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의 해체는 냉전의 종식을 의미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이래로 미국과 소련의 대립체제였던 냉전은 사회주의 진영이 무너지거나 자본주의적 대안을 받아들이면서 사라졌는데, 이는 현실 사회주의권 중 하나였던 북한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북한은 온갖 자연재해와 UN의 경제제재 그리고 김일성의 사망을 거치면서 경제가 매우 열악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다.

 

1990년대 당시 고난의 행군으로 30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최근 통계 및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사자의 수치는 43만 명이라고 한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사후 아들 김정일이 북한의 권력을 계승한 이후인 1999년에 종결되었다. 그러나 이 고난의 행군이라는 명칭은 그 이전부터 사용되었던 명칭으로 북한의 초대 지도자인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항일 유격대를 이끌었던 김일성은 1938년과 1939년 대략 1년간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행진을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었다.

 

현재 우리가 아는 북한의 김일성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시작되던 시점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항일투사의 삶을 걸었던 인물이다. 김일성은 1932년 봄에 자신의 첫 번째 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에 나섰다고 한다. 서대숙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시기 김일성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수백 명의 한인 빨치산들이 1937년과 1940년 사이에 만주 및 북한에서 있었던 일본군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바 있다.”라고 서술했다. 또한 역사학자 한홍구도 김일성이 매우 명성이 높은 항일투사였으며, 1930년대 시기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이 국내에서 명성을 떨친 것은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인 1937년 이른바 보천보 전투를 감행하면서 부터였다. 물론 보천보 전투 그 자체는 김일성 본인이 자서전 세기와 더불어에 표현했듯이, 전투성과로서는 보잘 것 없는 것이었지만, 그 어려운 시기에 국내로 진격하여 유격전을 전개한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던 전투였다. 이 소식은 당시 동아일보를 통해 크게 보도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 김일성은 항일투사로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194510월 소련군정 사령관 치스차코프의 지원을 받아 평양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김일성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 이유는 전설적인 인물 김일성이 너무나도 젊었기 때문이었다. 즉 이 시점에서만 보더라도 김일성은 분명히 전설적인 항일영웅으로써 명성을 떨쳤던 것이다.

 

1937년 보천보 전투를 치른 이후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간삼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중일전쟁 개전 이후인 1938년 일본군이 이들에 대한 토벌을 강화하면서 김일성과 그의 항일 유격대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37~38년 동북항일연군은 동만주와 남만주 그리고 북만주 각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당시 동북항일연구의 규모는 1,850명이었는데, 수많은 전투를 치르면서 이들 중 상당수가 희생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의 억압과 회유에 못 이겨 전향서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중일전쟁 개전 초기는 김일성과 항일 유격대에 있어 아주 힘든 시기였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해보았을 때, 김일성 휘하의 항일 유격대가 얼마나 열심히 항일투쟁을 했는지 짐작을 해볼 만하다.

 

이와 더불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토벌작전도 날이 갈수록 혹독해졌다. 일제는 집단부락을 건설하여 유격대를 민중들로부터 격리시켰고, 끈질긴 추격 작전으로 유격대원을 고전하게 만들었다. 특히 영하 수십도로 내려가는 겨울이 되면서 투쟁은 더 힘들어졌다. 193812월부터 다음해인 19393월까지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의 대규모 동계 토벌작전을 피해 힘겨운 행군을 계속해야 했는데, 이 과정이 바로 고난의 행군인 것이다. 대략 100여 일간 계속된 행군 속에서 김일성 부대는 영하 40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추격을 피하며 전투를 치렀다. 적잖은 사상자가 속출했지만, 궁극적으로 김일성 부대는 창바이현 북대정자에 이르러 일본군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쳤다.

 

와다 하루끼가 집필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에 따르면, 이 고난의 행군에는 다수의 소년대원들도 참가했다고 한다. 즉 김일성의 경호대원 가운데는 소년대원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이들 소년대원과 김일성 사이에는 매우 굳건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고 전해지며, 부족한 식량을 서로 나눠먹었다는 회상이 많다고 한다. 이때의 경호대원이나 소년대원으로는 10대였던 리을설, 리두익, 김철만, 전문섭, 김익현, 조명선, 오재원, 리종산 그리고 리오송 등이 있다. 이들이 바로 북한 정치에서 만주빨치산파로 남은 사람들이다. 즉 북한 정권 초기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들은 김일성이 항일투쟁 과정에서 이러한 관계를 맺고 있던 이들이었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3910월부터 19413월까지 관동군과 만주군 그리고 경찰대로 구성된 75,000명의 병력을 동원한 토벌작전을 수행했는데, 여기에는 김일성의 부대를 토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북한의 김일성이 1930년대 만주에서 얼마나 가열차게 항일투쟁을 전개했는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김일성이 전설적인 항일영웅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 근거가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추격을 피해 김일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소련으로 넘어가 88특별여단에 배속되었지만,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김일성의 항일전력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참고문헌

 

한국전쟁의 기원, 브루스 커밍스, 김자동(), 일월서각, 1986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와다 하루끼, 이종석(), 창비, 1992

 

한국의 레지스탕스, 조한성, 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끼, 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 박찬승, 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브루스 커밍스, 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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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5.18 광주민주항쟁 41주년입니다. 우리는 광주에게 참으로 많은 빛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반공주의적 폭력에 맞서 끝까지 저항했던 이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1980년 5월 18일 대규모의 공수부대와 군사병력을 투입했던 전두환 일당은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었고 수백 수천명을 죽거나 다치게 했습니다. 자국민에게 곤봉을 휘두르고 착검한 M-16 소총으로 찔러죽였으며, 총탄도 난사했었습니다.

1980년 광주의 비극은 단순히 일회성 사건이 아닙니다. 해방 이후 이승만과 미국이 저질러온 대구 10.1 항쟁과 제주 4.3 항쟁, 여순민중항쟁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 수십만을 무차별 학살한 국민보도연맹 학살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역사가 반복된 것입니다.

특히나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80년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는 베트남 전쟁에서 훈련된 지휘관들이었고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보았을때, 광주의 비극은 베트남 전 당시 한국군의 살인적이고 파괴적인 군사작전과 분명히 밀접해있습니다.

오늘만큼은 이 광주민주항쟁의 투사들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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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5-18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유족들을 포함하여 후손들이 앞으로 해야할 일이 참 많이 남아있다고 느끼는 날입니다.

NamGiKim 2021-05-24 00:1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테레사 2021-05-18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 속의 청년은 어찌되었을까요? ㅜㅜㅜㅜ

NamGiKim 2021-05-24 00:15   좋아요 0 | URL
살아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순국하셨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마음이 아프죠.

행인96 2021-05-23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어떻게 갈수록 광주항쟁을 왜곡하고 당시 항쟁에 참여했던 시민들과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사람들과 그 주장들을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것 같아 머리가 아픕니다.. 이 사람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NamGiKim 2021-05-24 00:14   좋아요 1 | URL
그 북한군 개입을 운운하는 지 모씨의 정신병자 같은 소리는 자세히 생각해보면 국민을 바보천치로 아는거죠.
 

19361212일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Chiang Kai-shek)가 시안(Xian)에서 자신의 휘하 병력에게 체포되어 구금되는 일이 발생했다.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의 체포를 주도한 이는 바로 만주 지역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쉐량 즉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구금한 장학량이 그에게 요구한 것의 핵심은 바로 이거였다. 바로 일본에 맞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해서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1920년대 중국은 손문의 주도아래 제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었다. 그러나 제1차 국공합장은 1925년 손문의 사망과 더불어 장제스가 반공주의 노선으로 돌아서면서 결렬됐다. 당시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대립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장제스를 주축으로 한 우파가 공산당의 출출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영향력 배제를 요구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국민당이 공산당에 대한 탄압을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 19263월에 일어났다. 그 사건이 바로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중산함의 회항을 공산당의 반란음모로 규정하고 광주(광저우)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지휘관 이지룡을 체포한 뒤 보로딘을 비롯한 18명이 소련 고문단 철수를 요구했었다. 중산함 사건을 시작으로 장제스는 국민당 정부 안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장제스 정권의 공산당 탄압은 1927년에 들어 극심해졌다. 217일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는 저장성 성도인 항저우를 점령했고, 공산당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러자 공산당의 지원을 받는 상하이 노동조합은 상하이 함락을 염두에 두고 총파업을 개시했는데, 이후 장제스는 4.12 쿠데타를 획책하여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 및 학살을 자행했다. 장제스의 4.12 쿠데타 이후 3주 동안 최소 1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는데, 이것은 마오쩌둥을 포함한 공산당원들이 홍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제1차 국공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홍군 근거지를 건설하고 정강산에서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정강산 투쟁이었다. 홍군은 농촌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나갔지만, 그만큼 국민당의 포위 및 전투도 격렬해졌다. 국민당군의 포위전은 제5차 초공전까지 진행되었다. 4차 초공전의 경우 장제스의 경우 최소 4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여 중화 소비에트에 대한 공세를 감행했다. 1933년에 있던 5차 초공전에선 장제스는 나치 독일의 저명한 군사전략가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kt)를 군사고문으로 초빙하고, 미국으로부터 5,000만 달러의 차관을 얻어 전쟁비용을 마련했으며, 100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이른바 토치카 작전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국민당군의 포위 믹 군사 작전으로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19341016일 강서성과 서금을 포기하고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은 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군사작전에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20세기 전쟁사에서 상징적인 작전인 대장정(Long March)이다. 마오쩌둥 휘하의 10만 군대는 1년간의 대장정을 거치며 군대가 8,000명에서 1만 명으로 급감했다. 당연히 수백대의 항공기를 동원한 국민당군의 공격과 추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홍군은 다두허 도하 작전이라는 역사적인 기적을 창조해냈다. 이는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에 상세히 나와 있다. 이와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은 민심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 이후에도 중국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의 추격과 군사적 압박은 지속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를 계기로 부르주아 계급을 포함한 광범위한 반파시스트 연합전선전략이 강조됨에 따라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항일투쟁의 목소리를 높였고, 국민당에게도 항일연합전선을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물론 국민당은 공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기에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 속에서 19361212일 이른바 시안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쿠데타는 신속히 진행되어 그날 아침 6시까지는 모든 일이 끝났다. 국민당 측의 동북군과 서북군은 시안을 완전히 장악했고, 자다가 기습을 당한 남의사 병력은 무장해제당한 뒤 체포되었으며, 참모부 요원 전원은 시안 영빈관 숙소에서 포위당해 사실상 구금 상태에 놓였다. 경찰국장 사오리쯔가 사로잡혔으며, 이에따라 시안 시 경찰은 모두 반란군에게 투항했다. 난징 정부의 폭격기 50대와 조종사들은 비행장에 억류당했다. 장제스를 체포하는 과정에선 양측간의 교전이 일어났다. 새벽 5시에 장제스를 체포하기 위한 작전이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장제스는 체포됐다. 시안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장제스에게 요구한 것은 8개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난징 정부를 개편하고 모든 정파를 참여시켜 구국의 공동책임을 분담케 할 것.

2. 내전을 즉각 전면 중지하고 무력항일 정책을 채택할 것.

3. 상하이의 애국운동 지도자들 7명을 석방할 것.

4. 모든 정치범을 사면할 것.

5. 인민의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

6. 애국적 단체를 조직할 인민의 권리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할 것.

7. 손문 박사의 유지를 이행할 것.

8. 전국구국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

 

이 쿠데타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만주 군벌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었다. 장제스를 체포한 군인들은 장제스에게 각하를 쏠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단지 각하께서 조국을 이끌고 일본과 싸우기를 바랄 뿐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장학량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쿠데타 이후 장학량은 중앙정부와 각 성의 지도자 그리고 중국인에게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으며, “총통이 각성하도록 당분간 서안에 체류하도록 요청했다. 즉 앞에서 언급한 8개 항목에 대한 발표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 얘기하자면, 그렇다면 왜 장학량은 장제스를 납치하여 대일전을 촉구한 것일까?

 

그 이유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중국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장제스가 제1차 국공합작을 와해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던 가운데, 그는 이른바 북벌도 진행했다. 쉽게 말해 중국 내에서 군벌전쟁도 벌인 것이다. 장제스 북벌에 대한 맞대응으로 일본은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장작림 폭살 사건을 획책했다. 더 나아가 일본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 황제 푸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리고 1932년 만주 전역을 점령한 이후엔 이른바 상해 사변을 일으켜 전투를 치렀는데, 군함 80척과 항공기 300대를 투입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물론 국민당군이 일본에 맞서 항일전을 안 한 것은 아니었으나, 대규모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능하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오쩌둥>전기 저자 필립 쇼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침략자 일본을 저지하기 보단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축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장제스가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 안한 것은 아니었다. 1932년부터 전쟁을 준비했지만, 그는 공산당을 먼저 처리해야 한다고 결정했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치욕적인 양보를 거듭했다. 즉 이런 부분에서 마오쩌둥은 국민당에 대해 부끄러운 무저항 정책을 추친하며 중국의 국가이익을 팔아넘기고 있다.”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시안사건에서 장제스를 구금했던 장학량은 일본군에게 살해당한 장작림의 아들이었다.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은 1931년 만주사변 과정에서 굴욕적인 양보를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이행해야 했다. 따라서 그의 시각에선 합리적으로 장제스가 항일전은 안하고 공산당 토벌에만 앞장서고 있다.” 판달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후 장제스는 장학량의 요구를 받아들여 중국 공산당과의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켰다. 물론 장학량은 대략 60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지만 말이다. 비슷한 시기 19377월 일본은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중국 대륙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힘을 합쳐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대항했다. 중일전쟁이 격해지면서 일본은 중국에서 광란의 학살극을 벌였다. 대표적으로 난징에선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일본군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 그러나 국공합작으로 단결한 중국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일본은 세월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중국 전선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졌다. 2차 국공합작은 형식적인 차원에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신뢰관계는 1941년 신사군 사건을 계기로 완벽히 무너졌다. 당연히 여기에서 가장 큰 책임은 국민당에게 있었다.

 

참고문헌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1992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 푸른나무, 1999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현대 중국사 (), 이매뉴얼 C. Y. , 서정희(), 까치, 2013

 

중국의 붉은 별, 에드거 스노, 홍수원 안양노 신흥범(), 두레, 2013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2015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더 판초프 스티븐 레빈, 심규호(), 민음사, 2017

 

마오쩌둥 1, 필립 쇼트, 양현수(), 교양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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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공 정부가 점점 신망을 잃음에 따라 이를 상쇄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변해 갔다. 점점 신망을 잃음에 따라 이를 상쇄하기 위한 군사적 노력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변해 갔다. 1967년 말 하원의 한 비밀 보고서는 베트콩이 남베트남 정부보다 다섯 배가량 많은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있는데 반해, 베트남 정부의 토지분배 프로그램은 사실상 답보상태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베트콩은 지주의 지배를 없애 버리고 부재지주와 G.V.N(베트남 정부) 소유의 토지를 땅 없는 사람들과 베트콩 당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에게 재분배했다.”

 

사이공 정부가 지지를 잃었다는 점은 1968년 초에 민족해방전선이 사이공을 비롯한 정부가 장악한 도시를 대대적으로 침투하는데도 현지 주민들이 정부에 경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이로써 민족해방전선은 기습공격(당시는 베트남의 신년 연휴인 구정(Tet)’이었다)에 착수, 사이공 심장부로 진입하고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을 마비시켰으며 심지어 잠시 동안이지만 미국 대사관까지 점령했다. 비록 격퇴당하기는 했지만, 이 공격은 미국이 베트남에 퍼부은 그 모든 거대한 화력으로도 민족해방전선 자체와 그들의 사기, 그들에 대한 대중의지지, 싸우려는 의지를 파괴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구정 공세는 미국 정부 내에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재평가를 야기했고 미국인들 사이에 더 큰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개 중대의 일반 병사들이 저지른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민간인들에 대해 대규모 파괴를 가하려는 고위급 군 및 민간 지도자들의 계획과 비교하면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1966년 초, 국방부 차관보 존 맥노턴(John McNaughton)은 북베트남 촌락에 대한 대규모 폭격이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낳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맥노턴은 촌락에 대한 공습은 해외와 국내에서 반발의 물결이 높아지는 역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신 이렇게 제안했다.

 

그러나 제대로 처리하기만 한다면 수문과 댐을 파괴하는 전략은 유망한 효과를 발휘할지도 모릅니다. 이를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곳을 파괴한다고 사람을 죽이거나 익사시키지는 않습니다. 논에 관개되는 수량을 줄이고 식량을 제공하지 않으면 얼마 뒤에 기아(100만 명 이상이겠지요?)가 널리 확산될 테지요. 그 때 식량을 제공하겠다고 회담 테이블에서 말하면 된는 겁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폭격과 마찬가지로, 대규모 폭격은 베트남의 평범한 국민들의 저항의지를 파괴하려는 목적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군사 목표물만을 폭격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주장하긴 했지만, 정부는 폭격을 묘사하기 위해 나사를 한 번 더 돌려라같은 언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1966년 중 어느 때인가 중앙정보국에서 더 강력한 폭격 계획을 권고했는데, 중앙정보국의 표현대로 하면 정권의 의지 자체를 목표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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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를 가지게 된 것은 아마 메갈리아가 뜨면서 부터인데,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른다는 말로 일괄하게 되지만, 그래도 얘기하겠다.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면서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로 안티 페미니즘도 나타났는데, 이 두 진영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둘 다 어떠한 의제에서 양극단으로 빠지는 느낌이 강하다. 우선 내가 한국의 페미니즘 진영에 실망을 많이 느꼈던 점은 첫번째로는 친서방주의라 할 수 있고, 두번째로는 오바마나 힐러리식의 반공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안티 페미니즘쪽 진영은 뭐 그냥 거의 폐급으로 쓰레기 같은 반공주의자들이 많아서, 일정부분 옳은 말을 해도 싫게 된다.

 

근데 아직도 나는 두쪽 얘기 들었을 때, 두 쪽의 의견에서 어 이거는 페미가 옳은 말했고, 이거는 안티페미가 옳은 말 했네. 이렇게 느끼는 경우가 적잖게 있다.

 

자 나만의 결론!

 

여윾시 쿠바가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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