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반민특위 해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지원하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이 친일세력의 방해와 공작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문제에 있어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1947년 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노선을 확실하게 했고,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947년 9월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UN)에 이관했다. 즉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이 점차 이승만과 친일세력에게 유리해져 갔다는 것이다.

(1947년 유엔 총회 제1차 위원회에 참석한 임병직)
유리한 기회를 얻은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을 유엔으로 보내 로비 활동을 지속했고, 1947년 11월 14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43:0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에 따르면 ‘남북총선거 실시’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뜻했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 3달 뒤인 1948년 2월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메논과 모윤숙, 일설에 따르면 친일파 모윤숙은 메논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즉 모윤숙이 허리한번 돌리니 메논이 이승만에게 설득당했다는 얘기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남북한 선거관리 국가로 ① 필리핀, ② 엘살바도르, ③ 중국, ④ 프랑스, ⑤ 러시아, ⑥ 캐나다, ⑦ 오스트리아, ⑧ 인도 대표로 구성하고 인도대표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북한의 입북거부와 관련, 남한만의 선거 실시 여부에 대해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의 손에 한국의 장래, 특히 이승만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었다. 8개국 가운데 ①~④번 국가들은 남한만의 총선을, ⑤~⑧번 국가는 통일정부 수립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메논 의장의 손에 단정 수립 여부의 결정권이 부여되었다. 당연히 이승만은 인도의 메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의지’를 작동했다. 친일매국노이자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먹었던 모윤숙은 친일경찰을 등용했던 조병옥ㆍ장택상과 더불어 메논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극우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이 책은 메논을 건국을 도운 애국자로 묘사한 책이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밤이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메논을 데려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모윤숙은 드라이브를 빙자,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 이승만과 만나게 하고 프란체스카가 전해주는 연명서를 귀로에 메논에게 전하였다. 메논이 유엔총회로 떠난 후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의 이름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메논은 유엔 소총회의에서의 보고서에서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네루가 인도의 국민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할을 옹호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라고 이승만을 극구 찬양하였다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윤숙의 역할이 컸다. 세간에서는 모윤숙의 ‘미인계’가 메논을 움직였다고 보았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미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두고 토론 끝에 2월 26일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위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역사적 결의를 하게 되었다.
1948년 들어 남북한 정부가 단독정부 수립 방향으로 나서자 임정의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있을 수 없다.”며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협상에 나섰다. 이로인해 1948년 4월 27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또 15인 요인회담도 열렸다. 남측 대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 북측에서는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남북회담 또한 결과적으로 무산됐고, 김구를 포함한 남측 대표단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년 5월 10일 드디어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것이 바로 5.10 총선거였다. 남북협상파와 민족주의계열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된 5ㆍ10총선거의 결과는 71.6%의 투표율로, 당선자는 무소속 85명, 이승만의 독촉 55명, 한민당 29명, 대동청년단 2명, 기타 19명이었다.

(38선에서 사진을 찍은 김구,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는 분명 반공주의자였지만, 이승만과 달리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반탁을 외친 것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고, 남북협상은 늦은 선택이었다. 확실한건 1948년 시점에서 그는 분단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총선 당시 이승만과 대립했던 인물 중 최능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해방 후 조만식의 건준 산하 평양치안부장을 역임하다 월남한 그는 친일경찰을 많이 등용하는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미군정청의 수사국장 자리에서 해임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등록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그의 후보등록 서류를 탈취했고, 결국 최능진이 딘 군정장관에게 이승만 측의 등록방해 사실을 항의하여 마감일을 연기하면서 가까스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측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등록된 서류의 추천인을 문제삼았다. 당시 선거법에는 후보 등록에는 200명의 주민 추천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최능진 추천인들을 협박하여 추천 사실을 부인하도록 한 것이다. 최능진은 결국 후보등록이 말소되고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최능진, 그는 이승만의 정적이었다. 결국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한다.)
이승만의 찌질함과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0월 1일 수도청 형사대가 최능진을 체포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했다. 구속영장에 의하면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서세충, 광복군 출신인 여수 6연대장 오동기 소령 등과 공모,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었고, 10월 19일 최능진은 내란음모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시기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풀려난 최능진은 즉시 종전ㆍ평화통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한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최능진을 체포했던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악질 친일파였고, 보도연맹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할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다.
1948년 7월 24일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이 7월 24일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됐다. 이승만은 취임사 말미에 “대한민국 30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하여, 때로 상해임정을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취임사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 하는 것은 이승만의 발언마저 무시하는 무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민족청년단)
내무부장관 윤치영(독촉국민회)
외무부장관 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
국방부장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한민당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이 인(전 검찰총장)
문교부장관 안호상(서울대 교수)
농림부장관 조봉암(국회의원)
상공부장관 임영신(여자 국민당수)
사회부장관 전진한(국회의원)
보건부장관 구영숙(무소속)
체신부장관 윤석구(국회의원)
교통부장관 민희식(군정청운수부장)
무임소장관 이윤영(조민당부당수)
무임소장관 지정천(대동청년 단장)
총무처장 김병연(조선민주당)
공보처장 김동성(합동통신사장)
법제처장 유진오(고대교수)
기획처장 이순택(연대교수)
심계원장 명제세(한독당)
고시위원장 배은희(목사)
감찰위원장 정인보(국학대학장)
비록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대 내각에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우긴 했었다. 이렇게 해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해방 정국 시기 자신과 결탁했던 한민당을 배제했고, 이것은 양자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초대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유산몰수 유산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실행했는데, 이것은 태생적으로 친일지주들이 많은 한민당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임정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며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의 노력은 이승만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이승만과 결탁했던 친일파들은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상태였고,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남한내에서의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년 7월 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ㆍ부일협력자ㆍ전범ㆍ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년 9월 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특위는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월 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시작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이승만을 반민특위가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신익희와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고문하여 월북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 노덕술은 그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애국자였다. 따라서 그는 노덕술을 옹호하고 비호했다.
1949년 2월 2일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위반이라는 말 안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그해 4월에는 노덕술을 포함한 친일경찰 출신들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부탁을 받은 테러시트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그 사건은 미수에 그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충격은 엄청났다. 이렇게 친일세력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측은 5월에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호를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이 남로당프락치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6월에는 이들 외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을 발표하여 노일환·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11명의 의원을 구속했다. 구속된 의원 대부분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국회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 등을 제안했던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쉽게 말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빨갱이 몰이 했던 것이다.

(노덕술, 노덕술은 악질친일경찰로 무수히 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측에게 체포된 노덕술, 노덕술은 반민특위 활동 당시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애국자라고 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다. 이승만은 심야에 은밀히 반민특위위원장의 공관으로 김상덕을 찾아가 노덕술 등을 석방할 것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차관을 하던 장경근 휘하의 경찰병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른바 6.6 사건이다. 국립경찰의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그들은 조사서류를 탈취하고 요원들을 폭행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방해오 와해되고 말았다.

(반민특위 습격, 1949년 6월 반민특위는 장경근이 지휘하는 경찰에게 사무실이 습격받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도 당연히 이승만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다.)

(반민특위후손모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종 권력기관의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민특위 해체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벌 받은 친일파는 단 한명도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포장했다. 또한 이들이 이후 대한민국에 등장할 독재정권의 주구가 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적을 방해했고, 그를 이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또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각한 악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