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영화 리뷰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1412일 소련의 카자흐스탄 바이코누르기지에서 공군 중위 출신의 우주비행사가 탄 로켓트가 우주를 향해 발사됐다. 그 로켓트의 이름은 보스토크 1(Восток-1)였고, 보스토크 1호는 우주에 도달하여 1시간 30분간 지구 한 바퀴를 돌았다. 우주비행을 마친 보스토크 1호는 다시 지구로 돌아왔고, 원래 목표했던 도착지 보다 400km 떨어진 곳에 착륙했지만 확실히 지구에 귀환했으며 조종사 또한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을 마친 조종사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가 바로 유리 알렉세이비치 가가린(Юрий Алексеевич Гагарин) 즉 유리 가가린이다.

  

인류최초의 우주비행사라는 타이틀은 그 상징성이 매우 강력하다. 소련이 해체 된지 30년이 다 되어가지만, 러시아인들 마음속에는 가가린이라는 인물이 여전히 영웅으로써 기억되고 있다. 4년 전 공익근무를 시작하기 몇 주 전 러시아 여행을 갔던 필자는 러시아에서 레닌, 스탈린, 푸틴, 소련 상징물과 더불어 유리 가가린의 얼굴이 담긴 관광 상품들을 셀 수 없이 많이 봤다. 현재 러시아에서 유리 가가린이라는 인물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얼마나 강력한지 필자는 러시아 여행 과정에서 알 수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COVID-19로 인해 사실상 밖에 나가기도 힘든 요즘 필자는 넷플릭스에서 볼만한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필자 눈에 아주 강력히 들어온 영화 한 편이 있었는데, 그 영화가 바로 영화 유리 가가린(Gagarin First in Space)였다. 영화는 2013년 러시아에서 제작되었고, 러닝타임은 2시간 정도 된다. 영화는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을 하는 과정과 그가 걸어온 인생사를 총괄적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흐름은 우주비행전과 우주비행 과정 그리고 우주비행 후로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중간 중간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가가린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유리 가가린의 인생회상 장면에선 어린 시절 그가 놀았던 기억과,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치하에 있는 마을에서 독일군의 음식을 훔치려다 동생을 잃을 뻔했던 기억,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농촌을 떠나 도시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심하던 시절, 전투기 조종사 시절, 아내와의 연애시절과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고 환호하는 가가린의 모습 등의 장면이 회상신으로써 나온다. 이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얘기는 가가린이 동네에서 악단단원으로 연주를 하다가 도시로 가 학교에 입학하기를 결정하게 되는 장면인데, 이 장면에서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가가린은 아버지에게 도시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겠다고 밝히는데,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가가린아버지 저는 도시의 기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학교가 교복을 준대요. 트렌치코트랑 부츠도 주고 기숙사에는 침상도 있대요.

 

아버지또 다른 건?

 

가가린식사도 주고 월급도 줘요.

 

아버지: 뭘 준다고?

 

가가린: 돈을 준다고요. 한 달에 7루블요.

 

아버지: 예전에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아버지가 학비를 내줬어. 학비가 모자라서 송아지도 팔았어. 그랬었지.

 

가가린: 그건 옛날 얘기에요.

 

소련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장면이 무엇을 뜻하는지 놓칠 것이다. 즉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 일반인들이 다니기 힘든 학교는 소련을 거치며 무상교육으로 발전했고, 학생들이 필요한 학용품과 생필품 그리고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는 사회가 바로 소련이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필자에겐 영화상에서 언급되는 이 대사가 매우 반가웠고, 소련이라는 사회가 비록 미국보다는 경제적으로 밀릴지언정, 인민대중의 복지체계가 갖추어진 사회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주제는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당시 가가린의 경쟁자이자 동료였던 선발된 우주비행사들 또한 외면하지 않았으며, 유리 가가린을 우주로 보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과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를 매우 비중 있게 등장시킨다. 영화에는 유리 가가린 다음으로 우주비행을 마친 우주비행사 게르만 티토프도 나름 의미있게 다루는데, 첫번째 우주비행이 아닌 두 번째 우주비행사가 된 아쉬움이 남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도 잘 보여준다. 사실 영화상에선 언급되지 않아서 그렇지 티토프는 인류 세 번째로 우주비행을 한 우주비행사였다. 그 이유는 가가린 우주비행 성공 1달 뒤 미국의 우주비행사 앨런 셰퍼드가 우주비행을 마쳤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당시 유리 가가린의 우주비행 소식을 들은 소련사람들이 이 사실에 얼마나 열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는 중에 알려진 라디오 방송을 듣게 된 소련인민들은 우리가 인류 최초로 우주에 인간을 보냈어!”라고 하며 열광하고, 앞으로의 우주개척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었다. 코롤료프로부터 가가린의 우주비행 소식을 접한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은 혈압체크를 하던 중, “전 세계가 우리의 위상을 알게 될 거야!”라고 하며 기뻐한다. 우주비행에서 소련인민들이 느꼈을 감정을 대변하는 장면일 것이다.

  

그 외에도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기 전 느꼈을 기쁨과 두려움 고된 훈련 및 그 외의 감정들까지 잘 알 수 있었다. 또한 가가린이 타고 있던 로켓트가 우주비행을 하는 과정의 그래픽과 연출 또한 상당히 현실적이고, 고증도 잘해놨기에 볼만했다. 러시아의 영화기술이 매우 훌륭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유리 가가린! 그는 1968년 단순한 비행사고로 34세의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가 전 세계적으로 준 영향은 상당했고, 수많은 러시아인이 그를 기억하고 있다. 소련의 영웅 가가린과 인간 가가린을 동시에 보고싶은 이들에게 이 영화를 매우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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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911일 비행기 두 대가 세계금융의 도시 뉴욕에 있는 WTO 쌍둥이 빌딩에 자폭했다. 이 자폭테러로 최소 3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비슷한 시각 미국 펜타곤에도 비행기 자폭 테러가 감행됐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미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 충격은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만든 기폭제였던 진주만 기습 공격만큼이나 파급적이었고, 이것은 부시 정부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War on Terror)’을 선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북한, 이란, 이라크를 가리켜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하며 제국주의적 언성을 높였다. 또한 미국은 9.11 테러에서 받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9.11 테러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테러리즘(Terrorism)을 선보인 것이다.

 

과거에도 미국은 이와 같은 테러리즘을 거리낌 없이 자행했다. 이들이 자행했던 악랄한 테러리즘 중에는 911일에 했던 것도 있는데 그게 바로 1973칠레 쿠데타(The Coup in Chile)’였다. 1973911일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닉슨 정부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피노체트 군부세력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닉슨 정부의 지원과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의 군부세력은 아옌데가 있던 궁전을 탱크로 포위하고 시가전을 벌였으며, 궁극적으로 아옌데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미국이 칠레에서 반동 쿠데타를 일으켰던 이유는 명백했다. 왜냐하면 칠레의 아옌데 정부가 사회주의 정권이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남미 국가들을 사실상 자신들의 경제적 지배하에 놓고 싶어했다. 연합과일과 같은 미국의 독점자본들은 남미인민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축적했고, 남미의 부르주아 세력들은 미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동포들을 착취했다. 다른 중남미국가와 마찬가지로 칠레의 상황도 비슷했다. 칠레의 부르주아지들과 지배계급은 미제국주의의 이익에 복무했고,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세계 최대의 구리 생산국인 칠레는 그 구리 생산이 미국계 양대 기업 케니코트구리와 아나콘다 구리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칠레의 반공 그룹에게 지원했을 정도였다.

 

그러던 19709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사회주의자 후보인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민주적인 선거에서 반대세력을 꺾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칠레에는 세계 최초로 민주적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탄생하게 됐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 집권하게 되자, 베트남 전쟁으로 골머리를 앓던 닉슨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새로 출범한 아옌데 정권을 존중한다.”는 말을 했지만, 이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미 미국은 1970년 칠레 대선에서 아옌데의 인민연합을 겨냥하여 흑색선전에 100만 달러가량의 자금을 쏟아 부었으며, 미국에 부역하는 반공세력들을 이용하여 칠레에서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미국은 아옌데 정부가 칠레 산업의 핵심인 구리기업을 국유화 하자, 이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렸다. 그리고 당시 극심한 유아 사망률과 분유 부족에 시달리던 아옌데 정부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적 정책에 착수하자 미국은 칠레의 분유수입도 끊어버렸다. 또한 칠레의 중요산업 중 하나인 운수산업을 망가뜨리기 위해 요원들으 위장취업 시켜 어용단체를 만들고 파업을 주도하였으며, 경제를 붕괴시키고 물가를 급상승시켰다. 쉽게 말해 미국은 아옌데 정부가 경제적으로 망하게 하여 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경제가 더 어려워지면 민중들이 아옌데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미국과 CIA의 계산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닉슨 정부와 칠레 부르주아지들의 예상과는 달리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1972년 아옌데의 지지율은 전보다 더 올랐고, 그에 대한 민중들의 신뢰 또한 높았다. 칠레 민중이 아옌데를 지지했던 이유는 확실했다. 바로 그가 민중을 위한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아옌데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빈부격차가 극에 달했던 칠레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사회주의적 개혁 및 정책을 실행했다. 당시 폭등하던 물가인상률을 30%대에서 15% 이하로 감소시켰고, 전 정부에서 3%도 이루지 못했던 국내총생산 성장률을 약 8% 이상까지 치솟게 했다.

 

아옌데 정권은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모든 60세 이상 인구에게 연금 지급을 약속했다. 그는 중소기업에게도 사회보험 적용 대상에 포함시켰다. 가족 보호를 전담할 정부 부처도 신설하기로 했으며, 모든 어린이에게 무상으로 우유와 아침 식사 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 모든 동네마다 모자보건진료소와 법률상담센터를 마련하기로 하는 한편, 전기와 수돗물 공급을 칠레 전역으로 확대하고자 했다. 집권 초기에 아옌데가 보여준 단기간의 성과물은 더 많은 민중들이 지지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경제재제와 각종 방해공작에 의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민중은 아옌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미국이 내놓은 최종 해결책이 사회주의 정권에 반감을 품은 이들을 동원한 쿠데타였다. 이것은 미국이 직접 개입한 칠레에 대한 테러리즘이었으며, 대다수 민중들의 염원과는 거리가 아주 먼 일이었다. 쿠데타는 1973911일에 시작되었고, 피노체트의 쿠데타 계획에 따라 미 해군은 전날 밤 자국 전함들을 발파라이소항에 정박시켜 아옌데 정부와 칠레 인민을 향해 무력시위를 벌였다. 결국 미제국주의가 계획한 반동 쿠데타로 아옌데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가 선물한 AK-47 소총을 들고 저항하다 결국 죽음의 길을 택했다.

 

아옌데가 쿠데타로 죽고나서 칠레는 또 다른 테러리즘에 시달렸다. 피노체트는 칠레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칠레 가수 빅토로 하라는 쿠데타 이틀 후 체포돼 고문 끝에 숨졌다. 군인들은 하라의 숨이 끊어졌는데도 총질를 가했으며, 몸에서 무려 44 발의 총탄이 발견됐을 정도였다. 또한 피노체트의 지휘 아래 검거 선풍이 시작된 이래 3개월 동안 좌파로 의심되는 시민 3,197명이 학살되고 1,197명이 실종됐으며 13만 명이 감옥에 갇혔다. 이것은 CIA가 지원했던 작업이었고, 미국이 칠레에게 저지른 또 다른 테러리즘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정부 기간 동안 총 35000명이 학살당했고, 위에서 상술한 초기 검거 당시 감옥에 갇힌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인 911일 미국은 칠레에서 테러 행위를 자행했고, 그 이후에도 CIA를 통해 테러 행위를 했다. 미국이 칠레에서 한 테러행위로 인해 수만 명이 학살당했고, 또 다른 수만 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것이 바로 빈라덴의 9.11에 의해 잊혀진 미제국주의의 9.11 테러의 역사다. 지금의 미국은 예전하고 전혀 다르지 않다. 미국의 트럼프 정권은 지난해 초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정권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작년에 미국이 베네수엘라에서 했던 방식은 칠레에서 했던 테러리즘과 매우 유사했다. 이들은 후안 과이도라는 제국주의 앞잡이를 내세우면서 베네수엘라 경제를 고립시켰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민중은 미국이 내세운 과이도를 선택하지 않았고, 사회주의를 수호하고자 했다. 결국 미제국주의가 지원하는 세력은 반민중 반동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사례일 것이다.

 

미국사람들은 9.11 테러하면 자신들이 더 많은 학살을 저질러 분노를 해소했던 2001년 사태를 쉽게 떠올린다. 그러나 9.11 테러가 일어나기 28년 전 미국은 칠레에서 저지른 9.11 테러는 전혀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현재도 미국은 반미국가들에게 테러행위를 저지르고 있다. 올해 1월엔 이란에 테러행위를 저질렀고, 코로나가 전세계적으로 강타하는 와중에도 베네수엘라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미국사람들은 빈라덴의 9.11을 기억하기 이전에 칠레에서 저지른 9.11테러, 즉 대학살극으로 이어진 테러리즘에 대해 알아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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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동안의 광복 - 1945년 8월 15일-9월 9일, 한반도의 오늘을 결정지은 시간들
길윤형 지음 / 서해문집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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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영화 강철비2를 봤다. 영화 강철비2는 북·미 정상회담을 주제로 하고 있다. 영화는 가상의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문제가 주변국의 이해관계와 국제관계에 따라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아주 객관적으로 접근함으로써, 한반도 평화 문제가 단순히 한국과 북한의 문제가 아닌 그 지역을 둘러싼 강대국들의 국제적 역학관계에 따라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영화는 미국 대통령 스무트(트럼프 역할)의 결정과 판단에 따라 한반도 문제가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도 보여주는데, 이것은 외세가 한반도 문제에 어떻게 작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편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문제점을 지적함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이 왜 중요한지를 아주 강력하게 역설한다. 그것은 현재 우리가 인식하고 이루어내야 할 과제이기 때문이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 올림픽을 시작으로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갔다. 그해 427일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만나 양국의 교류 및 관계 형성, 종전협정을 논의했고, 612일에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역사상 최초로 북미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다음해인 20192월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선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안타깝게도 회담은 결렬됐다. 이것은 책 저자의 주장대로 한반도가 해방된 지 75년이 지났지만, 미국이라는 외세의 규정력이 너무나 압도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분단 75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분단이라는 냉전의 모순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영화 강철비2와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외세에 의한 작용도 매우 크다. 남북한은 서로 대치하고 전쟁 상황직전까지 가는 위험 혹은 제3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양국의 평화정착과 통일을 위한 발걸음 또한 주기적으로 있어왔다.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미친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했음에도 우리가 자주적으로 평화를 정착시키고 통일을 이룩하려는 움직임은 남북한에서도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자주적인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이념갈등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은 남북 분단 체제가 형성되기 이전부터도 존재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러한 노력은 분명히 있었으며, 일제의 패망과 미군상륙과정 속에서도 존재했다. 이 과정을 재조명 한 책이 길윤형 작가의 신간 <26일 동안의 광복>이다.

 

많은 학자들이 한반도 분단의 시작을 1945년부터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얄타와 포츠담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한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남북에 주둔하게 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연합국들이 한반도 분할 점령을 합의하기 이전부터 일제치하의 식민지 조선에선 일본의 패망을 대비한 조선인들이 해방 이후 한반도 정국을 어떻게 나갈 것인지를 고민하며 점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1944년 건국동맹을 조직하여 단체를 뿌리내린 여운형을 들 수 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한반도 이남은 소련군이 주둔하던 이북과 달리 세력이 크게 3개로 나뉘어 각파 전을 벌였다. 첫 번째는 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 받아 자신의 조직 건국동맹을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하여 정국을 이끌어 나갔던 몽양 여운형과 같은 좌익 인사들이었고, 두 번째는 일제시대 당시 전향하여 친일활동을 벌인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이들로써 몽양 여운형을 포함한 좌익인사들에 대립하던 우익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사실상 40년간 한반도를 통치해오다 패망하자 한반도에 거주하던 90만 일본인을 지키고자 했던 조선총독부였다. 26일 동안 벌어진 삼파전은 194599일 오키나와에 있던 아시아의 패튼 하지 준장의 제24군단과 제7사단이 서울에 입성하면서 막을 내린다.(물론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여운형은 전신조직인 건국동맹에서 그랬던 것처럼 좌익과 우익의 연합체를 결성하고자 했다. 좌와 우를 통합시키려는 여운형의 노력은 이후 우익 민족주의 정당 한민당의 주역이 되는 고하 송진우에 의해 두 번이나 무산되었다. 송진우가 이끌게 되는 한민당에는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대다수를 이루었지만, 그는 친일 문제에 있어선 매우 깨끗한 인물이었고 지식인으로서의 양심을 지켰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 패망 이후 좌우연합체 결성이라는 역사적 흐름을 스스로가 거부했고, 분열의 씨앗을 창조했다.

 

당시 송진우가 좌익과의 연합을 거부했던 이유에는 건준에서의 좌우익 비율이라는 문제도 있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는 안재홍과 같은 우익들이 있었지만, 그 비율이 좌익들에게는 매우 밀리는 수준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우익들이 주도권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송진우가 규합한 세력들은 그를 제외하면 친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좌익들이 정권을 주도하면 자신들에게 더불리해 질것이라는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 송진우가 주장했던 임정봉대론은 이 맥락에서 봐야 할 것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여운형이란 독특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을 매개로 세 개의 이질적인 그룹이 뭉친 느슨한 연합체였다. 첫째는 이만규·최근우·이여성·이상백 등 여운형의 오랜 측근 그룹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이 어느 길을 택하든지 끝까지 따를 이들이었다. 두 번째는 정백을 비롯한 옛 서울파와 이강국·최용달·박문규 등 여운형과의 개인적 인연에 따라 합류해온 공산주의자들이었다. 마지막은 이들과는 이념적 색깔을 달리하는 안재홍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여운홍은 당시 건준 구성을 공산당원인 극좌, 비공산주의적인 좌익 즉 온건한 사회주의자들, 안재홍·이규갑 등 우익, 무조건 형님을 지지하는 장권·송규환 등으로 나뉘어질 수 있었다고 적었다.”

 

출처 : 26일 동안의 광복 p.226

 

실제로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서중석 교수의 주장 따라 좌경화가 있었다. 당시 건준에는 사회주의자들이었던 정백, 이강국 등 대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좌경화 현상은 태평양 전쟁기 광주 벽돌공장에 노동자로 숨어있다고 등장한 박헌영의 영향도 컸었다. 전형적인 우익 독립운동가인 송진우의 입장에서 보면 좌경화 현상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다르게 얘기하자면 좌우 통일된 조직의 건설보다 헤게모니 장악을 더 우선시 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와 그들의 이해관계를 통해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격동의 26일을 재조명했다. 또한 필자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실들과 나름 새로 밝혀진 자료들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걸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필자는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좌익들 보단 우익들과 미국에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나온 바와 같이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연합과 좌우 협력을 거부하려 했던 세력이 바로 해방 후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익이었기 때문이다. 98일 상륙한 하지 장군의 미군은 한반도 민중의 염원과는 달리,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들어왔고, 좌익들이 선포한 인공과 건준을 해산해버렸다.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마오쩌둥 최초의 전기인 <중국의 붉은 별>을 집필한 에드가 스노 지적한 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남한을 점령한 미군이 건준을 활용했더라면 한국의 해방정국은 크게 방향을 달리했을가능성도 있었지만, 그 가능성을 활용하지 못한 건 미국이었다.

 

그리고 그 미국에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접근한 송진우와 우익 세력들은 해방 이후 좌우를 연합하여 자주적인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여운형에 대해 친일파라는 어처구니없는 인신공격을 주도했다. 이런 공격을 했던 한민당원 대다수가 친일파들이었고, 근거가 될 만한 물증도 전혀 없었다. 이게 역사적 팩트다. 따라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봤을 때, 한반도 분단의 책임은 1차적으로나 2차적으로나 우익들에게 있다. 물론 좌익들도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했던 욕심이 있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큰 틀에서의 연합을 거부한 이들이 우익이었고, 미국을 이용하여 분단을 고착화 한 것도 우익이기에 분단의 책임은 이들에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현재 75년 분단의 연결고리라 할 수 있다.

 

8.15 해방부터 미군정 탄생까지인 격동의 26일에서 가장 높게 평가 받아야 할 인물은 바로 몽양 여운형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또한 사회주의 성향을 겸비한 중도좌익이어서 그가 이끄는 단체는 좌익인사들을 대다수로 결성되긴 했지만, 중요한 건 좌우연합체를 결성하여 통일된 국가와 조직을 만들어나가고자 했던 그의 노력과 행적이다. 그런 점에서 몽양 여운형은 매우 높게 평가 받아야 한다. 분단과 갈등 그리고 대립보단 좌우연합과 통일, 자주적인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여운형의 노력과 정신이 인정받고 높게 평가 되어야 하는 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큰 틀에서 보았을 때, 그가 추구했던 통일 및 통합정신이 현재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남북평화통일과 화해의 목적과 비슷한 맥락과 정신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외에 중국에서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했던 중경 임시정부의 스토리와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이야기, 태평양 전쟁 말기 조선 총독부의 동선, 해방 이후 일본인들의 상황 및 이야기 그리고 우익들의 모습까지 매우 폭 넓게 알 수 있었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 올해 75주년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만, 분단이 된 과정과 그 사이에서 벌어진 통합의 노력은 잘 모르는 편이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몰랐던 공백을 채워줄 것이고, 분단이 아닌 통합과 통일이 왜 중요한 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알려줄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라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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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9-11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책을 읽다보면 과거 인물들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해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선택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역사적 비판을 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었음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비록, 그 선택이 지극히 개인의 이익에 편향된 것이라할지라도 자신의 기준에서는 최선이었겠지요...) 또한, 해방 전후의 극심한 혼란기에서 백범 김구 선생과 같은 존경받는 분들도 신탁통치와 관련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있다는 점도 고려한다면, 해방전후의 비극을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시를 살아간 인물들의 한계와 시대 상황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도 있다 여겨집니다...^^:)

NamGiKim 2020-09-11 13:06   좋아요 1 | URL
네 그들의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죠. 그러나 그 주체가 무엇을 추구했냐, 그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평가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26일 동안의 광복>은 그들 나름의 목표와 선택지의 이유를 다방면에서 접근했습니다. 그래도 전 개인주의를 추구했던 우익 민족주의자들 보다 통합의 노력을 기울였던 몽양 여운형 선생 같은 분들을 더 높게 평가합니다.
 

(중국공산당 측의 신사군)


2차 세계대전이 한참이던 1941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행위가 한참이던 중국대륙에서는 제2차 국공합작에 치명타를 입힌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 사건이 바로 신사군 사건(新四軍事件, New Fourth Army incident)이다. 일본은 1931918일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을 가속화했다. 그러나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치열한 내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들이 치르고 있던 내전은 1927년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주의자들을 일방적으로 대대적인 학살을 전개하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개시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침략자 일본을 저지하기 보단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을 축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1936년 군벌 장작림의 아들이었던 장학량이 이른바 시안사건을 일으키면서, 부하에게 구금당했던 장제스 또한 일본군과의 교전과 제2차 국공합작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37년 제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었다. 19377월 베이징에서 이른바 노구교 사건이 일어나면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했고, 거기서 대대적인 무차별 민간인 학살을 벌여 20~30만이나 되는 중국 민간인을 학살했다. 일본군들은 이런 학살을 비단 난징에서만 저지르지 않고 중국전역으로 확대시켰으며, 중국인민들을 제2차 국공합작으로 단결시키는 계기를 형성했다.

 

2차 국공합작이 성사되던 시절 마오쩌둥은 연안에서 철학강의를 하며 실천론모순론같은 사회주의적 철학 서적도 남겼지만, 세력 확장과 현실에서의 투쟁적 실천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마오쩌둥의 홍군은 1934년 장제스군의 제5차 포위전 끝에 이른바 대장정의 길에 올랐었고, 이들의 병력은 대장정 과정에서 대폭 감소하였다. 실제로 대장정에 참가했던 병력은 10만 명 중에 8천 명 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 외의 분산된 병력까지 합친다면 2만 명 안팎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대장정에서 얻었던 것은 한 가지 확실했다. 바로 민심이었다.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뭉친 홍군은 중일전쟁의 시작과 제2차 국공합작을 계기로 세력이 확장됐다. 중일전쟁이 발발할 당시 팔로군 3만 명, 신사군 12천 명이었던 홍군은 1938년 말에는 팔로군 156천 명, 신사군 25천명으로 증가되었고, 1940년말에는 팔로군 40만 명, 신사군 10만 명으로 총병력 5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당건설도 급진적으로 진행하여 19374만 명이었던 당원이 1940년에는 80만 명으로 증가했다.

 

공산당 세력의 급하급수적인 증가는 장제스와 국민당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이 대치국면으로 전환하면서 국민당 정부는 홍군의 활동을 억제하려고 노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공산당을 습격, 점령, 제한, 대항하라19391월 국민당 지도부의 비밀지령에서 드러난다. 국민당 정부가 마오쩌둥 세력의 확장을 걱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시 홍군이 국민당군보다 세력이 강했던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후 일어나게될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 국민당군의 총병력이 대략 430만이었던 반면 공산당군은 120만 명 안팎이라는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병력 규모면에서 국민당군은 홍군을 압도했었다. 또한 공산당군에 새로 편입된 대원들이 모두 총기를 소유하거나 공산당군이 충분한 탄환을 보유했던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마오의 공산당측은 근거지에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없었기에 병사들이 늘어나면서 이것을 감당하기 버거워 했다. 즉 이점에 있어서 국민당군과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장제스는 이에 대해 무척 불길한 느낌을 받았고, 중일전쟁이 일본의 패배로 끝이나면 다시 국공내전이 치열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장제스는 공산당군을 사전에 짓누르고 싶어 했다. 그들 입장에서 공산당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은일본을 물리치는 것 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았다. 1939년 봄 장제스의 군대는 서북 지방과 산시성에서 공산당의 확산을 저지하는 공세를 시작했었다. 그 다음해인 1940년 장제스는 병력 40만 명을 항일 전선에서 분리하여 홍군이 근거지로 삼고 있는 옌안 지역을 봉쇄하는 작전에 투입시켰으며, 2차 국공합작으로 매월 공산당에 지급하던 18만 달러의 정부 보조금을 중단했다. 또한 1940년 여름 국민당 군대는 안후이성과 장쑤성에서 공산당 측의 신사군과 교전을 벌였다가 쓰라린 패배를 맛보기도 했었다.

 

194010월 장제스는 홍군에게 한 달 내로 양쯔강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신사군 본부는 안후이성 남부에 위치했고, 이들은 부대 이동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부대를 이동하게 될 경우 일본군 통제 지역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기에 마오쩌둥은 장제스의 심리변화를 주시하면서 가능한 시간을 끄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194114일 홍군은 마오쩌둥이 승인한 경로를 따라 이동했다. 그러나 2일 뒤 국민당군의 매복지로 들어가고 말았으며, 국민당군과 홍군 사이에 전투가 일어났다. 이 전투는 1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국민당군의 비행기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비행기도 공격에 참여했다. 신사군 포위 작전에 투입된 국민당측 비행기는 사정없이 폭탄을 퍼부었고, 홍군이 피해 들어간 마을에도 기총소사를 했다. 결국 신사군 사건은 포위된 신사군이 궤멸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 과정에서 전사하거나 생포된 신사군 인원은 9천 명이나 됐다. 여기에는 군인뿐 아니라 간호사, 의사, 장교 가족, 짐꾼, 들것 운반인 등 비전투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위되었던 이들 중 약 1천 명 정도는 탈출에 성공했으며 소규모 집단으로 분산하여 양쯔강 이북의 안전지대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신사군 사건 이후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노골적인 반공정책을 펼친 장제스에게 강력한 항의를 제기했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국민참정회의 참여를 거부하고 국민당의 반공정책을 맹렬하게 비난하였으며, 신사군의 해산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진의를 총사령관으로 류샤오치를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사군의 재건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이처럼 장제스군이 개시한 신사군 포위 사건으로 국민당에 대한 이미지는 나빠졌다. 그리고 제2차 국공합작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사이는 더 악화되었고, 불신의 감정이 더 쌓이게 됐다. 리영희 선생은 책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신사군 사건에 대해 헐리 대사 보고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국대사관을 찾아와서 정세를 논의한 손과 입법원장은 중국군의 전쟁능력이 급속히 회복돼야 한다는 심각한 정세평가를 했다. 손과는 중국군의 대일전쟁능력 상실의 가장 큰 원인은 장총통이 정부군 30만을 공산당지역 봉쇄를 위해서 고정 배치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개탄했다. 그러나 이것은 정부군 30만의 손실일 뿐 아니라 그에 포위되고 있는 공산당군대, 일본군에 대항해서 그토록 잘 싸운 수십만의 공산당군대를 무장해제한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라고 말했다.”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139

 

이와 같은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마찰은 변론할 여지없이 장제스가 홍군의 규모와 활동구역을 가능하다면 국공합작 당시의 수준으로 제한하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물론 공산당도 국민당 정부가 철수한 지역과 일본군이 점령한 배후지역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혁명근거지를 확장하고 싶어 했다. 다시 말하자면 양측 모두 전쟁에서 보다 더 유리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즉 이러한 양측의 긴장관계 속에서 19411월 이른바 신사군 사건이 일어났고, 국민당군은 공산당 측의 신사군을 궤멸시켰다. 확실한건 신사군 사건에서 이들을 속여서 먼저 공격한 것은 국민당군이었고, 방법도 상당히 비열했다는 사실이다. 국민당군이 저지른 신사군 사건은 그들에게 있어 돌이킬 수 없는 실책이 되었으며, 그 화살은 결국 자신들에게로 왔다. 어쨌든 중일전쟁에서 민심을 바로 잡았던 것은 마오쩌둥이 이끄는 홍군이었고, 공산당에 대한 민중의 지지가 국민당에 대한 지지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1999

 

중국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2002

 

마오쩌둥 2, 필립 쇼트, 교양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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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조치 미이행, 주한미군장갑차에 의한 사망사고

경찰은 미군직접조사로 진상을 규명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라!

지난 8월 30일 밤 경기도 포천에서 SUV가 미군 장갑차 후미에 추돌하여 SUV탑승자 4명 전원이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사고 현장은 사진만 봐도 처참하다. SUV차량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고, 미군 장갑차 역시 무한궤도 일부가 부서질 정도로 큰 사고였다.

미군 장갑차는 도로 위로 나올 때부터 위험천만한 상태였다. 밝은 낮에도 장갑차에는 동행하며 불빛 등으로 이동 사실을 표시하는 콘보이(호위) 차량들이 함께 하는 것이 원칙이다. 더군다나 작전 수행용 장갑차는 차체 색을 어둡게 한다. 그런 상태로 야간에 후미등도 제대로 달지 않고 단독주행을 했다.

사고지점인 영로대교는 평소에도 군용 차량 이외에는 통행량이 거의 없다고 한다. 또한 직선도로이기 때문에 차들이 빠르게 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추돌한 SUV의 입장에서는 저속주행중인 장갑차를 인식했을 때는 이미 손 쓸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주한미군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이 목숨을 잃는 참변이 또다시 발생한 것이다. 안전수칙을 제대로 지켜 호위차량들이 있었다면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해도 직선도로에서 미군 장갑차를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참담한 심경이지만 현재는 사고의 원인을 낱낱이 밝히고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보도된 기사를 보면 블랙박스가 사고지점인 영로대교 진입 전 상황까지는 녹화가 되어 있고 진입 후부터 충돌까지의 상황은 기록되지 않는 등 몇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주한미군이 안전수칙을 어기고 위험한 야간주행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 조차 지켜지지 않는다면 비슷한 사고가 다시 일어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고를 눈여겨보고 있다. 우리의 높아진 자주의식은 이제 사소한 일 하나도 그냥 두고보지 않는다. 하물며 대한민국 국민 네명이 사망한 대형사고임에도 지금까지 으레 그래왔듯 여러 의혹들을 뒤로 한 채 조용히 넘어가려 하거나 사고의 원흉인 주한미군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불평등한 한미동맹 아래 쌓여온 민중들의 분노와 원통하게 목숨을 잃었던 이들의 몫까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20년 9월 1일

한국진보연대 자주통일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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