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전집 6 : 쏘련기행 중국기행 외 이태준 전집 시리즈 (소명출판) 6
이태준 지음, 상허학회 엮음 / 소명출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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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소련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더불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의 침략을 받았던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청난 전후재건의 속도를 보여줬다. 소련이 전 세계에 보여준 변화상은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서방 제국주의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냉전시기 소위 반공 제국주의 진영에 섰던 나라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보여준 소련의 놀라운 변화상을 자랑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며, 오히려 소련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고자 했다. 이는 당연히 1948년 정부수립부터 강력한 반공국가를 유지해왔던 대한민국 또한 마찬가지였다.

 

1948년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중심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은 분명히 좌익이라는 존재와 가치를 파리나 벌레만도 못한 대상으로 취급하던 극단적 매카시즘 국가였지만, 정부가 탄생하기 이전까지 한반도의 민중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남한에서 친일 경찰에 탄압을 받으면서 많은 좌익인사들이 월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또 많은 이들이 월북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월북을 선택했던 이들 중에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상징적 지표인 이태준이 있었다.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했던 이태준은 좌우대립이 남한 내에서 극명하게 나타나던 19468월 월북했다. 월북을 하게 된 이태준은 북한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북한에서 만든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써 소련을 여행하고 오는 일이었다. 이 여행 과정에서 이태준은 자기가 직접 보고 체험하고 느낀 것을 기록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쏘련기행(The Trip of The Union of Socialist Republics)’이었다.

 

이태준 작가가 쓴 쏘련기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는 19468월부터 10월까지 방소문화사절단의 일행으로 경험했던 소련 기행문이고, 두 번째는 10월 혁명 32주년을 맞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쪽 일원으로 방문했을 당시의 소련 기행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46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게 된 이태준은 월북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곳바로 소련여행을 떠나게 됐다. 소련에 가기 위해 평양에 있는 비행장에서 비행기를 타게 된 이태준은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소련 제1극동전선군의 제25군 사령관이자, 소련군정 최고 사령관인 치스차코프로부터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점차 가속화되고 있던 시기였다. 19463월 영국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 지도자였던 윈스턴 처칠이 미국 미주리주 풀턴시에서 발트 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유럽 대륙에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라는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면서 미국과 소련의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미국의 반소 반공정책인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 발표되진 않은 시점이었지만,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갈등은 심화됐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을 맞은 한반도 또한 마찬가지였고, 특히 한반도 이남을 점령한 미국은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에 친미정권을 세우고자 했으며, 여기서 친일파들의 힘을 빌렸다.

 

35년간 조선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 소련을 매우 적대시했다. 1920년대 이른바 문화통치 시기에 접어들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많은 사회주의 단체들과 학생운동들이 일어났고, 일제는 이들을 탄압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이들은 민족주의 계열보다 사회주의 운동을 탄압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농민·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주장하며, 대중과 민중속에 파고들어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근간을 흔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소련을 당연히 악마화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친일파 민족반역자세력도 그 당시 이 흐름을 따랐다.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있던 친일파들이 미군정과 결탁하였던 친일파들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국가 미국에 부역하며 반소선전과 반공선전을 일삼았다. 즉 해방 후 미군정을 등에 업고 반소선전을 했던 친일파들의 거짓말과 선전은 35년간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했던 반소선전과 일맥상통했다. 필자가 보기에 소련군정 최고사령관 치스차코프가 이태준 작가에게 자기 나라에 가면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의 대소선전이 옳았는가, 옳지 못하였는가를 보아 달라고 말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해방 후 친미 제국주의자들이 하는 반소선전의 거짓말이 어떤 것인지를 소련에 가서 직접 알아보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이태준이 소련을 처음 방문하던 1946년 소련의 상황은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처참했다. 무엇보다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이 일으켰던 독소전쟁으로 모든 것이 초토화 된 상황이었고, 4년간의 반파시스트 항쟁에서 2700만이나 되는 소련인민이 죽었다. 나치가 소련을 침공하며 저지른 만행은 씻을 수 없는 인류 최악의 전쟁 범죄였다. 그러나 단결한 소련 인민들은 침략자 히틀러에 맞서 군대와 인민이 단결했고, 소련의 육··공군은 파시스트 침략자들을 영웅적으로 무찔렀다. 책의 저자 이태준은 10월 혁명 32주년에 맞춰 두 번째로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소련군 퍼레이드를 보게 되었는데, 이들을 본 이태준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마다 선두에 말굽소리 달리며 사령관의 열병을 맞이하는 우라!” 소리가 성벽을 진동하며 일어났다. 뒤이어 역사박물관 쪽으로부터 자동차에 실린 낙하산부대와 대지를 뒤흔드는 탱크부대가 들어섰다. 탱크들은 앞에 내뻗은 포열마다 적의 비행기와 탱크를 쳐부순 수효대로 비행기와 탱크의 흰빛으로 그렸는데 하나같이 10여대씩 그린 영웅 탱크들이었다. 서구에서 10여 국가들을 침략하였고 이 위대한 10월에서 탄생했으며 레닌과 스탈린에게 영도되는 쏘련을 감히 유린해 들어오던 히틀러 야만들을 꺼꾸러뜨린 영용한 군대와 병기들이 바로 이 군대와 이 병기들이며 동양에서 반세기 동안 우리 조선을 비롯하여 여러 약소민족들에게 악독한 흡혈귀 노릇을 하던 일제를 쳐부순 것도 저 성스러운 군대와 병기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22

 

이태준 작가의 말대로 소련의 탱크와 비행기 대포는 히틀러 파시스트 도당을 멸망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소련은 이 전쟁에서 수많은 산업기반이 전시 초기에 파괴되었고, 2700만이나 되는 인명이 이 전쟁에서 죽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소련은 경제적으로 다시 재건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당시 소련의 지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이른바 전후재건을 위한 5개년 계획에 착수했고, 전쟁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련인민들은 전후복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태준이 방문했던 1946년 소련은 분명히 전후재건을 진행하는 중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즉 낙후성을 던져버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유로 들어 간악한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반소선전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들은 항상 편향된 자료와 관점을 가지고 거짓선전을 일삼았다. 그러나 이들은 항상 소련민중이 왜 스탈린과 소련사회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지를 놓쳤다. 그것은 바로 소련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가 책임지지 않는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기 때문이며, 또한 진보적인 성과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태준은 쏘련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민족들의 연맹에의 가맹과 탈퇴는 자유이며 민족들의 선진, 낙후의 차별이 없이 절대평등이 원칙으로, 자민족문화 중심으로의 발전의 자유, 그리고 이런 자유와 평등을 실제화 시키기 위해서는 낙후민족의 경제 상태를 비약시키지 않을 수 없으므로 농본지대를 농공지대화, 혹은 공농지대화의 중대한 과입이 생긴 것이라 한다. 전 연방 내에서 러시아공화국 같은 선진민족으로도 자기만 경공업에까지 손을 대어 인민의 일반 소비면을 윤택하게 해주지 못한 것은, 그래서 외부인들이, “소비에트 인민들의 생활이 무엇이 풍족하냐?”고 성급히 보아버릴 수도 있게 된 원인은, 실상은 16공화국이 다 잘살 수 있는 광범하고 평등한 공업기초에부터 전력을 집중해온 때문이었다. 그 결과 낙후된 민족들이 그동안 얼마나 자라고 있었는가는, 키르키스스탄 공화국이 혁명 전에는 제유공장 1, 치즈공장 1, 제혁공장 2 모두 수공업적인 4개 공장이던 것이 1945년에는 대소 5천 공장이 생기었고, 그중 4백여 공장은 전 연방적으로 유력한 공장들이라 한다. 이 낙후된 농본지대였던 키르키스는 지금 국민경제의 70%가 공업생산에 의존되는 것이라 했고 이런 부력의 비약은 모든 문화의 조건을 또한 비약시켰을 것은 필연의 사실이었다.”

 

출처 : 쏘련기행 p.55~56

 

그의 언급에서 알 수 있듯이 소련은 1930년대 공업화를 통해 이른바 중앙아시아에 있는 연방과 그 약소민족들에게 많은 혜택을 부여했고, 자본주의가 하지 않는 사회적 의무를 책임지고자 했다. 의료와 보건은 무상이었으며,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가가 전액을 지원하는 무상교육을 체계적으로 진행했다. 이러한 무상교육의 혜택은 소련에서 유학하는 외국인들에게도 적용되었고, 이태준이 만났던 소련서 유학하고 있던 조선인 대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현재까지도 천문학적인 학비를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자국민에게 요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또한 책에서 나온 소련은 원주민과 유색인종에게 인종차별을 마음껏 발산하던 제국주의 국가 미국하고는 매우 다른 모습을 보였으며, 인종차별은 철폐되었고, 소련에 사는 소수민족의 권리가 증진되었으며 이들의 교육율도 매우 높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외면당하는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진실이다. 쏘련기행에선 당시 미국에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과 소련의 소수민족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아주 정확하게 얘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예레반에서도 보았지만 25(인구)밖에 안 되는 도시에 전문대학이 아홉, 중학교가 60, 영화관과 극장이 열, 이런 고도의 문화시설은 그만한 경제력의 배경 없이는 불가능할 것으로 아르메니아의 단독실력으로는 이런 비약적 건설을 도저히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장이라고는 넷밖에 없던 키르키스스탄공화국이 공장 5천을 가진 것이나, 이것은 1940년에 미국 '트라이셀'이란 평론가가 지적한 것이지만, 1913년대에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소비에트의 타자키스탄공화국이 문맹비율이 동일했었는데, 17년 후 1930년에 이르러, 아메리칸 인디언은 문맹이 2%가 줄었고 소비에트의 타지크는 문맹이 60% 가 줄었다는 것이 우리는 어떤 감상을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출처 : 쏘련기행 p.114

 

19468월부터 10월까지 이태준을 포함한 방소문화사절단은 격리촌부터 시작하여, 이르쿠츠크, 치타, 모스크바, 아르메니아공화국, 그루지야공화국 그리고 스탈린그라드(현재 볼고그라드)와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돌아보고 왔다. 2달 동안의 여행과정에서 이들이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비록 전후재건 중이고,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적어도 인민의 당연한 권리가 적어도 자본주의 국가보다 훨씬 인정되고, 인식되는 국가였다. 무엇보다 히틀러 침략으로 인한 상상을 초월하는 타격을 입고도 전후재건에 나서는 소련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에게 매우 감동적으로 다가왔으며, 그런 감동적인 감정들이 책에 묻어나 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49년 이태준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 문화 활동가 대표의 한 사람으로 소련을 방문하게 됐는데, 그가 보게 된 소련의 모습은 불과 3년전 하고도 매우 달랐으며, 더 많은 방면에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처음 방문하던 1946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물자가 풍족하지 않아 배급제를 실시했지만, 1949년 시점에는 소비재 부분도 많이 성장하여 배급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국영상점들이 늘었으며, 소련 자체생산 기술로 조립된 자동차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태준은 이런사실들을 책에서 묘사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3가지 내용들을 인용하고자 한다.

 

호텔 건너편에는 큰 식료품점이 있어 마주 건너다 보였다. 김 서린 진열창에 포장 화려한 식료품들은 온실 속의 화초 같았고 자정 가까울 때까지 문이 열려 있는데 자동차를 세우고 들어가는 사람도 많았다. 우선 나의 시야는 호텔 주변에 국한된 것이나 왕래하는 시민들의 의복이나 신발이 3년 전에 볼 때와는 월등히 우수해졌고 식료품 상점 앞에서도 배급을 타러 줄지어선 광경은 다시 볼 수 없는 옛말이 되고 말았다.”

 

출처: 쏘련기행 p.201

 

이튿날 우리는 모스크바의 중요한 거리들을 자동차로 한 바퀴 돌았다. 네거리를 만날 때마다 앞을 가로 건너는 자동차의 떼로 한참씩 기다리게 되는데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차는 어쩌다 한대씩 볼 수 있는 정도다. 물론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 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즐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

 

출처 : 쏘련기행 p.213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혈색이 좋고 명랑한 기분드로 일하였다. 그전 일제 때 조선서 전매국에 다니는 여공이라면 으레 담뱃독에 찌들은 것 처럼 얼굴빛 누르고 한참 학교 다닐 소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곳 담배공장에는 그런 과로와 빈혈의 여공들은 볼 수 없었다. 모두 흰 작업복들을 입고 먼지 없는 작업장에서 유쾌히들 일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착취되는 노동이 아니라 자기들의 공장에서 자기들의 행복을 위햐 하는 노동이며 더욱 세계 전체를 착취 없는 사회로 개조하는 위업에 선두에 나선 쏘련 노동자다운 긍지들로 차 있었다. 2천 명 노동자중에 약 2백 명우 벌써(1110) 연간 계획량의 200프로를 초과완수하고 있었다. 노동임금은 최하 견습공이 5백 루블부터요 숙련공은 2천 루블까지 있었다. 모스크바서 승용차 한 대에 7천 루블이라 하니 숙련공의 석달 반 월급이면 자동차 한 대를 살 수 있는 것이다.

 

공장 안에는 식당이 있는데 빵고기우유맥주사이다케이크 등이 실비로 제공되고 있었고 식당은 김 서리는 접시들과 함께 따스하고 정갈하였다. 공장 곁에 있는 노동자 주택을 가보았는데 군데군데 자동 엘리베이터가 있고 부엌 식당 침실 목욕간 등과 스팀 전열 가스 수도의 완비와 가구들의 호화로움은 물질생활의 높은 수준을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라디오, 손풍금, 바이올린 등 악기들과 책상 위에는 문학 서적이 많을 것을 보아 이 공장 노동자들의 문화 정도의 높음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노동자의 집에는 사진기도 걸리었고 오토바이와 사냥총도 있었다.

 

이런 공동주택을 이웃하여 탁아소와 아동공원이 있었다. 탁아소는 조선에도 많이 있거니와 아동공원이란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학교에 들기 전 어린이들이 오는 유치원 셈이다. 여기는 아이들 놀기 좋고 자연과 친할 정원이 있고 집안에는 노래하는 방, 유희하는 방, 낮잠 자는 방, 밤에 자는 방, 식당 등이 있다. 아이들은 오면 똑같은 옷으로 갈아 입었고 집에서 다니는 아이와 여기서 자며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출처: 쏘련기행 p.244~245

 

많은 사람들이 소련하면 오로지 군사력만 투자한 국가로 생각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하지만 문학가 이태준이 쓴 쏘련기행을 읽어보면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비록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 풍요롭진 않더라도 미국보다 민중의 권리와 복지를 훨씬 더 많이 책임지고 있었으며, 전쟁의 폐허속에서도 그러한 가치들을 지키고 실천했다. 즉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당시 경쟁자였던 자본주의 국가 미국보다 인종차별, 교육, 의료, 주거면에서 훨씬 더 진보적이고 인민들에게 많은 부분을 챙겼다. 이것이 바로 반공주의자들이 항상 외면하는 소련의 진실이며, 소련의 어떤 사회였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명확한 팩트다. 그런 점에서 이태준 작가의 쏘련기행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었던 소련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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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초 강철비2를 보게 됐다. 영화 강철비22017년에 개봉했던 영화 강철비의 후속작으로 북미정상회담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후속작은 전편에 출연한 배우들이 나왔다는 점만 빼면 1편 스토리와의 연결점이 전혀 없는 다른 영화로 볼 수 있을 정도다. 지난 8월에 본 영화 강철비2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확실히 더 잘 만든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문재인 대통령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다는 부분과 트럼프 역할이 진중하지 않고 너무 개그캐로 갔다는 비판을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세세한 부분에 대한 입장을 떠나 한국 영화의 진일보를 보여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리뷰에서 강철비2가 어떤 점에서 진일보 했는지를 얘기해보고자 한다.

 

1. 다시 일어나는 일본 제국주의

 

영화상에서 나오는 반대 세력 내지는 적이라 볼 수 있는 대상중 하나는 일본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센카쿠 열도(중국말로는 댜오위다오)를 중심으로 해상분쟁을 하는 중국과 일본의 대립구도를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을 패망시킨 미국의 힘을 업어 미국의 반공 라인으로 있으며 경제성장을 한 일본의 극우들을 통해 이들이 항상 본인들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희생시키는 대상은 항상 조선반도(한반도)였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일본 극우세력의 막강한 파워 중 하나인 모리 신죠는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80여 년 전 미국이 석유를 끊자 우리 일본은 어쩔 수 없이 미국과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됐고 여기 원폭 투하로 우리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위대한 일본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이번엔 경제였죠. 불과 30여 년 전 도쿄의 반만 팔아도 미국의 땅 전부를 살 수 있을 만큼 세계 경제 패권은 우리 일본의 차지였습니다. 그러나 우린 미국에게 또 당했습니다. 플라자 합의라는 엔화의 인위적 절상을 통해 우리 일본은 이제 한국에게조차 무시당할 만큼 후퇴했습니다. 미국이 우리의 동맹이라고는 하지만 지난 세기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깊이 생각해봐야만 합니다.”

 

이것은 과거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범죄인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전혀 반성없는 모습의 일본과 전쟁 후 미국의 도움으로 반공의 보루로써 급격히 경제성장한 일본 그리고 미국과는 동맹이지만, 과거 일본 제국주의적 야심과 관점을 버리지 않은 일본을 보여줌으로써 현재 일본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 이 발언 이후 계속되는 모리 신죠의 대사는 다음과 같다.

 

빌어먹을 양키 놈들! 우리보고 중국과 붙으라니, 이제 더는 미국놈들한테 놀아나서는 안 돼. 이제는 우리가 미국을 이용해야 돼. 미국놈들이 원하는 대로 중국과 일전을 벌일 것 같이 뜸 들여 주면서, 우리는 빼앗긴 우리의 영토를 되찾자고! 임진왜란,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반도의 6.25까지 우리 일본이 일어설 때 시작은 항상 조선반도였다. 한국과 일전을 하게 되면 잠들어있는 우리의 야마토 정신이 살아날 것이네.”

 

영화에서 나오는 이런 대사는 현재 독도를 일본땅으로 만들고, 미국을 이용하여 중국과 영토 갈등을 벌이는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즉 한반도의 문제에서 일본 제국주의와 영토 분쟁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어떻게 역겨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사라 생각한다. 이렇듯, 한반도 문제를 접근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분단과 미중분쟁을 통해 얻으려는 계산이 무엇인지를 영화가 보여준 점은 상당히 긍정적으로 평가할 점이라 생각한다.

 

2. 영화상에 드러나는 미국 네오콘의 폭력성과 오만한 그리고 미중갈등

 

영화는 부제목으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을 걸어놓았지만, 단순히 북미 관계만 보는 것이 아닌 미국과 중국의 대립 구도와 갈등 그리고 중국과 싸우려는 미국 네오콘들의 폭력성과 오만함을 아주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현재 미국이 생각하는 한반도의 구도란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 미국 일본이 북한 중국 러시아에 대항하는 구도일 것이다. 영화는 한반도의 이런 신냉전적 구도를 무시하지 않는다.

 

특히나 초반에 보여주는 미중분쟁과 갈등을 보여줬듯이, 영화는 중국 자체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미국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도 보여준다. 영화상에서 등장하는 가상의 군사작전 카게무샤는 미국이 어떤 나라고,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선 스무트(트럼프)를 대신하여 대통령 권한을 위임받은 부통령 조앤 마틴은 북한과의 전쟁을 준비할 때, 다음과 같은 대사를 자기 측근에게 한다.


 

네오콘은 중국이 21세기에 나타난 나치라고 생각해. 언젠가 우리랑 한판 붙을 거라고 믿고 있지. 이왕이면 이길 수 있을 때 밟아놔야지. 안 그런가?”

 

이 대사는 현재 회고록 공개로 문제가 된 존 볼튼 같은 네오콘들 즉 북폭론자 반공주의자들이 북한과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아주 명확히 보여주는 대사다. 또한 영화에서 언급되는 카게무샤 작전의 목적은 중국의 정권교체이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통해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해상에서 자기들이 벌인 조작극을 중국에게 뒤집어 씌운는 것이 작전의 계획이라는 것에서도 영화가 미국 네오콘들이 어떠한 집단이고 왜 오만하고 위험한지를 아주 명확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3. 북핵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영화가 부제목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걸고 있듯이,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문제가 바로 북핵 문제다. 실제로 남북 4.27회담과 제1,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도 항상 이슈가 됐던 주제중 하나가 북핵문제다. 영화는 북핵문제를 북한이 비핵화 해야 한다는 기본전제를 깔고 있다는 점에서 필자의 견해와는 다르지만, 한국 영화치고 매우 진일보한 관점으로 북핵문제를 접근하는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김정은 역할인 조선사는 평화협정을 두고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소련이 망하고 남조선이 중국이랑 러시아랑 수교했던 30년 전 우리는 자존심 다 내려놓고 미국에 수교를 간청했습니다. 근데 미국은 조선은 망한다고 대상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게 핵입니다. 핵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우릴 대상이라도 해 줄 테니까 대통령께서 거기 앉기까지 30년이 걸렸습니다. 거기 종이 쪼가리에 이름만 쓰면 우리 인민들이 30년 동안 썩어지게 고생해서 만든 핵무기를 몽땅 넘기는 겁니다. 근데 그거 이름 몇 자 쓰는게 그렇게 힘듭니까?”

 

조선사의 대사처럼 실제로 북한은 냉전의 종식이라는 시대사적 격동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국에게 수교를 간청했다. 그리고 미국은 동구권의 몰락을 보며 북한이 막연히 망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를 일방적으로 거부했다. 거기다 1994년에는 한반도 전쟁 위기까지 있었다. 즉 거기서 선택한 것이 북한의 핵개발이다. 영화 강철비는 이러한 시대사적인 맥락을 상당히 객관적으로 접근한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영화상에서 이러한 접근을 한 것은 매우 진일보한 접근이고, 관점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까지 북한의 핵문제를 단순히 북한 정권의 일탈행위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이 핵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고, 그러한 노력들을 영화상에서 상당히 많이 보여주었기 때문에 영화 강철비는 상당히 높게 평가를 개인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다.

 

4. 결론

 

대표적으로 영화의 3가지 지점을 얘기하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듯이, 나는 영화 강철비2를 감명깊게 봤다. 개인적으로 전작인 1편보다 더 잘 만든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한국의 극우반공주의자들이 빨갱이 영화라며 공염불에 가까운 이상한 비난을 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북한의 쿠데타라는 주제는 매우 보수적이고 반공주의자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이다. 물론 그 쿠데타라는 설정상 상당한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그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문제를 국제적인 변화와 이해관계 그리고 맥락속에서 접근하고, 북한의 입장도 상당부분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영화 강철비2는 훌륭한 수작이다.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종전협정 그리고 남북통일을 바라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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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은 코로나???

gta 산안드레스에서 나왔다. 오늘 게임하다가 보게 되니 참 당황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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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9-29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산안드레아스가 한글버전도 있었군요^^

NamGiKim 2020-09-29 16:24   좋아요 1 | URL
정확히 말하자면 한글패치버젼이죠.
 

(이 글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반전운동에 나섰던 리영희 교수의 연설문입니다.)

 

평화 국가의 위상이 위기에 처해 있는 이 시각, 며칠 동안 계속 민주주의의 승리를 위해 싸우고 있는 여러분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모처럼 갖지 못했던 귀중한 이 기회에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에게 경고하고 아울러 간곡히 부탁하겠습니다. 대한민국 군대를 이라크에 절대 보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대통령과 정치인들은 분명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첫째, 그 동안 미국이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합법화하려고 선전한 사항이 모두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도 발견되지 않았고, 화학무기와 그밖에 유엔 안보리가 결정하고 제재를 가할 만한, 미국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따라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거짓된 주장과 요구를 몇 달에 걸쳐 심의한 결과도, 그리고 현지에 파견된 조사단의 철저한 조사 결과도 아무런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이번 전쟁은 침략전쟁을 구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세계 국가들의 행동 규정을 결정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유엔 헌장, 이 모든 것을 미국은 위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의 이라크 군사 공격은 명백한 침략 전쟁입니다.

 

, 파병은 대한민국 헌법의 근간이 되는 유엔 헌장 정신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은 국제 관계에서 국제 행동은 유엔 헌장 정신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또 우리 헌법에는 침략 전쟁을 부정하는 명백한 조항이 있습니다. 파병은 이것에 대한 위반입니다. 대한민국이 유엔의 결정에 의해 탄생한 국가인 만큼 유엔 정신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행동 결의가 없는 미국의 불법적 전쟁 행위에 군대를 파병하는 것은 유엔 헌장 위반이며 대한민국의 법적 뒷받침이 되고 있는 기반을 파괴하는 겁니다. 따라서 노대통령과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분명히 대한민국의 헌법이 정한 바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 것이며, 대한민국 헌법을 위반하는 것은 국가와 국민의 대표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넷째, 우리 대통령과 국회의원들과 파병 지지 세력들은 파병이 한-미 동맹 관계에 바탕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1954년 발효된 것으로, 이 방위조약에는 분명하게 군사행동에 대한 제한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동맹이라 해서 모든 군사행동이 허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나 그 연배 분들인 거 같아서 대한민국의 군사 행동에 관한 한미방위조약에 관한 강의를 할까 합니다.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그 전문에서 상호 군사 행동을 분명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1.파병은 오히려 한미 방위 조약 위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한국이 미국을 도와도, 미국이 한국을 도와도 그것은 외부의 무력 공격이 있어야만 정당화됩니다. , 그 지역은 태평양 지역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노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분명하게 외쳐야 합니다. 외부로부터의 명백한 군사 행동이 없었는데도 대한민국이 한미방위조약에 입각했다고 착각하고 미국의 군사공격에 지지를 보낸다면 한미방위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미방위조약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 해결하게끔 돼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평화적 수단을 다했습니까?

 

, 국제 관계에서 유엔에 배치되는 방법으로 무력 위협이나 무력 공격을 삼간다고 돼 있습니다. 따라서 유엔에 위배되는 이라크 공격은 한미방위조약에도 위배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라크가 무력 공격을 해 왔습니까? 이라크 국민들이 한국 국민들에게 손가락질 하나 한 일이 있습니까?

 

이라크가 아시아에 있습니까? 극동 지역에 있습니까?

 

이라크가 선제 공격을 했습니까? (청중들:아니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미국의 군사 공격을 지지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박관용 국회의장과 여야 국회의원들은 이제 미국과의 동맹 관계라는 허황된 논리로 파병을 결정하려 하는 이유를 국민들에게 설명해야 합니다.

 

다섯째, 여러분은 젊어서 베트남 전쟁 당시 상황을 잘 모를 겁니다. 대한민국 군대 35만 명이 베트남에 갔고 상시적으로 5만 명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군대가 미국을 지원하기 위해 베트남에 갈 때도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간 것이 아니에요. 미국은 이 조약에 근거해 대한민국 군대를 베트남까지 끌고 갈 근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형식을 취했냐 하면 남베트남 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에 독자적으로 군대 파병을 요청하게 하는 군색한 방식을 썼습니다.

 

미국의 요청으로 베트남에 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멍청한 한국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이 미국 요청 없이 자발적으로 갔다고 하는 엉터리들이 있는데,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근거가 없으니까 남베트남 정부가 한국에 요청하도록 한 것일 뿐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못된 방법을 쓴 것입니다.

 

여섯째, 그렇다면 동맹 국가는 다른 동맹 국가의 전쟁에 무조건 참전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 때 영국은 군대를 포함해 아무것도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국이 하도 요청하니까 급기야 의장대 6명을 보냈습니다. 사이공 공항에 의장대를 세워 놓고 마치 영국이 미국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인 양 쇼를 한 겁니다. 영국이야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멸망할 것을 마셜 플랜을 비롯한 미국의 원조로 살아난 나라입니다. 미국과 같은 앵글로 색슨 핏줄인 영국은 우리 나라보다도 더욱 대대적으로 미국의 베트남전을 지원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의장대 6명만을 보냈다는 사실은 굉장히 인상적이지 않습니까?

 

일곱째, 국가 이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국가 이익을 획득하는 방법은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살인·강도의 방법으로, 남의 나라를 침범하고 남의 선량한 국민들을 해치면서 돈을 벌고, 시장을 개척하고, 석유 이권을 챙기는 것을 원하는 극우 반공주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벌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고 도덕적으로 해야 합니다. 강도·살인, 절도·강간·파괴·방화 이런 방법으로 번 돈이 얼마나 유익하고 국가 이익에 도움이 된단 말입니까?

 

여덟째, 노무현 대통령은 북한 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전략적으로 미국을 지지했다고 고통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를 해결하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전쟁을 지지했다면 이것이야말로 한심한 작태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특히 부시를 비롯한 공화당 세력에게는 미국의 이익이 행동 규범입니다. ‘동맹 국가의 희망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부시 정권의 고려사항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한국 정부가 아양과 아첨을 떤다고 부시 정부가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이만저만한 착각이 아닙니다. 미국은 오로지 미국의, 부시 정권의 철학과 정책과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집단입니다.


 

아홉째, 한국 국민들은 민주화 운동 과정을 거쳐 높은 민주 의식과 도덕성을 갖췄습니다. 세계인들의 존경을 얻기 위해서는 파병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은 이제 자주적이어야 합니다.

 

열번째, 대한민국의 전투병을 이라크 포로수용소 경비병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이야말로 훗날 전범 재판에 회부될 가장 위험한 직책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연합군 병사들을 포로 수용소에 가두었고 조선인들이 경비병 노릇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가련한 조선인들이 일본의 앞잡이로 몰려서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당했습니다. 포로 수용소 경비는 1급 전범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2. 미국의 행동 규범

 

열 한번째, 우리가 왜 12억 아랍 인구를 적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나라의 적을 새로 만들어서 국제 외교에 지장을 입을 이유가 없습니다.

 

열 두번째, 국내 반공 수구 세력, 미국의 말이라면 뭐든지 무조건 따르는 일부 수구 세력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열 세번째, 노 대통령 자신이 취임 전과 취임 후에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은 한다, 대한민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주적인 태도를 가지겠다 해서 여러분들은 아마 이 정권에게 표를 찍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미국에 대해서 할 말을 하는 노 대통령의 모습입니까? 이것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고 자기 자신을 배신함으로 해서 대한민국 국민을 배신하고 국가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열 네번째, 이번에 파병하고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되면, 우리 국민은 미국에 더욱 예속될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미국의 보호국처럼 취급받아 왔는데, 이번 파병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킬 겁니다.

 

끝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해 놓고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 대북 적대 정책에 무슨 근거로 대항할 수 있습니까? 미국은 우리의 요구와는 반대로 행동할 겁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묻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에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을 지지하고 군대를 파병해야 할 비밀 협약이 있는가? 한미방위조약 이외에 그것을 백지화하는 미국과의 비밀 조약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 헌법과 한미방위조약에 근거해 마땅히 그것을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에게 그 사실을 밝혀야 합니다. 국민은 알 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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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원 2020-09-25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유합니다

NamGiKim 2020-09-25 15:1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쿠자누스 2020-09-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영희 교수님 연설보다 몇 달 전이 되겠네요.
시사저널에 제가 기고한 글입니다.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88686

NamGiKim 2020-09-25 18:50   좋아요 0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댜.^-^
 

수백 년 동안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온 일본은 1853년까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적이 없었다그러던 중 이해에 미국 매슈 C. 페리 제독이 에도만으로 들어와 대포로 위협하고 중세에 머물러 있던 일본의 문호를 개방해 근대 국가로 유도했다일본인들은 페리의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출처일본 제국 패망사 p.55

 

에도막부를 거치며 이른바 쇄국정책을 펼치던 일본은 2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주변국들 일부를 제외한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일본이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시도 하지 않던 250년이라는 세월 동안 지구반대편에선 여러 사건들이 일어났다유럽인들은 소위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고 부르던 곳에 가서 정착 및 이주를 시작했고, 1776년 미국에선 독립혁명이 일어났으며, 1789년 프랑스에선 자유평등우애라는 가치를 내걸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또한 1804년 황제가 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유럽 정복에 나섰으며(물론 라이프치히 전투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며 끝났지만), 19세기 초 영국에선 소비재 대량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공장건설이 일어나면서 이른바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산업혁명, 19세기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기술과 과학 생산의 발달과 더불어 유럽을 자본주의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이끌었다. )

 

산업혁명을 시작으로 유럽은 자본주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도의 생산력을 보여줬으며 노동자 계급을 탄생시켰다또한 군사력의 현대화도 이루어졌다그러나 자본주의의 활성화는 소수의 상류계층이 중심이 된 착취를 의미했고자본은 노동자들을 하층화 내지는 비인간화시켰다그와 동시에 산업혁명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이 있었다그게 바로 제국주의(Imperialism)’이다영국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량생산을 위한 값싼 원료를 제공받고자 했고여러 나라들을 식민지화했으며필요에 따라선 총과 칼을 동원했다나폴레옹 황제가 잠자는 사자에 비유했던 중국(당시는 청나라)은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으며무굴제국으로 명성을 떨치던 인도는 영국의 독점기업 동인도 회사를 통해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아편전쟁, 아편전쟁은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제국주의 국가의 과학과 기술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청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친 나라들은 전부다 이런 과정을 거쳤고프랑스네덜란드벨기에 등도 똑같은 과정을 통해 많은 나라를 식민지화했다당연히 일본은 국제정세가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무감각했으며태평한 나날을 보냈다그러던 1853년 일본의 역사가 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바로 미국이 들어온 것이다미국은 신생국가였지만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나라였다어쩌면 일본과 미국의 관계는 여기서 부터가 시작일지도 모른다. 1853년 6월 3(양력으로는 7월 8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동인도 함대 소속의 군함 4척이 일본 에도만의 우라가 항에 나타났다. 1852년 3월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라는 지령을 부여 받은 페리 제독은 그해 11월 미국의 필모어 대통령 의 친서를 휴대하고 버지니아 주 노퍽을 출항하여 7월 8일 우라가 항에 입항했다.

(페리 제독, 페리 제독은 미영전쟁의 영웅 올리버 해저드 해리의 동생이다. 그 또한 전쟁영웅이 될 형을 따라 1812년 미영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페리는 1850년대 군함을 이끌고가 일본을 개항시켰다.)

 

페리 제독은 막부의 관리들에게 미국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면서미국과의 통상을 요구했다이는 당연히 10년 전 영국이 청나라에게 했던 방법과 비슷했으며만일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위협도 같이했다페리 제독이 이끌고 온 현대식 군함 4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는 페리제독의 요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신속한 움직임을 보였다페리 내항 사실을 조정에 알렸으며 각 지역 다이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이 과정에서 막부는 페리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론을 취한 반면조정과 다이묘들은 서양 오랑캐를 쫓아내야 한다는 양이론을 내세웠다. 1854년 1월 페리 제독은 이번엔 7척의 배를 이끌고 에도 만 안으로 다시 입항하여 답변을 재촉했다결국 막부는 페리 제독의 요구를 수용하여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에 들어온 미군 군함, 미국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처럼 산업혁명과 자본주의화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길렀다.)


(성조기를 달고 있는 미국 군함)

 

미일화친조약 체결로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의 길에 들어섰다하지만 미국의 초대 영사로 부임한 타운젠드 해리스가 제한적 개방에 불만을 갖고 통상의 자유화를 주장하면서해리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막부는 1858년 7월에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정식 조인했다이 조약으로 일본은 개항장을 다섯 개(요코하마하코다테니가타고베나가사키)로 늘리고무역의 전면 자유화 및 협정 관세 채택외국인에 대한 영사재판권 인정하게 됐다또한 막부는 네덜란드와러시아영국프랑스와도 통상조약을 체결했다개국을 한 일본이 서양 열강이 지배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된 것이다.

(일본에 입항한 페리 제독과 그의 병사들)


(개항한 일본의 도시를 나타낸 지도)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에서 칙허(임금의 허가함)의 문제를 계기로 일본은 정치적 갈등이 전면에 드러났다막부는 통상조약 체결을 결정했고천황에게 칙허를 요청했는데결정적으로 고메이 천황이 이를 거부했다물론 막부는 천황의 의견과는 별개로 통상조약 조인을 강행했다개항을 하게 된 일본이 겪어야 했던 문제는 바로 경제적 문제였다개항으로 인한 수출 급속 증대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해 물가가 폭등했고물가상승으로 인한 하급무사와 서민의 생활의 막대한 부담으로 이어졌다거기다 미국과 체결한 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으며여기에 대한 불만도 만만치 않았다이런 불만은 외국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져 1860년 해리스 통역관이 사쓰마번의 낭사(浪士)에게 살해당했고, 1861년 도젠지의 영국 임시 공사관이 습격당하기도 했으며영국 공사관이 일본인들의 습격으로 불태워지기도 했었다.

(일본이 미국에 보낸 사절단, 1860년 일본은 미일수통상조약의 비준 및 교환을 위해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은 그들이 서양을 배울 수 있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860년 이른바 신미사절단이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고그해 4월 4일엔 수도 워싱턴의 미국의회를 방문했었다. 1861년 말 일본은 개항연기 교섭 담판을 위해 다케우치 사절단이 유럽에 파견되었고이들은 1862년 5월 24일 네덜란드 의회를 방문했으며여기 수행원 중 한 명이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프로이센 의회를 방청하기도 했다. 1863년 12월에는 영국과 프랑스에 이케다 사절단이 파견됐고이들은 1864년 7월에 귀국했다막부 말기부터 일본은 서구 열강을 배우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고이는 일본이 서구 열강에 따라 근대화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에도막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변화였다. 또한 일본이 서구 열강에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에도막부 말기에 접어들면서 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막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막번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체제구상으로 공의정체론이 부상했고서양세력의 침략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중앙집권체제로의 전환이 필요성을 깨달았다이 과정에서 막부와 반막부세력으로 나뉘어 1860년대 일본은 이들의 격동과 대립이 전개되었다. 1867년에 들어 막번체제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867년 12월 반막부 세력은 왕정복고 쿠데타를 주도하여 천황의 궁정을 장악하고 천황의 이름으로 왕정복고의 대호령울 발표했다이에 따라 막부의 폐지와 삼직(총재·의정·참여)의 설치장군의 관직 사임과 영지 몰수가 결정되었다이렇게 하여 260년간 지속되었던 도쿠가와 막부가 막을 내렸다이것이 바로 메이지 유신이었고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은 이른바 서구화 및 탈아입구(脱亜入欧だつあにゅうおう)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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