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대한민국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했다.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친필을 남겼다. 그 친필은 바로 ‘성전만리’다. 즉 “조국을 떠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이와 같은 박정희의 친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은 우방국 미국을 도와 자유민주주의 남베트남을 수호하는 전쟁이었다. 이것은 당시 해리 트루먼 대통령과 리처드 닉슨 그리고 린든 존슨 등이 인식하던 이른바 ‘도미노 이론(Domino Theory)’와 다르지 않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국가적으로 체계화시킨 저급한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것이 바로 반공주의(Anti-Communism)다. 애초에 군사혁명 공약 가장 먼저 서술한 것이 “반공을 국시의 제1로 한다”였을 정도로 매카시즘급의 반공주의를 강조한 박정희 정권은 당연하게도 베트남 전쟁을 반공성전과 같은 시각으로만 접근한 것이다. 박정희가 베트남에 파병할 당시 이러한 반공주의적 시각에 반대한 참된 지식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사상의 은사라고 불리는 리영희다. 1974년 그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쟁인지를 객관적 근거에 입각하여 입증해냈다. 그렇다면 베트남 전쟁이 왜 민족해방전쟁인 것일까?
그 이유는 베트남의 19세기 그리고 20세기의 근현대사를 보면 알 수 있다. 19세기에 응우옌 왕조를 거치던 베트남은 1858년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다. 1858년 베트남의 항구도시 다낭에 상륙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지역 전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들은 베트남을 북부는 통킹 중부는 안남 남부는 코친차이나로 삼등분하여 통치했고, 꼭두각시 황제를 내세워 통치했다. 프랑스 치하의 베트남에선 판보이쩌우와 같은 민족주의적 독립운동가들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 놓여있던 1890년 베트남 응에안 성 낌리엔 마을에선 미래의 지도자가 될 인물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베트남의 국부인 호치민(Ho Chi Minh)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 강대국들은 파리에서 강화회의를 열고,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 self-determination)를 주창했고, 이에 감명 받은 20대 청년 호치민은 ‘안남 민족의 요구라는 8개 조항’을 청원했다. 그러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와 서구 제국주의는 이를 무시했다. 이에 따라 호치민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블라디미르 레닌에 감명을 받는다. 따라서 1923년 모스크바로 가서 훈련받은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와 교육 및 혁명운동 건설에 이바지했고, 이에 따라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홍콩에서 창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유럽에서 한참이던 1940년 나치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다. 이에 따라 당시 독일의 동맹이던 일본은 인도차이나를 접수했다.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이 베트남을 점령한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사악함을 잘 알고 있던 호치민은 1941년 중월국경지대에 잠입하여 30년 만에 귀국한 뒤 이른바 혁명조직인 베트민(Viet Minh)을 창설한다. 베트민은 계급 출신성분을 망라한 혁명조직으로 항불항일의 기치를 들고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OSS팀이 베트남에 잠입하여 이들과 협력하여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끝났고, 미국 또한 더 이상 베트민을 훈련시킬 필요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호치민은 베트민에게 봉기를 호소하여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1945년 9월 2일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베트남 독립’을 선언한다. 얄타회담과 포츠담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처럼 신탁통치를 합의본 연합국은 북위 16도선에 따라 북쪽은 중국 국민당군 남쪽은 영국군이 접수하게 했다. 베트남 문제에 관심 없던 영국은 옛 지배자인 프랑스를 다시 끌어들였고, 중국 국민당 또한 내전의 분위기에 휩싸이면서 베트남에서 완벽히 철수한다. 베트남을 다시 지배하고 싶었던 프랑스는 호치민의 베트민과 합의를 보려고 했지만, 예전에 일본이 내세웠던 괴뢰 황제 바오다이를 내세우며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대하려 했다. 이런 과정에서 1946년 11월 프랑스의 군함대가 베트남의 항구도시 하이퐁을 포격했고, 민간인 6,000명을 그날 사살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자, 베트민을 이끌던 호치민은 전인민의 항쟁과 투쟁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베트남 민중과 혁명군대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하게 된다. 전쟁 초기 프랑스군이 승기를 잡는 것 같기도 했지만, 1949년 국공내전이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1950년 소련의 스탈린이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전세는 베트민군에게 유리해졌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프랑스에게 전쟁물자와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지원은 대대적으로 증가하여 1954년에 이르러 프랑스 전쟁비용의 80%를 미국이 대신 지원했다.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점차 베트민에게 유리해졌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 베트민과 프랑스측은 제네바에서 회담을 준비하면서도 서로가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대규모 전투를 준비하는데, 그게 바로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앙리 나바르의 지휘를 받은 1만 6,000명의 프랑스 최정예 부대는 디엔비엔푸 요새를 철벽같이 방어했지만, 베트남의 명장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장군은 앙리 나바르가 상상하지도 못한 전략전술로 디엔비엔푸를 포위하여 56일만에 함락시켰다. 이게 1954년 5월 7일이었다. 프랑스 최정예 부대 11,000명이 베트민군의 포로로 붙잡혔고, 프랑스는 결국 제네바 협정을 통해 물러나게 됐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이번엔 또 다른 강대국이 적극적으로 베트남 문제에 개입했다. 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개입해오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따라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분단된 베트남 상황에 개입했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가 내세우던 괴뢰황제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남베트남에 새로운 인물을 지도자로 내세웠다. 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다. 남베트남에 괴뢰국을 세운 미국은 당연하게도 2년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다. 이에 따라 응오딘지엠은 남베트남에서 부정부패를 일삼으며 자신 만에 왕국을 건설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응오딘지엠 정권은 반민중적이고 부정부패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에 반대한 민중은 1960년 남베트남에서 새로운 조직을 창설하는데 그게 바로 베트콩(Viet Cong)이다.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은 1960년에 새로 당선된 존F.케네디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했다. 1961년 900명이었던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는 1963년에 이르러 1만 6,000명을 돌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응오딘지엠은 여전히 유지되지 못했다. 1963년 6월 남베트남의 고승 틱광둑이 소신공양을 하고, 민중은 디엠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고, 베트콩 또한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투쟁했다. 결국 응오딘지엠은 CIA의 계획에 따라 암살당한다.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에선 군벌들의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미국의 린든 존슨 대통령은 1964년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하여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물론 언급한 바와 같이 통킹만 사건은 미국의 치밀한 자작극이었다. 통킹만 사건을 조작한 이후 1965년 미국은 롤링썬더 작전(Operation Rolling Thunder)이라 하여 북폭을 개시한다. 그리고 그해 3월 다낭항에 미지상군 3,500명을 상륙시킨다.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1967년 말에 50만 명을 돌파했고, 전사자도 2만 명을 돌파했다. 또한 B-52와 같은 최신식 폭격기들은 남북 베트남 전역을 초토화 시키고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죽게 된다.
1965년 전면 개입한 이래 미국은 국민들에게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말은 1968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구정 공세(Tet Offensive)를 감행하면서 폭로된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은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의 암살과 68혁명의 흐름에 따라 대대적인 반전운동에 직면하게 된다. 구정 공세 이후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공화당의 닉슨 대통령은 이른바 베트남화(Vietnamization)라 하여 단계적인 철수를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1970년 캄보디아와 1971년 라오스를 침공했지만, 남베트남 철수과정을 단계적인 절차를 밟았다.
1972년 마지막 협박으로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가했지만,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완벽히 철수하기에 이른다. 1973년에 미국이 철수하자 남베트남은 무방비 상태에 놓인다. 1965년에 정권을 잡은 응우옌반티에우(Nguyen Van Thieu) 정권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1974년 12월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통일을 위한 계획을 준비했고, 1975년 초에 이를 실행했다. 1975년 3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공세를 가하자 남베트남군의 거점은 신속하게 무너졌다. 부온마투옷, 다낭, 후에 등의 도시가 단숨에 함락됐고, 4월 말엔 쑤언록의 방어선마저 함락됐다.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진입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대통령궁을 부수고, 남베트남의 임시지도자인 즈엉반민(Duong Van Minh)에게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로써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지금까지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얘기해봤다. 이처럼 베트남 전쟁은 19세기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하여 전개된 베트남 민중의 투쟁이었다. 즉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가 치르던 침략전쟁의 연장선상이었다. 당시 미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의 경우 지도부 대다수가 식민지 시절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협력했던 인사들이었다. 심지어 150만 명의 규모를 자랑하던 남베트남 군대의 지휘관이나 장교들 중에는 딱 한사람 그것도 육군 중령 한 사람만 식민지 시절 베트민에서 활동한 사람이 존재했다. 그 외에 나머지 군장성들은 죄다 프랑스에 협력했던 민족반역자들이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박정희가 주장한 반공선전 자유민주주의 따위의 용어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역사왜곡적인지 알 수 있다. 즉 미국과 한국 그 외의 자유라는 단어로 포장해서 참전한 동맹국들은 민족반역자 세력을 도와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를 이은 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에 맞선 베트남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이었다. 이런 본질이 너무나도 명확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아직도 자유니 민주주의니 돈을 벌었다니 하며 치켜세우는 대한민국 반공주의자들의 시각과 주장들이 참으로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다. 1960년대 당시 리영희 선생께서 주장하던 민족해방전쟁이라는 관점은 지금기준으로도 1%도 틀리지 않은 명백한 진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