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꽝남성 지도, 하미마을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 현에 있다.)

 

베트남 다낭에서 호이안으로 가다보면 호화로운 리조트와 골프 코스가 늘어서 있는 도로가 있다그 고속도로는 1A 고속도로로 베트남 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전투현장이기도 했다지금이야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냥 차를 타고 지나쳐 가는 곳이 되었지만, 1A 고속도로에서 갈라져 나온 샛길을 지나다 보면 위령비 하나가 있다그 추모비가 바로 1968년 한국군이 저지른 하미마을 학살

(Ha My massacre)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위령비다.

 

노란색 담장이 있는 뜰 안에 있는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는 사원의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정사각형 뜰의 중앙에 높은 연단이 자리 잡고 있고그 위에 푸른 널빤지로 이은 2층 지붕을 열여섯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비각이 있다그리고 그 연단에는 1968년 학살 당시 죽은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있다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생이고가장 나이가 어린 희생자는 1968년생이다그들의 이름은 보 자인(Vo Danh)이라는 글자로 새겨져 있다도대체 이 끔찍한 학살을 저지른 주체는 누구일까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과 주변 마을 사람들은 바로 한국군이 저지른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주장한다. 1968년 당시 하미마을에선 도데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국은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다총 30만 명 이상이 참전했고연 5만 명 이상의 한국군대가 남베트남에 주둔했었다이들은 주로 베트남의 휴양지인 다낭을 기점으로 배치되었고주로 꽝남과 꽝응아이 그리고 빈딘 성에서 작전을 이어나갔다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베트남 전쟁 당시 맹호부대와 청룡부대 그리고 백마부대가 전투부대로써 남베트남에서 여러 작전들을 수행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들이 벌인 작전들은 수색과 섬멸(Search and Destory)’으로 전투지역을 설정해놓고자유사격지대(Free Fire Zone)로 설정한 곳에서 어떤 일을 벌여도 상관이 없었다즉 이 얘기는 자유사격지대에 있는 목표물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라고 총으로 쏴죽이거나 수류탄으로 파괴해도 된다는 것이었다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 연합군의 민간인 학살은 구조적으로 발생할 위험성이 매우 높았다따라서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의 민간인 학살은 어떻게 보면 수색과 섬멸 작전의 실상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에 적힌 학살자 명단, 이 중에는 1살, 2살, 3,살, 4살, 5살의 이름도 적혀 있다.)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1965년부터 67년까지 대략 2년 동안 미군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해가 바뀌어 1968년 구정에 있던 공세는 베트남 전쟁의 전황을 바꿔 놓았다. 1968년 1월 31일 구정 공세가 발발하면서 베트남 전쟁의 양상은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유리해져갔다물론 전투에서야 미국의 압도적인 화력을 버티기 힘들었지만반전여론이 강해짐에 따라 미국의 상황은 불리해졌다한편 구정 공세 이후의 전투는 보다 잔혹해진 양상을 보였다미군의 그 악명 높은 전쟁범죄인 피닉스 작전이 벌어진 것도 이때다.

(하미마을 학살에서 살아남은 쯔엉티투 할머니, 그는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다.)

 

한국군 또한 이 시기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대표적으로 1968년 2월 12일에 일어난 퐁니퐁넛 학살이 그러했다퐁니퐁넛 학살이 발생한지 2주 뒤디엔반 현 디엔즈엉 사에서 한국군에 의해 발생했는데그게 바로 하미마을 학살(Ha My massacre)이었다. 1968년 2월 25일 새벽 청룡부대 2개 중대가 하미 촌의 따이 마을과 쯩 마을을 포위했다마을을 포위한 한국군은 오전 7시 쯤 대략 135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했다학살당한 135명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희생자는 1880년에 태어난 88세 여성이고가장 어린 희생자 3명은 1968년에 태어났다그 외에도 학살당한 이들 연령대가 2, 3, 4살이다쉽게 말해 한국군은 하미마을에서 제주 4.3항쟁과 여순항쟁에서 자행했던 민간인 학살을 그대로 했다.

 

한국군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 학살을 절대로 잊지 않았다. 2001년 당시 한국에 있는 베트남참전전우복지회가 새로운 정서와 화해 그리고 신뢰 회복을 목적으로 거대한 위령탑을 세웠는데그 과정에서 마을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면서 학살 사실에 대한 기록 삭제를 요구했었다물론 진실을 기록하기 원했던 주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았으며주민들의 바람대로 학살 기록은 그들이 겪은 대로 기록되었다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인 팜티호아 할머니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학살이 일어난 것은 아침 9시 경이었다호이안 쪽에서 군대는 7시에서 8시 사이에 들어왔다학살이 있기 며칠 전부터 한국군들은 사람들을 모아서 빵을 주었다그래서 그날 아침도 빵을 주나보다 하고 한군데로 모였다그런데 한국군들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나는 자식을 몸으로 감싸고 엎드렸다수류탄 하나가 등으로 날아왔으나 터지지 않았다그때 수류탄 하나가 더 날아와 다리가 잘렸다나는 죽은 척 엎어져 있었다밤이 되도록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다밤이 되자 나는 기어가 숨었다사람들이 나를 데려갔다그 당시에는 치료할 약도 없었다나는 그때 네 명의 가족을 잃었다자식 둘과 임신 4개월의 조카며느리를 잃었다이 며느리는 한국군에게 강간을 당하기도 했다우리 며느리는 참 예뻤다저항을 했으나 그 힘을 당할 수가 없었다당시에 우리가 살았던 집이 양민 학살터였다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그 터에서 살기가 싫고 무서워 이 집으로 옮겼다그날 죽은 사람들의 수는 137명이다.”

 

하미마을 학살의 생존자 응우옌티탄은 2018년 퐁니퐁넛 학살 희생자이자 동명이인인 응우옌티탄과 함께 한국에 와서 한국정부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었다하미마을 학살 당시 11살이었던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남동생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다그리고 그 또한 한국군의 수류탄 공격을 받고 왼쪽 귀와 왼쪽 다리허리를 심하게 다쳤다그는 법정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남기며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와 남동생의 유해를 지금까지 찾지 못해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또 다른 얘기도 남겼다.

 

이 자리에 오지 못한 다른 학살 피해자와 유가족들그리고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대신하여 묻습니다어째서 한국군은한국 정부는 그러한 끔찍한 잘못을 저질러놓고 50년이 넘도록 그 어떤 인정도사과도 하지 않는 것인가요.”

(2018년 한국에 와서 사과를 요구했던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응우옌티탄은 학살의 현장에서 어머니남동생작은 어머니 그리고 사촌 동생 2명을 잃었다.)

 

이 끔찍한 학살이 벌어진지도 53년이 지났다그러나 당시 피해자들의 마음속에는 53년 전 당시의 민간인 학살 경험이 생생하게 남아있으며지금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베트남 전쟁 8년 기간 동안 한국군은 대략 5,000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부상당했다또한 이들은 군사기록상 4만 1,000명 이상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을 사살했다그러나 1990년대 이후 밝혀진 9,000명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기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어쨌든 한국군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다. 135명을 무차별 학살한 하미마을 학살 또한 그런 전쟁 중 하나다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우리 사회는 반성해야 한다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은 우리가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반성해야할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다.

 

참고문헌

 

미안해요 베트남이규봉푸른역사, 2011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비엣 타인 응우옌(), 부희령(더봄, 2019

 

뉴스타파 목격자들 전쟁 2책임없는 전쟁뉴스타파, 2016.05.27.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제가 그 증거입니다생존자들의 호소서울신문, 20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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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은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게시됐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프랑스가 물러나자 미국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단시켰다베트남을 분단시킨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 남쪽에서 그랬듯이 베트남의 이승만인 응오딘지엠을 내세워 친미 꼭두각시 정권을 수립하고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했던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렸다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치에 분노한 민중들은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을 창설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즉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과 한국군이 베트콩베트콩!’라고 비하하고 폄하하던 병사들은 사실 남베트남의 부패하고 반민중적인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투쟁했던 그리고 그 혁명적 대의를 이루기 위해 정글 속에서 죽어가고 희생했던 혁명가들이었다이런 점에 있어서 베트남 전쟁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호치민과 공산당의 민족해방전쟁이었다따라서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국은 과거 프랑스가 했던 짓들의 연장선상이었고 더 추악하고 잔혹했다.

(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 해병대 대원)

 

총선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던 미국이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권을 위해 선택한 전략은 바로 군사고문단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부터 미국은 베트남에 군사고문단을 배치했고이 고문단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스와 한반도에서 그랬듯이반혁명 군대를 지원하고이른바 빨갱이 소탕에 나섰다이들의 규모는 1961년 미국의 존 F. 케네디가 집권하면서 대폭 증가했다. 1961년 당시 900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은 1963년 불과 2년 만에 16,0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더 나아가 케네디 정부는 네이팜 폭탄과 에이전트 오렌지를 포함한 다수의 고엽제 살포를 공식적으로 허가했다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더 잔혹해졌다.

 

이런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의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가족정치와 독재정치로 악명을 떨치던 응오딘지엠의 비인간성은 1963년 6월 11일 틱광둑이라는 한 승려가 소신공양을 하면서 극에 달했다응오딘지엠의 무자비한 불교도 탄압으로 목숨을 잃은 고승 틱광둑의 소식에도 불구하고디엠 정권의 막장성은 더 극명하게 표출되었다응오딘지엠의 제수인 마담 누(본명 쩐레수언)는 그 중놈이 바비큐가 된 게 뭐가 문제냐?”라는 식의 발언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했고이에 따라 남베트남 민중의 분노와 미국 내에서의 여론도 흔들렸다.

(다낭에 상륙한 대규모의 미 해병대)

 

결국 미국은 CIA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계획했고이를 실행에 옮겼다. 1963년 11월 1일 미국이 주도한 쿠데타로 응오딘지엠은 사살됐고남베트남에는 즈엉반민이 이끄는 새 정부가 들어섰다물론 이 정부 또한 무능해서 또 다른 군부 내부의 쿠데타가 발생했고이로 인한 정권 교체는 1965년까지 계속되었다당시 남베트남 정권은 이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1963년 당시 베트콩은 남베트남 지역의 75% 이상을 장악한 상황이었다민중은 베트콩 편이었고디엠 정권 시기 건설된 전략촌들은 베트콩에게 흡수당했다.

 

남베트남의 군대는 전투에서 너무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응오딘지엠 정권 시기 일어났던 압박 전투에선 300명의 베트콩이 1,500~1,700명 이상의 남베트남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겨주었는데이런 비슷한 상황들이 응오딘지엠 정권 몰락 이전과 이후에도 계속 반복됐다결국 미국이 또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그것은 바로 전쟁 참전의 명분을 조작하는 것이었다따라서 1964년 8월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북베트남에 대한 전면적인 선전포고를 감행했다물론 통킹만 사건은 사전에 아주 치밀하게 계획된 자작극이었다.

(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남베트남의 여학생들)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했지만남베트남은 무너지고 있었다같은 해 11월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근처에 있는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베트콩에 기습 공격을 받아 수십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파괴되었다. 12월 빈지아 지역에선 남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교전을 치렀는데이 전투는 호치민의 표현대로 작은 디엔비엔푸였으며압박 전투 때와 같이 남베트남군은 참패하고 패주했다.

 

1965년 2월 플레이쿠에 있는 미군 특수부대 기지가 베트콩에 의해 기습 공격을 받아 8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그로부터 6일 뒤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보복 공습 명령을 내렸고이른바 롤링썬더 작전을 개시하기에 이르렀다물론 플레이쿠에서의 기습 공격은 당시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던 베트콩이 일반적인 기습 공격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그러나 미국은 이 사건을 과장하고 확대해석하여 북폭 명분을 합리화했다.

(미국과 남베트남의 우정을 얘기하는 현수막)

 

미국의 린든 존슨 정부는 북폭 게시와 더불어 지상군 파병을 감행했다베트남의 첫 번째 파병 부대로는 미 해병대가 선택되었다대략 3,000명 정도의 미 해병대가 남베트남의 항구도시이자 휴양지인 다낭(Da Nang)에 상륙하는 걸로 결정됐다. 1965년 3월 8일 미국 정부는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미 해병대 대원들로 하여금 상륙정에 태워 해안가에 상륙하도록 했다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군들은 상륙전까지만 해도 전투가 있을 것이라 긴장했었다뜻밖에도 그들을 맞이한 것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 기다리던 베트콩이 아니라미군을 환영하러 나온 남베트남의 여학생들이었다.

(미케 해변에 상륙한 미군 탱크)

 

당시 남베트남의 여학생들의 환영식과 더불어 해변가에는 당신은 꼭 여기 있어야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예상 밖의 환영식을 받은 미군은 긴장을 풀었고현장에 있던 카메라맨들은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냈다당시 미 해병대 대원으로 다낭 해변에 상륙했던 병사 필립 카퓨토는 다큐멘터리 PBS 베트남 전쟁에서 당시 본인이 느낀 감정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제가 가장 놀란 건 베트남이 정말 아름답다는 거였어요논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대나무와 야자수 숲 안에 아름다운 마을이 있었죠멀리는 파란색의 산악 밀림이 펼쳐져서 마치 지상낙원 같았어요베트남 여인인지 여학생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줄지어 있던 게 기억납니다마치 천사들이 내려온 것 같았어요꽤 놀랍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습니다이렇게 아름답고 매혹적인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니 말이죠.”

 

다낭항에 상륙한 미군들은 해변을 벗어나 남베트남 내륙으로 진입해 들어갔다당시 다낭에 상륙했던 미 해병대는 군용트럭과 탱크도 함께 상륙했고 이들도 내륙으로 들어갔다이런 과정에서 미군들은 또 놀라운 광경을 보기도 했다초록 군복을 입고 M-14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들이 지나가는 걸 본 한 베트남 노인은 다음과 같은 소리를 지르며 미군을 환영했다.

(당시 상륙했던 젊은 미 혀병대 대원)

 

“Viva La Francais”

 

바로 프랑스 만세였다즉 그 노인은 미군을 보고 프랑스군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1965년 3월 8일에 있던 미 해병대의 다낭 해변 상륙작전은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빠졌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었다이들이 처음 상륙한 이후 총 280만 이상의 미군이 베트남을 거쳐 갔고, 1968년에는 이들의 숫자가 54만 9,000명에 육박했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했으며 패배했다따라서 미 해병대의 성공적인 다낭 상륙작전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패배를 향한 행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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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815일 추축국의 마지막 세력인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당시 중국은 1937년 길게는 1931년부터 일본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차 국공내전에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던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중일전쟁을 시점으로 세력 확장과 군사력의 증대를 이루어 냈다. 1940년 말에는 팔로군 40만 명, 신사군 10만 명으로 총병력 5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당건설도 급진적으로 진행하여 19374만 명이었던 당원이 1940년에는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45년에는 거의 120만 명의 대군을 마오쩌둥이 이끌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사회주의 이론과 민족주의적 호소에 따라 세력을 결집시켰던 공산당의 능력도 있었다. 이점에서 중국 국민당은 공산당보다 민심을 잡지 못한 점, 특히 민중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자국의 봉건 세력과 부르주아지들을 대변하였다는 점에서 민중이 공산당과 마오쩌둥에게 더 많은 지지를 보낸 점도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이 정규전에서 전투를 많이 치르더라도 전략적으로 공산당이 민중의 지지를 더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했지만, 중국 대륙의 상황은 위태로웠다. 루스벨트 사후 미국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초기에 장제스와 마오쩌둥을 화해시키는 노선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은 1941년 국민당이 주도한 신사군 사건으로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와 마오쩌둥은 19459월 충칭에서 협상을 가지고 축배를 들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국으로 와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며 공산당과 회담하는 정책을 펼쳤었다. 194511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 군인인 조지 C. 마셜 장군(George C. Marshall)을 중국 주재 대통령 특사를 임명하여 장제스에게 공산당과의 화해 및 중재하도록 했다. 조지 마셜 장군은 194512월 중순 양당 대표 모두가 중재를 받아들이게 했는데, 이 세 가지 목표에는 내전 중지, 정치협상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 논의 그리고 국공 양당의 군대를 하나의 국가 군대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들은 1945년 말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19451114일 미국 전함을 타고 산해관으로 이동한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군을 공격했고, 미군이 중국 본토에 상륙하기도 했었다. 당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민심을 사로잡아서 세력을 확장하여 120만이라는 대군을 만들었지만, 군사력에 있어서 국민당의 군대는 430만으로 공산당 보다 군대가 최소 3.5배나 더 많았다. 1946년 당시만 보더라도 그러했다.

 

양측의 대립은 1946년 만주에서 깊어졌다. 19458월 소련군은 만주 지역에 있는 일본군을 몰아냄으로써 그 지역을 해방시켰다. 그리고 19464월 소련군이 철수를 했는데, 소련군이 철군한 지역을 중국 공산당이 그대로 접수해나갔다. 이것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서로에 대한 불신도 깊어졌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7월 국민당 정부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구 공산당의 거점지역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군사적 공격을 감행했다. 2차 국공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양측의 대립이 나타난 근본적인 이유는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가 추구하는 정치적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다는 것이다. 전쟁 초기 전세는 중국 국민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의 병력은 점차 늘어났다. 그 이유는 바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너무 부패하고 폭압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장제스 정권은 공개 처형과 비밀경찰로 유지되던 일당 독재 국가였다. 또한 국민당 정부에서의 대책없는 화폐 남발로 인플레이션은 극에 달했고, 물가 상승률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민중 대다수를 이루고 있던 농민들의 토지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다. 따라서 제2차 국공내전에서 압도적인 병력숫자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이 세력을 더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 정권의 태생적인 부정부패가 주원인이었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제2차 국공내전은 중국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민당에게는 최대의 지원국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해 연합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19463월 영국의 정치인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철의장막 연설을 하면서 냉전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미국의 반공주의자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19473월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면서 냉전은 더 심화되었다.

 

해리 트루먼이 발표한 트루먼 독트린에 따르면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미국이 소련과 공산주의에 맞서 단호히 대응하겠다.”는 목적의식을 공개적으로 천명한 행위였다. 이런 논리에 따라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우익 세력들을 지원했다. 물론 그 우익세력은 반민중세력이었고, 이들은 제주4.3항쟁에서의 친이승만세력처럼 무차별 방화와 학살을 저질렀다. 즉 그런 행위의 정당화가 바로 트루먼 독트린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공산당과 내전중인 장제스의 국민당을 지원했다. 194710월 미국은 국민당에게 2,770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해줬다. 1947년 말 장제스는 미국에 4년간 15억 달러를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에 트루먼은 194821857,000만 달러를 지급할 것을 건의하기도 했었다. 미국은 장제스 정권에게 막대한 원조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은 부패한 장제스 군대에게 20억 달러나 원조했으며,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무기와 장비로 전투를 전개했다. 미국제 탱크와 항공기, 대포로 무장했음에도 1948년의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에게 패배하고 있었다.

 

1949년부터 중국 공산당은 통일을 위한 최종적인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미 국민당 정부는 19489월부터 19491월까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대략 150만 명이나 되는 병력 손실이 있었다. 1949420일 중국의 인민해방군은 역사적인 양자강 도하작전을 감행하여 국민당정부의 심장인 난징과 상하이로 진격했다. 1949424일 난징이 함락되고, 527일에는 상하이가 점령되었다. 이렇게 국공내전에서 승기를 잡은 마오쩌둥은 194910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현재의 중국이 건국되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국민당은 패배했다. 1949년은 미국에게 있어 참으로 충격적인 해였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원자폭탄을 개발한 미국은 불과 4년 뒤 자신의 적국인 소련이 기존의 원자폭탄보다 더 강한 수소폭탄을 개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9101일에는 국공내전이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이러자 미국에서는 극단적인 이데올로기가 표출되었다. 바로 매카시즘이다. 아무튼 미국의 대대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내전의 승리자는 공산당이었다. 이점에 있어서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던 장제스는 무능한 지도자였다고 생각하며, 그가 이끄는 국민당의 패배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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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2차 세계대전 말기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준비했던 미국은 일본이 항복하자 일본 본토에 군대를 주둔하게 되었다. 즉 일본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장군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가 지휘하는 총사령부(GHQ)가 발족되었다. 미국의 일본 점령은 직접적인 군정 통치가 아닌, 기존 일본 정부의 행정기구를 활용하는 간접 통치 형태를 보였다.

 

더글라스 맥아더 휘하의 연합국 총사령부는 19459월 이래 강도 높은 전후 개혁을 추진했다. 우선적으로 군수 생산의 전면 중지, 일본 제국의 육해군 해체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 체포 등과 같은 군사적 무장해제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리하여 시데하라 내각이 성립했는데, 이 내각은 5대 개혁지령을 실행하여, 인간선언, 공직추방, 전쟁포기에 관한 기초적 발안을 만들었고, 극동국제군사재판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맥아더는 일본 주둔 GHQ의 총책임자로써 개혁구상이 있었는데, 일본의 정치 행정적 개조, 비군사화, 경제적 비무장화, 배상 방침, 재정금융 방침 등이 그의 개혁구상이었다. 헌법의 자유주의화를 추진했고, 부인참정권을 부여했으며, 심지어 노동조합 결정을 장려했다. 일본 제국 시기 있던 비밀경찰과 치안유지법, 특고경찰 등을 폐지했고, 정치범들을 석방했으며, 교육제도도 개혁했다. 또한 일본 내의 정당 결성도 촉진 시켜 1948년엔 사회당 내각이 성립하도록 만들기도 했었다. 즉 맥아더는 이런 간접통치를 통해서 제국주의 일본은 소위 자유민주주의 일본으로 바꾸고 싶어 했던 것이다.

 

특히나 맥아더가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라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그가 단행한 전후개혁에서 노동조합을 장려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긴 했지만, 그가 보기에도 당시 일본은 굉장히 군국적이었기에, 그러한 군국주의적인 요소를 희석시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장려했다. 그러나 전후 초기 GHQ가 했던 개혁은 이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우선적으로 맥아더측에서 했던 개혁이 간접통치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전쟁전의 관료제가 되살아나게 되었고,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본의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적잖은 책임이 있는 히로히토 천황을 절대로 처벌하지 않았다. 또한 극동군사재판도 독일에서 실행되던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달리 많은 전범들이 풀려나고 사면받기도 했다. 특히나 731 부대를 창설하여 온갖 반인륜적 악행을 저질렀던 총 책임자 이시이 시로같은 이들이 처벌받지 않았다. 그래도 확실한건 천황제를 폐지하지 않고 처벌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가 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믿음을 일본사람들에게 주었다는 것은 나름 긍정적인 의의가 있다.

 

더 나아가 1947년 일본에서 지방자치법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경찰법과 민법개정이 이루어졌다. 그 시기 일본에선 경제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재벌 해체와 독점 금지 심지어 농지 개혁과 노동 개혁까지 시행되었다. 어떤 면에선 자유주의적이지 못하고 일정부분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들어간 이 조치는 어디까지나 군국주의의 영구 배제를 위한 경제의 비군사화가 맥아더와 미국의 점령정책 목표였다. 1947년에 제정된 교육 기본법은 군국주의 교육을 부정하고 민주주의 이념과 기회균등의 교육을 표방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도 미소냉전이 격화되면서 점차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특히나 1949년 스탈린의 핵개발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통일은 맥아더와 미국으로 하여금 일본을 반공진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50년 한반도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전후 개혁 초기에 보였던 조치들은 완벽히 수포가 되게 되었고, 맥아더는 일본은 미제 무기를 생산하는 전쟁기지로 탈바꿈시켰다. 그리고 일본 공산당과 같은 진보 정당들을 탄압하게 되었고, 일본 자위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국가경찰 예비대를 창설했다. 이는 확연히 전후 초기에 했던 것과는 다른 조치였다. 특히나 1952년 미국과 일본이 맺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인하여 일본은 전후 초기 일본의 모습을 벗어 던졌고, 한국전쟁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전후복구와 더불어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1954년에는 자위대를 창설하여 적잖은 군대까지 보유하게 된다.

 

일본의 전후 개혁에 대해 다시 정리하자면 전후 초기에는 소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겠다던 맥아더와 미국의 바람에 따라 탈군국주의화에 기반한 개혁들이 진행되었다면, 1949년 냉전이 격화되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떻게 보자면 정치 체제만 소위 다당제 민주주의를 유지한 과거의 일본으로 흘러갔다. 이는 미소 냉전이라는 혼란과 긴장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동아시아적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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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3.15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집권을 계획했던 이승만은 4.19 혁명으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1공화국이 무너진 이후 대한민국에는 장면 내각과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되며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4.19 혁명의 불씨는 제1공화국 몰락 이후 이승만 정권 시기 반공이데올로기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 또한 이들과 노동운동에 대한 대응은 강경한 처지였다. 당시 한국은 매우 가난했다. 1공화국 시기 이승만을 포함한 친일 지배계급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휘청거렸고, 지금당장이라도 북한에 흡수 되도 무리가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던 1년 뒤인 1961516일 한국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5.16 쿠데타였다. 516일 박정희와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장교 250명과 사병 3,500명은 한강에 진입하여 새벽 3시에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2시간 뒤인 새벽 5시에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밝히는 한편 6개항의 혁명공약을 선포했다. 5.16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와 그 반란세력은 다음과 같은 공약을 선포했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권 몰락 이후 또 다시 강력한 반공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5.16 쿠데타로 한국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이 새로운 정권에 관심을 가진 두 나라가 있었다. 바로 북한과 미국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한국의 적국이었던 북한의 경우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에 있었던 경력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물론 5.16 쿠데타 이후 새 정권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것을 확인한 이후엔 수도 평양에서 반미집회를 가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 북한의 김일성은 박정희 친형 박상희의 절친 이었던 황태성을 밀사로 내려 보내기도 했다.

 

박상희의 친구였던 황태성은 일제시기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조선 공산당과 남로당에서 활동했고, 여운형이 창설한 조선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활동했던 사회주의자였다. 1946년 대구 10.1 항쟁 이후 월북한 황태성은 1961년 박정희를 만나기 위해 밀사로 남한에 파견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그의 남하는 간첩행위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은 박정희를 설득하여 최소한 남북연방제에 대한 합의를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정희는 그를 간첩죄로 몰아 1963년 형장의 이슬로 보냈다. 하지만 한 가지 걸리는 건 그를 밀사로 보낼 때 김일성의 신임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확실한 건 박정희가 이렇게 손쉽게 자신의 친형의 친구를 사형시킬 것을 북한이 예상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이다.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 또한 한국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아이젠 하워를 이어 미국의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미국 역사에 있어 20세기의 뉴프론티어를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우수한 성적과 더불어 인기가 많았던 케네디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0<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Why England Slept)>라는 논문으로 명성을 끌었던 인물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 PT-보트 부대의 해군으로 참전했던 그는 전역 이후 미국 정치에 발을 담갔던 케네디는 1960년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매카시즘 열풍을 전후로 해서 반공주의를 표방했다면, F. 케네디는 매카시즘이 많이 완화된 상태에서 미국 대통령으로써 반공주의를 추구했다. 케네디가 대통령이던 시절은 비록 매카시즘의 광풍은 사라졌지만, 미국의 반공주의가 영향력을 발휘하고 미국인들로부터 지지를 받던 시기였다. 1961년 소련의 흐루쇼프는 베를린에 장벽을 설치했고, 2년 전인 1959년 미국의 옆 나라 쿠바에선 피델 카스트로와 체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이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1년 뒤인 1962년에는 이른바 쿠바 미사일 위기라 하여 전 세계가 제3차 세계대전의 공포 속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또한 베트남에서는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이른바 베트콩들이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혁명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속에서 존 F. 케네디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반공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즉 박정희의 5.16 군사 쿠데타는 존 F. 케네디가 반공정책을 추진하는 과정 속에서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거기다 5.16 한 달 전에는 소련에서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탄생시켰고, 피델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피그스만 침공은 대실패로 끝난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케네디의 반공주의는 열이 올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실제로 존 F. 케네디는 베트남 전쟁을 전면화 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반공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에서 전략촌 소개나 네이팜 폭탄 투하 그리고 고엽제 살포와 같은 전쟁범죄행위를 실행에 옮겼었다.

 

19614월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포착한 미국 CIA516일 케네디 대통령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물론 미국은 5.16을 그저 지켜만 보았다. 쿠데타 이후 박정희가 했던 일중 하나에는 미국으로부터 정권의 승인을 받는 것이 있었다. CIA를 통해 한국의 상황과 박정희의 이력을 파악하고 있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박정희를 의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박정희가 해방 이후 남로당에 가입했던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정희에게 있어서 케네디 대통령을 자신의 편으로 설득시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19611111일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된 박정희는 1114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백악관에서 1시간 20분 동안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의 반공관을 증명하고자 했다. 케네디 또한 이러한 점들을 이용해서 한국을 반공의 보루로 만들고 싶은 목적이 분명히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며 전형적인 친미반공적인 면모를 자발적으로 입증해주었다. 당시 박정희의 방미길에 동행했던 리영희 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박정희가 케네디와 회담할 때 보인 비굴한 태도에서 실망감을 더하게 되었다. 케네디의 오만방자한 태도도 꼴보기 싫었지만, 박정희의 비굴한 태도는 목불인견이었다. 박정희는 금색 도금 테두리의 짙은 색안경을 끼고 빳빳한 등받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가끔 다리를 반듯이 모으기도 하고 꼬기도 하고 그랬다. 마치 군주 앞에 홀로 불려나온 신하처럼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는 미국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동북아시아 지역 통합 전략에서 한미, 한일 관계의 마지막 꼭짓점을 마무리 짓는 중요한 인물로 부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케네디는 박정희가 베트남에 군대를 파병하겠다 자진한 점을 매우 만족스러워 했다. 이것은 박정희가 미국이 만든 아시아의 반공주의 전략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얘기를 역으로 얘기하자면, 박정희는 미제국주의자 존 F. 케네디가 추진하던 베트남에서의 침략전쟁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의지를 표명한 것이며, 미제국주의의 동아시아 반공전략에 적극 협력하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케네디가 그를 지지한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 전략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지, 세간에서 얘기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탁월한 외교력따위의 것이 절대로 아니다.

 

참고문헌

 

20세기 우리 역사, 강만길, 창작과비평사, 1999

 

박정희 평전, 전인권, 이학사, 2006

 

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 김삼웅, 가람기획, 2010

 

박정희 평전, 김삼웅, 앤길, 2017

마르크스주의로 본 한국 현대사, 한규한, 책갈피,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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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홍 2023-06-02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스크바붉은광장이나 내용에 리영희기자.. 이사람은 철저히 공산주의시점에서 글을썼다. 빨갱이색끼

NamGiKim 2023-06-16 23:01   좋아요 0 | URL
ㅇㅇㅇ 빨갱이 맞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