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반민특위 해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사진)

 

해방 이후 귀국한 이승만은 친일파들의 지원하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운형과 김규식이 전개했던 좌우합작운동이 친일세력의 방해와 공작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여운형이 암살당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정부 수립문제에 있어 노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거기다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소위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발표하면서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인 노선을 확실하게 했고, 이것은 이승만에게 있어 매우 기쁜 소식이었다. 19479월 미국은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포기하고 한국문제를 유엔(UN)에 이관했다. 즉 국제정세와 미국의 정책이 점차 이승만과 친일세력에게 유리해져 갔다는 것이다.

(1947년 유엔 총회 제1차 위원회에 참석한 임병직)

 

유리한 기회를 얻은 이승만은 임병직과 임영신을 유엔으로 보내 로비 활동을 지속했고, 19471114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 독립국가를 세우자는 미국의 결의안을 소련 대표가 퇴장한 가운데 43:0으로 가결시켰다. 결의안에 따르면 남북총선거 실시라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남한만의 총선거를 뜻했다. 이 결의안이 채택되고 나서 3달 뒤인 19482월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접근 가능지역 즉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안을 가결했다.

(메논과 모윤숙, 일설에 따르면 친일파 모윤숙은 메논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와 하룻밤을 보냈다고 한다. 즉 모윤숙이 허리한번 돌리니 메논이 이승만에게 설득당했다는 얘기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남북한 선거관리 국가로 필리핀, 엘살바도르, 중국, 프랑스, 러시아, 캐나다, 오스트리아, 인도 대표로 구성하고 인도대표 메논을 의장으로 선출하였다. 유엔 한국위원단은 북한의 입북거부와 관련, 남한만의 선거 실시 여부에 대해 토론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들의 손에 한국의 장래, 특히 이승만의 정치적 운명이 달려 있었다. 8개국 가운데 ~번 국가들은 남한만의 총선을, ~번 국가는 통일정부 수립의 입장이었다. 따라서 메논 의장의 손에 단정 수립 여부의 결정권이 부여되었다. 당연히 이승만은 인도의 메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의 권력의지를 작동했다. 친일매국노이자 자신의 제자를 정신대에 팔아먹었던 모윤숙은 친일경찰을 등용했던 조병옥장택상과 더불어 메논을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극우 출판사에서 출간한 책인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 이 책은 메논을 건국을 도운 애국자로 묘사한 책이다.)

  

이승만은 모윤숙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밤이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하는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니 어떻게 해서든지 메논을 데려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당부했다. 모윤숙은 드라이브를 빙자, 메논을 이화장으로 안내, 이승만과 만나게 하고 프란체스카가 전해주는 연명서를 귀로에 메논에게 전하였다. 메논이 유엔총회로 떠난 후에도 이승만은 모윤숙의 이름으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을 호소하는 서신을 띄웠다. 메논은 유엔 소총회의에서의 보고서에서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은 남한에서 마술적 위력을 가진 이름이다. 네루가 인도의 국민지도자인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는 한국의 국민적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박사는 한국의 영구적 분할을 옹호하기에는 너무도 위대한 애국자라고 이승만을 극구 찬양하였다

 

유엔소총회에서 메논은 이승만의 손을 들어주었다. 모윤숙의 역할이 컸다. 세간에서는 모윤숙의 미인계가 메논을 움직였다고 보았다. 유엔소총회의 결정을 미국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단독정부수립안을 두고 토론 끝에 226일 유엔소총회는 유엔 한위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역사적 결의를 하게 되었다.

 

1948년 들어 남북한 정부가 단독정부 수립 방향으로 나서자 임정의 주석을 지냈던 백범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있을 수 없다.”며 김규식과 더불어 남북협상에 나섰다. 이로인해 1948427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정당사회단체 대표자 합동회의가 열렸다. 15인 요인회담도 열렸다. 남측 대표는 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홍명희·김붕준·엄항섭, 북측에서는 김일성·김두봉·최용건·박헌영·주영하·허헌·백남운 등이 참석했다. 하지만 남북회담 또한 결과적으로 무산됐고, 김구를 포함한 남측 대표단은 55일 서울로 돌아왔다. 1948510일 드디어 남한에서만 총선거가 실시됐다. 이것이 바로 5.10 총선거였다. 남북협상파와 민족주의계열이 참여하지 않는 가운데 실시된 510총선거의 결과는 71.6%의 투표율로, 당선자는 무소속 85, 이승만의 독촉 55, 한민당 29, 대동청년단 2, 기타 19명이었다.

(38선에서 사진을 찍은 김구, 임정의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는 분명 반공주의자였지만, 이승만과 달리 1948년 남북협상에 나섰다. 그러나 반탁을 외친 것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에 나서지 않은 것은 그의 실책이었고, 남북협상은 늦은 선택이었다. 확실한건 1948년 시점에서 그는 분단정부를 원하지 않았다.)

 

총선 당시 이승만과 대립했던 인물 중 최능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해방 후 조만식의 건준 산하 평양치안부장을 역임하다 월남한 그는 친일경찰을 많이 등용하는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미군정청의 수사국장 자리에서 해임됐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를 선언하고 등록을 준비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후원과 지지를 받는 서북청년단 단원들은 그의 후보등록 서류를 탈취했고, 결국 최능진이 딘 군정장관에게 이승만 측의 등록방해 사실을 항의하여 마감일을 연기하면서 가까스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승만 측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고 이번에는 등록된 서류의 추천인을 문제삼았다. 당시 선거법에는 후보 등록에는 200명의 주민 추천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최능진 추천인들을 협박하여 추천 사실을 부인하도록 한 것이다. 최능진은 결국 후보등록이 말소되고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의 영광을 차지했다.

(최능진, 그는 이승만의 정적이었다. 결국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당한다.)

  

이승만의 찌질함과 악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인 101일 수도청 형사대가 최능진을 체포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했다. 구속영장에 의하면 최능진은 독립운동가 서세충, 광복군 출신인 여수 6연대장 오동기 소령 등과 공모,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혁명의용군을 조직하고 기회가 도래하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정권을 차지하려는 일종의 쿠데타를 음모했다는 것이었고, 1019일 최능진은 내란음모죄로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최능진은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시기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풀려난 최능진은 즉시 종전평화통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한국군의 서울 탈환 이후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 위반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19512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최능진을 체포했던 김창룡은 일본 관동군 헌병 출신으로 악질 친일파였고, 보도연맹 학살의 주범이었다. 이승만은 그에게 훈장까지 수여할 정도로 그를 매우 아꼈다.

 

1948724일 초대 정·부통령 취임식이 724일 중앙청광장에서 거행됐다. 이승만은 취임사 말미에 대한민국 307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라하여, 때로 상해임정을 비판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지만, 취임사에서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을 건국절이라 하는 것은 이승만의 발언마저 무시하는 무지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초대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대통령 이승만

부통령 이시영

국무총리 이범석(민족청년단)

내무부장관 윤치영(독촉국민회)

외무부장관 장택상(전 수도경찰청장)

국방부장관 이범석(국무총리 겸임)

재무부장관 김도연(한민당 국회의원)

법무부장관 이 인(전 검찰총장)

문교부장관 안호상(서울대 교수)

농림부장관 조봉암(국회의원)

상공부장관 임영신(여자 국민당수)

사회부장관 전진한(국회의원)

보건부장관 구영숙(무소속)

체신부장관 윤석구(국회의원)

교통부장관 민희식(군정청운수부장)

무임소장관 이윤영(조민당부당수)

무임소장관 지정천(대동청년 단장)

총무처장 김병연(조선민주당)

공보처장 김동성(합동통신사장)

법제처장 유진오(고대교수)

기획처장 이순택(연대교수)

심계원장 명제세(한독당)

고시위원장 배은희(목사)

감찰위원장 정인보(국학대학장)

 

비록 이승만이 친일파들을 이용하긴 했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초대 내각에 독립운동가들을 내세우긴 했었다. 이렇게 해서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이 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부 수립 과정에서 해방 정국 시기 자신과 결탁했던 한민당을 배제했고, 이것은 양자간의 갈등으로 심화되었다. 이렇게 하여 한민당은 서서히 반이승만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초대내각에서 농림부 장관을 지냈던 조봉암은 유산몰수 유산분배에 입각한 토지개혁을 실행했는데, 이것은 태생적으로 친일지주들이 많은 한민당에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 임정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상덕은 반민특위에서 일하며 친일파 청산에 나섰다. 아쉽게도 그의 노력은 이승만의 방해로 실패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이승만이 매우 곤혹스러워 했던 큰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회의 반민족행위자처벌법(반민법)의 제정이었다.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은 시대적인 과제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이승만과 결탁했던 친일파들은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한 상태였고, 사회 각계에 뿌리를 내린 상태였다. 남한내에서의 친일파청산의 시도는 미군정시기인 1947720일 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나 군정장관 딘이 이 법의 공포를 거부하면서 사문화되었다. 국민의 여망에 따라 제헌국회는 헌법 부칙에 반민법의 제정을 명시하고, 국회는 반민법 제정 주도자들을 빨갱이로 모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194891일 반민법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특위는 정부 안에 있는 친일파 숙청안을 의결하면서 이승만과 정면 충돌하게 되었다. 교통장관 민희식과 법제처장 유진오, 상공차관 임문항이 대상이었다. 반민특위가 이들의 파면을 요구하자 이승만은 93일 담화를 발표, 특위활동에 대한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모두 심사숙고해서 우선은 정부의 위신이 내외에 확립되도록 힘쓸 일이다. 무익한 언론으로 인신공격을 일삼지 말고 친일파 처리는 민심이 복종할 만한 경우를 마련해 조용하고 신속히 판결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승만은 시작부터 친일파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런 이승만을 반민특위가 분노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을 체포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신익희와 반민특위위원장 김상덕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을 석방할 것을 종용하였다. 노덕술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하고 죽였던 악질 친일경찰이었다. 심지어 해방 후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고문하여 월북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있어 노덕술은 그저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애국자였다. 따라서 그는 노덕술을 옹호하고 비호했다.

 

194922일 이승만은 반민특위의 활동이 헌법위반이라는 말 안되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그해 4월에는 노덕술을 포함한 친일경찰 출신들이 반민특위 요인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암살부탁을 받은 테러시트트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그 사건은 미수에 그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사회충격은 엄청났다. 이렇게 친일세력이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측은 5월에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최태규·이구수·황윤호를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이 남로당프락치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6월에는 이들 외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을 발표하여 노일환·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김약수 국회부의장 등 11명의 의원을 구속했다. 구속된 의원 대부분은 반민특위에서 활동하거나 국회에서 외국군의 철수와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남북정치회의 개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평화통일방안 7원칙등을 제안했던 진보적인 소장파 의원들이었다. 쉽게 말해 이승만 정권은 이들을 빨갱이 몰이 했던 것이다.

(노덕술, 노덕술은 악질친일경찰로 무수히 많은 독립투사들을 고문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까지 고문했었다.)

 

(반민특위측에게 체포된 노덕술, 노덕술은 반민특위 활동 당시 체포됐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를 애국자라고 하며 석방을 요구했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의 반민특위 와해공작은 참으로 집요하고 사악했다. 이승만은 심야에 은밀히 반민특위위원장의 공관으로 김상덕을 찾아가 노덕술 등을 석방할 것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내무부(현 행정안전부) 차관을 하던 장경근 휘하의 경찰병력이 반민특위를 습격했다. 이른바 6.6 사건이다. 국립경찰의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한 그들은 조사서류를 탈취하고 요원들을 폭행하는 폭력을 저질렀다. 이렇게 해서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노골적인 방해오 와해되고 말았다.

(반민특위 습격, 1949년 6월 반민특위는 장경근이 지휘하는 경찰에게 사무실이 습격받아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것도 당연히 이승만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다.)

 

(반민특위후손모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특별법의 법적근거마저 모두 제거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모두 자유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이 각종 권력기관의 완장까지 차게 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적대시하고 탄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민특위 해체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처벌 받은 친일파는 단 한명도 없게 됐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친일파 청산을 하지 못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였다. 처벌 받지 않고 풀려난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반공이데올로기로 포장했다. 또한 이들이 이후 대한민국에 등장할 독재정권의 주구가 됐고, 민주주의를 짓밟았으며 분단체제의 고착화에 앞장섰다.

 

이승만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적을 방해했고, 그를 이후에 국가보안법으로 구속했다. 또한 친일파 청산을 위해 설립된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승만의 심각한 악행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서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어난 상상을 초월하는 민간인 학살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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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옳았다 - 5·16과 10월유신의 정치경제학 박정희가 옳았다 1
이강호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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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라는 인물은 대한민국에서 상당히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중 하나다. 그를 찬양하는 측에선 그가 집권할 당시의 경제성장을 예시로 들어 산업화의 아버지혹은 배고픔을 해결해주신 분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반면, 그를 비판하는 측에선 독재자혹은 친일파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인물이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는 아직도 아주 강력하게 남아 있다. 그가 태어난 구미 시에는 박정희 생가가 있고, 거기엔 어마 무시한 박정희 동상이 서있다. 또한 서울 월드컵경기장역 옆에도 박정희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박정희 기념 도서관이 있다.

 

이처럼 박정희의 향수는 어느 특정 세대와 특정 정치집답에게 아주 강력히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들이 찬양하는 박정희는 어떤 이미지의 박정희인지 그들이 전개하는 논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즉 아무리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전향한 운동권 출신이 쓴 <박정희가 옳았다>를 읽어보기로 마음을 먹게 됐다. 읽기 전부터 책이 가지고 있는 정치성향이 필자의 생각과는 완전히 상극을 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읽어보니 그 상극은 더 길어졌다. 왜냐하면 이 책은 독자만의 지나친 억측과 논리비약, 역사왜곡, 어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인신공격, 국민들에 대한 우롱 그리고 극단적 반공주의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에 있는 내용을 다 반박하려면 정말 몇 십장이나 되는 논문이나 혹은 책 한권이 나와야 할 정도로 오류가 많다. 그러나 필자가 쓰는 것은 책에 대한 서평이기에 이 글에선 그만큼 다룰 생각은 없다. 이 서평의 목적은 저자가 저지른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와 허점 그리고 사실왜곡에 대한 지적이다. 따라서 이 서평에선 필자가 생각한 저자의 대표적인 논리적 오류가 무엇인지 간추릴 것이다.

 

우선 책 저자에 대해 소개를 하겠다. 책 저자는 한때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운동권 출신이다. 대부분의 80년대 운동권이 그랬듯이 저자 또한 1991년 소련 연방의 해체를 경험하면서 쉽게 말해 사상적 혼란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책 저자가 택한 길은 바로 극우였다. 책에서 저자가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리는 뉴라이트들이 하는 논리와 같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선택해서 세계 경제 대국 10위에 오른 기적과도 같은 위대한 나라고, 북한이라는 나라는 소위 인민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 최빈국 대열에 껴 지옥으로 변모한 나라라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이승만 정권의 탄생을 대한민국의 건국은 자유민주혁명이다.”이라는 형용모순이 매우 심각한 말로 표현한다. 여기서 저자는 해방 이후 민중들이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것과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와 친일세력들을 등용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친일세력에 지원을 받는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라는 사실을 아주 쉽게 무시한다. 저자는 이승만 정권의 탄생이 민중들의 염원인 것처럼 얘기하기 위해, 당시 민중들이 이에 저항했다는 것과 민중의 70%가 이를 반대한 것 그리고 그 민중이 바로 빨갱이로 몰려 무차별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무시한다. 여기서부터 저자의 극우적 색체는 아주 명백하게 들어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박정희는 이승만을 싫어했던 인물이었지만, 저자는 이를 무시하고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떻게든 연결시키려는 무리수를 둔다. 박정희는 군인시절 이승만을 매우 싫어했던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군인시절 이승만을 제거할 생각을 했었던 인물이기까지 하지만, 어떻게든 이승만과 박정희를 연결하려는 저자는 이런 사실에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는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한다. 심지어 영국의 명예혁명에 빚대어 5.16 쿠데타를 군사혁명이라고 표현하기 까지 한다. 5.16 쿠데타를 혁명으로 포장하기 위해 과거에 있던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폭력성과 극단성을 강조하며, “5.16 혁명은 그런 세계사적인 혁명에 비해 유혈이 낭자하지 않은 위대한 혁명이라며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혁명은 일으키는 주체가 누구냐를 떠나 그 목적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무엇보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는 반공이라는 구호를 걸고 일어난 사건인데, 반공의 주체는 약자와 빈민을 대변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따라서 5.16은 반혁명 내지는 군부관료들의 쿠데타일 뿐이다.

 

비슷한 시기 혁명이라는 이름을 달고 CIA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던 쿠데타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남베트남에서 일어났다. 남베트남에서 즈엉반민(Duong Van Minh)의 지도하에 응오딘지엠 정권 타도를 걸고 일어난 쿠데타 또한 그 시기에는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 사건을 현재 혁명이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같은 맥락에서 박정희의 5.16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경제 성장 즉 대기업 위주의 성장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거의 종교적 맹신을 뛰어넘는다. 박정희 시절 배고픔과 경제를 잘살게 해줬다는 종교적 믿음과 부자가 잘살게 되면 가난한 사람도 잘살게 된다.”는 상류층 중심적인 저자의 생각은 책에서 이중합창을 한다. 여기서 저자는 소위 박현채가 작성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구했다는 대중경제론을 지적한다. 즉 대중경제론을 선택했다면 한국이 가난을 면치 못했을 거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이다. 급속도의 경제 발전에서 생산한 것을 누구에게 분배를 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하다. 물론 박정희 시절 한국이라는 국가가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거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성장이 과연 가난한 민중을 위한 것이었나를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절대 아니었다.

 

자본주의를 토대로한 경제발전이 성공한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나라가 한국, 일본, 대만, 싱가폴이다. 물론 이 나라가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잘 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서 이 나라들이 채택했던 경제체제가 진리고 올바른 선택이었다고만은 할 수 없다. 또한 저자의 왜곡된 믿음과는 달리 자본주의 체제에 놓여있는 가난한 나라들은 전세계적으로 아주 많다. 즉 한국이 경제성장을 박정희 때문에 할 수 있었다는 얘기와 자본주의를 선택해서 발전했다는 주장은 사실 왜곡된 반공주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다.

 

그런 경제성장은 부유층들이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는 원리로 돌아가지만, 정작 경제성장의 원동력인 노동자들에겐 그 혜택이 부여되지 않았다. 물론 박정희 경제성장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한 형태였기에 1920년대 미국식 경제성장하고는 달랐다. 현재 한국사회가 실행하고 있는 복지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불완전한 형태이지만, 일정부분 사회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자본주의 국가 치고 그런 복지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위에 있는 북측이 미약하지만 무상의료 무상복지를 실행한 측면도 강했다. 즉 북한이 하니까 본인들도 그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초반에 미약하게나마 실행했다. 이것은 마치 히틀러가 반볼셰비즘을 표방하면서 복지혜택을 부여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박정희때는 그런 복지체제가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연금제도도 공무원과 군인 교사에만 한정해서 하고 교육도 철저히 시장원리에 맡겼다. 쉽게 말해 인민대중의 복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박정희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한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뿐이다.

 

저자는 반공주의가 고로 자유민주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미국이 지원한 남미의 반공국가들은 전부다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이며 무수히 많은 인명 학살을 저질렀던 나라들이었다. 박정희 정권 또한 매우 탄압적이어서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탄압은 매우 극심했다. 여기서 저자는 박정희 정권 시절 있던 간첩 조작 사건들을 단순히 반공의 이름으로 합리화 시키며, 어떻게 해서든 북한하고 연결시키고자 한다. 예를들면 책에서 나온 김대중 납치사건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마치 좌파로 몰지만,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철저한 우파였다. 전혀 친북적이지도 좌파적이지도 않은 인물임에도 그저 박정희에게 반대하면 무조건 좌파 빨갱이로 모는 저자의 논리가 과거 반공주의 시대와 판박이다.

 

더 나아가 저자는 현재 더불어민주당 정권과 문재인 대통령까지 좌파 종북으로 모는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 현재 문재인 정권은 친미 친기업적인 구조에서 한 치도 물러난 적이 없지만, 단순히 더불어민주당이 박사모와 반대된다는 이유를 들어 종북 좌익세력으로 모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박근혜 탄핵을 사기 탄핵이라는 박사모들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쉽게 말해 저자가 책에서 전개한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문재인 정부의 전두환 자서전 판매 금지 조치를 두고 출판을 탄압하는 비민주적인 조치라 얘기한다. 그러면서 드는 것이 1974년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 논리 출간이다. 이것은 확연히 다르다. 전두환 자서전이 출판이 금지된 건 1980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대한 합당한 처벌이었을 뿐이다. 마치 현재 독일에서 나치에 대한 찬양 서적을 내면 처벌하듯이 말이다. 반면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다르다. 우선 박정희 시대의 출판 금지조치는 전환시대의 논리도 적용이 됐다. 또한 저자도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지냈다. 또한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는 이 책을 읽으면 빨갱이로 몰려 끌려가기도 했다. 쉽게 말해 광주를 학살한 전두환 따위가 정당한 절차를 거쳐 법적으로 처벌을 받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얘기다.

 

저자는 세련된 공산주의와 후진적 공산주의를 얘기하며 공산주의는 실패로 귀결된다는 신자유주의적 망언을 한다. 세련된 공산주의로 드는 예시가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인데, 거기서 저자는 살바도르 아옌데가 경제를 망쳤다며 역사를 왜곡한다. 오히려 경제를 더 망친 인물은 책에서 저자가 경제성장 운운하며 찬양하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였다. 피노체트의 경제성장은 신자유주의를 적용한 상태에서 오른 성장이었을 뿐, 빈부격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해졌고, 대다수 민중의 삶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락에 떨어졌다. 또한 아옌데 정권이 나중에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제국주의국가의 경제고립과 우익들의 노골적인 테러 행위 때문이다. 저자의 편협한 반공주의는 이런 기본적인 역사적 맥락마저 무시하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가 끝난 것도 아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밑에 있는 나라 쿠바는 미국보다 영유아 사망률도 낮고, 주거와 의료 교육에 있어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더 안정적인 삶을 구가하고 있다. 따라서 단순히 자본의 논리로만 모든 국가의 사례를 접근하는 저자의 관점은 얄팍하고 편협한 관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소위 5.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킨 박정희는 무오류 무결점의 반신반인 예수 부처다. 쉽게 말해 박사모들의 종교 경전이라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이 1부터 10까지 전부다 억측과 비약, 역사왜곡 반공주의로 점철되어 있다. 단순히 사회주의를 실패의 논리로 보는 것도 그렇고, 북한이 경제적으로 가난을 면치 못하는 이유를 미제국의 경제고립에 대한 맥락을 싹다 빼놓고 단순히 체제문제로만 보는 시각도 매우 단순하고 단세포적이다. 박정희의 왜곡된 반공 신화는 2012년 종교에 심취한 한 무능한 인물을 대통령 자리에 앉혔다. 이것이 바로 박정희 신화의 오류고 시대역행이다.

 

저자는 공과 과를 평가하는 것은 단순하다고 얘기하며, 어떠한 인물을 평가할 때, 그 시대사적인 맥락을 파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정희는 시대사적인 맥락으로 봤을 때, 인민의 이름으로 재판받아야할 반역자요 친일파였다. 이것은 프랑스의 나치청산 기준으로 보았을 때, 사형 혹은 무기징역을 면치못하는 반역자일 뿐이다. 5.16 또한 일부 군관료들의 뒤틀려진 반공 쿠데타였을 뿐, 민중을 1도 대변하지 않은 반동적 행위였을 뿐이다. 따라서 과거 극단적 반공주의 즉 친미제국주의적 기조하에 탄생한 반공주의적 시각은 이제는 타파되야 하고 사회적으로도 청산되야 한다. 그 시작은 바로 무능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의 왜곡된 신화의 허상을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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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네im 2020-07-2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는 너가 뱃속에 있지도 않던 시절을 직접 체험하며 보낸 철없는 사회주의 망상에 빠지다가 정신차려 회개한 사례야 선생님으로 모시면서 강의를 몇백먼 들어가며 들어야한단다 읽어다면서 하는 꼬라지봐라 본문에서도 죄다 엉터리를 쓰는 주제에 뭔 역사를 논한단냐 ㅉㅉ

박정희가 얼마나 위대한 리더였냐면은 밖으로는 매일같이 북한과의 총격전이 벌어지며 안으로는 국회의원.사회단체원노동자 등 사회 각 분야에 광범위하게 위장하면서 간첩에 협조하며 국가를 갖다바치려는 매국노들 때려잡으면서 의문사.자살.사형집행 전부 합쳐 30명도 안되었으면서도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없어 회생불능으로 판정난 나라를 20년만에 중진국으로 발돋음했던 말이야 세계 근현대사를 통틀어 이런 사람은 없었어 즉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이루었딴 말이야

너가튼것들 문빠나 민주당좋아하는 것들 2500만명 정도 되는데 북한에 싹다 보내버려 24시간 집안에 김돼지들 모시며 비밀경찰 감시받고 쫄쫄 굶고 공개처형 구경하는 꼴을 1년만 체험해봐야 얼마나 자유와 민주주의가 소중한지 깨닫게되지

친일파? 히로히토에 애비가 죽은거만야 90도 대가리박은 도요다다이쥬 무덤파고 시체를 토막내야 한다는 주장이나 하거라 이런거보면 중남미처럼 민주팔이들 몇만명 사형시켰어야 했는데 고작 고문.투옥이 태반이었는데 과오지
 

홍콩시위에 대한 단상

작년 봄부터 홍콩시위가 격해지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 정부에 반대하여 대규모 민중항쟁적 성격을 가지고 일어난 홍콩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시위에는 수백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참가했고, 홍콩 전체가 시위 현장으로 돌변했다. 몇몇군데는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전선이 나타났을 정도고, 중국측은 이를 진압하고자 했다.

홍콩시위가 격해지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홍콩시위를 보며 5.18 경제민주화운동과 6.10 민중항쟁을 떠올렸던 것 같다. 영화 ‘택시운전사‘나 ‘1987‘를 보며 홍콩에서 시위하는 대학생들이 하는 얘기를 듣다보면 그럴싸하기도 하다. 또한 그들은 민주주의라는 가치(정확히 말해 서구식 민주주의)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홍콩 시위에서 중국측의 대응은 전 세계 매스미디어를 통해 전파됐다. 홍콩 시위를 대응하는 중국의 행위가 잘못됐고 그렇지 않고를 떠나서 전 세계는 중국에 대해 비판적인 모습을 보이고 홍콩 시위에 대해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홍콩시위의 전 세계적 지지는 한국 사람들 또한 좌우를 막론하고 이를 지지하게 만들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규모 연대집회가 있었다. 오히려 홍콩시위에 대해 일반적인 견해와 다른 논평을 냈던 민중당(현재 진보당)은 홍콩 시위 지지자들에게 대차게 까였다.

물론 홍콩시위가 격해지며 중국 공산당측에서 보인 대응은 상당히 강경적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홍콩시위가 지나치게 극우 반공주의적 관점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입장과 다를게 없다.

홍콩 시위가 일어나게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선 중국의 자본주의식 극심한 빈부격차나 생계문제도 한점했다. 즉 홍콩과 중국 사이의 모순에는 자본주의적 모순이 정확히 있다. 그러나 홍콩 시위가 격해지면서 국내의 노동문제나 인권탄압 빈부격차등 자본주의적 모순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극우 반공주의자들이 홍콩 시위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물론 그들의 진 목적은 친미반공기조하에 근거한 중공정권타도지, 홍콩 시민의 생활 질 향상이 아니다.) 박근혜 탄핵 무효를 외쳤던 그들까지 말이다. 미국 공화당 네오콘들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부터 난 홍콩시위에 대해 많은 의심을 했었고, 지금도 이런점들 때문에 개인적으로 지지하지 않고 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필자는 홍콩 시위 자체가 파시스트들의 시위라는 일부좌파적 견해라든지, 모든 사람이 미국 앞잡이라든지 하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이 시위 자체가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반공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가 없다고 본다.

홍콩시위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 딱히 욕하거나 그들이 무조건 잘못됐다 결론짓고 싶지도 않다. 다만 홍콩 문제의 역사적 맥락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적으로 ‘너 중공 지지자냐?‘라는 식의 논리는 전개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쨌든 난 홍콩시위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홍콩시위를 다르게 보는 관점도 필요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홍콩시위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겠다. 수백만의 참가한 홍콩시위는 걷으로 보기엔 중국 공산당에 맞서는 양상이지만, 그들이 모인 이유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의 자본주의식 체제가 빛어낸 극심한 빈부격차다. 그 빈부격차를 해결할 수 있는건 영미식 자유주의 체제는 역사가 입증하듯이 절대 아니다. 결과적으로 전인민적 복지와 민중혜택을 혜택을 적용한 사회주의다. 이것이 핵심이다. 따라서 홍콩시위는 사회주의로 나가기 위한 방향으로 가야지, 자본주의를 활성화 시키기 위한 방향으로 가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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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공방전이 한참이던 1941년 12월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은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애리조나호를 비롯한 다수의 미국 군함과 선박이 파괴되었고, 이로써 27개월간 중립을 표방해오던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Pearl of Harbor)의 소식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치 독일에게도 전해졌고,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기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가 없다. 3천 년 동안 한 번도 정복당하지 않은 나라가 동맹국으로 있기 때문이다. 그런나라에게 공격을 받았으니 루스벨트도 충격이 컷을 것이다.”

 

히틀러의 이런 황당무계한 전제의 밑바탕에는 그가 오래전부터 품어 온 시나리오가 있었다. 즉 일본이 참전하면 미국은 태평양에 발이 묶이게 되고 극동에 식민지를 둔 영국도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의 심복이자 선전장관인 괴벨스 또한 이런 히틀러의 반응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히틀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면서 세계의 그림이 확 바뀌었다. 이제 미국은 소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국에도 변변한 물자를 공급하기 어려운 입장에 놓일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선포하자 히틀러 또한 미국과 전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치독일의 모든 정치권력자들이 미국과의 전쟁을 환영하지는 않았다. 특히나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리벤트로프가 그러했다. 리벤트로프는 히틀러에게 “우리가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참가할 의무는 없습니다. 그건 그들의 전쟁입니다. 먼저 미국을 도발한건 일본입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히틀러는 이 말에 대해 “그것은 동맹 조약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듣지 않았다.

 

진주만 기습 공격이 있은 다음날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인 오시마 히로시를 불러 이를 축하해줬다. 또한 히틀러는 12월 8일에서 9일 사이 카를 되니츠 제독이 이끄는 유보트 부대에게 미국 배를 침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 차츰차츰 그 과정을 진행해 나갔다.

 

미국을 향한 나치 독일의 선전포고는 진주만 기습 공격 4일 후인 1941년 12월 11일에 이뤄졌다. 목요일 오후에 있던 히틀러의 ‘대미선전포고’ 연설은 1시간 30분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연설 전반부에선 유럽 전선 즉 소련과의 전쟁에서 나온 전과를 세세하게 나열했고, 후반부에선 “악마처럼 교활한 유대인의 사주를 받고 루스벨트가 전쟁으로 독일을 파괴하려 한다.”는 주장을 하며 반유대주의를 자극했다. 이렇게 하여 히틀러는 미국을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전선으로 끌어들였다.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한 다음 날 히틀러는 진주만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부터 설명했다. 일본이 나서지 않았으면 독일이 언젠가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햇을 것이라 그는 이야기했다. 또한 그는 “확전이 되면 유보트도 대서양에서 활개를 펼 수 있고, 유보트에 침몰되는 적의 선박도 크게 늘어나며 이것은 전세를 크게 좌우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히틀러는 굳이 일본이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미국하고 전쟁을 할 생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2일 뒤인 12월 14일 히틀러는 베를린 주재 일본 대사인 오시마 히로시에게 독일독수리황금대십자훈장을 수여했다. 이처럼 히틀러는 미국과의 전쟁을 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했던 장밋빛 그림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얘기였다. 오히려 현실을 아주 정확하게 직시했던 인물은 히틀러가 아닌 윈스턴 처칠이었다. 일본이 미국에게 선전포고 했다는 소식을 들은 처칠은 매우 기뻐하며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그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하는 것을 보며 연합국의 승리를 확신했다. 이후 역사가 증명하듯이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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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곳곳에서 반공의 가면을 쓰고 다른 나라름 침략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곳곳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중남미·아시아·아프리카뿐 아니라 유럽·오세아니아에까지 손을 벌리는 통에,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미국을 달가워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수많은 인민들도 미국을 싫어합니다. 일본도 미국을 싫어합니다. 미국이 자국을 억압하기 때문입니다. 동양에는 미국의 참략을 받지 않은 나라가 한 곳도 없습니다. 미국은 중국 영토인 타이완을 침략했습니다. 개중에는 미국의 동맹국도 있습니다. 인민들이 불만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부 국가에서는 정부조차 미국을 싫어합니다.

 

피압박 민족은 모두 독립을 갈망합니다.

 

만물은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큰 세력이 부패하면 새로운 작은 세력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작은 세력이 커지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이 변화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미제국주의의 큰 세력도 작아질 것입니다. 미국 인민들이 자국 정부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평생이 이런 변화를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우리 중에는 청조시대에 태어난 이도 있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태어난 이도 있습니다.

 

청조는 오래 전에 무너졌습니다. 누가 청조를 무너뜨렸을까요? 그것은 손문이 이끄는 당파 인민이었습니다. 순몬의 세력은 매우 작았기 때문에 청조의 관료들은 이들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는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으나 그때마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청조를 전복시키고 말았습니다. 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큰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이 큰 것으로 바뀔 것입니다. 청나라를 전복시킨 이후 손문은 패배를 당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민의 요구, 예를 들자면 토지와 반제국주의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반혁명을 진압해야 한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시는 반혁명 세력이 도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후에 그는 베이양군벌 사령관 위안스카이에게 패배를 당했습니다. 위안스카이는 손문보다 세력이 컸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세력이 작더라도 인민과 연대하면 강하며, 세력이 크더라도 인민과 대립하면 약하다는 법칙 말입니다. 이후로 손문의 유산계급민주혁명파는 우리 공산당과 합작하여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군벌 세력을 패퇴시켰습니다.

 

장제스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중국 통치를 승인받았습니다. 22년간 집권하면서 그의 세력은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해졌습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의 세력은 보잘것없었습니다. 반혁명 세력을 진압하는 와중에 5만 당원은 1만 명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도처에서 소란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강대한 적이 실패한 것은 인민과 동떨어졌기 때문이요, 약한 우리가 승리한 것은 인민과 연대하여 인민을 위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지금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항일전쟁 시기 일본은 막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국만당 군대는 오지로 밀려났으며,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세력 또한 적 배후의 농촌에서 유격전을 치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일본은 베이징·텐진·상하이·난징·우한·광저우 등의 대도시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독일의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몇 년 못 가서 붕괴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된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퇴각하는 동안, 수십만 병력은 수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장정 25000리 끝에 남은 병력은 25000명뿐이었습니다.

 

공산당의 역사를 살펴보면 좌우 노선 할 것 없이 많은 오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오류는 천두슈의 좌경 노선과 왕밍의 우경 노선이었습니다. 그 밖에 장궈타오·가오강 등도 우경 노선의 오류를 저질렀습니다. 오류를 저질렀다고 해서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통해 인민과 당을 교육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일본·미국, 장제스·천두슈·리리산·왕밍·장궈타오·가오강 등 수많은 반면교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면교사에게서 학습하느라 우리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과거에 영국은 우리와 여러 번 전쟁을 벌였습니다. 영국·미국·일본·프랑스·독일·이탈리아·제정러시아·네덜란드 모두 우리의 당덩어리에 군침을 흘렸습니다. 저들은 우리의 반면교사이고, 우리는 저들의 학생입니다.

 

일본에 맞서는 항전의 시기를 지나면서 우리 군대는 90만 대군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해방전쟁을 치렀습니다. 우리의 총포는 국민당과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국민당 군대는 400만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3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가 소탕한 적국의 수는 총 800만에 이릅니다. 국민당은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우리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한 자가 반드시 승리하는 법입니다.

 

현재 미제국주의가 강하다 하나, 이는 진정으로 강한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아주 취약합니다. 대다수의 인민과 동떨어진 탓에,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정부를 싫어합니다. 미국 인민들도 마찬가지로 정부를 싫어합니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실제로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 없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겉은 호랑이처럼 보이나 종이로 만들어진 탓에, 비바람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합니다. 전체 역사, 즉 인류 계급사회의 수천 년 역사가 입증하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강한 것이 약한 것에게 자리를 내준다는 것입니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국주의가 멸망해야만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종이호랑이가 쓰러지는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스스로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종이호랑이를 무너뜨리려면 비바람이 몰아쳐야 합니다. 우리가 미제국주의를 종이호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전략적인 측면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미국은 대수롭지 않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호랑이는 발톱과 이빨이 있습니다. 이 녀석을 쓰러뜨리려면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려야 합니다. 예컨대 이빨이 열 개 있다면 우선 한 개를 뽑아버립니다. 그러면 아홉 개가 남습니다. 다시 한 개를 뽑아버립니다. 이제 여덟 개가 남습니다. 이빨을 다 뽑아버렸으면 이번에는 발톱 차례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성실하게 나아간다면 결국 승리를 거두고야 말 것입니다.

 

전략적으로는 완전히 무시합니다. 하지만 전술적으로는 중시하는 것입니다. 이들과 전쟁을 벌일 때에는 매 전투마다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현재 미국의 세력은 강대합니다. 하지만 전체 모습을 폭넓은 시각으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십시오. 미국과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미국의 정책을 싫어합니다. 미국은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합니다. 이런 이유로 호랑이는 반드시 거꾸러질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 없습니다. 얕잡아 보아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미국이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은 철강을 매년 1억톤씩 생산하여 곳곳에서 공격을 일삼고 있습니다. 미국은 철강을 매년 1억 톤씩 생산하여 곳곳에서 공격을 일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과 싸울 때에는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해야 합니다. 또한 한 번에 하나씩 물리쳐야 합니다. 여기에는 시간이 소요됩니다.

 

상황을 보건대, 라틴아메리카·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끊임없이 미국과 충돌할 것입니다. 이는 비비람이 종이호랑이를 박살낼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중남미 국가에서 유럽 출신 백인과 본국의 인디오가 단결해야 합니다.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통치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피통치 계급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억압받는 백인들은 토착민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같은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라틴아메리카의 벗들, 아시아··아프리카의 벗들과 같은 처지입니다. 하는 일도 같습니다. 우리는 인민을 위해 일하며, 제국주의가 인민을 억압하지 못하도록 노력합니다. 우리의 노력이 성공을 거둔다면 제국주의의 억압을 근본적으로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동지입니다. 제국주의의 억압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여러분과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다만 지역, 민족, 그리고 언어가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제국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제국주의는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납니다. 제국주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습니다. 중국 인민은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 인민 또한 제국주의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국주의는 존재 이유가 없습니다.

 

1956714,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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