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3번째로 큰 영토와 세계 최강의 군사력 그리고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미국은 말 그대로 여러 민족과 인종들이 살고 있는 사회다. 33천만 미국 인구 중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는 것은 16~17세기에 건너간 유럽계 백인들 특히 앵글로 색슨 족이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당히 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미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미국에는 소위 재미교포라고 불리는 이들이 살고 있으며, 대략 240만 명 이상으로 상당히 그 규모가 크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 때, 재미교포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다. 오늘은 한국계 미국인의 역사와 이들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얘기해볼까 한다.

 

한국인의 미국 이주 혹은 방문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역사적인 기록에서 찾아보면, 1883년 보빙사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갔던 근대사상주의자인 유길준이나,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던 서재필 등이 있었다. 서재필의 경우 1894년 미국 시민권을 얻어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했는데, 그 이후의 행적에서 이승만 못지 않게 상당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유길준이나 서재필 등과 같은 사례는 집단 이주는 아니었다.

 

미주지역으로의 한인 이주는 을사조약 체결 3년 전인 1902년에 시작됐다. 즉 대한제국 시절의 일이었다. 19021222일 한인 121명이 인천의 제물포항을 떠나 당시 미국의 식민지이던 하와이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19057월 미국 정부에 의해 한인의 미주 이민이 금지될 때까지 65회에 걸쳐 7,226명이 이주했는데, 이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 또한 이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초기 개화운동 시기 한성감옥에서 의형제를 맺었던 박용만의 도움을 받아서 하와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박용만은 이후 이승만에게 제대로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참으로 씁슬한 일이다.

 

미주지역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1903년 하와이 홀놀룰루에서 홍승하 등에 의해 신민회라는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가 설립됐다. 이에 따라 혈성단, 자강화, 공진회, 의성회, 부흥회 등 20여 개의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했다. 4년 뒤인 19079월 하와이 한인들은 한인합성협회를 창립했으며, 한인합성신보를 발행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한인 자치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안창호 송석준 등과 같은 49인은 19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른바 공립협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을사조약 전후로 해서 미주지역 한인들은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도 많이 넘어갔고, 그 이후에는 당시 미국 식민지나 다름없던 쿠바에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다.

 

안창호를 중심으로 설립된 공립협회는 미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조직의 범위를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했다. 이들 중에는 1907년 당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치를거라 생각하고, “이를 기회로 삼아 독립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도 있었지만,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그로부터 34년 뒤인 1941년에 발생했다. 그런 가운데 1908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과 전명운 열사가 친일파이자 친미제국주의자인 스티븐스를 처단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결국 재판을 받았다. 스티븐스 처단 사건 이후 공립협회는 합성협회와 통합을 추진하여 19092월 회원 4천 명을 거느린 국민회를 창립했다. 이 국민회는 19102월 대동보국회를 통합하여 19105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면서 스스로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임을 선포했다.

 

1910829일 일본은 드디어 조선을 합병함으로써 식민지 지배를 본격화 했다.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이후 신한민보는 논설에서 “2천만 국민은 결단코 왜황, 왜노, 왜종에 굴복하는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밝히면서 독립의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여기엔 박용만이라는 인물이 1911년에 주필로 부임했는데, 그는 무장투쟁을 위한 병력 양성에 힘을 썼다. 무장투쟁론자였던 박용만은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주에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워 군인을 양성하고자 했으며, 이 소년병학교는 191213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을 시작으로 1914년까지 1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박용만은 19146월 하와이 오아후에서 대조선국민군단과 사관학교를 창설하여 일본과의 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최대 300명이 여기에 참가했다. 하지만 재정 문제와 미일관계 문제로 인해 1917년 박용만의 군단은 문을 닫았다.

 

미국에 정착하여 프린스턴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한 이승만 또한 독립운동을 했다. 그러나 이 독립운동이 이승만 개인의 사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많은 이들의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일단 이승만을 좋아하는 측의 얘기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은 교육 사업을 전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상당히 문제가 많았으며, 자세한 내막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두 얼굴의 이승만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여운형을 중심으로 세워진 신한청년당은 강대국들의 회의에 맞춰 김규식을 파리에 파견했는데, 이는 3.1 운동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후 19194월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정부의 초대 총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됐다.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총령까지 오른 이승만은 그해 8월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설립했다. 이 구미위원부는 북미주와 하와이, 멕시코 그리고 쿠바 등지의 교민 사회에도 지부가 생겼다. 당시 이승만의 구미위원부는 대한제국 시기 한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더 나라들에게 서한을 보내 한국에 새 임시정부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중국에 있던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에게 상당히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921년 이승만이 상해에 왔을 때도 결국 갈등만 심해진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925년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당했다.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은 전 세계 식민지 해방 운동에 영향을 줬는데, 미주지역 또한 이런 영향을 받았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김영옥의 경우, 친누나 김월나가 사회주의 사상에 상당히 호감과 흥미를 느꼈다고 한다. 이 내용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이라는 책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192111월에는 워싱턴D.C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렸는데 상해 임시정부는 그해 8월 이 회의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했었다. 이승만, 서재필, 김규식 등을 대표로 파견해 청원서를 전달하고 회의에 직접 참석해 발언하려 했으나, 이 회의는 강대국들의 이권 재조정이 목적이었기에 무시당했다. 1920년대에는 미주 지역 내에서 도산 안창호 세력과 이승만 세력의 갈등이 존재했다. 독립운동 세력 내부에서의 피튀기는 싸움이 있었고, 당연히 여기엔 이승만의 책임이 크다.

 

1930년대 만주사변일 일어나고 유럽에서 파시즘이 급부상하면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것 같았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미주 한인들은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보였다. 여기에는 1932년 이봉창이나 윤봉길이 거둔 독립운동적 성과도 한 몫 했다. 하와이에 있던 국민회와 동지화는 194010연합한인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이 1941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로 바뀐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표로 선출했는데, 당시 그는 적극적인 반일주의자적인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일본 내막기라는 책까지 집필했는데, 이런 사실을 보면 정세를 읽는 눈이 띄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1941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일본과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게 되자, 미주지역 내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여러 활동을 했다. 우선 친미주의 성향의 이승만과 그 세력들은 미국의 소리라는 단파 방송을 통해 해외 독립운동 세력에게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을 알렸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른바 맹호대라는 민병대를 설립했고, 병력 규모는 800명 정도였다. 이후 미주지역 독립세력들은 중경 임시정부와 협력하여 미국 OSS 휘하에서 대략 50명 정도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캘리포니아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이런 활동을 하다가 1945815일 해방을 맞이했다.

 

추가적으로 더 첨언하자면, 미국의 식민지였던 쿠바에도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임천택이 그러했다. 임천택은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는 상해 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의 독립자금 송금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을 정도로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이후 그는 쿠바에 계속 남았고, 1950년대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주도한 쿠바 혁명에도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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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은 좌초입니다! - 천안함 조사위원으로 참여한 선반 전문가 신상철의 비망기
신상철 지음 / 민진미디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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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3 26일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의 초계함인 천안함이 침몰했다천안함이 침몰하면서 46명의 해군이 사망했고한국사회는 천안함 침몰에 대한 의구심과 더불어 이들에 대한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이것이 바로 천안함 사건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등은 이 천안함 사건이 북한측 잠수함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했고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을 믿었으며지금까지도 믿고 있다최근 인터넷 사이트들을 보면 천안함 사건이 마치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많이 묘사되고 있고이것을 빌미로 반북주의적인 정서를 강요하기도 한다.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소행이라는 주장은 널리 받아지고 있다. 2011년 미국에서 나온 FPS 게임이자북한이 미국을 점령한다는 게임 홈프론트(HomeFront)’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홈프론트 게임 시작 오프닝에서 천안함 사건으로 46명의 한국 해군 장병들이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전사했다.”는 힐러리 클린턴의 발표가 나오면서 시작된다심지어 FPS 게임에서도 천안함은 북한 잠수함의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이러한 시각은 한국에도 정말 널리 퍼져 있으며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찾기 힘들다.

 

천안함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점에 의구심을 가지거나 토를 달면 종북 혹은 빨갱이와 같은 원색적인 단어를 들어가며 색깔몰이 당하기 쉽상이다즉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한국 사회는 천안함 사건에 대해 정부가 내린 결론과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견해에 관용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천안함 사건은 그 자체로써 의문점도 많고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사실들이 많다최근들어 PD수첩에서 방영한 방송을 보면 당시 최원일 함장은 어뢰 공격을 상부에 보고했다고 하는데그런 증언과 방송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우선 필자의 생각을 밝히자면필자는 천안함 사건에 관해 자세히는 모르지만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많은 사람들이 천안함 사건을 얘기할 때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그것은 바로 북한이 천안함 사건 이후 한국에 관련 조사단을 보내려고 했다는 사실이다북한 국방위원회는 물증확인 위해 검열단 파견하겠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확실히 밝혔다그러나 이명박 정부에서 이들의 주장을 철저히 외면했고한국과 미국은 천안함 사건이 북한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만 내릴 뿐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천안함 사건을 통해 안보의식을 강화하고자 했던 이명박 정부는 자신들이 내린 결론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관용적이지 않았다천안함 사건 이후 민주당 추천 조사위원으로 천안함 사건 진상조사를 위한 민군합동조사단에 참여하여 진실규명에 나섰던 신상철씨는 천안함은 좌초에 의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만약 필자가 반북의식이 아주 강했던 고1~2때 이 책을 읽었다면 분명히 반감을 가졌겠으나최근들어 천안함 사건이 다시 화제가 되면서지금껏 크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천안함 사건에 관한 관심이 생겼다따라서 필자는 이번에 신상철씨가 집필한 책인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를 읽게 됐다.

 

천안함은 좌초입니다!”는 신상철씨가 천안함 사건을 조사하며항해부분 전문가로써 분석한 자료를 정리한 책이다책에 따르면 천안함 사건 최초의 보도는 좌초라는 사실이었고실제로 자신이 여러 자료와 증거물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천안함은 좌초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한다예를 들면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라면그 주변 물고기들이 폭발로 죽어야 하며천안함에서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도 폭발에 의한 피해가 극심해야 한다고 한다그러나 시신을 조사해본 결과 사망자 전원이 익사에 의한 것이었으며생존한 장병들 또한 어뢰 공격으로 인한 피해로 보이는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고공격을 받을 시에 깨져야 하는 형광등이 멀쩡했다또한 어뢰 공격으로 인한 물기둥을 본 사람도 없었고물고기 떼죽음 현상도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증거와 사실관계를 보았을 때천안함 사건은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 아닌 좌초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천안함 좌초설의 근거가 상당히 자세하고 거짓으로만 받아들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관계들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필자는 알 수 있었다책에서는 저자가 주장한 좌초설을 트집 잡거나 처벌하기 위해 또는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일어났던 여러 사건들에 대한 내용도 나온다미군측에서도 끝까지 좌초설을 외면하고 무시했으며 완고히 부정했다이명박 정부 또한 그랬으며신상철씨의 좌초설을 강압적으로라도 막으려 했다정부가 신상철씨를 막으려고 했던 점과이후 좌초설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정에 그를 세웠던 일(물론 신상철씨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을 생각하면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실들이 많다.

 

이처럼 천안함 사건은 여러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이 많다그러나 필자 또한 책에서 주장하는 좌초설이 진실인지는 모르겠다우선 이 책의 초판은 2012년에 나왔고개정판은 2016년에 나왔다이 사이에 천안함 관련 여러 목소리와 증언 그리고 조사 자료 등이 나왔기 때문이다따라서 필자는 천안함 좌초설을 전적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그러나 책 저자가 쓴 취지와 날조극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왜냐하면 저자의 주장대로 풀리지 않은 의문점과 더불어 은폐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필자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공격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는다결정적으로 천안함 사건 당시 북한의 어뢰 공격이라는 사실을 만들어내기 위해유용원과 같은 자칭 군사 전문가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인간어뢰를 생각하며, “북한에서 인간어뢰를 발사하여 천안함을 격침시켰다.”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 주장들을 남발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북한군의 어뢰 공격설을 밀었던 이들이이를 입증하기 위해 보인 방식도 상당히 편향적이었다앞서 말했듯이신상철씨와 같은 좌초설을 무조건적으로 없는 이야기 취급했다그것도 필요하다면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면서 말이다따라서 필자는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어뢰 공격설이라 주장하는 입장을 매우 반대한다.

 

2010년 천안함 사건을 보다보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그것은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Gulf of Tonkin Incident)이다. 1964년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는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게시했다통킹만 사건 이후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 해군이 미국 구축함 매독스 호를 공격했다고 얘기했지만이는 완벽한 날조극이었고 사전에 미국이 계획한 일이었다물론 북베트남 해군이 1차로 공격한건 사실이었지만, 2차 공격은 완벽한 날조였다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은 통킹만 사건 몇일 전에 혼미와 혼니우 섬에 남베트남군 특수부대를 상륙시켜 기습 공격을 가했고이 계획에 따라 미국 구축함을 북베트남 영해에 배치했다한마디로 미국의 자작극이었다이 통킹만 사건의 진실은 1971년 펜타곤 페이퍼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그 진실도 같이 드러났다.

 

과거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가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듯이천안함 사건도 이명박 정부가 조작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든다본문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이러한 의문점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아마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 대통령인 이명박은 천안함의 진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워낙 의문점이 많기에 의구심도 많이 드는 사건이기에 필자 또한 정확한 진실은 알 수 없다그러나 확실한 것은 북한군의 어뢰 공격은 상당히 믿기 힘든 주장이라는 사실이다천안함 사건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천안함 사건이 어떤 부분에서 날조가 있었는지왜 당시 정부의 발표만을 믿을 수 없는지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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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시리즈를 연재하기로 했는데거의 5개월 가까이 연재를 하지 않았군요기다리신 분들을 위해 사과드립니다다시 방학기간이니졸문이지만 종종 연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일본은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다이런 일련의 침략행위를 통해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잠자고 있던 서방 세력에게 힘을 과시했다비슷한 시기 지구반대편에서도 파시즘이 급부상하고 있었다일본의 만주 점령 10년 전 이미 이탈리아에선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가 이끄는 검은 셔츠단(Blackshirts)이 수도 로마로 진군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다즉 이탈리아에선 10년 가까이 파시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2.26 사건, 1936년에 일어난 이 군부의 쿠데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하게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게 된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은건 반공주의 성향의 조직들을 모아 폭력과 무력으로 잡은 것이었다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도 이러한 반공주의 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나타났는데그것이 바로 1920년 히틀러를 당수로 둔 나치당(Nazi Party)이었다이들은 무솔리니의 검은셔츠단을 예시로 삼아 갈색셔츠단 즉 돌격대(Stormtrooper)를 만들어군대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에 나섰다그러나 1923년 바이마르 당국의 진압으로 실패했고히틀러 또한 감옥생활을 경험했다당시 독일의 바이마르 정권은 그 이후 계속 유지되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대공황을 맞으면서나치와 사회주의 세력에 의해 흔들렸었다경제 대공황 이후 다시 경제가 휘청거리자나치는 다시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 민주적인 투표를 통해서 독일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솔리니와 히틀러,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20세기 파시즘을 추구한 인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장본인들이다. 무솔리니가 선배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지속되면서 히틀러의 힘이 무솔리니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던 시대는 끝났고군부를 중심으로 정치가 형성되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상해 사변을 통해 시작됐다또한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도 시작이 됐다이노우에 닛쇼가 결성한 국가주의 단체 혈맹단은 일본 정부의 전 대장이나 대신 그리고 재벌 총수 등을 차례로 암살했다. 1932년엔 5.15 사건이라고 하여일본 해군출신의 청년장교들이 이누카이 쓰요시 수상을 살해하고육사 생도등이 정부와 정당 기관 그리고 일본 은행 등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것은 당시 히로히토 천황의 측근과 정당 그리고 재벌에 대한 테러이자 쿠데타였다.

(5.15 사건을 보도한 일본의 언론사)


(찰리 채플린, 무명영화 배우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 또한 이 사건에서 암살당할 뻔했으나, 덴뿌라를 먹고 있어서 살아남았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룬적이 있다.)

 

이런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들은 재판에서 위기에 처한 국가방위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다쿠데타에 가담했던 이들은 가담의 정도에 따라 유기징역과 집행유예 및 훈방조치를 받았다당시 일본 민중들이 정당정치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기에오히려 반란 장교를 구명하려는 탄원이 많이 있었으며이에 따라 사형을 받은 이들은 한명도 없었다재판을 받은 40명 중에 거의 전원이 1~2년 내에 석방됐다그러나 일본에서 일어난 5.15사건은 1920년대로 대표되던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와 식민지 조선에서는 문화통치로 일컬어지던 시대의 종말 즉 정당내각 시대의 종언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2.26 쿠데타 당시 진격하는 일본군)


(2.26 쿠데타 관련 일본 측 서적)

 

1932년에 일어난 5.15 사건은 이렇게 끝났지만, 1936년 2월 26일에 일어난 이른바 2.26 쿠데타는 아니었다. 1936년 2월 26일 수도 도쿄에 주둔하던 일본군 제1사단의 청년 장교들이 이끄는 1,400명의 병력은 말 그대로 쿠데타를 일으켰다이들은 육군대신의 공관을 포위했고경시청을 점거했으며총리대신과 대장 대신내대신시종장을 암살했다그리고 육군 교육총감의 집으로 몰려가 총감을 살해했다쿠데타를 일으킨 이들이 내세운 명분은 존황토간(尊皇討奸)’으로 천황을 제대로 받들기 위해 간신들을 치겠다는 의미였다이들은 천황에게 자신들의 뜻을 알리기 위해육군대신의 공관으로 몰려들어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알려줬다그들의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정치사회적 개조와 통제파 지도자들을 체포할 것

2. 황도파 장교들을 요직에 임명할 것

3. 소련을 압박하기 위해 아라키 장군을 관동군 사령관에 임명할 것

 

당시 2.26 쿠데타에 연루가 됐던 인물 중에는 사회주의와 파시즘 사이에서 애매모호한 입장에 있던 기타 잇키(Kita Ikki)도 있었다그는 참으로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일본 제국 패망사의 저자 존 톨랜드(John Tolland)는 그에 대해 사회주의 강령에 제국주의를 결합하려고 애쓴 열렬한 혁명가이자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는데그는 급직적인 사회상을 꿈꾸면서도 천황 숭배 사상에 사로잡혔었다고 톨랜드는 주장했다물론 톨랜드의 주장과는 달리 기타 잇키가 천황제를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고, 2.26 쿠테타의 실질적인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기타 잇키, 그는 사회주의와 제국주의 성향이 혼합된 인물로 말 그래도 짬뽕인 인물이다.)


(국내에 출판된 기타 잇키 전기, 교양인에서 문제적 인간 시리즈로 출간했다. 분량과 가격이 만만치 않은 책이다.)

 

기타 잇키는 중국과 인도의 7억 형제들은 우리의 보호와 지도력이 없으면 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라고 생각했고이러한 생각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입장에서도 나타났다물론 그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인들을 차별하는 것에 반대했고그러한 차별을 완벽히 철폐해야한다 생각했다이러한 그의 생각은 하나의 일본제국 하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은 대등한 민족이 되어야 한다.”라는 그의 주장에 잘 나타나 있다그렇지만일본의 지배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 또한 2.26 쿠데타에 관여가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사회주의와 제국주의가 혼합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2.26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은 천황이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32년 5.15 사건을 생각하며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이 쿠데타 소식을 들은 천황은 매우 분노했고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진압하겠다고 하며 큰소리를 쳤다반면 일본 육군은 청년 장교들의 취지에 공담한다면서 천황을 설득하고자 했다결국 천황의 명령에 따라 일본 군대는 쿠데타 진압에 나섰다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고장교 2명이 자결하고 세 차례의 재판 결과 주모자 및 적극 가담자 18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6명이 무기징역형, 22명은 1년 6개월~6년의 징역형을 받았다이렇게 되면서 2.26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도쿄에 있던 독일 대사관도 이 소식을 접했고당연히 반란의 소용돌이 안에 있었다당시 나치독일의 언론 지였던 프랭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서 비공식 통신원으로 일하던 대사관의 무관 비서관은 2.26 쿠데타에 관한 임시 보고서를 작성했는데보고서를 2개나 작성했다하나는 나치 독일에 보내는 것이었고다른 하나는 소련에게 보내는 것이었다이 임시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의 증조부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친구사이였다그가 바로 소련의 스파이로 독소전쟁에 큰 기여를 했던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였다.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 나온 박정희, 어린 시절 그는 2.26 쿠데타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만주군 중위가 된 박정희, 그는 결국 1940년 만주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 이렇게 해서 박정희의 기회주의적인 생애가 시작된다.)

 

아이러니 한 일이지만 이 2.26 쿠데타는 25년 뒤 한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젊은 시절 군인의 꿈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의 한 청년이 이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다그가 바로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Park Chung hee)였다. 2.26 쿠데타가 진압으로 끝나면서 통제파가 전면에 서게 되었고일본 군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전시체제가 확고해졌다앞에서 언급한 소련의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 덕분에 소련은 “2.26 사건을 통해 일본이 중국 대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소련이 예측한 대로 일본은 1년 뒤 중국과의 확실한 전면전에 돌입했고그것이 바로 1937년에 발발한 중일전쟁이었다마지막으로 일본 제국 패망사』 1장 게코쿠조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리하르트 조르게, 그는 일본 주재 독일 대사관에 근무하면서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의 활약 덕분에 소련은 상당히 많은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스파이임이 발각되어 1944년 처형당했고, 1960년대 초 소련에서 영웅으로 인정받았다.)


(일본에 있는 조르게의 묘, 현재는 러시아 대사관 측 인물들이 그를 기리고 있다.)

 

“2. 26 사건은 끝났다여기서 발생한 폭력 사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유혈극이었다다만 목숨을 잃은 사람이 7명에 불과했고 폭도들은 순수히 항복했다가장 뛰어난 용기의 모범은 여인들이 보여주었다반대로 장군들은 허둥거렸다대부분의 외국인에게 이 반란은 초국가주의자가 저지른 또 하나의 학살극에 지나지 않았다그리고 이 사건의 의의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단 소련은 알았다이 사태가 중국 내륙을 향한 팽창주의로 이어질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한 조르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끝났지만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은 이미 태평양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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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정규군을 파병하던 1965년 쿠데타를 일으켜 남베트남에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다그 쿠데타를 일으킨 인물은 남베트남에서 10년간 대통령을 했던응우옌반티에우(Nguyễn Văn Thiệu)였다응우옌반티에우는 1963년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주도했던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 암살 쿠데타에 가담했던 인물로 한국의 박정희와 같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박정희가 1950년대 이승만 제거 계획에 참가했던 인물이라는 점과 이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티우랑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이 시기 티우와 더불어 같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이 있었다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수상이자 공군 사령관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 Nguyễn Cao Kỳ).

 

응우옌 까오 끼는 1930년 9월 8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이었던 하노이에서 태어났다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한참이던 1949년 응우옌 까오 끼는 18세의 나이로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에 있는 프랑스측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즉 이 기간 동안 프랑스 식민지군으로 복무했고여기서 만난 인물들 중에는 구정 공세 시기 베트콩 용의자를 즉결처분한 응우옌응옥로안(Nguyễn Ngọc Loan)이나 같이 쿠데타에 참여하게 되는 응우옌반티에우 등이 있었다. 1952년부터 디엔비엔푸 전투가 한참이던 1954년까지 끼는 프랑스령 모로코에서 조종사로 훈련받았으며거기서 중위 계급까지 올랐다마이클 매클리어에 따르면 베트남인으로는 최초로 프랑스 조종사가 되었다고 한다아무튼 그 또한 대다수의 남베트남군 군인집단이 그렇듯이 프랑스 식민지 군대에서 복무했었다제네바 회담 이후 베트남으로 귀국하여 즈엉반민 휘하의 남베트남군 공군에서 복무했다.

 

1961년부터는 탄손누트 공항에 있는 공군부대에서 복무했으며소령자리까지 올랐고, CIA와 협력하여 북베트남에 침투시키는 비밀공작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1963년 응우옌반티에우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을 제거하는 쿠데타에도 참가했으며, 1964년에도 즈엉반민 휘하에 놓여 있었다. 1963년 당시 끼는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전투기 조종사였다고 마이클 매클리어는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언급하기도 했다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군벌들의 쿠데타가 일어났는데, 1965년 끼는 티우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내부 쿠데타를 종결시켰다당시 미국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남베트남에 지상 병력을 파병했는데끼는 친미파로서 이를 적극지지했다.

 

1965년 6월 19일 티우와 끼는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키는 것과 동시에 미국의 맥 조지 번디(McGeorge Bundy)와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대사에게 전문을 보냈는데주요 내용은 남베트남 사령관이 타당한 이유로 미군의 지원을 요청할 경우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투에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에 따르면 당시 수상이었던 응우옌 까오 끼는 수상임에도 여전히 편대장 시절의 공군 제복을 자랑삼아 입고 다녔으며장식이 하나도 없는 검은색 제복이나 선홍색 작업복에 보라색 스카프를 두른 차림으로 다녔다고 한다당시 남베트남 주둔 미군 총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William Westmoreland)하고도 성향이 비슷하여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그 둘은 사이가 좋았는데 당시 수석 보좌관이던 부이 디엠(Bùi Diễm)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한쪽에는 끼 수상과 나(부이 디엠), 그리고 장관 몇 명이 앉았고 반대편에는 테일러 대사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이 앉았다매주 이렇게 만나 토의하는 내용은 주로 사이공이나 다낭 항에 도착하는 미군들의 환영 방법이었다.”

 

수상이었던 끼는 아주 반민주주의적인 면모도 아주 강하게 보였다그는 대놓고 사람들이 누구를 영웅으로 생각하느냐고 묻는데나한테 영웅은 딱 하나밖에 없다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라고 할 정도로 형편없었다또한 그는 남베트남에서 민주화 시위를 전개하던 불교도들을 탄압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1966년 4월 그는 다낭 지역에서 집회를 하는 불교도와 시민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4,000명의 남베트남 해병을 파견했고직접 현장에 나가서 진압작전을 지휘했었다이런 과정을 통해서 수천명의 불교도와 시민들을 반정부 시위자 혹은 공산주의자로 몰아 투옥시켰다.

 

또한 그가 집권하던 시기 남베트남의 부정부패는 심하면 더 심해졌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리고 군대의 무능력도 사라지지 않았다. 1966년만 하더라도 12만 4,000명이아 되는 남베트남 병사들이 탈영했으며사실상 미군의 지상병력으로 남베트남을 유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그러나 의외로 끼는 현실적인 시각을 가지기도 했었다대표적으로 북베트남과 공산당 그리고 호치민에 대한 입장이 그러했다그는 1965년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과의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남베트남 정권보다 사회정의와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베트남 전쟁이 끝난 이후 응우옌 까오 끼는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었다.

 

그는 베트남 인민들에게 존경 그 자체였다그는 프랑스는 물론 다른 외침에 대항하는 투쟁에 언제나 앞장섰다내가 어려서 철이 없었을 때대부분의 베트남 사람들은 호치민을 대단한 애국자로 생각했다나도 그를 대단히 칭송했었다.”

 

끼는 1967년 남베트남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도 참여했었고대통령이 되진 않았으나 남베트남 정권의 부통령으로 복무하며 티우 정권의 핵심으로 남았었다그러던 1971년 대선에 도전하고자 입후보하려 했지만후보사퇴 압력을 받고 물러났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공세로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티우와 더불어 미국으로 망명했다혁명군의 탱크가 사이공 대통령궁을 통과하던 4월 30일에 USS 블루리지 호에 올라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미국에 가서는 캘리포니아 웨스트민스터에 정착했고 거기서 대략 28년 동안 술집을 운영했다.

 

그러던 2004년 남베트남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통일된 베트남으로 귀환하여 현 베트남 정부와 협력하는 방향을 선택했다이에 따라 그의 부인과 자녀들 또한 귀환했다마지막 여생을 현재 베트남 정부와의 협력 및 화해의 길을 선택했기에적잖은 베트남계 미국인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다특히 현 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측의 투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그리고 그는 2005년 베트남 전쟁 30주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그들(반공주의 성향의 베트남계 미국인들)은 지식도 없고 자존심도 없다

 

여생을 베트남에서 다가 2011년 7월 2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로 사망했고이후 그의 유해는 캘리포니아주 휘티어에 있는 로즈힐스 불교 묘지에 안치되었다향년 80이었다.

 

응우옌 까오 끼는 분명 프랑스군에 복무한 민족반역자였고존경하는 인물이 히틀러라 할 정도로 몰지각한 인물이었다또한 불교도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다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민중이 공산당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마음속으로는 현재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을 존경했다또한 남베트남 지도자로선 최초로 통일 베트남에 귀국하여 투자에 힘썼다즉 과거에 대한 청산을 본인 스스로 했다는 점에서 나름 개과천선한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마이클 매클리어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https://en.wikipedia.org/wiki/Nguyễn_Cao_K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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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쳐 중국에 저항한 역사다베트남의 역사를 보면 쯩 자매의 저항부터 1979년 중월전쟁까지 아주 긴 세월에 걸쳐 중국의 침략을 받았는데놀랍게도 중국은 결과적으로 베트남을 완벽히 정복하지 못했었다이는 몽고 제국도 그러했고명나라도 그러했으며청나라 또한 그러했다몽고 제국의 침공이나 명나라의 지배는 수십년에 걸쳐 이루어 졌지만청나라의 침략은 제법 짧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그러나 중요한건 베트남 민족이 청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는 사실이다.

(응우옌 후에 동상, 현재 베트남에서 청나라의 침략을 무찌른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나라가 베트남과 전쟁을 치른 것은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당시 베트남에서는 떠이선(Tây Sơn)의 반란이 일어나서 내부에서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이 과정에서 베트남 역사에 명성을 떨치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가 바로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였다응우옌후에는 자신의 형제인 응우옌반냑과 응우옌반루와 함께 이 반란을 주도했었고베트남 내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떠이선 3형제)

 

1784년에는 300척의 함선을 동원한 태국군 3만 명이 캄보디아 땅을 거쳐 베트남 남서부 해안지대에 상륙했었는데소아이뭇 전투(Battle of Rạch Gầm-Xoài Mút)에서 태국군을 섬멸하는 활약을 펼쳤다. 1785년 1월 20일 태국군에게 휴전을 요청하였으나이에 응하지 않았던 태국군은 떠이산군을 섬멸하려 했으나도리어 자신들이 떠이선군에게 패전했다베트남측 기록에 따르면 여기서 태국으로 돌아간 병사는 3천 명도 안된다고 한다.

 

그 이후 기세를 몰아 응우옌후에는 응우옌쭈어을 멸하고 북진하여 1786년 7월에는 수도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를 접수했다이로써 응우옌후에는 베트남의 왕이 되었다당시 베트남은 후레 왕조였는데그 후레 왕조의 마지막 왕은 청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이에 따라 청나라의 양광즉 광동성과 광서성 총독이었던 손사의는 황제에게 본래 안남은 우리의 옛 영토이니 레 왕조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나중에 병력을 보내 이를 지킨다면 안남을 또다시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상소문을 올렸고청나라는 29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손사의의 지휘 아래 베트남을 침략했다.

(청나라의 베트남 침공, 1788년 청나라는 베트남을 점령하기 위해 2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다.)

 

베트남을 침공한 청나라군은 광서성과 운남성에서 두 갈래로 출발했고, 1788년 11월에 수도 탕롱에 입성했다청나라군이 탕롱에 입성할 때까지의 군사적 저항은 거의 없었다당시 탕롱을 지키던 떠이선군은 급히 철수해 타잉화(Thanh Hóa)에 진을 치고 퀴논에 상황을 알렸다이 소식을 들은 웅우옌후에는 청나라의 출병이 레 황제 복위가 아닌 베트남 지배에 있다 생각했다따라서 그는 청나라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그해 11월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꽝쭝으로 정했으며직접 10만의 수륙 양군과 200마리의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북진했다아이러니 하게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군에 맞서 전격전을 시도했다. 1789년 1월 양국의 대명절인 구정을 이용했다.

(응우옌 후에가 지휘한 전격전을 표현한 인형)

 

1789년 1월 5일 새벽에 떠이선군이 기습을 가하자 청나라군은 대혼란에 빠졌고지휘관 손사의는 말을 타고 간신히 북쪽으로 도망쳤다응우옌후에는 먼저 탕롱으로부터 남쪽으로 90km 떨어진 닌빈에서 후레 왕조의 급조된 군대를 일거에 격파했고청의 주력군이 주둔 중이던 탕롱으로 신속히 이동했다그리고 1월 5일 밤에 탕롱의 외곽 방어거점이던 하호이와 응옥호이 요새를 점형하고다음날 정오 탕롱에 입성했다즉 여기서 청나라군이 대패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손사의가 도망을 치자 운남성 일대에서 주둔 중이던 청나라 군대는 이 소식을 듣고 본국으로 철수했다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는 불과 12일 만에 청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이렇게 끝난 것이 바로 베트남의 대청항쟁이었다이후 응우옌후에는 청나라에게 낮은 자세를 보였지만청나라는 패배했다는 사실에 굴욕을 느끼고 있었다청 조정은 “50만 대군을 동원해 베트남을 평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막상 실현하지는 않았다.” 결국 청나라는 웅우옌후에를 안남국왕으로 책봉하고 더 이상의 침략을 단념하기에 이르렀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동다 공원)

 

이렇게 해서 응우옌후에의 대청항쟁은 베트남 저항의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격화되던 시점에 보 응우옌 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 승전 10주년 즈음하여 디엔비엔푸 대첩과 동춘 승리의 궁극적 의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그 글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바익당

 

치랑(Chi Lang)

 

동다(Dong Da, Battle of Ngọc Hồi-Đống Đa)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우리는 이제 위대한 시대에 살고 있다네.

 

미래는 우리의 것일세.”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천년전쟁오정환종문화사, 2017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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