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에서 연작으로 방영하고 있는 리영희 선생의 인생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리영희! 그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시절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각성시켰던 인물로, 사상의 은사라 불렸던 저항적 언론인이었다. 40년의 인생을 오로지 펜을 들고 저항했던 그는 현재 대한민국 정치계에 있는 인물들에게도 젊은 시절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현재 노무현 재단에 있는 유시민부터, 현재 대통령인 문재인, 화가 임옥상씨, 현재 성남시장인 은수미씨 등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인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 있는 군포시 중앙도서관 1층에는 살아생전에 리영희 선생께서 도서관에 기증하신 책들을 모아놓은 장소가 있다. 리영희 선생이 기증한 책 대다수는 선생의 흔적과 손자국이 남아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준다. 즉 이 책들은 리영희 선생이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 큰 역할을 했던 책들인 것이다. 나 또한 리영희 선생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총 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의 통역을 담당했을 정도로 뛰어난 영어 실력을 소유했던 그는 권력형 지도자이자 독재자였던 이승만과는 달리 권력과 권위에 아부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추구하는 길을 걸었다. 설사 자신이 삶이 윤택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이러한 부분이야 말로 리영희 선생이 정말로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한다. 그는 수십년간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오로지 진실을 탐구하고, 또 밝혀냈다. 그는 이승만 독재정권과 박정희 독재 정권 그리고 전두환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반공주의가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세계관을 거부했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독재정치에 항상비판적이었던 그는 1960년 혁명 당시 단순히 취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와 함께 이승만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리고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을 때, 그러한 소식을 외신을 통해 가장 먼저 전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미국의 존F.케네디 대통령과 회담을 했을 때, 수많은 족벌 어용 언론들은 마치 한미관계가 동등한 위치에서 혹은 형제애적인 관계에서 잘 해결된 것처럼 보도했지만, 그는 미국 측 인사들의 인터뷰를 통해 자료를 모아 당시 어용언론이 보도하지 않던 진실을 보도했다. 그리고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박정희 정권이 강요하던 북괴라는 단어를 거부하고 북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아주 용기 있는 언론인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1960년대 기자로써 했던 가장 훌륭한 업적은 바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진실탐구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1965년부터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공산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우방국 미국을 도우러 간 반공성전”으로 보도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크게 관심이 없던 어용언론들도 그렇게 보도했으며, 실제로 한국 사람들은 당시 베트남 전쟁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리영희 선생은 이러한 박정희 정권의 주장이 얼마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지를 단순히 반대하는 걸 넘어서 구체적인 자료와 근거를 통해 체계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1960년대 당시 진행되고 있던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침략전쟁이라는 사실과 북베트남 호치민과 공산당을 따르는 베트남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박정희 시대가 강요하던 지적 사상적 암흑기에 오직 언론인 리영희만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보도했었다.


리영희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이제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마지막으로 20대 중반인 내가 어떻게 해서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되었고, 존경하게 되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내가 리영희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이었다. 우연히 민족문제연구소 관련한 자료를 찾던 나는 ‘리영희’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리영희라는 인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나는 김삼웅 선생이 쓴 ‘리영희 평전’을 공익근무를 하던 당시에 읽게 되었고, 진실을 탐구했던 언론인 리영희의 생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었다. 1970,80년대 당시 운동권과 민주화운동세력에게 사상적 영향을 준 ‘전환시대의 논리’는 나에게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삼웅 선생의 ‘리영희 평전’과 ‘전환시대의 논리’는 내가 리영희를 좋아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뉴스타파에서 리영희 선생의 일생사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리즈로 방영하는 중이다. 참으로 반갑고 가슴이 벅찬다. 앞으로의 다큐멘터리가 매우 기대된다. 이 글을 읽은 이들도 뉴스타파에서 방영하는 리영희 선생 다큐를 많이 시청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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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20-12-19 1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리영희 선생을 오래전
조정래의 <한강>을 읽다가 주인공이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는 걸 보고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통킹만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보여준 책이었어요^^

NamGiKim 2020-12-19 16:25   좋아요 1 | URL
제 블로그에 올린 통킹만 사건 관련 글도 전환시대의 논리 참고했습니다. 매우 좋은 책이죠.^-^
 

(파리강화회의 당시 임시정부 대표단, 앞줄의 한인은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과 우사 김규식이다. 뒷줄에는 조소앙과 황기환도 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났다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승전국 자리에 오른 미국과 영국프랑스는 전후 문제를 논의하게 되었고이에 따라 1919년 1월 파리강화회의와 6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합의를 봤다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미국의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즉 각 민족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서 그 귀속과 정치 조직운명을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한 집단적 권리를 주장했고이는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나라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베트남의 국부로 칭송받고 있는 호치민이나 중국의 마오쩌둥 등이 이에 감명 받기도 했다그러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사실상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패권을 나눠먹기 위한 용도로 사용됐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1910년부터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지식인들을 자극시켰다이에 따라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조선의 독립을 요구했고그 이후 신한청년당 단원이었던 장덕수는 일본 도쿄로 건너가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월 8일 이광수를 포함한 200명의 학생들과 함께 2.8독립선언식을 가졌다이것은 식민지 조선 전역과 만주 연해주에도 소식이 전해졌고,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명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식을 가지게 되며전국적인 항전으로 이어졌다이것이 바로 3.1운동의 발단이었다.

(3.1운동 당시 종로에서 있던 만세시위)

 

3.1운동은 서울 외에도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양상을 보였다이렇게 시작된 3.1운동은 3월 중순이 되어 청년학생교사나 지식인만이 참가하는 시위가 아닌 도시노동자 및 상인층이 참가하고 그들에 의해 전국 소도시로 확산되었으며그 시기에는 중남부 지방면 단위 이하의 농촌 지역 심지어 산간벽촌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3월 22일 서울에서 노동자와 청년 학생들이 준비한 노동자대회에서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해 시위를 전개했다이 시위는 이후 서울 시가지 시위의 기폭제가 되어 23일 이후 매일 밤 시내 도처에서 게릴라식 시위가 벌어졌다. 26, 27일에는 전차 종업원경성철도 노동자만철 경성관리국 노동자들도 파업에 돌입하기도 했다.

(3.1운동 관련 상상화,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학생들을 표현한 게 인상적이다.)

 

이렇게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이 시위를 강력하게 진압했다. 3월 1일 조선 총독 하세가와는 추호의 가차도 없이 엄중 처단한다는 협박문을 발표하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2개 사단 즉 23,000명의 일본군이 있었다이걸로는 시위 진압에 부족하다 느낀 일제는 3.1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4월 들어 일본 본토에서 헌병과 보병부대를 증파시켰으며, 3월 중순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도중 군경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가 크게 늘어났고이를 진압하는 일본 측의 잔인함도 극심해졌다일례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유관순과 그 동료들은 서대문형무소에서 극심한 고문을 받았었다. 3.1운동에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나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는 않았지만일제 측 자료에 따르면 1919년 3월 이후 1년간 피살자를 350명 혹은 630부상자는 800명 혹은 1900명으로 기록하고 있고투옥된 이들은 8000~9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제암리 학살, 1919년 4월 15일 일본은 수원 제암리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였다.)

 

계급과 계층을 망라하여 전 조선민중이 참가했던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끝났다. 3.1운동 진압 과정에서 일본은 민간인 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는데그 학살이 바로 1919년 4월 15일 수원 제암리에서 벌어진 제암리 학살이다이 제암리 학살로 30명 이상의 민간인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3.1운동은 비록 일본의 진압으로 끝이 났지만세계적인 식민지 해방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이후 중국에선 5.4운동이 일어났고인도의 독립운동가 간디가 이에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아일랜드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5.4 운동,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중국에선 외세와 일본 제국주의를 배쳑하고자 5.4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한일합병 이후 실행해오던 무단통치에서 이른바 문화통치로 노선을 바꾸었다물론 이것 또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과 경찰력 동원에 있어선 큰 차이는 없었지만 말이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에선 한국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한 것이다또한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은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1919년 1월에 압록강 이북 서간도 지역에서 발족된 한족회는 서로군정서라는 군정부로 개편되었다두만강 이북 북간도 지역에는 간민회라는 자치단체가 대한국민회로 이름을 고쳤고이들은 국민회군이라는 독립군부대를 편성했다또 북간도 왕청현 지역에서는 대종교 세력이 북로군정서라는 부대를 편성했다.

(홍범도 장군, 그는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영화 봉오동, 봉오동 전투는 2019년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부터 국내 진공 작전을 개시했다. 1920년 기준으로 독립군이 함남·함북·평북에 침입해 전개한 전투는 1,651건 정도로 동원된 독립군만 해도 4,643명으로 집계된다이처럼 독립군이 자주 국경을 넘어 들어왔기에 일본은 국경 3도에 군사 및 경찰 경비력을 강화시켰다이렇게 독립군들이 식민지의 국경을 공격하자 일본군은 1920년 6월 북간도의 독립군을 추격하기 위해 250명의 추격대를 편성하여 훈춘 인근의 봉오동 쪽으로 진격했었다여기서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최진동의 군무도독부안무의 국민회군이홍수의 대한신민단 등은 6월 7일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유인하여 섬멸했다당시 독립신문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157명 이상이 사살되었다고 보도했다전사자 수치에 대한 논란이 있긴 하지만분명한건 일본군이 이 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이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 장군은 1920년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명장이다. 깡패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지낸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확실한 사실은 아닌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산리 전투 상상도, 박정희 시절인 1970년대 국가사업 차원에서 나온 그림이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생각한 나머지 만주의 군벌인 장작림에 협조하여 이른바 훈춘 사건을 조작했다훈춘 사건을 구실로 일본은 약 2만 명의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이러자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과의 정면승부를 피하며 은신했다이후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한 독립군은 김좌진 장군의 지휘아래 일본군을 깊숙이 유인하여 섬멸했고홍범도의 독립군 부대도 이에 협력하여 일본군을 섬멸했다이것이 바로 청산리 대첩 또는 청산리 전투다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들은 적백내전 당시 러시아에서 철수하던 체코군으로부터 사들인 총기로 무장했다그리고 청산리 전투에서 이들은 대략 1,000명 가까이 되는 일본군을 섬멸했다. 1920년에 있던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대승으로 기록되었다.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북로군정서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인근 지역에서 소름끼치는 학살을 전개했는데그것이 바로 간도참변이다조선주둔군 예하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 부대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가던 많은 한인들을 학살했고그들의 마을과 가옥을 불태웠다당시 파견된 조선군은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한인에게 과시하여 저항의지를 차단하고독립군을 근거지에서 분리하기 위해 무력시위와 최신무기를 동원하였다.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학살로 수천 명의 한인이 목숨을 잃었다.)


(간도참변 당시 한인 독립군을 총살하는 일본군)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군사작전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서에 입안한 것이었다위에서 상술한 조선주둔군 19사단은 10월 14일 한인마을에 대한 제1차 토벌을 개시했고이들은 한인마을들을 포위 습격했다. 10월 22일에는 제2차 토벌을 개시했다. 2차 토벌 당시 일본군은 “600명의 독립군이 있다는 것을 첩보하여 10얼 28일 부근 학교 및 가옥을 소각했다간도 지역은 일본군이 군사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학살의 장으로 변했다간도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에서 전개됐다.

(간도참변 당시 학살당한 조선 양민의 시신)

 

대략 2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독립군의 근거지를 파괴하고수천 명을 학살했다. 1920년 10월과 11월 사이 약 2개월 동안 북간도의 8개현에서 3,600여 명이 피살되었으며, 3,200여 채의 가옥과 41채의 학교, 16채의 교화가 불에 탔다부녀자들과 아이들도 학살당했으며부녀자들 중에는 일본군에게 강간당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2015년 당시 국내에서 1,000만 이상이 관람했던 영화 암살에서는 전지현이 연기했던 안옥윤은 간도참변에 대해 얘기하는 약산 김원봉에게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저희 어머니도 그때 총에 맞고 돌아가셨습니다운이 좋으셨죠다른 사람들은 칼에 찔려 죽고몽둥이에 맞아 죽고목이 졸려 죽고불에 타서 죽고생매장 당해 죽고솟에 삶기도 하고그렇게 3400명을 죽였습니다. 27일 동안

 

물론 이것은 픽션이 약간 가미되었을 수는 있지만간도참변의 잔혹함을 알기에는 아마 충분할 것이다이렇듯 간도참변 당시 일본군의 학살은 상상을 초월했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간도참변이라는 연구 논문을 쓴 조원기는 간도참변은 단지 간도지역 한인 및 항일운동에 대한 탄압에 그치지 않고 일제의 만주침략을 위한 구도에서 감행된 것이었다.”라고 밝힌다즉 1920년 전후 만주독립군의 활동을 억제하거나한인사회의 파괴만을 목적으로 일어난 군사침략만이 아니라만주침략이라는 계획아래 추진된 학살만행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간도침략의 1차 목적은 기존 한인 사회를 해체하고 한인 학살에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1차 세계대전이 얼마 끝나지 않은 1920년 당시 안정적인 국제정세하에서 일제가 만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대신 일본은 간도침공을 통해 자신들의 만주에 대한 군사적 지배력을 대외에 과시하였고간도를 사회적경제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여 만주침략의 전초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과 1932년 괴뢰 만주국 건설이라는 이후의 행보를 생각해보았을 대간도 참변은 즉 그러한 군사적 행동의 신호탄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이쇼데모크라시 관련 서적)

 

일제는 1919년 3.1운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으로 조선인 수천 명을 학살했다그러나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흐름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또 다른 문제에 시달리기도 했다그것은 바로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일본에 영향을 끼친 좌파 이데올로기의 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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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 - 만화로 배우는 미국의 모든 것
래리 고닉 지음, 노승영 옮김 / 궁리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하버드 대학과 예일 대학교에서 인정했다는 사실을 밝힌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만화 미국사를 읽었다. 하버드 대학의 수학과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파이베타카파의 회원이기도 했던 만화가 래니 고닉은 자신의 전공인 수학뿐만 아니라 심리학, 물리학, 사회과학 등 다방면의 지적 분야에서도 여러 만화책들을 썼었다. 걸프전쟁이 일어나던 1991년 그는 미국사 관련한 만화책을 집필하기도 했는데, 그게 바로 2018년에 국내에 번역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미국사(Cartoon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래리 고닉이 쓴 이 미국사 책은 아메리카 대륙이 아시아 대륙과 연결이 끊기는 시점부터 1991년 미국이 걸프전쟁에 개입하는 시점까지의 미국사를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책 제목이 만화를 뜻하는 카툰을 달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책의 내용은 상당히 수준이 높고, 웬만한 미국사와 세계사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일반인들에게는 조금은 어려울 수도 있는 책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배려가 책 안에서도 들어나는데 독자가 혹시 책을 읽는 도중에 까먹을 수 있는 사건이나 단어 혹은 역사 등을 각주를 달아 몇 페이지를 참고하라혹은 이런 사건, 이런 인물, 이런 용어등의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사실 책의 내용을 보면 미국사를 다루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사회의 문제점들을 미국사를 통해서 일일이 다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원주민 억압의 역사와 흑인 노예제와 인종차별, 마약문제와 페미니즘 문제 그리고 환경문제를 서술하는 부분에선 저자의 날카롭고 예리한 시각이 돋보인다. 특히나 자연과학쪽을 좋아해서 그런지 환경문제를 다루는 저자의 시각이 가장 많이 각인되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은 바로 미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저자 래니 고닉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대해 비판의 포문을 여는데 상당히 거리낌이 없다. 거기다 저자 특유의 관점과 만화적 풍자까지 더해진다. 책에서 나온 만평중에 기억에 남는 만평이야 워낙 많지만, 대표적으로 뽑자면 매카시즘 관련 만평이 기억에 남는다. 냉전 초기인 1949년 관련한 파트인데, 여기서 저자는 소련의 핵개발과 중국의 공산화로 인한 미국의 피해망상적 매카시즘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저자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구제국주의인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물려받아 신제국주의적인 체제로 갔으며, 그러한 신제국주의적 정책이 각국의 반미감정을 불러일으켰다고 비판한다. 한국전쟁 관련한 부분에선 이승만에 대해 무능하고 부패한 독재자라고 비판하고,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에 대해서도 부패한 독재자이자 미국의 꼭두각시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보았을 때 저자의 정치관도 꽤나 진보적임을 알 수 있다.

 

래리 고닉의 이 책 말고도 미국사를 비판적으로 접근한 만화 책이 있다. 그 책은 국내에도 번역된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쓴 만화로 보는 하워드 진의 미국사(A people’s history of American empire)’. 그러나 하워드 진의 만화책과 래리 고닉의 만화책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하워드 진의 책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와 반노동 친자본적인 모습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한 명저이지만,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상당한 진지함과 감정적인 투쟁의식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래리 고닉의 미국사하고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래리 고닉의 책은 하워드 진 선생이 진지하게 혹은 비판적 의식을 감정적으로 고찰시키기 위해 접근한 역사적 사실들을 읽는이가 상당히 즐거움을 느끼게 승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래리 고닉의 미국사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인 핵심이다. 그 덕분에 나또한 상당히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래리 고닉의 미국사 책은 미국사나 세계사에 대한 지식이 하나도 없는 이가 보기엔 조금은 어려울 수 있는 내용들이 적잖게 있다. 그러나 그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래리 고닉의 책은 무엇보다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즐거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했던 미국사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고, 현대사회에서 많은 이슈점들을 가진 문제들 또한 같이 알 수 있다. 역사를 좀 공부한 사람이라면 책을 어렵지 않게 읽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미국사를 공부해보지 않았다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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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테헤란 회담 당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

 

2차 세계대전 당시 이데올로기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던 미국과 소련은 파시즘에 맞선 전쟁을 치르면서 서로 협력하는 동맹관계가 되었었다. 1930년대 당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스탈린에 대해서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는 강력한 비난을 일삼았었지만히틀러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소련에 대한 비판을 멈췄었다2차 세계대전은 미국과 소련간의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고실제로 이들은 전쟁 와중에 전후 세계질서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하기도 했었다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은 적대관계에 있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를 하나의 협력자로 만든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6,500만에서 7,00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앉아간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기 전부터 여러 가지 불안한 사태들을 예고하고 있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를 침공했고괴뢰 황제 푸이를 내세워 괴뢰국을 건설하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평화적인 차원에서 만들어진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3년 독일에서는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되었고히틀러의 선배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1935년 에티오피아를 침공하며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1936년 선거를 통해 좌파가 정권을 잡은 스페인에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는 프랑코가 전쟁을 일으켜 이른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났고, 1937년엔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함락시켰다그리고 나치독일은 1936년 라인란트 지역을 점령하고 1938년에는 오스트리아를 1939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했다.

 

이처럼 1930년대의 국제질서는 제2차 세계대전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그러던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의 화약이 유럽에서 터졌다나치 독일의 폴란드를 침공한 것이다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과 소련은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1929년 검은 화요일로 시작한 경제 대공황에 직격타를 맞은 미국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며 경제를 회복시켜나가는 과정에 있었고루스벨트 대통령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형식적인 중립국의 위치를 지켰다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영국에게 물자지원을 했고중국 국민당 정부를 지원했지만 말이다.

 

소련 또한 마찬가지로 전쟁 초기에 참전하지 않았었다레닌 사후 권력을 계승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공업화 노선을 통하여 낙후된 소련을 초강대국의 소련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생산력을 발전시킨 스탈린은 1939년 아돌프 히틀러와 협상하여 이른바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적잖은 충격을 주기도 했지만, 1938년 영국의 체임벌린과 히틀러가 합의본 뮌헨 협정에 대한 배신이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그리고 이것이 적대관계에 있던 양국(나치독일과 소련)의 군사적 동맹을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어쨌든 소련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참전한 입장은 아니었다물론 그 과정에서 폴란드 분할이나 핀란드와의 전쟁이 있었지만이것은 러시아 혁명 이후 소련의 영토 관련 문제에서 비롯된 개별적인 전쟁이었을 뿐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미국의 랜드리스, 1941년 부터 시작한 미국의 랜드리스는 영국, 중국, 소련 등의 연합국에게 엄청난 양의 물자지원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지원은 소련이 독일군에게 반격하는데 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양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시킨 연도는 1941년이었고추축국의 공격에 의한 것이었다소련의 스탈린은 1941년 6월 히틀러가 대대적인 침공을 한 것이 주된 이유였고미국의 루스벨트는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 주된 이유였다따라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1941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2차 세계대전 당시 양국의 참전은 늦었지만 1941년이라는 시점부터 서로가 협력하는 관계가 되었다.

 

모스크바 전투가 한참이던 1941년 12월 미국은 이른바 랜드리스라 하여 소련에게 상당한 량의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1942년부터 1943년 당시 미국은 영국과 중국 그리고 소련에 물자를 지원했는데이는 상당한 양의 물자 지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미국은 3400만 벌의 군복과 1450만 켤레의 군화, 420만 톤의 식품 그리고 11800대의 기관차와 다수의 차량을 소련에게 제공했다무기 대여법에 의해 소련에게 제공된 트럭이나 지프는 독일과의 전쟁에 있어서 소련군의 기동력을 높였고미군 전차나 항공기도 소련에게 보내졌다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국은 소련에게 상당한 양의 식품을 소련에게 지원하기도 했는데현재 우리가 즐겨먹는 스팸의 경우 소련군의 허기를 채워준 소중한 식량 역할을 해냈다이 때문에 당시 소련 참전용사들은 미국제 스팸을 회상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프로파간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소련군이 하나가 된 포스터다. 즉 소련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을 동맹국으로써 양국의 협력을 강조했다.)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면서부터 소련과 스탈린을 대하는 미국과 영국의 태도는 현저하게 달라졌다. 1930년대 당시 스탈린을 독재자 혹은 폭군이라 비난하던 미국과 영국 언론은 스탈린을 이른바 엉클 조(Uncle Jo)라고 부를 정도로 호평했다그것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는 스탈린과 소련군의 기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2년 5월 루스벨트 대통령은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나로서는 그건 참 부인하기 어려운분명한 사실이오러시아군은 유엔 25개 회원국 전부를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이추축국 병력을 살상하고 그 물질적 토대를 파괴했소따라서 1942년에는 당연히 최대한 모든 무기와 탄약을 그들에게 공급해줌으로써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를 지원해야 할 것이오.”

(골든 게이트 퀘텟, 1931년에 결성된 미국의 보컬 그룹인 골든 게이트 퀘텟은 1943년 Stalin wasn't Stallin이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가사 내용은 히틀러가 러시아를 침공하여 큰 실수를 저질렀고, 스탈린이 나치를 물리치고 영국과 미국에게 도움을 주는 이야기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루스벨트 대통령만의 생각은 아니었다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맥아더도 이후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 하워도조지 마셜 장군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 대한 찬양에 열을 올렸다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소련의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가 미 국무부를 방문했을 당시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나치에 대한 소련의 영웅적 투쟁을 극찬하기도 했었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련의 영웅적 행동을 높이 평가하는 여론이 미국에서 보편화 됐다. 1942년 6소련이 독일군의 침공에 맞서 싸운 지 1주년이 되는 달을 맞아 미국의 <뉴욕 타임스서평 담당자인 오빌 프레스콧은 소련군이 전쟁 승리와 인류구원이라는 업적을 이룩하고 있다고 극찬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프로파간다, 연합국의 깃발이 있는 이 포스터에도 소련 깃발 또한 있다.)

 

이런 움직임에 따라 미국 헐리우드 영화사도 소련 홍보에 나섰다. 1942년 7월이 되면 MGM, 컬럼비아유나이티드 아티스츠(United Artists), 20세기 폭스파라마운트 같은 주요 영화사들이 제작 중이거나 제작을 검토 중인 소련 관련 영화는 9편 이상이나 됐는데결국 <모스크바 특명(Mission to Moscow)>, <북극성(North Stat)>, <러시아의 노래(Song of Russia)>, <러시아 소녀 삼총사(Three Russian Girls)>, <영광의 나날(Days of Glory)> 등 5편의 주요 작품이 나왔다당시 군인들 정훈교육 차원에서 만든 영상에서도 소련군의 업적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이들을 지원하자는 입장을 분명히 표시했었다뿐만 아니라 미국 내에선 이른바 2전선을 만들자는 국민적인 캠페인도 활발히 전개됐었다.

(1943년에 만들어진 미군 정훈교육 영상, Why We Fight라는 이름의 이 영상은 러시아인들이 침략자 나치 독일에 맞서 어떻게 저항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소련을 지원하는 미국인들과 미국정부의 마음은 확실했지만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강력하게 호소했던 이른바 2전선의 형성은 많이 늦었다사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미국의 전쟁에 참전하기 3개월 전 영국의 윈스턴 처칠에게 25~30개 사단을 파견해달라고 요구했었다즉 이것이 제2전선(Second Front)을 형성해달라는 서방에 대한 스탈린의 첫번째 요구였다. 1942년 당시에도 스탈린은 미국과 영국에게 제2전선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이러한 스탈린의 부탁은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충분히 납득될 만했다왜냐하면 당시 미국의 정치인들이 생각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에 맞서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르고 있던 주체는 바로 소련이었기 때문이다. 1943년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도 스탈린이 미국과 영국에게 아주 강력하게 요구한 것은 당연하게도 제2전선 형성이었다.

 

스탈린이 강력히 요구했던 제2전선은 1944년 6월 영미 연합군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면서 형성되었다이 제2전선은 스탈린이 처음 요구한 시점부터 3년이 지난 상황이었다미국이 소련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했듯이소련 또한 나치 독일에 맞서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과 영국에 대해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사설들을 내기도 했다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과 생각보다 사이가 좋았던 스탈린은 실제로 루스벨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 대사관한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소련에서 만든 만화 또한 제2전선의 염원을 담기도 했었다독일과 전쟁을 치르던 소련 사람들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개시했을 때 낙관적인 생각을 가졌었다즉 소련 또한 1944년 영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여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했을 때영미 연합군에 대해 확실히 긍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1945년 4월 독일 엘베 강에서 만나게 된 미군과 소련군)

 

이러한 소련 사람들의 감정을 잘 보여주는 일이 있었다.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 당일 공수부대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어니스트 M. 그륀버그 대위는 독일군의 포로로 붙잡혔었다포로가 된 그는 당연히 독일군이 운영하는 연합군 포로수용소로 갔고거기서 다른 미군 장교 2명과 함께 탈출하여 소련군을 만났다이들을 발견한 소련군은 그들을 도왔고탈출한 지 14일 만에 그들은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할 수 있었다그륀버그 대위는 이후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우리는 걸은 적이 거의 없었다늘 트럭이나 기차가 우리를 태워주었다돈을 달라거나 표를 보여달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우리는 미국인이었다그게 우리한테는 좋을 리 없는 일이었다하지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우리를 재워주었다우리는 트럭과 화차를 타고 다녔고모스크바에 들어갈 때는 러시아군 장교들이 타는 차를 타고 거창하게 들어갔다당연히 자유롭게.”

(1945년 2월 얄타회담,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있는 얄타에서 강대국들은 전후 문제를 논의했다.)

 

뿐만 아니라 폴란드 사람들과 소련 사람들은 그륀버그와 2명의 미군 장교에게 얼마 되지 않는 배급 음식도 기꺼이 나눠주었으며그륀버그 또한 포로수용소에서 빠진 11kg의 살이 그 과정에서 불어났다고 주장했다이처럼 양국의 관계는 나치 독일과 맞서면서 꽤나 우호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1945년 3월 갤럽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55%가 소련은 전쟁 이후에도 미국과 협력이 가능한 신뢰할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즉 이 여론조사만 보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준다. 1945년 당시 모스크바에서 퍼레이드를 지켜봤던 아이젠 하워 장군 또한 전후 소련과 미국이 좋은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었다.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동맹관계였지만 이 시점부터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의심하는 단계에 있었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파시즘이라는 큰 적에 맞서 싸우는 위치에 있었기에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고미국이 원자폭탄을 가지게 되면서 점차 낙관적인 전망에서 서로를 의심하는 관계 더 나아가 전쟁 이후에는 적대적인 관계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비록 단기간이지만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서로를 믿고 의지하던 관계였다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6년 윈스턴 처칠의 철의장벽(Iron Curtain)’ 발언과 1947년 대통령 해리 트루먼이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미국과 소련은 완벽한 적대관계가 된다.

 

참고자료

 

독소전쟁사데이비드 글랜츠열랜책들, 2007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올리버 스톤들녘,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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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김삼웅 지음 / 두레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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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참으로 역동적이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에서는 여러모로 슬픈 일도 많았고, 황당한 일도 많았으며, 잔인한 역사도 많았다. 해방 이후 미소냉전에 의한 남북분단과 1950년 한국전쟁 그리고 자유당 독재와 박정희의 유신 독재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는 알면 알수록 비판적인 역사적 고찰을 요구하게 된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학살과 독재 그리고 국가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악순환의 어디서부터가 시작일까?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다보면 이와 같은 필연적인 질문들을 던지게 만든다. 한국 현대사의 이면을 비판적으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시점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으로부터 찾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그는 일본이 강화도를 침략하던 조선후기에 태어나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하던 1965년에 사망했다. 그는 904개월 동안의 삶을 살았다. 경력으로만 보자면 그는 남부럽지 않은 권위와 인생사를 가지고 있다.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던 조선 후기 그는 독립협회의 지도자인 서재필의 지원 및 도움을 받아 초기 개화운동에 나섰고, 이후 미국에 유학가서 지금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수준의 대학인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를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1919년 상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총령 즉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었고, 대한인동지회와 구미위원부의 총 책임자였으며, 해방 이후 탄생한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또한 대통령에 있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전쟁을 겪었고, 이후 10년 동안 대통령 자리에 있었다.

 

이렇게만 본다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상당히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인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적 이면에 숨겨진 이승만의 실체는 엄청난 비리와 만행 그리고 악행의 대명사였다. 그가 저지른 악행과 만행은 1907년 장인환 전명운 열사의 친일친미제국주의자 스티븐슨 처단에 대한 재판에서 변호를 거부한 것부터 시작해서 1960년 혁명 당시 시위대에 대한 발포로 수백 명을 죽이고 수천 명을 다치게 한 것으로 끝난다. 즉 이승만의 무수히 많은 악행은 무려 50년 동안 그가 저질러온 인생사이기도 하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은 이명박 정권이 끝나가던 2012년에 독부 이승만 평전을 집필했었다. 친일파 문제와 독립운동가 그리고 민주화운동가의 생애를 재조명하는데 한평생을 바친 민족주의자 김삼웅 선생이 평가한 이승만은 말 그대로 기회주의자이자 악의화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건설적이고 체계적인 비판은 역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왜곡하려는 친미 뉴라이트 세력들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기도 했다.

 

나는 김삼웅 선생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을 박근혜가 국정 교과서를 추진하던 2015년에 읽었었다. 당시 이 책을 완독했던 나는 왜곡된 독립운동가이자 독재자인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들을 보면서 치를 떨었었다. 왜냐하면 책에 나온 내용들은 과거 내가 알고 있던 이승만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그 관료집단들의 이해관계 및 정세판단에 발맞추기 위해 지난 3년 사이에 한국은 전통이 지배하는 느림보 나라에서 활발하고 웅성대는 산업 경제의 한 중심으로 변했다는 망언을 했던 그의 모습에서 그가 정말 나라의 독립을 위한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 외에도 그가 독립운동을 한다는 과정에서 저지른 일들은 상식적인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분노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저자가 책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승만에 대해 광신적인 찬양을 일삼는 서적들은 이미 국내에 널려있다. 대게는 이승만을 참된 반일 독립운동가나 건국의 아버지 그리고 부국의 아버지로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책들이 대다수다. 이러한 이승만 찬양 흐름은 이른바 박근혜 정권을 끝낸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섰음에도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COVID-19가 한참인 올해에도 엄마라는 단어를 빙자한 극우 반공 세력이 쓴 엄마가 들려주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이야기같은 똘이장군식 논리를 보유한 책들이 적잖은 인기를 끌기까지 했었다. 나 또한 서점에 들렀다가 엄마의 이름을 모욕하고 빙자한 그 책을 보고 충격과 분노를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이런류의 책들이 이승만을 미화하기 위해 주장하는 논리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즉 좌편향으로 물들어 있는 좌익 빨갱이 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며, 북한을 옹호한다는 식의 수준 낮은 공격이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들은 말 그대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뉴라이트 비판이라는 책을 쓴 김기협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자본주의의 우월성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에 북한의 성취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역사의 대목 대목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공의 역사로만 해석해야 하는 편향성이며, 공산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실패할 운명의 나라로, 자본주의를 택했다는 이유만으로 남한을 성공할 운명의 나라로 규정한다는 것은 역사학의 문법에 맞지 않는 쉽게 말해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래서 뉴라이트 역사관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원리주의 성향의 유사종교가 떠오르는 것이다.”

 

출처 : 뉴라이트 비판 p.186

 

쉽게 말해 이들은 역사를 종교의 영역 즉 이승만교로 접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로 유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은 아들 부시 대통령 시기 부통령을 지낸 인물인 딕 체니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그 영화가 바로 바이스(Vice)’. 영화 바이스는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수십만의 이라크인을 죽이고, 명분없는 전쟁을 조작하고 국민을 기만했던 딕 체니의 일생사를 블랙 코미디 형식으로 전개한 명작이다. 영화에서 나오는 쿠키 영상은 영화를 본 일부 미국인들의 토론 및 소감을 보여준다. 거기서 트럼프를 지지하는 성향의 한 백인 남성은 영화를 보면서 깨달았어요. 모든 게 다 좌편향이에요. 다 좌익 편향된 시각에서 만들어진거잖아요라고 대답한다. 이 답변을 들은 한 젊은 남성은 전부 다 팩트 잖아요. 전문가들의 검증을 거쳤을 것이고요. 사실인데 진보 보수가 무슨 상관이에요!”라고 말하자, 트럼프를 지지하는 백인 남성의 답변은 이러했다. “빨갱이 새끼 지랄하네! 너는 힐러리나 지지하겠지!”

 

상당히 흥미로운 구절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팩트를 얘기해도 좌편향이고, 팩트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인 것이다. 이것을 그대로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접근하는 이들에게 적용해볼 수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말 그대로 성스러운 건국의 아버지로 생각하면서, 팩트에 입각하여 이승만에 대해 비판을 하면 영화 바이스에 나온 트럼프 지지자 아저씨처럼 그런식의 반응을 보인다. 물론 이런 반응은 말 그대로 개인적 감정에 기반을 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기도 하지만, 학술적인 영역에서도 반공무쌍을 찍어가며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승만에 대해 좌편향, 종북, 빨갱이, 남로당 사관과 같은 용어를 사용해가며 이상한 비난을 하는 뉴라이트들의 이승만 옹호 및 찬양 논리는 그러한 논리를 기반에 두고 있는 것이다.

 

2020년 들어 COVID-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여 우울하고 힘이 빠질 시기, 위에서 언급한 엄마를 빙자한 이승만 찬양물이 나온 것은 그 우울함과 분노를 자극시켜주는 것 같다. 그 외에도 기파랑 출판사나 뉴라이트 세력들이 낸 이승만 전기가 시중에서 도는 것은 그러한 감정을 더더욱 부채질 한다. 이런 과정에서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 선생이 독부 이승만 평전의 개정판을 8년 만에 출간했다는 소식은 여러모로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때문인지 이번에 개정판을 읽게 된 나는 상당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뉴라이트 세력들이 주장하는 천박한 친미 제국주의 논리 그리고 자본주의 논리에 대해 비판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번에 나온 독부 이승만 평전개정판은 사실 내용면에선 8년 전에 나온 책하고 큰 차이는 없다. 또한 책의 성향도 저자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우파적 민족주의 성향과 백범 김구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도 아주 강력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점들이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나 자신과는 분명히 안 맞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훌륭한 이승만 비판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국내에 출판된 이승만 평전중에 이만큼이라도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대게는 뉴라이트 성향의 미국사 교수 이주영이 쓴 건국 대통령 이승만 평전 정도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다. 따라서 내가 이 개정판을 높이 평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에 대해 좀 더 얘기하겠다. 내가 생각하는 이승만 또한 책 저자가 생각하는 것 못지않게(혹은 그 이상으로) 매우 부정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승만은 미소냉전에서 반소 반공의 지도자로써 통일운동을 지향하지 않고, 오로지 분단정부만을 고집했던 그 사람의 행적은 사회주의나 적어도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사회를 원했던 70% 이상의 민중들의 염원과 바램을 무참히 짓밟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수립 과정에서 제주도와 여수순천에서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극을 벌여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한국전쟁 초기 2~3개월 동안 이승만이 학살한 보도연맹원만 해도 30만 명을 넘긴다. 말 그대로 이승만은 코리안 킬링필드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에서 대대적으로 강조한 바와 같이 이승만이 저지른 악행들과 만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지만, 국민보도연맹 학살은 그중에서 가장 천인공노할 만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표현은 조금은 과격할지는 몰라도 도올 김용옥이 말한 바와 같이 몇 년 전 스페인 내전을 일으키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지원을 받으며 독재 권력을 행사한 파시스트 프랑코처럼 파묘를 당하는 수준으로 우리 또한 그를 역사의 심판대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1975년 반제국주의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베트남인들은 남베트남의 권력자이자 독재자이기도 한 응오딘지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왜냐하면 독재자 응오딘지엠이 지향했던 길은 반민족 반민중 친외세 그리고 반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응오딘지엠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과거 프랑스와 미국에게 빌붙었다가 미국으로 도망친 해외 망명자 일부만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유난히 이승만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작업이 힘을 얻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한국이라는 나라가 친일과 친미제국주의를 청산하지 못한 반민중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다. COVID-19가 전 세계적으로 돌고 있는 와중에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 같은 중남미에서는 좌파와 사회주의가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즉 이승만이 추구하던 자유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이승만이 가장 사랑했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COVID-19 대처에서 가장 무능하다는 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아옌데 정권 3년 동안 사회주의를 경험하다 17년간 피노체트 군사독재를 겪으며 신자유주의를 경험했던 칠레는 올해 10월 피노체트 헌법을 국민의 투쟁으로 폐지했다. 코로나 감염이 크게 번진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에서도 사회주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처럼 이승만이 추구했던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무튼 세계는 이승만이 원하는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칠레에선 민중의 힘으로 피노체트의 잔재를 무너뜨렸다. 우리 또한 이승만의 잔재들을 4.19 혁명 이후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무너뜨려야 한다. 김삼웅 선생이 쓴 독부 이승만 평전개정판은 읽는 이에게 이승만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타락하고 무능했으며, 무수히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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