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단되었던 국가가 있다. 대표적으로 1910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가 35년 만에 해방을 맞이한 한국이 그랬고, 19세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게 점령당한 뒤, 다시 프랑스가 들어간 베트남(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라 16도선 이북은 중국이 이남은 영국이 접수)이 그랬다. 냉전 초기에 분단의 모습을 보인 국가가 또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라 독일이었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동쪽에서는 소련군을 서쪽에서는 미··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1945년 항복을 선언했을 때는 이미 동과 서로 분단된 상태였다. 독일의 동부는 소련군이 접수했고, 서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이 접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분할의 베트남이나 한국과는 달리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Berlin)도 둘로 나누었던 것이었기에, 소련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의 점령 지역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서방 세력에게 국제관계적인 측면에서 세심한 배려를 했기에, 수도 베를린의 분단을 합의 보았다. 그 결과 서베를린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동베를린은 소련이 접수하게 됐다.

 

당시 소련 점령 지역은 독일 총 면적의 40%를 차지했고, 베를린 시의 토지 46%와 인구 28%를 포함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소련이 서방 세계에게 얼만큼의 배려를 보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가던 194565일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 점령 지역을 통치할 최고 기구인 독일관리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이 위원회의 위원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그리고 버나드 몽고메리가 맡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고,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 형성이 점차 보이자, 독일 문제는 보다 냉전의 구도를 띄게 되는데 그 시작은 1946년이었다.

 

19463월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그 유명한 철의장막발언을 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세 나라가 점령한 독일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자고 제의했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이런 안에 반대했지만, 19471월 독일 내 미국 점령지와 영국 점령지의 경제 통합 협정이 체결됐고 정식으로 두 점령지가 하나로 통합됐다. 이것은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기 2개월 전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스탈린은 강력한 항의 표시를 했었다. 1946915일에 출판됐던 미국무부 보고서에는 독일에서의 사태 전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지배하는 일말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영국과, 또한 가능한 프랑스와도 함께 이 지역에서 경제를 회복함으로써 서독의 통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무부 보고서에 나온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은 이 시점부터 소련과의 대립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독일 점령지역을 통합하자 프랑스 또한 통합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9482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서방국가 6개국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런던 의정서를 통과시켰다. 즉 이에 따라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세 나라의 점령지에서 서독 정부를 세울 준비를 했었던 것이다. 서방 세력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소련은 당연히 반발했고, 항의의 표시로 관리위원회(앞에서 언급한 1945년에 설립된 위원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선포했다.

 

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한 소련은 이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소련도 동독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계획들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소련 점령지에서 ‘D’라고 찍힌 마르크를 발행함과 동시에 동베를린과 소련 점령지에서 통용되는 통화로 삼았고, 624일에는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상징과도 같은 사건인 서베를린 봉쇄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소련에 대한 비난의 화포를 열었고, 그와 동시에 막대한 물자를 수송기를 통해 대량으로 서베를린에 투하했다. 이런 시점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각을 올렸고, 당연히 이러한 책임에는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다.

 

스탈린의 생각과는 달리 서방 세계는 서베를린을 지켜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19495월 폐쇄했던 도로를 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4952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탄생했고, 5개월 뒤인 107일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탄생했다. 하지만 동독의 탄생에서 알아야 할 사실은 동독이 통일 독일의 목적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1948523일 포츠담 회담에서 선언되었듯이 통일 독일을 만들기 위한 주민투표 요구가 독일 전역에서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점령 지역에서의 투표는 금지가 되었었고, 그 결과 주민투표는 실행되지 못했었다.

 

1949년 분단 정부가 수립 되었지만, 동서독 통일을 위한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에선 집권당이 1952년에 주민투표 안으로 다시 요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소련의 스탈린은 1952310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열강 대표자들에게 독일의 재통일과 중립화를 위한 제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안을 서독의 아데나워 정부는 즉각 거절했다. 1개월 뒤 스탈린은 두 번째 노트를 서방측에게 전했다. 여기서 스탈린은 서방측이 주장한 자유총선거를 승인하되 유엔감시하가 아닌 4개국 감시 하에서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서방 세력들은 이런 양보에 가까운 제안들을 모두 다 거절했다.

 

이렇게 되면서 동독과 서독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대립 구도로 갔다. 1949년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반공주의적 군사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제국주의 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NATO를 창설했다. 1954104일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은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 기지가 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1년 후인 195556일에 서독은 NATO에 합류했다. 그렇게 되자 1주일 뒤 소련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군사동맹 체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였고, 동독 또한 이 사회주의 대오에 합류했다. 당연히 이것은 서독의 군사기지화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지금까지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공동관리위원회를 만들었으나, 독자적으로 이 위원회의 목표를 침해한 세력은 바로 소련이 아닌 서방세력이었다.

2. 1948년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으나, 이것은 19482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체결한 런던 의정서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미국은 서독을 반공 기지화했다.

3. 동독과 소련의 스탈린은 독일 통일안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이러한 요청을 완벽히 무시하고, 거절한 주체는 서방 세력이었다.

4. 1955년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한 이유는 서독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동맹인 NATO에 가입한 것에 대한 맞대응이다.

5. 따라서 독일 분단의 책임은 소련이 아닌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책임이다.

 

참고문헌

 

독일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있는책, 2015

 

1917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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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른바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가 시작됐다. 냉전은 19463월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Harry Truman)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 선언은 사실상 미국의 신제국주의의 길로 가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위였다. 트루먼 독트린에 따라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서는 친일세력과 결탁했던 친미제국주의자 이승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작용했고, 여운형 암살과 김구의 남북협상 이후 한반도 남부에 자본주의적인 분단정부가 수립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면서 미국은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 군사고문단을 투입하는 형식으로 개입하여 그리스의 좌익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학살했다. 또한 1948년에 일어난 제주 4.3 항쟁에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 앞잡이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도륙했다. 이들의 학살극은 말 그대로 광란의 학살극이었으며,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물자 지원을 받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또한 내부의 부정부패와 더불어 온갖 학살극을 국공내전 시기에 자행했다. 이처럼 트루먼의 신제국주의 정책은 친제국주의적 세력을 지원함과 동시에, 그 지역에서 무차별 광란의 학살극을 동반했다.

 

1950625일 북한군의 기습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은 북한이 침략했다는 이유를 들어, UN군의 형태로 한국전쟁에 아주 신속히 개입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켰고, 1950101일에는 한국군과 같이 북진하여, 북한지역 대다수를 접수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나의 변수가 생겼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전쟁은 다시 38선을 중심으로 원점이 됐고, 1951년 여름부터는 휴전회담이 진행되게 됐다.

 

한국전쟁에 대해 단순히 자유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지켰다는 식으로만 배우는 우리사회가 항상 외면하거나 언급을 꺼리려 하는 역사적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당시 사회주의 국가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중국(중화인민공화국) 그리고 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은 전쟁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국제연대를 실천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1946년 장제스의 선제공격으로 일어난 제2차 국공내전은 19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면서 종결됐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과정에서 유엔군 총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만주지역의 핵공격 계획과 더불어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의 군대를 중국 본토에 상륙시키고자 했다.

 

당시 북한에 지원군을 파병한 마오쩌둥은 1950년 스탈린과 더불어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공식국가로 승인했으며, 수교와 더불어 중월국경지역을 중심으로 베트민에게 물자를 지원했다. 반면 한국전쟁에 신속히 참전했던 미국은 1950년 시점부터 식민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프랑스를 위해 소수의 군사고문단을 사이공에 파병했으며, 프랑스의 전쟁비용을 대신 지불해줬다. 그 결과 1951년 보 응우옌 잡 장군이 홍강 삼각주를 목표로 프랑스군에게 총공세를 가했을 때, 미국이 지원한 네이팜 폭탄이 베트민군을 향해 투하됐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1949년부터 1954년까지 중국과 북한 그리고 베트남에서 치러진 전쟁은 말 그대로 미제국주의와 그 위시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맞선 반제국주의 투쟁이자 반식민주의 투쟁이었다. 거기다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식민주의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해방전쟁이었으며, 그런 전쟁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의 본성을 드러내며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에게 무기와 전쟁자금을 지원했다. 거기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 일부는 19537월 휴전협정이 성사되고 난 이후 베트남으로 가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히기 까지 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는 장제스의 반동적이고 친제국주의적인 군대를 한반도 전선에 투입하여 중국 본토를 자본주의화 시키려는 야심찬 계획까지 진행했다. 그리고 이런 계획은 미제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과 비슷한 시점에 진행됐다.

 

지금까지 국공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의 미국의 정책을 언급했다. 이러한 사실을 들어 생각해 보았을 때, 당시 미국이 치르고 있던 전쟁은 식민주의적이었으며 신제국주의적인 전쟁이었다. 특히나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군이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베트남으로 향했다가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하여 포로로 잡혔다는 점에서 이 세 가지 전쟁의 성격이 어떠한 성격을 가진 전쟁인지 아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시 사회주의 진영이 치렀던 이 세 가지 전쟁은 반제국주의 반식민지주의적 민족해방투쟁이자 계급해방전쟁이었으며, 미국과 그 위성국들의 전쟁은 말 그대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이에 따라 당연히 한국전쟁 또한 제2차 국공내전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더불어 민족해방전쟁이라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충분히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의 해석은 앞으로의 학계가 발전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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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1-07-11 14: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부 수립부터 53년까지 한국은 자본주의 정부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제헌헌법 경제조항만 읽어봐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초기 한국 정부는 국가사회주의와 더 유사점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초기 이승만 정부의 정치 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 그리고 그 일민주의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범석 양우정 안호상 등 족청계는 기본적으로 반 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습니다. 반자본주의 반공산주의 강력한 민족주의 이 세 가지가 족청계 그리고 초기 한국 정부를 특징짓는 중요 요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적이라고 말하려면 적어도 1953년 이후 헌법을 언급하는 것이 그나마 더 적당할 것입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비판은 피해야 합니다
자세한 것은 후지이 다케시 <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NamGiKim 2021-07-11 14:24   좋아요 2 | URL
족청계.... 김두한류의 청년단....

이 사람들은 정말 연구 대상이긴 합니다. 민우님이 표현했듯이, 하긴 그들의 성향은 파시즘(비스마르크로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재 복지 보장)으로 상징되는 성향도 분명 있었죠. 하긴 김두한은 뉴딜도 칭찬하고 히틀러도 칭찬하고, ˝아 우리가 빨갱이 때려잡으려면 무상복쥐 해야지˝라는 소리도 했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이승만이 그런 족청계를 포함하여 숙청했으니. 안호상도 대표적인 예시고.

이 글을 읽어보았다면 알겠지만, 냉전사적 그리고 식민지 해방전쟁적 측면에서 바라본 관점이죠.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이런 책도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다.

Redman 2021-07-11 17:30   좋아요 1 | URL
정말 권력마귀 이승만...ㅋㅋ 후지이 다케시는 워낙 주목받았던 연구자고 관점도 참신해서 읽어볼만 합니다

아 그리고 글 잘 읽었습니다!
 

[번역]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답장

이 글은 1967년 2월에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 주석이 미제국주의자이자 베트남을 침략한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한 것입니다. Exchange of Letters with U.S President Lyndon B. Johnson의 내용으로 원본은 여기서 (https://www.historyisaweapon.com/defcon2/hochiminh/)에서 확인이 가능합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 각하, 1967년 2월 10일에 받은 귀하의 편지에 대한 제 답변입니다.

베트남은 미국으로부터 수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습니다. 베트남 인민은 미국에게 그 어떠한 해를 끼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맺어진 조항들과는 달리,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 끊임없이 개입해왔으며, 베트남에서의 영구분단과 미국의 남베트남 신식민주의화, 미국군대의 전초기지화를 목적으로 남베트남에서의 침략전쟁을 개시하고 강화해왔습니다. 대략 2년 동안 미국 정부의 군용 항공기와 해군은 독립국이자 주권국가인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평화와 인류에 대항하는 전쟁범죄들을 저질렀습니다. 50만에 달하는 미군 병사와 위성국들의 병사들은 우리 동포들을 학살하고, 농작물을 파괴하고 마을을 없애버리기 위해 네이팜 폭탄과 화학 무기 그리고 독가스와 같은 가장 비인간적인 무기와 가장 야만적인 전쟁방식을 수행해왔습니다. 북베트남에서는 수천대의 미군 항공기가 수백 수천 개의 폭탄을 투하하여 도시, 마을, 공장, 도로, 다리, 제방, 댐과 심지어 교회와 탑, 병원 그리고 학교까지 파괴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메시지에서 베트남의 겪는 고통과 파괴를 슬퍼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누가 이런 소름끼치는 범죄들을 저지르고 있습니까? 바로 미제국주의와 그 위성국들의 병사들입니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극단적인 상황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베트남 인민을 대상으로 한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은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도전이자,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위협이요, 아시아와 세계 평화에 대한 심각한 위협입니다.

베트남 인민은 독립과 행복 그리고 평화를 전적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민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서 궁핍과 희생에 대한 공포를 떨쳐 궐기했습니다. 우리 인민은 진정한 독립과 자유 그리고 진정한 평화를 쟁취할 때까지 단호히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대의명분은 전 세계 인민들과 미국 인민 대다수를 통틀어 강력한 지지를 받고 또 인정받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침략전쟁을 도발했습니다. 침략행위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하며, 그것만이 평화를 재정착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미국 정부는 단호하게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대한 전쟁 도발 행위와 폭격을 반드시 중단해야 하며, 모든 미군과 그 위성국들의 군대 전부를 남베트남에서 철수시켜야 하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베트콩)과 베트남 인민 스스로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의 4가지 기본적인 입장 내용이며, 1954년 베트남 제네바 협정의 기본원칙과 준비사항입니다. 이것이 베트남 문제의 올바른 정치적 해결책의 기초입니다. 대통령께서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미국의 직접적인 협상을 제안했습니다. 만일 미국 정부가 대화를 원한다면, 우선 폭격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무조건적으로 멈춰야 합니다. 미국의 폭격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에 대한 모든 적대행위를 중단한 이후에야 미국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 간의 대화와 양당에 영향을 끼치는 의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트남 인민은 무력에 결단코 굴복하지 않으며, 폭격이라는 명실상부한 위협이 존재하는 한 대화요청을 수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의명분은 전적으로 정당합니다. 미국정부는 도리에 맞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진심을 담아,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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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 개전(바로바로사 작전) 80주년인 어제, 주딱 동지와 몇몇 노사과연(노동사회과학연구소) 동지들과 함께 소성리에서 사드 반대 집회를 햇었습니다.


6월 21일 아침 저와 아는 동지 한명랑 고속터미널 역에서 같이 대구행 버스에 올라 대구에 내려간 뒤 몇몇 동지들과 일정을 갖은 뒤에, 밤 10시 40분 쯤 대구에서 소성리로 가는 봉고차에 올랐습니다.


11시 30분이 넘어 소성리에 도착한 우리는 그곳 현장에서 잠시나마 취침을 가진 뒤, 다음날인 새벽 5시쯤 일어나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사드 집회를 참가 하기 위해선 새벽 가까이 움직여야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미제국주의의 전쟁 기계 사드 관련 부품 및 물품들이 들어가는 시간이 새벽 5~6시쯤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올해들어 역대급으로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이었는데, 대략 100명 정도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민주노총 건설노조, 전교조 그리고 노사과연 및 기타 동지들이 모였고, 이 투쟁의 규모로 보았을 때 주축은 대진연 동지들이었다 봐도 과언은 아니었습니다. 뭐 어쨌든 진보세력의 정파를 떠나서 한반도의 평화와 미제국주의의 패권주의적 야욕을 막겠다는 정신 하나만큼만은 뭉친 연합체였다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저희가 5시 40분 쯤 나왓을 때, 이미 경찰은 사드 현장에 결집한 100명의 시위대를 막기 위해 못해도 1,000명 이상의 경찰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수십대의 경찰차량 버스가 저희를 진압하기 위해 온 것이지요.


6시쯤 우리는 동네에 계신 사드 반대 투쟁을 지지하는 어르신들과 여러 단체 동지들과 함께 평화로운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러던 7시쯤이 되자 경찰들이 우리를 포위했고, 시위대 한명 한명을 들어 올려 시위대 그 자체를 와해시켜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제국주의 무기의 진입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또한 경찰에게 끌려 나갔고, 수많은 동지들이 그렇게 끌려 나갔으며, 대략 2명이 경찰에 의해 부상당했습니다. 경찰이 강제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 진열이 다소 과격해지며, 몸싸움을 동반한 진입 투쟁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대략 1시간 30분 가까이를 경찰과 충돌했고, 9시에서 9시 30분쯤 집회는 끝났습니다. 물론 사드 관련 부품들은 소성리 마을 도로를 통과했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투쟁했다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투쟁을 전개하며, 평화시위 따위만을 갈구하는 행위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말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목표한 바를 쟁취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투쟁을 해야할 때는 어느정도의 희생과 더불어 각오도 있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경찰과의 충돌은 개인적으로 LG 트윈타워에서 진입투쟁을 벌인 이후로 두 번째입니다. 이번에 노사과연에 있는 한 동지의 발언 즉 국가의 독점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 체제에 대한 분노의 연설이 꽤나 감명깊었습니다. 또한 사상은 다른 대진연 동지들의 적극적인 진입투쟁에서도 감명받았습니다.


저는 좌파라면 이런 사드 반대 집회에 참가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사드 문제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와 한국의 재벌독점체제 그리고 자본주의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집회가 궁금하신 분들이라면 아래의 영상을 감상하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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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rsation between Ho Chi Minh and Ngo Dinh Diem in 1945.

 

1945년 호치민과 응오딘지엠의 담화


(스텐리 카노우가 쓴 <Vietnam: A History>에 있는 호치민과 응오딘지엠 사이의 대화 내용을 한번 번역해보았습니다.)

 

Diem: What do you want of me?

 

응오딘지엠: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Ho: I want of you what you have always wanted of me. your cooperation in gaining independence. We seek the same thing. We should work together.

 

호치민: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항상 원했던 것입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당신의 협력이오. 우린 같은 대의를 추구합니다. 따라서 우린 함께 해야 합니다.

 

Diem: You are a criminal who has burned and destroyed the country, and you have held me prisoner.

 

응오딘지엠: 당신은 조국을 불태우고 파괴한 범죄자입니다. 또한 당신은 나를 포로로 붙잡았고요.

 

Ho: I apologize for that unfortunate incident. When people who have been oppressed revolt, mistakes are inevitable, and tragedies occur. But always, I believe that the welfare of the people outweighs such errors. You have grievances against us, but let’s forget them.

 

호치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먼저 사과합니다. 억압받던 민중들이 봉기하면 그런 실수들은 불가피하고 비극이 나타나죠. 하지만 저는 인민들의 복리가 그런 오류보다도 더 중대하다고 봅니다. 불만의 여지가 있지만 이제는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Diem: You want me to forget that your followers killed my brother?

 

응오딘지엠: 당신의 부하들이 내 형을 죽인 것을 잊어버리라는 얘기오?

 

Ho: I knew nothing of it. I had nothing to do with your brother’s death. I deplore such excesses as much as you do. How could I have done such a thing, when I gave the order to have you brought here? Not only that, but I have brought you here to take a position of high importance in our government.

 

호치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 형제들의 죽음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소. 나 또한 이 지나친 일에 대해 당신만큼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을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제가 명령이라도 한 줄 아십니까? 더군다나, 당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우리 정부의 중차대한 직책을 맡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Diem: My brother and his son are only two of the hundreds who have died and hundreds more who have been betrayed. How can you dare to invite me to work with you?

 

응오딘지엠: 친형제와 친형의 자식은 수백 명의 사망자 중 2명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수백 명이 배신당했습니다. 나를 불러 함께하자고 초청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소?

 

Ho: Your mind is focused on the past. Think of the future education, improved standards of living for the people.

 

호치민: 과거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군요.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인민생활의 향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Diem: You speak a language without conscience. I work for the good of the nation, but I cannot be influenced by pressure. I am a free man. I shall always be a free man. Look me in the face. Am I a man who fears oppression or death?

 

응오딘지엠: 몰지각한 말만 하는구려.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나는 조국을 위해 일할 이유가 없소. 나는 자유인이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똑똑히 보세요. 내가 탄압과 죽음에 겁먹을 사람으로 보이는지.

 

Ho: You are a free man.

 

호치민: 당신은 자유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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