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시) 붉은 별 쿠바

쿠바!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혁명의 땅!

미제의 60년 통치속에서 억눌리고 짓눌렸던 쿠바는

붉은 별 카스트로와 체게바라의 혁명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가 되었네.

미제의 피그스만 침공과 케네디의 카리브해 위기 협박속에도 단결하여 인민을 수호해온 쿠바는

단결한 인민들의 피와 땀으로 사회주의를 수호하며, 사회주의 강성대국 건설했도다.

미제의 탄압과 억압에도 빈라덴의 테러속에서 부상당한 미국 인민을 인도주의 정신으로 무상치료해준 사회주의 붉은 별 쿠바!

미제 식민지배 60년
미제 탄압 60년

강력한 코끼리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은 쿠바는 지금도 붉은 별이 되어 사회주의를 수호하고, 반동의 공격에도 붉은 별을 수호하리.

영원한 승리의 그날을 위하여 붉은 별 쿠바는 앞으로 전진! 또 전진!🇨🇺🇨🇺🇨🇺

김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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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719일 혜화동 로터리(현재 4호선인 혜화역에 있는 그 로터리다.)에서 한 인물이 괴한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그는 한평생을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했고, 해방 이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었으며, 19193.1운동의 불씨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그가 바로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Lyuh Woon Hyung)이다.

 

여운형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큰 인물로 애국계몽운동부터 중국 유학, 신한청년당 당수, 3.1운동의 불씨제공, 고려 공산당 활동 및 중국 혁명 참여, 조선중앙일보 사장 그리고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까지 상당히 돋보이는 이력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다.

 

1922년에는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기도 했으며, 손문과 장제스 그리고 마오쩌둥과도 친분이 있었으며,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였던 호치민하고도 만났었다. 또한 해방 이후에는 여러 미군정 인사들이나 소련측 인사들도 그롤 높게 평가했으며,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38선을 넘어 김일성을 포함한 북조선 인사들과도 협의하는 유연한 행동력과 친화력을 보였던 인물이다.

 

나는 무엇보다 그가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여 일제의 패망을 대비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이었던 김용중은 1946년 초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라고 얘기했는데, 당시 여운형에 대한 대중의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남북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전개하다 암살당한 그는 우리 현대사의 비극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죽음은 1948년 남북분단 정부 수립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제주4.3학살과 여순학살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이어졌다. 서중석 교수나 정병준 교수 그리고 박태균 교수를 포함한 한국 현대사를 연구한 사학자들은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분단을 막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나 또한 그런 입장에 동의하는 바이며, 따라서 그의 암살은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여운형의 암살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분단정부를 수립하고자 온갖 테러와 악행을 일삼던 이승만과 그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들에게 있어서 여운형의 존재는 아주 무서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여운형은 친일파들이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설 때, 끝까지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고, 대중적인 인기도 컸으며, 미국과 소련을 아우르는 통합력과 통일력을 소유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떻게든 제국주의적인 분단정부를 세우기 위해선, 이승만과 친일 친미 제국주의 세력은 그를 제거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오늘은 여운형 선생이 암살당한 719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719일은 친미 제국주의자 이승만이 늙어서 죽은 날이기도 하며,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이 북한에서 처형당한 날이기도 하고, 버마의 독립지도자 아웅산이 암살당한 날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719일에 여운형과 이승만의 추모제가 동시에 서울지역에서 거행되는데, 일설에 따르면 이승만 지지자들이 여운형 추모제 근처에 와서 소음공해를 일으키기도 한다고 한다.

 

이제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인 남북분단을 허물어 버려야할 시점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여운형 선생의 바람대로 분단을 물리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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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하늘의 전사들 - 제2차 세계대전 독일 공수부대 팔쉬름얘거의 신화 KODEF 안보총서 4
크리스토퍼 아일스비 지음, 이동훈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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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게는 전쟁 초기 전쟁터에서 맹활약을 떨쳤던 부대들이 있었다. 특히 육군의 탱크부대나 루프트바페와 같은 공군 그리고 나치 독일 전쟁범죄의 대명사인 SS등이 있었는데, 이중에는 팔쉬름 야거라 불리던 공군 소속의 공수부대 또한 존재했다. 역사상 공수부대를 만든 주체는 1930년대 소련이었지만, 공수부대를 실전에 투입한 주체는 바로 나치 독일이었다.

 

1939년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 독일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한 뒤 서유럽으로 진격했는데, 이때 아르덴 숲 돌파를 포함하여 벨기에와 네덜란드 점령에 있어 팔쉬름 야거라 불리던 독일 공수부대의 활약이 컸다. 이 시기 독일의 공수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투입이 생각보다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는데, 이는 1941년 그리스 침공에서였다. 특히 그리스령 크레타 섬 점령에서 독일은 막대한 손실을 냈고, 이는 히틀러가 더 이상 대규모의 공수작전을 하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됐다.

 

소련 침공 이후 독일 공수부대는 동부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이때부터는 단순히 보병 부대로 활용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고, 대규모의 공수작전은 없었다. 이는 미영 연합군을 상대로 했던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1943년 연합군의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이들은 거의 2년 동안 연합국의 발목을 이탈리아에 잡아놓기도 했는데, 이 이탈리아 전선은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할 때까지 유지됐다.

 

특히 몬테카시노 전투는 공수부대의 저항으로 서방 연합군은 극심한 사상자가 속출했었다. 그 외에도 일부 병력이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 구출이나 유고슬라비아에서의 파르티잔 지도자 티토를 생포하기 위한 작전에도 투입됐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서부전선에도 투입됐고, 동부전선에 투입된 이들은 베를린 전투까지 참가했다. 책에 따르면 동부전선에 참전했던 일부 SS출신 공수부대원들은 소련군에게 체포되면 처형될 거라 생각하여, 일부러 영미 연합군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나치독일 공수부대가 어떻게 전투에서 활약했는지를 다룬 책이다. 나쁘게 말하자면, 독일군 미화라고 표현할 수 도 있을 것이다. 주로 계급과 병사들의 군장비 그리고 무기와 훈장 및 계급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으며, 책에 나온 사진들 대부분은 그러한 설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점은 제2차 세계대전 초기 공수부대를 전선에 활용한 주체는 독일이었지만, 이후 전쟁이 진행되면서 이 공수부대를 전략적으로 잘 활용한 주체는 미국과 영국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2001년 미국 HBO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에 잘 나온다. 결국 나중에 이 부대를 활용한 이가 승리했고, 전쟁 초기에 활용했던 이는 전쟁의 패배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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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시작됐다. 냉전은 미소양국의 군사적 대립과 갈등으로 표출되었고, 많은 부분에서 양국은 경쟁했다. 현재 한국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나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 가르치는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냉전의 구도를 마치 자유주의 대 공산주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설득력이 거의 없는 이야기일 뿐이며, 그것이 제국주의자들의 위선과 기만 속에서 만들어진 주장일 뿐이다. 이를 알 수 있는 역사적 팩트가 존재하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미국과 우크라이나 극우주의자들의 협력이다.

(스테판 반데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현실은 나치에 협력하여 인종청소를 포함한 각종 전쟁범죄를 저지른 대학살자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당시, 예전부터 반소감정이 심했던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와 같은 극우 민족주의자 단체들이 침략자 나치를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OUN의 지도자였던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는 나치와 협력하여 소름끼치는 대량 인종 학살들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으로 1941929일에서 30일에 수도 키예프(Kiev)외각에 있는 바비야르(Babi Yar)에서 33,721명의 유대인을 기관총으로 집단 학살한 사건이 대표적이었다. 나치의 우크라이나 점령 기간동안 대략 15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는데, 스테판 반데라가 지휘하는 OUN 대원들은 나치의 천인공노할 정책에 적극 협력했으며, 1941년에만 최소 30만의 유대인을 대량 학살했다.

(미콜라 레베드,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지휘자로 수만에서 수십만의 유대인과 폴란드인 그리고 러시아인 등을 인종청소하고 학살한 전쟁범죄자다. 그러나 미국 CIA는 그를 후원했으며, 그 덕분에 천수를 누리며 살다 1990년대에 생을 마감했다.)

 

또 다른 조직으로는 우크라이나 봉기군(UPA, Ukrainian Insurgent Army)가 있었으며,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나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와 같은 UPA 인사들은 볼리니야아 갈리치야 지역에서 반데라의 군대가 그랬듯이 소름끼치는 민간인 학살 및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1943년 볼리니아 지역에서는 최소 35,000명에서 7만 명 혹은 10만 명 이상의 폴란드 주민들이 이들에게 무차별 학살당했으며, 스테판 반데라 또한 이런 천인공노할 인종학살극을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벌였다.

(CIA,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CIA는 소련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서유럽에서 파시스트들과 협력했다. )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군이 점차 반격하기 시작하자, 나치와 소련군을 동시에 대항한 전투를 벌였으며, 이런 게릴라전은 1945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이들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반파시즘 항전에 참가한 소련 인민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1944년부터 1945년 상반기 까지 91,615명의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군대가 소련군에게 사살됐고, 비슷한 비율의 숫자가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스테판 반데라와 같은 몇몇 우크라이나 극우주의 성향의 인물들은 연합국 점령지역으로 도망쳤고, 몇몇은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 정착했다.

(냉전 당시 OUN과 CIA의 관계를 알려주는 자료, 올리버 스톤의 다큐인 우크라이나 불에 휩싸이다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1945년 당시 나치 전범들을 재판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있었는데, 반데라와 같은 우크라이나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심판이나 처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냉전 초기 미국은 이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따라서 미국 CIAOUNUPA 지도자들의 미국 이주를 후원했었으며, 이들을 소련 전복을 위한 전복부대나 첩보부대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었다. 한마디로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이 전쟁범죄자들을 이용했다. 심지어 볼리니아와 동부 갈리시아에서의 폴란드인 학살에 막중한 책임이 있는 미콜라 레베드(Mykola Lebed)1990년대까지 뉴욕시 퀸즈에 살았었다. 미국의 지원 아래 이런 전범들은 잘먹고 잘살았었다는 얘기다.

 

더욱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것은 미콜라 레베드의 경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로마로 탈출하여 연합국과 접촉했는데, 미 육군 방첩대는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으며, 19496월에는 CIA의 협력하에 미국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법무부가 레베드를 미국서 추방하려고 했으나 후일 CIA 국장이 되는 앨런 덜레스(Allen Welsh Dulles)미콜라 레베드는 CIA에 엄청난 가치가 있는 인물이라고 하며, 핵심적인 반소작전을 돕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 세워진 스테판 반데라 동상, 스테판 반데라의 동상은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때도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보도하는 서방 언론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냉전 초기 소련 휘하의 우크라이나에 침투하여, 작전을 개시했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게시했다. 벨라도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등이 있다. 실제로 미국 CIA는 스테판 반데라나 미콜라 레베드와 같은 인물과 협력하여 194995일 우크라이나인 스파이 선발대를 낙하산으로 소련에 침투시켰다. 그리고 이런 공작은 1954년까지 지속됐다. 물론 소련은 이런 제국주의 무리들을 신속히 처리해버렸다.

 

이처럼 미국은 나치 협력자들을 통해 소련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공작을 했었고, 실제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냉전 당시 적국에 대한 값비싼 정보를 워싱턴에 제공한 대가로 CIA는 그 보답으로 민족주의자 퇴역군인들을 영향력 있고 권위 있는 지위에 두면서, 그들이 기존대학에서 준 학문적인 기관이나 학술적 지위를 만드는 것에 도움을 줬다. 미국은 공산주의를 막는다며 이런 전쟁범죄자들과 파시스트들을 이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피시스트들은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진실은 서방 사회에서 알려지지 않았다. 반공주의 교육과 제국주의 교육이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를 보여주는 역사다.

 

미국이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한 이유에는 동유럽에 대한 소련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런 악행들을 저질렀으며, 이와같은 사실에서 미국이 얼마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냉전 초기에 추구했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해리 트루먼이 말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의 진실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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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코프스키 2022-03-16 1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서 잘 보았습니다. 저도 서첩반 반걸랍/스테판 반데라를 박노자 교수 문서에서 확인한 바 있었는데 문서에서 더 확실하게 보았고요 나중에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에 대해서도 써 주세요... 관련 문서들의 주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필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튤류라는 영문자료 뿐이네요...

박노자 교수의 문서

http://www.redian.org/archive/71712

https://blog.naver.com/bec5483?Redirect=Log&logNo=221996757798

사첩반 반걸랍/스테판 반데라

https://ko.wikipedia.org/wiki/%EC%8A%A4%ED%85%8C%ED%8C%90_%EB%B0%98%EB%8D%B0%EB%9D%BC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

https://en.wikipedia.org/wiki/Symon_Petliura

NamGiKim 2022-03-16 19:47   좋아요 0 | URL
오마이 뉴스도 있습니다.

http://m.ohmynews.com/NWS_Web/Mobile/at_pg.aspx?CNTN_CD=A0002810842

보스코프스키 2024-09-20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가로 서몽 피득류랍/시몬 베틀류라 관련 위키백과 항목에서 한국어 항목을 확인했습니다. 이후에 추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표기는 시몬 페틀류라로 박노자 교수와는 약간 다른 표기입니다. 주소는 제시목록과 같습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A%AC_%ED%8E%98%ED%8B%80%EB%A5%98%EB%9D%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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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이 책은 2015년 박근혜 정부 시기 사화과학 베스트 셀러 중 하나였다.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를 담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그러나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기도 하다.)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는 1936년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과의 전쟁으로 나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이에 따라 소련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2.26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37년 여름 일본은 이른바 중일전쟁을 일으켰다조르게의 추측이 현실이 된 것이었다중일전쟁은 1937년부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는 시점까지 대략 8년간 진행됐다물론 앞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일본은 1920년대 후반부터 중국대륙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벌였으며, 1931년에는 중국 대륙 중 일부인 만주를 침략했었다. 1937년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시점을 1931년 만주사변부터 잡는다면 중국과 일본이 치른 전쟁의 기간은 아마 15년으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장제스와 마오쩌둥, 이들은 25년 동안 중국 대륙을 놓고 싸웠다. 이들은 제1,2차에 걸쳐 내전을 치렀고, 제1,2차에 걸쳐 국공합작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장제스는 대만으로 피신가고 마오쩌둥은 현대 중국의 지도자로 등극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을 통해 중국대륙을 대상으로 한 팽창을 추진했다당시 중국 대륙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으로 나뉘어 이른바 내전을 치르고 있었는데이 내전은 1927년부터 시작됐다. 1927년 4.12 쿠데타를 통해 장제스가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학살에 나서자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이른바 홍군(Red Army)을 조직했고장제스 국민당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이것이 제1차 국공내전의 시작이었다.

(중국의 붉은 별,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가 쓴 책으로 3대 르포 문학에 들어가는 작품이다. 마오쩌둥의 생애와 대장정 그리고 시안사건까지를 다루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는데여기에는 국민당이 보유하고 있던 전투기도 동원됐다장제스는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서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년 10월 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지만대장정이라는 전쟁사적 신화를 창조했다당연히 수백 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대장정은 시작한지 1년 뒤인 1935년에 마무리 되었으며에드가 스노(Edgar Snow)가 저서 중국의 붉은별(The Red Star Over China)’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중국 공산당은 이런 일련의 과정 속에서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장제스와 장학량, 1936년 시안 사건을 통해 장제스 또한 공산당과의 연합을 추구하게 됐다. 그러나 그 대가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60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당시 장제스 휘하에는 일본군에게 폭살당한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이 있었는데그는 1931년 만주사변부터 그 이후까지 일본군에게 굴욕적인 양보를 단행했던 장제스에게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사변에서 장제스 정부가 안 싸운 것은 아니었으나당시 장제스는 일본에 저항하기 보단 중국 공산당을 뿌리 뽑는 것을 선행과제로 생각했다. 1933년 열하사변에서도 일본군은 러허성 그리고 허베이성을 단숨에 점령해버렸다. 1935년에도 일본 관동군은 본격적인 화북침략에 나섰으며국민당과 공산당이 싸우고 있던 1936년 10월 일본은 괴뢰 만주국을 앞세워 내몽고 지역을 침공했었다따라서 장학량의 시각에선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합리적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이에 따라 장학량은 1936년 12월 12일 중국 국민당 내부에서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다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안 사건이다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물론 장학량은 장제스의 보복으로 인해 60년 동안 감옥살이(가택연금도 포함)를 하게 됐다장학량의 요구에 다라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연합의지를 보이면서 중국 대륙은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내전에 휩싸여 있던 중국 대륙이 다시 힘을 합쳐 뭉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현재의 노구교, 노구교는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점이다.)

 

현재 중국 정부의 수도인 베이징은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점이었다. 1937년 7월 6일 일본군 500명이 중국과의 사전 협의도 없이 노구교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했었다문제는 이 지역이 중국군의 관할이었기에당연히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도발이었다문제는 그 다음날인 7월 7일이었다그날 오후 10시 40분 일본군의 훈련이 끝나던 찰나에 몇 발의 총성이 들렸고8중대장이던 시미즈 세쓰오 대위는 점호했다그러나 이등병 한명이 안보였고8중대장이던 시미즈 대위는 총성을 근거로 중국군의 소행이라 생각했다이에 따라 시미즈는 대대장인 이치키 소좌에게 노구교에서 중국군이 선제공격하여 아군 1명이 실종되었다.”라고 보고했으며실종된 병사를 수색하여 찾고자 했다.

(중국군 기지를 포격하는 노구교에 주둔했던 일본군들)

 

사실 실종된 병사는 설사 때문에 상관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자리를 비웠었고, 20분 후에 부대로 복귀했다즉 확인되지 않은 오보를 한 것이었다이를 보고한 시미즈 대위는 책임 추궁이 두려워 미적거리다 뒤늦게 이치키에게 보고했다그 사이에 지나주둔군 사령부를 거쳐 일본 본국에 까지 보고가 올라갔고 사건은 국제 문제로 비화될 만큼 커져버린 상태였다이후 시미즈 대위는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고 한다.

(무타구치 렌야, 그는 노구교 사건의 책임자로 이후 버마 전선에서도 여러 기행으로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선 숨겨진 독립운동가라는 조롱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나의 허가를 받지 않고 병사가 대열을 이탈해 천천히 용변을 보다가 늦어진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걸 어떻게 사실대로 밝힐 수 있겠는가그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다음 날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웠기에 별다른 처분을 내리지 않았다.”

 

이 사건은 그 다음날인 새벽 4시에 상관이던 무타구치 렌야는 공격 명령을 내렸고일본군은 포격을 가하며 노구교를 관통하는 핑한 철도 철교의 중국군 초소를 기습 공격했다이후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게시했고, 1937년 7월 28일에는 베이핑과 천진 그리고 탕구 전역에 걸쳐 중국군에 대한 총공격을 게시했다중일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7월 30일 밤까지 일본군은 베이핑과 천진을 완전히 점령했는데, 3일간의 전투에서 중국군 사상자가 1만 6천 명이었던 반면 일본군 사상자는 불과 600명밖에 안됐었다고 한다.

(상하이 전투 당시 중국군 정예부대, 당시 장제스가 투입한 2개 사단은 독일식 훈련과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정예부대였다.)


(상하이 전투에 투입됐던 일본군 탱크)

 

이로부터 몇일 뒤 1937년 8월 2일 중국 국민당 정부의 린썬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하여 전 국민은 정부를 신뢰하고 대일 항전에 임하라라고 선언했다여기에는 중국 공산당의 주더와 저우언라이도 참가했으며이로써 일본 침략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이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체결됐다사실 1931년 만주사변 시점부터 항일투쟁과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통해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결성하자고 했던 중국 공산당과 비교했을 때늦은 감이 있지만어찌됐든 이를 통해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연합하여 항일투쟁에 나서게 됐다.

(난징 대학살 추모비, 30만이라는 숫자는 당시 일본군이 학살한 민간인의 숫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진격은 신속했다일본은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중국의 경제능력을 분쇄하기 위해 중국의 금융 중심지인 상하이에 제전선을 조성했다하지만 상하이를 방어하는 장제스측의 대응도 결코 작지 않았다장제스는 나치독일식 훈련과 독일제 무기로 무장한 2개 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했다이를 통해 대략 3개월가량 일본군을 저지했으나그 이후 중국군의 방어선은 손쉽게 무너졌다상하이 전선이 뚫리면서 당시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가는 길이 뚫리게 됐다이후 일본군은 난징으로 들어가게 됐고거기서 소름끼치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그것이 바로 난징 대학살이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기 베스트 셀러가 됐던 권성욱씨의 중일전쟁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그 내용을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을 때한 병사의 설사가 순식간에 중일 양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어 무려 8년에 걸친 참혹한 싸움으로 이어지리라고는그리고 2천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져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끝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물론 일본은 중국을 침략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기에 시간과 방법의 문제일 뿐 어차피 전쟁은 일어났을 것이 틀림없다.”

 

출처중일전쟁 p.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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