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위대한 혁명가 레닌 동지의 탄생일입니다. 사실 이 글은 호치민 주석이 젊은 시절 모스크바에 있을때 쓴 글이지만, 당시 레닌이 아시아 인민들에게 어떠한 희망을 주었는지 그리고 어떤 인물인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이라 생각히기에 이렇게 레닌 동지 생신에 올립니다.)

 

레닌이 죽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소식은 아프리카의 비옥한 평야로, 아시아의 푸른 벌판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흑인이나 황인 사이에서 레닌이 누구고 러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사실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의도적으로 그들이 무지에 갇혀 살게 만들었으니까요. 무지는 자본주의의 버팀목 중 하나지요. 그렇지만 베트남의 농민들뿐 아니라 다호메이 숲의 사냥꾼들도, 착취 세력을 무너뜨리고 주인이나 식민지 총독 없이도 스스로 나라를 경영하는 민족이 지구 저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나라가 바로 소련이고, 그곳에는 용기 있는 자들이 살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용감한 사람이 바로 레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중들이 그 나라와 지도자에게 깊은 존경과 열렬한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 위대한 지도자가 자민족 해방이라는 과업을 수행한 후 타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도 일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유색인종들이 외부의 침략이나 주재 총독 등, 외세의 속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도록 백인들이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도 그런 인물과 계획이 존재할 거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공산당을, 착취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코민테른이라는 조직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레닌이 그 조직의 수장이라는 사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비록 문화적 소양이 부족해도 감사할 줄 알고 친절했던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레닌을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레닌을 해방자로 간주했습니다. “레닌이 사망한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레닌처럼 우리 민족의 해방을 염원하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만큼 용기 있고 고결한 인물이 또 나타날까?” 억압받던 식민지인들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돌이킬 수 없는 손실에 크게 상심하며, 모든 민족들과 함께, 형제자매들과 함께 애도의 마음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러나 코민테른과 당 지부, 식민지에 있는 지부까지, 모두 힘을 합쳐 우리의 지도자가 남기고 간 가르침과 교훈을 실천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친 교훈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야말로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요?

 

레닌은 우리의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동지이자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길을 밝게 비춰준 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과업 속에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1924127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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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나치는 자신들의 인종적 이데올로기인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산시켰다. 1920년부터 나치당을 창당하여 독일 총통자리에 오르게 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젊은 시절부터 반유대주의에 심취한 인물로 그 반유대주의를 항상 노골적으로 표출했던 인물이었다히틀러로 대표되는 독일 파시즘(German Fascism)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비판했었는데독일 파시즘의 두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에는 반유대주의적인 관점이 있었다히틀러가 주장한 파시즘에서 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여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는 유대인들의 사상이었고사회주의는 계급투쟁으로 민족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유대인들의 사상이었다이러한 히틀러의 사상은 1928년 그가 했던 연설에 아주 잘 드러난다.

 

첫째우리 민족은 희망도 질서도 없는 국제주의로부터 해방되어야만 하며열광적인 민족주의에 의해 단호하고도 열정적으로 재조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둘째우리는 의회주의라는 광기에 맞서 싸우는 방법을 가르치고 권위와 명령의 필요성을 깨닫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의회주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떼어 놓을 것입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한 이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는데이 기회를 틈타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로부터 대대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1933년에 집권할 수 있었다히틀러가 집권하자 독일의 경제는 단기간에 실업을 해소하고생활의 질이 급격히 개선되었다그러나 이 이면에는 다른 인종 혹은 민족에 대한 인종주의적 탄압이 항상 존재했으며그 주된 타겟은 히틀러가 항상 혐오하던 유대인이었다.

 

1933년부터 나치는 학교에서부터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고반유대주의 정책은 전 사회적인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시점에는 국제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그러한 억압적인 조치를 잠시나마 풀기도 했지만올림픽 이후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더 활발해졌다. 1935년부터 반유대주의는 나치 정부의 정책이 되었으며, 3년 뒤인 1938년 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을 통과시켰다뉘른베르크 인종차별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공공 공원수영장콘서트홀교통수단 등도 이용하지 못하게 되었고독일 시민권도 박탈당했다또한 특정 직종에 취업할 수 없게 되었고교육도 못 받게 되었으며독일인과의 결혼도 불법화되었다신분증과 여권에는 유대인을 뜻하는 ‘J’자가 찍혔다이러한 과정 속에서 유대인의 탄압이 더 강도 높아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수정의 밤(Kristallnacht)’이었다.

 

1938년 11월 9일에 시작된 수정의 밤은 독일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벽마다 방수 페인트로 유대인이라고 적혀 있게 되고나치스 돌격대가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과 유대인 상점 등에서 파괴와 방화를 저질렀다나치독일의 경찰들도 이러한 행위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오히려 이것을 빌미로 유대인들을 체포했다당시 미국측 특파원 오토 톨리슈스는 뉴욕타임스지에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독일 방방곡곡에서 파괴약탈방화가 조직적으로 저질러졌다대다수 군중이 침묵 속에 지켜보았고경찰들은 그저 교통 통제만 하거나 보호 명목으로 유대인을 전부 체포해갔다.”라고 썼다.

 

수정의 밤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유대인 시설들과 가게가 파괴됐다공식 집계에 의하면 814개의 상점과 171개의 가옥이 파괴됐고, 191개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다. 36명의 유대인이 죽었으며또 다른 36명이 중상을 입었다또한 11월 12일까지 최소 2만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다하우나 부헨발트 등과 같은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그러나 이것은 유대인 탄압을 향한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시작이었을 뿐이다수정의 밤에서 보였던 광기는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면서 더 극심해지게 된다.

 

참고자료

 

히틀러의 아이들수잔 캠벨 바톨레티손정숙지식의풍경, 2008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 II, 존 톨랜드민국홍페이퍼로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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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지음 / 책과함께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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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는 왕과 신권이 있었고 이쪽에는 인민과 인권이 있었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139

 

1789714일 파리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인류 역사를 바꿔놓은 하나의 시작점이었다.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나온 이른바 <인권선언>은 개인의 절대성과 자유의 존엄성 및 만인의 평등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것이었다. 이러한 선언은 19세기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창한 사회주의의 이론적 근거의 근간이 되었으며, 온갖 영역의 모든 인간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저자의 설명대로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프랑스만을 근대국가로 전환시킨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은 낡은 전제주의 유럽 여러 나라에 자유와 평등, 국민주의와 자유주의,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새 씨앗을 뿌렸으며, 19세기 여러 유럽 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자체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헌 군주주의의 시도나 민주 공화주의의 시험 심지어 보나파르티즘으로 대표되는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도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혁명과 반혁명을 거듭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틀어 책의 저자는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부터 파리코뮌이 진압되는 1871년까지의 과정을 프랑스의 혁명과 반혁명의 역사로 묶어 설명했다. 사실 나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 잘 알지 못했었다. 단순히 프랑스 혁명이 현재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시하는 인권과 기본적인 권리들의 시작점이었다는 사실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번에 노명식 교수의 개설서를 읽으면서 프랑스 혁명에 대해 아주 흥미롭게 잘 알 수 있었다. 책의 부제목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이지만, 초반 부분에는 1789년 이전의 근대 프랑스 역사도 짧게나마 설명하고 있다.

 

미국사를 공부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프랑스는 1775년 북미대륙에서 시작된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영국에 맞서 싸웠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게 된 시점은 워싱턴 휘하의 독립군이 영국군에게 점차 반격에 나서던 1778년이었는데, 프랑스의 참전은 지배계급들 입장에선 사실은 어리석은 조치였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는 20억 리브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프랑스가 만성적인 재정 적자를 일으키게 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거기다 1789년 기준으로 프랑스에 있는 143명의 주교 연수입이 약 24,000만 리브르였는데, 당시 프랑스 정부의 예산액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거기다 1776년부터 1789년까지 13년 동안의 프랑스 평균 물가 상승률은 65%였다. 쉽게 말해 프랑스가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왜 이러한 재정적자를 내면서 이후 본인들의 시민 혁명을 앞당기게 될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생각해보면 많이 유치하다. 순전히 영국에 대한 복수심 때문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오랜 세월 유럽에서의 라이벌 관계였는데, 18세기 북미 대륙에서도 그 라이벌 구도가 작용했다.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 불리는 7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영국에게 대패했었는데, 이 전쟁에서의 패배 굴욕을 잊지 못한 프랑스는 항상 복수하고 싶어했고, 결국 미국 독립전쟁에서 지원하여 영국에게 복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미국 독립전쟁 참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한 사건이야말로, 복수심 같은 원시적인 감정에서 나온 정책이 국가이익에 얼마나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모델이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57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폴레옹에 대해 잘 몰랐다. 무엇보다 나폴레옹이 어떠한 것을 추구했고, 어떠한 과정을 통해 프랑스의 종진 통령에서 황제까지 등극했는지 즉 그러한 과정들을 모르고 있었다. 단편적으로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대서양 아프리카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됐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처음부터 황제가 되었던 것은 아니고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통해 임시 통령정부를 구성하면서 프랑스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무엇보다 1798년 이집트 정복에서의 군사적 활약과 왕당파가 일으킨 방데미에르 13일 반란을 효율적으로 진압한 것을 통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은 시에예스와 뒤코스랑 통령 자리에 올랐는데, 이후 이들을 축출하고 1804년 황제 자리에 등극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폴레옹은 신성 동맹 세력이 시작했다 종결된 혁명전쟁에서 프랑스의 정복전쟁으로 나섰다. 프랑스의 정복전쟁을 통해 프랑스의 영토가 확장되었지만, 가장 큰 한계를 드러냈는데 그것이 바로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1812년에 시작한 러시아 침략 전쟁에서 나폴레옹은 수도 모스크바에 들어갔다가 참패했고, 오히려 러시아와 프로이센 측에게 반격을 당했으며,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참패를 당했다.

 

모스크바 침략에 나섰던 60만 대군은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15년 벨기에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해 1821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나폴레옹의 정복주의적 침략전쟁은 다른 한편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프랑스 혁명의 기본적 성질인 자유, 평등, 우애정신을 전파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은 나폴레옹을 평가할 때, 같이 봐야할 것이다. 거기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었고, 집권 이후 프랑스 사회에 있던 신분제적인 법적 제약을 철폐하여 능력위주의 인재들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점도 같이 봐야 한다든 것이다.

 

부제목에 나온 것과 같이 책의 마지막 단락은 1871년 파리 코뮌에 대한 것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 파리코뮌이라는 사건이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애국적 운동으로 보느냐 사회주의 혁명으로 보느냐하는 해석도 마찬가지였다. 이 파리코뮌 같은 경우 마르크스나 엥겔스 또한 지지했던 움직임이었고, 20세기에 등장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상당히 많이 언급되고 기억되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1960년대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파리코뮌을 기억하며 그 정신을 연상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즉 중국 공산당에서 파리코뮌을 상징적으로 국민들에게 상기시켰다는 얘기다. 또한 파리코뮌이 경우 한국 사회에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하고도 많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진보적인 사상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선생 또한 파리코뮌과 광주민주화 운동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파리코뮌은 앞으로도 연구가 더 되어야하고, 진보진영에 있는 운동가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바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혁명 진보의 아이콘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지들이다. 자유주의 학계에선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독재, 권위주의, 학살과 같은 수식어를 많이 붙였었는데,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진정으로 가난한 인민들을 사랑했던 참된 혁명가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었다. 물론 단두대 정치라는 공포정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가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들은 바로 부를 독점하는 지배계층과 반동적인 자산가들이었고, 한 없이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속해 있던 산악파와 그 동료들은 실제로 방토즈 법이라 하여 반혁명 혐의자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가난한 애국자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사실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혁명적 동지들을 처형했던 이들은 사실 어딘가 구린 구석이 있는 부패한 정치인들이기도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나의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외쳤는데, 여기에는 민중에 대한 로베스피에르의 진심이 들어가 있다.

 

왕정은 폐지되었다. 성직자도 귀족도 사라지고 평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자기들만을 위한 공화국을 세워 부자와 관리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려는 사이비 애국자와 평등과 국민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공화국을 건설하려고 애쓰는 진짜 애국자를 구별하라.

 

소란과 도둑이라는 관념을 민중과 빈곤이라는 관념에 결부시키려는 구태의연한 태도를 주시하라.”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134

 

이번에 내가 흥미롭게 읽은 이 책은 1980년 노명식 교수가 집필했던 저서의 2011년 개정판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 지식이 별로 없는 한국 대학생들과 일반 독자들이 슨대 시민혁명의 전형인 프랑스 혁명과 그 이후에 전개된 19세기 프랑스 역사의 흐름을 이해하기 쉽도록 하고자하는 목적에서 기획된 작품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가난한 민중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 이유는 로베스피에르가 항상 약자의 편에 서고자 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폴레옹의 정복전쟁 이전 프랑스 혁명 이후 시작된 전쟁이 사실은 혁명 프랑스를 지키기 위한 혁명전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조금은 다른 사건이지만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이 치러야 했던 적백내전처럼 말이다. 프랑스 혁명을 좀 더 쉽게 접근하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혁명이 왜 혁명으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 하겠다. 프랑스 혁명 또한 수많은 유혈과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까지도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것은 프랑스 혁명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적인 권리를 천명하고 실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 초기에 발표한 <인권선언>의 전문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프랑스 인민의 대표자들은, 인권에 대한 무지와 망각 또는 경시가 공공의 불행과 정부의 부패의 원인임을 유의하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양도할 수 없는 신성한 권리들을 엄숙한 선언을 통해 명시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선언이 의도하는 바는, 사회체의 모든 구성원이 항상 이 선언에 준하여 부단히 그들의 권리와 의무를 상기하게 하고, 또 입법권과 행정권의 행사가 모든 정치제도의 목적과 부합하도록 비교할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권력의 행사가 한층 더 존중받을 수 있도록 하며, 향후 시민의 요구가 단순하고도 이론의 여지가 없는 원칙에서만 제기되도록 함으로써 헌법의 유지와 만민의 행복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함이다. 따라서 국민의회는 최고 존재 앞에서 그 가호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인권과 시민권을 승인하고 선언한다.

 

1: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 사회적 차별은 오로지 공동 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하다.

 

2: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은 시효에 의해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자연적인 권리를 유지하는 데 있다. 이 권리는 자유, 재산, 안전 및 압제에 대한 저항권이다.

 

3: 모든 주권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국민에게 있다. 어떤 단체나 어떤 개인도 명백히 국민에게서 유래하지 않는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

 

4: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자연권 행사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에게도 같은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할 경우 외에는 제약을 받지 아니한다. 이 제약은 법률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5: 법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가 아니면 금지할 권리를 갖지 아니한다. 또 법에 의하여 금지되지 않은 것은 어떤 일이라도 방해받지 않으며, 또 법이 명하지 않은 것은 누구에게도 강효할 수 없다.

 

6: 법은 일반의지의 표현이다. 모든 시민은 개인적으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입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보호하는 경우든 처벌하는 경우든, 법은 만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모든 시민은 법앞에서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의한 차별 이외에는 아무런 차별 없이, 모든 영예와 공공 지위와 직무에 평등하게 취임할 수 있다.

 

7: 누구도 법에 의하여 규정된 경우이거니와 법이 정하는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고소, 체포, 구금되지 아니한다. 누구든 어떠한 독재적인 명령이라도 간청하거나, 전파하거나, 실행하거나, 실행되도록 원인을 제공하는 자는 처벌받아야 한다. 다만 법에 의하여 소환되거나 체포되는 시민은 누구나 즉각 법에 순응해야 한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죄가 된다.

 

8: 법은 엄격히 그리고 명백히 필요한 형벌만을 요구해야 하고, 누구도 범죄 이전에 제정되어 공포될 법률이나 또는 정당하게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안니하고는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

 

9: 유죄로 선고되기까지는 누구나 무죄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체포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신병을 확보하는 데 필요하지 않은 강제 조처는 법에 의하여 엄중히 제지되어야 된다.

 

10: 누구도 자신의 발언이 법률에 의하여 확립된 공공질서를 교란하지 않는 한, 종교적 견해를 포함한 자신의 의견으로 인해 신변의 불안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11: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전달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권리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로이 말하고 쓰고 출판할 수 있다. 다만 법률에 의하여 규정될 경우에는 자유의 남용에 대하여 책임을 저야 한다.

 

12: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공권력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고, 그것은 위임받은 사람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하여 마련된 것이 아니다.

 

13: 공권력의 유지와 행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공동의 조세는 반드시 필요하다. 세금은 시민 각자의 재산 규모에 맞게 평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

 

14: 모든 시민은 스스로 또는 대표자를 통하여 공공 조세의 필요를 검토하고, 그것에 자유로이 동의하고, 조세의 용도를 추구하고, 또 세액과 과세의 기준과 징수의 방법 및 기간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

 

15: 사회는 모든 공직자에게 행정에 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16조 권리의 보장이 확보되어 있지 않고 또 권력의 분립이 제정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헌법이 없는 사회이다.

 

17: 소유권은 신성불가침한 권리이므로 합법적으로 확인된 공공의 필요가 명백히 요구하고 또 정당한 사전 배상의 조건하에서가 아니면 결코 침탈될 수 없다.”

 

출처: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1789~1871 p.8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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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4-18 17: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NamgiKim 님께서 지금까지 모든 리뷰에 말씀하신 비극은 거의 프랑스 혁명에서 기초했다고 보입니다. ㅠㅠ

NamGiKim 2021-04-18 17:31   좋아요 1 | URL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봅니다. 전 자유주의 학계가 부정하는 로베스피에르의 존재 재평가가 중요하다구 생각해요.

NamGiKim 2021-04-18 17:32   좋아요 1 | URL
복학한 4학년이라 많이 바빠 책 리뷰 오랜만에 올립니다.

북다이제스터 2021-04-18 17:34   좋아요 1 | URL
네, 제가 보기에도 잘못된 혁명의 대명사가 바로 ‘프랑스 혁명’ 아닌가 생각됩니다. ㅠㅠ

그레이스 2021-04-26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탁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근대사 정리를 너무 잘해놓아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프랑스혁명을 1789년 이후에 연속된 혁명과 공화와 왕정이 반복되는 역사의 연속선상에서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파리콤뮨까지...
함께 본 책으로 칼 마르크스의 <프랑스혁명>이 있습니다.

NamGiKim 2021-04-26 19:23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확실히 개설서로의 의미가 큰 작품이죠. 마르크스 선생이 쓴 <프랑스 혁명사>도 읽고 싶습니다.
 

유럽에서 서쪽 끝에 있는 나라 스페인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터지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관광하러 들리는 곳이었다. 프랑스, 이탈리아와 더불어 사랑받던 여행지가 바로 스페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의 스페인은 관광지로서 사랑받는 곳이지만, 스페인 또한 가슴 아픈 20세기 역사가 있다. 그 역사가 바로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전개되었던 스페인 내전(Spanish Civil War)이다. 스페인 내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유럽에서 발생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끔찍한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게르니카 폭격(Bombing of Guernica)이다.

 

1930년대 스페인에선 이른바 좌파연합이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었다. 이를 계기로 1936년 사회당 계통의 노동자총동맹(UGT)과 무정부주의자 그룹인 노동자국민동맹(CNT)이 서로 손을 잡아 이른바 인민전선을 구성했고, 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과반수의 지지를 얻음으로써 승리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좌파들은 국민들에게 좋은 정치인민을 위한 정치’, ‘진보적인 정치를 약속했다. 이들은 정치범 석방, 농민의 조세와 지대 경감, 노동자의 임금 인상과 실업 대책, 중소기업 보호, 교육 개혁 등 개혁적이고 민주적인 정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계획을 반대하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스페인의 군인인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였다.

 

좌파 정부에 불만을 품은 프랑코는 파시스트 세력들을 결함하여 인민전선 지지자들에게 테러행위를 가했고, 더 나아가 보수 기득권 세력을 등에 업고 19367월에 군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발발한 스페인 내전은 좌파 혹은 개혁을 지지하는 공화파와 쿠데타를 일으킨 파시스트 세력 즉 국민파(라고 쓰고 파시스트라고 읽어야 한다.)의 대결로 이어졌다. 여기서 공화파와 국민파의 대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구도로 나타났다. 프랑스(당시는 레옹 블룸이 이끄는 좌파 정부였다.)와 소련이 공화파를 군사적으로 지원했고, 미국이나 영국 그외의 다른 나라에서 좌파나 이론가들을 중심으로 지원부대가 결성되었다. 어네스트 해밍웨이 또한 이 전쟁에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반대로 파시즘 국가인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국민파를 지원했다. 특히 이들은 프랑코에게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 전력을 지원했다. 당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 또한 적잖은 병력과 무기를 공화파에게 지원했고, 적잖은 전차 부대를 스페인에 보냈다. 해외에서 모인 국제여단의 규모는 4만 명에 달했으며, 이 전쟁에선 아나키스트와 맑스-레닌주의자,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트로츠키지지파까지 각종 좌파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막론하고 웬만한 좌파 세력들은 공화파의 깃발 아래 집결했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페인 내전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항공 병력을 국민파에게 지원했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항공 지원을 받은 프랑코 세력은 전황을 유리하게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치독일의 공군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고, 그것이 바로 민간인 학살인 게르니카 폭격이었다.

 

1937426일 오후 4시경 나치 독일의 하인켈 111형 폭격기와 융커스 52형 폭격기 그리고 하인켈 51형 전투기 등으로 구성된 공군 부대는 게르니카 지역을 폭격했다. 당시 나치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각종 신병기를 실험하고자 했고, 게르니카 폭격은 그러한 목적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독일공군은 무차별 폭격과 기총소사를 게르니카에서 행했고, 게르니카는 순식간화 불에 타버렸다. 도시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으며, 집과 건물이 무너지고 생존자들은 불에 탄 시체들을 도로에서 치워냈다. 당시 게르니카 마을의 인구는 7,000명이었다. 그러나 이 무차별 폭격으로 1,600명 이상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히틀러의 공군은 그 마을 인구의 최소 1/4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이후 이 마을엔 프랑코를 지지하는 국민파 병사들이 나타나서 그 시체를 모두 모아 소각해버렸다. 독일 공군의 만행이 저질러진 뒤 게르니카의 끔찍한 참상이 전 세계에 전해졌지만 프랑코 측은 그런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몇 주일 뒤 영국의 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들어왔으나 시체는 이미 소각되고 없었다. 조사단은 무너져 내린 게르니카 시가지를 간단히 둘러본 뒤,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게르니카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방화되었다.”

 

물론 이 발표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1939년 스페인 내전은 파시스트의 승리로 끝이났고, 스페인은 파시스트 독재자 프랑코의 40년 철권통치에 시달렸다. 진보 성향의 화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인 피카소는 가로 7.8미터, 세로 3.5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그려진 게르니카라는 작품을 내놓았다. 게르니카는 유럽의 여러 도시들에서 전시된 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전시되어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1973년 피카소는 스페인에 민주 정치가 부활되는 날에 게르니카를 스페인 땅으로 보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게르니카197511월에 프랑코가 사망한 뒤에야 비로소 조국 스페인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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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사회주의 지도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떠올리면 아마도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인지도가 가장 높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들이 무장투쟁을 통해 혁명을 성공시켰다는 점, 그리고 게릴라전을 통해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필립 쇼트가 쓴 <마오쩌둥 평전> 개정판에 따르면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한 참일때, 베트콩의 게릴라전과 마오쩌둥 홍군의 게릴라전을 비교한 서방의 연구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었다. 이런점에서 마오쩌둥과 호치민의 공통점이 부각되는건 당연할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호치민은 혁명과정에서 마오쩌둥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에 맞서 싸우고 있던 호치민과 공산당 군대에게 적잖은 물자를 지원했다. 심지어 군사고문단도 보내어 베트민을 훈련시켰으며, 트럭과 의약품, 대포, 소총화기 등은 중국에서 온 것이 많았다.

 

이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이후 사회주의 형제 국가인 중국과 소련은 수정주의 논쟁에서 대립하였지만, 1960년대 미제국주의에 맞서 북베트남에 막대한 물자지원을 해주었다. 이때도 중국제 트럭과 무기 그리고 식량은 북베트남군에게 있어 필수적인 것이었다. 특히 존슨 정부가 롤링썬더 작전을 감행하면서 북베트남은 식량 부족 현상에 시달렸는데, 이때 중국이 쌀을 지원하지 않았다면 많은 베트남인들이 굶어죽었을 것이다.

 

아무튼 20세기 역사에서 사회주의 중국과 베트남은 적어도 미국과 맞서 싸우는 과정까지는 동맹관계였다. 이런점도 호치민과 마오쩌둥이 같이 비교되기도 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거기다 둘다 총한번 안들고 동지들이 총을 들고 싸웠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호치민과 마오쩌둥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 차이점은 바로 그들의 젊은시절 경험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나서 스탈린을 만나러 소련을 방문할 때까지, 단 한번도 해외를 나간적이 없다. 무정부주의자였던 젊은 시절의 마오는 프랑스 유학을 꿈꾸기도 했지만, 본인은 다른 동지들의 초기 유학비용을 대느라 중국에 남았다. 거기다 그는 1930, 40년대 중국 연안의 홍군 기지에서 대부분을 보냈다. 쉽게 말해 외국을 깊게 알지 못했고, 그러기에는 경험상 부족했다.

 

반면 호치민의 경우는 달랐다. 호치민은 21살이 되던 1911년에 프랑스 기선인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거의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는 5대양 6대륙을 다 다녔고, 특히나 세네갈이나 콩고와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서 제국주의의 잔혹함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1969년 당시 베트남을 방문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스페인어로 환영할 정도로 스페인어도 나름 할줄 알았고, 이러한 내공은 젊은 시절 아르헨티나를 포함한 중남미 국가에서 쌓은 경험에서 나왔다.

 

그외에도 호치민은 1941년 중월 국경지대 팍 보에 기지를 세우기 전까지 베트남 독립운동을 해외에서 전개했다. 1930년에 창당된 인도차이나 공산당도 홍콩에서 창당됐다. 거기다 최근에는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한 것이 문서로 밝혀졌다.


이처럼 호치민은 마오쩌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매우 국제적인 인물이었다. 따라서 두 사회주의 지도자에 대해 평가할 때, 항상 이러한 차이점을 염두해두며 평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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