들어 여성 비율이 50%를 넘기면서 남녀 간 완전한 고용평등을 달성했다. 비록 1980대를 거치며 하락하여 1989년에는 40% 수준에 머물렀지만, 여성 고용률 50% 달성은 비생산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1949년 비생산 영역 취업활동 인구 90여만 명 중 여성이 54만 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는데, 1949년부터 1989년까지 비생산 영역 취업인구는 180여만 명으로 두 배 정도 증가했다. 즉, 이런 나라가 어떻게 해서 박정희 시절 훅은 전두환 시절의 독재정권과 같은 선상에서 비교가 될 수 있는지 심히 의심이 든다.


즉, 이와 같은 변화가 에리히 호네커 시절 동독에서 있었다. 노동 시간에서도 선진적이었다. 이해영이 집필한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에 따르면, 동독에서는 근로자의 약 75%는 1주에 43.75시간을 근무했고, 16세 미만의 청소년과 임산부의 경우, 야간작업이 금지되었으며 6세 미만의 자녀를 가진 여성과 돌보아야 할 식구를 거느린 근로자는 야간작업을 거부할 수 있었다.시간 외 근무는 예외적인 경우, 노동자위원회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며, 연간 20~26일의 휴가를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동독의 경우 노동의 권리(Recht auf Arbeit)는 인간 기본권으로써 헌법으로 보장받았다. 그러니까, 근로기준법 조차도 없었고, 노동자를 굴리는 것 밖에 생각하지 않으며, 민주화 된 이후에도 주 120시간 노동을 지껄이는 윤석열이 집권하는 한국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 대해 무작정 독재자 프레임을 씌우는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들을 전혀 보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호네커는 단순히 군사독재에 복무한 사람이거나, 과거 나치에 협력하며 민족반역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 전혀 아니었다. 에리히 호네커는 열렬한 사회주의 혁명가였고 투사였다. 1920년대 독일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30년대 국제레닌대학교에서 유학하며 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을 하자, 이에 맞서 싸우다가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감옥살이를 했다. 1935년 투옥되어 1945년 소련군에 의해 독일이 해방될 때까지 옥살이를 한 인물이다. 쉽게 말해, 제국주의와 파시즘에 맞서 저항한 열렬한 혁명가였던 것이다. 도데체 어떻게 해서 호네커라는 인물이 이승만이나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과 같은 이들과 동일선상의 독재자 프레임으로 엮을 수 있는지 나는 이해가 되질 않는다.


지금까지 “에리히 호네커를 단순히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이 왜 문제가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적 관점에 따라 독재자로 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전두환의 독재를 생각하며 같은 선상에 일단 놓고 보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그렇게 했을 시 생기는 오류가 분명히 있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이런 관점이 진지하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들이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에 따라 억압의 강도가 강할 수 도 있고, 약할 수도 있다. 이는 자본주의 국가도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니 자본주의 국가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면, 사회주의 국가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리히 호네커를 단순히 ‘동독의 독재자’ 프레임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가 존재하는 것이다. 에리히 호네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선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에 다뤄볼 예정이다.


참고문헌


이해영, 『독일은 통일되지 않았다』, 푸른숲, 2000.

정재훈·박수지, 『동독 사회보장제도: 역사와 변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17.

카트야 호이어, 송예슬 옮김, 『장벽너머 - 사라진 나라 동독 1949-1990』, 서해문집, 2024.

Honecker Erich, From My Life, Pergamon Press, 1981.

Murphy Austin, The Triumph of Evil: The Reality of the U.S. Cold War Victory, European Press Academic Publishing, 2000.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4-03-19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리히 호네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낡아빠진 ‘반공주의‘ 사상이 낳은 산물이 아닌가 싶네요! 사실 우리 머릿속에 ‘사회주의 국가‘하면 ‘가난하다‘, ‘억압적 통치가 이루어진다‘라는 의식이 너무 뿌리깊게 (반공주의에 찌든 나머지) 박혀있지만, 사회주의 국가 중에도 동독과 같이 잘 사는 국가도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 중에 가난한 나라들(과테말라, 필리핀...)도 꽤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적이고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3년이라는 전쟁 기간 동안 300~400만 명이나 되는 한반도 인명이 희생되었는데, 이 중 100~150만 명은 군인이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사망자의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양민 학살과 미군의 무차별 공중폭격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일어난 베트남 전쟁에서 비슷한 인명이 희생되었는데(로버트 맥나마라의 추산에 따르면, 미국이 일으킨 전쟁으로 380만 명의 베트남인이 희생당했다. 노엄 촘스키는 400만 명으로 추산했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 보다 3배 이상 기간이 더 길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나 일본에게 한 것 보다 파괴적이었다. 1950년 11월 8일 맥아더 사령부가 북한의 도시 신의주를 폭격했을 때, 대공 방어막이 전혀 없던 이곳엔 지옥이 펼쳐졌다. 그날 미군 B-29 폭격기 70대를 포함한 100대 이상의 항공기가 8만 5,000발의 네이팜탄과 폭탄을 투하했다. 총 3,017호에 달하는 신의주 공공건물 중 2,100호가 파괴됐고, 1만 1,000호 이상의 일반 주택들 가운데 6,800호가 파괴됐다. 16개의 초등학교와 14개의 중등학교, 15개의 교회와 2개의 병원도 이날 폭격으로 파괴됐다. 총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당일 폭격으로 사망했는데, 이중 4,000명 이상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즉,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 80%는 여성과 아이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이 경험했던 참극의 역사였다. 놀랍게도 당시 이와 같은 미군의 폭격은 전쟁 내내 지속됐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의 영토는 개전 초기의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됐다. 그러나 1951년부터 전쟁이 다시 38선 인근에서의 전투로 전개되면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중공군이나 북한군의 대규모 공습을 전혀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이때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재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북한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에 서명하고 나서 12시간이 지날 때까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먼저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와는 별개로 미군의 폭격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면서 내세웠던 기준에 따라 보자면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공습은 북한 사람들이 미국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는 계기였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들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이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에 맞아 사지가 불타고 찢기며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보며 이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반미교육을 강화한 데에는 전쟁 당시 자신들이 겪은 끔찍한 트라우마 때문인 것을 이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 북한의 트라우마는 결과적으로 전후재건기 방공망 강화로 이어졌다. 김일성 시대 당시 북한은 소련의 모스크바를 제외하면 소련의 S-25(장거리 지대공미사일)가 배치된 유일한 도시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 소련의 최신식 지대공 무기들이 북한 전역에 배치됐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존하는 미국의 군사적 압력도 크게 작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58년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 공격에 나서겠다는 위협을 고조시켰다. 1958년 1월부터 미국은 남한에 일방적으로 핵무기를 배치했다. 그 결과 대략 950개나 되는 핵탄두가 남한에 배치됐다. 이것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북한을 핵무력으로 파괴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론상으로 이 정도의 무력이면 당시 북한과 중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던 수준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한참이던 1970년대 초중반 남한에 배치된 미국의 핵탄투는 대략 700개 정도였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이승만의 반공주의를 물려받아 북한의 위협을 정치 및 사회적으로 항상 내세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는 현실과 상충되는 주장이었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당시 북한이 미군 공습에 대한 공포를 가질만했다. 



실제로 미 합동참모본부는 “북한군을 상대로 대규모 핵 공습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북한 영토 위로 감시 비행 활동을 벌여 조선인민군의 방위에 관한 상세하고 중요한 정보를 획득했고, 이를 남한의 공군과도 공유했다. 1958년 1월 말 기준으로 보자면, 미국은 한반도 이남에 150개의 핵탄두를 배치했다. MGR-1 어네스트 존 로켓포 시스템, 280mm 대포와 203mm 핵 곡사포, ADM 핵지뢰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해 3월에는 미국의 타격 전투기들이 자체 핵탄두를 장착했고, 탄도 미사일을 장착한 MGM-18 라크로스와  MGM-19 서전트, M-28 데이비드 크로켓 활강포를 포함한 전술핵무기를 위한 발사 장치가 즉각 뒤를 이어 배치됐다.



이렇게 해서, 미국의 핵미사일 배치는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북한 입장에서 보자면, 재래식 포 자산으로 방비가 삼엄한 미군 기지를 포격하는 것 말고는 잠재적 핵 공격에 대응할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반도의 힘의 균형은 미국에게 압도적으로 쏠려 있는 상황이었다. 1953년 정전 협정 이후 미군 첩보기가 북한 영공을 비행했으며, 전쟁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 10대 이상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됐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석방된 인질들을 데려왔다. 당시 미국의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범에 대해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 해마다 7,900건 이상의 도발행위를 집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1980년대 한국에서 나온 북한방문기인 『분단을 뛰어넘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는 생각했다. 저 분단의 장벽을 쌓으려고 얼마나 많은 백성의 피땀이 흘러졌으며 얼마나 많은 서민의 혈세가 소비되었을까? 또 한편 저 분단의 공사를 함으로써 높은 분과 군 장성 그리고 청부업자들의 배를 얼마나 부르게 했을까. 나의 상상은 끝이 없었다. 2배나 되는 인구를 갖고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 그리고 최신의 미제무기를 장비로 갖춘 국군, 그 뒤에 미 지상군 4만과 해공군의 지원, 핵탄두 700개, 그것을 갖고도 현대판 만리장성까지 쌓았다. 그리고도 계속 남침의 위협을 고창하면서 국민을 억압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북한이 남한을 군사적으로 침공할 것이라는 주장은 1958년부터 현실 가능성이 없는 반공 정부의 프로파간다라 볼 수 있다. 그리고 북한이 핵무장을 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과 미국의 일방적인 전쟁도발행위가 존재했다. 그렇다면, 1960년대 북한에서 나온 남조선혁명론과 1968년 김신조 사건은 과연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다음번에 올리도록 하겠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4-03-25 2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진실을 부정하는 분단Yuji세력 국짐과 윤석렬-김거니-한똥훈 정치검찰파쑈독재정권은 허구한 날 ˝선제타격!˝만 외쳐대고 허상에 가까운 북한붕괴론을 맹신하여 남북관계를 파탄내고 있죠...
 

1924년 1월 21일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이 사망했다. 올해 2024년은 레닌 서거 100주년이다. 20세기 레닌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이후 등장한 수많은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레닌은 위대한 혁명가이자 이론가로서 존경받았다. 레닌이 죽고 난 다음 소련 공산당에서 최종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이었다. 레닌 사후 소련 공산당 내에서는 당내투쟁이 있었다. 트로츠키(Trotsky), 부하린(Bukharin), 지노비예프(Zinoviev) 그리고 스탈린이 경쟁했는데, 스탈린이 승리했다.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트로츠키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트로츠키주의자(Trotskyist)들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에 대해 비난할 때 사용하는 소재 하나가 있다. 바로 ‘레닌의 유언’이다. 즉,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거나,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트로츠키 및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들도 잘만 인용 및 이요하며 스탈린을 헐뜯기 바쁘다. 이 부분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연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레닌의 유언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자.


사실 레닌은 트로츠키에 대해 안 좋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알기 위해선 19세기 말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주의 세력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1898년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 전 러시아 대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당의 기초를 마련했다. 1903년 영국 런던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창당됐고, 이후 당 내에서 레닌과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파가 분리됐다. 당시 레닌이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다수파를 의미하는 볼셰비키라 불렀고, 마르토프가 이끄는 세력을 러시아어로 소수파를 의미하는 멘셰비키라 부르게 됐다. 당시 트로츠키는 레닌을 비방하고 헐뜯는 멘셰비키파에 있었다. 트로츠키가 볼셰비키로 노선을 바꾼 것도 1917년 러시아로 귀국한 다음이었다.


트로츠키가 1917년 10월 혁명에 참가했으며 적백내전에서 붉은 군대를 지휘한 공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로가 스탈린에게 전혀 없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스탈린 또한 적백내전에서 소련의 붉은군대를 지휘했다. 특히나 1919년 5월에는 유데니치가 지휘하는 백군에 맞서 페트로그라드의 방어를 지휘하기 위한 전권을 볼셰비키로부터 물려받았다. 또한 차리친(현재 볼고그라드)에서 그는 붉은군대 지휘관으로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1921년부터 1923년 동안 볼셰비키 공산당에서 레닌 다음의 2인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1922년 4월 23일 레닌의 추천에 의해 총서기장에 임명됐고, 당시 중앙위원회, 정치국, 조직국 위원이자 볼셰비키 공산당의 총서기장이었던 인물은 스탈린이 유일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을 조작했다고 자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진실은 무엇일까? 


우선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시킨 이후 레닌의 건강상태를 알 필요가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1년 뒤인 1918년 8월 러시아 사회혁명당원인 핀야 카플란의 암살 시도 때문에 총상을 입었다. 그 때문에 1922년 4월 23일 총탄들의 하나를 처치하기 위한 외과수술을 받았으며, 1달 뒤 그의 오른쪽 손과 발이 마비됐다. 1922년 12월 16일 레닌은 두 번의 위험한 발작을 겪었고 12월 23일에 또 한 번의 발작이 있었다. 1923년 3월 10일 레닌은 새로운 발작 때문에 신체 절반이 마비되었고, 언어 능력도 앗아갔다. 그렇게 해서 레닌은 더 이상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24년 1월 21일 사망했다. 따라서 레닌은 1922년부터 생과 사를 오갔으며, 유언을 작성했다. 그 유언으로 알려진 문서가 있는데, 이 유언이 작성된 문서의 시점을 볼 필요가 있다.


소위 ‘레닌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문서는 1922년 12월 23일과 31일 사이에 구술됐다. 1923년 1월 4일에 한층 보충되었으며, 이는 그가 발작을 겪어 건강상태가 안 좋던 시기였다. 특히나 공산주의의 적들이 ‘레닌의 유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1922년 12월 23일부터 25일까지의 기간 동안 구술된 것이다. 1922년 12월 22일 스탈린은 레닌에게 선별적인 정보의 조각들을 가져다 주는 것에 대해 전화로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를 힐책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화 통화가 크룹스카야로 하여금 카메네프에게 스탈린의 무례함에 대해 불평하는 글을 쓰게 된 원인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부르주아 학자 내지는 작가들은 레닌의 유언에 집중했다. 여기서 서구 학자들은 레닌이 유언에서 트로츠키를 위해 스탈린의 제거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벨기에 왕립군사학교의 명예 교수인 앙리 베르나르는 다음과 같이 책에 썼다.


“정상적으로는 트로츠키가 레닌을 계승했어야 했다.... (레닌은) 그를 후계자로 여겼다. 레닌은 스탈린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출처는 어디일까? 바로 트로츠키 자신이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스탈린이 당에 숨긴 레닌의 유언과 관련해 분개했다. 그러나 1922년 12월 23일과 1923년 1월 5일 사이에 레닌이 구술한 서신을 보면 내용이 다르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나는 중앙위원회의 신망을 두텁게 하기 위해, 우리의 행정 기구를 충분히 개선하기 위해, 그리고 중앙위원회 분파 간의 갈등이 당의 미래에 과도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 당이 노동계급 출신에서 50명에서 100명의 중앙위원회 위원을 요구할 모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분열을 막는 방책’이 될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안정성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스탈린과 트로츠키와 같은 중앙위원회의 그러한 위원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 사이의 관계가 분열의 위험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면 끝이 없다.”


뿐만 아니라 레닌이 진술한 전문을 보면,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태도를 비판하기는 했지만, 트로츠키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레닌은 스탈린이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1923년 3월 5일 새로운 서신을 구술했다.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귀하는 전화상으로 나의 아내를 호출하여 질책하는 무례함을 저질렀습니다. 나는 나에 대해 저질러진 일을 쉽게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내 아내가 당한 것이 또한 내가 당한 것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귀하가 말한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는 지, 혹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여부를 귀하가 신중하게 숙고하기를 요청합니다. (레닌)”


레닌은 이러한 구술 서신을 남겼지만, 역사학자 이안 그레이에 따르면 크룹스카야는 비서에게 그 서신을 스탈린에게 전달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스탈린에게 전달이 안됐던 것이다. 거기다 레닌이 진술한 유언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비볼셰비즘이라고 비난하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가 10월 혁명(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 동안에 했던 실수에 대해 우연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 사실은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반면에 스탈린에 대해선 크룹스카야에게 보인 무례함을 지적하기는 했으나, 스탈린이 실수들을 했다는 것에 대한 단 한마디도 없었다. 참고로 트로츠키는 말년에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앞서 언급한 벨기에 제국주의자 앙리 베르나르는 이와 같은 트로츠키의 억지주장을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추가하며 책에 서술했다.


“나는 이와 같은 사건의 경과를 어느정도 상상해본다. 레닌은 1923년 2월 말에 독약을 요구했고, 겨울이 다가오자 레닌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햇으며 그의 언어 기능은 돌아오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권력의 다음 차례였다. 그의 목적이 가까워졌으나, 레닌으로부터의 나오는 위험은 훨씬 더 가까웠다. 이런 때에 스탈린은 지체 없이 행동에 옮겨야 되는 결심을 해야 했다. 레닌이 회복할 가망이 없다는 의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스탈린이 레닌에게 독약을 주었는지, 아니면 스탈린이 보다 직접적인 수단에 의존했는지는 나는 모른다.”


애초에 1923년 3월 6일부터 레닌이 죽을 때까지, 거의 완전히 마비되었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아내인 크룹스카야와 그의 누이 그리고 그의 비서들은 그의 침대 곁에 있었다. 즉, 레닌은 그들 몰래 독약을 먹을 수 없었으며, 스탈린이 암살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이를 받아 적는 부르주아 학자들은 이와 같은 상상력을 발휘해 스탈린이 레닌을 죽였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따라서 무슨 레닌이 자신의 후계자를 트로츠키로 임명했다거나, 레닌이 그의 유언을 통해 스탈린을 공격하는 등 반스탈린 투쟁을 했다는 주장이나 스탈린이 레닌을 독살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날조된 사실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사하로프라는 러시아 학자가 잘 반박했으며, 이는 서구 역사학계에서도 유명한 스티븐 코트킨 또한 높게 평가하는 자료다. 스탈린에 대한 얘기 중 하나는 그가 소련 공산당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말 그대로 엉터리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빌 블랜드의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세계의 지도적 맑스주의자로서 레닌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서기장의 자리로부터 스탈린의 제거에 대한 그의 유언에서의 요구는 소련 공산당 제13차 대회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사실은 그 문서가 쟁점이 된 환경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스탈린이 당으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은 친일 문제에 직면했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설립된 이래로 한반도 이남에선 역으로 친일파가 부와 권력을 가지게 되는 모순이 발생했다. 특히나 하지가 이끌던 미군정은 친일 경찰들을 이용했는데, 당시 경찰의 최소 85%가 친일경찰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친일파 청산을 향한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 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미군정장관이던 윌리엄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됐다.

 

194885일 친일파를 처리하기 위한 특별법기초위원회가 국회에 설치되었는데, 정부 수립 공포 다음날인 816일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안이 상정되었고, 91일에 최종적으로 통과됐다. 이른바 반민법은 친일파들에게 거센 공격을 받았다. 이들을 중심으로 민족 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이다.”라는 내용이 담긴 삐라가 살포됐다. , 여기서부터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반공의 논리가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 속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발족됐다. 위원장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이, 특별재판부는 독립운동을 변호했던 김병로, 특별검찰부에는 권승렬이 임명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활동을 개시했다. 반민특위는 박흥식·이종형·최린·최남선·이광수·김연수 등을 구속했으며, 악질 친일경찰로 유명한 노덕술과 하판락 등도 체포됐다. 놀랍게도 이승만은 이와 같은 반민특위 활동에 분노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아끼던 수도경찰찰청 수사과장 노덕술을 반민특위가 체포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고문왕으로 불리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그는 신간회, 광주학생항일운동, 메이데이 시위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죽였다. 해방 이후 월남한 그는 장택상의 눈에 띄어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기용되어 경찰 내의 반이승만 세력을 숙청했으며,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러한 악행을 저지른 노덕술은 본인이 반민특위에 체포당할 것 같자,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해 국회 내 반민법 관련 핵심 인물들을 암살하고자 했다. 놀랍게도 노덕술의 암살 리스트에는 극우인사인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이들도 포함됐다. 그러나 백민태라는 인물이 검찰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의 암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간부들을 불러 항의했으며, 2월에는 반민특위 내의 특별경찰대(특경대) 폐지를 요구하는 강경 담화를 발표하면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당시 이승만이 펼친 논리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잡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반민특위 와해는 1949517일 노일환과 함께 소장파 리더 격이었던 이문원 등 세 의원이 구속되면서 일어난 연쇄사건 속에서 발생했다. 이들을 석방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이 정부 당국의 방조를 받으며 공격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531일 파고다 공원(지금의 탑골공원)에서 세 의원 석방동의안에 가표를 던진 88명의 의원을 적색분자로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었다. 여기서 극우반공주의자들의 표적은 88명의 의원이 아니었다. 바로 반민특위 그 자체였다. , 여기에 공산주의자가 있다는 논리를 적용하여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한 이다.


 

이들은 63일 반민특위로 쳐들아가서, “반민특위는 공산당의 앞잡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반민특위 측은 이들을 체포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잇단 시위의 배후에 친일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가 있음을 파악한 다음 최운하를 포함한 친일경찰 간부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66일 중부경찰서장이 경찰을 이끌고 반민특위를 습격해 특경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무기와 서류 등을 빼앗고 직원들을 연행해 고문했다. 당시 이 습격을 주도한 이가 바로 내무차관이던 장경근이었다. 도쿄대학 법학부를 나온 장경근 또한 일제시기 친일을 한 사람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사법 부문에 수록된 인물이다.

 

다음 날인 67일 대통령 이승만은 한 발 더 나아가 AP통신 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자신이 특경대 해산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반민특위의 활동은 이승만의 요구에 따라 국회가 공소시효를 2년에서 1949831일로 단축하면서 종결됐다. 특히나 이승만 정권이 조작한 국회프락치 사건과 안두희의 김구 암살을 겪으며 친일파 청산은 정말 물거품이 됐다. 반민특위는 194918일부터 검거활동을 시작했는데, 취급한 조사건수는 682건이었다. 이 중에 체포가 305, 미체포 193, 자수 61, 영장취소 30, 검찰송치 559건이었다.



이렇게 해서 남한 내의 친일파 청산 노력은 이마저도 물거품이 됐다. 그 결과 남한에서 처벌한 친일파의 숫자는 말 그대로 0명이 됐다. 그렇게 해서 친일파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정치, 행정, 군사, 기술, 학계 및 여러 분야에서 암약할 수 있었고, 부를 더 축적하여 재벌 및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 남한 정부가 수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 남한 엘리트의 최소 90% 이상이 일제 부역자 혹은 부역자 가족에 연루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위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50년 미국 CIA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승만과 그의 정권은 설사 공산주의자가 아닌 남한 사람 거의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다수에게 평판이 나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4-03-19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기에는 언급이 안 되어 있지만, 이승만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응징한 전명운, 장인환을 변호하는 것을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한 인물로도 악명이 높습니다.
 

2010년 아이티에서 지진이 났을 당시 나는 중학생이었다. 뉴스에서 보도된 내용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대한민국 영토에 3~4배는 작은 나라 아이티에서 지진이 발생하여 무려 10만 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TV 속에 비추어진 지진으로 파괴된 아이티의 모습은 참으로 비참했다. 그러한 장면과 더불어 충격적인 장면이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굶주린 아이티의 아이들이 진흙쿠키를 먹고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이 장면이 충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얼마나 먹을 게 없고 굶주렸으면 영양가 하나도 없고 신체에 지극히 해로운 진흙을 먹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충격적이다.


(아이티의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


현재 아이티의 기아지수는 항상 최악이었다. 세계 최악의 기아지수를 매년 자랑하는데, 기아 문제가 최악인 인도나 현재의 북한보다도 항상 낮게 측정이 된다. 참고로 이 기아지수 추정치는 미국에서 낸 것이다. 즉, 아이티는 인도나 북한보다도 훨씬 굶주리는 국가인 것이다. 참고로 북한은 1990년대 대기근을 겪었던 시기에 자국민에게 진흙쿠키를 나눠준 적은 없었다. 반면 아이티는 수십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항상 최악의 빈곤 국가 중 하나였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그리고 기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그렇다면 아이티는 어째서 굶주렸던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아이티의 친미독재 정권에게 있었다.


(아이티 국기)


특히나 분단 상황에 있는 한국인들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타국의 경제를 잘 도우며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다는 착각에 많이 빠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한국은 이승만 정권 이후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경제성장 동력을 얻었지만, 한국·일본·대만·싱가폴이 특수한 경우라 할 수 있다. 그 외에 미국의 패권적 영향이 미치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을 보면 얘기가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가 바로 국가 아이티의 존재다.


(아이티 지도)


아이티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지 2년이 되던 1791년에 독립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혁명의 급진좌파라 할 수 있는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가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했던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아이티의 독립이었다. 혁명으로 아이티에 독립국가가 탄생했지만, 1804년 마무리된 혁명 이래로 아이티는 항상 위협적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프랑스 정부는 아이티 독립 초기 220억 달러를 강탈했다. 19세기 내내 프랑스는 아이티에게 배상금 지불이라는 명목으로 이 나라의 국고를 털어갔다.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미국이 아이티 문제에 개입하였는데, 이것도 미국쪽 기업의 이익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1915년 미국은 아이티를 침공했으며 1934년까지 군정 통치를 했다. 사실상 아이티를 식민지 지배한 셈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아이티에서도 콩고의 파트리스 루뭄바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뒤마르세 에스티메였다. 그 또한 미국에 의해 제거 및 축출됐고, 미국은 1950년대 중후반부터 친미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해서 집권하게 된 인물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독재자 프랑수아 뒤발리에다.


(2019년 아이티에서 일어난 대규모 반정부 시위)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57년 정권을 잡았으며, 악명 높은 비밀경찰인 통통 마쿠트(Tonton Macoute)를 만들어 자신의 반대파를 제거 및 숙청했다. 참고로 이 비밀경찰 조직은 뒤발리에의 준 군사 조직이었고, 이들은 미군에게 군사훈련을 받았다. 당연히 그는 자신을 따르는 집단에겐 경제적 과실을 집중적으로 주었고, 그의 집권기간 내내 아이티는 경제파탄을 겪었다. 심지어 선거도 부정선거를 저질렀는데, 1960년대 아이티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그는 반대표가 하나도 없는 132만 748표를 얻었다. 오죽하면 당시 미국 뉴욕 타임스가 “라틴 아메리카는 그동안 많은 부정선거를 겪었지만, 뒤발리에보다 터무니없는 작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앞서 언급한 그의 폭력통치는 학살도 동반됐다. 그의 집권 기간 동안 무려 5만 명이 살해당했다.


프랑수아 뒤발리에는 197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아들인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19살의 나이에 아이티 대통령이 됐다. 즉, 아이티는 친미 독재 세습에 성공했다. 아들 또한 마찬가지로 15년 동안 권좌에 있으면서 반대파를 납치, 처형, 고문하면서 민생을 유린했다. 그 결과 1986년 아이티의 민중봉기로 쫓겨나게 됐다. 비자이 프라샤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공포와 거짓으로 사회 내 반공 및 반민중 정서를 심화했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이후에도 아이티는 계속 가난했고, 경제 상황은 여전히 최악이었다. 즉, 예나 지금이나 사는 것이 크게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미국은 꾸준히 아이티 내의 우파 군부를 지원했으며, 내정을 이간질했다.


(아이티에서 아이들이 먹는 진흙쿠키)


2009년 아이티 정부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0.24달러에서 0.61달러로 올리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최저임금법 도입으로 아이티 노동자는 하루에 5달러를 벌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티 4인 가족의 하루 생활비인 12달러보다는 훨씬 낮은 임금이었다. 그럼에도 아이티 내 미국 섬유 기업들은 주 아이티 미국 대사관을 통해 불만을 제기했고, 대사관은 정부에 로비를 펼쳐 최저임금 인상을 철회하도록 만들었다. 미국 대사관의 요청으로 아이티 정부는 최저임금을 결과적으로 0.07달러만 인상했고, 그 덕분에 프루트오브더룸, 헤인즈, 리바이스 등의 읠 기업은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즉, 아이티는 프랑수아 독재가 물러난 이후에도 여전히 미국에 의해 정치와 경제가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자신들 바로 아래에 있는 나라에 친미국가를 만들어 경제를 빨아 먹으면서, 인도나 북한보다도 기아지수가 훨씬 높은 나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한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미국이 세계를 부유하게 만들고 있는가? 결국 그 부의축적은 미국과 과거 19세기 서구 열강들을 중심으로만 돌고 돌았던 것이 아닌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newdvs117 2024-03-19 2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티의 뒤발리에 부자가 한 짓을 보면 칠레의 피노체트랑 거의 쌍벽을 이룰 정도로 지독한 중남미 ‘숭미 극우 독재정권‘의 민낯을 보여 주죠.

2024-04-04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