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3.1절입니다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을 기립니다.)

 

1940년 6월 서유럽으로 진군을 시작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함락시켰다독일의 수상 히틀러는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구경했고프랑스 북부는 나치 독일이 남부는 친나치 협력자이자 제1차 세계대전 베르됭 전투의 영웅인 필리프 페텡이 통치하도록 했다같은 해 6월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본은 동남아시아에 있는 프랑스령 식민지가 무주공산이 되자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했다본국이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해있던 인도차이나령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당연히 일본에게 굴복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 장군, 1940년에 만나게 된 호치민과 보 응우옌 잡은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함께 투쟁해왔다. 이들은 이후 프랑스와 미국 두 서구 제국주의 열강을 무찌른 투사로 발전했는데, 그 시작은 항일투쟁이었다.)

 

1940년 8월에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여 동남아시아에서의 정치·경제적 우위를 인정해주었고, 9월 22일에는 일본군 주둔과 관련한 협약이 맺어져 대략 2만 5,00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으며, 3개의 비행장이 일본군 손아귀에 들어갔다이로써 인도차이나에는 새로운 지배자인 일본이 등장한 것이다일본이 인도차이나에 입성하자베트남의 독립운동 세력 혹은 일부 민족주의 세력들은 침략자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다혼합 종교인 까오다이교(Cao Đài) 세력이나 호아하오교(Hoa Hao) 세력들은 친일 종교 세력으로 성장했다이후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응오딘지엠(Ngo Dinh Diem) 또한 일본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었다.

 

물론 이것은 태평양 전쟁 당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1942년 일본이 인도네시아를 침공했을 때네덜란드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수카르노(Sukarno)는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했었다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도 일본군이 침공하자독립운동가 아웅산(Aung San)이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했다따라서 동남아시아 내의 독립운동 세력의 친일화는 특수한 현상이 아니었다당연하게도 이런 환상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그 나라에서 무자비한 통치와 잔혹함을 보이면서 산산조각이 나게 된다.

(2018년에 발굴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 이 문서를 통해서 호치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드러났다.)

 

이 시기 일본군이 침공해 들어오자 일본 제국주의의 잔인성과 기만성을 알고 반일투쟁을 준비했던 인물이 있다그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이다. 1890년에 태어나 1911년 식민지 베트남을 떠났던 호치민은 30년 동안 해외를 돌아다녔던 인물이다아시아와 아프리카중동유럽미국과남미 등을 떠돌아 다녔던 호치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던 해 응우옌 아이 꾸옥(Nguyen Ai Quoc)이라는 가명으로 안남 민족의 요구 8개 조항을 즉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했던 인물이었다. 1920년대 소련에서 코민테른 요원으로 훈련받았으며, 1930년에는 홍콩에서 이른바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창설한 인물이었다. 1940년 일본이 침공해오자 오직 호치민만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인물이었다그렇다면 왜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인가?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 사람들이 행복해 보이던가?”

 

이것은 호치민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환영하는 이들에게 했던 외침이다. 2018년 남북회담과 북미회담으로 한반도가 평화무드에 접어들었을 때프랑스에서 새로운 문건이 발견되었다그것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이 프랑스 파리에 있을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를 했었던 것이 당시 프랑스 경찰 당국 문서에서 대거 발굴된 것이다. 1920년을 전후로 해서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인사인 김규식황기환조소앙윤해 등의 인사들과 교류를 했다이들과 교류를 하면서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감화되었고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졌던 것으로 보인다여기에는 서구 열강에게 독립을 청원했다 거절당한 양측의 경험이 작용했을 것이다호치민과 교류했던 우사 김규식의 경우 1918년 여운형이 창당한 신한청년당의 일원으로 1919년에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을 청원했었다이런 경험이 호치민과의 공감대를 만들었을 것이다. 2017년 미국의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켄 번즈(Ken Burns)가 제작한 베트남 전쟁 10부작(PBS Vietnam War Series)을 보면 호치민이 시작부터 반일 투쟁을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0년 전 세계는 다시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갔습니다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대부분을 점령했고일본 제국은 아시아의 유럽 식민지를 위협하면서 베트남을 점령했습니다또한 그들 동맹인 프랑스 협력자들이 식민지를 계속 통치하도록 했습니다일부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이 오는 것을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배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망명 중이던 호치민은 일본 제국주의를 프랑스 제국주의와 똑같은 침략자로 여겼습니다그들은 오로지 조국 베트남의 자원 수탈에만 관심이 있고베트남 곡물로 자신의 밥그릇을 채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죠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모든 애국자농부노동자상인군인들이여단결하여 프랑스와 일본 제국주의자들 그리고 그 협력자들을 물리칠 때가 왔습니다.”라고 말입니다.”


(1944년 12월 대프랑스 항전과 대일전을 위해 결성된 베트남 해방군, 맨 왠쪽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보 응우옌 잡 장군이다.)

 

PBS 베트남 전쟁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호지민은 분명 일본 제국이 침공해올 때부터 반일주의자였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호치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뜻 깊은 교류를 프랑스 파리에서 했었다대략 30년 동안 인간 호치민을 연구했던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는 지금까지 나온 가장 두꺼운 호치민 전기를 집필했다. 2000년에 출간된 이 책은 2003년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간되었는데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에도 호치민이 식민지 조선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안남애국자 연합은 표면적으로는 급진적 목표를 내걸지 않았다실제로 조직의 창립자들은 베트남인 공동체 내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위해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으려 했다조직의 명칭에 전통적인 베트남’ 대신 안남이라는 말을 쓴 것도 정부에 이 조직이 식민지 체제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내려는 의도였을 것이다그러나 타인(호치민 예전 이름)은 처음부터 이 연합을 이용하여 베트남인 공동체를 인도차이나 식민지 체제에 대항하는 효율적인 세력으로 전환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다그는 이미 조선인이나 튀니지인 등식민지 통치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그들 나름으로 비슷한 조직을 세운 다른 민족 단체와 접촉하고 있었다.”

 

출처호치민 평전 p.108

 

응우옌 아이 쿠옥은 이 글에 이어 인도차이나와 조선이라는 글을 르 포퓔레르(Le Populaire)에 실었고이어 10월에 같은 잡지에 우트레 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실었다앞의 글과 마찬가지로 이 두 글 역시 프랑스의 몇몇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면서도제시하는 해결책은 기본적으로 온건했다.”

 

출처호치민 평전 p.120


(1945년 탄라오에서 찍은 호치민의 사진, 당시 미국 OSS요원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다.)

 

이 구절에서 호치민이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그리고 이것은 2018년에 발견된 프랑스 경찰 당국의 문서 내용과 상당히 연관성이 있는 이야기다일본이 침략한 시점부터 반일투사였던 호치민은 1941년에 중국과 베트남 국경지대에 잠입하여 팍 보(Pac Bo) 동굴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창설했다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독립동맹 즉 베트민(Viet Minh)이다베트민의 군대는 20세기 최고의 명장 보 응우옌 잡(Vo Nguyen Giap)이 이끌었고호치민이 조직한 베트민은 1941년부터 1945년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는 시점까지 반일독립투쟁을 전개했다이런 점에서 호치민의 반일애국투쟁은 당연하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호치민 평전윌리엄J.듀이커정영목(), 푸른숲, 2003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뉴스홈 김용래 기자, 2018년 9월 30일자 기사

 

PBS 베트남 전쟁 시리즈켄 번즈 제작, 2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길 한반도는 냉전이 끝나지 않은 곳이라고 한다. 1948년 남한과 북한에 두 개의 국가와 두 개의 체제가 형성된 이후부터 한반도는 지금까지 대략 73년간 분단되어 있는 상태다. 1948년부터 현재까지 북한과 남한 국경선에서 크고 작은 교전부터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까지 간 적이 있었다. 1950625일에 시작된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과의 전쟁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거대 진영이 맞붙는 국지전으로 발전했었다. 물론 한국전쟁과 같은 대규모 전면전은 1953년 휴전 협정이 성사된 이래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적은 적잖게 있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날 뻔 했던 위기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도 있었다. 20101123일 오후 234분 북한군이 대한민국 서해에 있는 섬 연평도에 170발의 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2명과 한국군 2명이 전사했으며, 북한군의 포격을 받은 가옥과 시설이 파괴되었다. 이 사건에서 한국인들이 느낀 충격과 공포는 상당했다.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나 또한 전쟁이 날거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와 더불어 이 사건으로 인해 김정일 돼지를 죽여야 한다.” 혹은 북한은 믿을 수 없는 적이라는 반북 반공의식이 생겼을 정도였다. 거기다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정부에서도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 몇 시간 뒤 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2차 도발을 할 시에 전쟁이 선포된다.”는 발표를 했었다.

 

이러한 분위기였기에 전쟁이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던 로버트 게이츠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대한 군사적인 보복을 계획했었다.”고 폭로했었고, 그것을 미국이 중지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한반도는 전쟁이 일어날 뻔했던 적이 여러번 있었다. 그 외에도 1968년 김신조 청와대 습격사건과 울진 삼천 무장공비 사건,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999년 제1차 연평해전과 2002년 제2차 연평해전, 2015년 서부전선 포격 사건 등 양측의 교전은 많았다. 양측의 긴장관계는 심각해져서, 2017년 여름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북한을 겨냥하며 화염과 분노를 맛볼 것이라고 북한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도널드 트럼프의 이러한 발언들인 제국주의 국가 미국이 상대방에 대해 위협할 때 자주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양측의 긴장관계가 높아질 때, 북한 내부에서 드러나는 구호나 발언들이 있다. 바로 반미주의적인 발언이나 구호들이다. 그렇다면 왜 북한은 반미국가인 것이고, 그러한 반미주의적 구호나 행동들이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물음을 찾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한국에서 이승만식 북진통일을 원하는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들은 북한이 반미적 구호를 외치는 것과 그들이 그런 구호를 외치는 이유에 대해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다. 이것은 대한민국에 대해 자유민주주의와 같은 용어들을 이용해가며, 친미 혹은 숭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집단들 또한 마찬가지다.

 

내가 생각하기에 북한이 반미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반도의 근현대사와 국가가 존속해오면서 겪어야 했던 일련의 과정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북한이 자주 내세우는 명분 중 하나는 자신들의 항일투쟁 정통성에 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시점까지 항일독립운동을 해온 인물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평양에서 소련 군정사령관 치스차코프와 같이 연단에 섰을 때, 놀라움과 더불어 환영의 목소리도 들렸던 것이다. 즉 그런 김일성이 1950년에는 미국과 그 제국주의 군대까지 참전한 상황에서 북한이라는 나라를 지켰다. 이런 점에서 북한이 생각하는 한국전쟁은 이른바 조국해방전쟁인 것인데, 여기에는 1945년 해방 이후 남한에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표출된 제국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모순점들이 폭발한 점들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점에서 해석하기도 했다. 즉 북한의 경우도 그런 맥락에서 한국전쟁을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의 경우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측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이 먼저 일으킨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어찌됐든 그 전쟁 자체는 브루스 커밍스가 지적한 모순점들이 분출하여 전쟁의 상태로 발전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국전쟁이 전개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북한은 미공군의 잔혹하고 야만적인 폭격을 경험했다. 이것은 사실상 일방적인 민간인 학살극에 가까웠다. 미공군이 타격하는 곳들 대다수가 군사시설이 아닌 민간시설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유럽과 태평양에서 사용된 네이팜 폭탄도 북한에 대대적으로 투하했다.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에 투하한 폭탄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본토에 투하한 폭탄량에 최소 3배 이상이었다. 635,000톤이나 되는 폭탄이 북한에 투하됐다. 여기에 북한에 투하된 네이팜 폭탄 3만 톤을 추가하면 665,000톤이 된다. 민간인 사망자도 극심했다. 이런 야만적인 전략 폭격을 계획했던 커티스 르메이의 말에 따르면 대략 100만 명 이상의 북한 민간인이 폭격으로 사망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 초기 마오쩌둥이 병력을 파견했을 때, 핵폭탄 사용도 고려했었다. 물론 이것은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의 독단적인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전쟁의 구도는 국제적인 시각에서 제국주의 대 사회주의적인 구도를 분명히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에 지원군을 보냈던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한반도에서 북진하는 유엔군이 만주에서 공격하고, 대만으로 피신한 장제스 군대가 미군과 연합하여 중국 영토에 상륙작전을 개시하며, 인도차이나에서 식민지 유지를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치르던 프랑스가 중국 남부지역을 위협할 것이라 우려했었다. 이러한 구도를 보았을 때, 당연히 북한이 한국전쟁을 조국해방전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으로 볼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미군의 폭격은 극심했고, 이런 민간인 학살은 북한 사람들이 반미적인 정서를 불붙히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쟁 초기 한국 우익 청년단이 저지른 신천 양민 학살사건과 각종 민간인 학살들도 북한사람들의 반미정서를 자극했었다. 이러한 반미정서는 전쟁이 끝난 이후 더 발전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유지되어 온 것이다. 특히나 북한이 전후 재건 이후 군의 현대화에 있어 대공 방어망을 강화했던 이유에는 미군의 야만적인 무차별 폭격도 영향이 컸다. 거기다 한국전쟁 이후에도 미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정책들을 펴왔으며,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8년 구정 공세로 맥이 빠져 있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북한에 대해 선제 핵공격을 운운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대통령이 된 리처드 닉슨 또한 당연히 북한을 위협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0년대 북한은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GDP가 박정희 정권보다 앞섰던 북한은 1980년대부터 경제가 점차 흔들렸고, 동구권 몰락과 더불어 소련이 해체 되면서 경제적으로 위급해졌다. 거기다 홍수를 비롯한 자연재해가 겹치고, UN을 통한 미국의 경제제재가 지속되면서 결국 무수히 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을 겪어야 했다. 고난의 행군은 북한 전역을 강타했고, 북한에서 삶의 질이 좋은 평양마저도 고난의 행군으로 고생을 했다. 일각에서는 고난의 행군 책임을 김일성과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돌리지만, 이러한 책임론은 매우 의미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 사람들의 생각과 전혀 맞아 떨어지지도 않으며 설득력도 매우 부족하다.

 

영화 강철비2에서 나온 것처럼 실제로 북한은 소련 해체 이후 미국과의 수교협정을 요구했다. 여기서 이를 완벽히 무시한 대상은 바로 미국이었다. 거기다 1994년 전쟁 위기에서 미국 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 사태 개입이나 유고 내전 개입처럼 북한과 실질적인 전쟁을 치르려 했다. 아니 베트남 전쟁이나 걸프전쟁처럼 침략전쟁을 실행하고자 했었다. 그 시기 클린턴 정부는 팀스피리트 훈련을 재개했다. 팀스피리트 훈련엔 미군과 한국군 20만이 동원되었고, 평양에 대한 핵폭격 훈련, 원산과 흥남항에 대한 대규모 상륙훈련 등이 진행되었는데, 이러한 대북 도발은 예전부터 미국과 한국이 자주 해오던 것이었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북한이 선택한 길이 바로 핵무장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이 있기에 북한이 미국에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으로 북한이 반미주의를 내세우는 것도 앞에서 설명한 역사적인 맥락과 더불어 정치적이고 국제적인 상황 속에서 알 수 있다. 사실 한국에서 이른바 대남도발로 알려진 사건들의 실질적인 원인을 판단해보면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한 반대급부에서 행해진 일련의 사건들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을 본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나 수구세력들은 이런 빨갱이 새끼라고 하며 욕과 비난을 일삼겠지만, 그들이야 말로 이러한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몰역사적 시각을 가진 것이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무조건적으로 동조하는 제국주의자들이다. 지난 해 미국과 이란의 전쟁 상태에 갔을 때, 호르무즈 해협에 한미동맹 강화를 위해 한국군을 파병해야 한다.” 주장하며, 반전시위를 하던 이들을 빨갱이 혹은 종북이라 운운했던 이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제국주의의 위험성과 폭력성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한반도의 긴장관계와 평화수립을 위해선 북한이 왜 이러한 결정을 했고, 왜 이러한 상황에 놓였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이해가 없으면 상호존중과 이해관계 속에서의 평화체제 건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트] 마오쩌둥 1~2 - 전2권 문제적 인간 13
필립 쇼트 지음, 양현수 옮김 / 교양인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시아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는 나라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나라다. 14억 인구를 자랑하는 나라 중국은 현재 중국 공산당이 다스리는 정치체제다. 중국 공산당이 14억 인구 전부를 다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다수 중국인민들은 그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편이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을 놀러 가면 관광지로 꼭 들리게 되는 곳이 있다. 바로 천안문이다. 천안문에는 한 인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 인물이 바로 현대 중국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은 다방면에서 평가해볼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그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선 비판의 대상의 되기도 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중국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을 잡은 덩샤오핑이 공7 3으로 평가 내린 것처럼, 부정적인 평가보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베이징 천안문 광장 쪽에는 아직도 마오의 시신을 방부 처리한 그의 묘가 있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참배하기 위해 먼 곳에서부터 그곳을 방문한다. 또한 현재 중국의 지폐는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마오쩌둥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그 외에도 마오쩌둥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높이 평가하는 모습들이 중국 곳곳에 드러나 있다.

 

반면 서방세계나 대한민국에서 내리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중국이나 중국인들이 내리는 평가하고는 상당히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선 한국에서 기억되는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적대국인 침략자 북한을 도운 공산주의 두목정도로 보는 평가가 많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인식을 말하는 것이다. 서방에서 내리는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그들이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해 내리는 부정적인 평가와 겹치는 부분들이 있다. 그래도 스탈린과는 달리 마오쩌둥은 서방학계에서 혁명가적인 입장은 제법 인정받는 편이다.

 

마오쩌둥에 대해 평가할 때,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들은 학계에서 상당히 많은 편이지만, 대표적으로 두 가지 사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1950년대 소련과의 갈등 속에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단행했던 이른바 대약진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1960년대 중반부터 대략 2~3년 동안 강력하기 전개되었던 문화대혁명이다. 아무래도 이 두 가지 사례가 보편적인 측면에서 마오쩌둥이 강하게 비판받는 이유일 것이다. 대약진 운동 과정에서 일어난 대기근 사태는 참으로 끔찍했고, 최소 2,000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이 기근을 고의적으로 이용하거나 일으키고 민중을 학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저지른 실책 또한 명백했다. 1960년대의 문화 대혁명은 최소 100만에서 150만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대부분 경우 공개처형에 의한 것이 아닌 자살이었다. 물론 마오쩌둥이나 중국 공산당이 사살을 명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분명히 마오쩌둥은 과오가 있었다. 1950년대의 대약진 운동의 경우 고의적인 학살은 아니었지만, 문화 대혁명의 경우 필요한 측면이 있었을지라도 많은 실책과 과오들 특히 마오쩌둥이 개인적인 이기심에서 벌어진 부분들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홍위병들에게 무고하게 희생되었다. 심지어 중국의 동맹국인 북한의 김일성도 홍위병에게 반동으로 비판받는 아이러니가 벌어질 정도였다. 그런 한계점이나 과오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마오쩌둥을 잊지 않고, 그를 전사회적인 영역에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의 근현대사와 밀접해 있다.

 

한국 사람들이 깊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중국의 근현대사는 말 그대로 외세의 침탈과 피로 물들은 역사다. 1842년의 아편전쟁부터 시작된 외세의 침탈과 서구 열강의 지배 및 착취는 거대한 나라였던 중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서구 열강은 20세기 초까지 중국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중국 대륙에서 일으킨 전쟁 또한 그런 맥락에서 전개된 침략이었다. 즉 그렇게 뜯기던 중국을 하나로 뭉쳐 통일시키고, 중국을 더 이상 서구 열강에게 뜯기지 않는 강대국으로 만들었던 인물이 바로 마오쩌둥이었다. 따라서 중국 사람들이 이 위대한 조타수(중국 사람들의 표현을 빌림)’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 중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래로 중국은 더 이상 서구열강에게 침탈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제적으로도 말이다. 오히려 중국은 서구 열강이 대등한 위치에서 판단하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대표적으로 중소 국경분쟁 당시 중국을 들 수 있다. 1969년 진바오섬(러시아어로는 다민스키섬)을 둘러싸고 시작된 중국과 소련의 국경충돌은 자칫하면 양측 사회주의 국가 간에 전면전으로 확대될 뻔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미국은 소련을 상대하고자 중국의 편을 드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였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동맹국인 북베트남을 침략하여 잔혹하고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970년대 초에 시작된 데탕트에서 미국이 파트너로써 선택한 나라는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의 동맹국 북베트남에게 침략을 자행하던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2년 미국 최초로 중국을 방문한 대통령이 되었다. 중국을 방문한 닉슨은 중국과 수교를 맺고, 양국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대화의 문을 미국이 중국에게 열고자 한 모습에서 사실상 서구열강의 위치에 있는 미국이 중국을 어떠한 관계 속에서 판단하고 평가를 내렸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미국이 중국에게 이러한 접근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중국이라는 나라를 무시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점을 생각해볼 때, 마오쩌둥 통치 시기 중국이 어떠한 위치에 올랐는지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 이번에 내가 읽은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상당히 흥미로운 마오 전기였다.

 

1970년대와 80년대 중국에서 BBC 특파원으로 근무했던 필립 쇼트는 국내에 출간된 <폴포트 평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중국에서 살았던 쇼트는 1999년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 전기를 출간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 뒤 쇼트는 개정판을 냈다. 이 개정판은 1999년 이후 나온 마오쩌둥에 대한 새로운 연구 자료와 문서들을 추가했고, 기존의 내용을 더 가다듬었다. 따라서 쇼트는 책에서 방대한 자료들을 잘 소화해냈다. 책에 주석으로 달린 자료들을 상세히 보면 수많은 자료를 이용하고 참고한 그의 노력이 돋보인다.

 

2017년에 국내에서 <마오쩌둥 평전>으로 번역되어 출간된 알렉산더 판초프의 마오 전기 또한 방대한 자료, 특히 러시아 측의 방대한 문서들을 바탕으로 최신의 정보들을 담아냈다. 아마도 이것이 판초프의 마오쩌둥 전기가 가지고 있는 장점일 것이다.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그것을 충분히 뛰어넘는 수준의 방대한 자료들을 참고하고 이용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책에 달린 주석들에 매우 꼼꼼하게 박힌 내용들은 독자로 하여금 여러 자료들을 교차검증할 수 있도록 상세한 배려를 해주었다. 물론 판초프의 책도 방대한 자료를 담은 마오쩌둥 전기라는 점을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료이지만, 이번에 쇼트의 마오 전기를 읽으면서 그것을 뛰어넘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에서 적잖게 돋보이는 점은 바로 필립 쇼트가 혁명가 시절의 마오쩌둥을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혁명가 시절 마오쩌둥에 대한 필립 쇼트의 평가는 기존의 서방학자들에 비해 상당히 두드러지는 편이다. 일단 쇼트가 보는 마오쩌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중국의 혁명가로선 매우 뛰어난 인물이지만, 이후 권력자로써도 무자비했던 인물이다. 쇼트의 책을 읽다보면 마오쩌둥이 혁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이상을 가지고 혁명에 투신하는 과정들은 상당히 흥미롭게 서술되어 있다. 혁명 이후 중국의 지도자가 된 마오쩌둥에 대한 쇼트의 평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물론 쇼트는 일부 반공주의적 혹은 반중주의적 우익 학자들이 저지르는 편향된 오류는 저지르지 않는 편이다.

 

예를 들면 익학자 프랭크 디쾨터는 대약진 운동의 아사자가 4,500만 명 이상이 된다고 주장했고, 기근의 원인을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모습에서 찾았던 것에 반해 저자 필립 쇼트는 마오쩌둥 집권기 일어난 대약진 운동의 원인을 정책적 실책에서 찾고 있으며, 아사자가 4,500만 명이라는 수치가 매우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여러 자료들을 통해 교차검증한 아사자 수치를 내놓는다. 즉 이러한 점에서 필립 쇼트는 다른 반공주의적 혹은 반중주의적 학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점을 보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책에서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쇼트는 마오쩌둥에 대해 접근할 때, 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에 대해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쇼트가 언급하는 스탈린에 대한 수준은 솔작하게 말하자면, 자칭 자유주의자들의 관점과 전혀 다르지 않다. 물론 필립 쇼트는 중국 전문가이기에 소련이나 스탈린에 대해서 그러한 시각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소련에 대한 그의 시각이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쇼트는 마오쩌둥에 대해 접근하면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이나 개인권력 강화라는 점에 주목하며 유사성을 찾는다.

 

하지만 쇼트가 개인독재 강화라는 스탈린의 대숙청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문서고가 개방이 되면서 계급투쟁적인 측면이 수정주의적 사학자들에 의해 조명 받았으며, 명분이 있었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대숙청에 대한 쇼트의 접근은 나이브하다. 또한 스탈린에 의해 사망한 사람이 대숙청과 굴라그 노동수용소를 합치면 1,200만에서 1,500만이라고 하지만, 이 또한 상당히 과장된 수치이다.(이것은 소련사 수정주의 연구자들의 자료를 보면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이나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도 다소 아쉬운 점들도 있다. 쇼트는 현재 중국인들이 마오쩌둥 시대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많이 강조한다. 출판이나 표현 등과 같은 일종에 서구의 기준을 들면서 말이다. 더 나아가 쇼트는 개정판 후기에서 중국은 역사적으로 단 한번도 민주적인 국가였던 적이 없다,” 혹은 서방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 낸 것은 중국이 단기간에 이루어 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식의 서술들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이었다. 이러한 표현에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다른 보편적인 체제들 보다 낫다는 전제가 깔려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 쇼트는 자유주의적 성향이 다소 드러난다.

 

예를들면 쇼트는 자유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그로인한 자본주의적인 성장을 얘기하는데, 그로인해 나타난 부정부패나 빈부격차, 사회주의 복지의 쇠퇴 등에 대한 비판은 매우 약하다. 아니 오히려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변했다고 강조한다. 물론 개혁개방을 거치며 중국이 급속도의 경제성장과 부를 창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인해 극심해진 부정부패나 빈부격차 등과 같은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문제들은 분명히 마오쩌둥 시절과는 비교과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해졌다. 이것이 개혁개방의 핵심이다.

 

또한 쇼트는 마오쩌둥 시절 양질은 아니지만 제법 공평하게 제공되었던 무상의료 무상복지등의 향수의 영향력은 다소 무시하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양질은 아니지만 마오시절 중국의 무상의료는 적어도 미국보다 일반 인민들에게 더 좋은 보편적인 의료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것은 리영희 선생이 쓴 <8억인과의 대화>에 잘 나오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은 단순히 자유라는 단어로만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기에 비판적으로 지적할 수밖에 없다. 비슷한 맥락으로 현재 러시아인 70%가 이오시프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도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필립 쇼트는 기존에 나온 반공주의적 혹은 반중주의적 학자들의 서술들에 비하면 상당히 객관적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객관성은 바로 중국 국민당에 대한 접근에서 돋보인다. 최근 들어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 작업들이 주목을 받는 추세이다. 물론 장제스에 대해 일정부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학술적인 차원에서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장제스에 대한 재평가는 아이러니 하게도 현대 중국에서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제스 재평가의 문제는 일부 학자들이 지도자 장제스를 지나치게 미화적 혹은 옹호적인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 있다. 필립 쇼트는 국민당군이 저지른 만행이나 악행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고자 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쇼트의 그러한 서술들은 제1차 국공내전이나 대장정, 중일전쟁, 신사군 사건 그리고 제2차 국공내전등에 대한 주제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쇼트는 장제스 정권이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제스 정부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점점 신뢰를 잃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난 뒤 국민당 뜨내기들은 충칭에서 도시로 몰려와서 도시의 행정 기관을 차지했으며, 일제 강점기에 살아남은 도시의 상류층을 적대시했다. 그러던 중에 내전이 시작되었다. 중간계급 사람들은 공산당을 비판하기보다 장제스가 평화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악인 것은 공개 처형과 비밀경찰로 유지되던 일당 독재, 자유주의적 반대자들에 대한 암살, 전쟁 수행을 위한 화폐 남발이 야기한 극심한 물가상승과 실질 수입의 감소, 정당한 영업 행위를 할 수 없게 만드는 만연한 부정부패였으며, 이는 국민당 핵심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국민당 정부의 폐해가 자라난 뿌리에는 장제스가 세운 체제가 있었다. 그 체제는 너무도 약하고 파벌 싸움이 심해서 체제 자체를 인민들에게 강제할 힘이 없었으며, 너무도 부패하고 공공의 복지를 등한시한 탓에 인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끌어낼 수가 없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15~116

 

에드거 스노의 저작 <중국의 붉은 별>과 알렉산더 판초프의 저작 <마오쩌둥 평전>과 더불어 3번째로 읽은 마오쩌둥의 전기지만,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이 흥미롭게 읽힌 것은 아무래도 국민당에 대한 균형 있는 서술들을 잘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책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부분 중 하나를 뽑자면 한국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대략 3년간 진행된 한국전쟁에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한 이유에 대한 서술이 상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쇼트 또한 사회주의 중국이 국공내전기 혁명투쟁을 도왔던 북한의 은혜를 외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책에 나온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의 이야기를 의심한 마오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북한의 공격 개시를 정말로 승인했는지 확인했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37~138

 

앞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필립 쇼트의 마오쩌둥 전기는 상당히 많은 자료를 이용하고 참고한 책이다. 또한 장제스에 대한 객관적인 비판도 매우 잘 드러나 있으며, 이를 통해 상당히 균형 있는 시각을 견지하려는 저자의 노력도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자유주의적 성향이 다소 돋보이는 저자의 한계도 있다. 비록 단점이 없진 않지만, 기존에 서방 사학자들이 출간한 중국 근현대사 관련한 책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분명히 읽어볼 가치가 높은 책이다. 책의 분량이 두껍기에 읽는 데 다소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만, 일단 나는 두꺼운 책이 읽을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다소 선호하는 부분이 있다. 마오쩌둥에 대해 관심 있는 이라면 이 책을 읽어볼 가치가 매우 높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얘기하자면, 책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개정판 후기 2’는 서방 사학자들이 다룬 중국 근현대사 관련 혹은 마오쩌둥 관련 서적들에 대한 필립 쇼트의 학술적인 평가가 들어가 있다. 상당히 가치가 있는 자료다. 또한 기존의 서방 사학자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마오쩌둥과 중국 근현대사를 접근해 왔는지도 같이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장에선 서방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장융과 존 핼리데이 공저 <마오>와 프랭크 디쾨터의 <인민 3부작> 그중에서더 대약진 운동을 다룬 <마오의 대기근>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과 체계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전자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이 개정판 후기 2를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중국 혁명가로서의 마오쩌둥과 중국 최고 권력자 혹은 지도자로서의 마오쩌둥을 알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적극 권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Redman 2021-02-27 00: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벽돌 책 두 권을 구할 재량이 없기에 바로 구할 수 있는 도서관에서 판초프 본을 빌려서 읽어보려 합니다 ㅋㅋ 우선 중국사 공부 좀 더 하고

NamGiKim 2021-02-27 00:53   좋아요 0 | URL
판초프는 2018년 초에 읽었습니다. 주로 러시아 문서들이 인용된게 장점입니다.
 

(아래에 있는 내용은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의 저자이자 미국사 전공자인 콜롬비아 대학 교수인 앨런 브링클리가 책에서 집필한 내용입니다.)

 

1953727, 한국의 판문점에서 교섭 당사자는 마침내 휴전 동의서에 서명했다. 두 적대 세력은 각자의 군대를, 전쟁 이전의 남북한 경계선인 38선을 따라 현 전선에서 1.5마일씩 후퇴시켜야 했다. 한국을 평화적으로 재통일할 수단을 강구하기 위해 1954년에 제네바 회담이 열렸지만, 사실 그 회담에서는 어떠한 합의도 끌어내지 못했으며, 휴전선은 양국 간에 명백하고도 영구적인 경계선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거의 동시에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길고도 쓰디슨 전쟁에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1945년 이후 프랑스는 한때 식민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게 포기해야만 했던 베트남에서 예전의 권위를 되찾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 반대하는 호찌민(Ho Chi Minh)의 강력한 민족주의 세력은 독립 투쟁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호찌민은 대서양헌장의 반식민지적 수사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에 기초하여, 1945년에 미국의 지원을 희망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제2차 세계대전 증 일본과 싸울 때 미국의 정보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민족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였다. 트루먼 행정부는 호찌민을 무시하고 미국의 가장 중요한 냉전 우방 중의 하나인 프랑스를 지원했다.

 

호찌민은 1954년까지 공산주의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한편, 미국은 1950년 이래 베트남에서 프랑스가 벌이는 성과 없는 전투의 비용 대부분을 지불하고 있었다. 1954년 초, 12,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라는 부락에서 위험스런 포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미국이 개입해야만 프랑스 군대가 완전히 괴멸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아이젠 하워는 국무 장관 덜레스, 부통령 닉슨, 그 외 여러 사람이 강력히 권하는데도 의화나 미국의 여타 우방이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베트남에서 미군의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를 거절했다.

 

미국의 원조가 없게 되자, 프랑스의 디엔비엔푸 요새는 마침내 195457일에 붕괴되었다. 그해 여름, 한국에서의 협정을 고려하던 제네바 회담에서, 프랑스는 재빨리 갈등의 조정에 동의했다. 미국이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니었던, 19547월 베트남에 관한 제네바 협정은 17도선을 따라 베트남을 잠정적으로 분단시키는 것이었다. 북쪽은 호찌민이, 남쪽은 친서방 체제가 지배하게 되었다.

 

민주 선거는 1956년에 베트남을 통일할 토대가 되었다. 그 협정은 프랑스의 베트남 개입이 끝나고 베트남에서 미국이라는 존재가 확대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부각시켰다.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세우는 데 협력했으며, 정권의 우두머리로 소수 세력인 가톨릭교도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을 세웠다. 패배를 예상한 디엠은 1956년 선거를 허용하지 않았다. 북쪽에서 어떤 공격을 가해 와도 미국이 군사원조를 풍족히 제공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디엠은 선거를 거부하면서도 안전하다고 느꼈다.

 

출처: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3 p.374~3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국제분쟁이었다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민간인 학살인종청소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들이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유고슬라비아의 영웅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이후 국가가 사분오열된 유고슬라비아는 종족분쟁과 소수민족 대립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른바 NATO군의 이름으로 군대와 대규모의 항공력을 투입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그것은 이 추악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생각보다 안 알려졌다는 점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 이전에 미국이 개입했던 또 다른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도데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그 자체 보단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개입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1990년대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상황)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투쟁을 전개했었다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심지어 사회주의권에서 해외여행의 자율화를 최초로 성공시킨 나라였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중국의 한족(중국 인구의 94% 이상)이나 베트남의 비엣족(킨족베트남 인구의 87%이상)과는 달리 가장 많은 종족이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과 다수종족의 인구 비율과 비슷하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년 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그리고 그해 8월엔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그 도시가 맞다.)를 포위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평화 유지군으로 파견된 미군)

 

1994년 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95년 8월 28일 세르비아측에서 사라예보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하자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딜리버럿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을 나섰다이 작전은 17일간 전개되었다. 400대 이상의 나토군 항공기가 항시 대기했고,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이 이루어졌으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F-15 전투기,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맹폭을 가했던 항공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보스니아에 개입하면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총 15회나 출격시켰다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B-2B 스텔스 폭격기, 한 대당 약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자랑하는 이 스텔스기는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이 투입했던 최강의 전력이었다. 심지어 이 기종은 유럽 인근이 아닌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를 폭격하고 다시 미국 본토로 복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내전이 다시 발발했다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총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만 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만 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밀리터리 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다음과 같다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코소보 내전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던 밀로셰비치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면서 끝이났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과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된 코소보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와 전쟁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전쟁보다 추악하고도 잔인했다물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나 신유고연방의 밀로셰비치 등이 저지른 악행들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전쟁범죄였다그러나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이 주장하듯이인종청소를 자행한 이들과는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미국이 진행한 폭격 또한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만들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맹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공중폭격 또한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폭격처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또한 코소보 내전 당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미국을 강력히 비판했었다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조사에서는 81%거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을 정도였다대부분의 응답자들은 미국이 러시아 국경지역에 역으로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따라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벌어진 참상과 더불어 NATO군 형태로 개입하여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미국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참고문헌

 

궁극의 군대토머스 G. 맨켄김수빈(), 미지북스, 2018

 

미국 민중사 II하워드 진유강은(), 이후, 2008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역)들녘, 2015

 

좌파 세계사닐 포크너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하워드 진아거인물과사상사, 2020

 

유고 내전 총합본샤를TV, 2020년 7월 21일자 유튜브 영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