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닉슨, 1970년대 초 데탕트 시대를 열었던 그는 베트남 전쟁을 확전했고, 칠레에서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1972년 미국 대통령 최초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던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은 소련의 브레즈네프 총리와도 회담을 가지며 이른바 데탕트 시대를 열어갔다그러나 그의 전임자 린든 B. 존슨(Lindon B. Johnson)이 매듭짓지 못한 동남아시아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물론 그는 전임자와는 다르게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이라 하여베트남에서 단계적인 철수를 게시했다그러나 그 과정에서 베트콩을 소탕한다는 목적으로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하고 침략하여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을 확전하고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972년 닉슨은 이른바 데탕트(Détente)를 진행했지만그런 한편 북베트남에 대한 역대급 대규모 폭격을 감행했다이것이 바로 라인배커 작전이었다하노이와 하이퐁을 포함하여 북베트남 전역이 미국 B-52 폭격기의 폭탄세례를 받았다물론 이 최신식 기계가 공격한 곳 대부분은 군사시설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들이 대다수였다결국 이러한 폭격은 제2의 게르니카 폭격이라는 국제적인 비난에 시달리게 되었고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악화되는 영향을 불러왔다특히나 미국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던 북베트남측은 이에대해 강도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닉슨은 결국 1973년 1월 프랑스의 수도 파리에서 북베트남과 평화협정을 맺고미군을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280만이 참전하고 최대 54만 9,000명이 주둔했던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닉슨의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프랑스 좌익성향 단체가 만든 포스터)

 

닉슨이 베트남에서 대량의 학살극을 벌이고 있을 시기 남아메리카 국가중 하나인 칠레에선 세계최초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그것은 바로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통해 칠레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그 정권이 바로 좌파들이 이끄는 살바도르 아옌데 정부였다. 1970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된 아옌데는 곧바로 칠레를 변혁시키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실행했다과거 연합과일 회사(United Fruit Company)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 기업들에 대한 국유화와 각종 생산수단의 국유화가 칠레에서 실행됐다미국 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한 구리광산 또한 국유화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가고 있던 닉슨 정부는 곧바로 아옌데 정부에 대한 정치공작을 게시했다사실 미국은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쿠바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웠을 때곧바로 극우파 망명자들을 모아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다여기에 기본적으로 경제제재도 당연히 단행했다마찬가지로 1970년 아옌데가 정권을 잡자 미국은 경제제재부터 단행했다그리고 CIA를 통해 칠레의 극우파들에게 막대한 정치자금과 흑색선전도 게시했다미국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행위는 이들이 최소한의 도덕성도 무참히 어기면서 시행됐다칠레의 어린이들이 먹는 분유에 대한 경제제재를 시행하여칠레 아동들을 영양실조에 실리게 만들었으며이를 통해 아옌데 정권을 몰아내려했다.

(살바도르 아옌데, 1970년 선거를 통해 집권한 그는 칠레 민중을 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군부 쿠데타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더 나아가 아옌데를 암살하기 위해 온갖 정치공작을 일삼았고칠레의 기득권 세력을 이용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려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옌데 정권은 좌파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대대적인 지지를 받았고민중들은 우익들의 공작에 맞서 자발적으로 공장의 생산을 증가하고생필품의 사재기를 차단하며우익들의 공작에 맞선 집회와 시위를 주도했다즉 미국의 경제제재와 정치공작에도 아옌데 정권의 지지율이 상승한 것이다.

 

이러고 있는 사이 미국은 1973년 1월 베트남에서 철군하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완벽히 패배했다뿐만 아니라 대니얼 엘스버그의 펜타곤 페이퍼 유출과 워터게이트 사건도 터져서 닉슨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비난에 시달렸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을 당시 우리는 중국을 잃었다.”라는 주장을 하며트루먼 정부를 맹비난했던 그는트루먼 못지않은 혹은 그 이상의 반공주의자였다따라서 그는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에 착수했는데그것이 바로 군부 쿠데타였다닉슨 정부는 칠레의 군부 인사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에게 막대한 자금을 풀어쿠데타를 일으켰다그것이 1973년 9월 11일이었다.

(쿠데타군에게 포위당한 아옌데의 대통령궁)

 

닉슨이 주도한 칠레의 쿠데타는 성공적이었다아옌데는 수도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에서 AK-47 소총을 들고 저항하다가 자결했다이렇게 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은 피노체트 정권이 칠레에 등장했다이에 따라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적으로 대규모 학살당했고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고문과 감금 그리고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피노체트 정권은 집권 당일에 3,200명의 민간인을 학살하며 시작했고그의 집권 기간 동안 최소 3만 5,000에서 6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결국 닉슨 정부는 쿠데타라는 아주 부도덕하고 반인륜적인 방법을 통해 칠레에서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켰다그렇다면 왜 닉슨은 이런 짓까지 하며 칠레의 사회주의 정권을 전복시킨 것일까이것은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자 해석이지만얘기하자면 베트남 전쟁에서의 굴욕적인 패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이미 1959년 미국 아래에 있는 식민지 쿠바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됐고, 1960년대 중남미 국가들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 1970년 칠레도 마찬가지였다다른 중남미의 좌파정권들은 CIA의 가벼운 정치공작에 제법 손쉽게 전복시킬 수 있었지만칠레는 아니었다즉 칠레가 제2의 쿠바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닉슨에게 있었던 것이다거기다 국내외적으로 비난받고 규탄 받던 베트남 전쟁은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미국의 패배로 이어지고 있었다따라서 이러한 국제적인 맥락 속에서 닉슨은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쿠데타로 없애고우익 독재정권을 세운 것이다.

(쿠데타쿤과 교전 중이었던 아옌데 대통령)

 

이런 점에서 자칭 데탕트를 주도했던 미국의 닉슨 정부는 매우 폭력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수법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짓밟았다또한 전임자가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B-52 폭격기와 같은 최신식 전쟁기계들을 이용하여 무수히 많은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이것이 바로 미국 닉슨 정부가 저지른 또 다른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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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테러리즘이, 그 뿌리 깊은 기원과 경제적·정치적 발생 요인들, 또 생존과 관련된 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근절되어야 하는, 위험하고 윤리적으로 옹호될 수 없는 현상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국민에게 닥친 인간적·정신적 피해, 무고한 수천 명의 시민이 예기치 못하게 죽은 충격이 야기한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이익을 보았습니까?

 

그들은 극우세력, 가장 퇴보한 우익세력들입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점점 고조되는 저항을 분쇄하고, 지구상에 아직 남아있는 모든 진보세력을 청산하고 싶에 합니다. 그러한 행동을 조직하거나 부추기는 세력은 그 누구든 간에 커다란 오류, 엄청난 불의 가공할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비극은, 정의의 이름으로, 특이하고 기이한 이름의 무한한 정의(Infinite Justice)라는 작전으로, 그만큼 무고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게 될 전쟁의 빌미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며칠 사이 우리는, 그러한 전쟁을 위한 전제, 구상, 진정한 목표, 정신, 조건들이 황급히 만들어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아무도 이것이, 단지 기회만 기다리면서 예전부터 구상해 오던 것이 아니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이른바 냉전종식 이후에도 군사력 증강과 인류의 살해와 말살을 위한 가장 고도의 수단을 계속 개발해 왔던 세력들은, 자신들의 대규모 군비투자가 세계 다른 민족에 대한 절대적이고 완벽한 지배 특권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체제의 이데올로기 주창자들은 자신들 행위의 성격과 이유를 물론 잘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국민을 목표로 한 이번의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테러 공격에 대해 지구상 모든 민족이 충격을 받고, 진심으로 함께 아파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가장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주창자들과 이미 특권을 차지하고 있던 가장 호전적인 매파들은 무한한 군사적·기술적 역량을 갖춘 세계 최강대국의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 국가의 파괴·살상 능력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반면, 침착한, 차분함, 사려 깊음, 자제력은 최저선에 머물렀습니다. 비슷한 특권을 같이 즐기는 다른 부유한 강대국들까지 공모하여, 팽배한 기회주의, 혼돈, 공황상태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이제는 예측할 수 없는 유혈적 결과를 피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군사적 행동이 취해지더라도, 그 첫 번째 희생자는 저발전된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믿기 힘든 경제·사회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 변제 불가능한 외채, 고가의 생필품, 증대되는 자연적·생태적 파국, 기아와 비참한, 그리고 아동, 10, 성년에게까지 나타나는 광범위한 영양실조, 심각한 에이즈 유행, 말라리아, 민족의 전멸을 위협하는 결핵과 여타 전염병들이 그것입니다.

 

심각한 세계경제워기는 이미 경제 강대국들의 중심부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그 위기는 이러한 새로운 환경 하에서 필연적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며, 절대 다수 사람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부담이 될 때 그 위기는 혼돈, 저항, 통치불능상태를 수반할 것입니다.

 

그 비용 또한 부국들에게 지불될 수 없는 선이 될 것입니다. 앞으로 수년 동안은 환경과 생태에 관해 거론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자연보호 프로젝트나 그 연구결과를 거론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주제들을 거론할 공간과 기회가, 아직 시작하지 않은 군사행동, 전쟁, 범죄행위, 이른바 무한한 정의에 모두 사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6시간 전에 미국 대통령이 의회에서 행한 연설을 들으니, 도대체 무슨 희망이 남아있을지 의심스럽습니다. 나는 그 연설문 작성자를 향해 형용사나 수식어 또는 다른 도발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러한 용어는 전혀 불필요하고, 현 시기처럼 긴장되고 심각한 시기가 사려 깊음과 침착함을 권고하고 있는 때에 전혀 시의적절하지도 못합니다. 나는 모든 걸 말해 주는 짧은 몇 문장만 인용하겠습니다.

 

1. “우리는 필요하다면 모든 전쟁무기를 사용할 것이다.”

 

2. “미국인들은 한차례의 전쟁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례가 없는 장기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3. “전 지역의 모든 국가는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라.”

 

4. “나는 군에 경계정보를 발령시키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미국이 행동을 취하고, 당신들이 우리를 자랑스럽게 만들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5. “이 전쟁은 세계의 전쟁이며, 문명의 전쟁이다.”

 

6. “나는 장기전이 될 것에 대비해서 당신들의 인내를 요구한다.”

 

7. “우리 시대의 위대한 업적과 모든 시기의 위대한 희망은 이제 우리 손에 달려있다.”

 

8. “이 전쟁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중립이 아님을 알고 있다.”

 

나는 쿠바 시민들 모두에게, 앞에서 언급된 문장들에 담긴 사상에 대해 깊이, 그리고 조용히 생각해 볼 것을 당부 드립니다.

 

당신들은 우리 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 아니면 테러리스트 편 가운데 한 편이다.” 세계 어느 국가, 심지어 거대한 강대국들조차 이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전쟁이나 공격의 위협으로부터 빠져가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무기라도 사용할 것입니다.” 그 무기의 윤리적 가치나 치명적인 위험 여부와는 관계없이 모든 사용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습니다. 핵전쟁, 화학전, 생물학전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이 전쟁은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 될 것이다. 역사상 전례가 없이 오래 걸릴 것이다.”

 

이 전쟁은 세계의 전쟁이자 문명의 전쟁이다.”

 

마지막으로, 거의 종말론적 모험의 시기처럼 전쟁 전야에 행해진, 이전의 정치적 연설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던 고백, “이 전쟁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중립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이 말은 놀라운 주장입니다. 지금 막 시작하려 하는 기이한 성전(?)에 참여하는 현실의 적들, 혹은 가상의 적들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느 쪽 광신주의가 더 강력한지 도저히 판단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목요일에, 미국 의회에서는 국제법이나 국제기구와 관계없이 배타적인 힘의 법칙을 갖게 될 세계군사독재라는 이념이 개진되었습니다. 이번 위기에서 철저히 무시당한 유엔은 그 어떠한 권위나 특권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오직 단 한 명의 보스, 한 명의 판사, 하나의 법만이 존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미국정부 아니면 테러리즘 둘 중 한편과 동맹관계를 맺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쿠바는 테러주의 행동으로부터 가장 심각하고 가장 오래 고통을 받아 온 국가라는 사실에 근거한 도덕적 권리 위에서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합니다. 쿠바국민을 협박할 수 있는 위협이나 권력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국민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현재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쿠바는 예측할 수 없이 참담한 결과를 가져올 전쟁을 피해야 할 필요성을 재차 강조합니다. 연설자 부시 대통령 자신이 인정했듯이 그 전쟁이 어떻게 될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쿠바는 테러리즘의 완전소멸을 위해 모든 국가들과 기꺼이 협력할 의사가 있음을 재차 밝힙니다.

 

미국의 우방국들은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미국에 조언해야 합니다. 저 멀고 고립되고 접근 불가능한 오지에, 그 유령이 어디에 있는지, 심지어 과연 있기는 한지도 잘 모르면서, 또 미국이 죽이려는 민족이 미국에서 죽은 무고한 시민들의 죽음에 실제로 책임이 있는지도 잘 모르면서, 마치 유령과 싸우는 것처럼, 미국정부가 젊은 미국 병사들을 내던져 버리지 못하도록 조언해야 합니다.

 

쿠바는 결코 미국민의 적으로 스스로를 천명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민은 오늘날, 증오와 복수심을 유포하기 위해 고안된 전례 없는 홍보 캠페인에 노출되어, 심지어 평화를 고무시키는 음악마저 금지시켰습니다. 이와는 달리 쿠바는 그 음악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쿠바 어린이는 선포될 유혈 전쟁이 계속되는 한 평화를 위한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쿠바 영토는 미국민을 향한 테러행동을 위해서는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국민을 향한 그러한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연대감을 표명하고, 또한 평화와 평온을 주장합니다. 언젠가 그들은 우리의 행동이 옳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공격을 받으면, 우리는 독립과 원칙, 그리고 우리의 사회적 업적을 명예롭게 지키기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다하여 방어할 것입니다! 미국이 공격할 명분을 조작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미국이 필요한 모든 무기를 사용할 전쟁에 관해 언급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런 경험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시에 기억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40여 년 전에, 수백 가지 전략·전술 핵무기가 쿠바를 목표로 했지만, 우리 동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처럼 영웅적인 민족의 후선이며, 우리의 애국적 혁명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합니다. 지금은 침착과 용기가 소중한 시기입니다.

 

세계는 이러한 사실을 점점 더 잘 알게 될 것이고, 지금 막 겪기 시작한, 심각하고 위협적인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를 높여갈 것입니다.

 

쿠바국민에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긍심과 결연함을 가지고 우리의 의지를 선포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사회주의가 아니면 죽음을!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2001922

수도 아바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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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after 4,000 years of struggling against nature and foreign invaders and the last 25 years, prior to the revolution, of struggle against French colonialism. I don’t think that the people of Vietnam are about to compromise in any way, shape, or form about the freedom and independence of their country, and I think Richard Nixon would do well to read Vietnamese history, particularly their poetry, written by Ho Chi Minh.(베트남 인민은 4천년 동안 자연과 외국 침략자들을 상대로 줄기차게 싸워왔습니다. 프랑스와 식민투쟁에서도 이겼습니다. 베트남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스스로 쟁취해나갈 것입니다. 리차드 닉슨이 베트남 역사와 베트남의 시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호치민이 쓴 시를 잘 읽어 음미했으면 합니다.)”

 

위에 인용한 구절은 1972년 북베트남을 방문한 반전운동가이자 여배우인 제인 폰다(Jane Fonda)가 했던 연설이다. 베트남 전쟁이 사실상 미국의 패배로 끝나가던 1972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를 목표로 함과 동시에 이미 베트남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침공하여 수십만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민간인을 대량 학살하는 반인륜적 전쟁범죄를 자행했다. 이미 구정 공세를 통해 미국 내에서 격해진 반전운동은 미국의 수많은 젊은이들과 지식인들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도록 만들었고, 미녀배우로 유명했던 제인 폰다 또한 그 중 일부였다.

 

반전운동이 격해지는 과정에서 반전 시위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또 다른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이자 현재도 국부로 평가받고 있는 지도자 호치민(Ho Chi Minh)이다. 반전운동 시위대들 중에는 적잖은 이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다시 바라보게 되었고, 당시 미국에 맞서 반제국주의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호치민이라는 인물 또한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1971년 펜타곤 직원인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가 미국의 1급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를 세상에 폭로하면서 그 전쟁의 추악함은 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의 민중과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은 호치민과 그가 조직한 베트민(Viet Minh) 뿐이었다. 이처럼 미국은 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을 방해하기 위해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었던 호치민은 베트남의 상징과도 같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1890519일 응에안 성에서 태어난 그는 젊은 시절부터 반프랑스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1911년 베트남을 떠나 전 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경험을 쌓았다. 1919년 그는 베르사유 회담 당시 베트남 인민의 기본적인 권리를 호소하기 위해 파리 베르사유 궁전까지 가서 이를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이후 레닌의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되었으며, 모스크바로가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다. 그리고 그 이후 중국에 가서 활동하며 1930년 홍콩에서 현재의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30년간의 해외생활을 보냈고, 30년 동안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에 맞서 독립은 쟁취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는 국제정세를 읽고 이를 잘 이용하는 실용적이고 탁월한 지도자였으며, 무엇보다 30년 동안의 해외생활을 했던 인물이었기에, 1949년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한 것이 첫 해외방문이었던 마오쩌둥하고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인물이었다. 이번에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빌려서 읽게 된 세계 지도자 열전 시리즈 중 하나인 호치민에서는 그가 미국에 있을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데,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호치민은 주로 주방 요리사나 식당의 심부름꾼 노릇으로 연명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가 받은 인상은, 미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들이 향유하는 자유의 정도가 각자의 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 호치민 p.31

 

194130년 만에 베트남에 돌아온 호치민은 자신의 해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베트남을 침략한 일본에 맞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무장투쟁에 나섰는데, 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 독립 동맹 즉 줄여서 베트민이었다. 당시 호치민은 중월 국경지대인 까오방의 한 동굴에서 혁명투쟁을 시작했는데, 책에 나온 그 내용은 상당히 감동적이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곳의 밤은 지독히 추웠다. 너무나 추워 잠조차 들 수 없는 밤이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장작불을 피워놓고 그 주위에 웅크리고 앉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혁명의 과정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호치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을 지새웠다. 그는 또한 자기에게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나타내고자 인근의 산봉우리를 카를 마르크스 산정이라 이름 붙이고, 근처의 개울을 레닌 시냇물이라 명명했다.”

 

출처: 호치민 p.65

 

호치민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식민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에 맞서 싸웠으며,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다시 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어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는 온갖 화력과 병력을 동원하여 베트민을 공격했지만, 호치민과 그를 따르는 위대한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은 게릴라전으로 맞서 싸웠으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The Battle of Dien Bien Phu)에서 프랑스군의 최정예 병력 11,721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디엔비엔푸 전투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면서, 프랑스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결국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제네바 회담 이후 남베트남에 들어선 국가는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었고, 1949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가 내세웠던 바오다이 황제(Bao Dai)의 베트남국(States of Vietnam)을 계승한 나라였다. 단순히 바오다이 황제에서 그가 수상으로 내세웠던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 대통령이 되었을 뿐이고, 프랑스 대신 미국이 그 나라를 지원했을 뿐이었다. 책 또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결국 베트남 전쟁의 명분에서 당연히 호치민과 공산당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베트남 전쟁 또한 호치민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 책에는 베트남의 역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분석이 인용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실상 베트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3개월 전에 이미 두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북부의 공산주의 세력과 남부의 프랑스 세력이 그러했다. 이후의 대립 투쟁은 궁극적으로 거기에 기초하여 전개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처: 호치민 p.90

 

즉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 또한 이런 맥락이 존재하는 것이며, 호치민이나 북베트남 공산당 그리고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The National Liberation Front of South Vietnam)은 프랑스에 이어 미국에 빌붙은 민족반역자들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본질이다. 심지어 이 책은 미국에서 열전 시리즈로 만들어 진 것이며, 미국인의 시각에서 보아도 베트남 전쟁 자체가 결과적으로 명분이 호치민과 북베트남 공산당에게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수백만이나 되는 베트남인들을 폭격과 고엽제 투하로 학살했다는 점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기에, 당연히 지금까지도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엄밀히 따지자면, 어린 시절 읽게 되는 위인전에서 벗어나 인물의 생애를 보다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 중 하나다. 물론 미국에서 출판된 책이기에, 다소 미국 편향적인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이번에 읽은 호치민의 경우에도 현재는 과장으로 드러난 토지개혁 10만 처형설이 그대로 언급되긴 하지만, 내용 자체는 대체로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술됐다. 물론 북베트남 정권의 토지개혁은 호치민 스스로가 강도높은 자아비판을 했고, 여러 연구와 베트남측 문서가 공개되면서 희생자 수치가 10만 명이 아닌 3,000명에서 15,000명사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 책이 나온 연도가 냉전이 끝나던 1990년이라는 점과 다소 미국 우파적 시각에서 서술된 점을 고려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호치민은 한 평생을 베트남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바친 위대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항일, 항불 그리고 항미투쟁을 전개한 구국의 80년 생애를 보냈으며, 미국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계승한 공산당 정치인들과 민중은 6년간의 항전끝에 베트남의 통일을 이룩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투쟁적 생애가 베트남 인민들로 하여금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준다. 책 마지막 구절에 나온 내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겠다.

 

호치민은 살아생전 전쟁의 끝맺음을 보지 못했다. 196993, 그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여하튼 그는 두 대륙에 걸쳐서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셈이다. 그는 1966년의 라디오 대담에서 스스로 말했듯이 자신의 전 생애를 조국의 자유화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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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은 한국 현대사의 시작점을 알리는 시대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 한반도는 북쪽 지역에는 소련군이 남쪽 지역에는 미군이 들어와 38선을 기점으로 사실상 남북 분단됐다. 물론 이 시점까지만 해도 남과 북이 왕래할 수 있는 길은 있었으나, 1948년 남북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러한 길까지 막혔고, 이는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이 입성한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948년에 수립됐다.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됐고, 북한하고는 다른 이른바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른바 자유주의 국가(물론 자유주의 국가도 아니지만)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정부수립 과정과는 달리 남한에서는 이대올로기적 대립과 갈등이 표출되었는데,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김두한과 같은 우익깡패 조직들이나 족청 그리고 서북청년단 같은 이들이 무차별 테러리즘을 선보였다. 독소전쟁 초기 소련을 침공했던 히틀러 파시스트 군대 중 그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폭력을 휘둘렀는데, 그런 역할을 바로 서북청년단이나 이범석의 족청 그리고 김두한의 우익깡패조직들이 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지원을 받은 이승만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의 주된 지지층은 한민당과 같은 지주계급으로 친일적 성향을 상당히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식민지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정국 초기 가장 먼저 움직인 세력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였다.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걸쳐 활동을 하며 해방 정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했다. 그러나 98일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가 이끄는 미군이 한반도 이남에 상륙하면서, 이른바 맥아더 포고령이 한반도 이남 전역에서 실행이 되었는데, 이는 미국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써 들어온 것을 뜻했다. 당시 미군정의 포고령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미군은 점령군의 지위로 들어오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형이나 그 밖의 형벌에 처한다.

경인 지구에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통행금지를 실시한다.

 

따라서 점령군으로서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은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직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군은 여운형이 선포한 인공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 어느것도 인정하지 않고 일제의 통치 기구를 이용했다. 미군정은 일제강점기 시설 부역한 경찰을 찾아내 다시 경찰로 활동하게 해 경찰 간부 대부분을 일제 경찰 출신으로 채워졌으며,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이나 하판락 그리고 간도 특설대 대장이던 백선엽 등이 미군정에 빌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진우가 창설한 극우익성향의 한민당 또한 미군정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에 이른다.

 

미군정이 실행된 지 1달 뒤인 19451016일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 끝에 이승만이 귀국했는데, 사실 이승만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시점부터 태평양 전쟁 총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에게 강력한 반소반공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반공주의는 더글라스 맥아더로 하여금 그를 존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이승만은 해방 후 일본 도쿄에서 미군정사령관인 하지를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지원을 받아 미군 C-47 항공기를 타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한민당 측에선 그를 환영하는 환영식을 아주 성대하게 열어주었다. 이를 통해 이승만은 미군정과 한민당 그리고 친일경찰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정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놓고 회담을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모스크바삼상회의였다. 여기서 소련은 한반도의 즉시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이런 사실은 반대로 왜곡되어 국내에 보도되었다. 그 결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소련의 입장(조선의 즉시 독립)을 지지했던 박헌영 측의 조선 공산당은 매국노로 몰리고, 이에 덩달아 이승만과 김구는 연합하여 반탁운동을 벌였다. 이후에 신탁통치 정정보도가 있었지만 반탁운동은 친일파민족반역자들에게 천재일우의 기회였고, 이 반탁시위는 사실상 해방 정국의 한 면을 장식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는데, 양측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전라도 정읍에 내려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해야 한다.”는 분단론적인 발언을 했으나, 이는 역으로 미군정의 반발을 사서, 여운형과 김규식이 국내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좌우합작운동은 남한내의 좌우갈등을 극복하고, 한반도에 남북 통일정부를 수립할 목적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이승만 지지파들의 노골적인 방해로 실패로 끝났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에 불만을 가진 민중들은 조선 공산당과 더불어 항쟁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이었다. 대구 10.1 항쟁은 미군정이 탱크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고, 적잖은 사람들이 미국과 이승만 지지세력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됐다. 이 시기 남한 민중의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했는데, 이러한 목소리를 막은 것은 결국 미국이었고, 미국은 친일파들을 이용하여 민중을 적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좌우합작운동이 실패로 끝나는 과정에서 이승만에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이 바로 19473월 트루먼 독트린이 선언된 것이다. 당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국가 그리스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세력간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이 내전의 성격은 서방의 지원을 받았던 이들이 과거 나치 협력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민중항쟁적인 성격이 아주 강했다.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미국은 그리스에 고문단과 군사원조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승만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트루먼 독트린은 반공정책이었고, 이승만이 추구하는 것과 일치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이승만을 보다 더 지원하게 된 것이다.

 

1947년부터 확실한 지원을 받게 된 이승만은 여운형 암살 이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박차를 가했고, 미군정은 유엔에게 한국의 단독정부 수립 선거를 진행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민중항쟁이 일어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광란의 학살극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미 10만 명 가까이나 되는 민간인이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학살당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해방 이후 미국과 이승만의 정책은 폭력적이고 반민중적이었으며 제국주의적이었고 광란의 대학살극이자 유혈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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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People : 케네디 Why? 인물탐구학습만화
박민정 지음, 이두원 그림, 윤재웅 감수 / 예림당 / 201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미국의 대통령 존 F. 케네디에 대해 제법 관심이 생겨 Why 시리즈에서 출간한 어린이 위인전을 읽었다. 물론 케네디에 대해 알기 위해선 푸른숲 출판사에서 출간한 케네디 평전 I,II권을 읽는게 맞지만, 그냥 입문하는 차원에서 읽어보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인기가 많은 인물이다. 비록 그는 2년이라는 아주 짧은 재임 기간을 가진 대통령이지만, 그가 추구했던 뉴프론티어 정신은 현재 미국인들에게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지금이야 코로나 바이러스로 항로가 차단되어 가기 힘들지만, 뉴욕의 국제공항 이름이 존 F. 케네디 국제공항이다. 나 또한 3년전 미국여행을 여기서 시작하여 1달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케네디는 현재 미국에서도 인기가 많다.

우선 이 책에 대해 얘기하자면, 뭐 전형적인 스트레오타입의 위인전이라 할 수 있다. 성실함, 독서를 좋아하고 꾸준함, 배려심 깊음, 도전적 인물 그리고 공부잘하고 똑똑한 인물 등의 긍정적인 측면으로 그려지는 위인전이니 솔직히 전형적이다 못해 다소 지겨운 레파토리를 보는 느낌이었다. 위인전이니 당연히 부정적인 행적은 언급이 안되거나 각색되어 표시되는데, 특히 케네디에 대한 위인전은 그것이 더더욱 많이 느껴졌다.

우선 그의 가족에 대한 얘기가 그렇다. 위인전에선 성실한 리더십의 지도자형 생애를 각색하기 위해 케네디의 9남매 부모님이 엄청나게 자상하고 헌신적으로만 그려진다. 물론 똑똑한 케네디의 남매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예전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나왔듯이, 이는 로즈마리 케네디의 이야기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케네디의 아버지는 그의 여동생 로즈마리 케네디를 지적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가문의 수치로 여겼다. 그리고 그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가두어 버렸다. 심지어 가문의 수치로 여겨 학교도 안보냈고,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1940년대 전두엽 절제술을 했다가 그나마 갖고 있던 지능과 언어능력을 모두 상실했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계의 길을 걸었던 케네디를 위해 가족은 로즈마리를 정신병원에 보냈고, 이 사실을 철저히 숨겼다. 가족에게도 버림받은 로즈마리는 2005년 1월에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책에서 0.1%도 언급되지 않으며, 여동생을 표현한 그림은 나와도 자세히 소개되지 않는다.

케네디의 아내 재클린 케네디에 대한 각색도 너무 우습기 짝이 없었다. 재클린 케네디는 화려한 미모와는 달리, 사치행각이 어마무시한 인물이었다. 그녀의 사치행각은 태생적으로 부유한 집안인 케네디마저도 경악을 했을 정도였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트를 달리는 남자‘에서도 아주 상세히 소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화려한 패션감각과 문화예술의 확산으로 각색되어 나온다.

마지막으로 더 비판할 것을 뽑자면, 어린시절에 대한 필요이상의 내용 할애와 반공주의 미화를 들 수 있다. 우선 이 위인전은 필요이상의 어린시절 내용을 할애했다. 그냥 책의 절반이상이 어린시절 내용이다. 물론 위인전이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각색되어 많이 포함할 수 있다. 그러나 케네디의 중요한 내용은 그가 정치를 하던 시절과 대통령이 된 시절이다. 대통령때 했던 행적과 정치인 당시 그의 내용은 너무 축약된 느낌이다. 즉 찬양하는 책을 만드려면 그의 정치행적을 보다 강화해야 했는데,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공주의에 대한 지적은 여기서 언급하자면, 그의 실책과 과오가 은근슬쩍 덮어진다. 대표적으로 쿠바 침공과 미사일 위기에 대한 내용이다. 1961년 피그스만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침략행위였다. 책에서 정상적인 집단으로 규정되는 쿠바 망명자들은 바티스타 정권 시기 미국에 부역하여 인민을 착취하던 압제자들이었다. 이들이 쿠바 혁명 이후 피델 카스트로가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자, 이들은 미국으로 도망쳐 CIA로부터 훈련을 받아 쿠바 전복을 위해 준비했었다.

케네디의 전임인 아이젠 하워는 실제로 쿠바 사회주의 정권 전복 훈련을 실행했고, 실제로 시도할 계획이었다. 이는 케네디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그 또한 미국의 자유주의를 숭배했고,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 보여줬다.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한건, 카스트로의 도움 요청도 있었지만 미국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겨냥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터키에 핵미사일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즉 이것이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위인전에선 이런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나는 한국 사회에서 여러 인물들에 대해 위인전을 쓰는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위인전에 나온 인물들이 과연 실질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지는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되는 작업이다. 나 자신은 사회주의자이지만, 한국에서 백범 김구나 안창호 혹은 한국전쟁에서 활약한 김영옥과 같은 우익 계열 인물이 위인전이나 평전이 나오는거 자체엔 반대하지 않지만, 객관적인 시각에서 위인이라고 생각할지에 대한 문제는 별개라 생각한다.

즉 그러한 입장에서 미국의 대통령 케네디나 닉슨, 레이건, 클린턴, 부시 그리고 오바마와 같은 인물을 평가한다면, 나는 이들이 매우 잘못된 인물이고 비판받아 마땅한 제국주의자들이라 생각하며, 따라서 위인전에 등장하기에 너무나도 부끄러운 인물들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비판이 필연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책에서 미화되는 케네디의 정책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케네디는 미국 민주당 계열에게 부강한 미국과 약자를 위한 미국을 꿈꿨던 걸로 극찬받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선 침략자였고 범죄자였다 생각한다. 우선 앞에서 언급한 쿠바의 사태가 그렇고, 책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베트남 개입이 그렇다. 케네디는 베트남에서 반민중적인 친미정권인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다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온갖 반인륜적 전쟁범죄가 베트남 민중들을 대상으로 자행됐다.

이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하고 구금했으며, 조금이라도 자신의 정치견해와 맞지 않으면 탄압했다. 1963년 사이공에서 한 승려의 분신자살은 그 체제가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한 체제였는지를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은 사건이다.

책에선 전혀 언급되지 않은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도 사실 케네디의 작품이었다. 일제시기에는 친일 해방 이후 남로당 경력이 있던 박정희의 경력을 알았던 케네디는 그를 의심했지만, 박정희의 신하적 충성을 보고 한국을 반공주의 국가의 보루로 만들었다. 그 악랄한 박정희를 이용해서 말이다. 그 결과 한국은 극단적 반공주의라는 후유증에서 못벗어난 사회가 되어 버렸으며, 공산주의의 ‘공‘자와 사회주의의 ‘사‘자만 나와도 탄압과 검열이 들어가는 매카시즘 국가가 되고 말았다.

이제 케네디에 대해 결론 내릴 차례다. 이러한 사실관계를 생각해보았을때, 전쟁범죄자이자 반공주의자인 케네디는 아이들에게 위인으로서 존경받기에는 너무나도 낯부끄러운 인물이다. 이 책은 그런 인물을 리더십이나 근면성실 그리고 인재인 정치인 및 대통령으로 미화한 책이다. 그렇다고 미화를 하면서 인물을 제대로 다룬 것도 아니라 부족한점도 많다. 이런 점을 생각했을때, 이 책은 그냥 입문서로도 부족한 삼류위인전일 뿐이다. 뉘른베르크법이 적용된다면 전범으로서 재판에 서야할 인물 미화는 그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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