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국내의 영화들을 정말 많다. 2004년에 개봉한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천만관객이라는 성공적인 성과를 거둔 영화도 있다그 외에도 한국전쟁 관련 드라마 또한 적잖게 있다이러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항상 설정해 놓는 것이 있다그것은 바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을 돕기 위해 참전한 중공군에 대한 묘사다한국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영화나 드라마 등을 보면정치성향과는 상관없기 중공군에 대한 묘사는 일치한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나온 중공군 물량 공세)

 

예를 들어 드라마를 보자면, 2010년 MBC에서 방영했던 반공 드라마 로드 넘버원에서 나온 중공군들은 숫자에 의존한 공격을 퍼붑는 것으로 나온다드라마 상에서 나온 중공군의 평양 탈환작전이나주인공 부대와 한미 연합군이 치르는 전투에서 중공군은 압도적인 물량으로 이들을 압박하지만미공군의 항공지원으로 간신히 무찌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2006년 KBS에서 방영했던 해방전후사를 다소 진보적인 시각에서 다룬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서도 중공군의 공세를 66화에서 아주 짧게나마 다루는데여기서도 중공군은 숫자로 한국군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인다영화도 마찬가지다앞에서 언급한 태극기 휘날리며나 고지전등에서도 중공군은 물량공세를 펼치는 것으로 나온다.

 

이처럼 국내에서 만든 한국전쟁 관련 대중매체는 중공군을 단순히 인해전술에만 의존한 군대로 묘사한다그렇다면이러한 묘사는 사실적인 묘사일까내가 내리는 답은 물론 아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싸움이자내전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베트남 전쟁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진영의 민족해방전쟁적인 모순점도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던 전쟁이었다이 전쟁에 중국이 참전하게 된 것은 1950년 10월 25일의 일이었다.

 

한미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수도 서울을 수복한 시점까지만 해도 중국은 참전할 의사를 보이지 않았었다그러한 이유는 중국이 내전을 끝낸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이승만의 염원에 따라 북진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1950년 10월 1일 한국군은 단독으로 38선을 돌파했는데그 다음날인 10월 2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참전 관련 편지를 보냈고, 10월 13일에 참전을 결정했다. 10월 19일 한미 연합군은 평양에 입성했는데이 시점에 마오쩌둥이 보낸 중공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에 대기하고 있었다.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팔로군들)

 

이렇게 되면서 10월 25일 중공군은 한국전쟁에 참전했고참전한 중공군은 여기서 유엔군과 첫 교전을 벌였다이후 중공군은 팽덕회(펑더화이)의 지원 아래 초기에 최소 30만 명이 참전했다참전 규모는 이후 100만에서 150만까지 증가한다이들은 곳곳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을 격퇴했고크리스마스가 되기 전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의 말을 몽상으로 바꾸어 놓았다중공군은 북한의 조선인민군과 연합하여 12월에 다시 평양을 탈환하고 1951년에는 다시 서울을 점령했다그 이후엔 수원과 용인 그리고 충청북도 주변까지 진격했다이후엔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38선 부근까지 후퇴했고그곳에서 2년간 고지전을 치르다가 휴전을 맞이했다.

 

전쟁 초기 중공군이 쓴 전술로는 흔히 인해전술이 많이 알려져 있다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물론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쓴 경우가 있었는데대표적으로 유엔군이 철수하게 된 장진호 전투에서였다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 12만 명과 유엔군 2만 명이 교전을 벌였고중공군은 4만 명 그리고 유엔군은 2,500명이 전사했다당시 중공군은 미군을 밀어붙이기 위해 물량에 의존했었고당시 참전했던 미군들이 이후 인해전술로 불릴만한 증언들을 했기 때문이다이것이 바로 우리가 중공군에 대해 가지게 되는 인식의 시작점이었다.

(북한에서 만든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을 그린 그림)

 

실제로 중공군의 주된 전술은 인해전술이 아니었다이들의 주된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중공군은 과거 제1차 국공내전과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에서 그랬듯이게릴라전에 익숙한 군대였다마오쩌둥이 키운 중국의 홍군은 게릴라전을 기반으로 성장한 군대였고, 1935년 대장정 뿐만 아니라 중일전쟁 시기에도 일본군이 모든 것을 불태우고약탈하고죽인다.”는 삼광작전을 펼친 것도 팔로군의 게릴라전술에 대한 대응이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장제스에 맞선 전쟁에서도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은 주로 화력보단 게릴라전술에 의존했다내전 초기 국민당군이 430만 대군이었던 반면 공산당은 120만 명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전력에서도 국민당이 3.5배나 많았다화력에서도 국민당이 미국의 탱크와 항공기를 지원받았기에 압도적이었다따라서 중공군은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인해전술식 군대가 아니었다.

 

특히 국공내전 시기 동북해방전선에서 활약한 이 중공군은 한국전쟁에서도 국민당군을 굴복시킨 전술을 참전 초기에 사용했다이들은 보급로가 길어지면서 고립된 유엔군과 한국군 부대를 포위 공격했고야간을 이용하여 산을 타고 내려온 부대들을 통해 이들의 후방을 차단했다따라서 당시 적잖은 한국군과 유엔군이 공산진영의 포로로 붙잡혔다결국 이러한 전략전술을 통해 중공군이 다시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고수원과 용인을 넘어 충청북도 인근까지 진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공군에게도 한계가 있었다그것은 바로 막강한 유엔군의 화력이었다우선 유엔군은 막강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고거기다 한국전쟁 초기 낙동강 전선에서 보충한 강력한 기갑부대도 있었다특히나 항공화력은 북한 전역을 초토화 시킬 정도로 무서운 수준이었다이러한 화력지원을 토대로 맥아더 해임 이후 유엔군 총사령관이된 리지웨이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효율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이에 따라 양측 모두 더 싸우기 보단 휴전협정을 앞당기는 쪽을 택했다본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공군의 전략적 뿌리는 게릴라전에 있었다따라서 한국전쟁 시기 중공군이 인해전술에 의존했다는 인식은 사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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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베르 호자의 사진, 상당히 다정해 보이는 얼굴이다.)

 

그리스와 코소보마케도니아 그리고 몬테네그로와 맞닿아 있는 국가 알바니아(Albania)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점령당했었다산악지대를 주로 이루고 있는 이 조그마한 산악 국가는 당시 봉건적 잔재가 많이 남아있던 농업국가였고역사적으로 이탈리아의 영향권에 놓여 있었던 나라였다이는 20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의 동맹세력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5개월 전 알바니아를 침공했었다.

 

이탈리아 군대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자 조그(Zog) 왕과 그의 정부는 도망쳤고체터스(Chetas)라고 불리는 일부 게릴라 부대들이 이탈리아군에 맞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였다당시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에 대략 5개 사단을 배치했다이로부터 대략 2년 동안 알바니아에 대한 정보는 서방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가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역전되고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미 연합군이 승리한 이후 이탈리아 본토 상륙을 계획하기 시작하자알바니아인들은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9년 알바니아에 입성한 이탈리아군, 이탈리아군의 L3/35 탱크도 보인다.)

 

이 시점에서 알바니아의 주요 조직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첫 번째로는 공공연하게 군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군장교 아바스 쿠피(Abas Kupi)의 지도하에 알바니아 북부 지방 일대에 있던 조그주의자(Zogist) 운동 그룹이다당연히 이들은 왕당파를 상징하는 세력이었다둘째는 알바니아 해안지대와 중부지방의 작은 언덕지대에서 활동하던 극우성향적 공화주의파인 발리 콤베타(Balli Kombetar) 즉 민족연합 운동 그룹이었다그리고 마지막은 이 글의 주인공인 엔베르 호자(Enver Hoxha)의 공산주의 그룹과 그들이 이끄는 LNC(빨치산부대였다.

 

알바니아의 지도자로 알려진 엔베르 호자(Enver Hoxha)는 1908년 오스만 제국령 알바니아에서 태어났다부르주아 출신 집안에서 자란 호자는 벨기에에서 교육을 받은 역사학 교수였고이탈리아가 알바니아를 침공하여 점령했을 시점부터 반파시스트 운동에 뛰어들었던 인물이었다유학생활을 바탕으로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도 할 줄 알았었다고 한다이탈리아군에 맞선 파르티잔 투쟁을 벌였던 호자는 1942년 말 왕당파 그룹이었던 게헤그(Gheg)의 게릴라 부대를 설득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다또한 그리스 공산당(KKE)와 유고슬라비아의 티토(Tito)하고도 협력하는 관계였었다.

(독일군에 맞설 당시 호자의 전투 지휘를 표현한 상상화)

 

당시 영국의 SOE는 이탈리아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던 호자와 협력관계를 형성한 게헤그의 부대와 호자의 파르티잔에 관심을 기울였다이들은 그들에게 무기와 장비를 공급해주고자 했고, 2개의 타격연대를 훈련시키기도 했었다그러나 1943년부터 이탈리아가 항복할 기미를 보이게 되면서 새 정부 수립 부분에서 갈등이 나타났다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축출되고 연합군에게 항복하자이번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의 군대가 알바니아에 들어왔다독일군이 입성하면서 파르티잔 투쟁은 고난을 겪었다독일군은 대략 3개 사단을 동원하여 수많은 게릴라 부대들은 몰아냈는데작전 개시 2주도 안되어 수세에 몰렸다독일군은 알바니아 점령에 총 4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파르티잔 투쟁 당시를 표현한 엔베르 호자의 상상화)

 

그러나 당시 독일군은 연합군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기에 알바니아에 대해 크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거기다 유고슬라비아의 경우 30만이 넘는 추축군의 병사가 티토의 파르티잔 부대를 상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따라서 독일은 전쟁이 끝나면 알바니아 철수 후 그곳에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다독일군은 알바니아의 도시와 주요 도로들을 장악한 것에 만족하고그 밖의 지역의 점령에는 소홀했다이에 따라 호자는 알바니아의 나머지 부분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게 됐다. 1943년 가을 호자는 그의 병력을 동원해 정적인 발리 부대를 공격했는데발리 부대는 여기서 독일군과 손을 잡았다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탈리아 점령 초기부터 게릴라전을 전개하던 체터스는 독일군과 거의 싸우려 하지 않았다이런 상황이 전개되자 알바니아에 침투했던 SOE의 여단장 트로츠키 데이비스(Trotsky Davies)는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알바니아에서 활동했던 독일의 Waffen-SS, 이들은 결국 1944년에 알바니아에서 물러나게 된다.)


(알바니아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의 깃발)

 

1944년 봄 영국의 SOE는 조그주의자(왕당파세력인 쿠피 그룹을 중심으로 하는 레지스탕스 봉기를 일으키고자 했지만당시 이 그룹은 친나치파 문제와 더불어 조직 내의 분열에 휩싸여 있었다이와 대조적으로 호자와 그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세력을 확장했고, 1944년 1월에 5천 명이었던 조직이 5월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이에 따라 연합국은 이들에게 군수품을 포함한 물자를 공중으로 지원했다호자의 빨치산 부대는 이런 지원을 바탕으로 지역을 확장하고독일군 호송대와 나아가 수비대를 상대로 공격을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11월 알바니아를 해방시킨 호자의 빨치산 군인들)

 

그해 6월 독일군은 제1산악사단을 창설하여 북부의 연합군 교두보를 폐쇄시키는 데 성공하여 빨치산들은 산속으로 쫓아내 버렸지만1산악사단이 유고슬라비아에 배치되자 다시 독일군에게 게릴라전을 감행했다이후 독일군은 불리해지는 전황에 따라 알바니아에서도 후퇴하게 되었다노르망디 상륙작전 5개월 뒤인 1944년 11월에 호자가 이끄는 빨치산들은 궁극적으로 알바니아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기에 이른다이로써 알바니아가 해방된 것이다빨치산의 주장에 따르면 대략 5천 명에서 6천 명 이상의 독일군이 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알바니아에서의 전쟁을 다룬 관련 서적)

 

그로부터 1년 뒤인 1945년 알바니아는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와 스탈린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했다이에 따라 1946년 엔베르 호자를 지도자로 한 알바니아 인민 공화국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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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건인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군사적 패배를 경험한 전쟁이다총인원 280만의 참전했고, 5 8천 명이 전사했으며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군사적 수단을 미국은 이 전쟁에 동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패배했다그와는 별개로 베트남 전쟁은 미국 내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았던 전쟁이기도 하다. 1776년 건국 이래 경험해보지 못한 대규모 반전운동이 미국 내에서 일어났고심지어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마저 자신들이 받은 훈장을 백악관 건물에 던지는 일도 일어났다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전쟁의 주체인 미국에서도 대규모의 반발에 휩싸이게 됐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1960년대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전쟁을 공산 월맹의 침략으로부터 자유월남을 구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었다그러나 이는 박정희 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내세운 주장이었을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니었다베트남 전쟁의 원인은 1971년 이른바 펜타곤 페이퍼가 유출되면서 그 진상이 드러났다이것은 결국 아시아에서의 제국주의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의 사악한 음모와 계략에서 시작된 전쟁이었다즉 당시 미국이 적으로 내세운 북베트남의 호치민과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의 베트콩 전사들은 과거 일본과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것처럼자신들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따라서 오늘은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어떠한 방식으로 베트남을 침략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미국과 디엠정권의 제네바 협정 파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됐다그러나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에 물자를 지원하던 미국은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시켰다물론 여기에는 “2년 이내에 남북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다이에 따라 북베트남에는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호치민 정권이 들어섰고남베트남에는 과거 프랑스가 지원한 바오다이 정권이 유지됐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카드가 있었다그것이 바로 반공주의적 민족주의자 응오딘지엠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은 제네바 회담 시기 바오다이가 총리로 임명한 인물로 공산당에 대한 혐오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다우선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바오다이 황제를 부정선거로 축출하고, 1955년 남베트남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이와 더불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남베트남에서 항불투쟁을 했던 전직 베트민에 대한 탄압을 가속화 했으며미국 아이젠 하워 대통령과 더불어 총선거를 파기해 버렸다.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 총선거를 파기해버린 이유는 간단했다민중의 80%가 호치민과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사실을 이 두명의 반공주의자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총선을 파기함과 동시에 응오딘지엠은 전직 베트민 투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구금하고 처형하는 천인공노할 만행들을 남베트남 곳곳에서 저질렀다그러면서 남베트남의 내각을 민주적인 투표로 결정된 인물들이 아닌 가톨릭 신자들과 디엠의 일가친척들로 구성했다응오딘지엠은 동생 응오딘 누를 수석보좌관으로응오딘 누의 부인 마담 누를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퍼스트 레이디로마담 누의 아버지는 미국 대사로어머니는 유엔 옵서버로자기의 친형은 후에의 추기경으로다른 2명의 형제들은 지방의 권력자로 임명하였으며사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내각의 주요 직책과 지방 관공서의 요직을 내주었다.

 

2.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창설과 케네디 정부의 고문단 지원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한 미국은 남베트남을 자신들의 반공기지로 만들고자 노력했다미국의 남베트남 정권 지원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와중에 진행됐고응오딘지엠 정권 하에서도 지속됐다이에 따라 남베트남에는 소수의 미군사고문단이 활동했다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막장에 가까운 통치를 통해 이미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특히 가톨릭 우대 정책과 불교도들에 대한 탄압 그리고 전직 베트민 인사들에 대한 구금을 가속화했다그 결과 분노한 민중은 1960년에 군사조직을 창설했는데 그것이 바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다.

 

초기의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목적으로 활동했었다. 1960년에 창설된 베트콩은 과거 프랑스에 협력한 반역자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남베트남군 보다 훨씬 높은 전투력을 보였다거기다 남베트남군 관료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미고문단이 지원한 무기들이 베트콩측에게 넘어갔다베트콩의 활동이 급증함에 따라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군사고문단 지원도 급증했는데특히 존 F. 케네디 정부가 등장하면서 확장됐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부터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했다고문단으로 파견된 병력 중에는 이른바 그린베레로 불리는 대게릴라전 특수부대도 있었다. <베트남 미국의 홀로코스트>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마틴 쉰의 표현을 빌리자면프랑스 베레모에서 미국의 그린베레로 바뀐 셈이다이들은 남베트남군을 지원함과 동시에 남베트남 지역에 있는 소수민족들을 민병대로 훈련시켰다또한 라오스와 캄보디아에서도 활동했다.

 

또한 케네디는 네이팜 폭탄 사용과 인체에 치명적인 고엽제 살포를 허용한 장본인이었다이에 따라 베트콩이 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남베트남의 시골에는 네이팜 폭탄과 고엽제가 살포됐다그리고 미군의 최신식 전투 헬기와 장갑차량 등의 기계화된 전쟁무기들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됐다즉 미국은 베트남에서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벌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 시점부터 동원했다더 나아가 케네디의 최측근인 로버트 맥나마라는 응오딘지엠의 동생 응오딘누를 도와 전략촌 계획을 세웠고이런 전략촌 건설은 남베트남 농민들의 반발을 제대로 샀다그 결과 대다수의 전략촌은 1963년에 베트콩에 의해 파괴됐다.

 

3. 응오딘지엠 암살과 통킹만 사건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트콩들은 남베트남군과의 전투에서 항상 우수한 성과를 올렸고남베트남군은 부정부패와 무능력 그 자체였다그리고 케네디 정부가 지원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독재 정치와 부정부패로 인하여 민중들의 반발을 제대로 사고 있었다특히 1963년 6월 남베트남의 한 승려가 수도 사이공 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하자민중들의 반응오딘지엠 집회도 더 심해졌다응오딘지엠 정권은 반체제 시위를 계엄령으로 대응했고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이들이 구금되고 투옥됐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폭력적이고 부패한 체제에 회의감을 느낀 케네디는 CIA를 동원하여 남베트남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응오딘지엠을 제거해버린다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지만이 정권 또한 쿠데타에 시달렸고정권 전복을 시도한 쿠데타는 1965년까지 지속됐다즉 이렇게 되면 남베트남은 민중 봉기로 무너질 상황이었다이런 혼란속에서도 미국의 지원은 지속되어 1964년에는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가 3만 명을 돌파했다.

 

혼란스러운 남베트남 상황에 우려를 느낀 미국의 린든 B. 존슨 정부는 맥스웰 테일러윌리엄 웨스트모어랜드 그리고 로버트 맥나마라 등과 논의하여베트남 침략전쟁을 시작할 계획을 비밀리에 준비했다그것이 바로 통킹만 사건이다이들의 계획에 따라 1964년 7월 31일 남베트남 공격 보트들이 다낭을 떠나 북베트남 영해에 진입하여북베트남의 섬 혼메(Hon Me)와 혼니우(Hon Nieu)에 상륙했다또 한 이들은 그 전에 라오스에서 비밀리에 공중 작전을 벌였다.

 

작전에 따라 북베트남 영해에 잠입한 미국 구축함과 해군들은 1964년 8월 2일 통킹만에서 1차 교전을 벌였고, 2일 뒤인 8월 4일에는 미국 대통령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통킹만 공격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그 발표에 따르면 2차 공격이 있었다고 했지만이는 미국 측의 자작극이었다즉 여기서 베트남 전쟁의 명분을 만들기 위한 미국 측의 새빨간 거짓말이 주지의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러한 새빨간 거짓말을 한 린든 B. 존슨은 뻔뻔스럽게도 다음 날인 8월 5일 미공군을 출격시켜 북베트남 어뢰정 기지석유 저장소 등 4개소를 공격하고 어뢰정 및 그 밖의 함정 25척을 격침 또는 격파했다이것은 아무런 선전포고도 없이 행해진 미국 측의 침략행위였다이른바 북폭을 감행한 미항공기 중 하나가 격추됐고탈출한 조종사는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혔다이러한 기만과 위선속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1964년 통킹만 사건이었던 것이다.

 

4. 북폭과 미지상군 파병

 

통킹만 사건 이후 남베트남 주둔 미군사고문단의 숫자 또한 계속 증가했고이에 따른 베트콩 측의 대응도 격해졌다. 1964년 12월 사이공 근처에 있던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받아 수십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파괴되는 사건과그 다음 해인 1965년 2월 중부고원지대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그린베레 기지가 베트콩의 공격을 받아 미군 8명이 전사하고 100명이 부상당하자 미국은 이에 대한 엄청난 보복을 준비했다그것이 바로 롤링썬더 작전이었다.

 

롤링썬더 작전은 1965년 3월 2일에 게시됐다미군 항공모함과 비행장 그 외의 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와 폭격기들이 북베트남 전역을 말 그대로 달의 표면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폭격을 감행했다이러한 폭격은 당연히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았으며이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도 급증했다베트남 전쟁에서 최소 200만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민간인 사망자 대다수는 이런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는 북폭 게시와 더불어 지상군 파병을 감행했다베트남의 첫 번째 파병 부대로는 미 해병대가 선택되었다대략 3,000명 정도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 상륙하는 걸로 결정됐다. 1965년 3월 8일 미국 정부는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미 해병대 대원들로 하여금 상륙정에 태워 해안가에 상륙하도록 했다이렇게 하여 1858년 침략자 프랑스 군대가 다낭에 상륙한지 100년 만에 또 다른 외세의 지상병력이 베트남을 침략했다.

 

1달 뒤인 1965년 4월 존슨은 병력 4만을 추가로 파병했고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75,000명으로 증가했다이렇게 해서 남베트남 주둔 미군의 숫자는 1965년 말에 20만으로 증가했으며그 이후에는 더 증가하여최대 병력 54만 9,0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미국의 베트남 침략 전쟁의 발판은 이런 식으로 마련됐고또 전개됐다.

 

5. 결론따라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침략전쟁이다.

 

지금까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시점부터 1965년 린든 B. 존슨 정부가 북폭 게시와 더불어 대규모의 지상병력 파병까지를 알아보았다베트남 전쟁은 이렇게 미제국주의자들의 기만과 위선속에서 계획되고실행된 전쟁이었다미제국주의자들은 민주주의라는 위선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단어를 통해 남베트남 친불 매국노 정권에 대한 지원을 합리화 했다또 미제국주의자들은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우던 호치민과 민족해방세력들을 그저 빨갱이로 몰이하는 철면피스러운 행위를 했다미제국주의자들은 남베트남 민족반역자 정권을 지원하며북폭이라는 천인공노할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게시했다그리고 1858년 프랑스 제국주의 군대가 상륙했듯이다낭에 미제국주의 상륙부대의 주력인 미해병대를 상륙시키는 이미지 매이킹도 시도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베트남 전쟁은 미제국주의자들이 거짓말과 위선 그리고 기만속에서 일으킨 침략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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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전쟁 - 무릎 꿇지 않는 베트남-중국
오정환 지음 / 종문화사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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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들어 한국과의 문화적 교류가 많아진 베트남은 상당히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의 역사는 한국의 고조선과 같은 반랑(Văn Lang)부터 따지면, 대략 4천 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만 반랑(Văn Lang)의 경우 고조선과 마찬가지로 단군신화처럼 연대기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는 빈약하다 할 수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베트남은 유례를 찾기 힘든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2천년 동안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저항해온 역사가 바로 베트남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을 방문했던 윌프레드 버체트 기자는 팜 반 동(Phạm Văn Đồng) 수상과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버체트는 팜 반 동에게 당신들 마음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들을 이렇게 끈질기게 만들지요?”라고 질문을 하자, 팜 반 동 수상의 대답은 명확했다.

 

궁금하면 우리 역사를 한번 보시오. 외국 침략자들에 대한 투쟁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적들은 항상 우리보다 강한 상대였습니다. 자연과의 투쟁도 많았지만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싸워서 이겨야 했습니다. 과거 2,000년에 걸쳐 이런 시련을 겪은 우리 인민들은 어지간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는 신경 체계를 가지게 되었지요. 우리는 외세의 위협에 당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 인민들은 , 또 시작이군!’이라고 말할 정도로 적응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북베트남의 팜 반 동 수상이 대답과 같이, 베트남의 역사는 2천년에 걸친 저항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국에 맞선 베트남의 투쟁은 쯩 자매의 반란부터 시작이 된다. 쯩 자매는 한나라의 지배에 맞서 병사들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전개했었고, 한무제가 보낸 토벌군에 맞서 결사항전 하다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었다. 베트남 저항의 역사 시작점인 쯩 자매는 베트남인들의 마음속에 외세에 대한 항거와 독립 의식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물론 중국의 베트남 지역 지배는 오래됐고, 그 과정에서 지배에 대한 저항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서기 900년대 들어서 응오꾸엔이 이끄는 군대는 바익당 강 전투에서 중국의 대군을 무찌르고 독립국가를 세웠다. 또한 300년 뒤에도 그 바익당 강에서 몽고군의 대함대가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격파됐다. 몽고의 베트남 침략은 12차 그리고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1차 칩입때는 게릴라전으로 몽고군의 지상병력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200년 뒤에는 명나라의 지배를 받았을 때, 레러이(Lê Lợi)가 기나긴 대명항쟁 끝에 명나라의 지배로부터 독립국가를 세웠고, 20세기 미국에 맞선 베트남의 게릴라 전술의 기초가 여기서 탄생했다. 300년 뒤에는 청나라의 대군이 침략했으나, 떠이선(Tây Sơn) 반란의 지도자 응우옌후에(Nguyễn Huệ)이 지휘아래 청나라 침략군을 무찔렀다. 그리고 그로부터 200년뒤인 1979년 이른바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인 중월전쟁이 일어났는데, 베트남은 중국의 침공에 맞서 보조병력만으로 막아내는 저력을 보여주기 까지 했었다. 이러한 역사를 생각해 보았을 때, 베트남의 역사는 중국에 맞선 저항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중국에 맞선 저항만 있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지배 과정에서 중국 문화가 베트남에도 자리를 잡았고, 관습이나 학문 제도, 도량형 등 중국의 영향을 역사적으로 지대하게 받았었다. 중국의 지배와 간섭 그리고 침략 속에서 남부에 있던 강대국 참파와 라오스를 대상으로 정복전쟁을 벌였으며, 참파의 경우 16세기쯤에 베트남에게 사실상 정복당했다. 그 외에도 현재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과 태국하고도 전쟁을 적잖게 치렀으며, 프랑스 식민지 시기 코친차이나라고 불렸던 베트남 남부의 경우 17세기에 베트남 영토로 편입됐다. 물론 이 영토의 경우 베트남 전쟁 이후 베트남과 캄보디아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이번에 읽은 오정환 전 MBC 본부장의 저서 천년전쟁은 말 그대로 중국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저항의 역사를 다뤘다.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책은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인 프랑스와 미국과의 전쟁은 하나도 다루지 않고 있으며, 국내에서 깊이 다루지 않는 역사인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즉 중월전쟁을 다루고 있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중월전쟁 관련 부분의 내용은 다른 파트에 비해 그다지 자세하지 않고, 상당히 짧은 분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베트남의 대중항쟁 2천년 사를 알기에는 상당히 유용한 서적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어볼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베트남 역사에 관심이 많지만, 사실 베트남의 대중항쟁 역사에 대해 그리 깊이 알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읽음으로써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대중항쟁 역사를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중국 침략에 맞선 베트남의 역사가 참으로 놀라웠다. 무엇보다 세계 최강이라고 불리던 몽고군의 침략을 3차례나 받고도 버텨낸 것을 보면,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거기다 베트남 원정에 실패했던 몽골은 이 굴욕을 못 이겨 4차 원정까지 준비했었다. 물론 1294년 쿠빌라이칸이 사망하면서 시도되지 않았다. 이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현재 베트남인들이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현대사에서는 중월전쟁에서 중국까지 이겼으니, 자부심이 한층 더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베트남의 대중항쟁 역사를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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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0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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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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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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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6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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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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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4 1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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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빅 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감독 아담 맥케이(Adam McKay) 2018년 딕 체니(Dick Cheney)의 생애를 다룬 영화 바이스(Vice)’를 제작했다영화 바이스는 2001년 오사마 빈라덴의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이슬람 극단주의자의 테러 공격을 받은 미국은 전역에 비상이 걸리고백악관의 지도부들 또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러나 영화상에서 아주 침착하게이 사건을 대응하며 즐기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 딕 체니였다영화에 따르면 많은 미국인들이 이 딕 체니라는 인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고그가 어떠한 짓을 저질렀는지 자세히 모른다고 한다그렇다면 딕 체니는 어떠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일까?

 

딕 체니는 1941 1월 30일 미국 네브래스카 주에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전개되는 와중이었고그의 부모님은 열렬한 프랭클린 루스벨트(FDR)의 지지자였다어린 시절 그는 성적이 우수했으며정통적인 미국 교육을 받고 성장하였기에미국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이 투철했다그는 1950년대 미국 와이오밍주 캐스퍼에서 자랐는데고등학교 시절 앞으로 아내가 될 여자 린 빈센트 즉 린 체니를 만났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성적이 좋았기에 1960년대 초 그 둘은 예일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그러나 대학에 진학하자 체니는 아주 방탕한 생활에 찌들어음주운전과 패싸움 등등을 하다가 학교에서 퇴학당하고결국 일용직 노동자로 노가다를 뛰게 되었다. 1962년 당시 체니는 아내 린 체니와 사실혼 관계였는데부인 린 체니가 그를 아주 강력학세 갱생시켰다린 체니의 도움으로 방탕하고 술에 찌들었던 생활에서 벗어난 딕 체니는 와이오밍 대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미국 국회의사당을 뽑는 보좌관 시험에 합격했다여기서 만난인물이 이후에 이라크 전쟁을 같이 계획하게 되는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이 격해지면서적잖은 미국 젊은이들이 징병으로 동남아시아 밀림으로 끌려갔다그러나 딕 체니는 대학 진학생에 이미 1965년 정식 결혼까지 한 상태였기에징집을 보류 받을 수 있었고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수 있었다그러나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반전운동이나 기존 보수주의에 대항한 히피(Hippie)에 대해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이들을 비난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이후 위스콘신 대학교에 들어가 박사과정을 밟게 된 체니는 도널드 럼즈펠드 밑에 있으며닉슨 정부 측근들과 인맥을 맺기 시작했다또한 이 과정에서 1970년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공화당 측에 있으면서 활동한 딕 체니는 1976년 카터가 당선된 이후 잠시나마 정치인생에서 정체기를 맞게 되는데, 1978년 와이오밍주 선거에 도전했다다만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이 와서 병원 신세를 졌고연설력도 부족하여 밀리는 상황이었는데그의 와이프가 선거에 나가 유세를 적극적으로 하면서간신히 당선됐다이렇게 해사 1988년까지 체니는 무려 6선에 성공하였다물론 공화당으로써 보수층 지지자들을 끌어들이는 정책들을 얘기했고실행하고자 했다체니의 꿈은 1980년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다시 꽃을 피게 된다. 1970년대는 베트남 전쟁 종결과 더불어 로 vs 웨이드 사건’, 낙태 문제환경 문제 등이 사회적으로 급부상했다물론 딕 체니는 이른바 신보수주의자로서 이런 것들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980년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당선되면서딕 체니의 정치 일생은 다시한번 도약을 한다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하에서 딕 체니는 레이건을 따라 무기 제한법을 막고카터 정부 시기의 친환경 정책들을 폐기 시켰으며로널드 레이건의 중남미 정책을 적극 옹호하고 지지했다당시는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당연히 딕 체니는 로널드 레이건처럼 잔학하고 무자비한 콘트라 반군을 지지했던 것이다그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 있으면서 1987년연 공화당 하원 회의 의장이 되었고그의 아내 린 체니 또한 국립인문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조지 부시(아버지 부시)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국방장관을 하기도 했지만, 1992년 공화당의 빌 클린턴이 당선되자 레즈비언인 딸 메리 체니를 위해서 잠시마나 정치에서 물러나 있기도 했었다즉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물론 그는 기업 하나를 운영하기도 했는데석유 대기업인 핼리버튼의 사장이 된 것이다이후 그는 이 핼리버튼 CEO로 있으면서 이라크 전쟁에서 엄청난 부를 얻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딕 체니를 다시 찾게 된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그가 바로 아들 부시였다아들 부시 또한 딕 체니의 젊은 시절과 상당히 비슷한 막무가내 생활을 했었다아들 부시의 러닝메이트 제의를 수락받은 그는 2000년 조지 부시가 당선됨에 따라 부통령이 되었다. 1991년 걸프전쟁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그는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나자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이후 이라크를 침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이런 과정에서 국제법과 여러 비윤리 비상식적인 행위들을 벌였으며,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당시 딕 체니와 그 일당들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의 명분은 이른바 후세인 정부의 신무기였으나사실 이것은 거짓말이었고 진정한 목적은 미국의 패권 정립과 석유강탈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초기는 미국이 수도 바그다드를 함락시키고 후세인을 체포하면서빠르게 전게 되었으나결국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과 거짓말이 드러나면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이라크 전쟁의 책임으로 부시 임기 말기 민주당 하원의원이 탄핵안까지 내놓는 등 엄청나게 비난받으며 역사상 가장 많이 욕먹은 부통령 중 하나로 남게 되었지만탄핵은 부결되었고부시정부가 임기를 마칠 때까지 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던 딕 체니는 2008년 남오세아티아 전쟁(러시아와 그루지아 사이의 전쟁)에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었다거기다 2015년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것과 그것이 명분 없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았다사실 딕 체니는 남에게 총을 쏘아놓고도 사과하지 않은 인성을 보유한 인물이었는데그런 인성을 가진 그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진실이 드러났음에도 반성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나 그가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0~100만 이상의 민간인이 미군의 폭격으로 학살당했다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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