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분단되었던 국가가 있다. 대표적으로 1910년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가 35년 만에 해방을 맞이한 한국이 그랬고, 19세기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게 점령당한 뒤, 다시 프랑스가 들어간 베트남(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 따라 16도선 이북은 중국이 이남은 영국이 접수)이 그랬다. 냉전 초기에 분단의 모습을 보인 국가가 또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라 독일이었다.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패배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동쪽에서는 소련군을 서쪽에서는 미·영·프 서방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1945년 항복을 선언했을 때는 이미 동과 서로 분단된 상태였다. 독일의 동부는 소련군이 접수했고, 서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이 접수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 분할의 베트남이나 한국과는 달리 또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치 독일의 수도였던 베를린(Berlin)도 둘로 나누었던 것이었기에, 소련이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의 점령 지역으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서방 세력에게 국제관계적인 측면에서 세심한 배려를 했기에, 수도 베를린의 분단을 합의 보았다. 그 결과 서베를린은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동베를린은 소련이 접수하게 됐다.
당시 소련 점령 지역은 독일 총 면적의 40%를 차지했고, 베를린 시의 토지 46%와 인구 28%를 포함했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소련이 서방 세계에게 얼만큼의 배려를 보였는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가던 1945년 6월 5일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 점령 지역을 통치할 최고 기구인 ‘독일관리위원회’를 설립했는데, 이 위원회의 위원은 게오르기 주코프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 그리고 버나드 몽고메리가 맡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이 되고, 이에 따라 미국과 소련의 대립 구도 형성이 점차 보이자, 독일 문제는 보다 냉전의 구도를 띄게 되는데 그 시작은 1946년이었다.
1946년 3월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그 유명한 ‘철의장막’ 발언을 했는데, 그로부터 몇 개월 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 세 나라가 점령한 독일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자고 제의했다. 당시 프랑스는 미국의 이런 안에 반대했지만, 1947년 1월 독일 내 미국 점령지와 영국 점령지의 경제 통합 협정이 체결됐고 정식으로 두 점령지가 하나로 통합됐다. 이것은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하기 2개월 전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미국의 일방적인 조치에 스탈린은 강력한 항의 표시를 했었다. 1946년 9월 15일에 출판됐던 미국무부 보고서에는 독일에서의 사태 전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독일을 지배하는 일말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영국과, 또한 가능한 프랑스와도 함께 이 지역에서 경제를 회복함으로써 서독의 통일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분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미국무부 보고서에 나온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은 이 시점부터 소련과의 대립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이 자신들의 독일 점령지역을 통합하자 프랑스 또한 통합에 합류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948년 2월 미국 영국,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서방국가 6개국은 런던에서 회의를 열었고, 여기서 ‘런던 의정서’를 통과시켰다. 즉 이에 따라서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는 세 나라의 점령지에서 서독 정부를 세울 준비를 했었던 것이다. 서방 세력들의 독자적인 움직임에 소련은 당연히 반발했고, 항의의 표시로 관리위원회(앞에서 언급한 1945년에 설립된 위원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선포했다.
관리위원회에서 탈퇴한 소련은 이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소련도 동독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계획들에 착수했다. 스탈린은 소련 점령지에서 ‘D’라고 찍힌 마르크를 발행함과 동시에 동베를린과 소련 점령지에서 통용되는 통화로 삼았고, 6월 24일에는 서베를린을 봉쇄했다. 이것이 바로 냉전 초기 상징과도 같은 사건인 서베를린 봉쇄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은 소련에 대한 비난의 화포를 열었고, 그와 동시에 막대한 물자를 수송기를 통해 대량으로 서베를린에 투하했다. 이런 시점부터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각을 올렸고, 당연히 이러한 책임에는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다.
스탈린의 생각과는 달리 서방 세계는 서베를린을 지켜내는 데 여념이 없었고, 1949년 5월 폐쇄했던 도로를 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1949년 5월 23일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탄생했고, 5개월 뒤인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탄생했다. 하지만 동독의 탄생에서 알아야 할 사실은 동독이 통일 독일의 목적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1948년 5월 23일 포츠담 회담에서 선언되었듯이 통일 독일을 만들기 위한 주민투표 요구가 독일 전역에서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점령 지역에서의 투표는 금지가 되었었고, 그 결과 주민투표는 실행되지 못했었다.
1949년 분단 정부가 수립 되었지만, 동서독 통일을 위한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다. 독일민주공화국에선 집권당이 1952년에 주민투표 안으로 다시 요구했다. 그리고 같은 해 소련의 스탈린은 1952년 3월 10일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 열강 대표자들에게 독일의 재통일과 중립화를 위한 제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러한 안을 서독의 아데나워 정부는 즉각 거절했다. 1개월 뒤 스탈린은 두 번째 노트를 서방측에게 전했다. 여기서 스탈린은 “서방측이 주장한 자유총선거를 승인하되 유엔감시하가 아닌 4개국 감시 하에서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서방 세력들은 이런 양보에 가까운 제안들을 모두 다 거절했다.
이렇게 되면서 동독과 서독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흐름에서 대립 구도로 갔다. 1949년 서구 제국주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반공주의적 군사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제국주의 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NATO를 창설했다. 1954년 10월 4일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즉 서독은 서구 제국주의의 군사 기지가 되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1년 후인 1955년 5월 6일에 서독은 NATO에 합류했다. 그렇게 되자 1주일 뒤 소련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군사동맹 체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바르샤바 조약 기구였고, 동독 또한 이 사회주의 대오에 합류했다. 당연히 이것은 서독의 군사기지화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맞대응이었다.
지금까지 독일 통일 문제에 대해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 있는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공동관리위원회를 만들었으나, 독자적으로 이 위원회의 목표를 침해한 세력은 바로 소련이 아닌 서방세력이었다.
2. 1948년 소련이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으나, 이것은 1948년 2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체결한 ‘런던 의정서’에 대한 대응이었으며, 이런 과정속에서 미국은 서독을 반공 기지화했다.
3. 동독과 소련의 스탈린은 독일 통일안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이러한 요청을 완벽히 무시하고, 거절한 주체는 서방 세력이었다.
4. 1955년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한 이유는 서독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군사동맹인 NATO에 가입한 것에 대한 맞대응이다.
5. 따라서 독일 분단의 책임은 소련이 아닌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책임이다.
참고문헌
독일사, 맥세계사편찬위원회, 느낌이있는책, 2015
1917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