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가 대학에 들어가 1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군부대 입소 훈련이라는 것을 받아야 했다. 마침 변화의 조짐이 드러나는 때였던지라 처음에는 거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지만, 결국 선배들은 ‘더 큰 목적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입소 훈련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주로 낮에는 군사 훈련을 받고 저녁에는 정신 교육을 받았는데, 어느 날 저녁 베트남의 이른바 ‘보트피플’과 관련된 이야기를 영상으로 틀어주었다. 보트피플이란 베트남 통일 이후 작은 배로 베트남을 탈출한 난민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강당 스크린에는 어떤 보트피플이 지나가던 큰 배에 구조를 애걸하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아마 거기에, 봐라, 북베트남이 적화통일을 하고나니 저 사람들은 고국에서 쫓겨나왔을 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바다 한가운데서 오갈 데 없는 꼴이 되지 않았느냐, 하는 내레이션이 붙었을 것이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둔한 편이었던 옮긴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 화면에 상당히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냥 감명만 받는 것으로 끝냈으면 좋았을 텐데, 둔할 뿐만 아니라 경솔하기까지 했던 옮긴이는 그런 느낌을 입 밖에 내어 말로 표현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근처에 앉아 있던 예리한 친구가, 아니, 어떻게 그런 무지한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느냐, 여태 《전환시대의 논리》도 안 읽어보았느냐, 하는 취지의 이야기를 했다. 무안을 당한 꼴이라 그 자리에서는 무시하는 척했지만, 둔하고 경솔할 뿐만 아니라 귀까지 얇았던 옮긴이는 얼마 후에 그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을 구해 보았고, 물론 당시의 다른 많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머릿속에 들었던 것들이 물구나무를 서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옮긴이가 경험한 것을 당시 유행하던 말로 ‘의식화’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정부와 《전환시대의 논리》-저자의 의도와는 관계 없이-는 한 젊은 대학생의 의식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했던 셈이다. 물론 공정한 경쟁은 아니어서, 정부는 저자를 가두고 책을 판매 금지하는 폭력을 불사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당시 정권은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베트남 전쟁에 대하여 정부의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들어설 여지를 남기고 싶어하지 않았고, 그만큼 이 문제를 중시했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베트남전을 둘러싼 정부의 선전은 엄청났던 것 같다. 지금이나 그때나 노래 가사 외우는 일에 결코 유능하달 수 없는 옮긴이가 “가시는 곳 월남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하는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겠다. 단지 말과 노래로 하는 선전뿐이었으랴. 아버지가 월남에 갔다온 친구네 살림은 뭔가 모르게 윤택하게 바뀌었고, 가전제품도 상표와 광택이 눈부셨다. 물질에 별 관심이 없었을 어린아이 눈에 그런 것이 보였을 정도이니, 당시 어른들에게 월남을 통해 유입되는 ‘부’는 어떤 선전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해석이 중요했던 것은 월남 파병의 정당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베트남 상황과 한반도 상황이 여러모로 비슷해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는데-사실 한반도와 베트남은 근대 이전 중국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고통에서부터 근대의 분단과 전쟁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점들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이 닮은꼴에 주목한 사람들에게는 한쪽의 상황 해석을 다른 쪽 상황에 그대로 적용하고 싶은 유혹, 또는 한쪽의 상황 전개를 다른 쪽에서 이후에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시로 받아들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사실 누구보다도 이 유혹에 깊이 빠져든 쪽, 또는 이 유혹을 반긴 쪽은 바로 당시의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1975년에 남베트남 정부가 무너지자 이것을 구실로 민주적 권리들을 억압하는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한 것이 그 증거이다. 바다 건너 나라에 이데올로기 문제를 구실로 파병을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 먼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을 이유로 정변에 가까운 사태를 일으킨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닌 만큼, 당시 정권의 남베트남과의 동일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시 정권만큼은 아니겠지만 옮긴이도 이 책을 번역하면서 베트남 역사와 우리 역사의 비슷한 점에 새삼 놀랐고, 또 그런 유사성을 배경으로 우리와 다른 점들이 더욱 도드라지게 부각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두 가지를 비교해 가며 이 책을 읽는 것이 상당히 자극적인 독서 경험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런 맥락 덕분에, 즉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우리나라의 역사가 계속 참조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호치민이라는 인물 역시 좀더 생생하게, 강한 환기 효과를 발휘하며 다가온다. 이 점에서는 이 전기의 저자인 윌리엄 J. 듀이커에게 고마워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듀이커가 유물을 세심하게 붓으로 털어내어 발견된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 전기 작가라는 점이다. 바랜 부분을 채색하거나 떨어져 나간 부분을 땜질하는 대신 바랬으면 바랜 대로, 조각이 떨어져 나갔으면 떨어져 나간 대로 그대로 두기 때문에 그가 그린 초상에는 빈 곳이 많으며, 그 빈 곳은 읽는 사람이 상상력으로 채워나가야 한다. 이것은 특히 베트남이나 호치민처럼 우리와 ‘각별한’ 관계에 있는 대상의 경우에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는 것이 옮긴이의 판단이다.
옮긴이를 포함한 우리나라 독자들이 우리나라 상황을 배경에 깔고 읽는 것처럼, 저자인 듀이커 역시 학자로서 ‘엄밀성’과 ‘중립성’을 지킨다 하지만, 베트남과 나름대로 특별한 관계를 가진 미국의 학자로서 이 전기를 써나갔다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이 저자가 자신의 관점 또는 특정한 미국인 집단의 관점을 강요하려 한 삼류 전기가 아님은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따지고 들자면, 저자가 30년에 걸쳐 “호치민이 한 식구로 느껴질 정도로” 그 인물과 베트남을 연구해온 동기 자체가 ‘객관적’이지는 않으며, 미국인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자체도 의식하는 한 방식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일급의 전기를 읽는 도중 가끔 으슥한 곳에서 안경을 쓴 미국인 노학자의 모습과 마주치게 될 텐데, 그것은 독자에 따라 반가운 만남이 될 수도 있고 불쾌한 만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만남의 종류가 어떠하든, 또 저자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민족과 계급의 관계 같은 어려운 문제에 대한 답이 무엇이든, 시대의 과제를 감당하며 정직하고 겸허하게 살다간 사람들의 긍지는 그 무엇으로도, 심지어 세월로도 훼손할 수 없다는 옮긴이의 독후감에 독자와 저자가 흔쾌이 동의할 것으로 믿는다.
번역 과정에서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에 대해 조언해주신 최귀묵 선생님에게 감사드린다.
호치민 평전 후기
역자 정영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