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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1945년 연설하는 여운형, 일설에 따르면 그는 연설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에서는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났다. 이중에는 35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식민지 조선도 있었고, 1940년부터 일본이 패망할 때 까지 5년간 일제의 통치를 받았던 베트남도 있었다. 많이들 한국과 베트남이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한 얘기들의 근거는 아무래도 한국과 베트남이 남북 분단되어 전쟁을 치렀다는 역사적 사실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하노이 바딘광장 연단에 오른 호치민,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운동가로 상당히 탁월한 정치능력과 대중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한국의 경우 분단이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반면, 베트남은 1975년에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면서 분단을 극복해냈다. 이 점이 바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를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일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이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졌으나, 일본이 패망한 해방정국 시점에서 두 국가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려 했는지에 대해선 제법 알려지지 않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국가 모두 주체적으로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1945년 당시 해방정국을 주도했던 조선의 독립운동가 여운형(Lyuh Woon Hyung)과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치민(Ho Chi Minh)의 활동을 분석하고 비교하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또한 여운형의 조직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호치민의 조직 베트민을 비교함으로써, 전자는 왜 실패했고 후자는 왜 성공했는지도 분석해보려는 목적도 있다.

 

2. 여운형과 호치민의 간략한 생애

 

여운형과 호치민은 그 시기 각국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시점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조국의 명망높은 독립운동가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주체적인 독립국가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도 선명하게 있으며, 그것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얘기를 하기 위해선 우선 여운형과 호치민이 어떠한 생애를 가지고 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양평 몽양 여운형 생가, 현재는 경의중앙선인 신원역에 위치해있다. 몽양 여운형 생가 및 박물관은 2011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만능 스포츠인이자 조선의 독립운동가였던 여운형은 화려한 생애를 가지고 있다. 여운형은 1886525일 경기도 양평의 몰락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14살이 되던 1900년 미국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제학당에 입학했던 그는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조선이 을사조약을 통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했으며, 집안에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대담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은 여운형은 일제의 식민지배 초기 중국 난징에 있는 금룽대학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했고,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던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설하여 우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등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결정적인 인물이었다.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따자 일장기를 지워서 보도한 사건이다. 이 사건 또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이던 여운형이 주도했다.)

 

이후 임시정부에 들어간 그는 일본 고관들과의 회담에서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진정한 독립운동가로서의 모습을 보였으며, 1922년에는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직접 만나는 등 사회주의 운동에도 투신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 혁명에도 가담했었으며, 국제적으로 여러군데를 다니고 여행한 인물이었다. 1929년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식민지 조선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33년부터는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 활동했으며,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말소사건을 주도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시점부터는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뛰어난 국제정세 판단력을 가졌던 인물로 태평양 전쟁 당시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그 이후를 대비했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1944년 건국동맹을 만들어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으며, 194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했다.

(조선건국동맹 깃발)


(배우 신구가 연기한 여운형,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다.)

 

1945년 일본의 패망한 이후 여운형은 자신의 조직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만들어 해방정국을 주도했으며, 한반도 북부에 소련군 남부에 미군이 들어온 상태에서도 민중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다. 모스크바삼상회의 이후에는 분열된 좌우의 합작과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했으며, 괴한들의 테러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그러던 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괴한의 총탄에 비명횡사했다.

(응에안 성에 있는 호치민 생가, 호치민은 1890년 여기서 태어났다.)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호치민은 1890519일 베트남의 응에안 성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베트남을 돌아다니다 프랑스가 세운 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1911년 프랑스 측의 상선 보조로 취직하여 전 세계를 돌아다녔으며, 프랑스와 미국, 영국, 아프리카, 아시아, 중동, 라틴아메리카 등을 여행했다. 그러던 1917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한 길을 걷게 되었으며, 여운형이 김규식을 파리로 보내던 때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안남민족 8개 요구를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직접 제출했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했던 호치민)


(베트남 독립 동맹 대원들, 1941년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하여 독립투쟁에 나섰다.)

 

1920년부터는 프랑스 사회당과 공산당에서 활동했으며, 1923년 모스크바로 넘어가 소련 코민테른에서 훈련받았고, 이후 중국 광저우에 정착하여 베트남 독립을 위한 언론 활동 및 교육 활동 그리고 조직 창설활동에 나섰던 인물이었다. 이에 따라 호치민은 1930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했다. 1930년 반불봉기가 실패로 끝난 이후엔 다시 소련에서 유학하다 중국으로 돌아왔고,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귀국하여 베트남 독립 동맹 즉 베트민을 창설했다. 베트민을 창설하여 항불 항일투쟁에 나섰으며, 나중에는 미국 OSS하고도 협력하여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구축했었다. 그러나 1945년 일제 패망 시점에 맞춰 베트남 전역에서 총봉기를 일으켰고, 194592일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호치민은 이 승리를 통해 프랑스를 몰아냈다.)

 

그 이후에는 프랑스가 다시 쳐들어오자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스의 100년 식민 지배를 종결시켰다. 그 이후 미국이 남베트남에 친미 반공주의적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세워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미국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다. 그러던 19699279세의 나이로 서거했으며, 호치민 전기를 쓴 윌리엄 J. 듀이커(William J. Duiker)의 표현대로 그의 연설과 글들은 베트남이 미국을 무찌르고 통일을 이룩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따라서 여운형과 호치민 둘 다 훌륭한 독립운동가였으며, 진보적인 색채를 가진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과 조선인민공화국 탄생 그리고 강제해산

 

여운형이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한 것은 1945817일이었다. 이는 해방 이후 2일만의 일이었고, 초기 해방 정국을 몽양 여운형이 주도했다는 것을 뜻한다.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는 1944년 그가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을 바탕을 둔 조직이었으며, 해방정국에서 행정과 치안을 담당했다.

 

194248일 미국이 진주만 기습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둘리틀 공습을 도쿄에 가했을 때, 여운형은 이를 직접 도쿄에서 목격했다. 또한 그는 당시 이승만이 하고 있던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들었었고, 일제가 은폐하고자 했던 태평양 전쟁의 전황과 해외 독립운동의 상황을 주변 인사들에게 전달했다. 이런 이야기는 급속히 확산됐고, 그는 결국 1942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여운형은 1943810일 조동호·이상도·이상백 등과 같은 인물과 만나고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아우르는 조직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의했는데, 이 조직이 점차 확대되어 1년뒤인 19449월에는 새로운 단체로 확장 및 탄생했다. 그 조직이 바로 조선건국동맹이었다.

 

조선건국동맹은 1944810일 서울에 있는 현우현의 집에서 건설됐다. 건국동맹은 ‘3불맹서라는 원칙을 규약으로 채택했고, 두 달 뒤인 108일 자신의 고향인 양평군 용문산으로 동지들을 불러 모았다. 여기서 여운형은 또 다른 단체를 조직하는데, 그게 바로 농민동맹이었다. 농민동맹 또한 조선건국동맹과 마찬가지로 조국의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고, 징병 및 징용자들을 도피시키고 그들을 반일운동을 전개하게끔 활동하고자 했다. 건국동맹의 규모에 대해선 다소 논란이 많다. 여운형에 대해 가장 방대한 연구서를 집필한 이정식 교수는 건국동맹 단원이 수만 명이었다는 말을 믿지 않으며, 일제말기의 고등경찰이나 헌병대가 파업을 하고 있었다면 모르되 수만이 아니라 수백 명의 맹원을 가진 단체마저도 조직될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 어쨌든 조선건국동맹은 조직적으로 활동했고, 여기에는 이후 한국의 통일운동가 이기형 선생이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토너인 손기정도 관여했다.

 

19458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소련군이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만주에서 거침없는 진격을 하자 일본은 긴급히 협상할 대상을 찾았다. 처음에는 우익 민족주의자 고하 송진우와 접선하려 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총독부는 여운형과 회담을 했다. 회담에서 여운형은 총독부의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했다.

 

1. 전 조선의 정치범·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 생활지인 경성의 3개월분 식량을 확보하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의 추진력인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화에 간섭하지 말라.

5. 조선 내 각 사업장에 있는 일본 노무자들을 우리의 건설사업에 협력케 하라.

 

엔도 총감은 이 조건들을 아무런 이의없이 다 승낙했고, 이것이 바로 여운형이 8.15 직후의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치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중책을 맡게 되었던 배경이었다. 1945815일 일본 천황의 방송이 있자, 35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있던 계동으로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여운형의 딸인 여연구 여사의 회고록 <나의 아버지 여운형>에 따르면 갑자기 대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어느새 방안과 마루, 마당에 사람들이 꽉 차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816일 여운형은 현재 휘문중학교에 가서 우렁찬 연설을 했다. 연설의 내용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으로 향하는 여운형)

 

조선민족 해방의 날이 왔습니다. 어제 15일 아침 나는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초청을 받아(중략)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건 응락했습니다.(중략)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라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고 이 땅을 참으로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으로 건설해야 합니다.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분란의 단결로 나아갑시다.”

 

다음날인 817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창설했다. 여운형은 첫째로 치안을 확보하고, 둘째로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을 일원화하고, 셋째로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을 우선적으로 강구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여 일반민중으로 하여금 건국준비위원회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를 명확히 알렸다. 이에 따라 건준은 지방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조직된 지방 건준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한반도 전역에 창설됐다. 당시 소련군은 일본이 항복하기 며칠 전부터 한반도 이북에 들어왔는데, 자신들의 점령 지역에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창설되자 이들과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여기에는 그 지역 좌파들도 있었으나 우익 성향의 고당 조만식과 같은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이북지역에서의 건준 및 인민위원회 활동은 2006KBS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서울 1945에서 묘사된 적이 있다.

(건국준비위원회 지부, 건국준비위원회는 해방 초기 전국적으로 설립됐다.)

 

건준이 창설됨에 따라 각 지방의 유지들은 치안대, 보안대, 또는 유사한 이름의 단체를 구성하여 경찰관들을 밀어내다. 8월 말에는 남북을 통틀어 전국 145개소에서 건준의 지회 또는 분회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이런 건준 활동은 그 규모나 범위 면에서 광범위했기 때문에, 199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 또한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다. 건국치안대의 경우 청년학생 2,000명을 동원하여 서울의 치안 확보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지역별 및 직장별 치안대를 조직하여 각각 그곳의 치안을 유지케 하고, 중요 자재 및 기관사들과 특히 수원지 등을 보호케 하였으며, 전기회사 및 철도국과 연락하여 교통 원활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소련군 사령관을 만난 고당 조만식)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 The Origin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치안대 본부는 후에 중앙에서 파견된 인원에 의하여 조직된 것과 현지 집단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중앙의 추인을 받은 지부가 전국에 걸쳐 162개나 구성되었다고 발표했다.” 남북을 아울러 좌우연합체로서 결성된 건준은 소련군이 진주한 이북에서는 친일파 청산 작업에 착수하기도 했다. 실제로 초기 북한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이 구금되거나 처형되고 그리고 대다수가 남으로 도망친 이유에는 이러한 작업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한반도 이남에는 비록 항복했지만, 무장한 일본군이 있었고, 친일파들을 청산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기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어쨌든 해방정국 초기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준이 활동하면서 친일파와 일제의 힘은 약해졌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건준은 좌우연합체였다. 그러나 건준은 초기에 몇몇 문제를 겪기도 했는데, 이것은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이 대거 편입되면서 생긴 좌경화 현상이었다. 당시 건준의 핵심 멤버였던 안재홍과 같은 우익인사들이 박헌영을 포함한 조선 공산당 인사들의 참여하면서 탈퇴했고, 좌우연합의 색체가 사라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건준은 좌익세력이 주도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좌파입장에서 보면 애초에 우익적인 인사들을 축출하고 해게모니를 장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나, 좌우연합이라는 문제에선 아닐 것이다.

(서울에 진입한 미군들, 이것은 또다른 점령의 시작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여운형은 96일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94598일 첫 미군부대가 인천항에 상륙했고, 남한 땅에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다음날인 9일에 수도 서울에 입성했다. 당시 미 제7사단에 있던 총지휘관은 바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렸던 존 리드 하지였다. 미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민중들은 이들을 해방군으로써 환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일본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일본을 두둔하는 모습을 보였다. 서울에 입성한 미군은 조선 총독부 건물에서 공식적인 항복 조인식을 갖고, 총독부 국기게양대에 일장기를 내린 뒤 성조기를 올렸다. 이로써 미군정이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명백히 점령군이었다. 이런 사실은 이들의 포고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이 발표한 맥아더 포고령의 내용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2.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3.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여운형이 건설한 인공하에 있던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탄압하고 짓밟는 대신, 친일파들이 몰려있던 한민당과 일제 경찰출신과 군인출신인 이들을 해방 정국의 행정요인에 앉혔다. 이에 따라 여운형이 주도했던 해방정국의 헤게모니는 건준에서 미군정으로 넘어갔고, 미군정이 주도하며 한국 현대사의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마오쩌둥 1차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 The Red Star Over China>를 집필했던 에드가 스노(Edgar Snow)는 해방 후 조선에 와서 2개월간 머무르면서 정세를 알아보고 귀국한 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다.

 

미국은 아무 준비가 없이 조선에 상륙했다. 그러나 조선에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있었다. 곧 정치적 준비가 있었다. 미국인이 만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살렸더라면 조선의 건설은 더 신속하고 유리하였을 것이다.”

 

4. 베트민의 8월 봉기와 베트남민주공화국의 탄생

 

194592일 하노이 바딘광장은 수만 명 혹은 수십만 명의 인파로 시끌벅적했다. 그 이유는 새로운 조국의 탄생을 기다렸기 때문이다. 하노이 바딘광장에는 한 인물이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그는 빛을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시작과 같았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꾸옥(Nguyễn Ái Quốc)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중월국경지대 까오방에 있는 팍 보 동굴, 호치민은 이곳에 있던 산봉우리를 마르크스 산봉우리라 했고, 시냇물을 레닌 시냇물이라 했다.)

 

1919년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 가서 베트남 인민의 평등한 권리를 요구했던 호치민은 1941년 조국을 떠난 지 30년 만에 귀국했다. 그는 중월국경지대에 있는 팍 보(Pác Bó)라 불리던 동굴에서 한 조직을 창설했다. 그 조직의 명칭은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었다.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했던 1940년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베트남을 점령했다. 당시 베트남의 일부 독립운동 세력들은 일본을 해방자로 맞이하는 큰 착각에 빠졌었지만, 식민지 조선의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달랐다. 19415월 베트민의 권리 호소문을 보면 그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1. 전민단결!

2. 무장궐기!

2. 항불항일!

4. 베트남 독립!

 

이런 점에 있어서 호치민은 선경지명이 뛰어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다.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하여 중국 경찰에게 체포당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19439월에 석방됐다. 이 시기 호치민은 전설적인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 장군에게 베트민의 군대를 양성하도록 했는데, 이에 따라 194412월 잡 장군이 지휘하는 베트남해방군이 창설됐다. 그리고 태평양 전선에서 반파시즘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자 했던 미국과 협력하여, 베트민 부대들 중 일부를 OSS에서 훈련받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초래된 대기근으로 150~200만이나 되는 베트남인이 아사하자, 베트민은 일본군 창고를 습격하여 쌀을 농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OSS와 호치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와 호치민의 협력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룬 서적이다.)

 

실제로 OSS와 협력관계를 구축한 베트민들 중 일부는 일본군 기지를 공격하여 승리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2차 세계대전의 전황은 소련군의 베를린 해방과 미국의 오키나와 점령을 기점으로 급변했다. 특히나 19458월 원폭투하와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은 베트남 정국을 급변하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5개월 전 기존 프랑스 정권과 협력하던 일본은 3월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황제 바오다이(Bao Dai)를 내세웠는데, 기근으로 민심이 이반되자, 민중들 대다수는 독립세력인 베트민을 지지하고 있었다. 8월이 되자 호치민은 베트남에서 혁명을 준비했다. 당시 혁명을 준비하며 했던 호치민의 발언을 일부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 자신을 해방하기 위해 우리 온 힘을 모아 일어서자!

 

전 세계 수많은 피압박 민족들이 독립을 얻기 위해 다투어 나서고 있습니다. 우리만 뒤처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전진! 전진! 베트민전선 깃발 아래 용감하게 전진합시다!”

 

당시 보 응우옌 잡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의 군대는 급속히 성장했다. 194412월 몇 백 명의 대원으로 시작했던 베트민의 군대는 1945년 초중 순에 수천 명 단위에서 1만 명으로 증가했다. 군대의 숫자는 혁명 과정을 거치며 민중이라는 파도 속에서 더 급속히 증가했다. 1945812일 총봉기를 결정한 호치민의 부름에 따라 베트민은 봉기를 준비했고, 천황 항복 다음날인 816일에 혁명을 시작했다. 이 봉기를 이른바 8월 혁명(August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이 혁명은 베트남 북부와 중부 남부에서 신속히 진행됐다. 북부에서는 하노이. 중부에서는 후에, 남부에서는 사이공에서 베트민이 주도한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 봉기에 전국적으로 총 1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819일 하노이 봉기에서만 총 10만 명이 봉기에 참여하여 일본군 철수와 프랑스 식민 통치 종결 그리고 바오다이 황제 폐위를 요구했다.

(8월 혁명으로 베트민 깃발이 걸린 하노이, 8월 혁명은 일제의 패망을 전후로 하여 급속히 전개됐다.)


(바오다이 황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꼭두각시 노릇을 했던 인물이다.)

 

더 나아가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키고, 823일에는 바오다이 황제를 폐위시켰으며, 이에 따라 베트민은 전국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으로 급부상했다. 당시 시위대는 농촌인민과 도시인민이 섞여 제국주의자 타도, 프랑스 식민주의자 타도, 베트남을 베트남인에게, 모든 권력을 베트민으로등과 같은 혁명적인 구호를 외쳤다. 이 시기 베트민은 지역권력을 장악하고 인민혁명위원회를 수립했으며, 권력까지 장악했다. 북부 하노이와 중부 후에에서의 봉기는 사실상 무혈봉기에 가까운 승리였다. 다만 남부의 경우 까오다이와 같은 친일조직과의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8월 말 바오다이 폐위 결정에 따라 825일에는 남부의 중심도시 사이공까지 베트민의 지도하에 들어갔고,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장악하게 됐다.

(응우옌 칵 비언이 쓴 베트남사, 1990년대에 나온 이 책은 베트남 통사로써 전반적인 베트남 역사를 다루고 있다.)

 

8월 혁명에 대해 베트남의 역사학자 응우옌 칵 비언(Nguyễn Khắc Viện)“1945년 당시 8월 혁명은 80년간의 프랑스 식민통치를 종결시켰고, 군주제를 폐지시켰으며, 베트남을 독립국가로 재건했다.”<베트남 오래된 역사, Vietnam A Long History>에서 주장했다. 팜마이흥(Pham Mai Hung)“19458월 혁명은 베트남 민족의 영광스런 국가를 세우고 유지하는 몇몇 역사의 장 가운데 중요한 한 장.”이었다고 평가 내렸다. 1971년 베트남 전쟁 당시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전 세계에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The Pentagon Papers)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호치민은 이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베트남 전체 차원의 유일한 정치조직으로 구축해 놓은 상태였다. 호치민은 전국민적인 지지를 받는 베트남의 유일한 전시 지도자였으며, 19458월에서 9월 사이에 일본을 타도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창설하고, 진주하는 연합군을 위해 환영식을 개최하면서 베트남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충성을 얻고 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19459월의 몇 주 동안, 베트남은 근대사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외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호치민의 지도하에 남에서 북까지 통일됐다.”

 

따라서 호치민과 베트민이 주도한 8월 혁명은 이런 점에서 의의가 정말 큰 하나의 혁명사적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연설하는 호치민)

 

8월 혁명을 통해 베트남에서 해방정국을 주도한 베트민은 92일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켰다. 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민주공화국(Việt Nam Dân Chủ Cộng Hòa,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이었다. 194592일 이미 베트남 전역은 베트민이 만든 붉은 깃발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는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베트민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94592일 오후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호치민은 미국 자동차를 타고 하노이 바딘광장으로 향했으며, 도착하여 자신이 준비한 베트남 독립 선언(Declaration of Vietnam Independence)을 낭독했다. 그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사람들을 평등하게 태어났다. 창조주에게 절대적 권리를 부여받았으며, 그중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권이 있다. 1776년 미합중국 독립선언문에 둥장했던 불멸의 문구입니다. 더 넓게 해석한다면, 모든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살 권리, 행복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다는 말입니다.(중략) 우리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정부는 세상을 향해 엄숙히 선포합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사실상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민족이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이로써 베트남에는 호치민의 주도로 독립국가 베트남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하노이시는 붉은 깃발이 뒤덮었고, 베트남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 그리고 러시아러로 쓴 슬로건을 적은 현수막이 길거리마다 내걸렸다. “베트남인을 위한 베트남, 프랑스 식민주의 타도, 독립 아니면 죽음, 임시정부를 지지하라, 호치민 주석을 지지하라, 연합국 사절단 환영등과 같은 구호를 담은 현수막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 연합국들은 베트남을 북위 16도선으로 가르고, 북부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주둔했다. 이 과정을 틈타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베트남을 침략해 들어왔고,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식민주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호치민과 베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됐다.

 

5. 해방정국에서의 여운형과 호치민 차이점

 

지금까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조선의 여운형과 호치민의 활동을 정리했다. 19458월 일본의 항복은 여운형도 호치민에게도 큰 기회였고, 두 인물 다 해방정국을 주체적으로 주도했다. 여운형은 1944년 자신이 조직한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시켜 초기 해방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며, 남과 북 좌와 우를 망라했다. 전국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는 145개의 지부와 분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는 대한민국 전 대통령인 김대중 또한 젊은 시절에 가담했을 정도로 유명하고 대중적인 조직이었다.

(YMCA 건물에서 건국준비위원회 발족식때 강연하는 여운형)

 

호치민은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고, 실제로 무장투쟁을 벌였으며, 미국 OSS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전황 속에서 신속하게 8월 혁명을 주도했으며,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를 단기간에 장악했다. 이런 대중적 기반을 통해 호치민은 19459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탄생시켰다. 8월 혁명에는 최소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대중적으로 큰 호응을 받았고, 결과적으로 기반과 행정이 잡인 국가 탄생으로 이어졌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그리고 혁명동지들)

 

여운형과 호치민은 해방정국을 단기간에 주도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훌륭함과는 별개로 결정적인 차이점이 더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여운형의 경우 무엇보다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조직적인 군대가 없었다. 건준 조직도 어디까지나 치안대였을 뿐, 일본군 자체를 자력으로 무장해제 시킬 정도의 역량은 없었다. 조만식이 주도했던 북조선의 건국준비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초기 한반도 북부의 일본군 무장해제는 사실상 전투를 치르며 진격해나간 소련군이 했다. 따라서 194598일 미군이 상륙하여 건준과 인민위원회를 해산하자 무력하게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베트민을 선두지휘하는 양복입은 보 응우옌 잡 장군, 베트민은 독립운동 단체이자 강력한 군사조직이었다.)

 

반면에 호치민은 초기부터 군대양성에 주력했다. 이미 1945년에 1만 명 가까이나 되는 정규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8월 혁명 과정에서 일본군 무장 해제를 베트민의 군대를 통해 할 수 있었다. 또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군대를 지속적으로 양성했고, 이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무찌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당원의 숫자도 늘었는데, 보 응우옌 잡에 따르면 “1945년 총봉기의 날에는 당원이 단지 5,000명에 불과했으나, 1951년에는 760,000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군대의 성장도 이런 식으로 증가했다. 그 얘기는 호치민과 베트민 지도부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데 사력을 다했다는 것이다.

(분단된 한반도)


(한때 분단되었던 베트남)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은 큰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었다. 19459월 미군정이 들어와 건준과 인민위원회가 무기력하게 해산되었던 것에 반해, 중국 국민당군과 영국군 그리고 프랑스군이 들어왔음에도 호치민은 주도권을 외세로부터 빼앗기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전까지도 베트민과 프랑스측 사이에 교전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베트민은 외세 프랑스를 몰아낼 수 있었던 반면, 한반도의 운명은 미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됐다. 물론 여기에는 여운형이라는 인물이 군대를 양성하는 인물보다는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는 정치인이라는 점도 작용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한반도의 운명은 미군정의 염원에 따라 한국의 응오딘지엠인 이승만이 주도하는 판국이 됐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여운형과 호치민 두 인물 다 진보적이고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군대를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않았느냐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6. 마치며

 

이 글은 여운형과 호치민 누가 더 훌륭한가?’ 혹은 누가 더 옳았는가?’를 평가하고자 쓴 글이 아니다. 다만 어떠한 차이점과 과정이 있었기에 해방정국의 판도가 한쪽은 집권성공 한쪽은 집권 실패로 갔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사람들이 비교적 역사부분에서 관심을 크게 갖지 않는 부분을 재조명 내지는 재해석하려는 하나의 시도다. 따라서 내 주관적 관점도 많이 투영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개인적으로 여운형과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좋아하고 있고, 두 인물을 깊이 존경하기에 이러한 비교분석을 한번 해보고 싶었다.

 

앞으로 한국사회에서 여운형과 호치민이 더 재조명 받기를 바라며

 

7.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일월서각, 1986

 

나의 아버지 여운형, 여연구, 김영사, 2001

 

호치민 평전, 찰스 펜, 김기태(), 자인, 200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유인선, 이산,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

 

여운형 평전, 이기형, 실천문학사, 2004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여운형, 이정식,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호치민, 월든 벨로(서문), 배기현(옮김), 프레시안북, 2009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 2013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몽양 여운형 평전, 김삼웅, 채륜, 201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26일 동안의 광복, 길윤형, 서해문집, 2020

 

Vietnam a long history, Nguyen Khac Vien, The Gioi Publishers,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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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8-15 1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브루스커밍스 읽었습니다.
페이퍼가 논문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NamGiKim 2021-08-15 10:02   좋아요 1 | URL
논문형식을 따르고 있죠?ㅎㅎㅎ a4로 10페이지 이상 분량입니다.ㅋ
 
KBS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1950 미중전쟁 - 한국전쟁, 양강 구도의 전초전
KBS 다큐 인사이트〈1950 미중전쟁〉 제작팀 지음, 박태균 감수.해제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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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냉전(Cold War)1990년에 구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며 끝났다고 한다. 1991년 구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전 세계 패권은 미국을 중심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 있는데, 소말리아 침공이나 유고슬라비아 내전 개입 및 코소보 내전 개입 그리고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이라크 전쟁까지 미국은 세계 패권국가로서 막강한 무력을 타국을 침공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했었다. 그러던 2000년대 미국의 새로운 라이벌로 등장한 국가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즉 중국이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이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덩샤오핑은 이른바 흑묘백묘라 불리는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자본주의화가 가속화되었고, 1989년에는 중국 내에 있던 사회주의 세력과 반체제 세력이 천안문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일이 생겼었다. 소위 천안문 항쟁이라 불리는 이 집회는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이 탱크와 군대를 동원함에 따라 잔혹하게 진압됐다. 당시 서방언론은 천안문 시위에 대해, ‘중국의 민주화라는 구호로 미화했으나, 사실 천안문 시위에는 적잖은 마오주의자들 그러니까 중국의 수정주의화 내지는 자본주의화에 반발한 사람들도 많았었다.

 

물론 서방이 홍보했던 중국의 서방식 민주주의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해 중국 경제를 성장시키는 방향을 선택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제는 성장세를 달렸고, 2000년대에 들어서 경제규모로만 세계 2위에 도달했다. 심지어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중국의 경제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성장세를 달렸다. 중국은 1인당 GDP2010년대 후반에 1만 달러를 돌파했다. 더 나아가 중국은 2012년 시진핑이 집권하며 대외팽창 그러니까 미국의 아시아 대중국라인을 돌파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몇몇 이들인 현재 미국과 중국의 신냉전(New Cold War) 시대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 신냉전이라는 표현이 어떤 면에선 다소 과장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의 경우 미국과 소련의 경제관계가 그다지 깊지 않았던 반면, 현재 미국과 중국은 좋든 싫든 때기 힘든 경제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런 사실을 보았을 때, 이러한 시각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영화 강철비2를 보면, 미국과 중국의 분쟁을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역학관계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다. 영화의 첫 시작은 센카쿠 열도(중국 댜오위다오)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대립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물론 여기에는 군사적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도 그 운명에 휩쓸리게 되며, 남북 평화회담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온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20세기 들어서 전쟁을 치렀던 적이 있다. 그것은 19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한 박태균 교수가 감수한 책 <1950 미중전쟁>은 현재 미중분쟁의 기원을 1950년 한국전쟁에서 찾고 있다. 책은 1946년 미국이 소련을 위협하기 위해 스폰지밥의 고향으로 유명한 비키니 섬에서 핵실험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냉전 초기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과 반공주의적인 대소전략이 어떠한 것인지 보여주며, 1950년 한국전쟁을 얘기한다. 한국전쟁에서 미국과 중국이 치른 전투를 심도 있게 설명한 뒤, 중국과 미국이 또 다시 대립했던 베트남 전쟁과 1972년 데탕트를 얘기하며, 마지막으로 미중분쟁이 현재 지속되고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에 따라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책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초기에는 남북한의 내전의 성격을 띄었다가 중국이 참전하면서 사실상 국제전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미국과 중국 두 강대국이 적으로 부딪히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주장이 아주 일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냉전이라는 분쟁적 성격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냉전이라는 분쟁은 반식민주의 대 제국주의라는 대립의 성격도 다분했기 때문이다.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이, 1950년 미국의 전략은 특히 베트남에서 식민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이후 미국에 맞선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인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중국과 미국의 대립은 1950년에 정점을 찍었다. 사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자 미국의 반공 전략은 소련 핵개발의 영향과 더불어 전면적인 수정을 거쳤는데, 한국전쟁에서 중국과 전쟁을 치르면서, 전술적인 면에서도 변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북진하지 않고 단순히 남베트남을 지키는 선에서 전쟁을 마무리 하려고 했던 점은 1950년 한국전쟁 시기 북진의 실패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한 호치민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전면전인 남진을 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통해 50만의 미군을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뜨린 것도 한국전쟁의 교훈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 이후 중국과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비록 교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인 부분에서 적이었다. 그러나 1972년 미국 대통령 닉슨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만나면서 데탕트가 시작됐는데, 이러한 미중 데탕트는 미국의 대소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국이 급속도로 경제성장을 하고 2000년대에 강대국이 되면서 미국과 중국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발생했고, 그 분쟁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 분쟁의 기원은 1950년 한국전쟁이었고, 실제로 중국은 유사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고려할 가능성도 있다. 2010년 연평도 포격 당시 중국이 북한을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왔을 정도니 빈말은 아니다.

 

<1950 미중전쟁>2020년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에 KBS에서 방영했던 3부작짜리 다큐멘터리다. 즉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만든 것이다. 책의 감수는 한국 현대사 전공자인 박태균 교수가 감수했다.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학자의 검증을 받았다. 현재의 미중분쟁은 한국 내의 갈등도 초래하는 것 같다. 일부는 중국을 매우 혐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다른 일부는 중국과의 협력을 주장한다.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길을 선택할 지는 말 그대로 우리의 몫이다. 책에서 주장하듯이 분명한 것은 단순히 적대적인 감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미중분쟁에 대한 우리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미중분쟁을 이해하기 위해선 한번쯤은 읽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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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중국관행 연구총서 18
후루타 모토오 지음, 이정희 옮김, 인천대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기획 / 학고방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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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여행가면 어디에서든 쉽게 볼 수 있는 한 인물의 초상화와 동상, 사진, 공산당 측의 선전 포스터 등을 볼 수 있다. 그는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80노인이 되기까지 평생을 투쟁으로 살아온 인물이었으며, 베트남 인민들 대다수가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호치민(Ho Chi Minh)이다. 196992일에 79세의 나이로 서거한 그는 현재까지도 베트남의 남녀노소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깊은 존경의 대상이다. 대다수의 베트남인들은 그를 조국 베트남의 국부로 생각하고 있고, 깊은 존경을 표하고 있다. 비록 호치민의 유언과는 거리가 있는 부분이지만, 1945년 그가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던 바딘광장에는 호치민묘(Ho Chi Minh Mausoleum)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의 시신이 보존되어 있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비판을 피하기는 다소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현재까지도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을 그만큼 잊고 싶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런 비슷한 문제는 현재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문제와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레닌이나 호치민묘에 대한 찬반과는 별개로 나 또한 러시아와 베트남 여행을 갔을 당시 레닌묘와 호치민묘를 관람했었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는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고개 숙여 진심으로 인사드렸을 뿐이었다.

 

호치민은 20세기 세계사와 혁명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을 무찌르고 조국의 통일을 이룩한 인물이었다. 특히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의 침략행위와 잔학성에 맞서 투쟁하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서방사회에 크게 각인된 인물이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유럽 그리고 일본 등 자본주의 진영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났었는데, 당시 젊은이들은 호치민과 체게바라의 초상화를 들고 ! ! 호치민! ! ! 체게바라!”를 외치며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호치민은 이른바 68혁명(68 Revolution)의 상징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호치민은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 책은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학자이자, 베트남국가대학 하노이교 일월대학 총장인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1996년에 집필한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는 소위 호치민 사후 그를 계승한 후계자들이 어떻게 해서 호치민의 사상을 계승했고, 이것을 도이모이라는 과정에서 해냈는지를 분석했다. 사실 이런 부분에서 개인적으로 많은 궁금증들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현재 도이모이 과정에서 태어난 베트남 세대들에게 어떻게 해서 좋게 인식되는지가 가장 궁금했다. 예를 들면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의 경우 대체로 젊은이들에게 나쁜 평가를 받지는 않지만,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은 중국 내부에서도 결코 약하지 않다.

 

그에 반해 호치민에 대한 국민적 비판은 사실상 없는 수준에 가깝다. 굳이 찾자면 호치민을 강력하게 비판(사실상 근거 없는 비난에 가까운)하는 존재는 베트남 전쟁 이후 배를 타고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망명한 이들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망명자들이 하는 호치민에 대한 비판은 건전한 비판이 아닌 근거 없는 비난과 조롱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리고 목적이라는 부분에서도 상당히 불건전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호치민을 비난하는 이유는 패망한 남베트남에 대한 영혼 없는 옹호를 하기 위한 목적에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호치민 비난 및 조롱은 신념화된 뒤틀린 반공주의적 말로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쿠바의 반카스트로주의자들이 쿠바에 대해 흑색선전을 하는 것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학계에서 호치민에 대한 비판으로 가장 많이 드는 사례를 굳이 뽑자면 토지개혁(Land Reform)의 문제일 것이다. 사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였던 1953년부터 베트민은 토지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1954년부터 1956년까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근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다소 억울한 희생자가 나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대략 2,500명에서 1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처형당했는데, 이들 중에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베트민에 협력했던 지주들이나, 혁명투쟁 가담자들도 있었다. 즉 이런 부분에 대해 호치민의 실책을 묻기도 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 호치민에 대해 비판만 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당시 호치민은 당 내에서 강도 높은 자아비판과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을 실행했다. 또한 토지개혁 책임자였던 쯔엉찐(Trường Chinh) 해임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했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재산도 일정부분 돌려받는 조치가 베트남에서 실행됐다. 또한 호치민과 공산당이 실행한 토지개혁은 성공적이었다. 이 토지개혁을 통해 새로운 계층들이 혜택을 보았고, 더 이상의 토지문제가 최소한 북부지역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식량문제도 해결되어 적어도 미국의 살인적인 폭격이전까지 먹고사는 문제가 상당히 해결됐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을 생각해 보았을 때, 오히려 토지개혁을 통해 호치민이라는 인물이 인격적인 측면에서 지도자적인 측면에서 훌륭한 자질은 갖춘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토지개혁 당시 호치민이 했던 발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는 민주가 빠져 있어서 타인의 의견을 듣는 것이 적고, 현실을 보는 것이 적었다. 이렇게 폭풍이 불고 있는 때 나는 책임 질 각오가 되어 있다. 모든 중앙위원은 이처럼 타인의 의견을 듣고 현실을 직시하여 책임을 져야만 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159

 

전반적인 그의 인생사를 따져 보았을 때, 호치민이라는 인물은 상당히 호감이 생기는 인물이다. 그의 인품이나 부패하지 않은 청렴함 그리고 혁명투사로서의 이미지는 충분히 존경받을 만하고, 나 또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기에 호치민을 존경한다. 이번에도 이 책을 읽으며, 호치민의 인생을 통해 그의 감동적인 삶이 다시 한 번 깊게 다가왔다. 젊은 시절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에 자주 등장하는 독립운동가들의 길과 상당히 비슷하다. 하지만 가장 다른 점은 호치민이 성취한 것에 있다.

 

호치민은 1945년 일제가 패망하는 시점에서 총봉기를 일으켜 베트남 전국을 단기간에 장악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했다. 비록 그는 1969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미제국주의와의 전쟁에서 침략자들을 축출하고 통일을 이룩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호치민이라는 혁명가의 위대함을 느끼게 되는 한편, 우리 역사에는 그 정도로 승리한 독립운동사가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게 느껴진다.

 

호치민의 또 다른 매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그의 행보에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동남아시아의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일본에 협력하는 길을 선택했었다. 버마의 아웅산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이 대표적인 예시다. 물론 이들도 나중에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성을 알고 이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지만, 베트남의 호치민은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한 시점부터 항불항일투쟁을 외치며 전개했다. 19415월에 그가 창설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도 항불항일투쟁을 목적으로 창설됐다. 1955년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이 당시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호치민은 상당히 현명한 지도자였다.

 

호치민의 후계자들이 그를 얼만큼 잘 계승했는지는 많은 논쟁과 논란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7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베트남은 많이 어려웠다. 이들의 반미투쟁은 혁명사적인 입장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 이후의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성과가 별로 없었다. 거기다 1978년 캄보디아 폴포트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은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산되어 베트남은 미국과 손을잡은 캄보디아와 중국에 맞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캄보디아에 대다수의 병력을 진격시켜 폴포트 정권을 전복시킨 것은 분명히 올바른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국제적인 고립을 자초하기도 했다. 거기다 통일 이후 공산당 정책에 대한 남부인민의 반발도 심했다. 이에 따라 베트남은 1986쇄신이라고 하는 정책을 발표했고, 그것이 바로 도이모이(Đổi mới)였다.

 

도이모이 정책은 경제적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고, 국제적인 고립을 타개하며, 지금까지 경제성장의 원천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과거 소련 사회와 비슷한 문제를 앉게 되기도 했다. 빈부격차와 부정부패 문제는 과거보다 더 증가했고, 과거에 미약하지만 유지했던 무상의료나 무상교육 시스템이 붕괴됐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가 들어오면서 이러한 문제점들이 사회 내부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 과정을 통해 베트남은 호치민 사상이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을 강조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현명하게도 베트남 공산당은 현재도 자아비판과 당내의 민주주의만큼은 아주 잘 유지하고 있다. 오히려 이런 점은 1970,80년대 한국보다 더 민주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이 점만큼은 나는 베트남이 호치민의 유지를 잘 받들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 책은 25년 전 후루타 모토오 교수가 쓴 호치민, 민족해방과 도이모이를 번역한 책이다. 현재 베트남 사회에서 호치민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한편, 이 책에 대한 인기도 결코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서문에 나온 설명과 같이, 역사학계는 호치민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대표적으로 2018년에 공개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다. 이 문서를 통해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깊게 교류한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이런 최신의 연구를 담지 못했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이 책을 통해 호치민 사상이 어떻게 베트남에서 수용되었는지를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호치민의 사상과 정신을 통해 앞으로 베트남이 어떻게 나아갈지는 베트남에게 달렸을 것이다. 나 또한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을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서 좋은 방향으로 갈거라 믿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 생각과 거의 비슷한 저자 후루타 모토오 교수의 발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필자는 호찌민을 인류사적 시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위인이라고 단언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지만, 호가 20세기의 대표적인 대중운동인 민족해방운동의 기수였다는 것은 호가 베트남을 탄생하게 한 민족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호찌민 주석은 영원히 우리들의 사업 속에 살아있다.’ 이 말은베트남 공산당 만세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만세라는 말보다도 베트남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표현이다. 호찌민의 평가가 베트남의 발자취와 한 몸이라고 한다면, 필자는 이 말이 베트남인들의 사상을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인류적 과제를 향해 확대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 바꿔 말하면 호찌민의 이름에 의해 호찌민을 넘어서려는 시도를 정당화하는 방향이 생성되기를 염원한다.”

 

출처: 베트남, 왜 지금도 호찌민인가 p.206~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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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년 만에 끝나가고 있다현재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미군은 거의 다 철군을 한 상태다사실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2014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었다그러나 2015 10월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고아프가니스탄 문제는 결국 트럼프 행정부로 넘어갔다트럼프 행정부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및 병력 감축을 추진했으나임기까지 대략 수천 명의 미군병력을 아프가니스탄에 남겨두고이 문제는 다시 민주당의 조 바이든 행정부로 넘어갔다.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위치)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예상보다 오래갔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빈라덴의 알카에다 소탕을 외치며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한 미국은 20년 동안 이 전쟁을 치렀다. 2,400명의 미군이 전사했고, 1만 9,000명 이상의 미군이 부상당했으며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또한 2~3만 명이 전사했다미군 다음으로 병력이 많던 영국군 또한 500명이 전사했다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으나 게릴라전으로 미군에 맞서 전투를 치렀던 탈레반 또한 최소 4만에서 5만 많게는 10만 가까이가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다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민간인 또한 1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군 복장을 한 로버트 베일스 하사, 그는 2012년 3월 11일 16명의 아프가니스탄 민간인을 혼자서 학살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 초기 미군은 압도적인 화력과 병력을 토대로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점령하고 장악했다당시 국방부 장관이던 도널드 럼스펠드(올해 고인이 됨)는 아프간 동굴 속 테러리스트 수백 명을 찾아내겠다.”라고 큰소리를 쳤다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이 병력을 증강하던 2008이 전쟁은 현재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아이언맨(Iron Man)이 영웅으로 탄생하는 곳으로 영화에서 등장하기도 했다영화상에서 보면 아이언맨은 미국의 적인 탈레반을 최신식 무기를 장착한 로봇으로 괴멸시킨다심지어 이들이 가진 탱크까지 미사일 한방으로 격파한다. 2008년에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을 본 이라면 이 장면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미국 헐리우드사는 이런 장면을 통해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합리화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로버트 베일스의 사진, 이 사진은 군감옥에 수감중 찍은 사진이다.)

 

그렇다면 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가려진 이면은 무엇일까베트남 전쟁 당시 손미 지역과 미케 지역에서 504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과 비슷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일어났다미라이 학살에 비하면 학살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미국의 폭격과 군사작전으로 죽은 민간인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 중 하나가 바로 2012년 3월 11일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났던 칸다하르 학살(Kandahar massacre)이다.

(칸다하르 학살 증거인멸 시도 현장, 로버트 베일스 하사는 학살을 저지르고 나서 시신을 불태워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당시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소속의 로버트 베일스(Robert Bales) 하사는 2012년 3월 11일 새벽 3시 경에 M203유탄 발사기를 장착한 M4 소총과 M9권총으로 무장했다야간투시경까지 착용한 로버트 하사는 중무장 상태로 부대를 빠져나와 부대에서 약 1.6km 떨어진 발란디와 알코자이 마을의 농가 세 곳을 습격하여민간인들을 학살했다새벽에 급습을 받은 마을 주민들은 로버트 하사에게 끌려나와 사살 당했으며총 16명의 민간인이 로버트 하사의 총탄에 살해됐다로버트 하사는 자신이 죽인 민간인들의 시체를 구석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다한 마디로 학살을 저질러 놓고그 증거까지 없애려는 치밀함을 보여준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통화중인 버락 오바마, 이 사건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오바마가 직접 사과해야 하는 상황까지 갔었다.)

 

그러나 이 학살에서 살아남은 일부 주민들은 아프가니스탄 당국과 미군에게 알렸고로버트 하사 또한 복귀하여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자수했다이후 로버트는 쿠웨이트를 거쳐 본국으로 이송됐고영창에 수감당한 상태에서 군사재판을 받게 됐다당시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 정부와 미군에게 강력하게 항의했으며대통령인 오바마 또한 책임자에 대한 엄중 처벌을 요구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가니스탄 내부에서는 시민들이 반미 시위를 벌이며 미군들에게 돌을 던질 정도로 사태가 심각해졌다이 소식을 들은 탈레반 또한 미군에게 보복 혹은 테러를 감행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12년 12월 재판에선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으나, 2013년 6월 로버트 하사 본인이 유죄를 인정하면서 사형은 불가능해졌다대신 그는 무기징역이 확정되어 남은 생애를 교도소에게 보내게 됐으며지금도 균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현재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의 절차를 밟고 있다미군은 사실상 거의 다 철수한 상태고탈레반이 현재 아프가니스탄 영토 70%를 접수한 상황이다뿐만 아니라 미국과 NATO에 협력했던 인사들을 대상으로 보복도 벌어지고 있다탈레반 세력의 잔혹함과는 별개로 현재 이들이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그만큼 아프가니스탄 내에 반미감정이 극심하다는 반증이다아프가니스탄인들의 반미감정이 심해진 이유에는 당연히 이런 민간인 학살 사건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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