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정책은 소련에 맞선 반공주의(Anti-Communism) 정책이었다이런 미국의 반공주의적 정책에 가장 잘 맞아떨어졌던 아시아의 두 인물이 있었는데하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 Man Rhee)이고다른 하나는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이 둘은 강경한 반공주의자로써 공산주의자들을 극도로 혐오했고국제정치 속에서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으며미국의 영향력에 의해 정권이 무너졌다.

 

이들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인 정책에 아주 강력한 협력자였으며미국의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사례이기도 했다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대한민국의 우남 이승만과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은 상당히 유사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이처럼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은 정치적인 측면이나 개인 성향 그리고 살아온 생애 또한 상당히 비슷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물론 다른 점도 있는데대표적으로 종교탄압 부분일 것이다따라서 오늘은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아시아의 극단적 반공주의자이자 독재자였던 이들을 한번 비교해볼까 한다.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에서 태어나 동학농민운동과 을미사변 이후 이른바 서재필이 만든 독립협회에서 초기 개화운동을 시작했고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거기서 의형제를 맺은 박용만의 도움으로 미국에 정착한 인물이었다이승만은 평생을 기독교 신자로서 살았다그는 하버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었지만독립운동 부분에 있어서 사적인 권력욕을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기도 했다따라서 1919년 미국에서의 명성을 토대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리에 있었지만본인이 일으킨 분열과 공금횡령 등의 문제로 결국 1925년에 임시정부에서 탄핵된 인물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1945년까지 미국에 있었고더글라스 맥아더와 존 리드 하지 미군정 사령관의 지원으로 대대적인 환영속에서 귀국했다미국의 지원을 토대로 여운형과 같은 중도좌파적 통일 세력을 짓밟았으며좌파세력들을 탄압했고, 1948년 유엔의 주도로 이어진 투표로 대통령이 됐다그러나 친일청산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었기에그는 단 한명의 친일파도 처벌하지 않았으며, 1950년 한국전쟁 시기에도 지도자로서 보이지 말아야할 행위를 했다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는 이른바 북진통일을 입에 달고 살았으며북진통일론은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할 때까지 그가 가지고 있던 정치 구호였다대통령 하야 이후에는 미국 하와이에서 살다가 1965년에 90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던 응오딘지엠은 190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꽝빈성에서 태어나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다가 식민지 관료의 삶을 걸었다. 1930년 반불봉기가 일어나자 이를 프랑스와 함께 진압하는 짓을 했기에민족반역자라는 비판을 피하기도 힘드나그 이후에는 바오다이 내각에 반발하여 결국 이승만식의 약식 독립운동을 진행했다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들어오자그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이는 실책을 범했고결국 나중에는 일본에 협력하다 반발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었다. 1945년 호치민이 주도한 8월 혁명 이후에는 인민전선 원리에 따라 베트민 정부의 협력을 호치민으로부터 제안받기도 했으나이를 거부했다.

 

다만 1945년 8월 혁명에서 민족반역자였던 친형이 베트민에게 살해당했기에이미 뼈속까지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었으며프랑스가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에는 베트남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에 거주했으며거기서 반공주의적이며 메시아적이고 망상적인 의무감 즉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 허무맹랑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그러나 미국 생활을 통해 지원자를 확보했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베트남이 분단되자 바오다이 내각의 총리로 임명됐다여기서 미국의 지원을 토대로 바오다이와 빈쑤옌호아하오까오다이 그리고 베트남국민당 등과 같은 세력들을 박살내고, 1955년 부정투표를 통해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됐다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반공정책을 통해 총선을 파기하고자신의 적인 베트민에 대한 강도 높은 살인적인 탄압과 테러를 저질렀으며대중적인 종교인 불교를 탄압했다. 1960년 베트콩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이러한 폭력적 행위를 일삼았으며, 1963년 6월 11일 틱광둑 승려의 분신자살을 시작으로 미국의 신뢰까지 떨어져 결국 CIA에게 암살당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은 미국이 추구하는 반공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아주 잘 맞는 인물이었고그랬기에 미국은 이들을 자신들의 꼭두각시로서 이용하고자 했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 이승만이 미군 병력에 의존하여 전쟁을 치렀듯이응오딘지엠 정권 또한 남베트남에서 일어나는 게릴라전에서 미국의 지원과 고문단 병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전투를 치렀다그러나 이승만 정권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결정적인 군사적 차이가 존재했는데이승만 정부는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그 외의 지리산 빨치산 게릴라전을 진압했고한국전쟁 이전까지 좌익의 씨를 말린 상태였기에한국전쟁 이후에는 더 이상 남한 내부의 게릴라전이 없었다.

 

반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프랑스-베트민 전쟁(1차 인도차이나 전쟁당시 프랑스에 맞서 싸우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잔존한 베트민 병력과 봉기한 베트콩과 민중의 군대를 제대로 뿌리 뽑지 못했다오히려 이 게릴라들 즉 혁명세력은 허약한 무장력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을 압도했으며, 1963년 압박 전투(Battle of Ap Bac)는 이런 현실을 아주 극명하게 보여줬다물론 그 뿌리는 그의 암살 이후 미국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질 정도로 아주 강력한 존재였으며역사적으로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이승만 정권과 응오딘지엠 정권 모두 양민에 대한 학살을 동반했다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미군정의 도움으로 제주4.3항쟁이나 여순항쟁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민중항쟁들을 진압하면서 대략 10만에 달하는 민간인을 학살한 상태였다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국민보도연맹 학살로 2~3달이라는 기간 동안 최소 30만에서 50만에 달하는 학살을 벌였으며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 수복과 북한으로의 북진 과정 및 점령과정에서 또 다른 수십만(북한지역에서는 20만이 이들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짐)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런 학살로 이승만은 대량 100만 이상의 양민을 학살했으며그 수법도 아주 잔인했다.

 

응오딘지엠 정권도 1954년부터 1963년까지 양민학살을 저질렀다이런 학살의 규모는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가 1954년에서 1956년 당시 토지개혁을 하는 과정에서 억울하게 처형한 2,500명에서 1만 5,000명에 달하는 규모를 압도적으로 우회하는 수치였으며(애초에 이런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고 두 사건의 성격은 너무나도 다른 것이지만), 이 시기 적잖은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학살당했다응오딘지엠은 일부 토착 세력 및 친프랑스 세력 들을 토벌하거나 흡수하는 방식으로 세력을 키웠는데응오딘지엠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은 바로 항불전쟁 시기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베트민 혁명가들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인적구성은 말 그대로 바오다이를 계승한 것이었기에인물들 대다수가 프랑스에 협력한 한국으로 치면 친일파 같은 인물들이었다특히 남베트남 군부는 어떤 육군 중령 1명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에 부역했던 반역자들이었으며이들이 바로 베트민과 이후 베트민을 대체하는 베트콩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양민들을 토벌하고 학살했던 주체들이었다한 마디로 민족반역자들의 집합체가 바로 응오딘지엠 정권이었고당연히 국가 정통성이 북베트남의 호치민 정부에게 압도적으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은 베트민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멸공반공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며이 과정에서 죽은 사람이 5만에서 8만 명에 달한다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에 따르면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대략 15만 명에 달하는 베트민과 베트콩이 죽었으며여기에는 당연히 학살당한 양민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이런 수치까지 합친다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대략 10만에서 15만에 달하는 양민을 학살한 것이라 할 수 있다못해도 5만에서 많으면 10만 이상의 민간인이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물론 이 학살의 규모에 있어서 이승만보다는 작은 편이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결정적인 차이는 아마도 종교에 있을 것이다이승만은 본인이 기독교 신자였지만대한민국 초대 내각을 기독교인들로만 구성하지는 않았었다그러나 응오딘지엠은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남베트남 초대 내각을 가톨릭으로만 구성했다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는 남베트남의 수석 보좌관으로응오딘누의 부인 마담누는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마담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디엠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 그리고 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따라서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불교도들의 극심한 반대투쟁에 직면해야 했고그 결과 응오딘지엠 암살로 이어졌다따라서 이 종교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이승만이 응오딘지엠 정권보다 관용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응오딘지엠을 쉽게 정리하자면, ‘미제국주의 압잡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이들은 정말 미제국주의의 하수인이었다이들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의 반공주의와 매카시즘을 전적으로 수용했으며그 반공이데올로기를 자신들 사회에 적용시키려 했다그 결과 한국과 남베트남은 냉전에 있어서 미제국주의의 반공기지로 태어났으며사회의 진보적 가치들은 철저하게 탄압받고 짓밟혔다이승만의 국가는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가 한층 더 강화하며경제를 발전시켜 유지한 반면응오딘지엠의 국가는 쿠데타 이후 등장한 티우 또한 부정부패로 인해 결국 나라가 혁명 세력에 의해 사라져 버리는 결과를 맞게 됐다물론 남베트남의 패망은 제국주의에 맞선 민중들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평가해야할 사건이지만동시에 결과적으로 남베트남은 미국 없이는 유지가 불가능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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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에서 친미주의자들이 반정부집회 열었다. 그리고 미제는 이를 지원하고 있다. 1차 시위는 쿠바 정부가 진압했다. 앞으로 2차 3차 4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맞불로 친정부 집회를 강화하고 반동들을 하루속히 체포해야 하며, 미제의 악랄한 개입에 맞서 카스트로 동지가 이룩한 사회주의를 수호해야 한다.

난 전적으로 쿠바 정부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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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전 미국의 조 바이든 정부는 쿠바 경제봉쇄 해제를 촉구하는 유엔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의 전파와 미국의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쿠바는 자체적으로 예방효과 92%’에 달하는 백신을 개발했다또한 쿠바의 의사들은 초기부터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투쟁을 전개하며바이러스 전파를 사력을 다해 막으려 하고 있다이러한 노력으로 옆 나라 미국에서의 창궐에도 불구하고 의료적으로 아주 잘 대처하고 있다이처럼 쿠바는 이 전대미문속의 질병창궐에도 불구하고바이러스 퇴치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도대체 이런 쿠바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답은 바로 쿠바가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사회주의 체제에 있다쿠바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자칭 신대륙 발견 이후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었다. 1898년 미서전쟁(스페인-미국 전쟁이후 쿠바는 사실상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했고대략 60년 가까이 미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었다미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압잡이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를 내세워 정치적으로 지배했으며경제적으로는 착취를 일삼았다미국 마피아들이 운영하는 호텔과 매춘업소 그리고 술집과 주요 생산물 사탕수수를 독점한 자본들이 판을 쳤다한마디로 미제국주의의 식민지였다.

 

이렇게 지배받는 쿠바를 바꾸기 위해 일어난 인물이 있었는데그가 바로 쿠바의 붉은 별(The Red Star of Cuba)인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피델 카스트로는 1953년 7월 26일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했던 인물로석방된 이후에는 혁명군을 조직하여 체게바라(Che Guevara)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그리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와 함께 1956년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에 상륙하여게릴라전을 전개했다이들의 혁명적인 전쟁은 1959년 수도 아바나를 접수하면서 승리로 끝났다.

(피델 카스트로 동지, 피델 카스트로 동지는 쿠바에서 혁명을 성공시켜 사회주의 쿠바를 건설하고 미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했던 영웅이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에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고미국의 자본과 각종 기업들의 이권을 몰수해버렸다토지개혁과 무상교육무상의료 그리고 그 외의 진보적인 정책들을 해나갔으며대중적으로 지지를 받게 되었다냉전이 한참이던 당시 미국은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으며아이젠하워부터 존 F. 케네디까지 사회주의 쿠바를 무너뜨리려는 추악하고도 사악한 정치공작과 방해공작을 저질렀다심지어 1962년에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조정하여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겠다는 협박을 소련과 쿠바에게 했다.

 

그 이후에도 쿠바를 대상으로 한 미제국주의자들의 경제제재는 끊임없이 지속됐다양심과 도덕도 없는 미국은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온갖 추잡하고 간신배스러운 짓들을 수없이 저질렀다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쿠바는 소련의 지원을 받음으로서 버텼으며냉전이 종식된 이후에도 미제국주의자들의 탄압과 억압 속에서도 버텨왔다그리고 그런 고난은 지금도 계속되지만계속 견뎌내고 있다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이나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 등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무너졌지만쿠바는 지금까지도 버텨내며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의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그렇다면 쿠바가 지금까지 사회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성취한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타국을 도우러 나가는 쿠바의 사회주의 의사들, 단순히 돈만 밝히는 한국의 엘리트주의적 의사들하고는 의식과 생각하는 구조가 다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쿠바는 혁명이 성공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회주의적인 제도를 끝까지 유지하고 있다비록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해 부유하지는 못하지만미국인들마저도 치료받으러 들릴 정도의 완비된 의료시스템과 전 교육과정을 돈 한번 내지 않고 받을 수 있는 무상교육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현재 북한 또한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쿠바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경제제재 속에서도 버티고 있다물론 의료부분에서 만큼은 쿠바가 북한보다 더 앞서긴 하지만북한이 이런 진보적인 가치들을 유지하고 또 수호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히 사실대로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혁명 이전 쿠바의 문맹률은 30%가 넘을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었지만피델 카스트로 정권이 등장한 이후에는 문맹률이 거의 0%까지 하락했다무엇보다 쿠바 인구의 100%가 12년간 무상 의무교육을 받고 있으며또 무상 의료서비스 덕분에 혁명 전 60%를 넘어섰던 유아 사망률이 21세기 들어서는 5.5%로 현저하게 낮아졌다심지어 2001년 9.11 테러 이후 현장에서 부상당한 미국의 소방관들이 쿠바에 가서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던 사례가 존재할 정도로 쿠바는 의료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선진적이다이러한 쿠바의 복지와 사회보장제도는 현재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일반 서민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것들이다.

(쿠바의 의사 숫자, 2018년 통계만 보더라도 쿠바에 있는 의사 숫자는 OECD 국가 평균을 압도적으로 우회한다.)

 

또한 쿠바는 반제국주의 투쟁의 기치를 높이 든 나라로서 국제주의적 혁명의 아이콘이기도 하다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침략전쟁과 중남미에서의 침략과 정치공작 행위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혁명 투쟁 등 항상 쿠바는 약자와 정의의 편에서 연대했다앙골라 내전의 경우만 하더라도 당연히 쿠바는 혁명세력을 도왔다그리고 베네수엘라에서 우고 차베스 선생이 사회주의를 세우고자 했을 때도 라틴 아메리카 사회주의 국가의 진정한 형제애를 보였고항상 연대의 대오를 내리지 않았다쿠바의 이런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현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서의 좌파의 움직임에도 힘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쿠바의 붉은 별 피델 카스트로 동지의 위대한 업적이다따라서 체게바라가 말했듯이위대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는 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 정의의 대오혁명의 대오진실의 대오 그리고 사회주의와 인류 보편의 가치의 대오 아래 전진해 나갈 것이다.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 쿠바 만세!

위대한 쿠바의 붉은 별 피델 카스트로 동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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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의 과거사 문제 태도, 한국사회에선 이렇게 많이 비교되기도 한다.)


(욱일기와 하켄크로이츠, 그리고 이런식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과거사 문제로 상당히 민감하다독도강제징용일본군 위안부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일본 제국주의가 저질렀던 전쟁범죄 문제 등은 한일관계를 냉각시키는 하나의 주요한 맥락으로 자리 잡고 있다물론 여기에는 과거 자신들이 저질렀던 전쟁 범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책임도 막중한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한 얘기가 나오다 보면꼭 빠지지 않고 나오는 얘기가 있다그것은 바로 독일의 과거사 청산 문제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유대인들은 이런 절멸 수용소에서 집단 학살 당했다. 이런 학살로 인하여 총 600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9화에 나오는 장면, 이 수용소를 해방시키 미군들은 큰 충격에 빠진다.)

 

현재 한국이 생각하는 독일의 모습은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일 것이다즉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나치즘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반성하고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했다는 관점이다필자 또한 몇 년 전 유럽 여행을 하면서 네덜란드의 안네 프랭크가 숨어살던 집(Anne Frank House)과 독일의 다하우 수용소(Dachau Prison Camp)를 들렸고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나치에 대한 청산이 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물론 독일이 과거사 청산에 나섰고피해국들에게 배상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그러나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의 이미지즉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독일이 탄생한 것은 단순히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따라서 오늘은 독일 과거사 청산의 과정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히틀러의 죽음을 보도한 미군 언론사인 성조지)


(독일 영화 '몰락'에 나온 장면, 한 SS 친위대 장교가 항복했음을 알리고 있다.)

 

1945년 4월 30일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아내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자살했다며칠 후 나치 독일의 지도부는 연합군에게 항복을 선언했고, 1945년 5월 8일에서 9일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전으로 끝났다1차 세계대전에 이어 두 번에 이은 패전이었다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영국과 미국은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치렀는데오키나와 전투 이후 미국의 원자탄 투하와 소련의 대일전 참전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 또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2차 세계대전은 완벽히 추축국의 패전으로 끝이 났다.

(독일 다하우 수용소 정문, 몇년 전 유럽여행 당시 직접찍은 사진이다.)


(구타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유대인 시체 소각로, 다하우 수용소에도 유대인 시체 소각로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서부에서 진격하던 영미 연합군과 동부에서 진격하던 소련군은 전쟁이 끝나갈 때 쯤 돼서아주 충격적인 것들을 목격했다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이 계획적으로 저질렀던홀로코스트(Holocaust)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목격했기 때문이다일반인들에게도 제법 알려진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Auschwitz concentration camp)의 경우 사망률이 85% 정도였는데트레블링카 절멸 수용소(Treblinka extermination camp)를 포함한 몇몇 절멸 수용소는 사망률 99%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말 그대로 대량의 인종학살을 나치가 했던 것이다이에 따라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대략 600만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 몇년 전 미국여행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다. 참고로 입장료는 없다. 무료다.)


(한국어 설명서, 미국에 있는 홀로코스트 박물관에는 한국어 설명서도 준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도 많이 방문한듯 하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 2001(Band of Brothers 2001)>를 보면노르망디 상륙작전부터 온갖 전투를 치렀던 병사들이 유대인 수용소를 해방시키는 장면이 나온다거기서 나온 주인공 중 한 명은 한 독일측 장교 혹은 장군의 저택에 들려아주 떳떳하게 행동하는 부인을 만났지만유대인 학살의 참상을 알리고자 떳떳하게 행동하는 독일시민들에게 유대인 수용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게 만들었다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가 묘사한 것과 같이 실제로 연합군은 독일인들에게 이 끔찍한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루돌프 헤스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빌헬름 카이텔이고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에리히 레더발두어 폰 시라흐프리츠 자우켈이다.)


(만화로 묘사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미국, 영국, 소련이 주도적으로 재판을 담당했다.)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연합국들은 전쟁범죄를 일으켰던 나치 독일의 인사들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을 열었다그것이 바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Nuremberg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이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8월 31일까지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주도했다당시 뉘른베르크 재판에는 이른바 죄형법정주의 문제즉 어떤 죄를 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에 관한 법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문제가 있기도 했는데우선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반인륜적인 전쟁범죄였기에당연히 재판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뉘른베르크 재판은 대략 9개월에 걸쳐서 진행됐고2차 세계대전 승전국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이 나치전범 재판을 단행한 사례였다이 전범재판에서 총 24명을 재판했고,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그 이후에도 나치 독일측 인물들이 기소되기도 했지만사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은 역으로 독일 스스로 과거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를 시간적으로 늦추게 된 원인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재판 자체가 승전국들이 진행한 재판이라는 점에서 독일인들에게 안 좋게 다가온 점이 있었다따라서 전후 독일 사회에서 이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전후 분단된 독일, 이 분단은 1949년 동독과 서독의 분단으로 이어진다.)

 

이후에도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 이른바 탈나치화 정책이 추진됐다미군정 휘하의 독일에서는 법령 104호에 의거해 탈나치화를 실시했다. 18세 이상의 독일인에게 1,300만 부의 설문지를 작성하게 하여, 340만 정도를 입건했으며, 100만 정도를 구술 재판했다여기서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수많은 이들이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이런 움직임의 문제점은 대규모 추방으로 행정 기능 마비와 더불어, 4개국 점령지역 마다 평가 및 처벌 기준이 상이했다이런 탈나치화 수사 결과로 총 5,205명이 구속됐고, 806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며, 486명에게 사형이 집행됐다.

(1914년 완공된 총길이 45.6킬로미터의 라인-헤른 운하가 지나고 있는 독일의 오버하우젠 지역

 

그러나 초기에 있었던 서방 연합군 지역의 탈나치화의 움직임은 이후 미소간의 냉전이 심해지면서 흐지부지 되어갔다애초에 미국측은 독일 과거사 문제를 철저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따라서 전후 철저한 청산이 서독에서 이뤄지지 않았으며나치 경력이 있는 이들이 상당수 남게 되었다당시 탈나치화에 의한 점령지역별 구속자 수를 보면영국이 64,500미국 95,250프랑스 18,963소련 67,179명이었다석방자 수는 순서대로 영국 34,000명으로 전체 비율에서 53%, 미국 44,244명 전체비율에서 46%, 프랑스 8,040명 전체비율에서 42% 그리고 소련 8,214명으로 전체비율에서 12%였다따라서 나치경력 인적 청산 부분에서 만큼은 소련이나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가 보다 확실했다.

(라인강의 기적을 나타내는 GDP 자료, 이 시기 서독은 이른바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경제재건에 나섰다.)

 

냉전 초기인 1950년대 독일에서는 사회적으로 정치 안정과 경제재건에 주력했다이는 과거사 보단 냉전이라는 시대사적인 현실에 맞춘 흐름이었다이에 따라 과거사 청산이 독일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심지어 나치를 추종하는 극우정당이 부활하는 움직임도 있었다물론 이들이 대중적으로 크게 지지받지는 않았고홀로코스트 보상법이 제정되기도 했으나어디까지나 나치나 개인의 책임으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이에 따라 집단 책임에 대한 부정과 피해자 의식이 확산되는 역효과도 있었다.

(모사드 관련 서적, 이스라엘이 만든 이 조직은 나치 잔당들을 추적했고, 실제로 재판에 세웠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유대인 학살의 책임자다. 1942년 유대인 절멸을 결정한 반제회의에서 그는 학살 대상자를 분류했다.)

 

물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경우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개인을 재판에 세우는 일은 있었다그리고 1948년 제1차 중동전쟁으로 탄생한 이스라엘에서 모사드(Mossad)라는 단체가 유대인 학살 가담자를 추적하여 체포하고 처형하는 경우도 있었다대표적으로 1960년에 있던 유대인 학살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이 그러했다그러나 이러한 일들이 독일 사회 전체에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이끌고 오지는 못했다쉽게 말하자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됐다.

(68혁명, 1968년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과 더불어 독일도 이 시대적 흐름에 휩싸였다. 서독의 젊은 이들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베트남 전쟁 반대 그리고 과거사 청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에서처럼 젊은이들은 호치민이나 체게바라와 같은 사회주의 인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었다. 사진은 1968년 2월 서독 서베를린에서 있던 시위다.)


(빌리 브란트 스탬프)

 

그러나 서독일 사회가 전반적으로 나치 과거사 문제가 큰 화제가 되었는데이는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으로 인한 68혁명의 움직임에 의한 것이었다.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군대를 보내면서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반전운동이 확산되었는데이는 서독일 또한 마찬가지였다즉 이런 움직임에서 독일 과거사 문제가 다시 대두된 것이다당시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관여한 나치 문제에 눈을 뜬 것이고이것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다이와 더불어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이른바 동구정책을 피게 되면서서독 사회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의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던 게토를 방문한 빌리 브란트, 그는 독일의 과거문제를 반성하는 모습을 동구권에도 각인시켰다. 아이러니 하게도 빌리 브란트 뒤에서 바른자세로 서있는 인물은 동독의 간첩이었다.)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 이 드라마 또한 독일인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다.)


(현재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보도되는 독일 과거사 문제)

 

68혁명의 움직임과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구정책을 통해 독일 사회는 과거사 문제를 사회적으로 보다 크게 대면하게 되었다여기서 더 나아가 독일 사회가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는데아이러니 하게도 1979년 미국에서 만든 드라마 홀로코스트(Holocaust (miniseries) 1979)의 방영이었다이 드라마은 시청률이 각회당 1,000~1,500만에 달했을 정도였다독일 정치학자 피터 리치(peter reiche)는 이 드라마의 방영이 독일 대중이 나치과거와 진정한 대면을 시작한 계기라고 평가했을 정도다그리고 이 드라마를 통해 소위 홀로코스트라는 단어가 유대인 학살의 동의어가 됐다이에 따라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에 현재 우리 사회가 아는 소위 과거사를 반성하는 독일의 모습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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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 - 뜨로츠끼의 주요 이론적 가정들에 대한 비판 노동자 교양문고 2
토니 클라크 지음, 문영찬 옮김 /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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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러시아 혁명사를 보다 보면, 최소 한번쯤은 절대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러시아 혁명에 참가했고, 적백내전에 참전했다 레닌 사후 스탈린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멕시코로 망명하여 삶은 마감한 트로츠키는 사실상 맑스-레닌주의 진영에서 거센 비판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멕시코 망명 시절 별도의 좌파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고, 그게 바로 제4인터내셔널(Fourth International)이었다.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트로츠키의 사상은 당연히 규탄과 비판의 대상이었고, 이에 대해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측에선 스탈린주의라는 말로 비판했었다.

 

의외로 트로츠키주의(Trotskyism)로 알려진 세력들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아시아에서는 초기에 중국과 베트남(주로 코친차이나 지역)에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도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1960년대 급진적 좌익주의였던 적군파 또한 트로츠키주의의 영향을 받았었다. 트로츠키주의와 트로츠키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와 감정과는 별개로 트로츠키주의가 좌파 진영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극단적 반공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도 트로츠키의 사상은 그 영향력이 강한데, 이는 트로츠키주의를 변형적으로 받아들인 토니 클리프의 이데올로기를 따르는 노동자 연대의 영향력이 크다. 이들은 더 나아가 트로츠키의 해석과는 달리 소련과 현실 사회주의 체제를 국가 자본주의라고 해석했다. 사실 국내에 나온 마르크스주의 관련 서적들을 보면 이들이 발행한 책들이 상당히 많고, 나 또한 사회주의를 그들의 책을 통해 접했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트로츠키 사상 그리고 트로츠키주의 집단에 대한 비판을 담을 서적들은 의외로 국내에 많지 않다. 우선 알라딘에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을 검색하면, 국가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해석한 책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반면, 트로츠키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담은 서적들은 찾기가 매우 힘들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로츠키는 패배자였고, 승리자는 현실 사회주의와 스탈린이었다. 트로츠키의 사상을 따르는 세력들은 그 패배를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의 간신배적 행위로 둘러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로츠키 추종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에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주의자들 보다 조직을 광범위하게 끌어들이지 못했다. 이는 중국 혁명과 베트남 혁명에서 잘 드러났다.

 

트로츠키를 좋아하는 이들이 항상 착각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레닌이 트로츠키의 사상과 우호적인 입장을 많이 취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이 얘기하는 레닌의 반스탈린적 입장은 일부분의 발언을 발췌한 것일 뿐이지, 레닌의 전반적인 스텐스는 아니었다. 레닌 또한 트로츠키와의 논쟁을 통해 트로츠키의 사상과 행동을 일목요연하게 비판했었다. 대표적으로 1921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레닌은 트로츠키의 관료주의적인 방식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 외에도 레닌은 트로츠키와의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사상적으로 비판했었으며,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 시점으로 간다면 말할 것도 없을 정도로 비판했다. 거기다 그 시절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였기에 사실상 레닌과 대립 점에 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생각해 보았을 때, 레닌을 마치 트로츠키의 서포터 혹은 사상적 동지로 묘사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 이번에 읽은 책 <뜨로츠끼주의란 무엇인가?>는 영국 공산당 동맹의 토니 클라크(Tony Clark)가 쓴 논문으로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이론적, 강령적 그리고 방법론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트로츠키가 주장하는 영구혁명이나 스탈린이 추구한 일국사회주의에 대한 비난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했으며, 트로츠키의 이런 일련의 주장들이 어떻게 해서 말이 안되는 접근법인지를 폭로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와 레닌주의를 구분하는 분석은 간단하게 두 개의 사고방식인데, 저자에 따르면 트로츠키주의의 추상적추론과 대비되는 레닌주의의 구체적추론이라고 한다. 즉 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의 대립물의 투쟁은 구체적 쟁점을 놓고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 사회주의의 수많은 혁명과 운동 그리고 여러 민족해방투쟁들이 트로츠키주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했다. 즉 이런 점에서도 트로츠키주의는 좌파 투쟁에서 크게 기여한 바가 없다. 심지어 토니 클리프의 경우 소련을 국가자본주의와 스탈린 관료라는 해석을 했다가, 반식민주의 진영의 지도자 호치민과 식민주의 진영의 압제자 바오다이 황제를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선넘는 행위를 했었다. 즉 호치민과 바오다이를 같은 선상에서 관료주의 압제자 혹은 착취자로 비교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의 전반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비상식 비과학적인 분석이었다.

 

200페이지가 좀 안되는 분량을 가진 이 책은 내용의 35%부록1’부록2’로 채웠다. ‘부록1’1970년대 알바니아 공산주의자가 분석한 현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분석이고, ‘부록2’는 스페인 내전 관련한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스트 그리고 우파들의 논리에 대한 반박 글이다. 전자의 경우 현실 사회주의권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유지하려 했던 나라의 분석이라 흥미로웠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스페인 내전 관련 글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예를 들면 영화감독 켄 로치(Ken Loach)가 제작한 랜드 앤 프리덤(Land And Freedom)’이 얼마나 편향된 시각을 가진 영화인지 알 수 있었다. 근래에 들어 스페인 내전에 관해 관심이 생기는데, 반공우익 역사학자 앤토니 비버(Antony Beevor)가 쓴 스페인 내전(The battle for Spain)’을 비교해가며 읽게 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통적인 맑스-레닌주의 집단에서 트로츠키주의를 어떻게 비판하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과 트로츠키주의의 문제점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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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7-09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트로츠키주의가 무엇인가요? 제목과 달리 트로츠키주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 무엇이 잘못됐나 같네요

NamGiKim 2021-07-09 17:52   좋아요 0 | URL
‘사이비 좌익‘이라는 단어로 요약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