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중화민족의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문화란 도데체 어떠한 문화를 말하는 것인가? 일정한 문화(관념형태로서의 문화)는 일정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의 반영이며 그것은 또 일정한 사회의 정치와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주며 크나큰 작용을 한다. 그리고 경제는 이러한 문화의 토대이며 정치는 경제의 집중적인 표현이 된다. 이것은 문화와 정치, 경제와의 관계 및 정치와 경제와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견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정한 형태의 정치와 경제가 먼저 그 일정한 형태의 문화를 결정하며 그런 다음에야 일정한 형태의 문화가 다시 일정한 형태의 정치와 경제에 영향을 주며 작용을 하게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의식이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고 하였으며, 또 종래의 철학가들은 여러 가지로 세계를 설명하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의식과 존재와의 관계문제를 정확히 해명한 과학적 규정이며, 또 그 후 레닌에 의하여 심오하게 전개된 능동적이며 혁명적인 반영론의 기본적 견해이기도 하다. 중국의 문화문제를 토론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이 기본적인 견해를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문제는 아주 명확해진다. 우리가 제거하려는, 중화민족의 그 낡은 문화에 들어 있는 반동적 요소들은 중화민족의 낡은 정치, 낡은 경제와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가 건설하려는 중화민족의 이 새 문화도 역시 중화민족의 새 정치, 새 경제와 분리될 수 없다. 중화민족의 낡은 정치와 낡은 경제는 중화민족의 낡은 문화의 토대이며 중화민족의 새 정치와 새 경제는 중화민족의 새 문화의 토대이다. 그렇다면 중화민족의 낡은 정치와 낡은 경제란 무엇인가? 그리고 중화민족의 낡은 문화란 또 무엇인가? 주나라, 진나라 때부터 중국은 봉건사회였고, 그 정치는 봉건적 정치였으며 그 경제는 봉건적 경제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경제의 반영으로서 지배적 지위에 있던 문화는 봉건적 문화였다.

 

외래 자본주의가 중국을 침략하여 중국사회 내부에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점차 생장하게 되면서부터 중국은 식민지, 반봉건적 사회로 점차 전환하게 되었다. 오늘의 중국은 일본 점령구에 있어서는 식민지사회이고 국민당 통치지구하에 있어서는 아직 기본적으로 반식민지 사회이며, 일본 점령구거나 국민당 통치기구거나 할 것 없이 그것은 다 봉건적, 반봉건적 제도가 우세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다. 이것이 목하 중국사회의 성격이며 중국의 실정이다. 지배라는 측면에서 말한다면 이러한 사회의 정치는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정치이고, 경제는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경제며 이러한 정치 및 경제의 반영으로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문화는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 문화다.

 

이러한 지배적인 정치, 경제 및 문화 형태가 바로 우리 혁명의 대상이다. 우리가 제거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식민지,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낡은 정치와 낡은 경제이며, 또 이러한 낡은 정치, 낡은 경제에 복무하고 있는 낡은 문화다. 그리고 우리가 건설하려는 것은 이와 정반대되는 것으로서 그것은 중화민족의 새 정치, 새 경제, 새 문화다. 그러면 중화민족의 새 정치, 새 경제란 무엇이며 중화민족의 새 문화란 또 무엇인가?

 

중국혁명의 역사적 행적은 반드시 두 개의 행보로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첫 번째 행보는 민주주의 혁명이며, 그 다음 행보는 사회주의 혁명이다. 그것은 성격이 다른 두 개의 혁명과정이다.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 민주주의라는 것은 이미 낡은 범주에 속하는 민주주의, 구민주주의가 아니라 새 범주에 속하는 민주주의, 신민주주의다. 이로부터 중화민족의 새 정치라는 것은 신민주주의적 정치며 중화민족의 새 경제라는 것은 신민주주의적 경제며 중화민족의 새 문화라는 것은 신민주주의적 문화라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이 목하 중국혁명의 역사적 특성이다. 중국에서 혁명에 종사하는 모든 정당, 모든 사람들이 이 역사적 특성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이 혁명을 지도할 수 없고 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그는 인민들에게 버림을 받아 한족 구석으로 가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가련한 존재가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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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해 동안 중국의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위하여 투쟁해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문화혁명을 위해서도 투쟁해왔다. 이 모든 것은 중화민족의 새 사회와 새 국가를 건설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 새 사회와 새 국가에는 새 정치, 새 경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새 문화도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정치적으로 억압을 당하며 경제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중국을 정치적으로 자유로우며 경제적으로 번영한 중국으로 전환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낡은 문화의 지배로 인하여 우매하고 낙후된 중국을 새 문화에 의한 지배를 통하여 문명되고 선진적인 중국으로 전환시켜야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새 중국을 창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화민족의 새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문화영역에서 우리가 하려고 하는 목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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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전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선생이 8년만에 개정판을 낸 이승만 평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이승만이 어떻게 해서 분단을 추구했고반소 반공의 지도자로 부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아래에 있는 내용은 책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승만은 1946년 6월 3일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자신의 환영강연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식적으로 제기하였다남북한 정치지도자 중에서 나온 최초의 분단정권수립론이다.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그리고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시기 바란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가히 폭탄선언이었다비록 탁치문제로 좌우가 분열되고소공위가 성과없이 결렬 상태에 놓였으나 아직 누구도 분단정권을 세우자고 나서지는 못한 상황이었다영구분단으로 갈지 모르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소공위가 장기 휴회로 들어가고 좌우익의 대립이 격화되는 가운데 여운형·김규식 등 중도파 인사들이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일반 민중과 정치지도자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어떤 이유에서도 분단정권의 수립을 막아야 한다는 충정에서였다이런 시점에서 이승만의 단정수립 주장은 정치인들과 국민에게는 충격과 분노’ 그 이상이었다.

 

이승만의 정읍발언에는 배경이 있었다이승만의 발언이 있기 전부터 미 군정 측에서 간헐적으로 단정관련 발언이 제기되었다다음은 4월 7일 미국 발신으로 국내 한 신문의 보도 내용이다미국과 미 군정은 이 발언을 부인했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거나 뜻을 전달받고 정읍발언을 했을지 모른다.

 

미점령당국은 남조선만에 한하여 조선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한다조선의 미 군정당국은 남조선 정부수립 계획에 있어서 미국인은 고문격으로 참여하여 전면적으로 지도하고 조선문제는 조선인에게 일임되리라 한다또 일부 정보에 의하면 민주의원 의장을 사임한 이승만 박사는 재차 출마하여 남조선정부의 주석이 되리라 하는데 미측이 남조선정부 수립안을 제의한 중요한 원인은 다음과 같다① 소련 측이 정치적 이유로 미소공동위원회를 천연시키려고 하는 것② 미군의 복원계획으로 조선미군정 당국의 미군 장교급이 축차 귀국하여 그 수가 희소하여 지는 것.”

 

실제로 이승만과 그의 측근은 정읍발언’ 이전에 몇 차례 단독정부 수립론을 언급했다이승만은 5월 10일 미·소공위가 휴회에 들어가자 자율적 정부수립에 대한 민성이 높은 모양이며 하루라도 빨리 정부가 수립되길 갈망한다” (주석 28)고 발언하였다또 하지의 정치고문이자 이승만의 로비스트인 굿펠로는 5월 24일 귀국에 앞서 가진 회견에서 소련이 조속히 무산된 제1차 미·소공위를 재개시키지 않는다면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이미 1946년 초반부터 미·소 협력의 불가를 내세워서 단정노선북진 통일노선을 측근들에게 공언했다. 5월초에는 미·소공위가 휴회되면 단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고공위가 휴회된 지 한 달 만에 공개적으로 단정 수립을 주장했다미 군정 내부에서는 4월 초에 단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미 군정의 정치 고문 겸 이승만의 로비스트였던 굿펠로는 5월 말에 남한을 떠나면서 단정을 주장했다이승만굿펠로우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서로 단정을 주장했고미 군정은 공식적으로 단정론을 부정했다.

 

이승만의 일련의 발언은 미국(군정)의 의도를 어느 정도 꿰고서 한 것으로 풀이된다굿펠로를 통해 하지의 의중을 읽은 것이었다하지만 이즈음만 해도 미국의 한반도 기본 정책은 소련을 적대시하지 않고 좌우합작을 통해 통일정부의 수립 쪽이었던 것 같다러치 군정장관은 6월 11일 출입기자단 회견에서 만일 이박사가 남조선에 따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입장에서 한 말이고나는 군정장관으로서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절대 반대한다고 언급하면서 이승만의 단정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또 하지는 1946년 6월초 서울에 온 이승만의 측근인 올리버를 만나 이승만이 한국에서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기는 하지만끊임없는 그의 반소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미국의 후원 하에 수립될 어떠한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정수립 쪽으로 노선을 정한 이승만은 좌우합작운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단정행보에 매진하였다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을 물러나고정읍발언으로 정계에서 외톨이가 되다시피한 이승만은 탈출구를 찾았다방법은 모스크바 3상회의 철회와 남한 단정수립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미 국무성을 움직이는 것이라 믿었다이것은 국내의 정치적 불리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길이기도 했다.

 

미 군정은 해방 직후 이승만을 자신들의 대리인처럼 지원하였으나 차츰 그의 존재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은 하지에게 좌우합작은 사실상의 공산주의자 지원이고중도좌파는 공산주의자라며 보다 완강한 반공적 태도를 촉구하였다하지도 반공적 입장에선 이승만에 못지않았으나 이승만의 이러한 맹목적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곤란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크게 의가 상하게 되고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12월 5이승만은 미 군정에서 제공한 미 군용기로 워싱턴을 향해 출발했다방미는 유엔총회에 조선실정을 호소한다는 명목이었다도쿄에 들러 출발을 하루연기시켜 가면서 맥아더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맥아더는 그의 면담 요청을 거절했으나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에게 수분간 면회를 허락했다.” 맥아더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인해 그와의 면담 자체가 미국과 한국에서 커다란 정치적 의미를 띨 수 있었고이승만은 그와의 면담을 정치적 선전을 위한 재료로 이용했다.

 

이승만이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유엔총회는 이미 폐회 상태에 있어서 한국문제 호소의 의제 상정이 불가능하였다그의 실제 방미 목적은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여 한국에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되는 일이었다그의 방미 기간에 국내의 어려운 상황까지 겹치면서 오히려 크게 도움을 주었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전국적 규모의 총파업같은 해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전개된 10.1항쟁 등 민중항쟁으로 남한 정국이 크게 불안하고 요동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 언론계와 정계에 있는 지인들은 물론 자신의 로비활동 단체들을 동원하여 미국 정부와 여론을 움직였다보다 강력한 대소련 정책과 반공주의남한 단독정부 수립론이었다이승만은 미 국무성에 6개항의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안>을 제시했다.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그 후 즉시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

 

2. 한국에 대한 미소 양국간의 협상에 구애됨이 없이 임시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임시정부는 한국의 점령 및 기타 현실문제에 관하여 미국 및 소련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3. 남한의 경제재건을 원조하기 위해 일본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한국의 주장이 검토되어야 한다.

 

4. 한국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원칙에 입각하여 안정되고 확립되어야 한다.

 

5. 타국과 동등한 원칙에 입각하여또한 어떤 국가에 대한 편중이 없이 완전한 통상권한이 한국에 허용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해야 한다. (주석 36)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맥아더를 치켜세우고 하지를 격렬하게 비난했다하지가 좌익을 편애하고 우익을 탄압하는 반면에 맥아더의 대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선전하였다대소 강경론과 냉전 분위기가 일기 시작한 미국 조야와 언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또 이것은 국내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미 대통령의 대소 봉쇄정책인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은 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다미국 언론과 조야에서 이승만의 반소반공주의가 트루먼독트린을 이끌어 낸 원동력인 것처럼 보도되었다미국 사회에 이승만은 단번에 아시아의 반공반소 지도자로 부각되었다여기에 미국 정부가 향후 3년간 한국에 6억 달러의 원조 계획이 언론에 보도되어 이것도 이승만의 공으로 돌려지고, 3월 22일 국무장관 마셜의 남한 단정 적극 계획’ 발언까지 보태져 이승만은 예기치 않았던 성과를 얻어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다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이번 방미가 그 자신에게는 권력획득의 길이 되고국가적으로는 분단정권 수립의 한 계기가 되었다이승만에게는 행운이었고민족사적으로는 비운이 되었다.

 

이승만은 4월 5일 미네아폴리스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재차 동경을 방문해 맥아더를 만났고국빈으로 중국에 들러 상해와 남경에서 장개석을 만났다이승만은 4월 21일에 광복군총사령관 이청천을 대동하고장개석이 제공한 전용기 자강호’ 편으로 귀국했다이승만은 아시아 최고의 반공 지도자인 맥아더장개석을 만났고그들의 전용기를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청산리전투의 항일명장 이청천을 수행원처럼 동반했다맥아더는 하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의 귀국을 승인했다이승만의 도미 외교는 그 자체로는 미국의 대한 정책에 아무런 영향이나 변화를 주지 못했다그러나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대한원조 계획 등 미국의 대한 정책에 생긴 변화를 자신의 외교성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출처 이승만 평전 p.182~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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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3국의 상황이 그려진 만평


1853년 미국 페리제독에 의해 개항을 했던 일본은 서방으로부터 굴욕을 당했던 시점으로부터 50년 뒤인 1904년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전쟁을 하게 됐다그 전쟁은 지구상에서 가장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제국과의 전쟁이었고그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이었다지난번 청일전쟁 편에서 다룬 바와 같이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요동반도를 차지하게 된 대가로 삼국간섭을 받았다특히나 1895년 민비 명성황후를 살해한 이후 고종이 아관파천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러시아 제국의 영향력은 강해졌다. 1898년 러시아 제국은 청나라 정부로부터 요동 반도의 여순과 대련을 조차했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청일전쟁의 결과일본은 한반도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대만과 팽호제도를 영유하게 됐다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 이전까지 불과 10년 만에 최소 2배 이상의 육군력을 보유하게 되었고전함의 숫자도 늘었다. 1896년부터는 103척의 함정을 건조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고종황제, 그는 1895년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아관파천하여 러시아의 조선 영향권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1897년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으로 선포했다.)

 

고종 황제의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 제국은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러시아 제국은 조선으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벌목권 등 많은 이권을 따냈고조선에 군사·재정 고문단을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이는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했을 때도 계속됐다만주에서도 북만주를 관통하는 동청철도와 남만지선의 부설권을 따냈다. 1900년 청나라에서 이른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 동청철도와 남만지선도가 많이 파괴되었는데러시아 제국은 철도보호를 구실로 만주에 출병하여 아예 만주지역을 점령해버렸다.

(영일동맹을 상징하는 포스터)

 

러시아 제국의 만주 주둔은 다른 열강들의 비판을 받았다제국주의 국가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껴 1902년 1월 30일 수도 런던에서 이른바 영일동맹을 체결했다이 영일동맹은 유사시 군사적 개입을 명문화하고일본이 조선에 대해 특별한 수준의 이해관계를 갖는다고 인정했다즉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를 사실상 승인한 것이다영일동맹 이후 이에 압력을 받은 러시아는 1902년 4월 단계적인 만주 철군을 약속했다그러나 일부만 철수하는 데 그쳤다.

 

1903년 7월 일본의 제의로 만주와 조선에서 세력권을 가르려는 러일교섭이 시작됐다그러나 두 제국주의 세력의 야욕이 맞물려서 합의에는 실패했다양국협상이 결국 결렬되면서 전운의 기운이 돌게 됐다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낙관하지는 못했다그러나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면 승리의 가능성이 더 희박해진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따라서 1903년 말 일본정부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결정했다양국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돌자 러시아는 자국 내부에 있는 혁명의 기운을 전쟁으로 끄고자했다.

(러일전쟁 당시 전투를 묘사한 그림)

 

1904년 2월 일본의 함대가 러시아의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일어났다전쟁 전에 대부분의 서양인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패배하고 결국 러시아가 승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일본이 중국에 대해 승리했지만그것은 쇠망하던 국가에 대한 승리에 불과하고 감히 서구강국에 대항하여까지 이길 수는 없으리라는 생각이었다개전 초부터 일본군은 연전연승하면서 바다와 육지양쪽에서 러시아군을 계속 밀어붙였다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해온 일본군을 맹비난했다일본에 대한 맹비난을 함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전쟁의 적극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203 고지 관련 영화, 대략 1만 명이 전사했던 이 고지쟁탈전은 이후 일본에서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04년 5월 일본군은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다만주로 진격한 일본군은 요양·사하·봉천 등의 전장에서 대병력의 참호전을 치렀다이 과정에서 양측의 사상자는 급증했다봉천에서만 러시아군 10만 명과 일본군 7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병사들은 땅에 바짝 엎드려서 전진해야 하고막대한 화력이 쏟아 부어지는 가운데 장시간 전투하다 보니 많은 희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1904년 8월부터 1905년 1월까지 전개된 여순 공방전 중 일보인 203고지 쟁탈전의 경우 이곳에서만 최소 1만 명 이상의 일본군이 전사했다즉 203고지 전체가 시체로 산이 형성된 것이다이것은 일본군이 지속적으로 돌격전술에 의존했던 것도 있었다어쨌든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은 157일 간의 포위 끝에 뤼순 요새를 함락시켰다.

(발틱함대)


(대마도에서 일본 군함에게 격침당하는 발틱함대)

 

사실 육지에서의 전투는 것만 보기엔 일본이 이긴 것 같았지만일본은 지쳐가고 있었다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확실히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해전이었다러시아 제국은 로제스트벤스키 제독 휘하의 러시아 발틱 함대를 러일전쟁에 투입시켰다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발틱함대는 말 그대로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러시아 중간에 있는 발트해에 있었다. 19세기 당시 이집트에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가 건설되어서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가 해로로 더 가까이 연결되었다그러나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식민지였고,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따라서 러시아 발틱 함대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지나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으로 향했고, 1905년 5월 27일 대마도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본함대에게 격파 당했다이로써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발틱함대 이동경로, 발틱 함대는 말 그대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 일본에 갔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명실상부 아시아의 최강국으로 거듭났다러일전쟁을 치르면서 치러야할 일본의 경제적 타격은 결코 적지 않았지만미국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를 받아들여 1905년 8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러시아와의 강화회담을 시작했고, 9월 5일에는 강화조약에 조인했다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조선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공식적으로 승인받았고여순과 대련을 이양 받았으며만주철도와 그 부속지의 양도 및 수비 병력 주둔권도 승인받았다또한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의 절반도 얻었다아무튼 일본은 러일전쟁을 통해 강대국으로 급부상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할린, 러시아 령이었던 사할린은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그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40년 뒤 다시 러시아(소련)이 접수하게 된다.)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시아에선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발포를 명령했고, 그 결과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 앞에서는 학살극이 벌어졌다.)

 

반면에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의 경우 체면적인 부분에서 많은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고국가적으로도 위태로워졌다. 1905년 러일전쟁 기간에 이른바 러시아 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1905년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905년 혁명이 일어난 이유 중에는 러일전쟁으로 인한 경제상황 악화도 한몫했었다물론 이 혁명은 니콜라이 2세가 군대의 발포를 명령하면서 대학살극으로 끝을 맺었다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러일전쟁을 기점으로 점점 쇠약해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화하고자 했는데조선의 식민지화가 바로 그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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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20-11-18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따라 제 글에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눌러주는것 같습니다. 다들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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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전 이래 전국의 인민들에게는 희망찬 기상이 팽배해갔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제는 출로가 생겼다고 생각하며 걱정에 차 있던 표정을 일소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 재차 갑자기 높아진 타협적 분위기와 반공에 대한 소문은 전국의 인민을 다시 의혹 속에 잠기게 하였다. 특히 문화인들과 청년학생들은 민감하여 이 점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중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문화가 출판되는 이 시점에서 중국 정치 및 중국 문화의 동향문제를 한번 이야기해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라 생각한다. 문화문제에 있어서 나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이를 한번 연구해보긴 했으나 이제 막 시작했을 따름이다.

 

다행히 연안에 있는 많은 동지들이 이미 이에 관한 상세한 논문들을 많이 썼으므로 나의 변변치 못한 이 글은 단지 개막을 알리는 북소리로 삼아주었으면 좋겠다. 전국의 선진적 문화일꾼들은 우리의 것을 모두 나쁜 것이라고만 하지 말고 1000가지 중에 1가지는 쓸모가 있는 것도 있다고 여기고, 이에 대해 함께 토론하여 정확한 결론을 얻어냄으로써 그것을 우리 민족이 요구하는 데로 적용시켰으면 한다. 과학적 태도란 실사구시를 말하는 것으로서 자기는 옳다고 하여 스스로 스승으로 자처하기 좋아하는그러한 망녕된 태도로써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재난은 지금 극도에 달하였다. 오직 과학적 태도와 책임적인 정신만이 우리 민족을 해방의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이다. 결국 누가 그 진리를 발견하였는가 하는 것은 주관적인 과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천에 의해서 결정된다. 오직 1100만 인민의 혁명적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중국문화를 출판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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